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과 상실을 대면하는 법

유디트 바니스텐달,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미메시스, 2013.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소멸은 사라지는 자의 몫이고 상실은 남겨진 자의 몫이다. 유디트 바니스텐달의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는 죽음을 둘러싼 소멸과 상실의 기록이다. 죽음은 거부할 수 없는 보편성과 생명으로부터 기원하는 개별성의 이율배반적 긴장 안에 있다. 언제든 함께할 수 있지만 딱 한 번의 체험만 허락되는 것이기에 두려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막막함이 죽음이라는 단어에는 깃들어 있다. 그래서인지 죽음은 그것을 맞닥뜨린 사람의 몫일뿐만 아니라 그를 지켜보아야 하는 사람들의 몫이 되고는 한다. 하여 죽음은 늘 함께하지만 한두 걸음 비껴 서있는 듯하고, 현재일 때 유효하지만 과거이거나 미래로 다가온다.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각자의 위치에서 생각하고 수용하는 과정의 이야기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죽음의 어김없는 실체와 구체를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때론 절절하게, 때론 낭만적으로 아름답게 그려냄으로써 죽음의 충만한 의미값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 미덕의 기반에는 후두암으로 죽어가는 다비드의 투병과 죽음을 대면하는 미리암, 타마르, 파울라, 다비드의 시점이 있다. 각자의 시선으로 다비드의 죽음을 사유하고 수납하려는 시도는 탁월한 선택이다.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굳이 죽음이라는 단어를 제목에서 빼놓고, 아버지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미리암과 타마르의 시점에 더욱 비중을 두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더구나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 작품은 목차 대신 다비드를 중심으로 한 가계도롤 제시하고 있다. 다비드의 죽음과 관련된 기록에 그보다 확실한 소멸과 상실의 계보도가 또 있을까?

이 작품에서 읽어야 할 것은 단지 소멸과 상실만이 아니라 그것의 어우러짐이 빚어내는 진실의 조각들이다. 그 진실의 조각들은 분명하고 일관된 메시지를 발신한다기보다는 모호하고 변덕스럽게 드러나거나 사라진다. 그것은 죽음을 대면한 삶의 모습이 그러한 까닭이며 삶을 둘러싼 죽음의 진면목이 그러한 까닭이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고, 누구도 돌이킬 수 없다는 유일한 사실과 삶의 맞은편에 있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삶에 간섭하고 개입하려드는 모순된, 그 온통의 확실성으로 우리 곁을 떠돌고 있다는 자명함. 그 막막하고 두려운 확실성 앞에서 비로소 실존의 충만한 진실을 만나게다.


