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지금 이곳에서 쓰고 있는 고전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삼국지는 살아있는 텍스트다. 대부분의 고전은 누대에 걸쳐 읽히면서 새로운 의미를 끊임없이 생산한다. 하지만 그것은 읽기와 관련된 것이지 텍스트를 다시 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데 왜 유독 삼국지만은 끊임없이 다시 쓰이고 있는 것일까?


삼국지는 명나라 때 나관중이 쓴 24240()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를 바탕으로 한다. 물론 나관중의 이 작품도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의 삼국지주(三國志註)에 수록된 야사와 잡기를 근거로,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의 줄거리를 중심으로 쓴 작품이다. 오늘날 전하는 삼국지는 청나라 때 모종강이 읽기 쉽게 다시 쓴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관중의 삼국지라고 부른다. 이러한 창작 과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삼국지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당대의 민중들이 요구하는 영웅들을 부각시키고 대중적인 요소들을 탄력적으로 삽입시킴으로써 끊임없이 다시 쓰고 읽히는 생명력을 갖게 된 것이다. 결국 삼국지를 읽으면 그것이 읽히는 시대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민중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요구하는 지도자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등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삼국지에는 그 시대의 열망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삼국지가 영원한 고전으로 다시 창작되는 이유인 것이다.

만화는 가장 대중적인 텍스트이다. 만화는 카툰화법(cartooning)을 주로 사용하며, 글과 그림의 이코노텍스트(econotext)로서 이미지의 연속성(narrative)을 필요조건으로 갖는 장르이다. ()의 객관적 재현보다는 주관적 왜곡을 통해서 전달의 효과를 높이는 카툰화법과 글과 그림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이코노텍스트적인 특성은 대중들의 접근을 용이하였다. 거기에 이야기 하는 인간(Homo Narran)’의 특성을 부각시킨 이미지의 연속성에 의한 서사(narrative)의 확보는 만화가 가장 대중적인 장르가 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최근 만화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폭발적이다. 그것은 크게 두 방향으로 드러나고 있는데, 하나는 먼 나라 이웃나라,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신화, 마법 천자문류의 학습만화시장의 급성장에 따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화의 스토리텔링의 원천소스로서 만화의 가치를 재인식하고 그 원작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그것이다. 20권까지 15백만 부 이상의 경이적인 판매량을 보인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신화14권까지 700만 부 이상의 판매량을 보인 마법 천자문의 예를 살펴보자. 이 두 작품은 모두 학습만화의 컨셉을 유지하면서 스토리텔링의 원천소스는 고전에서 가져왔다.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신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 그 자체를 학습만화의 형태로 바꾼 것이며, 마법 천자문은 중국고전 서유기의 스토리라인 위에서 천자문을 학습하는 방식이다.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성공은 학습만화라는 틈새 콘텐츠에 주목하고, 이윤기를 중심으로 불고 있던 신화 열풍을 중심 트렌드로 파악하여 그것을 콘텐츠 개발에 적극 반영한 결과였다. 신화를 원천콘텐츠로 하고 있는 이 경우는 학습만화를 통해 대중성을 검증하고, 이를 기반으로 애니메이션 <올림푸스 가디언>으로 발전적 변환을 시도함으로써 국내에서 장르 간 시너지 효과(cross over effects)를 성공적으로 극대화한 대표적인 콘텐츠가 되었다. 마법 천자문의 경우도 한자교육의 수요를 파악하고 보다 효과적인 학습형태로서 학습만화를 주목하였으며, 특히 드래곤 볼등으로 전환(adaptation)에 성공한 바 있는 서유기의 스토리라인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극적 흥미를 극대화한 결과였다. 더구나 이 두 작품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만화를 원천콘텐츠로하여 애니메이션(올림푸스 가디언, 태극 천자문)과 각종 뮤지컬 및 체험전 등으로 거점콘텐츠화함으로써 모범적인 One Source Multi Use의 사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원천콘텐츠는 독립된 콘텐츠로서 대중성을 검증 받아 이미 브랜드 가치를 확보한 콘텐츠를 말하는데, 장르 간 Multi Use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요소들을 콘텐츠 내부에 포함하고 있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원천 콘텐츠로서 활용되는 만화, 소설, 신화 등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대중성 검증이 가능해야하기 때문에, 그 자체 콘텐츠로서의 완성도를 확보하고 있어야만 한다. 반면, 거점콘텐츠는 원천콘텐츠를 기반으로 대중적인 호응을 기대할 수 있는 콘텐츠로 전환한 것을 말한다. 즉 매체와 장르의 확대를 통하여 Target의 확장을 도모할 수 있는 콘텐츠로 전환을 꾀하는 것으로 대중적인 호응은 필수적이다. 대중적인 호응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의 접근이 손쉬운 매체와 장르를 택해야 하기 때문에 이에 따른 많은 변환비용(Conversion Cost)을 요구하고 동시에 그만큼의 risk도 증대되는 것이다. 따라서 거점 콘텐츠의 경우 Target의 규모와 범위, 수평적/수직적 Multi Use의 활성화 기대 정도, 콘텐츠 자체의 대중성 확보 방안 등이 성패를 좌우하는 중심 요소이다. 거점콘텐츠는 기획단계에서 메인수익 window 선정, 수평적 Multi Use의 노출 시기와 빈도, 수직적 Multi Use의 다양성, 콘텐츠 브랜드 관리 방안 등에 대한 섬세한 고려가 요구되는 것이다. 원천콘텐츠를 거점콘텐츠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환의 목적에 부응하는 전략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만화는 원천콘텐츠로서 미덕을 골고루 갖춘 장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스토리텔링의 대중성을 검증할 수 있고, 그림으로 구체화되기 때문에 애니메이션, 영화, 드라마, 게임, 캐릭터 등으로의 장르 간 전환이 용이하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의 경우 대부분의 콘텐츠가 만화를 원천콘텐츠로 하여 출발하는 안정된 One Source Multi Use의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만화를 원천콘텐츠로 하여 <미녀는 괴로워>, <식객>, <타짜>, <>, <풀 하우스> 등의 성공적인 전환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다만, 문제는 이와 같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작품들이 얼마나 문화적 가치 창출했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는 점이다. 문화콘텐츠 시장의 규모나 그 파괴력을 고려하고, 특히 문화콘텐츠가 문화적 역량을 콘텐츠화함으로써 재화적 가치를 생산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문화적 가치의 창출은 선택이 아닌 필수조건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번 천웨이동(陳維東)삼국지출간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다. 천웨이동을 처음 만나 것은 문화콘텐츠와 문화전통 등을 주제로 개최된 국제학술대회에서였다. 무림의 고수와 같은 인상의 그는 중국 전통문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만화에 대한 열정이 지금도 또렷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그의 중국 전통문화에 대한 열정과 신념은 좌중을 이미 압도하고 있었는데, 특히 중국 고전을 작품 당 80권 정도로 창작하고 있다는 말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중국고전에 대한 깊이와 넓이를 갖지 않고서는 감히 시도할 수 없는 작업이며, 그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력과 자금 등의 단단한 토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해 겨울 우연한 기회로 천진에 있는 그의 회사를 방문한 자리에서 그의 말이 계획이 아니라 진행형이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중국 전통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그의 회사는 매우 인상적인 것이었는데 특히 전통문양의 창문과 다실(茶室)은 그의 중국 전통문화에 대한 사랑을 한눈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미 그는 300여권의 만화를 제작하였으며, 그의 작품은 유럽과 일본을 비롯한 국제시장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천웨이동은 신중국만화의 창시자이자 이론가라는 점이다. 국내에서도 숱하게 지적되어온 일본 만화의 폐해를 극복하고자 중국의 독자적인 내용과 형식을 통해 중국독자에게 다가서고, 이를 기반으로 세계시장에 중국만화를 알리겠다는 그의 의지가 신중국만화라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이러한 천웨이동의 노력은 일본 만화에 경사되어 있는 한국 독작들에게 있어서도 또 다른 만화의 가능성을 읽게 해 주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천웨이동의 만화 삼국지는 우리 어린이들 책장에 꽂혀있는 조악한 그림과 정보의 학습만화와는 분명하게 구별이 되는 작품이다. 중국전통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삼국지의 의미를 서두르지 않고 천착해가는 그의 행보는 분명 주목할만한 것이다. 국내에서 삼국지의 열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박종화, 김구용, 김홍신, 특히 이문열의 삼국지1,400만부가 판매된 바 있다. 또한 역사만화의 수작으로 손꼽히는 고우영의 만화 삼국지바벨 2로 유명한 일본 만화가 요코야마 미츠테루(橫山光輝)삼국지도 이미 소개된 바 있다. 고우영의 삼국지는 살인적인 연재스케줄에도 불구하고 엄혹했던 시대와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비판하며 삼국지를 읽어낸 수작이다. 블랙유머로 시대와 소통을 시도했고 용기있게 비판하면서도 극적 긴장을 놓치지 않았던 작품이 그것이다. 이처럼 뛰어난 많은 소설과 탁월했던 만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웨이동의 삼국지가 기대되는 것은 신중국만화의 작품에 대한 낯선 흥미와 그동안 중국 고전을 극화해온 작가의 내공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중국문화와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삼국지를 읽고 이해할 수 있으며, 동양문화의 보편성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갖지 못하고 어떻게 이 시대를 삼국지와 만나게 할 수 있겠는가?

첸웨이동의 삼국지은 독특하게 장 구성을 했다. 중심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만화로 극화하고, 그 뒤에 해당 장의 줄거리를 붙이고 이를 통해 생각해볼 것들을 삼국지 기사의 형식으로 첨부한 후, 해당 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고사성어를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의 인물열전은 옛 사서(史書) 편제를 따르면서도 인물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동시에 진행하는 독특한 부분이다. 장대한 스케일의 스토리를 모두 만화로 극화하지 않고 과감한 생략과 절제를 통하여 극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천웨이둥의 혜안이 빛나는 부분이다.

작품을 처음 접한 독자들은 한 면당 칸의 개수에 무척 낯설어 했을 것이다. 일본 만화나 국내 만화와는 다르게 한 면당 칸의 개수를 과감하게 줄임으로써 이야기 진행 속도를 빠르게 하면서 동시에 상대적으로 크게 확보된 칸을 통해 캐릭터의 심리나 매력이 여실히 드러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고량에 의해 수입이 결정되는 기형적인 구조로 인하여 무절제하게 남발되었던 일본식 그림과 칸들에 익숙해 있던 독자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갈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림은 크지만 섬세하고 캐릭터 하나하나의 심리와 성격을 드러내는데 중심을 두고 있는 까닭에 정밀한 구도와 계산된 구성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으로는 정적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러한 느낌은 배경 톤이나 동작선의 남발보다는 인물 그 자체의 표정과 동작을 통하여 움직임을 표현하고 가볍지 않은 동작으로 표현하려는 데서 기인한 것이다. 만화를 진행하면서도 중간에 연표나 각종 병장기에 대한 소개 등을 삽입함으로써 보다 구체적이고 생생한 극화를 만날 수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의 미덕 중 하나다.

만화는 가장 대중적이지만 하위문화로 취급되어 왔다. 선정성과 폭력성으로 질타를 당하는 자극적인 내용, 저급한 그림 수준, 유통되는 미디어의 하위성 등이 그 평가의 근거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구박받으면서도 아직까지 꿋꿋하게 아니 더 파괴력을 갖으며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만화라는 장르 자체가 지닌 생명력이며 동시에 경쟁력일 것이다. 더구나 최근에 영화, 애니메이션, 드라마, 게임, 캐릭터 등의 분야에서 그것들의 근간이 되어줄 스토리텔링의 보고로서 만화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가 천웨이동의 삼국지를 만난 것은 행운이다. 문화적 역량과 문화 전통이 지금 이곳에서 빚어내는 문화적 향취를 만화라는 가장 대중적이고 경쟁력 있는 장르를 통하여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전쟁 시대를 사는 지금 이곳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가 쓰는 또 하나의 삼국지를 읽는다. 아니 쓰고 있다. 그렇게 쓰고 있는 것이 반드시 삼국지가 아니어도 좋다. 천웨이동의 이 작품과 같이 깊이와 향기를 지닌 또 다른 우리의 고전이었으면 좋겠다. 지금 이 작품을 읽는 여러분이 바로 그렇게 써야만할 또 한 사람의 천웨이동이다.

-2008년 천웨이둥, 삼국지》 발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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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과 상실을 대면하는 법

유디트 바니스텐달,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미메시스, 2013.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소멸은 사라지는 자의 몫이고 상실은 남겨진 자의 몫이다. 유디트 바니스텐달의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는 죽음을 둘러싼 소멸과 상실의 기록이다. 죽음은 거부할 수 없는 보편성과 생명으로부터 기원하는 개별성의 이율배반적 긴장 안에 있다. 언제든 함께할 수 있지만 딱 한 번의 체험만 허락되는 것이기에 두려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막막함이 죽음이라는 단어에는 깃들어 있다. 그래서인지 죽음은 그것을 맞닥뜨린 사람의 몫일뿐만 아니라 그를 지켜보아야 하는 사람들의 몫이 되고는 한다. 하여 죽음은 늘 함께하지만 한두 걸음 비껴 서있는 듯하고, 현재일 때 유효하지만 과거이거나 미래로 다가온다.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각자의 위치에서 생각하고 수용하는 과정의 이야기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죽음의 어김없는 실체와 구체를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때론 절절하게, 때론 낭만적으로 아름답게 그려냄으로써 죽음의 충만한 의미값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 미덕의 기반에는 후두암으로 죽어가는 다비드의 투병과 죽음을 대면하는 미리암, 타마르, 파울라, 다비드의 시점이 있다. 각자의 시선으로 다비드의 죽음을 사유하고 수납하려는 시도는 탁월한 선택이다.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굳이 죽음이라는 단어를 제목에서 빼놓고, 아버지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미리암과 타마르의 시점에 더욱 비중을 두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더구나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 작품은 목차 대신 다비드를 중심으로 한 가계도롤 제시하고 있다. 다비드의 죽음과 관련된 기록에 그보다 확실한 소멸과 상실의 계보도가 또 있을까?

이 작품에서 읽어야 할 것은 단지 소멸과 상실만이 아니라 그것의 어우러짐이 빚어내는 진실의 조각들이다. 그 진실의 조각들은 분명하고 일관된 메시지를 발신한다기보다는 모호하고 변덕스럽게 드러나거나 사라진다. 그것은 죽음을 대면한 삶의 모습이 그러한 까닭이며 삶을 둘러싼 죽음의 진면목이 그러한 까닭이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고, 누구도 돌이킬 수 없다는 유일한 사실과 삶의 맞은편에 있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삶에 간섭하고 개입하려드는 모순된, 그 온통의 확실성으로 우리 곁을 떠돌고 있다는 자명함. 그 막막하고 두려운 확실성 앞에서 비로소 실존의 충만한 진실을 만나게다.


