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과 상실을 대면하는 법

유디트 바니스텐달,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미메시스, 2013.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소멸은 사라지는 자의 몫이고 상실은 남겨진 자의 몫이다. 유디트 바니스텐달의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는 죽음을 둘러싼 소멸과 상실의 기록이다. 죽음은 거부할 수 없는 보편성과 생명으로부터 기원하는 개별성의 이율배반적 긴장 안에 있다. 언제든 함께할 수 있지만 딱 한 번의 체험만 허락되는 것이기에 두려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막막함이 죽음이라는 단어에는 깃들어 있다. 그래서인지 죽음은 그것을 맞닥뜨린 사람의 몫일뿐만 아니라 그를 지켜보아야 하는 사람들의 몫이 되고는 한다. 하여 죽음은 늘 함께하지만 한두 걸음 비껴 서있는 듯하고, 현재일 때 유효하지만 과거이거나 미래로 다가온다.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각자의 위치에서 생각하고 수용하는 과정의 이야기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죽음의 어김없는 실체와 구체를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때론 절절하게, 때론 낭만적으로 아름답게 그려냄으로써 죽음의 충만한 의미값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 미덕의 기반에는 후두암으로 죽어가는 다비드의 투병과 죽음을 대면하는 미리암, 타마르, 파울라, 다비드의 시점이 있다. 각자의 시선으로 다비드의 죽음을 사유하고 수납하려는 시도는 탁월한 선택이다.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굳이 죽음이라는 단어를 제목에서 빼놓고, 아버지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미리암과 타마르의 시점에 더욱 비중을 두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더구나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 작품은 목차 대신 다비드를 중심으로 한 가계도롤 제시하고 있다. 다비드의 죽음과 관련된 기록에 그보다 확실한 소멸과 상실의 계보도가 또 있을까?

이 작품에서 읽어야 할 것은 단지 소멸과 상실만이 아니라 그것의 어우러짐이 빚어내는 진실의 조각들이다. 그 진실의 조각들은 분명하고 일관된 메시지를 발신한다기보다는 모호하고 변덕스럽게 드러나거나 사라진다. 그것은 죽음을 대면한 삶의 모습이 그러한 까닭이며 삶을 둘러싼 죽음의 진면목이 그러한 까닭이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고, 누구도 돌이킬 수 없다는 유일한 사실과 삶의 맞은편에 있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삶에 간섭하고 개입하려드는 모순된, 그 온통의 확실성으로 우리 곁을 떠돌고 있다는 자명함. 그 막막하고 두려운 확실성 앞에서 비로소 실존의 충만한 진실을 만나게다.