후두암에 걸린 아버지(다비드)의 투병과 죽음을 대면하는 두 딸과 아내 그리고 자기 자신의 상처와 사랑을 이 작품은 이야기한다. 과장된 감정으로 죽음의 고통과 슬픔을 어둡게만 그리기보다는 담담하지만 속 깊게 죽음이라는 현실을 만나게 한다. 그것은 상처나 슬픔보다는 오히려 치유나 사랑에 가까워보인다. 후두암 발병 사실을 아버지로부터 듣는 미리암과 우연하게 듣게 되는 타마르, 그것을 유머러스하게(아빠한테는 손녀만 중요해. 우리도 소중한 딸이라고요) 표현하는 딸이나 어린 타마르를 안심시키는 아버지의 모습(그림1)은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죽음을 담담하게 배워가며 수납하는 아홉 살 타마르의 이야기는 동화 같은 발랄함과 아련함을 가지고 있다. 친구 맥스와 함께 아빠를 미라로 만들어 살리겠다거나, 풍선에 매달아 편지를 보낸다고 믿거나 인어에게 아빠와 죽음이라는 말의 뜻을 풀이해주거나, 맥스와 함께 썰매를 끌고 병원에 오는 장면은 이 작품이 죽음으로만 경사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준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대면해야하는 가족의 이야기가 과도하게 감상적이거나 일방적으로 비관적이지 않고 따듯하고 진솔하다.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가 죽음에 대한 따듯한 진실을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의 시각이 아니라 모두의 시각으로, 각자의 관점으로 그것을 수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과 관련된 슬픔은 개별적이고 실존적이다. 누군가의 죽음 그 자체가 슬픈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와 관계되어 있고, 죽음이 실체로서 내게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탓이다. 죽음으로부터의 슬픔은 풍화되지 않고 점점 더 그것이 오롯한 자신만의 몫이며, 자신에게 닿기 전에는 결코 멈추지 않고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할뿐이다. 수납할 수밖에 없음을 타자의 죽음을 통하여 절실하게 느끼는 순간, 그것은 슬픔이라기보다는 절절한 현실, 절박한 현재, 적막한 고독이 된다. 그것을 통해 깨닫는 처연한 시간의 연민과 연민을 넘어서는 고요한 평안을 이 작품에서 만날 수 있다.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에서는 루이즈-타마르-미리암-파울라-다비드를 통해 생애 전주기의 연령으로 죽음을 대면하게 한다. 또한 후두암 발병소식과 루이즈의 탄생을 연결함으로써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그리고, 그 끝나지 않을 순환으로 영원을, 영원으로 모든 순간의 소중함을 이야기한다. 피할 수 없는 누구나의 상수항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슬픔보다는 오히려 그 맞은편에 있는 삶의 매순간의 소중함, 그 순간을 채워내야할 위로와 사랑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부각시킨다. 정작 두려워해야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순간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헛되이 시간을 보내거나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아니겠는가?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은 아름답고 서정적인 그림에 있다. 그것은 우아하면서도 발랄하고, 내면적 깊이와 역동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오브제의 과감한 생략과 선택, 캐릭터의 상황과 심리에 따라 자유롭게 변화하는 선과 색의 조화는 자칫 무겁거나 우울해질 수 있는 이야기의 무게와 속도를 조절하고 깊은 정서적 울림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작품 전체를 관류하는 일관된 분위기나 캐릭터별로 변별되는 색이나 선이라기보다는 개개의 캐릭터가 처한 상황이나 심리에 부합하는 선과 색의 구사를 선택했다. 이 작품에서 개개의 캐릭터와 그가 처한 상황이나 심리의 조합이 다양한 만큼 선과 색의 구사는 자유롭다. 분명하고 간결한 선으로 묘사한 상황과 흐릿하거나 여러 번 덧칠한 듯한 선으로 묘사한 장면만 비교해보아도 텍스트 전체의 서사적 맥락을 따갈 수 있을 정도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주장처럼 애니메이션은 움직임만으로도 즐거움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만화는 그림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움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만화의 고유한 문법에 최적화된 그림이 주는 즐거움은 다양한 방식의 자유로운 표현을 통해서다. 일상을 낯선 방식으로 재정의하여 자동화된 인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시도가 만화의 기저에 깔린 예술적 요구라면 그림은 무엇보다 중요한 표현 기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디트 바니스텐달의 그림은 주목할 만하다. 사실적인 묘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표현의 다양한 영역이 지속적으로 탐색되고 있는 그의 그림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풍성하고 미학적이다. <그림 3>을 보면 파울라가 다비드를 보내는 마지막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의 중심은 파울라에 두고 있지만 내레이션은 다비드에게 할애하고, 파울라의 움직임은 최소화하지만 다비드의 내레이션은 담백하지만 절절하게 울리게 하는 이러한 묘사는 정서적 울림의 깊이는 물론 공감을 부른다. 아울러 텍스트의 전체를 함께해온 독자들의 슬픔과 우울을 위로하고 있지 않은가?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말은 얼마나 감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레토릭인가라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는 내내 그것이 얼마나 경직되고 편협한 생각이었는지 느끼게 되었다. 거부할 수 없다는, 벗어날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수납하고 준비할 것이냐가 아닐까? 죽음이라는 이별이 단지 슬프거나 두렵지만은 않게 매순간을 긍정하고 그 위에 자신의 삶을 포개어 위로하며 사랑할 수는 없을까? 죽음 앞에 초라해지는 것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아니라 삶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 사랑해야하는 것들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 시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목소리를 잃고 더 이상 어떤 대화도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메모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다비드의 절절함은 늘 무의미한 말을 숱하게 쏟아내면서도 정작 전하지 못하는 사랑이나 위로의 말들에 닿아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한다. 당신의 죽음은 어떤 모습으로 어디쯤 와 있는가? 그래서 당신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만화 규장각> 201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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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상실의 닻 혹은 덫

