'노르웨이의 숲'에 해당되는 글 1건

행복한 미술관 혹은 버드와이저

84일 세인트루이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세인트루이스의 아침은 평온했다. 미시시피 강과 미주리 강의 강바람은 부지런히 무더위를 데려가고 있었다. 인색했던 오클라호마의 숙소와는 달리 세인트루이스의 숙소는 넉넉했다. 뷔페식으로 차려진 아침은 마음부터 든든했다. 여행은 여드레째 접어들고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가족들은 아직 지친 기색이 없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세인트루이스는 정형화된 이미지였다. 미리 읽어둔 자료들을 통해서 게이트웨이 아치, 버드와이저 공장,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이미지를 내 나름의 지도 위에 그려놓고 있었다. 일단 그려진 이미지는 그것의 정확도와는 무관하게 견고해진다. 견고한 선입견은 단호하고, 단호한 만큼 위험하다. 정말 우습게도 나는 귀에 익은 미국 도시들을 모두 같은 이미지로 그리고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 분주하고 혼잡스럽거나 어둡고 무질서했다. 세인트루이스도 역시 그랬다. 분주하고 혼잡스러운 대도시 이미지 위에 세인트루이스에 대해서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모아 그려놓았다.

하지만 이러한 모호하지만 견고했던 이미지들은 이미 세인트루이스 바실리카 대성당(The Cathedral Basilica of St. Louis)으로 가는 길에 산산이 부서졌다. 세인트루이스는 미국 10대 도시라는 말이 무색하도록 거리는 매우 한산했다. 편안한 높이의 집들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아주 멋스럽게 낡아가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 제법 넉넉한 품의 나무들이 제 몫의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지금껏 달려온 도시들과는 또 다른 풍경이 빚어내는 여유로움에 차는 차대로 속도를 늦추고, 나는 나대로 여유를 부리다가 길을 몇 번이나 놓치고 말았다. 몇 번이나 세인트루이스 바실리카 대성당까지의 경로를 다시 계산하며 조급하게 지시하던 사만다가 조용해졌다. 우리 앞으로 예상보다 큰 규모의 성당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세인트루이스 바실리카 대성당 외부 전경과 내부

1914년에 완공되었다는 세인트루이스 바실리카 대성당[각주:1] 주변은 몇몇 고층 건물들이 있었지만 오히려 고즈넉했다. 이른 시간이어서 그랬는지 의외로 성당은 한산 했다. 주차장을 찾지 못해서 성당 앞 도로에 차를 세우느라 식구들은 먼저 성당 안으로 들어가고, 나는 조금 늦게 성당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석조건물의 규모도 규모였지만 건물 자체가 내뿜는 아우라는 지극히 압도적인 것이었다. 세인트루이스 바실리카 대성당은 넓은 본당 좌우로 열주(列柱)들이 서 있었고 그 너머로 다시 측랑(側廊)이 배치되어 있어서 2,500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바실리카 양식이 로마시대의 법정이나 공회장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건물 양식을 교회건물에 적용한 것이라고 하니, 2,500명도 많은 수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세인트루이스 바실리카 대성당 내부 돔

세인트루이스 바실리카 대성당은 본당을 따라 들어가면 제단 앞 중앙에 큰 돔(dome)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작은 돔들이 연결되어 있는 이채로운 구조였다. 돔마다 둘레에 작은 창들이 나 있어서 그 창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신비롭기만 했다. 돔 안쪽으로 성경의 내용이 그려져 있었다. 그 사이로 구원의 징후처럼 아스라이 부서져 내리는 빛이 감동적이었다. 성당 내부의 천정에는 곳곳에 금빛 모자이크로 성인(聖人)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지만 크고 작은 창과 그 안으로 강성하게 쏟아져 내리던 빛이 오히려 압도적이었다. 창마다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s)로 장식되었는데도 그것이 소박한 색과 형태로 기억되는 것은 아마도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의 강성한 압도 때문이리라. 성당 안내 자료에 따르면, 성당 안에는 415,000개의 조각, 7,000개 이상의 색상으로 구성된 모자이크가 있다는데, 그것을 분별할만한 눈을 가지지 못한 나 같은 사람에게 그것은 그저 숫자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했다.