후두암에 걸린 아버지(다비드)의 투병과 죽음을 대면하는 두 딸과 아내 그리고 자기 자신의 상처와 사랑을 이 작품은 이야기한다. 과장된 감정으로 죽음의 고통과 슬픔을 어둡게만 그리기보다는 담담하지만 속 깊게 죽음이라는 현실을 만나게 한다. 그것은 상처나 슬픔보다는 오히려 치유나 사랑에 가까워보인다. 후두암 발병 사실을 아버지로부터 듣는 미리암과 우연하게 듣게 되는 타마르, 그것을 유머러스하게(아빠한테는 손녀만 중요해. 우리도 소중한 딸이라고요) 표현하는 딸이나 어린 타마르를 안심시키는 아버지의 모습(그림1)은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죽음을 담담하게 배워가며 수납하는 아홉 살 타마르의 이야기는 동화 같은 발랄함과 아련함을 가지고 있다. 친구 맥스와 함께 아빠를 미라로 만들어 살리겠다거나, 풍선에 매달아 편지를 보낸다고 믿거나 인어에게 아빠와 죽음이라는 말의 뜻을 풀이해주거나, 맥스와 함께 썰매를 끌고 병원에 오는 장면은 이 작품이 죽음으로만 경사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준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대면해야하는 가족의 이야기가 과도하게 감상적이거나 일방적으로 비관적이지 않고 따듯하고 진솔하다.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가 죽음에 대한 따듯한 진실을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의 시각이 아니라 모두의 시각으로, 각자의 관점으로 그것을 수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과 관련된 슬픔은 개별적이고 실존적이다. 누군가의 죽음 그 자체가 슬픈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와 관계되어 있고, 죽음이 실체로서 내게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탓이다. 죽음으로부터의 슬픔은 풍화되지 않고 점점 더 그것이 오롯한 자신만의 몫이며, 자신에게 닿기 전에는 결코 멈추지 않고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할뿐이다. 수납할 수밖에 없음을 타자의 죽음을 통하여 절실하게 느끼는 순간, 그것은 슬픔이라기보다는 절절한 현실, 절박한 현재, 적막한 고독이 된다. 그것을 통해 깨닫는 처연한 시간의 연민과 연민을 넘어서는 고요한 평안을 이 작품에서 만날 수 있다.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에서는 루이즈-타마르-미리암-파울라-다비드를 통해 생애 전주기의 연령으로 죽음을 대면하게 한다. 또한 후두암 발병소식과 루이즈의 탄생을 연결함으로써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그리고, 그 끝나지 않을 순환으로 영원을, 영원으로 모든 순간의 소중함을 이야기한다. 피할 수 없는 누구나의 상수항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슬픔보다는 오히려 그 맞은편에 있는 삶의 매순간의 소중함, 그 순간을 채워내야할 위로와 사랑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부각시킨다. 정작 두려워해야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순간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헛되이 시간을 보내거나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아니겠는가?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은 아름답고 서정적인 그림에 있다. 그것은 우아하면서도 발랄하고, 내면적 깊이와 역동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오브제의 과감한 생략과 선택, 캐릭터의 상황과 심리에 따라 자유롭게 변화하는 선과 색의 조화는 자칫 무겁거나 우울해질 수 있는 이야기의 무게와 속도를 조절하고 깊은 정서적 울림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작품 전체를 관류하는 일관된 분위기나 캐릭터별로 변별되는 색이나 선이라기보다는 개개의 캐릭터가 처한 상황이나 심리에 부합하는 선과 색의 구사를 선택했다. 이 작품에서 개개의 캐릭터와 그가 처한 상황이나 심리의 조합이 다양한 만큼 선과 색의 구사는 자유롭다. 분명하고 간결한 선으로 묘사한 상황과 흐릿하거나 여러 번 덧칠한 듯한 선으로 묘사한 장면만 비교해보아도 텍스트 전체의 서사적 맥락을 따갈 수 있을 정도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주장처럼 애니메이션은 움직임만으로도 즐거움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만화는 그림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움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만화의 고유한 문법에 최적화된 그림이 주는 즐거움은 다양한 방식의 자유로운 표현을 통해서다. 일상을 낯선 방식으로 재정의하여 자동화된 인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시도가 만화의 기저에 깔린 예술적 요구라면 그림은 무엇보다 중요한 표현 기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디트 바니스텐달의 그림은 주목할 만하다. 사실적인 묘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표현의 다양한 영역이 지속적으로 탐색되고 있는 그의 그림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풍성하고 미학적이다. <그림 3>을 보면 파울라가 다비드를 보내는 마지막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의 중심은 파울라에 두고 있지만 내레이션은 다비드에게 할애하고, 파울라의 움직임은 최소화하지만 다비드의 내레이션은 담백하지만 절절하게 울리게 하는 이러한 묘사는 정서적 울림의 깊이는 물론 공감을 부른다. 아울러 텍스트의 전체를 함께해온 독자들의 슬픔과 우울을 위로하고 있지 않은가?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말은 얼마나 감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레토릭인가라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는 내내 그것이 얼마나 경직되고 편협한 생각이었는지 느끼게 되었다. 거부할 수 없다는, 벗어날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수납하고 준비할 것이냐가 아닐까? 죽음이라는 이별이 단지 슬프거나 두렵지만은 않게 매순간을 긍정하고 그 위에 자신의 삶을 포개어 위로하며 사랑할 수는 없을까? 죽음 앞에 초라해지는 것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아니라 삶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 사랑해야하는 것들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 시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목소리를 잃고 더 이상 어떤 대화도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메모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다비드의 절절함은 늘 무의미한 말을 숱하게 쏟아내면서도 정작 전하지 못하는 사랑이나 위로의 말들에 닿아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한다. 당신의 죽음은 어떤 모습으로 어디쯤 와 있는가? 그래서 당신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만화 규장각> 201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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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상실의 닻 혹은 덫

제프 르미어, 수중 용접공미메시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가지고 있는 것은 잃은 것의 맞짝이고, 기억하는 것은 잊은 것의 맞짝이다. 잃은 것은 찾으려 하고 잊은 것은 기억하려 애를 쓰지만, 정작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잃은 것을 찾으려하고 잊은 것을 기억해내려 하는 것은 가지고 있는 것과 기억하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의미가 있는 행위다. 잃은 것과 잊은 것을 찾고 상기한다한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 모든 일들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제프 르미어의 수중 용접공은 정체모를 환상이 소환하는 잃어버린/잊어버린 것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잃어버린/잊어버린 것이 소환한 것은 단지 아버지나 회중시계에 대한 기억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것들에 집착함으로써 외면하려 했던 지금 이곳의 삶이다. 시추선에서 수중 용접공으로 일하는 잭 조지프는 오롯이 혼자일 수밖에 없는 해저에서 정체모를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해저에 있는 잭에게는 너무도 절박하고 생생했던 순간 지상에서는 사고로 인지된다. 정체모를 소리가 소환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의 죽음과 사라진 회중시계에 관한 것이었다.

바다 속 보물을 찾으면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것이라며 현실은 크게 개의치 않고 수중 탐사에만 몰두 하던 아버지의 모습은 만삭인 아내를 홀로 두고 맹목적으로 일과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집착하는 잭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보물과 일에 대한 몰두라기보다는 오히려 지금 이곳의 일상으로부터의 도피에 가깝다. 누군가의 남편이 되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는 부담감, 그것은 단지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된다는 의미를 넘어서는 책임감에 관한 것이다. 가장이든 아버지든 간에 그것은 나를 중심으로 했던 욕망을 괄호 속에 묶고 한층 성숙해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스스로의 성숙도나 책임감에 확신을 갖지 못했던 아버지나 곧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잭의 현실에서 조금 비껴난 행동들은 일종의 방어기제와 같다. 가정을 이루고 누군가의 아버지가 됨으로서 경제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아이의 삶을 지탱해주고 준거가 되어야 한다는 묵직한 책임감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욕망이 스스로 합리화시킬 수 있는 명분을 보물탐사와 수중용접에서 찾은 것이다. 잭이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갑자기 해저에서 아버지의 기억을 소환한 까닭이다.

잭은 수중의 절대 고독 속에서 일종의 환청과 환각으로 어린 시절의 자신과 그 시절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만난다. 그 과정에서 잭은 아버지의 죽음과 회중시계의 연관 고리를 찾고, 아버지 죽음의 또 다른 원인이 자신에게 있었음을 깨닫는다. 아울러 그것은 잭이 몰두하던 해저, 잠수, , 과거 등으로부터 지금 이곳의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다. 바로 그 순간이 텍스트 전체에 걸쳐 아버지와 변주된 데칼코마니처럼 유사성을 보이던 잭이 아버지와 완전히 분리되는 순간이며 동시에 아버지와 함께하던 어린 시절의 자신과 분리를 통해 성장하는 순간이다. 이러한 분리는 지금 이곳의 삶에 대한 직시이며, 보다 성숙한 자아로서 현실 수납을 의미한다.

수중 용접공에서는 집/시추선, 육지/수중, 현재/과거의 분리가 선명하다. 전자가 현실의 질서라면 후자는 아버지의 질서로 대변되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며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둔 잭 자신만의 세계이다. 아버지는 보물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현실과 거리를 두었지만 잭은 자신의 일에 몰두한다. 잭의 그런 모습은 현실에 충실한 듯 보이지만 아버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와 잭이 찾는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외면하려는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 다만 잭의 경우는 그러한 외면의 동기 저변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이 죄책감이 있었다는 것은 작품 뒤에서 발견할 수 있다. 결국 아버지는 끝까지 보물찾기를 이야기하지만 그가 우선 찾아야 했던 것은 그가 가장 사랑했던 보물인 아들 잭이 좋아하는 회중시계였다는 사실이 절묘한 메타포를 만들어낸다. 아버지의 보물찾기가 침몰한 스페인함선의 금화들이 아니라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단순화한다면 지극히 소박한 서사에 머물 뿐이겠지만, 그것을 아들 잭의 출산 즈음에 환상으로 연결함으로써 서사의 울림을 다양화한다. 자칫 잘못 읽으면 이 작품은 집/시추선, 육지/수중, 현재/과거의 이분적인 구도에서 전자만을 긍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아버지와 아들 잭의 데칼코마니 구도와 잭이 체험하는 환상의 내용을 연결해보면 양자가 비로소 잭의 온전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치 닻(anchor)이 배가 떠내려가지 않고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게 도와주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것이 자유롭게 떠날 수 없는 덫(snare)이 되기도 한다는 삶의 이율배반(antinomy)을 이해할 때, 그 이해 위에서 스스로 성인으로서 온전한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흥미로운 것은 수중 용접공을 읽으며 강도하의 큐브릭과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이 떠올랐다. 강도하의 큐브릭에서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미우의 죄의식이 만들어낸 자기방어기제를 잭의 회중시계에 대한 기억에서 떠올렸다면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의 과잉일까?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에서처럼 소중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찾는 과정은 마치 미스터리를 풀 듯 텍스트의 마지막까지 긴장을 유지함으로써 극적재미를 배가시킨다.

이 작품은 작화 면에서 상당히 과감한 시도를 한다. 텍스트 전체를 하나의 작화스타일로 유지하기보다는 장면과 상황에 적합한 자유로운 작화스타일을 선택하고 있다. 이것은 장면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서사 전체의 흐름을 작가 스스로 제어할 수 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며 시도다. 거기에 대사의 많고/적음이나 완급에 맞추어 작화스타일을 선택하고 있는 점도 무척 매력적이다. 이러한 작화스타일은 텍스트 전체를 잭과 동반자적 시점으로 전개하는 과정에서 긴장의 유지뿐만 아니라 서사에 대한 몰입에 크게 기여한다.


아버지나 아버지와 관련된 기억들이나 그것을 찾아가는 잭의 모습이 수직 구도로 구현되고 있다면 현실이나 일상은 수평구도를 선호하고 있는 것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다. 특히 현재의 삶, 자신을 기다리는 일상을 스스로 발견하는 장면(196-197)의 연출은 백미다. 시추선을 향해 나아가는 잭을 중앙에 배치하고 Z축을 중심으로 설정하고 동시에 자신의 아이와 함께하게 될 장면을 X축으로 설정함으로써 잭의 깨달음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출은 현재의 혼란스러운 잭 자신을 Y축으로 중심에 두고 과거의 아버지와 자신을 X축으로 연결하여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는 장면(112-113)에서 시도하여 학습하게 함으로써 그 효과를 배가한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와 화해하고(207)를 그를 수면위로 끌고 올라오는 장면(212)은 또 얼마나 환상적인 연출인가? 회중시계와 아버지 죽음을 연결시켜가는 과정에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분리시킴으로써 지금 잭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만들고, 회중시계를 매개로 분리되었던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를 화해하게 함으로써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와 어떻게 돌아와야 하는지를 열려주는 효과적인 연출이기 때문이다.

발문에서 데이먼 린들로프가 환상특급 운운한 것은 오히려 텍스트 리터러시에 장애가 된다. 환상적인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이 환상특급이 주는 분위기나 효과를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잭의 내면심리에 집중하여 읽어가는 것이 보다 현명한 일이 될 것이다. 자신이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시기에 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소환함으로써 아버지의 죽음의 비밀을 이해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함으로써 아버지의 기억으로부터는 자유로워지는 다소 안정적인 서사구조와 보수적인 주제의식을 지향하고 있는 까닭이다.

수중 용접공을 읽는 내내 박흥용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 등장하는 기저귀의 메타포가 떠올랐다. 사랑은 빨래하는 어머니가 아가의 허리춤에 매어둔 기저귀처럼 보호하는 것인지 구속하는 것인지, 그것이 닻인지 덫인지? “……이 모든 게 내 잘못이었던 거야.”(188)라고 깨닫는 장면의 배경이 러스티 앵커인 것을 근거로 수중 용접공이 닻에 비중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면 해석의 과잉일까? 사랑은 역시 어렵다.

<만화규장각> 20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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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비평의 방법론 탐구를 위한 문제 제기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방법론 탐구, 수용과 극복의 이율배반적 시도

 

방법론에 관한 탐구는 연구 대상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모색하고, 기존의 영역과 새로운 지평 사이의 실체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다. 이러한 시도는 기존의 논리적 토대 위에서 그것을 넘어서야만 하는 이율배반적인 긴장을 내포한다. 이율배반적 긴장은 방법론을 탐구하는 내내 연구 대상의 실체가 무엇이며, 어떻게 기능하는가에서 출발해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규명/갱신의 연속이다. 물론 여기서 연구 대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생산-유통-향유되는 생태계를 전제로 해야 한다. 생태계라는 상호유기적인 거시구조 안에서 생산 주체, 유통 구조, 향유 양상의 미시구조를 파악할 수 있을 때, 이 세 요소가 상호 연동함으로써 연출하는 총체적 상관관계의 다양성을 제대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을 신뢰할 수 있다면, 만화비평의 방법론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만화의 정체와 기능 방식에서 출발하여 만화비평의 목적 및 방법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안을 각 구성 요소의 상관망을 통해서 실천적으로 규명해야만 한다.

 

만화의 정체, 건강한 개방과 확장의 無限 根力

 

만화의 정체(正體)에 대해 병렬된 이미지들의 연속성으로 구성된 연속예술과 같은 식으로 규범론적으로 정의하거나 카툰화법(cartooning), 글과 그림의 이코노텍스트(iconotext), 이미지의 연속성(narrative) 등을 중심으로 범주론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지극히 현실추수적인 방식이다. 그것은 현재까지의 만화를 재구할 수는 있어도 만화가 지닌 언어와 표현의 건강한 개방성과 총체적 감각을 선택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무한 확장의 가능성을 온전하게 담아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우리 만화는 1) 치열한 작가의식의 창조행위냐 / 가장 저급한 상업문화의 결과물이냐, 2) 현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냐 / 왜곡된 현실의 의미 없는 과잉이냐, 3) 전 연령이 향유 할 수 있는 문화냐 / 아이들만의 하위문화냐, 4) 웹툰은 만화의 독립적인 영역인가 / 하위 영역인가 등등의 논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작위적인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처럼 보이는 이 논란은 후자인 현실태 앞에서 전자는 요원한 당위적 요구 수준을 넘지 못하는 기형적인 형국으로 전개되었다. 오히려 양자는 전자와 후자의 바람직한 긴장을 통해 표현 언어, 구현 방식, 취급 소재, 주제의 깊이, 사회적 맥락과의 상호관계 등을 풍성하게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로 일방적인 산업 종속과 문화 수준의 정체(停滯)를 극복할 수 있어야만 한다.

