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무슨 재미로 살아?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몇 주 전 휴일이었다. 이번 달 안에 마무리할 책 원고 때문에 몇 주째 잠이 부족한 상태였고, 무엇보다 전날 모임에서 술을 마신 터라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원고는 마무리해야 하는데 숙취로 집중이 잘 되지 않아 서재와 거실 소파를 오가는 내 모습을 보며 아내가 한 소리 했다. “당신은 무슨 재미로 살아?”

그러고 보니 그렇다. 연구하고 강의하는 일 외에는 딱히 하는 일이 없다. 젊은 시절 친구들이 즐기던 당구도 배우지 않았고, 골프도 별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클래식음악 애호가도 아니고 요리를 즐기는 것도 아니다. 굳이 하나 들라면 작은 화분을 가꾸는 것일 텐데, 그것도 혼자 볼 수준을 넘지 못한다. 사실 남는다고 의식되는 시간도 거의 없다. 그나마 남는 시간도 대부분 연구와 상관되는 콘텐츠를 분석하거나 책을 본다. 남들이 말하는 재미하고는 조금 거리가 있고, 대부분 혼자서 하는 일이다. 시간을 내는 일도, 하는 일도 없으니 할 줄 아는 것도 거의 없다.

의사인 고등학교 친구 A는 몇 해 전부터 그림을 그린다. 문화센터에 찾아가서 그림을 배워 취미로 꾸준히 그리고 있단다. 그림뿐만 아니라 쿠키 만드는 법을 배우러 다니기도 하고, 아이스하키를 배우는 아들을 태워주다가 자기도 아이스하키를 즐기게 되었단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곳에 비슷한 사연을 가진 아빠들과 아예 팀을 꾸려서 정작 아이는 아이스하키를 그만두었는데 아빠들은 계속하고 있단다. 어디 A뿐이랴? 아침마다 산을 찾고 그곳에서 찍은 사진을 페이스 북에 올리는 B, 주말마다 자전거 여행을 보여주는 C, 사진 개인전을 열기도 한 D,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와 책을 낸 E, 일요일 아침마다 모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즐기는 동문들까지 참 열정적으로 재미있게 지낸다. 사실 그동안 그런 재미를 꿈꾸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해마다 일을 줄이고 조금 여유를 찾겠다고 다짐하지만, 일을 줄이기는커녕 해가 갈수록 더욱 분주해질 뿐이다. 서재에는 글씨를 쓰겠다고 모아둔 붓과 등록하고 가지 못한 피트니스 센터 회원권과 출사를 꿈꾸는 카메라 가방은 먼지만 뽀얗게 덮여 있다. 강박처럼 구입하는 신간들은 연구실과 서재에 읽는 속도보다 빠르게 쌓여있다.

생각해보면 할 줄 아는 게 없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다는 말은 오늘까지의 자부일 뿐이다. 지금껏 부지런히 살아왔다는 자부만으로는 현재의 삶도 재미있게 만들지 못하는데 미래의 시간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가족을 위해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아왔으니 노년이 행복할 것이라는 기대는 소박한 바람일 뿐이다. 재미있게 살고 싶다면 그 또한 준비하고 노력해야 한다. 하고 싶은 일들, 재미있는 일들 중에 시간을 들여 배우지 않고 가능할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아마도 그 시작은 스스로에게 좀 더 많은 시간을 내주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적 관계가 요구하는 시간을 선별하여 줄이면서 자신이 좋아하고 재미있어 하는 일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아내가 지난해부터 운동을 시작한 이유리라. 몸에서 땀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던 아내가 벌써 1년 넘게 운동을 지속하고 있다. 운동을 다녀오면 온몸이 아프다고 즐거운 엄살이다. 바른 체형의 아내가 원하는 것이 군살 없는 몸매겠는가? 주어진 시간 동안 건강하고 즐겁고 그래서 당당한 삶이 아니겠는가?

젊어서는 내가하는 일이 제일 흥미롭고, 성취할 때마다 더할 수 없는 즐거움이어서, 굳이 다른 재미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지금도 책상이나 강단 위에서가 제일 편하다. 편한 일이 즐거운 일은 아닐 텐데, 그쯤에서 만족한다. 일상의 분주함과 피로는 관성이 되고, 게으름은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보니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좋아하는 것인 무엇인지, 재미있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잃어버렸다. 맹목적인 성실과 지향 없는 부지런함은 그저 매일매일 고단하게 반복되는 사랑의 블랙홀이 아니던가? 스스로 물어본다. “당신은 무슨 재미로 살아?”

<매일경제> 2018.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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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에 대한 어설픈 편견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학생들과 쓰촨을 다녀왔다. 방학마다 중국 곳곳을 방문하지만 늘 놀랍고 새로울 뿐이다. 평생을 보아도 제대로 다 보기에는 워낙 많은 사람들과 넓은 지역, 그리고 빠른 속도의 변화가 놀라움이라면, 그 안에서 문득 발견하는 그들의 문화는 새로움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문화란 삶의 반영이니 직접 살아보지 않고서는 쉽게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삶이라는 것이 당대의 것만도 아니어서 오랜 전통을 온몸으로 체감하지 않고서야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 더구나 중국은 그들이 자랑하듯 오랜 역사와 수많은 소수민족이 공존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집합이라기보다는 개개의 군집적 성격이 더 강하지 않던가? 그러니 현재 중국이 어떻다 이야기하는 것도 섣부른 일이겠지만 코끼리 다리 더듬는 심정으로 그 새로움을 읽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되리라.