후두암에 걸린 아버지(다비드)의 투병과 죽음을 대면하는 두 딸과 아내 그리고 자기 자신의 상처와 사랑을 이 작품은 이야기한다. 과장된 감정으로 죽음의 고통과 슬픔을 어둡게만 그리기보다는 담담하지만 속 깊게 죽음이라는 현실을 만나게 한다. 그것은 상처나 슬픔보다는 오히려 치유나 사랑에 가까워보인다. 후두암 발병 사실을 아버지로부터 듣는 미리암과 우연하게 듣게 되는 타마르, 그것을 유머러스하게(아빠한테는 손녀만 중요해. 우리도 소중한 딸이라고요) 표현하는 딸이나 어린 타마르를 안심시키는 아버지의 모습(그림1)은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죽음을 담담하게 배워가며 수납하는 아홉 살 타마르의 이야기는 동화 같은 발랄함과 아련함을 가지고 있다. 친구 맥스와 함께 아빠를 미라로 만들어 살리겠다거나, 풍선에 매달아 편지를 보낸다고 믿거나 인어에게 아빠와 죽음이라는 말의 뜻을 풀이해주거나, 맥스와 함께 썰매를 끌고 병원에 오는 장면은 이 작품이 죽음으로만 경사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준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대면해야하는 가족의 이야기가 과도하게 감상적이거나 일방적으로 비관적이지 않고 따듯하고 진솔하다.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가 죽음에 대한 따듯한 진실을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의 시각이 아니라 모두의 시각으로, 각자의 관점으로 그것을 수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과 관련된 슬픔은 개별적이고 실존적이다. 누군가의 죽음 그 자체가 슬픈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와 관계되어 있고, 죽음이 실체로서 내게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탓이다. 죽음으로부터의 슬픔은 풍화되지 않고 점점 더 그것이 오롯한 자신만의 몫이며, 자신에게 닿기 전에는 결코 멈추지 않고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할뿐이다. 수납할 수밖에 없음을 타자의 죽음을 통하여 절실하게 느끼는 순간, 그것은 슬픔이라기보다는 절절한 현실, 절박한 현재, 적막한 고독이 된다. 그것을 통해 깨닫는 처연한 시간의 연민과 연민을 넘어서는 고요한 평안을 이 작품에서 만날 수 있다.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에서는 루이즈-타마르-미리암-파울라-다비드를 통해 생애 전주기의 연령으로 죽음을 대면하게 한다. 또한 후두암 발병소식과 루이즈의 탄생을 연결함으로써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그리고, 그 끝나지 않을 순환으로 영원을, 영원으로 모든 순간의 소중함을 이야기한다. 피할 수 없는 누구나의 상수항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슬픔보다는 오히려 그 맞은편에 있는 삶의 매순간의 소중함, 그 순간을 채워내야할 위로와 사랑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부각시킨다. 정작 두려워해야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순간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헛되이 시간을 보내거나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아니겠는가?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은 아름답고 서정적인 그림에 있다. 그것은 우아하면서도 발랄하고, 내면적 깊이와 역동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오브제의 과감한 생략과 선택, 캐릭터의 상황과 심리에 따라 자유롭게 변화하는 선과 색의 조화는 자칫 무겁거나 우울해질 수 있는 이야기의 무게와 속도를 조절하고 깊은 정서적 울림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작품 전체를 관류하는 일관된 분위기나 캐릭터별로 변별되는 색이나 선이라기보다는 개개의 캐릭터가 처한 상황이나 심리에 부합하는 선과 색의 구사를 선택했다. 이 작품에서 개개의 캐릭터와 그가 처한 상황이나 심리의 조합이 다양한 만큼 선과 색의 구사는 자유롭다. 분명하고 간결한 선으로 묘사한 상황과 흐릿하거나 여러 번 덧칠한 듯한 선으로 묘사한 장면만 비교해보아도 텍스트 전체의 서사적 맥락을 따갈 수 있을 정도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주장처럼 애니메이션은 움직임만으로도 즐거움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만화는 그림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움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만화의 고유한 문법에 최적화된 그림이 주는 즐거움은 다양한 방식의 자유로운 표현을 통해서다. 일상을 낯선 방식으로 재정의하여 자동화된 인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시도가 만화의 기저에 깔린 예술적 요구라면 그림은 무엇보다 중요한 표현 기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디트 바니스텐달의 그림은 주목할 만하다. 사실적인 묘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표현의 다양한 영역이 지속적으로 탐색되고 있는 그의 그림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풍성하고 미학적이다. <그림 3>을 보면 파울라가 다비드를 보내는 마지막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의 중심은 파울라에 두고 있지만 내레이션은 다비드에게 할애하고, 파울라의 움직임은 최소화하지만 다비드의 내레이션은 담백하지만 절절하게 울리게 하는 이러한 묘사는 정서적 울림의 깊이는 물론 공감을 부른다. 아울러 텍스트의 전체를 함께해온 독자들의 슬픔과 우울을 위로하고 있지 않은가?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말은 얼마나 감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레토릭인가라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는 내내 그것이 얼마나 경직되고 편협한 생각이었는지 느끼게 되었다. 거부할 수 없다는, 벗어날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수납하고 준비할 것이냐가 아닐까? 죽음이라는 이별이 단지 슬프거나 두렵지만은 않게 매순간을 긍정하고 그 위에 자신의 삶을 포개어 위로하며 사랑할 수는 없을까? 죽음 앞에 초라해지는 것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아니라 삶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 사랑해야하는 것들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 시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목소리를 잃고 더 이상 어떤 대화도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메모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다비드의 절절함은 늘 무의미한 말을 숱하게 쏟아내면서도 정작 전하지 못하는 사랑이나 위로의 말들에 닿아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한다. 당신의 죽음은 어떤 모습으로 어디쯤 와 있는가? 그래서 당신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만화 규장각> 201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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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그래피? 자유와 광기의 즐거움

지미 볼리외, 센티멘털 포르노그래피미메시스, 2013.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야마모토 나오키의 내일 다시 전화할게와 지미 볼리외의 센티멘털 포르노그래피를 함께 읽은 것은 그저 우연일 뿐이었다. 포르노그래피라고 부르기에는 두 작품 모두 도발의 강도나 환기의 궁극이 매력적이다. 야마모토 나오키가 일상 안에서 꿈꾸는 혹은 조금 비껴서면 가능할지로 모를 섹스로 각자의 성적 판타지를 소환하고 있다면, 지미 볼리외는 자유와 광기의 당당한 질주와 동력을 즐겁게 그리고 있다. 전자는 현실의 구속 안에서 각자가 비밀스럽게 꿈꾸는 소심한 판타지로 그 안에서 향유자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은밀한 즐거움이 있다. 후자는 각자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자유와 광기의 질주를 보여준다.

