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인회> 그 정체와 지속

․ 《<九人會> 소설의 문학사적 연구, (국학자료원, 1998)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구인회>는 그 중요성에 비해 본격적인 연구가 활발하지 못한 편이다. 그 동안 <구인회> 자체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활발하지 못했던 이유는 일반적으로 1) <구인회>가 유력한 멤버들로 구성된 집단이기는 하나 그들의 활동이 개별적이고 분산적이었다는 점, 2) 이들 작품이 보여주는 특징이 상이하다는 점, 3) 각각의 특성이 다른 시인작가들을 하나의 성향으로 묶어서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구인회> 구성원들의 개별적인 작가론에서의 부분적인 언급이나, 몇몇 문학사에서의 표면적인 언급을 제외하고는 근년까지 김시태, 김윤식, 최혜실, 서준섭 등의 논의가 있을 뿐이다. 최근 들어 소장 연구자들의 모임인 상허문학회에서 발표한 근대문학과 구인회정도가 있을 뿐이다. 이 연구서의 경우, 16개월간 공동연구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개별 논문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15명의 필자 개개인의 입점의 차이로 인해 일관되고 종합적인 고찰로서는 미흡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은 <구인회>의 연구사적 위치를 고려할 때, 이중재의 <九人會> 소설의 문학사적 연구는 매우 소중한 성과임에 틀림없다.

이 연구에서 그가 강조하는 목적은 <구인회>와 구성원들간의 본격적인 연관고리를 종합적으로 규명하려는 것이다. 기존 연구들에서는 <구인회>만을 연구 대상으로 하거나, 구성원들의 작가론 혹은 작품론이 연구의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연구들의 한계를 극복하고, <구인회>의 성격과 연관시켜 구성원들의 문학적 성과를 점검하려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김한식에 의해 먼저 시도된 바 있다. <구인회> 소설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개별 작가들의 문학적 특질을 규명하기 전에 먼저 <구인회>로 묶일 수 있는 문학적 성격을 먼저 추출 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김한식은 이태준, 박태원, 이상, 김유정 등이 밝히고 있는 소설관을 재구하고 이를 통해 소설 작품을 점검하고 있다. 그가 텍스트로 삼고 있는 것은 이태준의 <달밤>, <孫巨富>,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이상의 <날개>, <지주회시>.

그러나 1) <구인회>의 단체적 성격에 대한 연구가 미흡하고, 2) 작품 분석 자체가 다섯 작품에 국한됨으로써 그것들의 대표성은 물론 나머지 수다한 작품들에 대한 검증을 과제로 남기고 있다는 미진함을 남긴다.

이중재는 이 연구에서 김한식과 유사한 연구목적을 견지하면서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해 나가고 있다. 그는 먼저 <구인회>의 문학적 성격을 순수문학이라는 기존의 상투적인 범주화를 거부하고, ‘모더니즘의 일단으로 구체화하여 평가한다. 또 그는 연구대상을 1) 이태준, 박태원, 이상의 2)광복 이전의 3) 단편소설로 한정하고 있다.

이태준, 박태원, 이상의 작품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그들이 소설창작이라는 측면에서 <구인회>의 핵심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이효석, 김유정 등 강권에 못 이겨 가입한 형식적인 멤버들을 제외하고, 이종명, 조용만, 이무영 등은 지속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주목할만한 작품이 없기 때문에 논외로 한다는 것이다. 또한, 시기를 광복 이전으로 하는 것은 광복 이후 이태준, 박태원의 문학적 노선이 크게 바뀌고, <구인회> 소설의 특성을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중단편 소설로 한정하는 것은 그것들이 이 연구의 취지에 부합되는 까닭이라고 했다. , <구인회>로 묶일 수 있는 문학적 성격이 소설 속에서 얼마나 구현되었는지를 살피기 위해서는 비교적 그 구조화의 성격을 분명히 할 수 있는 중단편이 타당하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여기서 시기를 광복 이전으로 한정하는 것에는 다소 이견이 나타날 수 있다. 이태준이나 박태원의 광복 이후의 행적을 <구인회> 활동기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 역으로 <구인회>활동의 성격을 규명하려는 시도가 있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의 행적을 저자와 같이 단선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연속선상에서 파악하려는 시도의 설득력도 만만한 것이 아니다. 즉 광복 이후 이들의 변모는 문학관의 변화가 아니라, 식민지 시대부터 견지해오던 현실인식이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여 능동적으로 대응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기를 광복 이전으로 한정하기 위해서는 광복 이후의 활동에 대한 보다 분명한 성격 규명이 선행되어야 한다. 왜 이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없느냐 하면, <구인회>의 성격 규명에 있어서 키워드인 모더니즘의 성격과 맞물린 것이기 때문이다. 30년대 우리 모더니즘의 경우 세계사적 보편성의 차원과 상당한 괴리를 보이고 있음은 기존의 연구에서 입증된 바 있다. 30년대 모더니즘의 실체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20년대부터 광복이후의 양상까지 두루 살피지 않고서는 그 결과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연구의 말미에 제시되고 있는 <구인회>의 문학사적 의의가 모더니즘과 맞물린 것이라고 했을 때, 시기를 광복 이전으로 국한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아닐까하는 의문을 떨치기 어렵다.

저자는 <구인회>의 결성 배경으로 정치적 요인, 발생론적 요인, 사회적 요인, 문단 내적인 요인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정치적 요인으로는 3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하에서 탈이데올로기적인 순수문학을 전면에 내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들고, 급격한 도시화의 과정 속에서 성장한 도시세대 시인, 작가들의 등장을 발생론적 요인으로 제시했다. <구인회> 동인들은 도시화 과정 속에서 자라나 일본 등에 유학했으며, 일본의 의사(擬似) 근대화 정책에 따른 식민지 체제가 확립되는 30년대 이르러 문학활동을 했다는 공통점을 고려할 때 설득력을 갖는 요인이다. 또 사회적 요인으로는 30년대 들어서 모국어에 대한 의식의 고조로 한글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 그 결과 지식층의 현저한 증가와 문학 의식의 성숙으로 인해 작가나 독자 모두 보다 세련된 문학을 추구했다는 점, 그래서 통속적인 작품과 본격적인 작품의 양분화 현상이 두드러졌다는 것을 들고 있다. 문단 내적인 요인으로는, 20년대 프로문학과 민족주의 문학이 한계를 보이자 새로운 출구가 필요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저자는 동인 형성과정에 관한 논의에서 김윤식이 주장한 <구인회>의 정치성은 출발 당시에만 해당될 뿐 <구인회>가 완전히 결성된 후에는 이러한 정치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반박한다. 그 근거로 <구인회>의 주도권이 발기인인 이종명, 김유영에서 이태준, 정지용에게로 넘어갔다는 사실과 카프측에 대해 철저하게 무반응, 무관심을 보인 그들의 활동을 들고 있다. 매우 흥미롭고 설득력 있는 반박이다. 사실에 대한 검증 없이 누가 말했느냐에 따라 정설인양 군림해오는 국문학계의 많은 오류들이 이렇게 실증적이고 논리적인 연구들을 통해 새롭게 정립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 때문일까? 이렇게 시원한 느낌은!

저자는 <구인회>의 활동상황에 대해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하나는 개인활동에 치중한 이유를 규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배문인들에 대한 신랄한 비평을 통해 세대의식을 표방한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는 <구인회>가 집단적인 활동보다 개인적인 활동에 치우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구인회>동인들이 4대 신문의 학예면은 물론 몇 가지 문학 잡지 --정지용의 <카토릭 청년>, 이무영의 <조선문학> <문학 타임즈>, 조선중앙일보 자매지(이태준)의 자매지 <중앙>, 조선일보(김기림)의 자매지 <조광>, 동아일보(이무영)의 자매지 <신동아> --의 지면들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신들의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다는 점, 조직과 집단 활동을 중시한 카프와는 달리 문학의 정치적인 목적성을 배제한 문학만을 추구한 <구인회>의 근본적인 성격에 비추어 볼 때 자연히 집단적 활동보다는 개별적 활동에 더 비중을 두게 되었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인회>동인들은 모든 개개인이 탁월한 문학적 감수성과 개성을 지니고 있는 작가시인들이었으므로 수준 높은 작품들을 왕성하게 발표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무영, 이종명, 박태원, 조용만, 김기림 등이 각각 이광수, 현진건, 김동인, 염상섭, 주용한 등의 선배문인들에게 자극적인 내용의 공개장을 발표해서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점을 들어 <구인회>의 세대의식에 주목한다. 이것은 몇 가지 주목을 요한다. 1) 비판이 어조와 논점에 있어서 편차는 있지만, 모두 기성문인들의 창작의 침체와 부진함, 통속화의 경향, 창작태도의 안이함 등을 비판하는 한편 그들의 뼈아픈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것은 비판의 과정을 통해 그들 스스로 세대의식을 자연스럽게 표방하게 되는 것이다. 2) 이처럼 선배문인들의 창작의 침체와 부진을 질타하던 자신들도 그들이 요구했던 만큼의 수준 높은 작품들을 써내지 못했다는 자기모순의 문제이다. 따라서 그들의 비판은 새로운 문학을 추구한다는 자긍심과 자부심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3) 비판이 대상으로 선정된 작가들이 모두 민족주의 문학을 표방하거나 그 언저리에서 창작의 동기를 찾던 작가들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이것은 민족주의 진영의 작가들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자신들이 바로 민족주의 문학의 비판적 계승자임을 자인한 것이 된다고 평가하고 있다.