성당 내부도 들어오는 빛과 인공조명의 조화를 통해서 만들어내는 엄숙함과 예술미

그곳에서 처음으로 파이프 오르간의 직접 모습도 볼 수 있었는데 밝은 귀를 갖지 못한 내게 떠오른 것은 엉뚱하게도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 극장판 12전율의 악보’(名探偵コナン 戰慄樂譜, 2008)[각주:2]였다. 그것은 성당의 엄숙한 분위기에 처음 보는 파이프 오르간 앞에서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은 아니었다. 늘 그렇듯 내 생각은 맥락도 없이 제멋대로다. 비록 성당에서 파이프 오르간 연주를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명탐정 코난>을 떠올린 덕분에 파이프 오르간으로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듣는 듯했다.

세인트루이스 바실리카 대성당 가는 길에 본 오래된 주택과 수리 장면

세인트루이스 바실리카 대성당에서에서 세인트루이스 미술관(St. Louis Art Museum)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잎과 가지에 시간을 넉넉하게 얹고 있는 가로수와 각기 자신의 시간을 건너왔을 고풍스러운 옛 건물들을 바라보며 아내는 안타까워했다. 아내는 새것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는 우리들의 모습을 이야기했다. 세월의 연륜을 느끼고, 그것을 통해 오늘과 내일을 가늠해볼 수 있는 고풍스러운 것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남아있지 않은 까닭이다. 잦은 전쟁 때문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일본을 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도쿄대학교를 방문했을 때 미군의 폭격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을 매점과 지하식당으로 바꾸어 지금도 활용하고 있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돈이 없어서 허물고 새 건물을 짓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흔적을 어떤 형태로든 간직하고 그 안에서 생활함으로써 조직에 대한 소속감이나 그 안에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었다. 그것은 자랑스러운 역사기 때문에 기억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통해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 그러한 노력을 통해 자랑스러운 역사를 만들어보겠다는 의지에 다름 아니었다. 오래된 것들을 단지 보존과 관람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대상으로 소환하는 일, 그것은 그 안에서 스스로의 뿌리와 정체를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아니겠는가? 우리에게 그러한 면이 부족했던 것은 지독했던 식민지의 상처와 기형적인 근대화 과정에서 빚어진 자기 부정의 흔적이거나 왜곡된 가치의식 때문이리라. 새로움과 선취 혹은 선점을 통해 상대적 우위를 점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우리의 강박이 새로움에 대한 맹목적인 경사를 낳은 것이다.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며 달리다 사만다와 함께 길을 또 잃었다. 사만다가 정신을 차리고 데려다 준 곳은 최근 급성장해서 미국 내 11위권이라는 워싱턴대학교(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Danforth Campus)부근이었다. 그 맞은편에 포레스트 파크(Forest Park)가 있었는데, 미술관은 그 안에 있었다. 포레스트 파크는 1904년 세계무역박람회가 열린 곳이란다. 표지판을 따라 조금 언덕진 곳으로 올라가다보니 왼쪽으로 주차장이 있었지만 이미 만원이었고, 미술관 옆으로 주차할 곳이 있어서 들어가 보니 공사장이었다. 다시 차를 돌려서 올라온 길을 내려가다 보니 마침 차 한 대가 나가고 있었다. 주차를 하고 다시 그 길을 올라가서보니 미술관 앞으로 탁 트인 전망이 아름다웠다. 미술관은 확장 공사를 하느라 일부 가림막을 하고 있었지만 단아한 석조건물과 그 앞으로 펼쳐진 풍경만으로도 무척 여유롭고 넉넉한 오전을 만들고 있었다.

세인트루이스미술관 전경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은 미국에서 본 미술관 중 가장 매력적인 곳이었다. 그것은 미술관의 규모나 전시물의 많고 적음과는 별도로 그곳이 만들고 있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물론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은 고흐, 피카소, 고갱, 쇠라, 세잔과 같은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가슴 뛰는 공간이었다. 더욱이 그곳은 시민들에게 무료로 개방되고 있고, 작품 30정도 앞에 그려진 선만 넘지 않는다면 자유롭게 즐길 수 있었다. 게다가 플래시만 사용하지 않는다면 사진촬영도 자유로웠다. 무엇보다 매력적이었던 것은 그러한 공간을 아주 여유롭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배려였다. 우리가 방문했던 시간이 한가한 시간이었는지 미술관은 한산했고, 전시실마다 소파나 의자가 놓여 있어서 여유롭게 쉬면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아내의 설명을 듣는 아이들. 바닥에는 접근 가능한 지점까지 선이 표시되어 있다.