만화는 창조적인 언어예술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언어는 음성언어나 문자언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 가능한 다양한 언어를 모두 포괄하는 말이다. 샤르트르는 색과 음은 사물이지 기호가 아니라라고 단언하기도 했지만 이것은 문학의 특수성을 부각시키려는 강조화법일 뿐이다. 오히려 만화의 문면/이면을 구성하는 언어, 가시적/비가시적으로 구현하는 언어, 언어 계열체( Paradigme) 간의 결합 방식을 통해 생산되는 새로운 형질의 언어 등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만화의 언어는 매우 다양하며, 거기에 각 언어의 상호 조합까지 고려한다면, 그것은 무한 가능성의 영역이며 지속적인 개방과 확장의 영역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만화의 언어는 글과 그림의 창조적인 결합이라고 소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면, 디지털 문화 환경의 도래 이후 다양한 언어들이 만화로 수렴되고 있는 양상에 주목해야할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수렴의 결과가 만화 자체의 고유한 문법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점도 웹툰의 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지 않은가? 따라서 만화는 언어의 조형과 문법의 갱신을 반복하면서 그 정체의 의미지평은 물론 표현지평까지 지속적으로 개방하고 확장하는 동력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만화가 지닌 언어예술로서의 무한 창조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풍요롭지 못한 것은 만화생태계의 역동성을 만화 안으로 온전히 수렴하지 못한 탓이다. 만화를 구성하는 창작자, 텍스트, 향유자, 유통업자, 플랫폼 등등의 최근 역동적인 행보를 고려할 때, 만화는 자기 정체의 변화에 주목하고 그것이 지향하는 개방성과 확장가능성을 파악하고, 그것을 내부로 수렴함으로써 새로운 정체를 조형해야만 한다. 이와 같이 만화 스스로 새로운 정체성을 구성하려는 시도와 노력은 창작자, 텍스트, 향유자, 유통업자, 플랫폼 등등 모두가 만화생태계의 거시 구조 안에서 총체적 상관망을 형성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 있는 결과를 확보할 수 있다.

만화의 가장 큰 힘은 자유다. ‘질펀하고, 넘쳐흐르고, 흩어지고, 어지러럽다는 만()의 축자적 의미(literal meaning)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만화는 소재나 주제에서부터 구현 언어나 소통 방식에 이르기까지 자유를 지향한다. 이러한 자유의 가장 근본적인 동인은 누가(소통의 주체), 언제(맥락의 시의성), 어디서(상황성), (소통의 원인), 무엇에 관하여(소통의 주제), 어떤 효과를 노려서(기대 반응), 누구(향유자)에게 말하는가라는 소통과 향유의 기본 모델 안에서 최적화 방안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자유로의 지향은 스스로의 구속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경쾌한 변화를 주도한다. 때문에 스스로 구속하지 않는 만화는 경직된 고정태라기보다는 부단히 변화하는 살아있는 모습이어야 한다. 여기서 살아있어야 한다는 말은 만화의 구현 언어, 술화(述話) 방식, 주변 장르와의 관계, 향유자와의 상호작용 방식과 결과, 사회문화적 맥락성 등의 변수가 끊임없이 개입하는 지금 이곳의 상황에서 스스로 최적화 방식을 지속적으로 모색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와 같이 다양한 변수들의 개입과 상호 충돌은 만화의 다의성(多義性), 다층성(多層性), 다성성(多聲性)을 확보해주는 생산적인 결과를 낳는다.

 

만화비평, 의미지평 확장과 가치 평가 사이

 

모든 비평의 시작은 리터러시(literacy). 리터러시는 텍스트와 향유자 간의 가장 적극적인 대화다. 리터러시는 텍스트에 대한 변별적 인식을 바탕으로 텍스트를 읽고, 그것의 내재적 문법 및 세계와의 상관성을 규명하기 위한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대화과정이다. 때문에 리터러시는 비평가가 고유의 관점으로 텍스트를 읽고 평가하는 단선적이고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라 텍스트의 구성 요소 간, 텍스트와 향유자 간, 텍스트와 세계 간, 텍스트와 텍스트 간의 각기 다른 차원과 층위의 대화를 창조적으로 수렴-조합-확장하는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과정이다. 비평은 이와 같은 리터러시의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대화에 출발한다. 축자적인 의미에서 비평은 말 그대로 준거를 마련하여 가치를 발굴하고 평가하는 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만화비평도 리터러시를 토대로 비평의 대상과 관점을 제시하고 텍스트의 가치를 발굴하여 평가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만화비평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만화미학이나 텍스트의 완성도를 귀납적으로 지향하는 것보다 새로운 창작자, 미디어 환경, 독서체험의 변화에 따른 텍스트의 변화를 종합적인 관점에서 각 요소의 층위와 상관망을 개방적인 자세로서 주목해야만 한다. 그러한 개방적인 자세를 바탕으로 텍스트의 가치를 발굴하고 평가함으로써 텍스트의 의미지평 확대하고 거시적으로는 만화미학 개발과 평가의 토대를 마련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다소 거친 일반화가 허용된다면) 만화비평의 대상은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창작자/텍스트/향유자/미디어 등의 문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창작자 중심으로 살펴보면, 작가의 정체성, 작가의 전기적 탐구, 만화미학과 만화수사학 등의 생산중심 미학 탐구, 창작 방법론, 작가와 세계와의 상관성, 작가의 창작 환경 등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텍스트 중심으로 살펴보면 구현 언어의 문제, 서술 미학, 장르의 문제, 다양한 텍스트 이론, 텍스트와 구현 미디어의 관계, 상호텍스트성,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transmedia storytelling), 향유 활성화 전략의 텍스트 내 수렴 여부 등의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향유자 중심의 관점에서 보면 향유 양상, 해석 공동체(interpretive community)의 정체, 수용미학, 해석론, 상호작용의 구조, 팬덤(fandom)의 양상과 생산성 등을 탐구해야 한다. 미디어의 관점에서 보면 미디어의 변화에 따른 구현 언어, 구현 방식, 유통 방식 및 과금(課金) 체계, 최적화 구현 양상 등의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이와 같은 창작자/텍스트/향유자/미디어 구분은 논의의 편의를 위한 것일 뿐, 실제 만화비평에서는 통합적이고 총체적인 양상으로 논의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텍스트 해석 문제에 규명하기 위해서는 텍스트의 구조, 작가심리학, 해석의 체계와 구조, 향유양상, 상호작용의 전개 양상 및 텍스트 수렴 양상, 구현 미디어와 최적화 구현 양상, 기존 만화미학의 수용과 극복 등의 다양한 요소들이 다채로운 상관망을 전제로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글에서 언급한 만화비평의 대상들은 그들 간의 다양한 조합을 통하여 구현도리 뿐만 아니라 하위에 수다한 개별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복잡하고 쉽지 않은 양상을 드러낸다. 거기에 만화비평의 목적과 개별 관점이 개입한다면 그 양상은 더욱 복잡해지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만화비평에서 전체를 온전히 다 말하겠다는 의욕은 일종의 실현 불가능한 과잉이다. 오히려 비평 목적과 대상을 초점화하고 자신의 관점을 분명히 하여 그 안에서의 충실성, 완성도를 추구하는 것이 보다 생산적인 결과를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만화비평의 목적은 미시적으로는 텍스트의 가치를 발굴하고 평가하는 일이며, 거시적으로는 즐겁고 의미 있는 향유 체험을 강화하고, 창작 및 리터러시 능력 향상을 통하여 풍요롭고 건강한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있다. 따라서 만화비평은 항상 텍스트와의 건강한 견제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 하에서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하며, 이러한 건강한 견제와 독립성은 텍스트의 의미지평을 발견-확장하고 만화미학을 지속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지적인 긴장을 유발함으로써 만화의 새로운 지평과 양식을 도전적으로 개척할 수 있다.

만화비평은 만화와의 상보적 긴장을 전제로 한다는 측면에서, 만화 창작-제작-유통-향유의 생태계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만화가 고유의 언어로 허구적인 것을 형상화한 것이고, 허구의 라틴어적 기원이 창안, 발상, 새로운 고안 등을 의미한다고 할 때, 만화비평의 몫은 분명해진다. 허구적인 것을 생산하는 사회문화적 콘텍스트와 동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적실한 언어를 찾았는가? 적실한 언어를 통해 형상화의 차별적인 미학을 창출하고 있는가? 그 차별적 미학은 만화의 새로운 지평에 일조하고 있는가? 이와 같이 비교적 분명해 보이는 만화비평의 몫은 다시 만화 창작-제작-유통-향유의 상관 망으로 환원되어만 한다. 최근 웹툰의 압도적인 전개를 보면, 제작-유통의 지배적인 힘이 창작과 향유의 양상 자체를 강하게 변화시키고 있고, 변화된 창작과 향유의 양상이 다시 제작과 유통을 상호 견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별 요소들의 하위 요소들에 대한 변별적 접근도 요구된다는 점엣 논의의 어려움과 복잡함이 있다. 가령 창작을 규명하기 위해서 텍스트에 구현된 사회문화적 콘텍스트에 주목하기 위해서는 그 성취의 정도와 상관없이 그것이 지닌 특수한 사회문화적 기능양태 안에서 분석하고 평가해야만 하는 것이 그 예이다.

이러한 맥락을 토대로 할 때, 만화비평은 이론비평(theorytical criticism), 실천비평(practical criticism), 메타비평(meta criticism)으로 나누어 전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현재 만화비평이 이렇게 나뉘어 구현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만화비평이 의미 있는 실천으로서 생산적인 결과를 담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비평의 세 양상이 상보적으로 순환하는 구조로 구현되어야만 한다.

이론비평은 창작자와 텍스트를 평가하기 위한 규범을 마련하기 위한 탐구인 동시에 텍스트 분석과 해석의 중심 개념을 합의하고 분석 방식과 해석의 방법론을 마련하기 위한 일련의 작업이다. 만화의 정체와 역할을 중심으로 한 고유의 미학을 찾아가면서 동시에 텍스트의 리터러시 방법과 체계, 사회문화적 맥락의 해석체계, 구현 미디어와의 상관관계 등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구축한다.

실천비평은 텍스트에 대한 섬세한 분석과 이해, 심층구조의 의미에 대한 해석, 텍스트의 가치 발굴 및 의미지평 확장, 텍스트의 완성도에 대한 평가 등으로 구현된다. 실천비평은 객관성을 지향하지만 비평가의 교양, 관점, 세계관, 미학관 등을 토대로 한다는 점에서 주관적인 관점을 내포하고 있어서 양자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그 성패의 첫 요소라 할 수 있다. 또한 실천비평은 이론비평에 의존함으로써 합리성과 체계성을 갖출 수 있고, 이론비평은 실천비평의 결과들이 축적됨으로써 넓이와 깊이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양자는 상보적인 순환관계를 구성한다.

메타비평은 비평의 자의식을 마련하고, 비평의 유효성을 지속적으로 확보하려는 비평에 대한 비평을 말한다. 기존의 실천비평이론비평을 대상으로 그것의 관점, 방법론, 해석체계 등에 대한 이해와 해석 그리고 평가를 수행함으로써 비평의 유효성을 지속적으로 확보하려는 노력이다.

이와 같은 비평의 세 양상이 지금 이곳의 만화비평에서 얼마나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지는 다소 의문이다. 소박한 해설이나 사적 전개의 정리, 신작 소개 수준으로 전개되는 지금 이곳의 만화비평을 고려할 때, 그나마 대부분이 실천비평에 편중되어 있고 본격적인 의미의 이론비평이나 메타비평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건강한 비평담론의 장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학술논문을 중심으로 이론비평과 메타비평의 토대를 만들기 위한 시도가 시작되고 있다는 점은 다행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 역시 해외 이론을 토대로 한 매우 고답적(高踏的)인 양상이기 때문에 웹툰과 같은 최근 만화의 역동적인 전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분명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만화비평의 방법론, ‘따로 또 같이의 다양성

 

만화비평의 본격적인 탐구에 앞서 그것의 방법론에 대한 고민은 전략적으로 매우 유효하다. 이론비평이든, 실천비평이든, 메타비평이든 간에, 그것을 의식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간에 방법론의 전략적 선택은 만화비평에서 가장 필수적인 전제이다. 앞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창작자/텍스트/향유자/미디어의 복잡한 조합과 그 하위 요소들의 무한에 가까운 상관망을 모두 다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은 애초에 가능한 일이 아니며, 또한 전체를 이야기하는 넓이보다 일반적으로 비평은 특정 관점을 렌즈로 하는 선택적 깊이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선택된 방법론들은 텍스트의 총체성을 지향하며, 개개의 방법론이 거시 구조 안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자의식은 확보하고 있어야만 한다.

방법론에 관한 이론은 객관적 인식과 합의 가능한 논증 그리고 납득 가능한 가치 평가를 탐구하고 체계화하려는 논리적 결과물이다. 비평 대상을 독립시켜 변별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논리적 토대를 마련하고, 고유의 내적체계와 논리 준거를 구성해냄으로써 분석과 해석 그리고 평가의 체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구성하고 객관적으로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은 비평이 텍스트와의 끊임없는 대화의 과정이듯, 부단히 조형적으로 파악해야할 성질의 것이다.

본격적으로 만화비평의 방법론을 고민하기 위해서 목적과 방법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만화비평은 만화의 언어적, 구조적 특성을 변별적으로 파악하고, 만화의 의미지평을 확대하고, 그것이 성취한 가치를 발굴하고 평가하기 위한 것이다. 만화비평의 이러한 목적을 염두에 둘 때, 만화비평의 방법론은 그것을 효과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만화비평이 고려해야할 요소들과 전통적인 비평의 방법들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수렴할 것인가의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만화비평의 목적을 고려할 때, 텍스트를 중심으로 사회문화적 맥락과 그것의 향유방식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다른 장르에서 이미 상당한 진척을 이루고 있는 비평이론들도 종합적으로 파악해야만 한다. 그것은 전통적인 비평 이론 위에 역사 비형, 사회학적 비평, 정신분석 비평, 원형 비평, 독자-반은 비평, 형식주의 비평, 구조주의 비평, 포스트모더니즘 비평 등이 될 것이다. 또는 그것을 크게 범주화하여 실증주의 비평, 구조주의 비평, 마르크스주의 비평, 해석학적 비평 등으로 나누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화가 지닌 복합성, 다층성(음향, 단어의 의미, 반영된 현실 요소들, 문체, 장르법칙들, 사회적 맥락과 의미 관련성 등) 등을 염두에 둘 때, 기존의 어떤 이론도 부분적인 분석과 해석에 적합할 뿐, 총체적 양상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분명한 한계를 보이고 있다. 결국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종래의 만화관이나 이론도 정태적 시각에서 역동적인 방향으로 확연하게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소박한 의미에서 전통적인 만화의 내포나 외연이 확충되고 있다는 의미이며, 적극적인 의미로 만화 자체의 뚜렷한 형질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격랑 위에서 만화비평의 자의식에 대한 고민과 그 방법론에 대한 실천적 탐구는 어쩌면 제일 먼저 풀어야할 과제라 할 수 있다.

만화가 문화콘텐츠로서 문화산업의 체제 유지적, 현실 추수적 경향을 내포하고 후기산업사회의 논리에 맹목으로 따라간다는 식의 논리는 당위적이고 이데올로기 중심적 사고다. 중요한 것은 개별 텍스트의 의미생산 구조 및 그것의 향유 구조를 파악하고, 그것이 소통하고 있는 사회문화적 콘텍스트와 상관하여 어떠한 리터러시가 가능한지 살펴보는 것이다. 책읽기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텍스트 향유 체험은 체계화될 수 없다. 언어예술로서 만화는 다양한 비언어적 구현 전술들을 수렴하여 자기화하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만화미학을 토대로 전체적이고 통일적인 규범을 정하는 일은 다소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뢰할만한 전문적인 향유자의 경우에도 주관적 관점을 통해 차별적인 가치를 확보한다는 태생적 이율배반성과 그가 구현하는 비평 양상 역시 그것의 목적, 타깃, 텍스트의 특성에 따라 상이한 양상을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비평가는 1차적으로 향유자로서 주어진 텍스트와 관계하며, 그 텍스트의 의미론적 구조와 잠재적 기능은 향유과정에서 구체화될 뿐이며, 그 결과는 해석적 언술을 통해서 구현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만화비평은 다양한 방식의 제한 없는 다차원성을 전제해야만 한다. 다만, 만화비평의 실천을 통해서 총체적 언어를 제공하고 텍스트를 새로운 소통의 탐험적 결과물로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만화가 지닌 근원적인 의미론적 중의성과 구현 전략의 자유로움, 예측불가능성은 향유하는 향유자들을 매료시키는 가장 강력한 기제 중에 하나다.

