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지금 이곳에서 쓰고 있는 고전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삼국지》는 살아있는 텍스트다. 대부분의 고전은 누대에 걸쳐 읽히면서 새로운 의미를 끊임없이 생산한다. 하지만 그것은 읽기와 관련된 것이지 텍스트를 다시 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데 왜 유독 《삼국지》만은 끊임없이 다시 쓰이고 있는 것일까?
《삼국지》는 명나라 때 나관중이 쓴 24권 240칙(則)의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를 바탕으로 한다. 물론 나관중의 이 작품도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의 《삼국지주》(三國志註)에 수록된 야사와 잡기를 근거로,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의 줄거리를 중심으로 쓴 작품이다. 오늘날 전하는 《삼국지》는 청나라 때 모종강이 읽기 쉽게 다시 쓴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관중의 《삼국지》라고 부른다. 이러한 창작 과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삼국지》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당대의 민중들이 요구하는 영웅들을 부각시키고 대중적인 요소들을 탄력적으로 삽입시킴으로써 끊임없이 다시 쓰고 읽히는 생명력을 갖게 된 것이다. 결국 《삼국지》를 읽으면 그것이 읽히는 시대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민중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요구하는 지도자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등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삼국지》에는 그 시대의 열망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삼국지》가 영원한 고전으로 다시 창작되는 이유인 것이다.
만화는 가장 대중적인 텍스트이다. 만화는 카툰화법(cartooning)을 주로 사용하며, 글과 그림의 이코노텍스트(econotext)로서 이미지의 연속성(narrative)을 필요조건으로 갖는 장르이다. 상(像)의 객관적 재현보다는 주관적 왜곡을 통해서 전달의 효과를 높이는 카툰화법과 글과 그림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이코노텍스트적인 특성은 대중들의 접근을 용이하였다. 거기에 ‘이야기 하는 인간(Homo Narran)’의 특성을 부각시킨 이미지의 연속성에 의한 서사(narrative)의 확보는 만화가 가장 대중적인 장르가 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최근 만화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폭발적이다. 그것은 크게 두 방향으로 드러나고 있는데, 하나는 《먼 나라 이웃나라》,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신화》, 《마법 천자문》류의 학습만화시장의 급성장에 따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화의 스토리텔링의 원천소스로서 만화의 가치를 재인식하고 그 원작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그것이다. 20권까지 1천 5백만 부 이상의 경이적인 판매량을 보인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신화》나 14권까지 700만 부 이상의 판매량을 보인 《마법 천자문》의 예를 살펴보자. 이 두 작품은 모두 학습만화의 컨셉을 유지하면서 스토리텔링의 원천소스는 고전에서 가져왔다.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신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 그 자체를 학습만화의 형태로 바꾼 것이며, 《마법 천자문》은 중국고전 《서유기》의 스토리라인 위에서 《천자문》을 학습하는 방식이다.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성공은 학습만화라는 틈새 콘텐츠에 주목하고, 이윤기를 중심으로 불고 있던 신화 열풍을 중심 트렌드로 파악하여 그것을 콘텐츠 개발에 적극 반영한 결과였다. 신화를 원천콘텐츠로 하고 있는 이 경우는 학습만화를 통해 대중성을 검증하고, 이를 기반으로 애니메이션 <올림푸스 가디언>으로 발전적 변환을 시도함으로써 국내에서 장르 간 시너지 효과(cross over effects)를 성공적으로 극대화한 대표적인 콘텐츠가 되었다. 《마법 천자문》의 경우도 한자교육의 수요를 파악하고 보다 효과적인 학습형태로서 학습만화를 주목하였으며, 특히 《드래곤 볼》 등으로 전환(adaptation)에 성공한 바 있는 《서유기》의 스토리라인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극적 흥미를 극대화한 결과였다. 더구나 이 두 작품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만화를 원천콘텐츠로하여 애니메이션(올림푸스 가디언, 태극 천자문)과 각종 뮤지컬 및 체험전 등으로 거점콘텐츠화함으로써 모범적인 One Source Multi Use의 사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원천콘텐츠는 독립된 콘텐츠로서 대중성을 검증 받아 이미 브랜드 가치를 확보한 콘텐츠를 말하는데, 장르 간 Multi Use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요소들을 콘텐츠 내부에 포함하고 있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원천 콘텐츠로서 활용되는 만화, 소설, 신화 등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대중성 검증이 가능해야하기 때문에, 그 자체 콘텐츠로서의 완성도를 확보하고 있어야만 한다. 반면, 거점콘텐츠는 원천콘텐츠를 기반으로 대중적인 호응을 기대할 수 있는 콘텐츠로 전환한 것을 말한다. 즉 매체와 장르의 확대를 통하여 Target의 확장을 도모할 수 있는 콘텐츠로 전환을 꾀하는 것으로 대중적인 호응은 필수적이다. 