제프 르미어, 수중 용접공미메시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가지고 있는 것은 잃은 것의 맞짝이고, 기억하는 것은 잊은 것의 맞짝이다. 잃은 것은 찾으려 하고 잊은 것은 기억하려 애를 쓰지만, 정작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잃은 것을 찾으려하고 잊은 것을 기억해내려 하는 것은 가지고 있는 것과 기억하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의미가 있는 행위다. 잃은 것과 잊은 것을 찾고 상기한다한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 모든 일들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제프 르미어의 수중 용접공은 정체모를 환상이 소환하는 잃어버린/잊어버린 것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잃어버린/잊어버린 것이 소환한 것은 단지 아버지나 회중시계에 대한 기억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것들에 집착함으로써 외면하려 했던 지금 이곳의 삶이다. 시추선에서 수중 용접공으로 일하는 잭 조지프는 오롯이 혼자일 수밖에 없는 해저에서 정체모를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해저에 있는 잭에게는 너무도 절박하고 생생했던 순간 지상에서는 사고로 인지된다. 정체모를 소리가 소환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의 죽음과 사라진 회중시계에 관한 것이었다.

바다 속 보물을 찾으면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것이라며 현실은 크게 개의치 않고 수중 탐사에만 몰두 하던 아버지의 모습은 만삭인 아내를 홀로 두고 맹목적으로 일과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집착하는 잭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보물과 일에 대한 몰두라기보다는 오히려 지금 이곳의 일상으로부터의 도피에 가깝다. 누군가의 남편이 되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는 부담감, 그것은 단지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된다는 의미를 넘어서는 책임감에 관한 것이다. 가장이든 아버지든 간에 그것은 나를 중심으로 했던 욕망을 괄호 속에 묶고 한층 성숙해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스스로의 성숙도나 책임감에 확신을 갖지 못했던 아버지나 곧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잭의 현실에서 조금 비껴난 행동들은 일종의 방어기제와 같다. 가정을 이루고 누군가의 아버지가 됨으로서 경제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아이의 삶을 지탱해주고 준거가 되어야 한다는 묵직한 책임감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욕망이 스스로 합리화시킬 수 있는 명분을 보물탐사와 수중용접에서 찾은 것이다. 잭이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갑자기 해저에서 아버지의 기억을 소환한 까닭이다.

잭은 수중의 절대 고독 속에서 일종의 환청과 환각으로 어린 시절의 자신과 그 시절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만난다. 그 과정에서 잭은 아버지의 죽음과 회중시계의 연관 고리를 찾고, 아버지 죽음의 또 다른 원인이 자신에게 있었음을 깨닫는다. 아울러 그것은 잭이 몰두하던 해저, 잠수, , 과거 등으로부터 지금 이곳의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다. 바로 그 순간이 텍스트 전체에 걸쳐 아버지와 변주된 데칼코마니처럼 유사성을 보이던 잭이 아버지와 완전히 분리되는 순간이며 동시에 아버지와 함께하던 어린 시절의 자신과 분리를 통해 성장하는 순간이다. 이러한 분리는 지금 이곳의 삶에 대한 직시이며, 보다 성숙한 자아로서 현실 수납을 의미한다.

수중 용접공에서는 집/시추선, 육지/수중, 현재/과거의 분리가 선명하다. 전자가 현실의 질서라면 후자는 아버지의 질서로 대변되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며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둔 잭 자신만의 세계이다. 아버지는 보물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현실과 거리를 두었지만 잭은 자신의 일에 몰두한다. 잭의 그런 모습은 현실에 충실한 듯 보이지만 아버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와 잭이 찾는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외면하려는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 다만 잭의 경우는 그러한 외면의 동기 저변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이 죄책감이 있었다는 것은 작품 뒤에서 발견할 수 있다. 결국 아버지는 끝까지 보물찾기를 이야기하지만 그가 우선 찾아야 했던 것은 그가 가장 사랑했던 보물인 아들 잭이 좋아하는 회중시계였다는 사실이 절묘한 메타포를 만들어낸다. 아버지의 보물찾기가 침몰한 스페인함선의 금화들이 아니라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단순화한다면 지극히 소박한 서사에 머물 뿐이겠지만, 그것을 아들 잭의 출산 즈음에 환상으로 연결함으로써 서사의 울림을 다양화한다. 자칫 잘못 읽으면 이 작품은 집/시추선, 육지/수중, 현재/과거의 이분적인 구도에서 전자만을 긍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아버지와 아들 잭의 데칼코마니 구도와 잭이 체험하는 환상의 내용을 연결해보면 양자가 비로소 잭의 온전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치 닻(anchor)이 배가 떠내려가지 않고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게 도와주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것이 자유롭게 떠날 수 없는 덫(snare)이 되기도 한다는 삶의 이율배반(antinomy)을 이해할 때, 그 이해 위에서 스스로 성인으로서 온전한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흥미로운 것은 수중 용접공을 읽으며 강도하의 큐브릭과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이 떠올랐다. 강도하의 큐브릭에서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미우의 죄의식이 만들어낸 자기방어기제를 잭의 회중시계에 대한 기억에서 떠올렸다면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의 과잉일까?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에서처럼 소중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찾는 과정은 마치 미스터리를 풀 듯 텍스트의 마지막까지 긴장을 유지함으로써 극적재미를 배가시킨다.