만화비평에서 텍스트와 향유자 간의 대화성, 과정성, 개방성은 상호주관성의 차원을 지속적으로 주목해야만 한다. 상호대등하고 독립적인 존재로서 입장과 자격에서의 대화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는 간주간성은 대화의 사회문화적 콘텍스트와 윤리적 측면에서도 강조되어야 한다. 리터러시의 구성요소인 인지-해석-평가의 상관적 체계를 구현하는 맥락 위에서 텍스트 고유의 특수성을 확보하여 미학적, 현실 반영적, 향유론적 경험의 체계와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만화비평은 만화의 리터러시 맥락 위에서 파악한 분석과 해석은 심미적 이해를 거쳐 역사적, 사회문화적 인식을 확장시킬 수 있는 탄력과 개방 그리고 확장 가능성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언어예술로서 만화의 소통이 일반소통과 다른 것은 그것이 정보와 미학의 잉여성과 특수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학적 체험이나 역사적 경험 그리고 사회문화적 반영의 컨텍스는 기존 질서에 대한 종속과 동시에 저항을 변증법적으로 전개해온 결과다. 더구나 새로운 만화적 소통에서 개방성이 최고의 미덕으로 꼽히는 시점에서 그것의 끊임없는 갱신성과 과정성은 창작의 새로운 동력을 제공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재의 만화비평은 텍스트 해석의 마지막 지평은 의미가 아니고 텍스트를 해석할 수 있게 해주는 담론 구조이며, 평가의 준거는 규범적 완성도가 아니라 개별 텍스트의 변별적 특성과 그것의 구현 정도에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만화생태계의 개별 구성요소와 그 전체의 구조 그리고 그들 간의 콘텍스트를 종합적으로 관찰 할 수 있을 때, 만화비평의 총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 이상의 전체 콘텍스트 위에서 분석된 개별 정보는 계기화된 의미잠재력을 지닐 수 있고, 그 잠재력의 구현태가 텍스트의 의미지평을 확장하게 될 것이고, 다양한 구현 전략은 고유의 문법을 형성하는 특유의 향유구조를 창출할 것이다. 이러한 향유구조 위에 앞으로의 만화, 그리고 만화비평은 서게 될 것이다. 따라서 만화비평의 방법론 역시 이러한 맥락성을 고려한 자의식이 필수다.

이 글은 앞으로 만화비평의 다양한 양상을 점검하고, 그것이 새로운 만화문법과 만화형질에 최적화될 수 있는 방안을 탐구할 것이다. 이러한 탐구는 만화비평의 변별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만화비평가의 자의식이 차별적 미학으로 전개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할 것이다. 문학, 영화, 연극, 미술, 음악 등 주변 장르에 축적되어온 비평이론과 방법론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필요한 요소를 어떻게 벤치마킹할지에 대하여실천적인 고민도 병행해야하는 고단한 작업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만화의 장르적 차별성과 정체성을 어떻게 확보할지에 대한 지속적인 모색과 만화비평의 고유성을 확보하기 위한 개방적인 시도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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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비평, 정체와 역할 그리고 변별성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이 글은 지금 이곳 만화의 변화에 적극 대응하고 선도할 수 있는 만화비평론을 구성하기 위한 시론(試論)의 성격을 지닌다. 기존의 해설중심의 의전비평, 주례사 비평이 아니라 도발적인 문제제기와 무모할 정도의 다채로운 시도를 통하여 독립적인 텍스트로서 즐길 수 있는 만화비평을 생산하고, 그 과정에서 보다 생산적이고 실천적인 형태의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 역동적인 만화담론의 장()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소란스럽고 다채로운 그래서 살아있는 만화담론을 생산하기 위한 만화비평의 시론을 도모한다.

 

 

1. 만화비평의 구조적 부재

 

다소 도발적인 문제 제기일지는 몰라도 만화비평은 부재중이다. 열정적으로 비평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비평가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만화비평은 구조화된 침묵이거나 부재다. 만화비평의 정체, 방법론, 역할 등에 대한 뚜렷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느냐/없느냐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만화비평이 신뢰할만한 매체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양적인 측면이나 질적인 측면에서 만화와 생산적인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웹툰을 포함한 만화산업 전체의 폭발적인 성장내지 변화에 비추어 본다면 만화비평의 오늘은 차라리 부재에 가깝다.

비평은 콘텐츠와 유기적인 상관속에서 긴장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그 존재 가치를 확보하며 상호 성장하는 것인데, 콘텐츠의 성장만 독주할 뿐 비평이 자기 정체나 역할을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는 어떤 관점에서도 결코 긍정하기 어려운 기형적인 양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최근 영화 등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비평의 형질 변환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겁고 진지한 분석 및 해석 중심의 비평에서 가볍고 쉬운 정보 중심의 비평으로의 전환이거나, 문자 텍스트 중심에서 비평가와 향유자의 직접 만남을 통한 비평방식의 변화이거나 또는 다양한 매체를 통한 새로운 형태의 비평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그것의 긍/부정 가치 평가를 떠나서) 비평의 부재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의 경우에는) 비평으로서의 자기 정체와 역할에 대한 변별적인 인식을 기반으로 하는 만화비평이 선행했다고 보기 어려운 현실임을 고려할 때, ‘지금 이곳에서 만화비평의 침묵은 오히려 부재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실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은 내재적 측면과 외재적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내재적 측면에서는 만화비평에 대한 변별적 자의식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과 만화비평의 토대가 되어야할 만화미학에 대한 탐구가 부족했기 때문에 만화와의 건강한 긴장관계 형성에 실패했다는 점 등을 그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아울러 외재적 측면에서는 만화비평의 생태계를 제대로 구축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전문 발표 매체와 다양한 관점과 이론적 토대를 갖춘 전문가 집단을 지속적으로 육성하고 유지하지 못함으로써 만화와의 비판적 거리 및 권위 확보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금 이곳만화산업 생태계에서 만화비평의 산업적 필요성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점이다. 판매부수로 그 가치를 평가받는 만화산업이나 클릭수나 댓글수로 대중성을 평가받고 있는 웹툰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만화비평 그 자체의 산업적 수요는 미시적 차원에서 결코 높지 않다. 더구나 다양한 플랫폼과 디바이스로 만화의 향유가 가능해짐으로써 향유가 축적되고, 그로 인한 일정 수준의 팬덤(fandom)이 형성됨으로써 향유자는 준전문가 수준의 정보와 지식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향유자들은 블로그나 SNS 등을 통하여 적극적인 형태로 작품에 대한 자유로운 품평을 다양한 차원에서 시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적극적인 형태의 향유를 통하여 비평의 저변이 넓어졌다거나 비평이 민주화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필연적으로 비평의 정체가 모호해지고 그 수준이 하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하여 가뜩이나 그 정체가 분명하지 않았던 만화비평의 정체는 더욱 혼란스러워졌고, 동시에 전문 비평가 집단의 비평에 대한 산업적 차원의 수요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만화비평의 산업적 수요는 현격하게 감소하였고, 그나마도 본격 비평을 전개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원고 분량을 요구하다보니 정치한 분석과 풍부한 해석을 기반으로 하는 심도 있는 비판이나 평가보다는 단순 정보 제공 수준의 비평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지금 이곳 만화 생태계는 이글에서 당위적으로 요구할 분명한 자의식을 지닌 비평을 굳이 요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최초의 만화비평이라고 일컬어지는 1927년 권구현의 <신문 삽화 만평>에서부터 대중문화론과 함께 주목받게 되는 1970년대 김현과 오규원의 비평을 건너 1990년대 만화비평의 대중적 확산에 이르는 과정에 주목해보면, 비평의 부재를 비판하는 현재 상황이 왜 심각한 것인지 알 수 있다. 특히 전문 잡지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양질의 텍스트가 쏟아지던 1990년대 초반을 상기해보자. 대중적인 호응과 다양한 이론적 배경을 지닌 비평가들이 대거 등장하여 (거시적 차원에서 평가해보면 문화연구라는 맥락이었지만) 각자의 관점으로 만화비평을 풍요롭게 생산했고, <스포츠 서울> 신춘문예를 통해 젊은 비평가들이 본격적으로 데뷔함으로써 비평의 황금기를 구가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많던 비평가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토록 풍성했던 관점과 해석의 지평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만화비평에 대한 접근이 단행본 한 권이나 비평 하나 정도 수준의 지속성이라면 아마추어리즘이라는 말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지속성이 보장되지 않은 외재적인 이유는 능히 추측할 수 있다. 전문적인 비평발표 매체가 부족하거나 없었다는 점, 보상이 만족스럽게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 만화비평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조금 더 냉정하게 만화비평의 내재적 측면을 생각해보자. 1990년대 비평의 황금기라고 이야기하던 그 시절이 정말 비평의 황금기였다면, 만화비평의 정체와 역할 그리고 변별적인 특성에 대한 고민이 전개되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만화비평에 대한 분명한 자의식이 전제되지 않고 생산된 비평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사라지고 난 후 만화비평은 다시 원론 수준으로 소박하게 돌아간 것은 아닐까? 더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들은 만화비평이 아니라 문화연구의 일환으로 대중문화, 하위문화의 첨병이라고 회자되는 만화를 선택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들의 비평에서 만화 장르 자체에 대한 도발적인 자의식보다는 만화를 통한 문화비평의 흔적이 더 발견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만화비평의 부재는 단지 비평가들의 비평에 대한 자의식이나 역량이 부족해서 초래된 결과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것은 오히려 만화생태계라는 거시적 차원과 만화비평생태계라는 미시적 차원의 문제가 유기적으로 얽혀있다는 점을 고려한 공시적 접근과 만화비평 역량의 축적 과정이라는 통시적 차원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만 한다. 따라서 만화비평의 부재는 현재적인 문제, 만화비평만의 문제, 비평가만의 문제가 아닌 지극히 종합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의 문제다.

 

 

2. 만화 비평의 정체와 역할 그리고 변별성

 

비평은 차가운 글 읽기따뜻한 의혹의 산물이다. ‘차가운 글 읽기란 섬세하게 작품을 읽는 데서 출발하며, 예리한 푸른 날의 칼로 마지막까지 결을 내는 분석 과정이다. 아울러 따뜻한 의혹이란 푸른 날로 조각 낸 섬세한 결들 속에서 삶의 편린들을 엮고 그 심층적 의미를 파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지금 이곳의 삶을 견제하고 성찰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과정이다. 이 두 행위 모두 텍스트에 대한 뜨거운 애정에서 비롯됨은 물론이다. 이와 같은 차갑고 따뜻한 긴장 속에서 작품의 의미 지평은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삶과의 연관은 자기 증식한다. 그러므로 비평은 텍스트와의 지속적인 대화 과정이다. 그 대화는 텍스트 안으로 스스로의 정체를 성찰하고 밖으로 다른 텍스트와 차이를 규명하여 그 가치를 가늠하고 평가하려는 노력이다. 섬세한 독법으로 꼼꼼하게 텍스트를 분석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텍스트의 깊이를 탐구하고 넓이를 확장하는 지속적인 과정인 이유다.

만화비평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만화의 변별적 특성을 바탕으로 만화비평의 역할과 상관하여 조형적(plastic)인 관점에서 그 변별성을 파악해야 한다. 만화비평의 정체라는 것이 고유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화의 형질 변화와 비평에 요구하는 역할에 따라서 조형적으로 구성해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만화비평의 정체에 대한 고민은 비평가의 만화비평에 대한 자의식의 다른 이름이다. 만화비평가의 자의식은 해당 텍스트를 비평을 해야 할 이유에서 출발하여 만화에 대한 이해와 애정 그리고 향유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기반으로, 텍스트가 놓인 컨텍스트와의 비판적 거리의 긴장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러므로 만화비평에 대한 비평가의 자의식은 지금 이곳 만화에 대한 애정 어린 의혹에서 시작하여 텍스트의 넓이와 깊이를 확보하려는 부단한 긴장이다.

만화비평의 자의식 부재가 초래한 결과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늘 게재할 수 있는 작품이나 비평해야할 작품보다 게재하고 싶어 하고 비평의 대상이 되고 싶은 작품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권위 있는 신뢰할만한 매체에 작품이 실리는 것은 그 자체로 그 작품의 우수성을 인정받는 것이며, 더구나 비평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그러한 효과를 증폭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형 포털이나 출판사의 의뢰에 의한 의전비평이나 주례사 비평은 단기적으로는 성과를 거둘지 모르겠으나 장기적으로는 비평 자체의 권위를 치명적으로 훼손시키는 얄팍한 전술이다. 이와 같이 만화비평에 대한 자의식이 없는 비평의 현재적 양상을 수렴해보면, 대부분 비평가의 관점은 은폐된 채 해설 중심으로 전개되며, 텍스트에 대한 평가가 맹목에 가까운 긍정과 칭찬으로 구성된다.

이와 같은 만화비평에 대한 자의식이 없는 비평으로 인하여 건강한 비평담론 생산이 차단되고, 텍스트에 대한 온전한 평가가 불가능해진다. 이 과정에서 비평가는 스스로 권위를 상실하게 됨으로써 정작 비평이 기능해야 할 상황에서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

1997년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 선정성 논란을 상기해보자. 작가가 필생의 역작으로 야심차게 기획했던 <천국의 신화>가 어처구니없는 선정성 논란에 휩싸였을 때, 비평은 과연 무엇을 했는가? 더구나 만화와 연관하여 가장 많은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선정성에 대한 이론적 연구나 텍스트 중심의 탐구를 통한 선제적 대응은 고사하고 그 어떤 비평도 옹호의 반대논리를 펴지 못하지 않았던가. 과연 비평이 텍스트에 대한 섬세한 읽기와 심도 있는 해석을 진행하고 제대로 된 평가를 내렸었다면, 선정성에 대한 비평의 선제적 탐구가 있었다면,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선정성이라는 소박한 기호에 치명적인 폄훼를 당했을까? 한국을 대표하는 거장이 만화의 비전문가인 20대의 새파란 검사로부터 일본만화를 베낀다는 모욕을 당하고 있었을까? 2012년 귀귀의 <열혈초등학교>가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폭력성 논란에 휩싸였을 때 그것을 적극적으로 옹호할 만큼의 만화 리터러시를 고민했던 비평이 있었는가? 비평이 제몫을 다했다면 <열혈초등학교>의 표면에 드러난 폭력성이 그 자체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고, 그 심층의 메타포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보수언론의 공격을 막아주었을 것이다. 귀귀의 B급 정서와 표현이 그만의 표현 전략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그것이 구체화된 것이 이 텍스트에 드러난 폭력의 컨텍스트였음을 읽어주었어야 했다.

새로운 미디어 플랫폼의 변화와 디바이스의 발전을 소박하게 인식하고 있다가 모바일 만화 시장을 무료화했던 2009년의 네이버 웹툰 논란을 상기해보자. 웹툰시장의 지배적인 사업자인 네이버의 일장적인 앱툰 무료화의 부당성에 대하여 비평은 무슨 의견을 제시했는가? 웹툰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무료라는 기형적인 시장구조를 만든 것도 어이없는 일이지만 심지어 앱툰시장 마저 다시 무료화하는 상황은 만화가 비평을 키우지 않으면 앞으로 또 어떤 일을 당할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2011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나 2015년 레진코믹스 사태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다른 의도로 관심을 환기시키거나 어린이를 볼모로 부모를 위협할 때, 그것의 첫 타겟이 만화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하여 비평은 생태계적 차원에서 고민해야만 한다.