이번 탐방에서 무엇보다 새롭게 발견한 것은 그들이 다르다는 것의 매혹과 근력을 전략적으로 세련되게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르다는 의미가 단지 동시대적인 의미에서의 민족과 공간의 차이만이 아니라 통시적으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차이까지 현재적 시공간 안으로 수렴하여 구현하고 있었다. 각 지역의 특성을 그대로 살리면서 55개 다양한 소수민족이 공존하는 나라다보니 특이한 것도 많고,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묶지 않고 각각 공존하게 하고 있으니 그 다양성의 경쟁력은 이미 아는 바와 같았다. 거기에 전통 문화를 과감하게 현재적 맥락에서 소환하여 지속적으로 콘텐츠 가치를 창출하려는 시도는 규모와 실천에서 세련된 참신함이 돋보였다. 이미 널리 알려진 인상공연뿐만 아니라 멋스러운 전통 건축물 안에 들어선 스타벅스와 파리바케트 같은 현재적 향유 공간, 전통문화와 연계한 다양한 참여형 콘텐츠, 관광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역민의 삶과 연계된 유적지는 매혹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르다는 것을 쉽게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일수록 포괄이 아닌 배제, 이해가 아닌 강요가 앞서는 닫힌 사회다. 배제와 강요에 익숙해진 닫힌 사회의 구성원들은 누구도 쉽게 수용하지 않듯이 우리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것이 다른 문화든 사람이든 혹은 다른 시대이든 물 흐르듯 섞이지 않으면 함께하기 어려운 시대다. 물론 중국이 답이라는 말이 아니다. 광장과 공원마다 국가주의적 색채가 도드라지고, 낯설고 강압적인 구호가 가는 곳마다 붙어있고,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혼란도 분명한 그들의 얼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 민족, 시대의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려는 노력에 자꾸 눈이 갔던 것은 우리에게 부족한 부분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또 하나 이번 탐방에서는 어설픈 편견이 여지없이 깨졌다. 그동안 중국에서 물건을 살 때, 그들이 달라는 대로 주면 손해라는 인식이 있었다. 사실 반 이상 깎아서 사기도 했으니 꼭 편견이라고 이야기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이번 청두에서는 정찰제라서 깎을 수 없다는 말을 들었고 역설적으로 그래서 물건 값에 더욱 신뢰를 갖게 되기도 하였다. 인민공원에서 우리에게 같이 배드민턴을 치자고 하거나, 전철에서 계속 말을 걸어오던 노부부나, 도강언에서 한국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던 양꼬치 팔던 회족 청년이나, 아미산 부근 숙소에 두고 온 시계를 전화를 걸어 찾아준 주인이나, 거의 모든 결제를 모바일로 하는 모습이나 이번 탐방에서 만난 현재 중국의 모습이었다.

일반적으로 새롭게 부상하는 대상을 폄훼하는 것은 분노와 두려움의 이중적인 감정의 발로다. 알리바바, 텐센트, 바이두와 같은 IT기업의 급부상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중국을 짝퉁상품과 싸구려상품을 생산하는 공장정도로 치부할 수 있을까? 편견은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소통하지 못한 결과다. 편견의 원인이야 무엇이든 책임은 편견을 갖는 사람과 그 대상 모두를 해친다. 방학을 맞아 해외로 향하는 학생들이 보고 듣고 느끼고 체험해 와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다르다는 것의 매혹과 근력인 이유다.

 

2018.02.02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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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와 장관

 

박기수(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전문가는 어떤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기능을 가지고 그 분야에서 비해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전문적인 지식과 기능이 하루아침에 체득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전문가는 대부분 오랫동안 그 분야의 일을 한 사람이다. 하여 그들은 그것으로 밥벌이를 하거나 혹은 밥벌이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것을 꼭 해야겠다는 의지와 열정이 남다른 사람들이다. 그래서 전문가라는 말에는 자기 분야에 대한 자부와 자존의 품격을 가진 사람들의 범접하기 어려운 아우라(Aura)가 있다.