미술을 잘 모르는 우리 가족들 모두 화집(畵集)으로나 보았던 작품들을 직접 보면서 묘한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아내와 내게는 그것은 무척 가슴 뛰는 일이었다. 어려서 미술책에서 보던 그림들이 바로 우리 눈앞에 있지 않은가? 아내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작품마다 아주 천천히 돌면서 이야기를 나누며 관람을 했고, 나는 나대로 사진을 촬영하면서 뒤를 따라다녔다. 한국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유명 전시회에 갔다가 작품 근처에는 가지도 못하고 인파에 밀려다니다가 돌아온 몇 번의 경험 때문인지, 이곳의 이 한가한 속도는 무척 부러운 것이었다.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은 2012년 완공을 예정으로 증축 공사 중이었지만 관람객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동선을 효과적으로 유도하고 있었다. 호수만 적힌 전시실 하나하나를 찾아가며 그곳의 테마와 작품들을 연결하며 감상하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2층의 대형 창문으로 바라본 미술관 앞 호수와 분수대 그리고 그 앞으로 펼쳐진 포레스트 파크와 고풍스러운 시가지의 모습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었다. 그 전경을 보면서 교토(京都)에 있는 시구라덴(時雨殿)[각주:3]의 진입로가 떠올랐다. 왼쪽으로는 큰 강이 흐르고 오른쪽으로는 일본 전통 가옥과 전통 음식점이 멋스럽게 들어서 있던 그 길은 보도블록과 경계석에도 일본 전통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흐르는 강물소리와 전통가옥의 풍취 때문인지 채 십분도 되지 않는 거리를 걷고 시구라덴에 들어설 때는 일행들 모두 이미 일본적인 분위기에 흠뻑 젖어 있었다.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을 보며 시구라덴을 떠올린 것은 두 공간 자체의 의미도 의미였지만 그곳에까지 이르는 과정이나 주변 공간과 어우러진 공간의 스토리텔링 때문이었다.

미술관에는 작품만 보러가는 것이 아니다. 미술관은 미술작품뿐만 아니라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만들어내는 문화적 아우라와 미술관에 간다라는 행위의 심리적 보상까지를 포함하여 그 모든 것을 취향에 따라 종합적으로 혹은 선택적으로 즐기기 위한 곳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에서는 보유하고 있는 작품들과 공간을 관람자가 즐길 수 있도록 어떻게 구성해낼 것이냐, 무엇을 즐기고 가게 할 것이냐의 문제를 고심한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세인트루이스 미술관 페트론

가족 모두 점심 먹는 것도 잊고 작품들에 매료되어 미술관에서 볼 수 있도록 허락된 곳은 모두 돌아보았다. 그런 까닭에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은 관람이 아니라 차라리 행운이었다. 그러다보니 미술관을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도네이션 박스에 도네이션을 하게 되었다. 입구 쪽으로 나오면서 오른쪽 벽을 보니 미술관 운영에 금전적인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21세기의 페트론(patron)들이다. 사실 이러한 기부자들의 명단은 동네 공공도서관에만 가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큰 명분에 이끌리어 이름을 앞세우는 기부가 아니라 소박하지만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자신의 능력만큼 기부하는 문화는 무척 부러운 것 중의 하나였다. 미술관을 나오면서 문득, 세인트루이스가 게이트웨이 아치가 아닌 미술관으로 기억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미술관을 나와서 점심을 먹으려고 보니 시간이 별로 없었다. 어제 계획한 일정으로는 게이트웨이 아치를 거쳐 버드와이저 공장까지 돌아보는 것이 오늘 계획이었는데, 미술관에 매료되어 지나치게 지체했기 때문이다. 밝을 때 아치에 올라가서 세인트루이스 시내를 보고 싶었다. 버드와이저 공장 투어는 6시에 마치기 때문에 점심은 뒤로 미루고 서둘러 이동했다. 어제 밤에 계획을 짤 때에는 미술관에서 이렇게 많은 시간을 보낼 줄은 몰랐다. 계획은 늘 어긋나게 마련이고, 보아야할 것은 볼수록 느는 것이 여행이니 서두르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었다.