만화비평의 정체는 비평 그 자체를 독립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텍스트로 인정할 때 파악 가능하다. 만화 텍스트를 원천으로 출발했고 매우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지만 만화비평은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즐길 수 있는 독자적인 것이다. 이처럼 비평이 독자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만화 자체의 문법과 대타적(對他的) 상관을 유지해야 하며, 그것을 기반으로 한 차별화 요소들을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만화는 큰 변화의 격랑 속에 놓여 있다. 유통 플랫폼, 과금체계, 디바이스의 변화에 다른 텍스트 구현 및 향유 방식의 변화가 그 변화를 주도하고 있으며, 그 결과 텍스트의 형질변화까지 이끌어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창작의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수용 변용함으로써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나는 반면 비평의 부분에서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다. 지금 이곳 만화의 급변에도 불구하고 비평의 방식이나 태도 그리고 그 메커니즘 자체가 변하지 못함으로써 비평의 지체 현상을 초래한다. 그로 인하여 대형 포털 중심의 웹툰 생태계를 추수할 뿐 웹툰에 대한 비판적 긴장을 형성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더구나 웹툰이 원천콘텐츠로서 각광을 받으면서 모든 평가 기준이 대중적 지지를 드러내는 객관적인 지표에 종속되거나 특정 타겟의 취향을 반복 재생산하는 지극히 소모적인 대중 인정투쟁 양상을 드러낸다. 웹툰 시장에 있어서 대형 포털의 권력화는 단지 원고료를 통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요구하는 취향의 인정투쟁으로부터 발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을 비판적으로 견제하기 위해서는 견실한 비평의 뒷받침이 필요한데, 지금 이곳의 비평은 전혀 그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웹툰 생태계의 기형화, 황폐화를 낳고 있다. 지속적인 위기의 수사가 식상할 정도로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그와 무관하게 위기의 양상은 오히려 노골적으로 본격화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그 주요 원인으로 등장하는 비평의 부재라는 비판은 이제는 충격적일 것도 없는 패배주의를 낳고 그만큼 그 종속도는 더욱 가중될 뿐이다. 만화담론을 활발하게 생산하고, 창작을 촉진하며 그것을 견제해야할 만화비평이 스스로의 몫을 방기함으로써 비평 자체는 물론 만화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만화비평은 부단히 변화하고 있는 만화처럼 변해야 한다. 만화가 변하듯 비평의 정체성도 그 역할에 부응할 수 있는 적극적인 변화와 구성의 노력이 필요하며, 그것의 저류에는 만화비평의 변별성을 확보하려는 의지가 흘러야 한다. 만화비평의 변별성은 만화와 비평의 기계적이 교합이 아니라 만화와 비평이 대타적 긴장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구성하고 발견해 나가야할 무엇이다. 왜곡의 미학, 시간과 공간의 상호교차적 대치, 칸사이의 호흡, 글과 그림의 이코노텍스트, 분절의 연속화에 기반한 서사 구성 등과 같은 만화미학의 기본 요소들은 지속적인 변화의 도정(道程) 위에 있다.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살아있다는 말이다. 만화가 살아있듯 만화비평도 살아있기 위해서는 분명한 자의식을 기반으로 만화와의 생산적인 긴장을 확보해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지금 여기 만화비평의 변별성은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3. 만화 비평, 담론의 장을 키우자

 

건강한 만화비평의 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만화비평 담론(discourse)의 장을 구현해야만 한다. 만화비평 담론은 만화미학과 비평윤리의 결합이 빚어낼 수 있는 역동적인 창의성에서 출발한다. 푸코식으로 표현하자면 담론은 특정 대상이나 개념에 대한 지식을 생성시킴으로써 현실에 관한 설명을 산출하는 언표들의 응집력 있는 자기지시적인 집합체이다. 언표와 규칙의 집합체인 담론은 역사적으로 존재하며 물리적 조건에 따라 변화하며, 그것은 개인들 간의 교환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익명성의 층위에 존재한다. 따라서 만화담론은 기존의 존재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구성에 가까우며 만화비평 담론은 만화담론에 기반한 비평담론을 창의적 결합으로 구성해내야 한다. 건강한 담론이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는 역동적인 충돌과 갈등과정에서 만들어진다고 할 때, 만화비평 담론은 신/, 지배/종속, 올드미디어/뉴미디어, 보수/진보, 존재/당위, /그림, 과장/축소 등과 같은 만화담론의 역동적인 대립쌍들이 비평담론과 화학적 결합과정에서 벌어지는 논란과 논쟁, 승인과 거부, 출현과 사라짐 등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 특히 후기자본주의적 시장질서와 뉴미디어의 상보적 결합이라는 시대의 특성을 적극 반영하려는 전략이 담론의 장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될 수 있는지 진지한 관찰을 통해 모색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지배소로 등장하게 될 향유의 활성화를 전략역시 만화비평의 영역에 망설임 없이 넣어야할 부분이다.

만화비평은 비평이 그렇듯 다양한 요소들이 다양한 층위에서 만나서 비평의 장()을 이룬다. 구현 매체, 유통 플랫폼, 장르분법, 지배적 언어, 사회문화적 공인과지지, 사회적/경제적 보상 등이 다양한 조합으로 결합하며, 비평의 성격에 따라서 구성 요소나 층위를 결정한다. 특히 전제 한 바와 같이 만화의 특성을 전략적으로 선택함으로써 만화비평 스스로의 정체와 역할을 구성하고 이를 통해 변별성을 확보한다.

만화비평의 담론은 만화에 대한 비판과 담론 생산은 물론 특정 사안의 첨병이거나 수호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다양한 맥락과 이론을 수렴해야 한다. 만화담론을 선도하거나 자극에 대한 선제적 대응에 필요한 요소들을 창발적으로 수렴함으로써 현재적 문제는 물론 예견된 갈등에 적극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만화의 현재적 고민은 다양하다. 새롭게 급부상하여 시장지배자로 군림하려는 웹툰과 관련되어서는 그것의 정체와 지향 그리고 기존의 만화와의 차별성 확보, 앱툰과의 변별,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Transmedia Storytelling)의 중심 매개로서의 역할 등은 물론 건강한 생태계 구성을 위한 모색 등이 그것이다. 또한 최근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는 그래픽 노블역시 웹툰과 같은 모색과 탐구의 짐을 지고 있다. 이와 같이 만화를 둘러싼 고민들은 텍스트를 중심으로 한 내재적/외재적 양상으로 드러나고, 텍스트의 완성도뿐만 아니라 콘텐츠로서의 시장 가치 및 확대 방안 등이 모두 포함되는 매우 다양한 양상을 드러낸다. 따라서 만화비평 역시 이러한 다양성에 부응하거나 선도할 수 있는 담론을 포괄해야 한다. 적어도 만화비평이 활성화되고 보다 생산적인 양상으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배제의 시학이 아니라 포괄의 시학에 기반한 수렴적인 담론체계를 지행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만화비평은 만화에 최적화된 비평 방식을 지속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비평이 대상이 다르면 비평의 언어도 달라져야 하고, 무엇보다 개개의 비평은 비평 대상이 되는 콘텐츠의 특성에 최적화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문자 텍스트 중심의 비평은 문학의 것을 빌려온 것 뿐이다. 영화는 최근 문자 텍스트 중심의 비평보다 구술언어 중심 현장전달 중심의 비평이 각광받고 있는데, 이것은 매스미디어의 학습효과를 기반으로 한 것이며, 팟캐스트와 같은 뉴미디어의 부상에 기민하게 대응한 결과다. 가장 산업화된 영화의 발빠른 행보 역시 그들의 생존을 위한 최적화 전략에 다른 아니다. 그러므로 만화와 같은 흥미로운 텍스트를 딱딱하고 무거운 문자중심의 비평으로 한정하는 것은 우울한 일이다. 텍스트에 대한 접근성, 공감의 보편성, 이해의 용이성 등이 어느 무엇보다 높은 만화의 특성에 걸 맞는 새로운 비평방식을 탐구해야함은 물론이다. 만화의 즐거움을 분쇄시키는 비평은 어떤 이유로도 온당하지 못하다. 만화가 즐겁듯 비평도 즐거울 수 있는 독립적인 즐거움 창출이라는 전제로 지속적인 모색이 필요한 이유다.

만화비평의 방법론으로 수렴할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가장 젊은 장르지만 가장 강력한 장르가 된 영화가 강한 이유는 수렴중심의 개방체계에 있다. 경쟁력 있고 소구력 있는 방법은 모두 창조적으로 수렴함으로써 자기화하는 영화의 전략에 주목해보면, 만화비평도 활용가능한 방법론들을 개방적으로 수렴하여 그 적실성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 문화 일반의 보편적 방법론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기존의 역사주의, 형식주의, 마르크스주의, 구조주의, 기호학, 탈구조주의, 실리주의, 독자중심, 페미니즘 등등 텍스트를 풍성하게 하고 심도를 확보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론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만화미학 안에서 통합시켜낼 수 있느냐의 문제는 이제부터 집요하게 탐구해야할 부분이다.

만화비평에 대한 자의식을 구성하고, 이를 토대로 정체와 역할을 모색하고 이를 통해 변별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은 다분히 당위적 요구에 가깝다. 실천의 구체적인 방안과 전략은 이제부터 실천을 통해 고민할 바다. 이제 시작이다.


2015년 <크리틱M>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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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폭력의 비정함과 살아내는 자의 쓸쓸함

다윈 쿡,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시리즈, 시공사, 2014.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1. 하드보일드, 무자비한 세계를 건너는 냉혈한

하드보일드는 인간에 대한 불신과 세계에 대한 절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풍경을 냉혹하게 그려간다. 끝나지 않는 악몽처럼 변질된 미국 대도시를 배경으로 윤리와 도덕은 배제한 채 무정부주의적인 자세로 오로지 자신의 의지만을 신뢰하며 질주하는 안티 히어로의 폭력적인 액션으로 가득한 장르가 하드보일드가 아니던가? 이상과 미덕은 애초에 기대할 수 없고, 존경과 권위는 이미 그 중심을 잃은 자본주의의 냉혹한 메커니즘 안에서 차가운 규칙만 만들어내는 비열한 거리를 단호한 폭력으로 폭주하는 안티히어로의 매력은 매혹과 공포 사이에 있다. 너무도 크고 견고해서 감히 덤비어 볼 엄두도 내지 못하는 거대 도시 가운데를 거침없이 달리며 폭력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안티히어로의 매혹이 압도적일수록 그와 적으로 만났을 때의 벗어날 수 없는 공포는 더욱 지독하기 때문이다.

하드보일드는 소설의 영역에서 추리소설의 대체재(substitute goods)로 등장하였다. 188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절정을 구가하던 영국의 고전적인 추리소설은 셜록 홈즈처럼 책상에 앉아서 혹은 실험실에서 논리를 만들고 현장에서 검증하며 범인을 잡았다. 김용언에 따르면 “19세기 탐정들은 복잡하고 역동적인 모더니티의 영향 아래 선형적인 진보와 개혁, 안정된 발전을 추구하고, ‘하나의범죄가 발생시켰던 균열을 솜씨 좋게 봉합하면서 범죄자의 체포라는 안전한 해결로 마무리 지었다. 범죄자는 사적인 욕망 때문에 사회의 근간이 되는 질서를 뒤흔든 나쁜 피이며, 그들 사회에서 추방함으로써(체포 혹은 자살유도) 다시금 안정은 마땅히 있어야 할 위치로 돌아[각주:1]올 수 있었다. 하지만 1차 세계 대전 이후 과학기술의 발전이나 역사의 진보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나 희망이 사라지고, 2차 세계 대전을 통해 홀로코스트와 핵폭탄의 가공할 학살의 트라우마(Trauma)를 갖게 된 인류에게 이성과 논리로만 무장한 천재들의 말의 향연은 더 이상 재미나 현재성을 주지 못했다. 더구나 계급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시선에 갇혀 우아한 매너리즘을 반복하던 고전적인 추리소설로는 더욱 심각해진 현실의 민낯과 속내를 제대로 보여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양 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와 풍요로움을 약속했던 자본주의는 더 큰 괴물이 되어 누구도 통제하지 못하거나 일부에게만 축복을 내려주었고, 안정과 평화는 그 어떤 것에서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끔찍한 현실 속에서 윤리와 도덕 그리고 공동체에를 토대로 한 삶의 질서는 향수의 대상일 뿐 더 이상 현실이 아니었다. 누구도 범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지옥 같은 현실에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냉정하고 이기적으로 자신의 세계, 자기 몫을 지켜내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등장한 하드보일드 소설을 이끌어가는 중심 캐릭터는 현장으로 뛰어든 탐정이거나 그들을 조롱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매력적인 범죄자였다. 범죄는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적 조건의 산물이라는데, 범죄자가 매력적인 주인공으로 매혹적인 액션을 전개해가는 하드보일드 소설, 하드보일드 그래픽노블이 읽히는 시대는 불행한 시대가 아닐까? 싸워야할 적이 거대하면 거대할수록, 그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가 부조리하면 할수록, 그래서 싸워야할 이유가 절박하면 절박할수록, 싸우고 있는 자신이 무력하거나 그러한 저항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느껴지는 절망의 시대에 하드보일드는 반짝반짝 빛나곤 한다. 조금 다른 의미에서 엄혹했던 1980년대 우리를 매혹시켰던 무협의 세계 역시 그렇지 않았던가? ‘지금 이곳을 살아내야만 하는 우리에게 하드보일드 그래픽노블이 새삼 통쾌하게 읽히는 이유다.

다윈 쿡의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헌터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아웃핏은 미국 범죄소설을 대표하는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가 리처드 스타크라는 필명으로 쓴 파커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작품들이다.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이 책의 국내 출간은 그 엄혹했던 시절의 원인을 제공했던 독재자의 아들이 운영하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지금 이곳에서 냉혹한 복수를 이야기하고, 거대 조직에 내상(內傷)을 입히며 그 보스를 제거한다는 점이다.

리처드 스타크의 매력적인 캐릭터 파커는 다윈 쿡뿐만 아니라 브라이언 핼겔랜드 감독의 영화 <페이백>(1999)으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연속적인 장르 전환(adaptation)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리처드 스타크의 원작은 파커의 주목할 만한 캐릭터성으로 한층 풍부해진 이야기성을 가지고 있다. 빼어난 원작의 후광효과(halo effect)뿐만 아니라 다윈 쿡의 인상적인 그래픽노블에서의 성취는 독립적이고 고유한 미학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성과의 기저에는 무엇보다 파커라는 압도적인 캐릭터가 있다. 파커의 트랜스미디어 스토리 월드(trans media story world)를 구축하려는 듯, 리처드 스타크를 비롯한 여타 장르의 많은 작가나 감독들이 자기 나름대로 파커의 이야기를 생산해온 것만 보더라도 파커의 이야기성은 충분히 증명이 된다.

파커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안티히어로이다. 그는 인간에 대한 불신과 세계에 대한 절망적 인식에서 출발한 단순한 악당이라기보다는 인간을 포함한 세계에 대한 지독한 환멸을 나름의 방식으로 대면하고 있는 캐릭터다. 세계에 대한 환멸적 인식을 파커는 특유의 압도적인 폭력과 감정을 거세한 냉혹함으로 행동한다. 그는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진실에 이를 때까지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진솔한 방식의 폭력으로 되갚아준다. 그 과정에서 파커는 부패와 범죄, 폭력의 내용과 과정을 정교하게 구현함으로써 향유자에게 대리보상의 통쾌함과 해방감을 선사한다. 이렇듯 파커가 응전하고 있는 세계는 범죄세계이며, 그와의 개인적인 원한과 이해관계로 인하여 잔혹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다.