이 작품은 작화 면에서 상당히 과감한 시도를 한다. 텍스트 전체를 하나의 작화스타일로 유지하기보다는 장면과 상황에 적합한 자유로운 작화스타일을 선택하고 있다. 이것은 장면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서사 전체의 흐름을 작가 스스로 제어할 수 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며 시도다. 거기에 대사의 많고/적음이나 완급에 맞추어 작화스타일을 선택하고 있는 점도 무척 매력적이다. 이러한 작화스타일은 텍스트 전체를 잭과 동반자적 시점으로 전개하는 과정에서 긴장의 유지뿐만 아니라 서사에 대한 몰입에 크게 기여한다.


아버지나 아버지와 관련된 기억들이나 그것을 찾아가는 잭의 모습이 수직 구도로 구현되고 있다면 현실이나 일상은 수평구도를 선호하고 있는 것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다. 특히 현재의 삶, 자신을 기다리는 일상을 스스로 발견하는 장면(196-197)의 연출은 백미다. 시추선을 향해 나아가는 잭을 중앙에 배치하고 Z축을 중심으로 설정하고 동시에 자신의 아이와 함께하게 될 장면을 X축으로 설정함으로써 잭의 깨달음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출은 현재의 혼란스러운 잭 자신을 Y축으로 중심에 두고 과거의 아버지와 자신을 X축으로 연결하여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는 장면(112-113)에서 시도하여 학습하게 함으로써 그 효과를 배가한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와 화해하고(207)를 그를 수면위로 끌고 올라오는 장면(212)은 또 얼마나 환상적인 연출인가? 회중시계와 아버지 죽음을 연결시켜가는 과정에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분리시킴으로써 지금 잭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만들고, 회중시계를 매개로 분리되었던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를 화해하게 함으로써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와 어떻게 돌아와야 하는지를 열려주는 효과적인 연출이기 때문이다.

발문에서 데이먼 린들로프가 환상특급 운운한 것은 오히려 텍스트 리터러시에 장애가 된다. 환상적인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이 환상특급이 주는 분위기나 효과를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잭의 내면심리에 집중하여 읽어가는 것이 보다 현명한 일이 될 것이다. 자신이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시기에 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소환함으로써 아버지의 죽음의 비밀을 이해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함으로써 아버지의 기억으로부터는 자유로워지는 다소 안정적인 서사구조와 보수적인 주제의식을 지향하고 있는 까닭이다.

수중 용접공을 읽는 내내 박흥용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 등장하는 기저귀의 메타포가 떠올랐다. 사랑은 빨래하는 어머니가 아가의 허리춤에 매어둔 기저귀처럼 보호하는 것인지 구속하는 것인지, 그것이 닻인지 덫인지? “……이 모든 게 내 잘못이었던 거야.”(188)라고 깨닫는 장면의 배경이 러스티 앵커인 것을 근거로 수중 용접공이 닻에 비중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면 해석의 과잉일까? 사랑은 역시 어렵다.

<만화규장각> 20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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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풍경과 시간, 그 거리에 관하여

- 마누엘레 피오르, 초속 5000 킬로미터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 <초속 5m>벚꽃이 떨어지는 속도를 말하지만 심층에서 만나는 것은 시간과 속도가 빚어내는 거리(distance). 존재 간의 좁혀지지 않는 거리, 그 존재론적 고독을 초등학생부터 성인이 된 현재까지의 시간을 따라가며 보여준다. 그 거리는 존재의 상이한 속도와 돌이킬 수 없는 존재론적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임은 물론이다.