대중적인 호응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의 접근이 손쉬운 매체와 장르를 택해야 하기 때문에 이에 따른 많은 변환비용(Conversion Cost)을 요구하고 동시에 그만큼의 risk도 증대되는 것이다. 따라서 거점 콘텐츠의 경우 Target의 규모와 범위, 수평적/수직적 Multi Use의 활성화 기대 정도, 콘텐츠 자체의 대중성 확보 방안 등이 성패를 좌우하는 중심 요소이다. 거점콘텐츠는 기획단계에서 메인수익 window 선정, 수평적 Multi Use의 노출 시기와 빈도, 수직적 Multi Use의 다양성, 콘텐츠 브랜드 관리 방안 등에 대한 섬세한 고려가 요구되는 것이다. 원천콘텐츠를 거점콘텐츠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환의 목적에 부응하는 전략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만화는 원천콘텐츠로서 미덕을 골고루 갖춘 장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스토리텔링의 대중성을 검증할 수 있고, 그림으로 구체화되기 때문에 애니메이션, 영화, 드라마, 게임, 캐릭터 등으로의 장르 간 전환이 용이하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의 경우 대부분의 콘텐츠가 만화를 원천콘텐츠로 하여 출발하는 안정된 One Source Multi Use의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만화를 원천콘텐츠로 하여 <미녀는 괴로워>, <식객>, <타짜>, <궁>, <풀 하우스> 등의 성공적인 전환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다만, 문제는 이와 같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작품들이 얼마나 문화적 가치 창출했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는 점이다. 문화콘텐츠 시장의 규모나 그 파괴력을 고려하고, 특히 문화콘텐츠가 문화적 역량을 콘텐츠화함으로써 재화적 가치를 생산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문화적 가치의 창출은 선택이 아닌 필수조건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번 천웨이동(陳維東)의 《삼국지》 출간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다. 천웨이동을 처음 만나 것은 문화콘텐츠와 문화전통 등을 주제로 개최된 국제학술대회에서였다. 무림의 고수와 같은 인상의 그는 중국 전통문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만화에 대한 열정이 지금도 또렷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그의 중국 전통문화에 대한 열정과 신념은 좌중을 이미 압도하고 있었는데, 특히 중국 고전을 작품 당 80권 정도로 창작하고 있다는 말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중국고전에 대한 깊이와 넓이를 갖지 않고서는 감히 시도할 수 없는 작업이며, 그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력과 자금 등의 단단한 토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해 겨울 우연한 기회로 천진에 있는 그의 회사를 방문한 자리에서 그의 말이 계획이 아니라 진행형이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중국 전통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그의 회사는 매우 인상적인 것이었는데 특히 전통문양의 창문과 다실(茶室)은 그의 중국 전통문화에 대한 사랑을 한눈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미 그는 300여권의 만화를 제작하였으며, 그의 작품은 유럽과 일본을 비롯한 국제시장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천웨이동은 ‘신중국만화’의 창시자이자 이론가라는 점이다. 국내에서도 숱하게 지적되어온 일본 만화의 폐해를 극복하고자 중국의 독자적인 내용과 형식을 통해 중국독자에게 다가서고, 이를 기반으로 세계시장에 중국만화를 알리겠다는 그의 의지가 ‘신중국만화’라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이러한 천웨이동의 노력은 일본 만화에 경사되어 있는 한국 독작들에게 있어서도 또 다른 만화의 가능성을 읽게 해 주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천웨이동의 만화 《삼국지》는 우리 어린이들 책장에 꽂혀있는 조악한 그림과 정보의 학습만화와는 분명하게 구별이 되는 작품이다. 중국전통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삼국지》의 의미를 서두르지 않고 천착해가는 그의 행보는 분명 주목할만한 것이다. 국내에서 《삼국지》의 열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박종화, 김구용, 김홍신, 특히 이문열의 《삼국지》는 1,400만부가 판매된 바 있다. 또한 역사만화의 수작으로 손꼽히는 고우영의 만화 《삼국지》와 《바벨 2세》로 유명한 일본 만화가 요코야마 미츠테루(橫山光輝)의 《삼국지》도 이미 소개된 바 있다. 고우영의 《삼국지》는 살인적인 연재스케줄에도 불구하고 엄혹했던 시대와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비판하며 《삼국지》를 읽어낸 수작이다. 블랙유머로 시대와 소통을 시도했고 용기있게 비판하면서도 극적 긴장을 놓치지 않았던 작품이 그것이다. 이처럼 뛰어난 많은 소설과 탁월했던 만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웨이동의 《삼국지》가 기대되는 것은 ‘신중국만화’의 작품에 대한 낯선 흥미와 그동안 중국 고전을 극화해온 작가의 내공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중국문화와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삼국지》를 읽고 이해할 수 있으며, 동양문화의 보편성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갖지 못하고 어떻게 이 시대를 《삼국지》와 만나게 할 수 있겠는가?