<구인회>에 대해 카프측에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못한 이유를 두 가지로 지적한다. 첫째 <구인회>가 등장할 시기에 카프의 세력이 현저히 약화되어 이미 와해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 카프측의 비판에 대해서 <구인회>측에서 철저하게 방관자적 태도를 취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저자는 좋은 작품을 써서 오직 작품으로 승부를 걸겠다는 <구인회>동인들의 결의에 따라 카프측의 비판에 대해 시종일관 무반응,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 그 자체는 <구인회>의 문학적 이념이나 특성을 시사해주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저자는 <구인회>가 한국문단에 이바지한 공적은 <구인회> 자체의 단체적 활동이나 그 역할 때문이 아니라, <구인회>가 구성원 개개인으로 하여금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소신껏 발휘할 수 있도록 그 구심체 역할을 담당했다는 데에서 찾아야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구인회>의 문학적 성과는 30년대 후반 이른바 김동리, 최명익, 허준 등 신세대 작가들에게 그대로 계승되고 나아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보았다.

저자는 결론을 대신하여 <구인회>의 문학사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구인회> 작가들은 무엇을이야기할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이야기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전대의 공리주의적인 목적문학의 한계에 대한 반발이라는 문학 내적 요인과 편내용주의적인 프로문학의 퇴조라는 문학외적 요인이 결과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문학은 그 자체로 고유한 가치를 지닌 자율적인 존재라는 문학에 대한 이들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자각에서 찾아야한다. 이는 그들이 미적 자의식을 체계적으로 수립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했다. 이와 같은 형식에 대한 관심은 문학의 일차 재료인 언어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 것이다.

둘째 모더니즘문학의 선봉장 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이태준, 박태원, 이상 등의 <구인회>작가들은 작품뿐 아니라 평론, 기타 잡문 등을 통해서 언어문법기법에 이르는 모더니즘 이론을 적극 수용소화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셋째, <구인회>작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역사사회 속에서 개인의 의미를 탐구하기보다는 역사사회로부터 유리된 개인의 삶의 모습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작품을 통해 지식인의 실직과 궁핍함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주목하고 있으면서도 당대 식민지 상황이나 사회구조적인 모순은 배제시킨 채, 작중 인물의 복잡 미묘한 내면 심리의 분석과 존재론적인 본질이 추구라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보인다고 보았다. 저자는 이러한 특성이 <구인회>작가들의 소극적인 세계인식의 결과기도 하지만, 집단적이고 총체적인 역사인식에서 비롯되는 공동체적 삶에 대한 관심 자체가 차단되고 봉쇄되던 당대의 현실상황을 고려해 보면, 작품 속에 구현된 <구인회> 작가들의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세계관을 단순히 현실 도피적이라고 폄하하기 어렵다고 했다. 즉 당대 식민지 상황에 대한 <구인회>작가들의 하나의 대처방식으로 수긍해야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저자의 이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끝내 수긍하기 어려운 것은 이것이 세계 대응방식으로 이해될 경우, 그 미학적 토대에 대한 논의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생략된 채 이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현실추수의 일상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게 된다. 문제는 이해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얼마나 세계인식과 대응에 유효한가이다.

넷째, <구인회>작가들은 모방론적 또는 반영론적 관점에 의거한 소설관을 부정하고 표현론적 관점에 의한 소설관을 견지하고 있다. 즉 표현과 묘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론적 소설관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소설이란 인간의 모습을 반영해내는 것이 아니라 언어라는 재료를 통해 작가의 독특한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인식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구인회>의 등장으로 소설에 대한 전문적인 예술가 의식 내지는 장인의식의 강조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창조적인 개성과 주관성 발휘를 중시하는 전문가의식장인의식이 <구인회>에 와서 본격화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 및 독자들의 문학에 대한 인식의 변화라는 요인을 갖고 있다.

저자는 <구인회>의 문학사적 의의를 1) 시문학파의 모더니즘적 이론과 해외문학파의 전문적인 예술가의식이라는 문학적 태도를 그대로 계승발전시킨 점, 2) 문학본래의 자율성을 중시하여 작품의 형식적인 측면에 보다 관심을 두었다는 점, 3) 30년대 후반 신세대 작가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묘사와 표현이 중심이 된 이태준의 문장 미학은 김동리황순원에게 이어졌고, 박태원이상의 심리주의적인 소설 기법은 허준최명익에게로 연결되어 <34문학>파와 <단층파>의 출형을 본다는 점을 찾아냈다.

그러면서 저자는 1) 지나치게 형식의 측면에만 관심을 모았다는 것, 2) <구인회>연구가 핵심 세 명에게만 국한되어 있다는 점 등을 이 연구의 미비점으로 지적한다.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면서, <구인회>의 성격을 먼저 규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작품과의 연관을 찾겠다는 저자의 의도는 매우 선행적인 의의를 갖는다. 안전한 기존의 방법론에서 한발구도 벗어 나려하지 않는 안일한 연구자들을 일깨우기에 충분할 것이다. 다만 다소 아쉬운 것은 저자도 밝히고 있지만, 연구 대상이 핵심인물 세 명 외의 동인들까지 함께 고찰해야 <구인회>의 대표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구인회>의 성격 자체가 통일된 강령 하에서 단일한 경향의 창작을 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다양하고 자유스런 분위기가 오히려 작품에 있어서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다양한 모습을 온전히 다 고찰했을 때, 저자가 의도했던 연구 성과를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형식적인 고찰 외에도 미학적인 고찰이 지나치게 소홀히 다루어졌고, 문학사적으로 모더니즘의 사적인 연관에 대한 규명이 다소 미흡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각을 지속적으로 견지하려하고, 철저하게 실증적인 작업이 이루어졌고, 무엇보다 <구인회>와 그 작품간의 연관을 밝히는 선구적인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유용한 참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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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지금 이곳에서 쓰고 있는 고전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삼국지는 살아있는 텍스트다. 대부분의 고전은 누대에 걸쳐 읽히면서 새로운 의미를 끊임없이 생산한다. 하지만 그것은 읽기와 관련된 것이지 텍스트를 다시 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데 왜 유독 삼국지만은 끊임없이 다시 쓰이고 있는 것일까?


삼국지는 명나라 때 나관중이 쓴 24240()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를 바탕으로 한다. 물론 나관중의 이 작품도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의 삼국지주(三國志註)에 수록된 야사와 잡기를 근거로,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의 줄거리를 중심으로 쓴 작품이다. 오늘날 전하는 삼국지는 청나라 때 모종강이 읽기 쉽게 다시 쓴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관중의 삼국지라고 부른다. 이러한 창작 과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삼국지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당대의 민중들이 요구하는 영웅들을 부각시키고 대중적인 요소들을 탄력적으로 삽입시킴으로써 끊임없이 다시 쓰고 읽히는 생명력을 갖게 된 것이다. 결국 삼국지를 읽으면 그것이 읽히는 시대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민중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요구하는 지도자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등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삼국지에는 그 시대의 열망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삼국지가 영원한 고전으로 다시 창작되는 이유인 것이다.