센티멘털 포르노그래피290쪽의 부피가 최소한의 서사 라인만을 갖추고 각각의 캐릭터는 자신의 욕망과 행복에 충실한 자유를 연출한다. 이 작품의 서사라인을 따라가면, 의도된 졸작 <정의로운 배반>(지독한 패러독스의 영화제목이 아닌가?)의 수익으로 구입한 코트 노르의 호텔에서 루이, 코린, 뮈리엘, 레옹스가 벌이는 광기어린 휴식을 만날 수 있고, 코린을 잊지 못하는 아니, 아니를 열망하는 가리에피, 가리에피의 넘어설 수 없는 친구 시몬 등의 이야기가 그 사이사이를 자의적으로 가로지르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의 서사적 지향을 가지고 구조를 중심으로 깊이와 울림을 만들어내려는 일반적인 서사물과는 달리 이 작품은 각 캐릭터의 욕망과 그것이 그려내는 자유를 연출할 뿐이다.

더 이상 낯설거나 부끄럽지도 않은 맨몸과 순간순간 자극적인 검은색 음모, 색과 구도 그리고 연출이 보여주는 비언어적 도발, 대상과 방식에 구애받지 않는 섹스의 자연스러움, 거침없는 대사와 장면연출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에로틱하기보다는 자유롭다. 그것은 단지 텍스트 전체적으로 펜, 색연필, 매직 등 자유롭게 사용되었다거나 칸의 구속과 순서적 읽기에서 벗어났다거나 2장의 모두부터 보여주는 소설과 만화가 적절한 긴장을 이루고 있다거나 하는 만화연출적인 차원의 문제만 아니다. 루이와 코린이 중심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가 독립적으로 각자의 욕망과 행동에서 거침이 없고 자유로우며, 그들 각자가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완전히 놓지 않는 절묘한 긴장선 위에서 질주하고 있는 까닭이다. 루이는 호텔을 구입하기 위하여 세상을 향한 야유와 같은 의도된 졸작 <정의로운 배반>을 만들지만 그것은 결국 세상을 견디기 위한 위대한 변절이었고, 루이와의 결혼을 꿈꾸지만 세상의 원칙으로부터의 자유와 정주를 동시에 꿈꾸는 코린이 보여주는 긴장에 주목해야하는 이유다. 지극히 연극적인 공간에서 작위적인 듯 보이지만 거침없는 자유와 광기를 그려내는 이 작품 속 모든 캐릭터들은 무엇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다워지기 위한, 그래서 더욱 행복하고 즐거워지려는 진솔한 자유를 꿈꾸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의 과격하고 포르노그래피한 장면연출은 숨겨진 은밀한 욕망이나 말초감각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분하게 그 지독한 장면들을 내면화하는 자유를 보여준다.

이 작품이 장별로 독립적으로 읽어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울러 290쪽의 어느 부분을 펴고 보아도 도발적이지 않은 시도가 없고, 그 숱한 도발이 환기하는 광기와 자유의 경쾌함을 만날 수 있다. 다시 말해 텍스트 전체가 아주 느슨하지만 매우 독립적인 형태의 자유와 광기의 즐거움을 기획하고 있다는 점은 무척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지점이다. 텍스트는 궁극의 지향을 향해 나아가는 이정(里程)의 기록이 아니라 순간순간 체험의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텍스트를 읽는 이유는 완결된 서사가 보여주는 마지막 지평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곳에 이르는 체험의 즐거움을 위해서이다. 즐길 준비가 되었다면 당신은센티멘털 포르노그래피를 펴서 읽어야 할 것이다. 반드시 시작이 아니어도, 처음부터 끝까지가 아니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문득 낯선 장면에서 당신이 즐거울 수 있다면 돌아봐야할 것이다. 당신을 구속하고 있는 지금 이곳의 맨살을…….