서부 개척의 시발점으로서 세인트루이스의 상징이 된 게이트웨이 아치(The Gateway Arch)는 높이와 밑면이 모두 192m인 대형 조형물이다. 주차장에서 아치까지 이어진 공원 옆으로 미시시피 강이 흐르고, 강을 따라 조성된 나무 터널 산책로에는 한가한 속도의 산책객들이 오가고 있었다.

게이트웨이 아치 전경

게이트웨이 아치와 미국의 다른 조형물들의 높이를 비교한 엽서

마크 트웨인(Mark Twain) 덕분에 미시시피 강은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던 강처럼 느껴졌지만 사실은 처음 보는 낯선 강일뿐이었다. 미시시피 강은 아메리카 인디언말로 위대한 강이라는 뜻을 지녔다. 길이는 6,210로 세계에서 네 번째로 긴 강이고 그 유역은 324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넓다고 하는데, 왜 내 눈에는 그저 탁류가 흐르는 소박한 강으로 보였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강 건너로 보이는 카지노 퀸(Casino Queen)의 모습은 중국 내륙의 어느 호텔처럼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게이트웨이 아치 바로 아래에는 서부확장 기념관(Museum of Westward Expansion)과 정상까지 올라가는 트램을 탈 수 있는 시설이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아내는 아치 정상에 올라가봐야 별것 없을 것 같은데 입장료(어른 10달러, 아이 5달러)까지 내면서 꼭 올라가야하느냐, 밖에서 보았으면 된 것 아니냐, 서부확장 기념관만 보고 가자고 계속 이야기했다. 여행이 진행되면서 초과되고 있는 여행 경비를 어떻게든 줄여보려는 아내의 고육지책이었다. 그래도 올라가야 하지 않겠는가, 올라가서 보고 별 것 없다고 느끼는 것과 올라가지 않고 신포도 바라보듯 별것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고 우겨서 결국 모두 올라가게 되었다.

트램을 타기 위해서 대기하는 승강장(), 아치 빌더들을 기리는 부조상(), 아치의 운행을 나타내주는 모니터(하)

게이트웨이 아치의 정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남쪽과 북쪽에 있는 작은 트램을 타고 올라가야 했다. 입장권을 사고 보니 7일 동안 유효하단다. 트램을 타기 위해서 남쪽과 북쪽 입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국립공원도 아니고 7일 동안 유효하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7일 동안 몇 번이고 탈 수 있게 하니 이렇게 기다리는 사람이 많은 것인지, 이렇게 사람이 많이 기다리고 있는데 또 타러 오겠냐는 압력인지 잘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트램을 타고 정상에 올라가고 나서 보니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트램을 타기 위해 기다리는 줄 옆으로 게이트웨이 아치의 건설과정과 역사가 소개되고 있었다. 1947년 설계 공모를 통해 설계를 채택해 놓고 정작 착공은 1963년에 해서 1965년에 완공된 후, 1967년부터 일반에 공개되었다고 한다. 설계 채택 이후 마땅한 공법을 찾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지만 예산 확보 및 활용성 등의 논란이 있었을 것으로 충분히 짐작이 되는 지점이다. 건설 과정의 역사는 다양한 방식으로 소개되고 있었는데 그것을 따라가면서 보다보니 직원 한 명이 커다란 번호표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1부터 8까지 적힌 A4용지만한 크기의 번호표였는데, 그것은 타야할 게이트 번호였다. 트램을 타는 곳으로 갔더니 1부터 8까지 적혀있는 게이트 앞에 각각 5명씩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트램이 도착해서 트램 안의 사람들이 내리면 기다리던 사람들은 벽으로 바짝 붙어서 그들이 지나가게 해주어야할 정도로 비좁았다는 것이다. 사실 더 재미있었던 것은 트램이 아치 내부로 운행되다보니 아치 안을 통과할 수 있게 크기가 제한되는 바람에 트램 내부가 매우 좁다는 것이다. 동양 사람들이 타도 비좁을 공간에 덩치가 큰 미국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풍경은 딱하기까지 했는데, 내리는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익살스러웠다. 무안해서 그러는 것인지 천성이 낙천적인지 따라가서 묻고 싶을 정도였다.