서울신문 중에서

평창 동계 올림픽 개폐회식을 성공적으로 이끈 총감독 송승환 씨의 며칠 전 인터뷰가 화제다. 그는 자신이 잘한 일 중 하나가 MB정부 때 문화부 장관을 거절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MB정부에 방점이 찍힌 것인지, 문화부 장관에 방점이 찍힌 것인지는 직접 물어봐야 알 일이지만, 나는 그 의미가 후자일 것이라 믿는다. 더불어 그러한 선택이 그가 문화기획전문가로서, 연극배우로서 가지고 있는 전문가다운 자부와 자존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을 한다. 이 말은 문화부장관이 별 것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일생을 바쳐 일궈온 자기 분야 전문가로서의 열정과 자부를 더 가치 있게 생각한다는 의미다. 멋지지 않은가? 누구는 하지 못해 안달인 자리를 거부하고 자기 분야에서 자기가 즐기는 일을 꼿꼿한 자부와 자존으로 성공적으로 일궈내는 전문가. 평창 동계 올림픽의 개폐회식에서 가슴 뛰는 감동을 얻은 이들이라면, 아무도 생각지 못한 드론쇼와 마지막 성화 주자였던 김연아의 공중 스케이팅 그리고 선수단 입장 내내 춤을 함께 춤을 추던 자원봉사자들의 열정에 압도된 이들이라면, 그러한 성취가 어디에서 올 수 있었던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송승환 씨는 젊은 시절 텔레비전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릴 때도 늘 자신을 연극배우라고 불렀었다. 그렇게 말한 것은 젊은 시절 그가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식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지향점에 대한 반복적인 선언이 아니었을까? 지향해야할 정체성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길을 잃지 않는다. 연극으로 시작해서 방송과 공연계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교수로서 후학을 지도하는 그가 보여준 전문가로서의 성취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기 분야에서 브랜드를 갖게 된 전문가에게 마치 시혜나 베풀듯 장관직을 권하는 풍토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다. 장관이야 해당부서에서 그 분야 일을 평생 해 온 전문 관료들이 맡으면 될 일이다. 20년 전쯤 김영하 작가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당시 대다수 작가들이 대학교수로 가는 세태를 꼬집었었다. 대학에서 후학을 지도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작가의 궁극적인 목표가 마치 교수인양 대학으로 가서는 창작을 이어가지 못하는 세태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작가의 유명세에 편승하기 위하여 앞 다투어 모셔가는 대학교를 비판한 것이다.

장관이든 교수든 그것도 전문가의 영역이어야 할 것이다. 뚜렷한 성격을 지닌 전문가의 영역에 불쑥 다른 영역의 전문가가 들어오는 것은 둘 다의 전문성을 모욕하는 일이다. 그동안 우리는 각기 자신의 분야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룬 분들이 장관 자리를 제안 받고 입각한 사례를 많이 보아왔다. 대부분 기대만큼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그동안 쌓아왔던 명성에 상처만 내고 초라하게 물러났다. 전문가의 전문성을 유명세 정도로 이해하거나 지나치게 신화화했기 때문이다. 전문가의 전문성이 필요하다면 지위나 권력을 앞세워 시혜를 베풀 듯 제안하기 전에 그가 갖고 있는 전문성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존중을 자세를 먼저 가져야 할 것이다. 각자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로 살아가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가 아닐까? 송승환 씨의 장관직 거부와 평창 동계 올림픽 개폐회식 자꾸 연결되며 멋져 보이는 것은 나만의 감상은 아니리라.

 

2018.03.30.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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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영화가 가슴으로 읽히는 이유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시간이 남아서 하는 일보다 시간을 내어서 하는 일이 재미있다. 숨넘어갈 듯 분주할 때면 그런 시간이 더욱 간절해지고는 하는데, 지난 주말이 그랬다. 해야 할 일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영화 두 편을 보았다.

마틴 맥도나 감독의 <쓰리 빌보드>는 분노와 화해를 이야기한다. 영화 속 세 개의 빌보드는 딸아이의 억울한 죽음에 무관심한 세상을 향해 진실 규명의 요구이며, 범인을 꼭 잡겠다는 의지이고, 딸을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의 표현이다. 세 개의 빌보드만큼이나 눈길을 끄는 것은 거침없고 당당한 엄마 밀드레드의 분노였다. 지켜주지 못했으면 그 죽음의 억울함만이라도 풀어주어야 할 텐데, 진실을 밝혀주어야 할 경찰이 손 놓고 있다고 생각하는 밀드레드는 분노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이어간다. 암 투병 중 자살하는 경찰서장 윌러비, 방화의 알리바이를 만들어주는 제임스, 파면된 이후에도 진실을 밝히려 노력하는 경찰관 딕슨. 이들은 모두 흠결과 모순 안에 존재하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밀드레드를 도와 진실을 밝혀내려 노력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당위적인 화해나 구원을 이야기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왜 화해에 이르지 못하는지, 화해에 이르기에는 우리가 얼마나 각기 다른 존재인지, 그럼에도 화해에 이르기 위해 어떻게 노력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스콧 쿠퍼 감독의 <몬태나>는 폭력과 증오의 역사를 지나온 사람들의 화해와 구원을 이야기한다. 전역을 앞둔 전쟁영웅 블로커 대위, 죽음을 앞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추장 옐로우 호크 일가, 코만치 족에게 가족 모두를 잃은 퀘이드 부인, 인디언 가족을 잔혹하게 살해한 윌스 병장. 이들은 증오와 폭력이 반복하면서 그려낸 피해와 가해의 무간지옥과 그곳으로부터의 구원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이 영화에서는 무엇이 정의인지를 말하지 않고 어떻게 서로 용서하며 함께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한다. 정의는 언제든 갖가지 이해관계나 다양한 맥락에 의해 변질되고 왜곡될 수 있지만 용서와 화해는 더불어 살 수 있는 변하지 않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코만치에게 가족을 모두 잃은 퀘이드 부인이 백인에게 가족을 모두 잃은 인디안 소년을 데리고 시카고로 떠나는 것도, 그 기차에 인디언 학살로 인해 전쟁 여웅이 된 블로커 대위가 전역한 모습으로 오르는 것도 그런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거친 말 대잔치라도 벌이는 듯, 거칠고 센 말들이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요즘이다. 거칠고 센 말들은 잠시 이목을 끌 수는 있지만 지속적으로 소통하거나 설득시킬 수는 없는 언어다. 더구나 거칠고 센말은 그 강도로 인해 왜곡되고 다양한 매체에 흔적을 남김으로써 말한 사람과 듣는 사람을 배반하고 통제할 수 없는 괴물이 되어 버린다. 더구나 SNS를 통해 공론의 장에서 검증되지 않은 개별화된 정보가 터무니없는 신뢰를 갖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공유되는 미디어 환경에서 거칠고 센 말들은 가공할만한 폭력으로 확대재생산 되지 않는가. 이청준은 떠도는 말들-언어사회학 서설Ⅰ》에서 인간이 말을 배반함으로써 말들은 제 의미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고, 왜곡되어 길을 잃고 떠돌고 있다고 비판했다. 작가가 두렵게 예견했던 일이 약 40년이 흘러 지금 이곳에서 현실이 되고 있다. 인간이 말을 배반하고 결국 말은 인간을 배반하게 됨으로써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불통의 폭력이 되고 있는 현실, 그것이 앞으로 어떤 괴물이 될지 알 수 없기에 더욱 두렵다.