마누엘레 피오르의초속 5000 킬로미터는 떠남과 돌아옴의 어긋한 시간, 방황과 자유의 아이러니한 긴장, 정주와 유목의 거부할 수 없는 진동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생애 주기로 본다면 <초속 5m>의 뒷부분처럼 보이면서 좀 더 현실적이고 세속화된 풍경을 보여준다. 초속 5000 킬로미터는 삶이 지니고 있는 선택과 회한 사이에서 끊임없이 부유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모순을 있는 그대로 묘사했다. 무엇보다 인간의 가장 뚜렷한 징표인 모순을 부정하거나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을 있는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삶의 여정을 긍정하는 쓸쓸하지만 따듯한 작가의 시선이 압권이다. 늘 같은 풍경과 같은 시간에 머물기를 거부하며 떠남과 유목을 꿈꾸지만 동시에 돌아옴과 정주를 욕망하는 이율배반의 삶을 루치아와 피에르를 맞짝으로 설정하여 그려내고 있다. 그러한 이율배반의 삶을 구성하는 것이 어디 공간과 시간뿐이랴, 결국 사람의 관계도 그러한 아이러니 안에서 기쁨과 슬픔, 떠남과 돌아옴, 현존과 부재, 현재와 추억을 동시에 품고 있는 것을. 그러한 지리멸렬함 속에서 삶은 지속되고 번복될 수 없음을 쓸쓸하게 수납하는 것이 아니까?

초속 5000 킬로미터의 매력은 스토리만큼이나 매력적인 유니크한 작화와 연출에 있다. 아련한 추억 같기도 하고, 자신 없는 선택처럼 흐릿함 같기도 하고, 너와 나의 엇갈린 회한 같기도 한 번짐과 불분명한 경계가 몽환적인 수채화로 구현되고 있다. 과감한 점프컷(jump cut)의 활용하여 시간과 장면을 뭉텅 비워둠으로써 예상 가능한 서사를 직접 표현하는 대신 향유자의 추체험을 소환하여 스스로 그 간극을 빼곡하게 채우게 한다.


루치아의 편지를 독백처럼 기술하면서 편지의 내용과는 무관한 애니메이션과 스벤과의 키스 과정을 교차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시퀀스(pp.48-49), 이집트의 열차 안에서 피에르가 오한을 느끼면서 보게 되는 루치아의 육감적 환영(pp.64-69)과 루치아와 니꼴라의 밀회에 대한 질투어린 상상이 겹치는 시퀀스(pp.71-76), 떠나지 못하고 이제는 떠날 수 없어진 시어머니에게 떠나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루치아의 시퀀스(pp.92-96), 중년이 되어 재회한 피에르와 루치아가 보여주는 떠난 자와 돌아온 자 그들 사이에서 떠나지도 못했던 자의 말하지 못했던 관계(pp.123-125)와 그들이 보여주는 성공하지 못한 중년의 쓸쓸한 섹스 시퀀스(pp.128-131)는 군더더기 없는 연출과 성긴 듯 촘촘하게 드러나는 서사의 밀도를 매력적으로 구현한다.

밝은 노랑(bright yellow)과 강렬한 노랑(vivid yellow)과 밝은 연두(bright yellowish green)가 중심색이었던 젊은 시절의 첫 만남에서부터 연보라(soft purple)와 밝은 보라(bright purple)로 바뀌면서 화려하지만 불안과 고독으로 전개하는 서사 전개에도 불구하고 마무리는 다시 노랑과 연두에 내주는 작가의 시선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모순적이고 아이러니한 욕망들의 지리멸렬한 삶의 여정에도 불구하고 사랑했던 순간들, 아름답게 질투했던 그 순간들, 언제나 소환에 응해주는 그 시절의 추억 속 사랑하는 이들의 모습 앞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붙이고 싶은 작가의 따듯한 시선을 발견할 수 있는 지점이다.

초속 5000 킬로미터를 향유하는 사람은 아마도 신카이 마코토의 <초속 5Cm>에서 느꼈던 질투를 다시 한 번 느끼게 될 것이다. 그 질투는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것이겠지만 무엇보다 작가가 가진 삶에 대한 애정과 성찰의 깊이에서 비롯된다. 초속 5000 킬로미터는 기분 좋은 그러나 오랫동안 기억해야할 질투의 다른 이름이다.