만화는 가장 대중적인 텍스트이다. 만화는 카툰화법(cartooning)을 주로 사용하며, 글과 그림의 이코노텍스트(econotext)로서 이미지의 연속성(narrative)을 필요조건으로 갖는 장르이다. ()의 객관적 재현보다는 주관적 왜곡을 통해서 전달의 효과를 높이는 카툰화법과 글과 그림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이코노텍스트적인 특성은 대중들의 접근을 용이하였다. 거기에 이야기 하는 인간(Homo Narran)’의 특성을 부각시킨 이미지의 연속성에 의한 서사(narrative)의 확보는 만화가 가장 대중적인 장르가 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최근 만화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폭발적이다. 그것은 크게 두 방향으로 드러나고 있는데, 하나는 먼 나라 이웃나라,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신화, 마법 천자문류의 학습만화시장의 급성장에 따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화의 스토리텔링의 원천소스로서 만화의 가치를 재인식하고 그 원작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그것이다. 20권까지 15백만 부 이상의 경이적인 판매량을 보인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신화14권까지 700만 부 이상의 판매량을 보인 마법 천자문의 예를 살펴보자. 이 두 작품은 모두 학습만화의 컨셉을 유지하면서 스토리텔링의 원천소스는 고전에서 가져왔다.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신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 그 자체를 학습만화의 형태로 바꾼 것이며, 마법 천자문은 중국고전 서유기의 스토리라인 위에서 천자문을 학습하는 방식이다.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성공은 학습만화라는 틈새 콘텐츠에 주목하고, 이윤기를 중심으로 불고 있던 신화 열풍을 중심 트렌드로 파악하여 그것을 콘텐츠 개발에 적극 반영한 결과였다. 신화를 원천콘텐츠로 하고 있는 이 경우는 학습만화를 통해 대중성을 검증하고, 이를 기반으로 애니메이션 <올림푸스 가디언>으로 발전적 변환을 시도함으로써 국내에서 장르 간 시너지 효과(cross over effects)를 성공적으로 극대화한 대표적인 콘텐츠가 되었다. 마법 천자문의 경우도 한자교육의 수요를 파악하고 보다 효과적인 학습형태로서 학습만화를 주목하였으며, 특히 드래곤 볼등으로 전환(adaptation)에 성공한 바 있는 서유기의 스토리라인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극적 흥미를 극대화한 결과였다. 더구나 이 두 작품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만화를 원천콘텐츠로하여 애니메이션(올림푸스 가디언, 태극 천자문)과 각종 뮤지컬 및 체험전 등으로 거점콘텐츠화함으로써 모범적인 One Source Multi Use의 사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원천콘텐츠는 독립된 콘텐츠로서 대중성을 검증 받아 이미 브랜드 가치를 확보한 콘텐츠를 말하는데, 장르 간 Multi Use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요소들을 콘텐츠 내부에 포함하고 있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원천 콘텐츠로서 활용되는 만화, 소설, 신화 등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대중성 검증이 가능해야하기 때문에, 그 자체 콘텐츠로서의 완성도를 확보하고 있어야만 한다. 반면, 거점콘텐츠는 원천콘텐츠를 기반으로 대중적인 호응을 기대할 수 있는 콘텐츠로 전환한 것을 말한다. 즉 매체와 장르의 확대를 통하여 Target의 확장을 도모할 수 있는 콘텐츠로 전환을 꾀하는 것으로 대중적인 호응은 필수적이다. 대중적인 호응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의 접근이 손쉬운 매체와 장르를 택해야 하기 때문에 이에 따른 많은 변환비용(Conversion Cost)을 요구하고 동시에 그만큼의 risk도 증대되는 것이다. 따라서 거점 콘텐츠의 경우 Target의 규모와 범위, 수평적/수직적 Multi Use의 활성화 기대 정도, 콘텐츠 자체의 대중성 확보 방안 등이 성패를 좌우하는 중심 요소이다. 거점콘텐츠는 기획단계에서 메인수익 window 선정, 수평적 Multi Use의 노출 시기와 빈도, 수직적 Multi Use의 다양성, 콘텐츠 브랜드 관리 방안 등에 대한 섬세한 고려가 요구되는 것이다. 원천콘텐츠를 거점콘텐츠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환의 목적에 부응하는 전략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만화는 원천콘텐츠로서 미덕을 골고루 갖춘 장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스토리텔링의 대중성을 검증할 수 있고, 그림으로 구체화되기 때문에 애니메이션, 영화, 드라마, 게임, 캐릭터 등으로의 장르 간 전환이 용이하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의 경우 대부분의 콘텐츠가 만화를 원천콘텐츠로 하여 출발하는 안정된 One Source Multi Use의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만화를 원천콘텐츠로 하여 <미녀는 괴로워>, <식객>, <타짜>, <>, <풀 하우스> 등의 성공적인 전환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다만, 문제는 이와 같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작품들이 얼마나 문화적 가치 창출했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는 점이다. 문화콘텐츠 시장의 규모나 그 파괴력을 고려하고, 특히 문화콘텐츠가 문화적 역량을 콘텐츠화함으로써 재화적 가치를 생산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문화적 가치의 창출은 선택이 아닌 필수조건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번 천웨이동(陳維東)삼국지출간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다. 천웨이동을 처음 만나 것은 문화콘텐츠와 문화전통 등을 주제로 개최된 국제학술대회에서였다. 무림의 고수와 같은 인상의 그는 중국 전통문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만화에 대한 열정이 지금도 또렷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그의 중국 전통문화에 대한 열정과 신념은 좌중을 이미 압도하고 있었는데, 특히 중국 고전을 작품 당 80권 정도로 창작하고 있다는 말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중국고전에 대한 깊이와 넓이를 갖지 않고서는 감히 시도할 수 없는 작업이며, 그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력과 자금 등의 단단한 토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해 겨울 우연한 기회로 천진에 있는 그의 회사를 방문한 자리에서 그의 말이 계획이 아니라 진행형이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중국 전통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그의 회사는 매우 인상적인 것이었는데 특히 전통문양의 창문과 다실(茶室)은 그의 중국 전통문화에 대한 사랑을 한눈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미 그는 300여권의 만화를 제작하였으며, 그의 작품은 유럽과 일본을 비롯한 국제시장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천웨이동은 신중국만화의 창시자이자 이론가라는 점이다. 국내에서도 숱하게 지적되어온 일본 만화의 폐해를 극복하고자 중국의 독자적인 내용과 형식을 통해 중국독자에게 다가서고, 이를 기반으로 세계시장에 중국만화를 알리겠다는 그의 의지가 신중국만화라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이러한 천웨이동의 노력은 일본 만화에 경사되어 있는 한국 독작들에게 있어서도 또 다른 만화의 가능성을 읽게 해 주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천웨이동의 만화 삼국지는 우리 어린이들 책장에 꽂혀있는 조악한 그림과 정보의 학습만화와는 분명하게 구별이 되는 작품이다. 중국전통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삼국지의 의미를 서두르지 않고 천착해가는 그의 행보는 분명 주목할만한 것이다. 국내에서 삼국지의 열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박종화, 김구용, 김홍신, 특히 이문열의 삼국지1,400만부가 판매된 바 있다. 또한 역사만화의 수작으로 손꼽히는 고우영의 만화 삼국지바벨 2로 유명한 일본 만화가 요코야마 미츠테루(橫山光輝)삼국지도 이미 소개된 바 있다. 고우영의 삼국지는 살인적인 연재스케줄에도 불구하고 엄혹했던 시대와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비판하며 삼국지를 읽어낸 수작이다. 블랙유머로 시대와 소통을 시도했고 용기있게 비판하면서도 극적 긴장을 놓치지 않았던 작품이 그것이다. 이처럼 뛰어난 많은 소설과 탁월했던 만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웨이동의 삼국지가 기대되는 것은 신중국만화의 작품에 대한 낯선 흥미와 그동안 중국 고전을 극화해온 작가의 내공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중국문화와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삼국지를 읽고 이해할 수 있으며, 동양문화의 보편성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갖지 못하고 어떻게 이 시대를 삼국지와 만나게 할 수 있겠는가?

첸웨이동의 삼국지은 독특하게 장 구성을 했다. 중심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만화로 극화하고, 그 뒤에 해당 장의 줄거리를 붙이고 이를 통해 생각해볼 것들을 삼국지 기사의 형식으로 첨부한 후, 해당 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고사성어를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의 인물열전은 옛 사서(史書) 편제를 따르면서도 인물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동시에 진행하는 독특한 부분이다. 장대한 스케일의 스토리를 모두 만화로 극화하지 않고 과감한 생략과 절제를 통하여 극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천웨이둥의 혜안이 빛나는 부분이다.