범죄는 항상 사회적 불안과 정치적 혼란을 여러 층위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기호화하고는 스펙터클 뒤로 숨고는 한다. 하드보일드 그래픽노블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스펙터클 뒤로 숨어있는 사회적정치적 혼란의 메타포를 읽을 수 있어야 하며, 그 메타포를 그래픽노블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작가 고유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다윈 쿡은 성공적이다. 더할 수 없는 하드보일드의 거칠고 냉혹한 감성을 굵고 거친 선과 연출로 표현함으로써 원작과는 또 다른 미학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커는 대부분 대사를 철저하게 절제하며 칸 안의 연출이나 칸과 칸 사이의 속도로 차별화된 미학을 만들고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커의 남성적인 대사나 그와 어우러지는 장면 연출 그리고 전개 속도의 조화를 구성하는 드러내지 않으며 표현하려는작가 고유의 전략으로 압도적이다.

 

2.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헌터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헌터는 파커시리즈의 시작으로 냉혹한 복수담이다. 탁월한 능력의 무법자 파커는 치밀하게 계획하고 절제하며 범죄를 저지르기 때문에 발각되거나 구속되지 않는다. 우연히 말 레스닉이 제안한 불법무기거래 현장을 터는 데 성공하고 돈을 나누어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한다. 파커의 몫까지 탐내는 말의 계략으로 파커의 아내 린은 파커를 배신하고 그에게 총격을 가한다. 나머지 일당도 모두 제거한 말은 린을 뉴욕으로 데려와 함께 생활한다. 하지만 파커를 죽인 죄책감에 불면에 시달리며 말에게 린이 마음을 열지 않자 그녀를 두고 말은 떠난다. 말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린을 찾은 파커, 린은 거절하는 파커의 태도와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살을 택한다. 생활비 배달을 온 악당을 추궁하고 그의 연결고리를 찾아 마침내 말의 위치를 알아낸 파커는 그를 죽이고, 자신의 돈을 찾기 위해 조직 아웃핏을 찾아간다. 중간보스를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돈을 찾아 나오지만 조직 아웃핏으로부터 쫓기게 된 파커는 성형을 하고 잠적할 것이라며 끝을 맺는다.

이 작품은 총 4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파커의 등장, 말과 얽힌 복수의 내력담(來歷談)→ ② 돌아온 파커를 눈치 챈 말의 대처, 말의 시점에서 재구성한 그날 사건의 전모 → ③ 파커가 말을 찾는 과정의 이야기 → ④ 말을 죽이고 조직 아웃핏을 자극하여 돈을 찾아 도주하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 작품의 4장의 구조는 내력담, 재구성담, 추적담, 도주담이라는 익숙한 모티브의 재구성임을 알 수 있다.

익숙한 모티브를 활용하여 거침없는 복수에 성공하는 비교적 간단한 서사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재미있게 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없는 삶의 리듬과 전모를 알 수 없는 거대 조직 그리고 냉혹한 자본의 논리가 폭주하는 거대 도시 안에서 타자에 대한 관용 없는 대응으로 스스로를 지켜내는 냉혈한 캐릭터 파커의 거침없는 행동이 만들어내는 자유로움과 해방감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익명의 공간에서 타인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 무지와 악덕 그리고 불쾌한 악몽 같은 현실에서 스스로 안위를 확보하려는 극도의 이기심으로 가득한 세계. 그 세계의 긴장의 안에서 자신만의 순결한 목표(적어도 파커 자신에게는)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추구하는 무법자의 자유와 해방의 몸짓은 매혹적이다. 과도한 남성성, 자기중심적인 거친 말투, 지금 해야 할 일에 대한 어김없는 몰입, 흐트러짐 없는 계획과 성공, 차갑게 절제된 욕망과 거세된 감성, 자기 삶의 주체로 부상하려는 여성계층에 대한 일방적인 태도, 윤리나 법에 구애받지 않는 무법의 사고방식, 일방적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폭력 등이 파커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다. 이것은 하드보일드 장르의 주요 향유자였던 백인노동계층 남성들의 로망을 오롯이 수렴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을 통하여 파커의 깊은 내면의 본모습 찾아간다거나 선택의 기로에서 주저하는 모습이나 갈등을 통한 성장이나 성찰을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무법의 냉혈한은 범죄가 놓인 컨텍스트(context)와 대화하지 않기에 해결하는 즐거움은 있어도 그로인한 가치의 성취는 기대하기 어렵다. 오히려 성취 이후의 공허를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마저도 그곳을 떠남으로써 해결하려들뿐 자기 내면의 심연을 들여다보며 공허를 떨쳐내려 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가 아니라 세계에 있다고 그는 믿기 때문이다. 하드보일드 장르의 비정함은 단지 폭력적인 주제를 냉정하고 무감한 태도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파커의 이러한 태도는 인간에 대한 불신과 미래에 대한 절망 그리고 세계에 대한 환멸에 맞닿아있다. 따라서 파커의 일상을 지배하는 범죄휴양범죄라는 의도된 단순성은 생각 없는 반복의 고리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환멸과 냉소의 포즈다. 그것은 허망함, 절망감, 무력감, 쓸쓸함이 어우러진 결과이며, 그보다 더 허망하고 절망적인 세계와의 의도된 거리두기의 한 방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것은 범죄가 놓인 컨텍스트에 대한 구조적인 접근이나 개인과의 연관을 심도 있게 천착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빠른 속도의 서사 전개, 스스로 의심하지 않는 자기 확신의 캐릭터, 그 캐릭터가 펼치는 비정하지만 파워풀한 액션이 보여주는 냉혹한 스펙터클만으로도 충분한 즐거움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겠지만 성공적인 시리즈물이고 그래픽노블로 전환하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아쉬울 따름이다.


또 하나 이 작품의 재미를 더하는 것은 원작의 아우라(Aura)를 그래픽노블로 더욱 멋지게 살려낸 다윈 쿡의 세련된 연출력이다. 파커의 등장 시퀀스는 두고두고 이야기가 될 수 있는 멋진 연출이다. 19쪽에 걸쳐 최소한의 대사만을 구사하며 파커라는 캐릭터의 특성과 사건으로 진입해가는 과정을 완급(緩急)과 고저(高低)를 살려가며 그려내고 있는 것은 몇 번을 다시 봐도 멋지다. 파커는 대부분 로우앵글로 잡거나 신체 일부의 클로즈업을 통해 그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과 압도감을 표현하고(10-15), 그를 관찰하는 사람들의 표정 변화를 통해 그의 캐릭터를 그려나간다거나(9, 11, 14,15), 속도감 있게 움직이던 그가 가짜 운전면허를 마련하고서는 이제 사회로 돌아올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듯이 거울을 노려보는 장면(20)의 멈춤은 압도적이다. 가짜 운전면허증으로 수표책을 발급받아 양복, 구두, 시계를 마련하고(22-24), 고급 식당에서 만찬을 즐기는 모습(25)의 통쾌함과 홀로 술을 마시고 병을 깨버리는 장면(26-27)의 의문과 불안은 전체 서사의 발단을 빠르게 제시하면서 얻어내는 효과라는 점에서 더욱 빛나는 지점이다. 압축적인 사건 요약이나 심도 있는 심리 묘사를 빠른 서사 전개의 마디마디에 배치함으로써 전체 서사의 완급을 조절하고 흥분한 향유자가 파커의 액션뿐만 아니라 그에게 심리적으로 동조할 수 있는 지점을 마련해준다.(101, 121)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헌터의 매력은 냉혹한 사냥꾼으로서 파커를 만나는 일이 될 것이다. 필요할 때에만 폭주할 줄 아는, 폭주 이후에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적어도 자신이 알고 싶어하는 세계에 대해서는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래서 더욱 공포스러운 매력을 지닌 파커. 이 작품에서 그의 폭주는 복수를 위한 것이다. 배신과 상처로 터진 분노를 절제하며 완수한 복수의 끝은 허망함과 또 다른 범죄의 시작일 뿐이며 벗어날 수 없다는 이 작품의 인식은 극도의 절망과 허무다.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할 주인공, 그가 파커다.

 

3.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아웃핏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아웃핏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헌터의 다음 이야기다. 원작은 이 두 이야기 사이에 얼굴 없는 남자가 있지만 그래픽노블로는 출간되지 않았다. 다윈 쿡의 그래픽노블은 리처드 스타크 원작의 특성인 독립성과 연계성의 이율배반적인 특성을 그대로 살리고 있기 때문에 얼굴 없는 남자를 누락해도 이 작품을 읽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헌터에서 성형수술을 하고 잠적하겠다고 했고,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아웃핏에서 성형 이후의 사건들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원작 소설 얼굴 없는 남자까지 그래픽노블로 전환되었다면 좀더 촘촘하고 밀도 있는 파커의 스토리월드를 구축했겠지만 빠졌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각권이 전체적으로는파커의 스토리월드를 구축하고 있지만 동시에 독립성을 유지하는 프랜차이즈 노블의 특성을 그래픽노블에서도 그대로 계승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파커가 세상살이의 전모를 꿰뚫고 있는 듯한 자신 있는 태도, 주체적인 처세, 타고난 동물적 감각의 생존 본능, 대범한 대응으로 거대한 조직 아웃핏과 스펙터클한 대결을 벌이는 이야기다. 이 작품도 전작과 같이 총 4장으로 조직 아웃핏의 파커 암살 기도, 스킴과의 내력담 및 스킴 제거 → ② 아웃핏의 지부들을 털면서 두목 브론슨의 위치 파악 → ③ 브론슨의 조직을 터는 여러 사례(잡지 기사, 약화체 요약) → ④ 브론슨을 없애고 이인자와 거래로 뒷탈을 막고 사라지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같은 형식의 반복은 전환과정에서 원작의 서사를 취사선택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며, 더구나 4장의 구조는 기승전결의 보편적인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반복의 식상함만 극복할 수 있다면 매우 유용한 구조다.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아웃핏은 빠른 속도의 전개와 통쾌한 액션 그리고 다채로운 사건들의 흥미로운 연쇄가 이어지기 때문에 식상할 염려는 없다.

싸움이 될 것 같지 않은 거대 조직과 두려움 없이 싸워 승리하는 파커의 서사는 거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공포와 적개심만으로 위축되었던 향유자의 욕망을 해소시켜준다. 조직 아웃핏이 보여주는 자본 축적 방식, 갱단을 회사로 칭하며 일상 안에서 합법화를 가장한 범죄조직, 누군가가 아닌 모두의 일상과 연계되어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파커의 반영웅적 행위의 통쾌함과 당위성을 강화시켜준다.


특히 아웃핏의 자본축적 방식이나 범죄의 합법화 과정 같은 정보를 잡지기사의 활용(82-90)이나 각 지역을 터는 과정을 약화체 그림을 통하여 요약(91-109)하는 방식은 전체 서사의 흐름을 따라가게 하면서도 호흡이나 긴장을 인위적으로 중단시킴으로써 사건의 스펙터클에 현혹되는 것을 방해하며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게 한다. 그 거리는 파커의 행위에 대한 비판적 거리가 아니라 합법을 가장하여 일상 속에 침투해 있는 범죄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게 한다. 물론 그렇다고 파커가 자본주의 시스템을 비판하고 있다거나 그 안에 기생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불신과 절망의 세계에 대해 어떤 태도를 견지할 것인가를 되묻고 있다. 그 모든 것들에 대하여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냉혹한 무관심으로 그 모두를 단지 도구화할 뿐인 파커의 스탠스가 그것이다. 이 작품에서 익숙한 리듬을 깨면서까지 확보한 그 거리는 쓸쓸함과 환멸로 가득한 세계, 회복 가능성보다는 타락 가능성이 더욱 농후한 세계 안에서 당신의 스탠스는 무엇인가라고 무심한 듯 묻고 있다.

이 작품에서 한층 더 노골화되는 반영웅적 캐릭터로서 파커의 냉혹한 폭력이 재미있는 것은 절대 강자가 구현하는 안전하지만 통쾌한 복수, 반사회적 범죄의 낱낱을 드러내는 폭로, 선과 악의 경계를 넘어선 악당의 악당 징벌, 현실 원칙에 얽매이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자유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이유가 종합적으로 작용하는데, 향유자는 1인칭 시점을 따라가며 동반자적 시점을 유지함으로써 심정적인 일체감을 강화할 수 있다. 그러한 일체감은 절대 강자의 두려움 없고, 정당하기에 냉정할 수 있는 복수와 자기 방어를 마치 자신이 수행하는 몰입을 얻을 수 있고, 그 몰입도만큼 자유와 해방을 맛보는 것이다.

다행인 것은 이 지독한 구타와 살인의 연속 안에서 파커는 도덕과 정의라는 명분 뒤로 숨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파커에게 도덕적 우위나 정당성을 주지 않는다. 그저 제 능력껏 살아남아서 이야기하는 자로 남겨둘 뿐이다.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헌터에서 파커는 말이 배신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먼저 말을 해치웠을 것이라는 진술을 통해 말과 파커의 정의나 윤리관이 다르지 않음을 드러낸 바 있고, 이것을 다시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아웃핏에서는 마치 린의 총을 맞는 파커처럼 알마 손에 스킴이 죽임을 당하게 하고 운좋게 살아 돌아오는 동일한 설정을 통해 한 번 더 강조하고 있다. 이 비정한 익명의 도시에서 문제는 살아남아 살아내는 것이지 어떻게 살 것이냐는 네가 판단할 몫일뿐이라고…….

 

4. 리처드 스타크와 다윈 쿡 사이

리처드 스타크의 빼어난 원작을 그래픽노블로 전환한 다윈 쿡의 작업은 또 다른 파커의 탄생이다. 문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거친 생생함과 체취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구현했기 때문이다. 다윈 쿡이 시도한 전환의 수준과 가치를 알아본 리처드 스타크는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파커라는 원작 캐릭터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다우니 쿡에게 주었다고 한다. 다만 아쉬운 것은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시리즈가 국내에는 아직 3권밖에 번역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금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거나 같은 작품의 전혀 다른 재미와 풍미를 느끼고 싶다면 리처드 스타크의 원작과 다윈 쿡의 그래픽노블을 비교하면서 읽어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일 것이다. 거기에 존 부어맨 감독의 <포인트 블랭크>나 브라이언 헬겔랜드 감독의 <페이백>(1999), 테일러 핵포드 감독의 <파커>(2103)까지 더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본격화되지 못한 하드보일드 장르의 그래픽노블을 만나는 것은 새로운 시작일 수 있다. 최근처럼 원천콘텐츠로서 만화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점이라면 장르적 유용성의 측면에서 더욱 그렇다. 만화의 가장 큰 장점은 구속되지 않는 자유의 질주, 노마드의 무한한 지평이 아니던가? 미국에서 하드보일드가 출현하던 시기의 불신, 절망, 환멸이 차고 넘치는 지금 이곳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더욱 매력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당위적으로 요구하는 윤리나 도덕 혹은 정의를 잠시 괄호 속에 묶어놓고 냉혹하고 비정한 이 도시 안에서 어쩌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자들의 색다른 스탠스를 만나는 일은 분명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우리의 현실이 더 흥미진지만 하드보일드라는 점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러면 어떠랴결국 더 센 놈이 살아남는 것인데…….

<만화규장각> 2016.12.13

  1. 김용언, 《범죄소설 그 기원과 매혹》강, 2012, p.13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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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그래피? 자유와 광기의 즐거움

지미 볼리외, 센티멘털 포르노그래피미메시스, 2013.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야마모토 나오키의 내일 다시 전화할게와 지미 볼리외의 센티멘털 포르노그래피를 함께 읽은 것은 그저 우연일 뿐이었다. 포르노그래피라고 부르기에는 두 작품 모두 도발의 강도나 환기의 궁극이 매력적이다. 야마모토 나오키가 일상 안에서 꿈꾸는 혹은 조금 비껴서면 가능할지로 모를 섹스로 각자의 성적 판타지를 소환하고 있다면, 지미 볼리외는 자유와 광기의 당당한 질주와 동력을 즐겁게 그리고 있다. 전자는 현실의 구속 안에서 각자가 비밀스럽게 꿈꾸는 소심한 판타지로 그 안에서 향유자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은밀한 즐거움이 있다. 후자는 각자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자유와 광기의 질주를 보여준다.