첸웨이동의 《삼국지》은 독특하게 장 구성을 했다. 중심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만화로 극화하고, 그 뒤에 해당 장의 줄거리를 붙이고 이를 통해 생각해볼 것들을 삼국지 기사의 형식으로 첨부한 후, 해당 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고사성어를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의 인물열전은 옛 사서(史書) 편제를 따르면서도 인물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동시에 진행하는 독특한 부분이다. 장대한 스케일의 스토리를 모두 만화로 극화하지 않고 과감한 생략과 절제를 통하여 극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천웨이둥의 혜안이 빛나는 부분이다.
작품을 처음 접한 독자들은 한 면당 칸의 개수에 무척 낯설어 했을 것이다. 일본 만화나 국내 만화와는 다르게 한 면당 칸의 개수를 과감하게 줄임으로써 이야기 진행 속도를 빠르게 하면서 동시에 상대적으로 크게 확보된 칸을 통해 캐릭터의 심리나 매력이 여실히 드러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고량에 의해 수입이 결정되는 기형적인 구조로 인하여 무절제하게 남발되었던 일본식 그림과 칸들에 익숙해 있던 독자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갈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림은 크지만 섬세하고 캐릭터 하나하나의 심리와 성격을 드러내는데 중심을 두고 있는 까닭에 정밀한 구도와 계산된 구성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으로는 정적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러한 느낌은 배경 톤이나 동작선의 남발보다는 인물 그 자체의 표정과 동작을 통하여 움직임을 표현하고 가볍지 않은 동작으로 표현하려는 데서 기인한 것이다. 만화를 진행하면서도 중간에 연표나 각종 병장기에 대한 소개 등을 삽입함으로써 보다 구체적이고 생생한 극화를 만날 수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의 미덕 중 하나다.
만화는 가장 대중적이지만 하위문화로 취급되어 왔다. 선정성과 폭력성으로 질타를 당하는 자극적인 내용, 저급한 그림 수준, 유통되는 미디어의 하위성 등이 그 평가의 근거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구박받으면서도 아직까지 꿋꿋하게 아니 더 파괴력을 갖으며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만화라는 장르 자체가 지닌 생명력이며 동시에 경쟁력일 것이다. 더구나 최근에 영화, 애니메이션, 드라마, 게임, 캐릭터 등의 분야에서 그것들의 근간이 되어줄 스토리텔링의 보고로서 만화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가 천웨이동의 《삼국지》를 만난 것은 행운이다. 문화적 역량과 문화 전통이 지금 이곳에서 빚어내는 문화적 향취를 만화라는 가장 대중적이고 경쟁력 있는 장르를 통하여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전쟁 시대를 사는 지금 이곳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가 쓰는 또 하나의 《삼국지》를 읽는다. 아니 쓰고 있다. 그렇게 쓰고 있는 것이 반드시 《삼국지》가 아니어도 좋다. 천웨이동의 이 작품과 같이 깊이와 향기를 지닌 또 다른 우리의 고전이었으면 좋겠다. 지금 이 작품을 읽는 여러분이 바로 그렇게 써야만할 또 한 사람의 천웨이동이다.
-2008년 천웨이둥, 《삼국지》 발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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