작품을 처음 접한 독자들은 한 면당 칸의 개수에 무척 낯설어 했을 것이다. 일본 만화나 국내 만화와는 다르게 한 면당 칸의 개수를 과감하게 줄임으로써 이야기 진행 속도를 빠르게 하면서 동시에 상대적으로 크게 확보된 칸을 통해 캐릭터의 심리나 매력이 여실히 드러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고량에 의해 수입이 결정되는 기형적인 구조로 인하여 무절제하게 남발되었던 일본식 그림과 칸들에 익숙해 있던 독자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갈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림은 크지만 섬세하고 캐릭터 하나하나의 심리와 성격을 드러내는데 중심을 두고 있는 까닭에 정밀한 구도와 계산된 구성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으로는 정적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러한 느낌은 배경 톤이나 동작선의 남발보다는 인물 그 자체의 표정과 동작을 통하여 움직임을 표현하고 가볍지 않은 동작으로 표현하려는 데서 기인한 것이다. 만화를 진행하면서도 중간에 연표나 각종 병장기에 대한 소개 등을 삽입함으로써 보다 구체적이고 생생한 극화를 만날 수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의 미덕 중 하나다.

만화는 가장 대중적이지만 하위문화로 취급되어 왔다. 선정성과 폭력성으로 질타를 당하는 자극적인 내용, 저급한 그림 수준, 유통되는 미디어의 하위성 등이 그 평가의 근거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구박받으면서도 아직까지 꿋꿋하게 아니 더 파괴력을 갖으며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만화라는 장르 자체가 지닌 생명력이며 동시에 경쟁력일 것이다. 더구나 최근에 영화, 애니메이션, 드라마, 게임, 캐릭터 등의 분야에서 그것들의 근간이 되어줄 스토리텔링의 보고로서 만화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가 천웨이동의 삼국지를 만난 것은 행운이다. 문화적 역량과 문화 전통이 지금 이곳에서 빚어내는 문화적 향취를 만화라는 가장 대중적이고 경쟁력 있는 장르를 통하여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전쟁 시대를 사는 지금 이곳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가 쓰는 또 하나의 삼국지를 읽는다. 아니 쓰고 있다. 그렇게 쓰고 있는 것이 반드시 삼국지가 아니어도 좋다. 천웨이동의 이 작품과 같이 깊이와 향기를 지닌 또 다른 우리의 고전이었으면 좋겠다. 지금 이 작품을 읽는 여러분이 바로 그렇게 써야만할 또 한 사람의 천웨이동이다.

-2008년 천웨이둥, 삼국지》 발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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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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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 스토리텔링으로 서다

 

박기수(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전 세계적으로 10년간 32천만부 이상을 판매한 <해리포터>시리즈가 완결되었다. 해리포터라는 이 작은 꼬마가 소설과 같이 성장하며 일구어낸 신화들, , 초당 23권의 경이적인 판매 부수를 보였다거나, 완결판의 보완을 위하여 블룸스베리출판사는 190억원을 들여 보완체제를 개편했다거나, 이 책을 출간한 국내 출판사가 향후 50년간 책을 찍지 않아도 충분할 만큼의 돈을 벌었다는 등의 이야기들은 이제 더 이상 새롭지 않다. 그렇다고 게임에 빠져 있던 아이들의 독서습관을 기르는데 도움이 되라고 부모들이 구입한 덕이라는 등의 구태의연하고 당위적인 주장도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해리포터> 시리즈를 살펴보고 그것의 미덕과 한계를 점검해보려 한다.

많은 자본이 들어가는 문화콘텐츠에서는 실패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대중성과 시장성이 검증된 텍스트와 windowing이나 One Source Multi Use를 원활히 수행할 수 있는 텍스트를 원천콘텐츠로 선호한다. 원천콘텐츠는 대중성뿐만 아니라 향유를 활성화할 수 있는 다양한 요소를 지니고 있어야 하며 거점콘텐츠로의 전환(adaptation)이 용이한 구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해리포터>시리즈는 원천콘텐츠로서 다양한 미덕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책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영화의 예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퀴디치, 호그와트 교복, 마술봉, 마술 빗자루 등 향유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미시콘텐츠들이 거시콘텐츠의 내러티브 구조 안에 유기적으로 잘 구조화됨으로써 텍스트의 완성도를 제고하는 동시에 부가상품화 가능성을 극대화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미시콘텐츠의 활성화는 해당 콘텐츠의 수익 증가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거시콘텐츠에 대한 관심을 상기시키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효한 전략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 시리즈가 흥미로운 것은 기본 생활은 영국식 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극적 사건 전개에 필요한 악당이나 괴물들은 서구의 신화들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특수성과 보편성을 절묘하게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규모의 경제를 확보해야 하는 문화콘텐츠 시장에서 문화할인율을 고려한 다양한 배려는 기획 단계부터 시도된다는 측면에서 <해리포터> 시리즈는 양질의 벤치마킹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존 피스크가 말한 대중문화콘텐츠의 3가지 차원의 생산성을 고려한다면, 이 시리즈는 보편적 신화의 특수한 재맥락화를 통한 기호학적 생산성과 향유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언술행위의 생산성을 활성화시키고 있다는 점, 그리고 다양한 텍스트적 생산을 통하여 그것을 지속강화하는 전형적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거칠게 단순화한다면 <해리포터> 시리즈는 익숙하고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는 서구의 신화와 전설 등을 참신한 캐릭터의 복수담과 미스터리담, 그리고 무엇보다 캐릭터들의 성장담으로 전환시킨 이야기이다. 익숙함과 참신함의 8:2로 배분하는 할리우드식 문화콘텐츠 대중화 전략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하지만 좀 더 섬세하게 말하자면 이 시리즈가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위와 같은 다양한 미덕을 하나의 텍스트에 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우수한 스토리텔링을 생산할 수 있었던 기저에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오늘도 끊임없이 스토리텔링을 고민하고 있다는 영국 내 2만 개에 달하는 스토리텔링 클럽에 있다. 다양한 문화적 역량을 지니고 있는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이 자기방식으로 대중성을 획득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하여 수시로 찾는다는 스토리텔링 클럽! 문화콘텐츠의 금과옥조처럼 이야기하는 개인의 창의력이란 바로 이러한 지속적인 노력과 양질의 향유공동체를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이 시리즈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해리포터> 시리즈는 완결되었지만 이것을 원천콘텐츠로 하는 거점콘텐츠화 사업은 앞으로 몇 년간 우리를 또 흥분시키며, 그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불려줄 것이다. 지금 이곳에서 이국의 낯선 이름들 대신 <미르가온>처럼 낯익은 우리 꼬마들이 펼치는 마법과 모험의 판타지를 기다려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2007년 <한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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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이 힘이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트랜스포머>, <스파이더맨 >, <디워>의 공통점은 내용중심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시각적인 놀라움과 즐거움이 압도적인 영화라는 점이다. 서사론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전통적인 의미의 내러티브에서 탈피하여 비주얼스토리텔링을 향유의 중심에 둔 영화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세 영화 모두 올 여름 극장가를 강타했다는 점이다. 특히, <디워>를 둘러싼 논쟁은 우리의 스토리텔링에 대한 관심과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준 사건이었다.


<디워>의 내러티브 부재를 지적했던 사람들은 옳았지만 틀렸다. 분명 <디워>의 내러티브 부재를 꼬집었던 그들의 지적은 옳았지만, 그 정당한 지적은 <디워>를 향유한 800만 이상의 관객들의 즐거움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틀렸다. <디워>의 국내 흥행 대박을 비주얼스토리텔링에 대한 향유가 본격화된 징후로 보아야 한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 역시 비주얼스토리텔링이 압도적인 콘텐츠였지만 완성도 높은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까닭에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그것이 내러티브가 부재한 <디워>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스토리텔링은 비주얼스토리텔링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스토리텔링은 스토리’(story)말하기’(tell) 그리고 현장성과 상호작용성(ing)으로 구성된 것이다. , 스토리텔링은 디지털 문화 환경의 도래와 뉴미디어의 발달로 인하여 스토리만큼이나 그것을 말하는 방식과 구현하는 방식이 중요하게 되었고, 그 결과 2의 구술성 시대의 도래가 가능해짐으로써 상호작용성에 기반한 향유의 극대화 과정이 더욱 부각된 결과다. 쉽게 말하자면 이제 말하는 내용만큼이나 말하는 방식과 구현 방식에 주목하게 되었고, 어떻게 향유를 극대화하느냐를 중시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유희성이 전면화되었다는 것이다.