2018년 지금 이곳에서 <쓰리 빌보드><몬태나>가 가슴으로 읽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가족을 잃은 밀드레드와 퀘이드 부인의 절망과 분노 그리고 용서를 보았다. 원수지간이던 블로커 대위와 옐로우 호크가 어떻게 이해하고 화해하는지도 보았다. 구시대의 언어로 윽박지르는 빅마우스가 선두에 서던 시대는 갔다. 자극적인 말로 거칠게 공포와 분노를 부르는 것은 설득이 아니라 협박이다. 협박의 언어는 지지를 얻을 수도 지속될 수도 없다. 좀 더 진정성 있는 이해의 언어 세련된 설득의 언어가 필요한 시대다. 분노는 더 큰 분노를 부를 뿐이라는 대사가 절절한 이유다.

 

2018.05.18.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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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헤어롤 혹은 거리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지하철을 탈 때면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고 페이스북과 카카오톡 사이를 오간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딱히 눈을 둘 곳도 귀를 기울일 곳도 없는 까닭이다.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관심이나 접촉이 두려워서다. 혹여 라도 뜻하지 않은 접촉으로 오해를 부를까 손도 팔짱을 끼어 단속을 한다. 그날도 그랬다. 지하철을 타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유리창에 비친 모습이 낯설어서 뒤를 돌아보았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딸아이 나이 또래의 여대생이었는데 앞머리에 핑크색 헤어롤을 감고 있었다. 차분하고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앞머리에 핑크색 헤어롤을 매달고 있는 모습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따금 우리과 학생들도 강의시간에 헤어롤을 감고 들어오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지하철과 같은 공공장소에서는 처음 본 모습이었다.


헤어롤을 감는 이유는 자신이 원하는 헤어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해서고, 그 헤어스타일은 자신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더욱 멋진 모습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일 텐데, 그것을 만드는 과정을 공공장소에서 보여주는 일은 아무래도 민망한 일이다. 하지만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녀에게 지하철 안의 사람들은 보여주고 싶은 사람의 밖에 존재하는 자신과는 무관한 사람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무관한 존재 혹은 아직 관계를 맺기 전인 존재들 사이에서 허락된 익명의 자유로움. 그 익명의 자유가 숨겨준 것이 자기 자신인지 아니면 자신이 익명화시켜버린 지하철 안의 사람들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녀는 그 정도의 거리로 타자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닐까.

1초에 41,000개의 게시물이 업로드 되고 1분마다 180만개의 좋아요가 눌러진다는 페이스북은 어떠한가? 나 역시 페이스북에 일기처럼 글을 자주 올린다. 보여줄 만한 사진만 골라서 올리고,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만 다듬어 들려주는 페이스북은 누구에게나 절묘한 거리를 유지시켜 준다. 페이스북이 확보해주는 거리는 스스로를 드러냄으로써 충족시키는 자기 증거욕과 동시에 온전히 노출하지는 않음으로써 은폐하는 익명의 자유 사이에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보여주지 않는 혹은 보여주지 못하는 페이스북식 말 걸기는 진정한 이야기에 이르지 못한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올리고 서로의 이야기에 좋아요와 댓글을 달면서 즐기는 페이스북이 진정한 이야기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은 아쉬운 일이다.

이야기는 세상을 향한 즐거운 말 걸기여야 한다. 삶을 통해 느끼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한 것들을 타자와 나누고자 세상을 향해 말을 거는 과정, 타자에게 말을 걸고 소통함으로써 관계를 맺으려는 과정이 이야기여야 한다. 그래서 이야기는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이 아니던가. 때문에 이야기에는 타자가 전제되어야 하며, 그들과의 건강한 관계 맺기를 위한 시도와 고민이 수반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긴장과 갈등을 해소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드러나야 한다. 그래야지 이야기를 통해 타자를 이해할 수 있고, 타자를 이해한 만큼 삶은 깊어지고 향기로워질 수 있기 않겠는가.