센티멘털 포르노그래피290쪽의 부피가 최소한의 서사 라인만을 갖추고 각각의 캐릭터는 자신의 욕망과 행복에 충실한 자유를 연출한다. 이 작품의 서사라인을 따라가면, 의도된 졸작 <정의로운 배반>(지독한 패러독스의 영화제목이 아닌가?)의 수익으로 구입한 코트 노르의 호텔에서 루이, 코린, 뮈리엘, 레옹스가 벌이는 광기어린 휴식을 만날 수 있고, 코린을 잊지 못하는 아니, 아니를 열망하는 가리에피, 가리에피의 넘어설 수 없는 친구 시몬 등의 이야기가 그 사이사이를 자의적으로 가로지르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의 서사적 지향을 가지고 구조를 중심으로 깊이와 울림을 만들어내려는 일반적인 서사물과는 달리 이 작품은 각 캐릭터의 욕망과 그것이 그려내는 자유를 연출할 뿐이다.

더 이상 낯설거나 부끄럽지도 않은 맨몸과 순간순간 자극적인 검은색 음모, 색과 구도 그리고 연출이 보여주는 비언어적 도발, 대상과 방식에 구애받지 않는 섹스의 자연스러움, 거침없는 대사와 장면연출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에로틱하기보다는 자유롭다. 그것은 단지 텍스트 전체적으로 펜, 색연필, 매직 등 자유롭게 사용되었다거나 칸의 구속과 순서적 읽기에서 벗어났다거나 2장의 모두부터 보여주는 소설과 만화가 적절한 긴장을 이루고 있다거나 하는 만화연출적인 차원의 문제만 아니다. 루이와 코린이 중심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가 독립적으로 각자의 욕망과 행동에서 거침이 없고 자유로우며, 그들 각자가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완전히 놓지 않는 절묘한 긴장선 위에서 질주하고 있는 까닭이다. 루이는 호텔을 구입하기 위하여 세상을 향한 야유와 같은 의도된 졸작 <정의로운 배반>을 만들지만 그것은 결국 세상을 견디기 위한 위대한 변절이었고, 루이와의 결혼을 꿈꾸지만 세상의 원칙으로부터의 자유와 정주를 동시에 꿈꾸는 코린이 보여주는 긴장에 주목해야하는 이유다. 지극히 연극적인 공간에서 작위적인 듯 보이지만 거침없는 자유와 광기를 그려내는 이 작품 속 모든 캐릭터들은 무엇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다워지기 위한, 그래서 더욱 행복하고 즐거워지려는 진솔한 자유를 꿈꾸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의 과격하고 포르노그래피한 장면연출은 숨겨진 은밀한 욕망이나 말초감각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분하게 그 지독한 장면들을 내면화하는 자유를 보여준다.

이 작품이 장별로 독립적으로 읽어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울러 290쪽의 어느 부분을 펴고 보아도 도발적이지 않은 시도가 없고, 그 숱한 도발이 환기하는 광기와 자유의 경쾌함을 만날 수 있다. 다시 말해 텍스트 전체가 아주 느슨하지만 매우 독립적인 형태의 자유와 광기의 즐거움을 기획하고 있다는 점은 무척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지점이다. 텍스트는 궁극의 지향을 향해 나아가는 이정(里程)의 기록이 아니라 순간순간 체험의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텍스트를 읽는 이유는 완결된 서사가 보여주는 마지막 지평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곳에 이르는 체험의 즐거움을 위해서이다. 즐길 준비가 되었다면 당신은센티멘털 포르노그래피를 펴서 읽어야 할 것이다. 반드시 시작이 아니어도, 처음부터 끝까지가 아니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문득 낯선 장면에서 당신이 즐거울 수 있다면 돌아봐야할 것이다. 당신을 구속하고 있는 지금 이곳의 맨살을…….

<만화규장각> 201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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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공분, 공유의 텍스트, <미생>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100만권 이상 팔린 책은 더 이상 책이 아니라 하나의 징후이며 담론이다. 같은 텍스트를 1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읽고 생각하고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쏟아지는 생산적인 소란스러움을 상상해보라. 향유자들이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텍스트와 각자의 대화적 관계를 형성하면서 다성(polyphony)의 소란을 만들어낼 때, 사회문화적 컨텍스트(context)로서 징후가 되고 담론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미생>은 이미 우리사회의 징후이며 담론이다. <미생>이 웹툰은 11억 뷰 이상, 책은 200만부 이상, 드라마는 케이블임에도 불구하고 6.7%대의 시청률을 기록했으며, 콘텐츠파워지수는 이미 정상에 있고, 100억 이상의 수익을 예상하고 있다는 것은 여러 매체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수치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체감할 수 있는 <미생>의 영향력은 놀랍다. 이토록 살아서 꿈틀대는 이 텍스트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웹툰 <미생>의 힘은 공감 가능한 이야기를 성실한 취재를 바탕으로 완성도 있게 구현한 스토리텔링에 있다. 스토리텔러로서 윤태호 작가의 비범함은 초기작부터 이미 알고 있던 바이지만, <이끼> 이후 그가 보여주는 스토리텔링은 무척 실험적이고 그만큼 흥미롭다. <내부자들>이나 <인천상륙작전>의 스토리텔링이 <이끼>만큼의 성취를 이루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시도만큼은 주목해야할 지점이다. <미생>의 완성도나 대중적 지지의 근저에도 스토리텔링의 실험이 있다. 종합상사라는 가장 치열한 삶의 현장을 철저한 취재를 기반으로 확보하고, 바둑이라는 인생의 메타포를 그 위에 솜씨 좋게 얹은 후에 마이너리티적 감성의 자극을 통해 대중적 공감을 확산하려는 <미생>의 스토리텔링 전략은 압도적이다. 사회적 맥락에서 볼 때 <미생>은 아직 살아있지 못한 마이너에 주목함으로써 향유자들이 스스로 심정적인 투사를 통하여 동일시 할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메이저의 성공신화보다는 마이너의 악전고투에 동조하는 대중의 심리적 기저를 잘 파악한 결과이다.

또 하나 주목해야할 것은 <미생>이 지닌 텍스트의 내적 리듬이다. <미생>에서는 미시서사의 일정한 마디마다 촌철살인의 대사나 내레이션을 통하여 지나친 정보 제공으로 인하여 이완될 수 있는 서사의 긴장을 당기고 있다. 종합상사가 배경인 까닭에 무역 전문용어 등이 불가피하게 제공되어야하는 까닭에 자칫 서사가 늘어지거나 지루해질 수 있는데, 이것을 미시서사의 전환이나 대사나 내레이션의 미적체험을 강화함으로써 극복하였다. 매주 2회 연재, 2-3일의 연재 간격을 유지해야하는 웹툰의 특성상 향유자의 관심을 유지하고 흥미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주단위의 미시서사 전개가 요구되지만, 그렇다고 매주 새로운 미시서사를 제공한다거나 미시서사 단위의 극적 긴장을 유지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전략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미생>의 시도는 웹툰의 장르적 변별성과 대중의 취향에 대한 뚜렷한 자의식을 갖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미생> 스토리텔링의 또 다른 미덕은 장그래의 성장담(Initiation story)에만 머물지 않고 원인터내셔널 전체 구성원을 캐릭터화하고, 그들 사이의 긴장과 미시서사의 유기적인 조합을 완성도 있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캐릭터들에게 고루 시선을 나눠주고 그들이 살아내고 있는 엄혹한 현실의 맨얼굴과 그 안에서 고분분투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되비춰 보게 함으로써 공분(公憤)과 공감(共感)을 공유(共有)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웹툰 <미생>의 작품성과 정서적 공감을 공유하고 있는 드라마 <미생>의 성공은 원천콘텐츠의 후광효과(halo effect)One Source Multi Use(이하 OSMU)의 전략적 전개 그리고 빼어난 텍스트적 성취에 기인한다.

우선 드라마 <미생>의 텍스트의 변별성은 스토리텔링 전략에서 찾을 수 있다. 드라마 <미생>은 웹툰에 비해 업무의 사실성보다는 그것을 수행하는 캐릭터들의 대응에 중점을 두어 다양한 캐릭터군을 구현하고 있다는 점, 매주 2화로 구성하는 미시서사의 주제 단위가 선명하다는 점, 주제단위별 중심 캐릭터가 다양하게 등장시킨다는 점, 장그래의 내레이션을 통해 관조하고 성찰하게 함으로서 거시서사의 흐름을 유지한다는 점, 지금 이곳에서 예민한 소재들을 전략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 등의 스토리텔링 전략을 구사하였다. 특히 눈여겨 볼 지점은 장그래, 장백기, 안영이, 한석률을 취업준비생인턴신입사원(정직원/계약직)’의 과정에서 구현하고, 그들이 대응할 세계를 긍/부정의 다양한 캐릭터 군상과 갈등하게 함으로써 사건을 전개한다. 이러한 갈등 과정은 오과장, 김대리, 장그래의 영업3팀을 긍정적 공동체로 그리고 대비적으로 각 팀을 그리고, 그 안에서 장백기, 안영이, 한석률의 미시적 갈등을 다시 구현하는 영리한 서사 구조를 구현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정규직/계약직의 문제, 성차별의 문제, 회사 내 정치의 문제, 일중독, 조직의 부속품일 뿐인 개인의 문제 등을 집중 부각시킴으로서 향유자와의 심리적 접속을 유도하고, 공감과 공분을 확장하는 효과를 성공적으로 거두고 있다. 프로진입 실패, 고졸 학력, 낙하산을 중심으로 마이너적 캐릭터를 구현한 장그래, 회사 내 정치와는 무관하게 올바른 자세로 윤리적 우위성과 보편적 양심을 확보한 분명한 오과장, 빼어난 실력에도 성차별을 받는 안영이(마치 헤르미온느처럼), 성과주의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본능적으로 합리화하는 냉혈한 최전무 등의 캐릭터는 향유의 지향과 정서적 동조가 가능한 수렴점으로서 성공적으로 기능한다.

<미생>OSMU도 눈여겨 볼 부분이다. OSMU는 장르전환(adaptation), 창구효과(window effects), 상품화, 브랜드 창출 효과 등을 통해서 부가가치를 극대화하는 마케팅 활동을 의미한다. OSMU의 동력은 원천콘텐츠의 후광효과 여부, 원천콘텐츠의 전환 적합성, 거점콘텐츠의 최적화 여부, 연동 콘텐츠 간의 상호 프로모션, 다양한 창구로의 확산, 브랜드 가디언의 효과적인 통제에 의한 상품화, 지속적인 브랜드 창출 등에 있다. 그동안 콘텐츠 업계는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통하여 강력한 원천콘텐츠의 확보 방안, 전환의 최적화 장르 파악 및 전략 탐색, 상호 프로모션 방안, 상품화 전략 등에 나름의 노하우를 가지게 되었다. 최근에는 콘텐츠의 제작 규모가 커지면서 콘텐츠의 리스크 헷지(risk hedge) 전략으로 이미 인지도를 확보한 원천콘텐츠를 중심으로 장르전환에 중심을 두면서 블록버스터 마케팅을 전개하고 있다.

강력한 원천콘텐츠였던 웹툰 <미생>은 드라마 방영에 맞추어 프리퀄(prequel)에 해당하는 사석을 5화 연재함으로써 원천콘텐츠는 물론 거점콘텐츠인 드라마에 대한 관심도 환기시켰다. 사석의 연재로 <미생>은 일종의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transmedia storytelling)을 매우 흥미로운 형태로 구현했다. <미생>은 원천콘텐츠에서 거점콘텐츠로 전환하면서 원천콘텐츠의 프리퀄을 첨가하면서 원천콘텐츠의 전사에 해당하는 오과장의 신입사원시절을 추가하였다. <미생>의 프리퀄은 여타의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과는 다르게 새로운 서사를 추가함으로써 보다 완성된 서사 세계’(narrative universe)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점콘텐츠의 방영에 맞춘 일종의 프로모션 툴로서 기능했기 때문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프로모션 툴은 뜻하지 않게 상품화의 결과로서도 성취되었다는 점이다. <미생>은 웹툰의 성공에 힘입어 드라마 이전에 이미 단행본 출간, 캔커피, 종이컵, 헛개수, 노트, 티셔츠 등의 상품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이것은 부가가치는 물론 <미생>이라는 브랜드 창출에 긍정적인 부메랑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드라마 <미생>은 성공적인 PPL(Product Placement)을 통하여 미시콘텐츠(micro contents)를 활성화였다. 낯선 이물감 없이 전체 서사에 유기적으로 녹아들어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숙취음료, 홍삼, 복사지, 일회용커피 등이 그것이다. 일반적인 PPL의 경우 상품당 1000만원이지만 <미생>의 경우에는 4000만원 수준이라는 것만 봐도 그 효과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미시콘텐츠의 활성화는 단지 수익의 극대화뿐만 아니라 향후 콘텐츠의 수명 연장 및 프랜차이즈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는 면에서 주목해야할 요소다.

현재적 의미에서 <미생>을 통해 드러난 콘텐츠 향유 경로의 변화와 그에 다른 수익창구의 다변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드라마 <미생>을 제 시간에 케이블을 통해서 보는 시청자만큼이나 다양한 스마트기기를 통해서 즐기는 향유자가 증가한 것이 현실이다. 스마트환경 하에서의 콘텐츠 향유는 다양할 수밖에 없고, 다양한 만큼의 수익 창구를 갖게 되는데, <미생>의 경우에는 주문형비디오(VOD)와 푸티지(footage) 광고 매출이 두드러진다. 편당 제작비 3억의 시청률 6.7%대의 20부작 드라마의 VOD 매출 30억은 유의미한 수익이며, 더구나 일부 영상만 뽑아서 활용하는 푸티지 광고 역시 20억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니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콘텐츠의 수익 창구의 변화는 콘텐츠 자체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향후 스마트환경 하에서 드라마는 구현할 수 있는 스마트 기기의 디바이스적 특성과 향유 경로와 연동하는 수익 창구의 성격에 따라서 스토리텔링 전략을 최적화해야하기 때문이다. PPL이 자연스러운 서사 요소의 확충, 미시콘텐츠를 활성화할 수 있는 서사 전략, 푸티지 광고가 가능한 연출 전략 등과 같은 다양한 요소들을 기획 단계부터 고려해야만 한다. 여기에 원천콘텐츠의 장르 전환까지 고려해야한다면 더욱 복잡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익 창구의 다변화와 신규 개발은 드라마의 질적 성장에 크게 기여할 것이고, 그와 더불어 원천콘텐츠이 웹툰의 수익 창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탐구해야할 문제이다.

이청준의 자신의 스터디셀러 󰡔당신들의 천국󰡕이 읽히는 시대는 불행한 시대라고 단언한 바 있지만, 그 작품은 현재가지 꾸준히 읽히고 있다. 이청준의 말투를 흉내내자면, 윤태호의 <미생>이 읽히는 시대는 온전히 완생에 이르지 못한 시대다. 아니 우리가 완생을 꿈꾸는 시대다. 그런 의미에서 <미생>은 현재 진행형이며 완생을 향한 준열한 성찰의 텍스트임에 분명하다. 지금 이곳에서 <미생>이 불러오는 공분(公憤)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공감(共感)이며 공유(共有)의 힘이다.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웹툰으로 단행본으로 드라마로 <미생>과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은가?

 

<만화규장각> 2014.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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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 최선, 낙관의 유쾌한 고군분투

- 마츠다 나오코의중쇄를 찍자

 

박기수(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다릴 것이 생겼다는 것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한참을 기다리던 요시다 아키미의바닷마을 다이어리7권을 그렇게 후딱 읽어버린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기다린 시간만큼 아주 천천히 차를 우리듯 읽었어야할 작품을 급한 마음에 후루룩 읽어버렸으니 말이다. 그 허전함을 견딜 수 있게 해준 것이 마츠다 나오코의중쇄를 찍자였다. 물론 그 못된 습벽으로 이 작품마저도 정주행하고 말았지만,바닷마을 다이어리8권을 기다리듯중쇄를 찍자4권을 기다리게 되었으니 설렘이 하나 더 늘어난 것이라고 믿기로 한다.