우리 트램에는 미국인 한 명과 같이 타야했는데 너무 비좁아서 다섯 명의 무릎이 닿을 정도였다. 그것을 타기 전에는 트램을 타면 올라가면서 밖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타서보니 트램은 꽉 막혀서 밖을 볼 수 없는 구조였고, 무척 답답했다. 같이 탔던 미국인도 머쓱했는지 어디서 왔느냐, 너무 좁지 않느냐고 물었다. 무엇보다 뚱뚱하고 덩치 큰 당신 때문에 너무 좁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너희 가족 네 명 때문에 좁다고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혼자서 웃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이동 시간은 길지 않았다. 내리면서 보니까 탈 때와 똑같이 사람들이 벽으로 붙어서 우리가 내릴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있었다.

게이트웨이 아치 정상에서 촬영한 부시 스타디움

게이트웨이 아치 정상에서 촬영한 옛 법원청사

트램에서 내려 짧은 계단을 올라가서 보니 정상도 그렇게 넓은 것은 아니었다. 남쪽과 북쪽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아주 작은 몇 개의 유리창을 통하여 아치 주변을 둘러보거나, 최정상 630피트(192m) 표시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었다. 올라가고 내려가는 길뿐만 아니라 올라가서도 불편하고 크게 볼 것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올라온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하고 있었다. 아치 앞으로 드레드 스콧 판결(Dred Scott Decision)[각주:4]로 유명한 옛 법원청사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구장 이 보였고, 반대편으로는 미시시피 강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가족들도 아치가 보여주는 풍경을 만끽하며 재미있는 표정으로 사진도 찍었지만 정상에 머무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트램을 타고 내려오면서 아내는 그것 봐라 별 것 없지 않느냐고 이야기했고, 아이들과 나는 그런 소리도 와봤으니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정상에 올라갔다와 보니 입장권에 적힌 7일 동안 유효하다는 말의 속뜻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7일이 아니라 70일을 줘도 체험은 한 번으로 족할 듯싶었기 때문이다.

아치 아래로 내려온 우리는 그제야 배가 고팠다. 그도 그럴 것이 4시가 다되어가고 있었지만 우리는 아직 점심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념품점 안에서 파는 머핀과 빵으로 간단히 점심을 먹으면서 남은 시간을 확인하고, 되도록 빠른 시간 안에 서부확장 기념관을 돌아보기로 했다.

서부확장 기념관은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부터 1890년 서부개척 종료까지의 역사와 기념물이 전시된 공간이었는데, 기대보다는 소박했다. 다른 지역을 여행하면서 보았던 서부의 이미지를 밀랍 인형 등으로 소박하게 재현해 놓았을 뿐이었다. 더구나 지난번 옐로우스톤 여행을 할 때 코디에서 보았던 다양한 유물과 자료들을 이미 보았던 터라 이곳의 전시는 소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서부확장기념관 내부. 총칼과 측량 기기로 대표되는 서부확장의 폭력성을 읽을 수 있는 곳이다.

아치를 나와서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길이 무척 평화로웠다. 버드와이저 공장 투어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모두들 서두르고 있었는데도 길을 걸으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무엇도 없는 숲과 나뭇길이어서 더욱 매력적이었다. 보존해야하기 때문에 다가갈 수 없고, 들어가는 것이 통제되는 그런 숲이 아니라 생활공간 안에서 우리와 함께할 수 있는 숲, 굳이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 운동[각주:5]을 운운하지 않아도 보존해야할 우선순위임은 분명했다.