헤어롤을 어디서 하고 있든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다만 그것이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을 자신과는 무관한 사람으로 괄호 속에 묶어버리는 일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을 괄호 속에 묶는다면 그렇게 묶고 있는 자신도 다른 이의 시선에서 배제될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페이스북을 통해 자기만족적인 드러내기를 하거나 적당한 익명성 뒤에 숨는 것 역시 큰 허물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것이 자신의 실제 모습을 오인하고 타자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이르게 하지 못하는 걸림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당신이 페이스북에서 정말 보고 싶은 것이 화려한 먹방 사진이 아니라 그것을 찍고 있는 사람의 진면목이듯이 다른 이들이 보고 싶은 것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017.08.18.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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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지 않으면 즐겁지 않아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캠퍼스 곳곳에 각종 행사 포스터가 빼곡하다. 대부분 학과별, 동아리별, 학회별 발표행사다. 한 해 동안 익히고 실천해온 성과를 모아서 그 결실을 보여주기 위한 행사이니 학생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의미 있고 즐거운 행사가 아닐 수 없다.

팀플이 유난히 많은 우리과 학생들에게 2학기는 무척 분주하고 힘든 학기다. 전공 학습량도 살인적인데다가 자신만의 대외활동이나 아르바이트까지 동시에 진행하다보니 서로 팀플 시간 맞추느라 무척 애를 쓴다. 결국 팀플은 늘 늦은 시간에 시작하여 새벽까지 이어지게 되고, 그런 팀플이 한 주에 3-4개이니 3-4일은 학교에서 밤샘하기 일쑤다. 그 바쁜 와중에 사진전시회, 영상발표회, 댄스 공연, 뮤지컬 공연 등을 진행하는 것을 놀라울 뿐이다. 누가 시켜서 한다면 할 수 없는 일에 학생들은 열과 성을 다한다.


최근 우리 학교 안에서 유쾌한 소란이 매일 계속된다. 홈커밍데이 행사를 위해서 ‘LOVE’라는 조형물을 설치해두었는데, 학생들이 밤마다 이 조형물의 철자를 조합하여 기상천외한 단어나 조형을 만들어낸다. 각각의 철자의 조합을 바꾸거나, 아래위를 뒤집거나, 정면으로 서 있어야할 철자를 측면으로 세워서 매일매일 새로운 단어나 조형을 만들어낸다. 가령, V자는 뒤집고, LO는 측면으로 세우면 한글로 씨티가 된다거나, O만 측면으로 세우면 ‘LIVE’가 된다거나, 철자 순서를 바꾸고 V를 뒤집어서 ‘LEON’을 만드는 식이다. 누가 만드는지는 모르지만 아침이면 여지없이 SNS를 통해 즐겁게 공유되고 한다. 학교도 학생들의 기발한 발상과 창의적인 시도를 즐겁게 지켜볼 뿐이다. 세계 유명 도시마다 LOVE 조형물은 숱하게 설치되어 있지만, 이렇게 즐겁고 창의적으로 향유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지난 학기에는 우리과 학생들이 학교글꼴을 만들 적이 있다. 학생회관 앞에 책상을 설치하고 오가는 재학생들의 손글씨를 직접 받아, 프로그램을 통해 글꼴로 만들 것이다. 500여명의 학생들의 손글씨는 3000자 가량 모아서 만들어낸 글꼴이 디자이너가 만들어낸 기존 글꼴보다 아름답고 매력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 자체로 감동이었다. 문서작성용 글꼴이라기보다는 팬시용품 등에 활용할 수 있는 글꼴이었다. 자비를 들여서 그 글꼴로 만들어 온 엽서의 글귀를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그 감동 때문이었으리라. “애도 어른도 아닌 나이 때, 그저 나일 때, 가장 찬란하게 빛나!”, “넌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디지털이든 4차 산업 혁명이든 미래의 변화를 예측하는 구호가 무엇이든 간에 그 핵심은 사람값을 지금보다 높이고 좀 더 즐겁고 행복하게 변화될 것이라는 기대와 노력이 아니겠는가? 미래가 어떨지 섣불리 예견할 수야 없겠지만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는 가장 큰 변화는 이야기할 수 있다. ‘참여와 체험을 통한 즐거움의 창출이 그것이다. 누가 하는 것 혹은 보여주는 것을 일방적으로 보고 즐기던 시대는 끝났다. 향유자가 자발적으로 콘텐츠에 참여하여,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하는 체험하고, 지속적으로 콘텐츠와 대화할 수 있어야 우리는 비로소 즐겼다라고 이야기한다. 이와 같이 참여와 체험을 통해 즐기는 과정을 향유다. 향유는 지금 이곳의 문화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가장 핵심적인 말이 되었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transmedia storytelling), 웹툰, <프로듀스 101>, 방탄소년단, 팬덤 등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이 단어들의 공통점은 향유를 전략적으로 잘 활용하여 성공한 예라는 것이다.