긍정적인 주인공의 성장의 고군분투는 언제나 흥미진진하지만 그리 새롭지는 않다. 중성적인 여성 혹은 작고 다부져서 아기 곰처럼 생겼다고 묘사된 유도선수 출신 출판사 신입직원 쿠로사와 코코로, 진심과 최선이라면 언제든 기대할 수 있는 선의와 낙관 그리고 여지없는 긍정의 결말은 대중서사의 익숙한 컨벤션이다.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그랬듯이 알고 보면 모두가 선한 사람이라는 이 작품의 설정은 전통적인 의미의 갈등구조 밖에 있다. 점점 전통적인 의미의 갈등, 즉 서로 다른 존재와 세계, 정서나 목표 간의 충돌을 통하여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요구하는 갈등에 대한 피로감 때문일까? 아니면 그러한 지향을 통해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세계를 갈망하는 것일까? 갈등을 통한 인간과 세계에 대한 탐구가 유용하듯이 갈등을 이완시킴으로써 구현할 수 있는 즐거움도 지금 이곳서사의 주목할 지점이다.

중쇄를 찍자에 마음을 뺏긴 것은 출판 현장의 살아있는 모습을 중심소재로 활용하는 있다는 점, 쿠로사와 코코로에게서 장그래가 읽혔다는 점(물론 장그래 보다는 밝고 조금 가벼운), 중심 서사의 캐릭터와 에피소드별 중심 캐릭터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물론 우리는 이러한 예로슬램덩크라는 탁월한 예를 알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진심과 선의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를 갖게 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만화출판이라는 소재의 현장성을 제대로 살리면서도 소재주의에 빠지지 않는 작가의 균형 감각이 돋보인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출판현장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작가는 놓치지 않는다.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의 만화출판 정보가 가볍게 제공되지만 거기에 매몰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만화를 팔고자하는 사람들의 노력과 그 안에서 아직은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아기 곰의 분투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본다. 이 역시 현실의 모습과는 무관한 우리가 보고 싶은우리의 모습을 투사한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진심, 최선, 낙관의 긍정적 기대를 신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가슴을 뛰게 한다. 그것은 아직은 나와 무관하지만 그러한 문맥 위에 스스로를 놓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기인한다. 전체적으로 씩씩한 모습으로 유쾌함을 유지하는 쿄토칸사람들의 열정을 통해서 현실을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그럴 수 있다고 근거 없는 기대와 자신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엄혹한 현실 안에서 무기력하게 무릎 꺾인 우리의 처음을 기억하게 한다는 것, 사는 일이 그렇다고 자조하는 우리에게 올곧은 체축으로 다시 한 번 서보라고 따듯하게 이야기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충분히 즐겁다. ‘팔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판 것이다라는 쿄토칸식구들의 자부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重版出來는 초판을 소진하고 중쇄를 찍어 돈을 벌겠다는 천박한 갈망이 아니라 사람들의 꿈을 짓고 있는 만화가에게 지속적인 창작의 기회를 마련해주려는 편집자의 따듯한 소망이다.

취향에 따라서 이 작품의 그림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서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나쁘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림의 완성도는 독특한 연출이나 완벽한 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의 분위기와 속도 그리고 이야기와 어우러진 정도가 아니겠는가?

 

<만화규장각> 2016.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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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성의 소환과 즐거움의 호명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도깨비감투에는 1970년대 풍경(landscape)이 있다. 그곳에는 서울 어느 골목에 사는 혁이네 가족만의 특별한 풍경이 아니라 197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몰장소적 풍경으로서의 다층적 의미가 담겨 있다. 김홍중에 따르면 풍경은 향수자가 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고 구성하는 일종의 제도적 세계상이며, 동시에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변동을 통하여 지각되고 감지되는 역사의 구성물이다. 그는 풍경을 주체의 경험을 초월하는 선험적인 인식틀이고, 체험의 조건으로 기능하는 제도로서 현실의 물질적 토대를 포함하며, 언어적논리적 질서를 넘어서는 영상적 질서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도깨비감투에서 만날 수 있는 1970년대 풍경은 특정 시공간을 잘라 관찰의 대상으로 삼는 에스노그라피(ethnography)적인 풍경이 아니라 지금 이곳’(現在)이 소환하는 풍경이다. 그것은 실체적 공간으로서의 1970년대가 아니라 각자의 기억으로부터 재구하는 지극히 사적이지만 대표성을 갖게 되는 시공간이며 동시에 지금 이곳에서는 사라진 소중한 무엇인가가 찾아가는 대타적인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도깨비감투의 풍경 속에서는 문 밖을 나서면 친구들이 있고, 서로의 이야기가 있고, 좁았지만 자유로웠던 골목이 있고, 어머니가 부르면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둘러앉을 밥상이 있고, 꾸중하는 어른이 있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명하게 판단하고 옳은 일에 모두 수긍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이 작품만의 특징이라기보다는 1970년대 명랑만화의 일상성을 구성하는 일종의 컨벤션이다. 박인하와 김낙호는 1970년대를 명랑만화의 시대로 규정하고, 그것은 웃기는 만화라기보다는 일상을 그린 만화로 규정하며, 그 핵심은 친근함과 일상이라고 주장한다. 1970년대 명랑만화 안에서 친근함과 일상을 구성하는 컨벤션에는 당대가 지향했던 양친부모가 모두 있는 중산층 가정, 가족들이 함께 생활하는 집(단독주택), 이웃과 함께하는 골목길이라는 물적 토대는 물론,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는 도덕 기준과 합의 가능한 가치관이 내재화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설정이 당시의 보편적인 풍경이냐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일 수 있겠지만, 그러한 풍경을 당위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명랑만화임에도 불구하고 교화적, 도덕적, 당위적 성격이 상대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명랑보다는 바른만화의 성격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 말은 도깨비감투가 명랑만화보다는 바른만화에 가까웠다는 말이 아니라 바른만화의 성격을 내재화한 1970년대 명랑만화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다. 이것은 작품 발표 당시 지향했던 보편적 일상의 반영이거나 검열과 심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술적 타협으로 볼 수 있다.


1970년대는 전통적인 농촌공동체가 붕괴되고 도시화가 가속화되면서 핵가족화, 이웃 간의 관계 단절, 가치관의 아노미화 현상이 본격화되는 시기이다. 동시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거나 바라본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던 개발독재정권의 검열과 탄압이 심의라는 이름으로 혹독하게 자행되는 시기라는 점을 상기할 때, 도깨비감투를 비롯한 당대의 명랑만화 안에서 그려지고 있는 일상은 있는 그대로의 일상이 아니라 당위적으로 요구받는 일상이거나 과장된 낙관 속에 은폐된 일상에 가깝다.

도깨비감투만약 내게 〇〇〇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이라는 아이들의 보편적인 판타지를 한국적인 소재인 감투로 바꾸어 하이콘셉트(high concept)로 전면화한 작품이다. 도깨비감투는 투명인간의 변형으로 해리포터의 투명망토와도 다르지 않고 어린 시절 누구나 꿈꿔봤을 소박했지만 보편적이었던 판타지의 구현물이다. 이 작품에서는 도깨비감투라는 신이(神異)한 능력을 지닌 도구를 획득함으로써 벌어지는 일상담과 모험담을 함께 전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마법의 도구를 얻게 되기까지의 모험담과 마법의 도구를 얻음으로써 새롭게 생긴 능력을 발휘하는 과정에서의 모험 및 성장담 그리고 그 능력을 슬기롭게 처리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귀환담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도깨비감투는 이러한 상례에서 벗어나 도깨비감투를 얻고 난 이후에 일상 속의 소소한 소동 혹은 다소 낙관적이거나 맥락 없는 모험을 그려냈다. 제사, 방학, 도둑, 위문공연, 눈싸움, 목욕탕, 성적표, 불우이웃돕기, 설날 등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납치범 검거, 밀수범 검거, 탈옥수 자수, 북한, 땅굴 등이 후자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월간이라는 특성과 초등학생이 중심 독자였다는 점에서 전자와 같이 1년 단위로 가정과 학교의 루틴을 중심 소재로 활용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지점이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다소 이물(異物)스럽거나 맥락 없는 소재임에 분명하다. 특히 우연하게 북한에 도착하고 그곳의 실상을 바라보고 땅굴을 발견하는 등의 에피소드(별책부록14/ 복간본 페이지가 픽스되면 복간본 기준으로 권수 표기 하겠습니다.)는 애니메이션 <똘이장군>(1978) 식의 반공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명랑만화에서까지 왜 굳이 북한을, 그것도 아주 스테레오타입으로 그려야했는지는 시대적 배경을 생각한다면 쉽게 수긍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정부의 압력에 의한 작가의 창작권 침해나 작품의 완성도 저하를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깨비감투의 중심 서사는 중심캐릭터인 혁이를 제외하고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이 단점을 지니고 있고, 그것으로 인해 벌어지는 소동들을 도깨비감투로 해결하는 방식으로 전개한다. 다만, 일반적인 서사물은 대부분의 뚜렷한 적대자 캐릭터를 상정하고 그들과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지향 가치를 부각시키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데, 도깨비감투에서는 뚜렷한 적대자나 본격적인 갈등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특징이 있다. 명랑만화의 성격상 본격적인 갈등을 통하여 자아와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의 소소한 에피소드 중심의 재미에 그 중심을 두고 매월 단위의 단편적인 서사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립요소와의 해소과정을 통한 성찰이 아니라 이미 설정된 결론(미덕)으로 이끌어가는 방식의 일방적 서사에 가깝다. 그러다보니 모험담의 동력이 되어야할 성장이나 성찰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특성은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서사적 결함이 아니라 1970년대 명랑만화의 특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월간 잡지라는 압도적인 매체를 통해, 월간이라는 분명한 주기를 가지고, 초등학생이라는 뚜렷한 타깃에 맞추어, 연재물이지만 단편적인 성격이 강했던, 일상 속의 재미를 지향했던 명랑만화의 장르적 특성에서 본다면, 도깨비감투의 이와 같은 서사적 특성은 매우 보편적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단지 명랑만화가 매우 개성적인 캐릭터(꺼벙이, 탱구, 두심이, 요철이, 고집세 등)를 중심으로 일상 속에서의 웃음을 전면화하였지만, 이 작품은 개성적인 캐릭터(혁이)보다는 신이한 능력을 지닌 도구(도깨비감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별할 수 있다.

사실 엄혹했던 시대적 배경과 열악했던 산업적 환경 그리고 제한적이었던 소비 및 향유의 토대를 고려할 때, 1970년대 한국 만화산업에서 명랑만화는 최적화된 장르라고도 할 수 있다. 명랑만화는 당국의 심의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분명한 독자층과의 원활한 소통에 중심을 맞추기 위하여 단순하지만 분명한 컨벤션의 설정, 단편서사 중심의 스피디한 전개, 심각한 고민보다는 가벼운 즐거움에 초점을 맞추고 이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간략한 선중심의 약화체(略畫體)와 재미있는 희화체(戲畫體)를 활용하였다. 그러다보니 일상을 중심소재로 하고는 있지만 일상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은 애초에 기대하기 어려운 지점이 될 수밖에 없고, 상이한 가치 간의 긴장과 대립을 기반으로 하는 본격적인 갈등은 등장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명랑만화의 수다한 미덕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긴장, 갈등, 변화가 내재되지 않기 때문에 기존 질서를 벗어나지 않고 회귀할 뿐인 체제 순응적이며 기존 질서를 강화할 뿐인 장르라는 혐의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현실을 제대로 관찰함으로써 문제를 찾아내고 그 문제와 본격적인 갈등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더구나 도깨비감투에서 사회악(社會惡)이나 체제악(體制惡)을 도깨비감투로 제거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되는 방식은 지극히 표면적이고 일방적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명랑만화로서의 장르적 특성과 주 독자층이 초등학생들이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197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과연 이러한 비판이 유효할 것인가는 좀 더 숙고해볼 문제다.

도깨비감투의 가장 지배적인 설정은 현실에서는 무력하거나 잉여로 취급받았던 어린이가 특이한 능력을 소유함으로써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를 타개해나간다는 판타지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십대의 어린 주인공을 자주 활용하는 것도 어른중심의 지배체제에 대한 불만, 무력한 현실을 타개하고 싶은 어린이들의 욕구 등을 창조적으로 수렴한 결과다. 이러한 맥락에서 도깨비감투의 이러한 설정은 독자와의 공감을 높이고 소통을 활성화할 수 있는 중요한 서사 장치라고 평가할 수 있다. 더구나 좋은 일에만 효과가 있는 능력이라는 단서와 언제든지 분실할 수 있다는 설정 그리고 모두가 알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설정은 일종의 데드라인(Dead Line) 설정과 같은 서사 장치로서 극적 긴장을 조성할 수 있는 주요 단서가 된다.

도깨비감투라는 중심 소재 외에는 매화 단편적인 서사로 전개되기 때문에 거시적 관점에서 작품의 완성도를 논하기는 다소 어렵다. 서사적 완성도를 논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에피소드별로 분석하여 그 안에서 서사적 완성도를 평가해야할 것이지만, 이 작품의 경우에는 서사적 완성도보다는 시트콤처럼 일상 속의 재미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성과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명랑만화의 계보학적 접근을 통하여 이 작품만의 변별성을 추론해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단지 도깨비감투만의 평가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만화에서 분명한 지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다소 모호해진 명랑만화의 위상과 정체에 대한 문제 제기를 위한 토대 작업이 될 것이다. 아쉬운 것은 지면과 필자의 능력 부족으로 인하여 이 글에서는 문제 제기에 그칠 뿐이라는 점이다.

197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어깨동무가 주는 신뢰와 재미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더불어 그것에 연재되는 작품의 대중적인 지지와 영향력 역시 대단한 것이었다. 도깨비감투를 제대로 읽기위해서는 어깨동무의 맥락 위에서 읽어야 하는 이유다. 현재적 시점에서어깨동무를 발행했던 육영재단의 성격과 실체, 발행 목적을 생각한다면, 그 시절 우리가 절대적 지지를 보냈던 작품들을 작품 그 자체만으로 평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상대적으로 이러한 맥락에서 자유로운 시점에 단행본 형식으로 읽어보는 것도 도깨비감투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할 수 있다. 사실 필자 역시 도깨비감투를 무척 즐겁게 읽으며 자란 세대(심지어 그 시절 도깨비감투를 소재로 동화-지금으로는 팬픽까지 써봤음을 실토한다)로서 오십이 넘은 나이에 다시 이 작품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오히려 단순하고 담백했다. 비쩍 마르고 키만 훌쩍 커버린 초등학생 하나의 소환, 잘 사는 사람보다는 잘 살고 싶어 애쓰던 서울 변두리 풍경의 소환, 친구들에게 빌려 읽던 도깨비감투갱지 냄새의 소환……이 작품을 매개로 타임 슬립(Time Slip)하는 순간 모든 현재가 미끄러지고 오롯이 그 시절의 나를 만나게 되는 즐거움을 체험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 시절 의 기억 어딘가에 도깨비감투와 함께 나를 묻어 두고 있었나보다.

신문수 만화는 도깨비감투가 그러하듯 추억 속의 만화가 아니다. 도깨비감투가 지금 이곳에서 다시 소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깨비감투에는 신문수 특유의 따듯하고 여유 있는 감성이 오롯이 살아있는 까닭이다. 하여 우리는 갈수록 강퍅해지는 세계 안에서 도깨비감투를 읽던 시절처럼 위로받고 의지하고 꿈꾸고 싶다. 처음 만났던 도깨비감투에서처럼.

2016년 도깨비감투》복간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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