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무슨 재미로 살아?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몇 주 전 휴일이었다. 이번 달 안에 마무리할 책 원고 때문에 몇 주째 잠이 부족한 상태였고, 무엇보다 전날 모임에서 술을 마신 터라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원고는 마무리해야 하는데 숙취로 집중이 잘 되지 않아 서재와 거실 소파를 오가는 내 모습을 보며 아내가 한 소리 했다. “당신은 무슨 재미로 살아?”
그러고 보니 그렇다. 연구하고 강의하는 일 외에는 딱히 하는 일이 없다. 젊은 시절 친구들이 즐기던 당구도 배우지 않았고, 골프도 별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클래식음악 애호가도 아니고 요리를 즐기는 것도 아니다. 굳이 하나 들라면 작은 화분을 가꾸는 것일 텐데, 그것도 혼자 볼 수준을 넘지 못한다. 사실 남는다고 의식되는 시간도 거의 없다. 그나마 남는 시간도 대부분 연구와 상관되는 콘텐츠를 분석하거나 책을 본다. 남들이 말하는 재미하고는 조금 거리가 있고, 대부분 혼자서 하는 일이다. 시간을 내는 일도, 하는 일도 없으니 할 줄 아는 것도 거의 없다.
의사인 고등학교 친구 A는 몇 해 전부터 그림을 그린다. 문화센터에 찾아가서 그림을 배워 취미로 꾸준히 그리고 있단다. 그림뿐만 아니라 쿠키 만드는 법을 배우러 다니기도 하고, 아이스하키를 배우는 아들을 태워주다가 자기도 아이스하키를 즐기게 되었단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곳에 비슷한 사연을 가진 아빠들과 아예 팀을 꾸려서 정작 아이는 아이스하키를 그만두었는데 아빠들은 계속하고 있단다. 어디 A뿐이랴? 아침마다 산을 찾고 그곳에서 찍은 사진을 페이스 북에 올리는 B, 주말마다 자전거 여행을 보여주는 C, 사진 개인전을 열기도 한 D,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와 책을 낸 E, 일요일 아침마다 모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즐기는 동문들까지 참 열정적으로 재미있게 지낸다. 사실 그동안 그런 재미를 꿈꾸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해마다 일을 줄이고 조금 여유를 찾겠다고 다짐하지만, 일을 줄이기는커녕 해가 갈수록 더욱 분주해질 뿐이다. 서재에는 글씨를 쓰겠다고 모아둔 붓과 등록하고 가지 못한 피트니스 센터 회원권과 출사를 꿈꾸는 카메라 가방은 먼지만 뽀얗게 덮여 있다. 강박처럼 구입하는 신간들은 연구실과 서재에 읽는 속도보다 빠르게 쌓여있다.
생각해보면 할 줄 아는 게 없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다는 말은 오늘까지의 자부일 뿐이다. 지금껏 부지런히 살아왔다는 자부만으로는 현재의 삶도 재미있게 만들지 못하는데 미래의 시간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가족을 위해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아왔으니 노년이 행복할 것이라는 기대는 소박한 바람일 뿐이다. 재미있게 살고 싶다면 그 또한 준비하고 노력해야 한다. 하고 싶은 일들, 재미있는 일들 중에 시간을 들여 배우지 않고 가능할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아마도 그 시작은 스스로에게 좀 더 많은 시간을 내주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적 관계가 요구하는 시간을 선별하여 줄이면서 자신이 좋아하고 재미있어 하는 일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아내가 지난해부터 운동을 시작한 이유리라. 몸에서 땀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던 아내가 벌써 1년 넘게 운동을 지속하고 있다. 운동을 다녀오면 온몸이 아프다고 즐거운 엄살이다. 바른 체형의 아내가 원하는 것이 군살 없는 몸매겠는가? 주어진 시간 동안 건강하고 즐겁고 그래서 당당한 삶이 아니겠는가?
젊어서는 내가하는 일이 제일 흥미롭고, 성취할 때마다 더할 수 없는 즐거움이어서, 굳이 다른 재미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지금도 책상이나 강단 위에서가 제일 편하다. 편한 일이 즐거운 일은 아닐 텐데, 그쯤에서 만족한다. 일상의 분주함과 피로는 관성이 되고, 게으름은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보니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좋아하는 것인 무엇인지, 재미있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잃어버렸다. 맹목적인 성실과 지향 없는 부지런함은 그저 매일매일 고단하게 반복되는 ‘사랑의 블랙홀’이 아니던가? 스스로 물어본다. “당신은 무슨 재미로 살아?”
<매일경제> 2018.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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