얼마나 사느냐만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시대라고 한다. 이 말은 자신의 삶을 가치 있는 즐거움을 만들어내기 위해, 얼마나 다양하게 자발적으로 즐길 수 있느냐를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 자신의 삶이 재미없다면 스스로 물어볼 일이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것에 참여하여 체험하고 있는지, 그것을 통해 스스로 주인공이 되고 있는지. 당신, 재미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2017.12.08.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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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 아닌 사람으로 기억될 그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선수, 이승엽이 은퇴를 한다. 평범한 직장생활을 했어도 길고 긴 23년이라는 시간을 숨 막히는 승부의 정글 속에서 버텨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그 시간 내내 그는 늘 최고였고 현재진행형의 살아있는 기록이 아니었던가? 더구나 마흔둘의 나이에도 최고의 기량으로 최선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은퇴시기를 미리 정하고 스스로 물러나는 그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은퇴 투어가 진행되는 동안 그와 관련된 프로야구 기록과 극적인 순간의 영상 그리고 팬들과의 숱한 미담이 쏟아졌다. 그 모든 기록과 승부와 미담 가운데 인간 이승엽이 보였다. 홈런을 치고도 상대 투수에 대한 예의로 고개를 숙이고 홈으로 들어온다거나, 벤치 클리어링 이후에도 상대 외국인 선수를 다독이는 모습에서 배려하는 최고를 보았고, 언제나 자신이 아닌 코칭스텝이나 동료들에게 공을 돌리는 모습에서 겸손의 최고를 보았고, 홈런왕이 되고나서도 끝없이 스윙폼을 바꾸는 모습에서 최선 없는 최고가 없음을 보았다. 잊을 수 없는 것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 준결승에서 일본을 물리치고 그가 보였던 뜨거운 눈물이다. 올림픽 기간 동안의 부진으로 그가 느꼈을 부담감, 자책감, 책임감을 8회 역전 홈런으로 떨쳐내고 흘리던 그 뜨거운 눈물의 진정성에 우리는 같이 울며 공감하며 희망을 꿈꾸지 않았던가.

사실 돌아보면 최고는 늘 우리 곁에 있었다. 최고는 누군가의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자의 것일 뿐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이승엽은 우리에게 왜 이토록 특별한 것일까? 은퇴 투어 내내 다른 구단과 선수단에서 그에게 준비해준 은퇴선물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가 우리에게 어떻게 기억될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는 단지 기량이 뛰어난 야구선수, 최고의 기록을 가진 야구선수가 아니라 겸손과 배려라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아는, 최고가 아닌 최선으로 기억되기 위해 노력한 야구선수였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물러설 때가 아름답기 어렵다.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자신이 어긋나 있고, 언제나 욕망은 불만족의 현재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때를 정하고 단호하게 은퇴를 택하는 것은 자기 삶에 대한 자존심이 아니겠는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또 다른 삶에 대한 꿈꾸기를 통해 온전한 자기 삶을 가꾸어내려는 노력이 그것이다.

살아가야할 시간은 늘고 있는데 은퇴 시기는 점점 빨라지는 지금 이곳에서 이제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이승엽처럼 최고는 아니겠지만 자기 나름의 아름다운 은퇴는 준비할 수 있지 않을까? 마무리로서의 은퇴가 아니라 제2의 인생을 위한 출발로서의 은퇴 말이다. 물론 그것은 은퇴 이후의 경제적인 삶을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에 대한 섬세한 준비와 남은 생을 어떻게 가꾸어갈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껏 그래왔듯이 통장의 잔고나 부동산 혹은 연금이 그 준비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금 이곳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후회를 두지 않는 것에서부터 은퇴할 적절한 시기를 가늠하는 것과 은퇴 이후 더 멋진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 준비에는 많은 생각과 상의와 가늠이 필요할 것이다. 준비 없이 충실했던 시간이 어디 있던가? 이러한 준비에 앞서 우선 노트 위에 그동안의 삶의 기록들을 정리해보면 어떨까? 그동안 무엇을 위해(Why), 무엇을 하며(What), 어떻게 살아왔는지(How) 꼼꼼하게 적어보고 진솔하게 스스로 물어보자. 그래서 행복했는지?

전설은 숫자상의 기록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그 기록을 세운 사람이다. 기억하고 이야기할만한 가치를 삶을 통해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사람, 그를 우리는 살아있는 전설이라 부른다. 살아있는 전설 그가 있어서 우리는 행복하다.

 

2017.10.13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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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서는 안 될 너의 이름은? 나의 이름!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올해 초 우리는 낯선 팬덤을 만나야 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이 흥행몰이를 하면서 느닷없이 등장한 혼모노(本物) 현상이 그것이다. 이 말은 극장에서 <너의 이름은>이 상영되는 도중에 OST를 크게 따라 부르거나, 객석에서 일어나서 호응을 유도하며 소란을 떤다거나, 감독 인터뷰 현장에서 자신에게 질문할 기회를 달라고 소리를 지르거나, 통역의 진행을 무시하고 일본어로 직접 질문을 하는 등 개념 없이 행동하는 사람들의 등장을 의미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나 콘텐츠와의 상호작용이 원활해진 현재의 미디어 환경을 고려할 때, 다양한 팬덤의 등장은 콘텐츠 생태계의 관점에서 고무적인 일로 평가할 수 있다. 더구나 최근 팬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화된 팬덤의 역동성은 스타는 물론 관련 콘텐츠를 활성화하고 새로운 향유문화를 구축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고려하더라도 혼모노 현상은 여전히 낯설고 쉽게 긍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단지 오타쿠의 일탈적인 행동 혹은 기이한 행동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조금 더 천착해 보면 그 기저에서 지금 이곳의 가오나시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등장했던 가오나시는 얼굴이 없는 존재이며, 그러기에 그리스 신화의 에코처럼 자기 자신의 목소리는 없고 누군가를 삼켜야지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혼모노의 기저 심리를 발견할 수 있다. 혼모노의 심리 기저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이나 감독에 대한 친연성과 전문성을 드러냄으로써 타자와 구별짓기를 시도하고, 구별짓기를 통해 충성도나 특별한 유대를 증명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놓여있다.

