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인회> 그 정체와 지속

․ 《<九人會> 소설의 문학사적 연구, (국학자료원, 1998)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구인회>는 그 중요성에 비해 본격적인 연구가 활발하지 못한 편이다. 그 동안 <구인회> 자체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활발하지 못했던 이유는 일반적으로 1) <구인회>가 유력한 멤버들로 구성된 집단이기는 하나 그들의 활동이 개별적이고 분산적이었다는 점, 2) 이들 작품이 보여주는 특징이 상이하다는 점, 3) 각각의 특성이 다른 시인작가들을 하나의 성향으로 묶어서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구인회> 구성원들의 개별적인 작가론에서의 부분적인 언급이나, 몇몇 문학사에서의 표면적인 언급을 제외하고는 근년까지 김시태, 김윤식, 최혜실, 서준섭 등의 논의가 있을 뿐이다. 최근 들어 소장 연구자들의 모임인 상허문학회에서 발표한 근대문학과 구인회정도가 있을 뿐이다. 이 연구서의 경우, 16개월간 공동연구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개별 논문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15명의 필자 개개인의 입점의 차이로 인해 일관되고 종합적인 고찰로서는 미흡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은 <구인회>의 연구사적 위치를 고려할 때, 이중재의 <九人會> 소설의 문학사적 연구는 매우 소중한 성과임에 틀림없다.

이 연구에서 그가 강조하는 목적은 <구인회>와 구성원들간의 본격적인 연관고리를 종합적으로 규명하려는 것이다. 기존 연구들에서는 <구인회>만을 연구 대상으로 하거나, 구성원들의 작가론 혹은 작품론이 연구의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연구들의 한계를 극복하고, <구인회>의 성격과 연관시켜 구성원들의 문학적 성과를 점검하려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김한식에 의해 먼저 시도된 바 있다. <구인회> 소설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개별 작가들의 문학적 특질을 규명하기 전에 먼저 <구인회>로 묶일 수 있는 문학적 성격을 먼저 추출 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김한식은 이태준, 박태원, 이상, 김유정 등이 밝히고 있는 소설관을 재구하고 이를 통해 소설 작품을 점검하고 있다. 그가 텍스트로 삼고 있는 것은 이태준의 <달밤>, <孫巨富>,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이상의 <날개>, <지주회시>.

그러나 1) <구인회>의 단체적 성격에 대한 연구가 미흡하고, 2) 작품 분석 자체가 다섯 작품에 국한됨으로써 그것들의 대표성은 물론 나머지 수다한 작품들에 대한 검증을 과제로 남기고 있다는 미진함을 남긴다.

이중재는 이 연구에서 김한식과 유사한 연구목적을 견지하면서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해 나가고 있다. 그는 먼저 <구인회>의 문학적 성격을 순수문학이라는 기존의 상투적인 범주화를 거부하고, ‘모더니즘의 일단으로 구체화하여 평가한다. 또 그는 연구대상을 1) 이태준, 박태원, 이상의 2)광복 이전의 3) 단편소설로 한정하고 있다.

이태준, 박태원, 이상의 작품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그들이 소설창작이라는 측면에서 <구인회>의 핵심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이효석, 김유정 등 강권에 못 이겨 가입한 형식적인 멤버들을 제외하고, 이종명, 조용만, 이무영 등은 지속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주목할만한 작품이 없기 때문에 논외로 한다는 것이다. 또한, 시기를 광복 이전으로 하는 것은 광복 이후 이태준, 박태원의 문학적 노선이 크게 바뀌고, <구인회> 소설의 특성을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중단편 소설로 한정하는 것은 그것들이 이 연구의 취지에 부합되는 까닭이라고 했다. , <구인회>로 묶일 수 있는 문학적 성격이 소설 속에서 얼마나 구현되었는지를 살피기 위해서는 비교적 그 구조화의 성격을 분명히 할 수 있는 중단편이 타당하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여기서 시기를 광복 이전으로 한정하는 것에는 다소 이견이 나타날 수 있다. 이태준이나 박태원의 광복 이후의 행적을 <구인회> 활동기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 역으로 <구인회>활동의 성격을 규명하려는 시도가 있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의 행적을 저자와 같이 단선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연속선상에서 파악하려는 시도의 설득력도 만만한 것이 아니다. 즉 광복 이후 이들의 변모는 문학관의 변화가 아니라, 식민지 시대부터 견지해오던 현실인식이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여 능동적으로 대응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기를 광복 이전으로 한정하기 위해서는 광복 이후의 활동에 대한 보다 분명한 성격 규명이 선행되어야 한다. 왜 이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없느냐 하면, <구인회>의 성격 규명에 있어서 키워드인 모더니즘의 성격과 맞물린 것이기 때문이다. 30년대 우리 모더니즘의 경우 세계사적 보편성의 차원과 상당한 괴리를 보이고 있음은 기존의 연구에서 입증된 바 있다. 30년대 모더니즘의 실체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20년대부터 광복이후의 양상까지 두루 살피지 않고서는 그 결과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연구의 말미에 제시되고 있는 <구인회>의 문학사적 의의가 모더니즘과 맞물린 것이라고 했을 때, 시기를 광복 이전으로 국한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아닐까하는 의문을 떨치기 어렵다.