<만화규장각> 201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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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나 내가 아니거나 혹은 둘 다 이거나

 - 클로에 크뤼쇼데, 여장남자와 살인자》, 미메시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살고 싶은 절실함이 살아 내야할 척박함을 견딜 수 있는 방식은 두 가지다. 살아 어떤 고통 속에서도 살아 내야만할 사랑을 하거나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깨끗이 지우는 것이다. 클로에 크뤼쇼데는 여장남자와 살인자에서 이 둘을 다 보여준다. 삶 그 자체로 아름다운 화양연화(花樣年華)에 죽어도 좋을 사랑을 만나 결혼하고, 결혼과 함께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는 루이즈와 폴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여장남자와 살인자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동명의 에세이를 클로에 크뤼쇼데(Chloe Cruchaudet)가 고혹적인 그림으로 전환(adaptation)한 수작이다. 이 작품은 스토리의 압도도 대단하지만 그림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프레렐(Frehel)의 샹송에 맞추어 춤을 추는 루이즈와 폴의 모습은 그림으로 표현한 음악이고 춤이다. “우리만의 춤을 추면되죠.”라는 폴의 대사와 프레렐의 노래 <그는 진짜 남자>는 마치 대구를 이루며 그림과 조화를 이루어낸다. 루이즈와 폴은 물론 악사들까지 매순간 다른 표정으로 몰입해 있고, 각기 다른 크기와 자세의 춤 그리고 동선은 그 안에서 완급을 읽을 수 있고, 섬세하게 묘사된 땀방울만으로도 둘의 뜨겁고 행복한 순간을 공감할 수 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림1>은 각각의 그림이 칸의 역할을 하며 동시에 두 페이지 전체가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는 구조이다. 각 칸의 역할을 하는 그림과 전체 그림의 조화, 그들이 빚어내는 유려한 역동성 그 마디를 찍어주는 루이즈의 붉은 치마는 매혹적이다.

클로에 크뤼쇼데, 여장남자와 살인자》, 미메시스 중에서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참전하게 되고, 전쟁이라는 극한적인 상황 속에서 동료의 참혹한 죽음을 목격하며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고 탈영하는 폴의 모습은 절박하고 단호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가기 위해, 무의미한 죽음 당하지 않기 위해 탈영을 감행하는 폴의 모습은 안소니 밍겔라 감독의 영화 <콜드마운틴>에서 인만의 그것과 닮았다. 탈영한 폴은 파리에서 숨어 지내다가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스스로 여장을 선택함으로써 손가락을 끊었듯, 총을 버렸듯 남성성을 은폐하거나 포기한다. 남성성기 상징인 손가락이나 총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생계를 아내에게 의탁함으로써 사회적 남성성을 포기하고, 오히려 여장을 하고 여성들의 일터에서 일하고 그들과 어울리며 남성과도 관계를 갖게 된다. 전쟁이라는 남성적 질서로부터의 도피(폴의 선택이라지만)로 인하여 생물학적인 성을 은폐하고 복장이나 생계와 같은 사회적 성역할과 남성적 성정체성 등의 혼란 속에서 볼로뉴 숲의 극단적인 섹스와 변태적 섹스 사이를 오가는 그래서 아내와의 불화가 심화될 수밖에 없는 쉬잔()의 일탈은 진정한 해방에 이르지 못하고 자기파괴적인 결과를 낳는다. 폴은 10년만에 사면으로 더 이상 자신의 성적정체성을 숨기지 않아도 되지만 쉬잔이라는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혼란스러운 관성과 전쟁으로 인한 극도의 트라우마로 인하여 루이즈와 자신을 괴롭힌다. 술이 깨어 있는 동안에는 성적인 혼란과 전쟁의 트라우마로 인한 환영에 시달리는 모습은 여성성과 남성성의 내재화된 충돌의 양상이다. 작가는 전쟁의 트라우마로부터 도피하려 했던 폴이 숨은 곳은 자기 안에 있던 여성성의 퍼스나 뒤였지만, 폴에게는 목숨과 같은 사랑 루이즈가 있었다는 점에서 결코 여성성을 전면화할 수 없다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의 예정된 충돌을 어둡지만 관능적으로 매료시키고 있다.