참여적 수행을 통한 가치 창출의 즐거운 체험을 향유라고 할 때, 그것은 작가나 작품에 대한 맹목적 숭배가 아니라 그것과 대등한 대화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독립된 주체로서 스스로 자신을 증명하지 못하고 자신을 매혹했던 대상으로부터 그것을 찾으려는 시도는 비참한 인정투쟁이거나 기만적인 위로가 될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 역시 누군가를 찾아가는 이야기라는 점은 무척 흥미롭다. “소중한 사람,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 잊고 싶지 않은 사람. 누구지, 누구야너의 이름은!”누군지도 모르면서 간절하게 찾아가는 이야기는 그의 데뷔작 이후 반복적으로 탐색해온 모티브다. 이러한 탐색의 모티브를 반복한다는 것은 탐색의 대상이 실체적이라기보다는 메타포에 가깝다는 의미다. 콘 사토시 감독의 <천년여우>에서 치요코가 평생 찾아가는 대상이 열쇠의 남자가 아니라 그를 만날 때의 자신이었던 것처럼. 따라서 <너의 이름은>에서 찾고 있는 것은 너의 이름이며 동시에 그 이름이 호명할 너이고, 너를 호명하고 있을 나 자신이기도 하다. 신카이 마코토 특유의 모호한 화법으로 찾는 대상을 딱 꼬집어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이름과 관계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름을 잃어 버리고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상기해보면, 이름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하는 일차적 기호다. <너의 이름은>에서 타키와 미츠하가 끊임없이 서로의 이름을 알고 싶어 하고 기억하려 하는 것은 뒤집어 보면 자신의 이름을 찾아가려는 시도와 같다.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는 찾으려는 내가 자신의 이름으로 스스로 온전히 서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굳이 남녀가 몸이 바뀐다는 식상한 도리카에바(とりかへばや) 모티브를 활용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가 아닐까?

찾아가야할 이름은커녕 자신의 이름까지 잃고도 그것조차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요즈음 뉴스에 자주 나온다. 그들의 하는 변명이나 부인을 들으며 불쾌한 혼모노의 극장을 떠올린 것은 필자만은 아니리라. 이제 우리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시간이다. 잊어서는 안 될 너의 이름은 무엇인가?

 

2017.04.21.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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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 없는 이야기, 이야기 없는 갈등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갈등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살면서 되도록 피하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갈등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즐기는 콘텐츠는 대부분 갈등을 매개로 스토리텔링을 전개한다. 아주 거칠게 말하면 갈등이 발생해서 해소하는 과정이 하나의 이야기다. 영화, 드라마, 웹툰, 게임, 소설 등 모든 극적 서사의 핵심은 갈등이다. 그 갈등이 얼마나 밀도 있게 긴장을 유지할 수 있느냐, 갈등을 통한 변화가 가치 있는 체험을 만들고 있느냐가 극적 서사의 관건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콘텐츠에서 갈등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물론 표면적으로야 극복해야할 대상이 있고 해소시켜야할 문제가 있다. 하지만 좀 더 꼼꼼하게 살펴보면 본격적인 갈등은 솜씨 좋게 빠져있다. 최근 콘텐츠에서 갈등은 최소한 서사 전개에 필요한 만큼만 제시되거나 제시된 갈등도 지극히 연성화 되어 있다. 뚜렷한 가치를 지향하는 각각의 적대적 세력이 존재해야하고 그들 간의 치열한 경쟁과 다툼 안에서 공감할만한 가치를 찾고 지지하는 과정을 갈등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삶의 또 다른 부면을 드러내거나 새로운 인식에 이르게 할 수 있도록 심화되어야 한다.


최근 <분노의 질주-더 익스트림>을 보았다. 압도적인 스펙터클과 근육질 수퍼히어로를 전면화한 이 영화에서 깊이 있는 캐릭터나 그들 간의 본질적인 갈등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의 질주> 시리즈의 전편에서 드러났던 적대세력과의 가치의 분명한 대립조차 이번에는 사라져 버렸다. 전편에 해당하는 <분노의 질주-더 맥시멈><분노의 질주-더 세븐>에 적대 세력이었던 오웬 쇼나 데카드 쇼가 같은 편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프랜차이즈 필름의 전략이라고 수긍한다 해도, 적대세력으로 등장하는 사이퍼 일당의 행위 동기가 불분명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우니 갈등의 동인이 마련되지 않는다. 몰랐던 아이의 등장으로 인하여 도미닉이 동료들을 배신하고 맹목적으로 사이퍼의 명령을 따른다는 설정은 가짜 갈등일 뿐이며 난센스다. 어디 이 영화만의 일이겠는가? 할리우드의 영화들은 프랜차이즈화 되면서부터, 우리 영화는 소재주의에 함몰되면서부터 갈등을 통한 깊이 있는 사고나 가치의 탐구 내지 선택은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인사청문회가 한창이다. 이름이 무겁고 맡아야할 역할과 책임은 더 중요한 만큼 도덕적 의무와 업무수행능력에 대한 검증은 철저할수록 좋은 일이다. 그 검증이 극적 갈등처럼 뚜렷하게 성격화된 두 세력의 토론과 쟁투의 생산적인 대립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나의 소망만은 아닐 것이다. 극적 갈등은 갈등에 참여한 두 세력을 변화시키고, 그 변화의 과정을 통해 가치를 창출하는 까닭에 실천적인 긍정을 낳는다. 완성도 높은 극적 갈등은 항상 향유자의 선택에 따라 각각 긍정할 수 있는 적대적인 두 세력을 제시하고, 그들 간의 심도 있는 토론과 치열한 쟁투를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누가 승리했느냐가 아니라 갈등의 과정을 통해 향유자가 느끼고 깨닫게 될 삶의 지혜다. 결국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싸움이 아니라 본격적인 갈등이고, 갈등을 통한 변화다.