<만화규장각> 2016.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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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옳았고 그래서 상처 받았던 그해 여름

- 마르코 타마키 글, 질리안 타마키 그림, 그해 여름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누구나 가지고 있어서 누구에게도 특별하지 않은, 하지만 돌아보면 그 개개의 누군가에게는 더할 수 없이 절절했던 시절이 있다. 그해 여름은 그 절절함을 열다섯 소녀 로즈의 시점으로 따라가고 있다. 해마다 여름이면 가족과 함께 찾아가는 이와고 비치 오두막에서 여름휴가를 보내왔건만 유독 그해 여름을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로즈의 엄마와 아빠가 둘째 문제로 해묵은 갈등을 드러내고, 이와고의 유일한 상점 브르스터를 중심으로 마을 젊은이들의 미숙하고 어설픈 하지만 절박했던 사건을 로즈의 시점에서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해 여름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라 어린 소녀의 눈에 낯선 어른의 세계를 비로소 들어오기 시작한 때가 그해 여름인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읽어야할 것은 갑자기 나타난 사건들이 아니라 그 사건을 바라보는 로즈의 시선이다.

내년 여름에는 틀림없이 멋진 가슴이 생길 것이라는 로즈의 마지막 대사는 성장한 시선의 다른 표현이다. 성장은 불안과 맞서는 일이다. 평온한 일상 속에서 즐겁게 지내던 로즈에게 문득 다가오는 세상의 다른 얼굴, 비로소 보게 되는 갈등과 고통스러운 순간들. 넘어져봐야 걷는 법을 배운다는 마을 노인의 충고처럼 로즈의 그해 여름은 불안이고 성장이다. 부쩍 성장한 몸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눈높이가 달라지고, 달라진 눈높이는 시선이 머무는 곳곳을 낯설게 한다. 낯선 세계는 불안하고, 불안한 만큼 고민하고 부딪혀야할 시간은 고통스럽다. 로즈와 윈디가 습관적으로 빌려오는 공포영화DVD를 바라보는 두 소녀의 시선(pp63-64)은 불안과 성장 사이의 메타포에 다름 아니다.

본문 중, 공포영화 DVD를 보는 로즈와 윈디(pp. 63-64.)

텍스트 전체에 걸쳐 이런 메타포는 반복적으로 드러나는데, 밤길과 손전등이 비추는 곳만 정체를 드러내는 세계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탐험하듯 걸어가는 로즈와 윈디(pp.88-91), 호수 속에서 눈을 뜬 채로 떠있는 로즈, 사유지를 탐험하듯 들어가고 그곳에서 마을 젊은이들의 흔적을 발견하는 모습 등이 그것이다. 던크의 아기를 가졌지만 그의 무관심 때문에 자살을 결심하는 제니와 둘째 문제로 아빠와 불화를 겪던 엄마가 물에 빠져 죽으려는 제니를 구하면서 둘 다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는 모습은 상징적이다. 마치 세례를 받듯, 어머니의 양수 안에서 태어나듯 의사(疑似)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는 모습은 마치 축제의 과정과 같다. 일상의 타락으로 신성함을 잃게 되면 의사 죽음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과정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로즈에게 그해 여름은 기억할만한 성장으로 남는 것은 아닐까?

본문 중, 밤길을 걸어가는 로즈와 윈디(pp. 88-91.)

그해 여름이 미덕은 당위로서의 성장, 성장을 위한 작위적 갈등을 상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서는 소위 메인 플롯을 추동하는 중심 갈등의 비중이 높지 않다. 그것은 이 작품이 중심 갈등의 해소과정을 쫓아간다기보다는 그해 여름 휴가동안에 로즈의 시점에서 바라본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현명한 독자는 갈등의 해소과정이 아니라 그 갈등에 반응하는 로즈의 변화과정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장하는 시기, 삶의 봄날에서 여름을 맞는 시기에 휴가라는 탈일상의 시간 동안 세상을 향해 스스로의 시선을 맞추어가는 로즈의 변화가 이 작품의 중심이다. 윈디가 파놓은 모래구덩이에 로즈가 들어가면서 나누는 대화는 가슴으로 상징되는 그녀의 성장의 징후이며, 로즈가 모아둔 조약돌을 침대에 두고 떠나는 마지막 장면도 그러한 징후의 하나로 보아야 할 것이다. 로즈의 성장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작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녀의 성장이 그녀의 성장만이 아니고, ‘그해 여름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어느 한 때의 그것이듯, 그 무렵 우리가 겪었던 그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그해 여름당신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변하였는가? ‘그해 여름은 당신의 삶 속에서 어떤 여름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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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ny, Sunny, Sunny!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마츠모토 타이요(松本 大洋)의 작품에 작가주의 운운하는 것은 다소 번거롭다. 소위 작가주의라고 말하는 것들은 주류 상업만화의 관습이나 장르적 특성에 얽매이지 않고, 작가 고유의 세계를 특유의 방식으로 창출한다. 그림에서부터 서사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세계를 구현하고 있는 마츠모토 타이요의 작품을 향유해본 사람이라면 그 특유의 세계 안에서 작가주의라는 수사(修辭)는 오히려 뱀다리가 되기 때문이다.