원더걸스의 <텔미> 열풍도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외모나 가창력 면에서 압도적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원더걸스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텔미>라는 노래와 춤이 절묘하게 결합하여 구현된 결과다.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텔미> UCC 동영상을 보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다양하게 재생산하고 있는 <텔미> UCC 동영상들은 향유자들이 이 노래에서 즐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강변하고 있다. 특히 절묘한 시점에 공개된 원더걸스 프로듀서이기도 한 박진영의 <텔미> 춤의 원본 UCC를 보면, 이 열품이 얼마나 정교한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흥미로운 것은 향유자들이 이 각각의 것들을 <텔미>라는 노래와 함게 즐기지만, 노래만을 즐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노래의 텔링에 해당할 수 있는 곡 해석력이나 가창력 등은 물론 춤이나 구성원들의 연출된 이미지 그리고 심지어 제작과정의 비화까지를 매우 주도적인 자세로 통합적으로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콘텐츠의 근간은 스토리텔링이다. 스토리텔링은 향유자들이 텍스트와 소통하는 기본 회로라는 점에서 중요하며, 특히 One Source Multi Use틀 통한 문화콘텐츠 수익 실현과정에서 중심이 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텍스트의 완성도와 대중적 소구를 결정짓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토리텔링은 기존의 내러티브 논의와 같이 해석 중심의 의미 탐구가 아니라 생산을 위한 전략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에서 전개되어야만 한다.

문화콘텐츠가 많은 자본(high-cost)을 요구하는 까닭에 위험이 많은(high-risk) 분야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문제는 위험을 어떻게 줄이고 성공 가능성을 높일 것이냐에 있는데, 그 중심에 스토리텔링이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리텔링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수준은 그리 높아보이질 않는다. 객관적이고 정치한 선행사례 분석을 통하여 보다 양질의 스토리텔링을 생산하려는 노력보다는 한 작가나 기획자의 발상이나 감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전근대적인 마인드가 아직도 만연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미드처럼 시즌제를 기반으로 6개월 제작 6개월 방영의 주기적 순환을 통하여 제작 일정의 안정적 확보가 어려운 우리의 현실을 고려할 때, 스토리텔링의 생산성을 극대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문화콘텐츠의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다양한 전략의 연구와 생산의 노력이 시급하다. 이러한 모든 노력의 토대가 스토리텔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지속적인 창작을 수행할 수 있는 우수한 인력을 양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화중심도시 광주에서 스토리텔링 아카데미를 개설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선택과 집중에 의한 과감한 교육모델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더구나 광주는 풍부한 예술 역량을 도시 속에 내재화하고 있고, 숱한 이야기꾼들의 아기집 노릇을 해왔다는 점에서 스토리텔링 아카데미에 거는 우리의 기대가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광주가 아시아문화중심도시로서, 동시에 문화콘텐츠의 생산 허브로서 우뚝 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광주가 지닌 스토리텔링 역량을 결집시키고 구체화해야할 것이다. 정부와 시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아직 광주의 문화콘텐츠 생산 역량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노력들을 수렴하고 하나로 꿰어낼 수 있는 구심점이 없기 때문이다. 문화콘텐츠의 다양한 영역과 분야 그리고 미디어들의 소통회로가 스토리텔링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스토리텔링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한 스토리텔링 역량을 강화하려는 노력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스토리텔링과 상관한 광주의 문화 역량을 모으고, 광주 지역 소재 대학들의 유관학과와 연계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산학협력을 기반으로 연구-교육-생산의 체계를 구축하며, 멘토링 시스템을 통한 실천적인 노력을 경주한다면, 오늘 우리의 기대는 멀지 않은 미래의 현실이 될 것이다. 광주가 스토리텔링을 선점하고 특화시킬 수 있을 때, 광주를 중심으로 한 문화콘텐츠 성공모델이 등장할 것이고, 그것은 다시 90%이상 서울에 몰려 있는 문화콘텐츠 기업들의 광주행 러시로 이어질 것이다. 지식기반사회를 선도할 문화콘텐츠에 대한 기대가 이제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에 대한 관심과 실천으로 구체화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2007년 <광주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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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매트릭스, 세컨드 라이프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는 퍼스트 라이프(First Life)가 아니다. 세컨드 라이프는 핍진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퍼스트 라이프와 흡사하지만 현실원칙에서는 자유롭다는 점에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현실과 흡사하기 때문에 몰입할 수 있고, 현실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즐거울 수 있는 이율배반적인 창조의 공간이 세컨드 라이프다.


실제와 유사한 생활을 즐기면서도 현실원칙에서는 벗어난 이 개방형 가상세계의 매력은 향유자 스스로 참여해서 즐길 것을 만들어내고 그 과정에서 수익까지 창출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와 같이 관계하지만 관계로부터 자유롭고, 사랑하지만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려는 일방적 욕망의 콘텐츠들이 차고 넘치는 지금 이곳에서 세컨드 라이프는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사랑스럽게 나를 위해 반응해주기만을 기대할 뿐 돌봐주거나 챙겨줄 의무는 없는 로봇 개, 내가 원하는대로 꾸며주고 감정을 배설하기는 하지만 상대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아도 좋은 일방적 사랑의 대상인 관절인형, 관계를 전제로 하지만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며 스스로 꾸밀 수 있지만 언제든 스스로를 닫아걸 수 있는 싸이월드, 스스로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여주거나 볼만한 것을 만들어 올리는 UCC 등에 익숙한 우리에게 린든 랩이 제공하는 세컨드 라이프는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세컨드 라이프는 참여, 공유, 개방이라는 웹2.0의 서비스 전략과 일치한다. 세컨드 라이프는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을 생산자의 시나리오에 따라서 제한적으로 즐기는 것이 아니라 제공되고 이미 만들어진 것은 제한적으로 수용하면서 향유자의 참여와 공유의 부단한 상호작용을 통하여 자신과 세계를 열어간다는 두드러진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세컨드 라이프는 가상세계에서 주도적으로 참여와 수행을 지속하는 향유자, 그들과 세계의 상호작용을 이끌어내는 리마커블(remarkable)’한 요소들이 어우러져 벌이는 지극히 자유로운 카니발적 공간으로 볼 수 있다. 세컨드 라이프가 즐거운 것은 즐거움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향유자 스스로 그곳에서 즐거움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컨드 라이프는 스스로 콘텐츠를 만들지 않고 그래픽 제작 프로그램 등만 제공하여 UCC를 활성화시킨다. UCC의 즐거움은 자유로움에 있는데, 이것은 승패나 구속으로부터의 자유이며 동시에 향유자 스스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기대와 성취의 자유이다. 기대와 성취의 과정은 향유자 간의 상호작용을 전제로 다양한 즐거움을 자유롭게 추구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구매한 아이템의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생산성도 확보할 수 있다는 미덕을 지니고 있는 네트워킹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강력한 플랫폼이다.

최근 세컨드 라이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세컨드 라이프가 국내에서도 그 열풍을 이어나갈 수 있느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컨드 라이프가 우리의 퍼스트 라이프에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가에 대한 기대와 우려에 대한 것이다.