우리는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갈등이 부재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것은 갈등이 없는 현실에 살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변화를 추동할 갈등, 서로 다른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고 그 중 최선의 것을 선택하는 갈등에 현실이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현실은 온통 갈등의 요소들로 충만한데 정작 갈등의 과정을 통해 그것을 해소하는 길은 찾지 못하니 분노와 적개심만 들끓을 뿐이다. 분명한 것은 적개심과 분노만으로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변화를 이끄는 것은 건강한 갈등이다.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의 맹폭에 오랜만에 갈등다운 갈등을 보였다는 영화<대립군>이 고전이란다. 이번 주말에는 온 가족과 함께 <대립군>을 보며 갈등이 빚어내는 긴장과 삶의 변화 그리고 깊이를 읽고 싶다. 갈등이 그리운 늦봄이다.

 

2017.06.23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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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 맛집 앞 우울한 풍경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삼미식당 앞 대기줄 

타이베이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78일간 중국 서안 출장을 다녀오자마자 출발하는 일정이라 모든 여행 일정을 대학교 새내기인 첫째가 짰다. 대학입시로 몇 년간 가족 여행은커녕 식사조차 함께하기 어려웠고, 첫째가 끝나자 둘째가 곧 시작해야하는 상황이라서 무리를 해서라도 떠나야 했다. 지난 10월 저렴한 비행기표가 있다는 첫째의 충동질에 얼떨결에 예약을 하고는 학교일로 경황이 없어서 계획은 엄두도 내지 못할 상황이었다. 다행히 첫째는 인터넷을 뒤져가며 마치 몇 번을 다녀온 사람처럼 45일의 시나리오를 꼼꼼하게 준비하였다.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첫째는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저녁을 먹으러 가야한다고 다그쳤다. 택시를 타고 도착해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연어초밥이 맛있다고 소문이 난 덕분에 개장보다 30분 일찍 도착했지만 이미 40분쯤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번호표를 받고 심지어 주문할 음식까지 적어내고 나서보니 온통 첫째 또래의 한국인들이다. 그렇게 어렵게 저녁을 먹고 나니 다음은 타이베이 3대 빙수를 먹어야 하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는 유명 제과점의 빵을 사야 한단다. 돌아오는 날까지 이러한 먹방 투어는 계속되었다.


여행 내내 불편한 풍경이었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타이베이의 물가가 한국에 비하여 저렴한 편이고, 일본 식민지로 인하여 중국음식과 일본음식 문화가 절묘하게 결합된 음식을 풍성하게 즐길 수 있고, 먹방 여행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했다는 점에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곳으로 타이베이가 인식되었다는 점은 쉽게 수긍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똑같은 맛집과 똑같은 먹거리를 찾는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유는 성실하고 역동적인 블로그에 있었다. 인터넷에서 대만여행을 검색하면 46만개 이상의 블로그 기사를 만날 수 있다. 그것들은 아주 친절하고 상세한 최신 여행정보, 그곳에서 반드시 체험해야할 것들, 그것에 대한 단호한 평가, 효과적으로 즐길 수 있는 꿀팁들까지 풍성하게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집단지성의 자발적이고 긍정적인 구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디지털 내이티브인 젊은 세대들에게 블로그는 타자와 연결하는 공간이며, 그들의 공감을 통해서 자신의 체험을 평가받을 수 있는 공간이고, 이를 토대로 정서적 유대를 공유하는 살아있는 스토리텔링의 장이 아니던가?

하지만 분명한 것은 스토리텔링의 핵심은 청중과의 연결, 청중의 적극적인 참여, 정서적 유대를 기반으로 한 자유로운 공유다. 스토리텔링이 제대로 전개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함께 나눌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오래 기억에 남을 만큼 차별성이 있어야 하며, 그것으로 인하여 청중의 긍정적 변화가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타이베이 맛집 앞에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한국 젊은이들이나 그들의 블로그에 빠져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해진다. 기계적인 연결과 맹목적인 참여 그리고 무조건적인 정서적 유대는 파시즘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곳에는 그것이 연결하고 참여하고 공유할만한 가치 있는 것이냐는 근본적인 질문이 빠져있다. 더구나 가치 있는 것이냐는 근본적인 질문은 지속적인 비판과 토론의 과정을 통해서 구성해가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타이베이 맛집 앞에서 인정투쟁 벌이듯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한국 젊은이들의 모습은 다소 우스꽝스럽거나 우울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지금 이곳이 아닌 곳에서 자유롭게 너와는 다른 심지어 떠나기 전의 나나와도 다른 나를 만나기 위함이 아니던가? 이미 누군가 샅샅이 훑고 가면서 자신의 눈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하여 공유한 곳을 다시 따라가며 그가 좋다고 했던 것들을 그대로 다시 해보면서 우리는 자유를 만날 수 있을까, 또 다른 나를 만나 볼 수 있을까? 그들과는 다른 나만의 체험을 구현할 수 있을까?

 

2017.03.10.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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