여유를 부리며 걷다보니 주차장 옆으로 이드스 다리(Eads Bridge)가 보였다. 1874년 완공 당시에 1,964m로 세계에서 가장 긴 아치교였고, 철강을 사용한 첫 다리였단다. 세인트루이스와 세인트루이스 평원을 연결하는 이 다리는 완공된 후에 안전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코끼리를 데리고  건넜다고 하는데, 코끼리는 안전하지 않은 구조물은 피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이란다. 이드스 다리는 게이트웨이 아치가 등장하기 전까지 세인트루이스의 상징이었다는데, 지금은 경전철만 오가는 이야기 속 다리가 되었다. 이 다리는 당시 미시시피 강에서 배를 운행하면서 수익을 얻던 선박 운행 업자들의 반발과 요구가 만만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리를 지탱하는 기둥의 거리나 높이 등에 있어서 제약이 많았고, 그 제약을 모두 해결하기 위해서 새로운 공법을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덕분에 건설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소요됨으로써 건설한 회사는 1년 만에 부도를 냈다고 하니 삶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효율성과 새로운 이익의 창출을 위해서 다리를 세우려했던 업자나 미시시피 강을 오가며 생활했을 선박 운행 업자들 모두 지금은 사라져 버리고, 미시시피 강은 무심한 표정으로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버드와이저(Budweiser) 공장 투어를 하기 위하여 사만다에게 주소를 알려주고 부지런히 달려갔다. 사만다가 웬일인지 헤매지 않고 잘 데려다 준다고 했는데, 엉뚱하게도 옛 법원청사 앞이었다. 아마 미리 적어둔 주소가 잘못된 모양이었다. 공장 투어가 가능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는데, 유진이가 내려서 사람들에게 물어오겠다고 나섰다. 사만다에 의지해서 찾아가야하는데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도 주소를 알고 있을 리 만무하니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유진이가 먼저 나선 것이다. 소심하고 잘 나서지 않는 유진이가 저도 급했는지 먼저 나선 것이다. 옛 법원청사를 구경하고 있던 흑인 커플에게 달려가더니 길을 물어온다. 다행히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이며, 찾아가기 쉽단다. 유진이가 일러주는 대로 달려가 보니 붉은 벽돌의 버드와이저 공장이 보인다. 유진이가 사만다보다, 아빠보다 낫다.

버드와이저 공장

1891년에 건설한 세계 최대의 맥주 양조장이라는 버드와이저 공장에 막상 도착하고 보니 투어를 참가하기 위해서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몰랐다. 이럴 때에는 일단 부딪쳐서 알아보아야 한다. 가장 가까운 입구를 찾아서 들어가서 물었더니 직원이 투어장소와 입구를 알려준다. 공장을 끼고 반 바퀴쯤 돌고 보니 입구가 보였다. 다행히 시간 안에 도착한 것이다. 헐레벌떡 달려가 보니 아직 투어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기다리고 있으란다.

기다리는 곳은 버드와이저 기념품을 파는 곳이었는데, 투어를 마치고 나오면 문을 닫을지 몰라서 미리 둘러보기로 했다. 맥주와 상관된 상품들에서부터 단지 버드와이저라는 상표만을 차용한 상품에 이르기까지 놀라울 정도로 많은 상품들이 있었다. 미국 관광지 곳곳에서 코카콜라, M&M's, 허쉬 초콜릿 등과 같은 유명 제품의 기념품점을 본 적은 있었지만, 이곳처럼 다양한 상품이 저렴하게 판매된 곳은 없었다. 확실히 버드와이저 기념품점은 다른 기념품점에 비하여 가격이 저렴했고, 맥주와 관련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문화와 관련 상품들이 다채롭게 제공되어 있었다. 가격이 무척 저렴한 것으로 보아 수익보다는 자신들의 로고가 새겨진 상품을 보급함으로써, 간접홍보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버드와이저 기념품점과 공장에 전시되어 있는 맥주 운반용 트럭과 마차.

기념품점 앞에는 20세기 초에 맥주를 배달했을 작은 트럭이 전시되어 있었다. 빨간 색깔에서부터 단순한 계기판에 이르기까지 매력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해질 무렵 동네에 트럭이 들어서고 일을 마친 사람들은 하나 둘 트럭 주변으로 모여들어 웃고 떠들며 마시는 시원한 맥주의 여유를 상상하며 혼자서 흐뭇해하고 있었다. 그러다 영화 <쇼생크 탈출>(1994)에서 듀프레인이 교도관의 세금을 경감시켜주는 조건으로 작업하는 동료 죄수들과 맥주를 제공받는 장면이 떠올랐다. 옥상 위에서 방수 공사를 하다가 제공된 맥주오랜 감옥생활에 그저 기억 속의 맛으로만 떠올리던 맥주를 아주 천천히 음미하며 마시던 근육질 사내들의 뒤쪽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그들이 쥐고 있던 차가운 맥주병의 촉감만은 아직도 느껴지는 것만 같다.