국내에서 세컨드 라이프가 활성화될 것인가에 대한 전망은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비관적이다. 그 근거로 온라인게임에 익숙해 구낸 향유자들에게 세컨드라이프의 가상현실은 새롭지도, 매력적이지도 않다는 점, 국내 향유자들의 경우 싸이월드나 MMORPG 등 더 재미있는 대체재들이 많다는 점, 시작하기 전까지 배우고 조작해야할 것이 너무 많다는 점, 목적이나 임무가 없기 때문에 창조적으로 즐길 수 있는 향유자가 아니라면 뚜렷한 즐거움을 찾기 어렵다는 점, 번역기가 제공되지만 언어적인 장벽 등을 제기한다. 이러한 비관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놀라운 성장세에 힘입어 세계 최초로 한국 지사(물론 세컨드 라이프 안에서지만)가 설치되고, 새로운 놀이와 비즈니스의 공간으로서 새로운 것의 전위에 서기 좋아하는 우리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세컨드 라이프의 국내 성공 여부에 대한 막연한 비관이나 낙관이 아니라 낙관적 전망을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전략일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매달 50만명씩 향유자의 증가를 가능하게 하는 요인인 무엇인지, 토지 분양과 관리비 외에 국내적 특성을 반영한 수익모델은 어떤 것이 가능할지, 사이버아이덴티티의 퍼스트 라이프에 대한 긍정적 견인 방안 등에 대한 생산적 탐구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세컨드 라이프가 퍼스트 라이프에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가에 대한 기대와 우려는 이제부터 지속적으로 고민해야할 과제이지 세컨드 라이프를 칭송하거나 비난하기 위한 판단의 근거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동안 사이버 세계가 부상하면서 제기되었던 비관과 낙관의 다양한 견해들을 가장 새롭고 구체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세컨드 라이프를 통하여 진지하게 검토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이버 아이덴티티의 문제, 퍼스트 라이프와의 법적, 윤리적 상관성의 문제, 대중추수주의에 따른 문화적 타락과 전환의 문제, 현실 세계의 황폐화 등의 문제는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연구해야할 문제이지 판단의 근거는 아니라는 점이다. 세컨드 라이프가 제공하는 자유는 퍼스트 라이프를 전제로 하는 상대적 자유기 때문에, 현실의 탈락보다는 현실과 긴장을 유지함으로써 창출된다. 따라서 지금 우리는 세컨드 라이프로 인하여 야기되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하여 보다 선도적인 자세로 전략적인 대응을 해야만 한다. 세컨드 라이프가 게임이냐 아니냐를 논쟁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창출하는 리마커블한 요소가 무엇인가에 주목하는 전략적 탐색, 사이버 아이덴티티를 통해서 견제하는 현실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 문화적 타락을 견제할 수 있는 치유 방안 등에 대한 실천적인 탐구 등이 그것이다.

세컨드 라이프와 퍼스트 라이프의 공분모는 그것을 향유하는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날마다 진화하며, 진화의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충한다. 정체성의 확충은 진화하는 자신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내가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나로서 존재하는 세컨드 라이프에서 내가 누리고 추구하는 것들은 지금 이곳에서 우리 자신이 갈구하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세컨드 라이프는 당신들의 천국이 아니라 우리들의 천국이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고, 그 즐거움의 원천이 자유로움이라면, 그것을 통해 구체화된 나 아닌 나의 자유를 통하여 나인 나를 진지하게 성찰해야만 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성찰하는 나인 나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그 는 끊임없이 참여하고 공유하고 개방하는 과정을 주체적으로 즐길 줄 하는 여야만 할 것이다.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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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과 만난 세계사의 즐거움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우리는 역사를 쉽게 잊지만 역사는 우리를 결코 잊지 않는다. 때문에 역사는 흘러 간 과거가 아니라 흐르고 있는 현재이며, 앞으로 흐르게 될 오래된 미래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어제이고 오늘이며 내일인 역사를 배우고 삶 속에서 체화시켜야하는 것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세계화를 지향하는 지금 이곳에서 세계사의 중요성은 재산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재미있게 효과적으로 학습할 것이냐에 있다. 바로 이것이 <달력 속에 살아있는 세계사>에 주목하는 이유다.


이 책의 미덕은 역사책 속에서 풍화될 뿐이던 화석화된 세계사를 달력이라는 생활 소품을 활용하여 일상의 세계로 끌고 나왔다는 점이다. 어렵고 외워야하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달력과 함께 부담 없이 즐기는 과정을 통해 살아있는 역사와 끊임없는 대화를 시도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획 의도는 책의 입체적인 구성을 통하여 더욱 빛나고 있다. 해당일의 역사적 사건은 물론 더욱 깊이 있게 탐구할 수 있도록 관련 사건을 연계시켰고, <역사 속 오늘 어떤 일이?>라는 코너를 통하여 독자 스스로 더욱 찾아 읽을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있으며, 화려한 도판과 지도 등을 통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또 하나 이 책의 미덕은 이미 세계적인 지명도를 확보하고 있는 캐릭터인 뿌까의 엔터테인먼트적 확장이라는 점이다. 이 책에서 뿌까는 친숙함으로 독자를 소구하면서도 내용에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독자와 동반자적인 관점을 유지함으로써 학습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캐릭터의 생산적 확장 과정에서 매우 실천적이며 효과적인 전략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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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아야 하는데 놀 줄은 모르고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놀고 싶다고 놀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놀 시간과 놀 수 있는 경제적 여건 그리고 마음의 여유까지 모두 갖추어져 있어도 놀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일하기 위해 논다던 아버지 세대와는 달리 요즘은 대부분 놀기 위해 일한다고 합니다. 일과 놀이가 하나였던 시기를 이상적인 삶의 공간으로 설정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금 이곳에서 일과 놀이는 아무래도 하나가 되기는 무척 어려워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모두 결사적으로 놀고 싶어 합니다.

오월이 아름다운 것은 대학의 축제가 있기 때문이라던가요. 하지만 정작 축제가 끝나고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별로 재미없었답니다. 어디서 누구에게 들었는지 한 학생이 정치적 이슈가 있었던 1980년대 축제는 멋지지 않았냐고 제게 묻습니다. 축제를 마친 다음 날이면 소방호스로 캠퍼스 곳곳에 하얀 버짐처럼 떨어져 있는 최루탄 가루를 치우던 관리 아저씨의 모습이 문득 떠올리며, 그렇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마 우리도 그 시절에 그 경직된 축제문화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며(축제를 폐지하고 대동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그 무렵), 1970년대 축제에는 낭만이 있었느니, 퇴폐적이었느니 운운했을 것입니다. 설사 지나간 시절의 축제가 재미있었다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지금 이곳에 있는 내가 축제를 즐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요?

난 요즘 오빠의 노트북이 되고 싶어!”

아내의 이 한마디는 충격적이었습니다. 휴일도 없이 몇 개월째 계속되는 제 강행군은 아이들은 물론 아내에게서도 멀리 나와 있던 모양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0주년 되는 결혼기념일에도 춘천에서 학회 발표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급한 일들만 마무리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가족들과 평창에 다녀왔습니다. 새로 지어진 팬션은 세련되고 깔끔했습니다. 허브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바비큐 그릴에 고기를 구워 먹으며 아버님과 소주를 마시고 아내와는 맥주를 마시는 동안 아이들은 신이 나서 뛰어 다녔습니다. 다음날에는 봉평장 구경을 하고 속초 대포 항까지 다녀왔습니다. 23일 동안 분주하게 차를 몰아댄 것은 사실 갑자기 주어진 그 시간 동안 함께할 프로그램이 딱히 없었기 때문입니다. 70이 넘으신 부모님과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두 딸 아이, 그리고 아내와 제가 함께 공유할만한 놀이를 찾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그냥 푹 쉬면 될 거 아니냐고 물으시겠지만, 문제는 무엇을 하며 쉬느냐였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고민은 저만의 것은 아니었는지 이웃 팬션의 사람들도 무척 분주해보였습니다.

저는 지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삶에 대해서 찬사를 보내기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 차릴 수 없이 분주하고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을 살아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무엇인가 해야 한다면 제대로 하자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제대로 노는 일의 중심에는 물론 우리 자신이 있어야겠죠. 그리고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은 노는 것도 평소에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낯선 것은 좀처럼 가볍게 즐길 수 없습니다. 늘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취향과 시간적경제적 여유에 적합한 놀이를 찾아보고, 주변 사람들과 그것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굳이 전문가들에게서 배우지 않더라도 자기 스스로 주체적으로 즐길 수 있는 것들을 미리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이죠. 자전거를 배우지 않고서는 자전거를 탈 수가 없습니다. 자전거 타는 즐거움은 자전거를 배우는 즐거움과 배운 이후에 그것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놀이를 다 포함하는 말이겠죠.