- 마츠모토 타이요, 써니》, 애니북스, 2013 중에서

그의 작품은 대부분 딱히 역동적인 구도가 아님에도 정적이라는 느낌보다는 나름의 속도감이 느껴진다. 칸 안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표정이 모두 각기 살아있고, 배경도 쉬지 않고 제 표정을 만들어냄으로써 칸 전체가 정지된 역동성을 갖는 까닭이다. 마츠모토 타이요의 화면연출과 캐릭터 구현 과정 그리고 다소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한(이것은 그의 작품의 매우 중요한 입점이 되겠지만) 시점과 내레이션의 유기적인 조화는 주목할 지점이다. 클로즈업한 정지영상을 캡처해놓은 듯한 화면연출을 통해서 캐릭터 개개의 성격을 모두 살려내고,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캐릭터임도 개별적인 감정선을 매력적으로 그려냄으로써 당위론적 결론이나 성장의 신화에 매몰되지 않는다. 특히 텍스트 전체를 보이지 않게 압도하는 시점은 내레이션과 함께 특유의 페이소스를 만들어내고 있다. 마츠모토 타이요의 작화는 작품별로 갱신된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작화의 완성도는 매번 자유로움으로 갱신되고 갱신의 차이만큼이나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여주고 있다. 죽도 사무라이에서 보여주는 작화는 일가를 이룬 작가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자유의 압도가 아니겠는가?


마츠모토 타이요는 이율배반의 미학을 구현한다. 이러한 이율배반의 미학이 가장 돋보이는 것은써니. 써니는 이제는 멈춰버린 자동차 써니 안에서 보육원 밖을, 돌봄이 필요한 유년의 밖을,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느낌의 밖을 꿈꾸는 아이들의 간절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이야기를 시간적 거리와 감정적 거리를 유지한 자세로 그려내고 있다. 아이들은 그들 생에 가장 화창하고 빛나야할 그 시절(sunny)을 겨우 멈춰버린 자동차 써니 안에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견뎌낸다. 가족이 아닌 가족들, 아이가 아닌 아이들. 사실 이러한 구도의 이야기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지만 써니는 식상하지 않다. 성장담의 컨벤션을 사용하고 있지만 성장에 집착하지 않기에 특정 시기 특정 사건에 매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드러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내레이션의 페르소나가 견디는 지금 이곳의 시간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보육원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홀로 던져져서 오롯하게 살아내야 하는 시간에 주목해보면, 지금 이곳은 당신의 화양연화(sunny)인가, 당신의 삶은 그저 움직이지 못하는 써니에 머물고 있지 않나, 오롯하게 혼자서 삶을 잘 견디고 있나 등등 다양한 의문을 남기고 있다. 그래서 써니의 캐릭터들은 각각의 내력담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이 개개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모두의 이야기로 수렴되어 특유의 페이소스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페이소스는 향유자가 그들의 이야기 위에 자연스럽게 자신을 투사하게 만든다. 문제는 향유자의 투사는 이야기 속의 유년시절로 가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 개개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지나간 추억 속의 유년을 우리가 공유했기 때문에 눈이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모습에서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지금 우리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자꾸 마음이 가는 것이다.


삶이 아름다운 것은 지금 이곳에서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출판사에서는 가장 대중적이고 안정적인 서사인 성장담으로 규정하고 싶어 하지만, 그곳에 머물지 않아야 제대로 된 써니를 향유할 수 있다. 마츠모토 타이요의 써니는 그냥 그림만으로도 즐거울 수 있고, 각각의 캐릭터만으로도 대화할 수 있으며(이들 중 누구 하나가 빠져도 서사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그것이 어느 시대, 몇 살쯤의 이야기라고 규정하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지독한 자유가 데려다주는 Sunny, Sunny, Sunny한 지금 이곳, 우리 삶의 화양연화가 아니겠는가?


<만화규장각>  2016.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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