이처럼 내게 맥주는 선명한 이미지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 미도리와 와타나베가 옥상에서 함께 마시던 캔맥주의 풍경은 내가 알고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퇴폐적인 아름다움이다. 불난 앞집의 절박함과는 무관하게 타오르는 불빛의 아름다움에만 취해 기타를 치며 미숙한 두 청춘이 나누던 은빛 캔맥주의 이미지를 상상해보라. 세계와 그 안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낼 수 없는 미숙한 청춘의 상처가 반짝거렸던 이 소설의 압도적인 이미지는 나오코의 불어동사표이거나 미도리 집 옥상의 캔맥주였다.

그 흐뭇함을 알고 있는지 트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신제품 시음행사를 하고 있었다. 이곳의 다른 음식처럼 맥주도 양이 많아서 시음하라고 주는 것이 300cc 정도로 흐뭇한 양이었다. 맥주를 한 잔 마시고나니 하루 종일 분주하게 뛰어다니던 조급했던 마음이 어느새 스러지고, 한결 여유로워졌다.

시간이 되자 안내하는 아가씨를 따라서 투어가 진행되었다. 한 시간 정도 소요된다는 투어코스는 걸어서 진행 되었는데, 밖으로 나오자마자 강한 호프의 향이 느껴졌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들은 공장이라고 하기에는 더 없이 멋스러웠다. 오래된 건물마다 개성 있는 조형물들이 건물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고, 그것을 소개하는 직원들의 표정에서 자부심을 읽을 수 있었다. 맥주도 맥주였지만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의 자세와 자부심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니, 맥주에 대한 신뢰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맥주를 만드는 과정과 포장까지 보여주고, 실제 생산 라인 곁을 걸어보게 함으로써 투어는 끝났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여러 대의 셔틀버스에 나눠 타고 시음장으로 이동했다. 옆에 앉아 있던 유진이가 앞 버스 후미에 적힌 문구를 보란다. 

Making Friends is Our Business

버스 뒤에는 ‘Making Friends is Our Business.’라는 인상적인 문구가 적혀있었다.시음장에서는 먼저 작은 봉지의 프레쩰(pretzels)을 집어 들고 카운터에 가서 자신의 취향대로 맥주를 선택하면 두 잔까지 무료로 마실 수 있었다. 미국의 음주문화는 매우 엄격하여 21세가 되지 않으면 술을 마실 수 없고, 마시다 적발되면 부모가 벌금을 내야한다. 그래서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 위해서는 무한리필 음료수대가 별도로 설치되어 있었다. 다섯 종류의 맥주를 무한리필로 제공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세 번째 잔을 받으러 갔더니 몇 잔째냐고 묻는다. 아무래도 제한을 두는 것 같았지만 어떻게 진행되나 보려고 세 잔째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니 두 잔까지만 제공한단다. 음주운전 문제나 지나치게 취하는 것을 막고, 말 그대로 시음에 의미를 두려는 조치로 보였다.

시음장의 아이용 음료수(), 안주용 프레쩰(), 시음장 전경()

우리 부부에게 버드와이저 맥주는 사연이 있는 맥주였다. 신혼 초에 집 앞 상가에서 하나당 500원에 과격하게 세일을 하는 버드와이저 맥주를 한 박스 구입했던 적이 있었다. 무엇이든 넉넉하지 않던 시절에 국산맥주보다도 싼 버드와이저는 매력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한 박스를 사다두고 아내와 한 병씩 나누어 마셨던 기억이 나서 아이들에게 그때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재미있어 했다. 그때 우리가 오늘처럼 버드와이저 공장에 직접 와서 시음을 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래서 인생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고, 때문에 재미있는 것이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멋스럽게 지어진 세인트루이스 카니덜스 구장인 부시 스타디움(Busch Stadium)을 지나왔다. 부시(Bush) 대통령과 무슨 관계가 있어서 부시 스타디움인가하고 농담을 하며 돌아왔지만, 철자가 다르다. 사실 이 구장의 이름은 버드와이저 맥주를 생산하는 앤호이저 부시 컴퍼니(Anheuser-Busch Companies)에서 따온 것이란다. 이런 맥락이라면 세인트루이스는 내게 버드와이저로만 기억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참 같은 부시인데 누구는 <화씨 911>을 떠올리게 하고, 누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두 가지만 이렇게 모아서 고맙게 제공한다. 부시라는 이름이 이토록 다른 이미지를 주는 것을 보면, 역시 맥주와 야구는 힘이 세다.