이와 같이 놀 줄 알게 된다면 자신의 아이들에게 낯부끄러운 향락적인 밤 문화는 많이 사라지겠죠. 그것이 꼭 고급한 놀이 문화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부부가 함께 악기를 연주하거나 그림 전시회에 다니는 일도 좋지만 취향에 따라서 같이 바둑을 둔다거나 요즘 인기 있는 영화를 노부부가 두 손 꼭 쥐고 함께 본다면 어떨까요? 자식들 이야기 하며 친구 부부들과 포커 한판은 어떨까요? 물론 보다 우아하고 의미 있는 놀이라면 더욱 좋겠지만 저는 이정도로도 만족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는 앞으로 더 분주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는 만큼 놀이의 강도와 만족도에 대한 기대도 높아지겠죠. 그렇다면 쉰다거나 노는 일 자체에 감사해하는 지금과는 달리 무엇을 하며, 어떻게 놀 것인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해야만할 것입니다. 시간이 남아서가 아니라 시간을 내서 만나는 사람이 소중한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물어 봅시다. 시간이 남아서가 아니라 시간을 만들어서 놀만한 것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2003오픈아이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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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2와 소주 사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일요일 아침 아내는 좀처럼 잠을 놓아주지 않습니다.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는 두 녀석을 깨워서 씻기고 입히고 먹여서 내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인지, 아침에 나갔다가 늦은 밤을 데리고 들어오는 제가 모처럼 집에 있는 날이어서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아내는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내가 일어나지 않아도 허기는 아이들을 깨우고, 깬 아이들은 저를 깨웁니다. 제가 일요일은 짜파게티 먹는 날이라고 우기는 동안에도 아이들은 만화채널을 넘나들며 애니메이션을 봅니다. 벌써 소파에는 녀석들이 먹었음직한 과자 봉지와 첫째가 제 목숨처럼 아끼는 스티커 북이 멋모르고 제 언니를 따라하는 둘째의 스티커 북과 함께 널려 있습니다. 그것들을 치우는 동안 짜파게티 끓일 물이 끓을 때쯤 햇살은 벌써 소파에 들어와 앉아 있습니다.

일요일 아침 아이들이 먹는 짜파게티 만큼이나 저는 녀석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이 불만입니다. 과장된 몸짓과 감정 표현, 거친 말투, 극단적인 적대적 관계 설정 등이 거침없이 반복되는 그것들을 그만 보게 하고 싶은데, 늘 잠의 유혹은 아버지의 의무보다 달콤합니다. 사실 애니메이션을 가지고 학위논문을 섰던 제가 아이들의 애니메이션에 불만을 갖는 것은 애니메이션에 대한 편견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편향성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은 일본 코믹물이 대부분인데, 그것들의 과장된 몸짓과 감정 표현, 거친 말투, 극단적인 적대적 관계 설정 등을 아이들은 이내 따라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TV에 나오는 내용을 아이들을 보고 따라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지나친 걱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제 아이들의 모방을 보면서 그런 걱정은 지나쳐도 좋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녀석들에게 이런 애니메이션 말고 다른 채널의 애니메이션을 보여줄라치면 녀석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습니다. 무엇보다 좀처럼 그치지 않는 둘째의 울음에 저는 대책이 없습니다. 둘째를 달래기 위해 TV에 피코를 연결해주고, 첫째의 컴퓨터 오락을 묵인해줍니다. SEGA에서 개발한 것을 삼성이 수입 판매한 피코는 원래 첫째의 것인데, 늘 그렇듯 첫째의 것은 둘째의 것입니다. 싱가폴 사는 제 이모가 가져다 준 일제 컴퓨터 게임CD는 첫째의 보물입니다. 두 녀석은 각자의 보물과 꽤 오래 같이 놉니다.

그러다가 그것도 지루해지면 녀석들은 제게 달고나를 해 달라고 조릅니다. 할인매장에서 어린시절이 생각나서 구입해온 달고나 세트는 아이들의 일요일 군입거리입니다. 어설프게 눌러준 뽑기를 손에 들고 이제부터 자신들을 어떻게 즐겁게 해줄 것이냐고 다그치듯이 쳐다보면 저는 둘 중에 하나는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는 아이들과 PS2 게임을 즐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열에 두세 번은 PS2를 설치합니다. PS2게임은 아이들이 어리고, 저도 할줄 아는 게임이 많지 않아서 간단한 철권을 함께합니다. 한글화 되어있지만 음성은 일본어로 나오는 철권을 하다보면 아이가 묻습니다. “아빠, 저 사람들은 왜 싸워?” 게임의 스토리를 설명하려다가 그만둡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아이들의 자전거를 가지고 집근처 공원에 갑니다. 둘째는 자전거를 잘 타지 못하고 어리광이 심해서 세발자전거 앞에 끈을 묶어 끌고 가는 경우 많습니다. 물론 더 심하면 아이를 업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 시간 쯤 놀고 집으로 오는 길에 아이들은 저를 문방구로 데리고 갑니다. 스티커 몇 장을 사달라는 거지요. 국적불명의 캐릭터들의 스티커를 사주고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려주면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더없이 행복한 표정을 지어줍니다. 배가 볼록하게 나올 정도로 두툼해진 아이들의 스티커 북에는 일요일마다 새로운 스티커 캐릭터들이 붙습니다.

올해 전면 개방된 일본문화는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몇몇이 두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일본문화가 아니라 일본문화콘텐츠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얼마 전에 일본에 다녀오신 은사님께서 일본인들이 소주를 술집에 keeping해 두고 마시며, 심지어 소주에 얼음을 타서 마신다며 재미있어 하셨습니다. 함께 웃으며 소주를 마시다가 보아를 떠올렸습니다. 소주는 어떻게 마시든 한국식이라는 이름이 붙겠지만 보아가 부르는 노래에서 한국적인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지 생각했습니다. 한류는 있지만 한국은 없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일본문화의 유입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문화의 일본 진출은 그리 호들갑 떨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무엇을 어떻게 수출할 것이냐가 아닐까요? 또는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정체성에 대한 실체적 탐구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아이들은 스티커 북을 가지고 놀고 있습니다. 아내는 어느새 피코와 PS2를 치운 모양입니다. 제 서재에는 이번 논문의 테마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몬스터 주식회사>, <치킨 런> 등의 CD가 놓여 있습니다. 분석한 메모들도 아내가 정리한 모양입니다. 니콘 디지털 카메라나 도시바 노트북을 가지고 있다는 것보다는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듯, 보아나 <태극기 휘날리며>가 일본에서 각광을 받는다는 사실보다는 그들이 왜 그런 문화코드에 열광하느냐에 주목해야 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해봅니다. 아이들이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는 모양입니다. 봄의 나른한 햇살은 이제 거실 끝까지 들어와 있습니다. 아내는 이제 저녁을 지을 모양입니다. 저는 다시 애니메이션 CD를 노트북에 밀어 넣고 있습니다.

2003오픈아이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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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 넌 대장금이 되지 말거라.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지난 설에 일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 3학년인 처남네 아이들이 세배를 와서는 노래를 들려주었습니다. “오나라 오나라……아내와 저는 신기해서 웃고, 장모님은 대견해서 웃고, 큰딸은 부러워서 웃고, 작은딸은 우리가 모두 웃으니까 웃었습니다. 인터넷에 가사를 다운 받아서 고모네 가서 들려준다고 며칠 연습을 했답니다. 물론 처남네 아이들이 이틀 간 머무는 사이에 두 딸들도 그 노래를 배웠고, 할아버지 생신날 멋지게 불렀지요.