거시적인 담론의 부담스러운 명분을 앞세워 전쟁을 일으키고,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의 젊은이들을 가장 참혹한 현장으로 내모는 폭력적인 상황을 거부할 수 없었던 평범한 젊은이의 비극적인 응전의 기록을 작가는 연민과 도발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 작품이 더욱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 지독한 이야기를 클로에 크뤼쇼데 특유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시선으로 애무하듯 글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작가의 아름다운 고집은 텍스트 곳곳에서 관능적인 모습으로 아름답게 빛난다. 수차례 강조한 바와 같이 그림의 미학적인 압도를 반드시 눈여겨 보아야할 이유다. 그 미학적인 압도 사이에서 볼로뉴 숲의 성적 일탈이나 폴의 또다른 퍼스나 쉬잔으로서의 자유가 빛나고 있음도 주목해야할 지점이다. 그 지점에서 폭력적이고 일방적이고 지극히 남성적인 전쟁이라는 맥락위에서 개인의 저항 가능성의 메파포를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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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는 도발과 차분한 숙고 사이

-체스터 브라운, 유료 서비스, 미메시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체스터 브라운의 유료 서비스는 거침없는 도발과 차분한 숙고 사이에 있다. 매춘이라는 다소 자극적이고 불편한 소재를 사적인 경험담을 담담하게 기록하는 형식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도발적이다. 사실 이 작품이 도발적인 것은 소재나 진술의 형식보다는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있다. 선택과 동의만 바탕이 된다면 형태의 섹스든 용납될 수 있기에 매춘은 데이트의 일종일 뿐이고, 타인의 재산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 내 몸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하던 그것은 내 권리며, 성매매 남성은 여성을 소유하지 않으므로 사는 것이 아니며, 권력, 착취, 선택, 결혼 등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있기에 매춘은 정상화되어야 한다는 작가의 주장은 거침없는 도발이기 때문이다. 성에 대하여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이라도 좀처럼 쉽게 동의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작가 자신도 그러한 도발의 설득력에 의문을 품은 것인지 아니면 견고한 보편의 벽을 의식했는지 몰라도 235쪽의 만화 뒤에 다시 2쪽의 발문과 62쪽의 부록을 붙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도발은 문제제기로서 혹은 생산적인 토론을 유도하는 첫 단추로서 의의를 지닌다.

체스터 브라운유료 서비스미메시스 표지

작가는 작품 내내 이 소재의 자극성을 중화시키고 메시지에 집중시키기 위하여 약화체 그림으로 매우 차분하고 기계적으로 성행위를 묘사한다. 도발적인 메시지와 문제 제기가 자극적인 이미지에 그 중심을 빼앗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일지를 기록하듯 사실 중심의 서술과 토론 중심의 전개를 일관되게 유지한다.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기 위하여 작위적으로 매춘여성들의 캐릭터를 설정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났던 여성들을 그대로 캐릭터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의 구성은 매우 느슨하지만 자연스럽다. 덕분에 독자는 작가가 은밀하게 기획해놓은 담론의 장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묘사된 매춘의 장 앞에 놓임으로써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갖게 되는 것이다. 매춘 하는 여성들의 내력담을 신파조로 서술하여 과도한 감상성을 유발하거나, 매춘 현장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즐기면서도 사회 부조리나 구조적 모순 따위를 운운하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은밀한 비겁이 아니라 이 작품은 그대로의 매춘과 맨얼굴로 대면할 것을 권유한다. 그 안에서 섹스, 결혼, 매춘 등의 문제를 스스로 생각하고 토론하고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이 작품의 빼놓을 수 없는 미덕이다. 메시지의 공감도, 도덕적 정당성, 서사적 완결성, 치밀하고 압도적인 플롯, 철저하게 계산된 캐릭터, 시공간의 매혹적인 메타포 등등 만화의 완성도와 상관될 수 있는 일체의 요소를 내려놓고 체스터 브라운은 격렬하게 토론할 수 있는 도발적인 문제의 장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섣부른 문제 제기가 엄청난 파장을 불러오는 지금 이곳에서 굳이 비난의 가능성이 충분한 체스터 브라운의 유료 서비스를 텍스트로 삼은 것은 토론의 과정, 그 과정의 소란스러움, 소란스러움의 역동성, 역동성의 생명력을 믿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바탕으로 논리성과 개방성 그리고 생산성을 지향하는 역동적인 토론이 차단된 지금 이곳에서 익명성을 무기로 일방적인 편 가르기, 비난, 혐오, 분노의 비겁한 전개를 향한 도발로서도 이 작품은 충분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 까닭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작품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제기한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정당한 것이냐는 별개의 문제라는 점이다. 더구나 개인의 자유에 대한 보장, 인권에 대한 사회적 보장과 인식, 여성의 지위 등에 대한 매춘의 다양한 층위를 고려해야지만 그 사회 안에서 매춘의 정체와 위상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과 매춘을 둘러싼 사회구조적 모순과 폭력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은 이 작품의 한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라는 자유의 장이 지니고 있는 도발적인 문제제기와 그것의 가능성을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변화를 꿈꾸게 할 수 있는 성공적인 텍스트라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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