7시가 넘었는데도 아직 해가 넉넉하게 남아있어서인지 어제 한 번 지나가서 그런지 길이 이제 조금 익숙해졌다. 세인트루이스에 가면 반드시 핫도그와 아이스크림을 먹어보고, 유니언스테이션을 가보라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핫도그와 아이스크림은 먹지 못했고, 유니언스테이션을 지나가면서 보았을 뿐이다. 그래도 아침에 숙소를 나설 때 낯설고 두렵기만 했던 이 길들이 정겹게 느껴졌다. 조금 익숙해지면 떠나는 일이 반복되다보니, 이제 하루만 되도 정겹기까지 한가보다.

여행은 낯선 것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낯선 환경 속에서 자신을 보기 위한 것이다. 이제 조금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일은 시카고로 달려갈 것이다.

 

  1. 바실리카(Basilica)는 중앙의 폭넓은 본당과 좌우로 각각 일 열의 측랑으로 구성되어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가톨릭 성당의 원형을 이루는 건축양식이다. [본문으로]
  2. 이 작품은 평생을 같이한 피아니스트와 조율사의 이야기였는데, 친한 사람들끼리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이해와 오해가 중심 모티브였다. 절대음감을 가진 조율사 후와 타쿠미는 아들을 잃고 평생해온 조율사의 일도 하지 못하게 되자,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네 명의 음악가를 차례로 살해하고 피아노 조율을 할 수 없게 한 평생지기 도우토모와 자신이 관장으로 있는 도우토모홀을 없애버리려 한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인 도우토모가 피아노를 그만두고 파이프 오르간 연주를 시작함으로써 자신은 조율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실은 나이가 들면서 절대음감을 잃고 음을 틀리게 조율하는 후와 타쿠미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한 도우토모의 배려였다는 것은 나중에 밝혀진다. 이 작품은 평생지기로 서로 잘 안다고 믿고 있기에 벌어지는 실망과 오해의 모티브를 잘 살리면서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서사와 유기적으로 어우러진 작품이다. [본문으로]
  3. 시구라덴은 닌텐도가 만든 교토 소재의 작은 테마파크로서 일본전통의 백인일수(百人一首) 게임을 인터랙티브 게임으로 변형하여 구현하고 있다. 와카(和歌)를 기반으로 한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어를 몰라도 참여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게임의 정교함이나 완성도보다는 백인일수 게임에 빠져들게 하는 스토리텔링 구성이 돋보이는 테마파크다. 시구라덴은 화투와 유희왕 카드 게임 등을 만들고, 닌텐도 DS로 유명한 닌텐도가 운영하는 곳인데, 원래 백인일수 게임도 카드 게임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본문으로]
  4. 드레드 스콧 판결(Dred Scott Decision)은 1857년 미국 연방최고재판소가 흑인 노예였던 드레드 스콧의 자유를 인정할 수 없다고 내린 판결을 말한다. 드레드 스콧은 자유주였던 일리노이 주와 미네소타 주에 살았음을 근거로 자신이 자유임을 인정해달라고 연방재판소에 요구하였다. 연방최고재판소는 노예는 시민권을 가질 수 없으니 흑인은 소송을 제기할 권리가 없고, 따라서 자유주에 거주했다 하더라도 자유를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노예제 논쟁을 격화시켰고, 남북전쟁 발발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본문으로]
  5.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 운동은 1895년 영국에서 시작된 자연보호운동이다. 자발적인 기부나 증여 등을 통하여 보존할 가치가 있는 자연과 문화유산을 구입하여 보호하고 관리하는 환경운동이다. 일본에서 <이웃의 토토로>에 배경이 되는 ‘토토로의 숲’을 구입하여 보존한 예도 그 중 하나다. [본문으로]
블로그 이미지

홑섬

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