<대장금>의 인기를 설명하는 것은 구구한 일입니다. 하지만 <대장금>의 인기 요인을 분석하는 것은 매우 유효한 일이 될 것입니다. 특히 <대장금>은 드라마의 작품성뿐만 아니라 그것의 콘텐츠적 가치를 효과적으로 실현한 대표적인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대장금>의 인기는 캐릭터와 공간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캐릭터를 구현하는 곳이 공간적 배경이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긴밀한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지요. 수라간과 내의원이라는 공간 설정은 음식건강이라는 코드로 요약이 되며, 이는 지금 이곳에서 우리의 관심이 가장 많이 모이는 것들입니다. 평소에 볼 수 없는 최고의 음식을 만드는 과정과 시식의 장면을 보여주는 것은 요리 프로에서 자주 볼 수 있었지만 이야기 속에서 구현된 것은 흔치 않은 일로 무척 새로운 일이었습니다. 의술은 <허준> 등을 통해 이미 대중성을 인정받았던 분야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음식은 경쟁의 형태로, 의술은 생사의 절박함으로 등장함으로써 극적 긴장을 높여준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두 소재는 콘텐츠적 가치라는 측면에서 상당히 성공적이었다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반면, <대장금>은 그것의 인기보다는 성공한 캐릭터나 독창적인 캐릭터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금 더 자세히 읽어봅시다. 장금이는 이 시대가 욕망하는 여성입니다. 섬세한 시청자라면 장금이를 보면서 <허준>의 예진아씨와 <인어공주>의 아리영, 그리고 <다모>의 채옥을 쉽게 떠올렸을 것입니다. 예진 아씨의 탁월한 의술과 지고한 정신적 사랑, 아리영의 다재다능함과 복수를 위한 당찬 의지, 채옥의 빼어난 무술실력과 주체적인 삶의 의지 등을 모두 조합하면 장금이가 탄생합니다. 주체적으로 삶을 개척하고, 자기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고, 신분을 넘어선 사랑을 이루어내면서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어머니와 스승의 한까지 풀어내는 장금이는 이 시대가 욕망하는 여성형 아니 인간형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은 옳은 탓에 그릅니다. 옳은 이유는 장금이는 이 시대가 욕망한다는 것이고, 그른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인물이 아니며 이 시대의 고민을 공유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장금이는 자기 시대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왜 평생 궁녀로 살아야하는지, 어머니와 스승을 죽음으로 내모는 부조리한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그 부조리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지 따위는 그녀의 관심이 아닙니다. 극의 후반부에서 장금이가 내의원의 안락함이나 권위를 버리고 백성들 사이의 의원으로 남고자 하는 것 등을 통해서 이러한 한계를 해소하려하지만, 그것이 갈등의 현장인 대궐을 벗어남으로써 이루어내려 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지 못합니다. 여기서 좀더 나가면 그녀를 욕망하는 이 시대의 문제가 남게 됩니다. ‘에 대한 선망,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자기 처지에 대한 두려움, 평범함을 넘어서고 싶은 보상심리 등이 장금이를 그려내고 있지만, 우리가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것은 짱 신드롬이 철저한 배제의 원리로 운용이 되며, 우린 대부분 포함이 아닌 배제되는 쪽에 속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장금이를 통해서 두려움을 넘어서고 대리만족을 얻으려는 우리의 심리적 이행은 현실이 누락된 허위의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작품에서는 장금이를 제외한 다른 캐릭터들은 모두 장금이의 성공담을 위한 배경적 캐릭터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한상궁은 인기는 얻었지만 그녀만의 독특한 캐릭터는 얻지 못했고, 같은 이유로 금영은 최상궁의 캐릭터와 다르지 않으며, 민정호는 중종과 변별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장금이의 캐릭터도 예진아씨와 아리영 그리고 채옥을 더한 후에 채옥의 무술만 제외하면 만들어지는 캐릭터로서 아니던가요. 문제는 장금이가 이들 캐릭터의 섞어찌개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한계를 문제의식 없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체적인 여성 같지만 여성스러움이나 남성종속적인 구조를 넘어서지 못했고, 주체적인 자기 삶의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처음 기획되었던 부분까지는 어머니와 스승의 복수담을 넘어서지 못했고, 이후에 주체적이 의지를 드러내는 부분은 극적 긴장을 이미 상실했다는 점 등이 그 증거지요.

<대장금> 노래를 부르는 아이에게 묻습니다. 장금이처럼 되고 싶냐고. 요리사가 되고 싶다는 다섯 살 둘째야 물정 모르는 녀석이고, 첫째는 장금이 처럼은 싫고 의사선생님은 되고 싶다며 아비의 염려를 피해갑니다. 그래 그러렴. 염려 많은 아비는 바랍니다. 아이가 장금이 처럼 살지 않기를. 그것은 장금이의 삶이 고단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그녀의 삶을 살지 못했고 자기 시대를 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으로 꾸릴 수 있다면 삶이 고단한들 뭐 그리 대수이겠느냐고. 하지만 끝내 마지막 말은 하지 못합니다.

2004년 《오픈아이》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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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먹고 잘 살면 다냐?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비 오는 날에는 자장면이 먹고 싶다던 시인이 있습니다. 대학원을 다니며 야간학교 국어교사를 했던 그분이 끼니를 놓치고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허겁지겁 비워내던 한 그릇의 자장면에는 고단한 일상이 자장이 되고 면이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한 주 용돈이 5000원이던 대학시절,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하나를 포기해야 했죠. 토요일에 강의가 없는 것은 순전히 제 용돈이 그 하루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우기던 시절이었지요. 학교 앞 시장에서 500원짜리 국수를 사 먹고 나머지 돈으로 사서 읽던 시집들. 그것을 밑줄 그어가며 읽고 읽다보면 어느새 암송할 수 있게 되면 술자리에서 약간의 취기를 가장해서 암송하던 치기어린 시절이었지요. 자취하던 녀석에게 집에 김치 한 포기 가져다주고 그것을 안주로 소주를 마시던 그 시절을 전 가끔 풍요의 시대라고 부르곤 합니다.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을 요즘 웰빙(well-being)이라고 부르지요. 그것이 꼭 유기농 채소를 먹거나 휘트니스 클럽에서 달려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양한 삶이 품목들을 채워가며 자신의 사람값을 높이고 싶다는 뜻이겠지요. 사실 이 말은 우리가 평소에 사람값을 제대로 못 받고 살고 있다는 뜻이겠죠. 문제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사람값의 맨 마지막 항목이라는 것이죠.

하루는 선배 교수님이 아침에 욕실에 들어 간 초등학교 3학년 딸이 나오지를 않아 욕실을 열어보니 딸아이가 울고 있더랍니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아이를 달래고 보니 아이가 세면대를 잡고 그러더랍니다. “아빠 사는 게 힘들어!” 술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웃다가 모두들 말없이 쓴 소주만 거칠게 비웠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겝니다. 강의를 마치고 출판사에 들려서 회의하고 자정이 다돼서 집으로 들어가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창고의 강릉으로 가는 차표 한 장이라는 노래를 듣다가 결국 차를 갓길에 세웠던 것이……. 만만한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 만만하면 삶은 또 뭐 그리 살만하겠습니까? 그렇다고 어떻게 살 것인지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잘 사는 일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잘 먹고 잘 살자고 우린 필사적입니다. 요리 프로그램도 전에는 만드는 법을 소개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요즘은 전부 맛집이나 맛난 요리에 대한 소개가 대부분입니다. 입고 먹고 사는 곳에 힘을 모으다보니 정작 어떻게 왜 살아야 하는지 따위에는 좀처럼 생각을 주지 못합니다. 욕망은 한없이 비대해지고, 비대해진 욕망만큼 결핍을 낳게 되고, 결핍은 다시 욕망을 낳는 악순환에 치여서 생각하고 의미를 만들어갈 우리 삶의 몫들이 훼손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지요. 전 세계 인구의 20%가 영양실조고, 17%는 마실 물조차 구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협박조의 통계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잘 먹고 잘 사는 일은 항상 주변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전제로 해야 합니다. 유기농 농산물을 먹고 비만해진 몸을 팻다운을 먹고 운동을 하며 줄여가는 것은 마치 로마인들이 맛난 음식을 먹기 위해 먹고 토했다던 그 야만을 지금 이곳에서 되풀이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로마인들이 그런 도락을 즐기는 동안에 뙤약볕에서 땀흘려야했던 노예들이 있었고 굶어죽어 가던 식민지 백성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더불어 함께하지 않고서 자신들만의 천국을 만들던 로마인들은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당신일 수밖에 없었고, 서로가 서로의 천국을 파괴하는 비극을 맞게 된 것은 제가 여기서 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 되겠죠.

웰빙은 단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얼마나 건강하게 살 것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떻게’ ‘무엇을 위해사는 것인지 돌아보고 살피는 삶의 자세일 것입니다. 허겁지겁 때늦은 자장면을 먹던 시인이 먹었던 것이 어디 면과 자장만이 아니었듯이, 점심과 바꾼 것이 시집만은 아니듯이 우리가 우리 시대에서 지켜 내야할 것이 유기농 채소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오염된 채소라도 웃으며 함께 나눌 사람들, 그들과 함께 채워 가야할 우리 삶의 시간들, 시간들을 의미 있게 만들어갈 의지와 소양들,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따듯한 사랑이 우리가 우리시대에서 지켜 내야할 웰빙의 조건들이 아닐까요? 아토피 피부염으로 고생하는 아이에게 손톱이 퍼렇게 알로에 껍질을 까서 강판에 갈아서 밤새 문질러줬다는 선배나 가려워하는 아이를 위해 밤새 자신의 침을 발라주었다는 친척형님의 말씀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배워가는 요즘입니다. 봄이 익어갈수록 꽃이 흐드러집니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지닌 색깔이나 향 때문이 아니라 함께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당신과 함께 봄 안에 있어 행복합니다.

2004년 《오픈아이》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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