저자는 <구인회>의 결성 배경으로 정치적 요인, 발생론적 요인, 사회적 요인, 문단 내적인 요인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정치적 요인으로는 3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하에서 탈이데올로기적인 순수문학을 전면에 내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들고, 급격한 도시화의 과정 속에서 성장한 도시세대 시인, 작가들의 등장을 발생론적 요인으로 제시했다. <구인회> 동인들은 도시화 과정 속에서 자라나 일본 등에 유학했으며, 일본의 의사(擬似) 근대화 정책에 따른 식민지 체제가 확립되는 30년대 이르러 문학활동을 했다는 공통점을 고려할 때 설득력을 갖는 요인이다. 또 사회적 요인으로는 30년대 들어서 모국어에 대한 의식의 고조로 한글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 그 결과 지식층의 현저한 증가와 문학 의식의 성숙으로 인해 작가나 독자 모두 보다 세련된 문학을 추구했다는 점, 그래서 통속적인 작품과 본격적인 작품의 양분화 현상이 두드러졌다는 것을 들고 있다. 문단 내적인 요인으로는, 20년대 프로문학과 민족주의 문학이 한계를 보이자 새로운 출구가 필요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저자는 동인 형성과정에 관한 논의에서 김윤식이 주장한 <구인회>의 정치성은 출발 당시에만 해당될 뿐 <구인회>가 완전히 결성된 후에는 이러한 정치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반박한다. 그 근거로 <구인회>의 주도권이 발기인인 이종명, 김유영에서 이태준, 정지용에게로 넘어갔다는 사실과 카프측에 대해 철저하게 무반응, 무관심을 보인 그들의 활동을 들고 있다. 매우 흥미롭고 설득력 있는 반박이다. 사실에 대한 검증 없이 누가 말했느냐에 따라 정설인양 군림해오는 국문학계의 많은 오류들이 이렇게 실증적이고 논리적인 연구들을 통해 새롭게 정립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 때문일까? 이렇게 시원한 느낌은!

저자는 <구인회>의 활동상황에 대해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하나는 개인활동에 치중한 이유를 규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배문인들에 대한 신랄한 비평을 통해 세대의식을 표방한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는 <구인회>가 집단적인 활동보다 개인적인 활동에 치우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구인회>동인들이 4대 신문의 학예면은 물론 몇 가지 문학 잡지 --정지용의 <카토릭 청년>, 이무영의 <조선문학> <문학 타임즈>, 조선중앙일보 자매지(이태준)의 자매지 <중앙>, 조선일보(김기림)의 자매지 <조광>, 동아일보(이무영)의 자매지 <신동아> --의 지면들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신들의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다는 점, 조직과 집단 활동을 중시한 카프와는 달리 문학의 정치적인 목적성을 배제한 문학만을 추구한 <구인회>의 근본적인 성격에 비추어 볼 때 자연히 집단적 활동보다는 개별적 활동에 더 비중을 두게 되었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인회>동인들은 모든 개개인이 탁월한 문학적 감수성과 개성을 지니고 있는 작가시인들이었으므로 수준 높은 작품들을 왕성하게 발표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무영, 이종명, 박태원, 조용만, 김기림 등이 각각 이광수, 현진건, 김동인, 염상섭, 주용한 등의 선배문인들에게 자극적인 내용의 공개장을 발표해서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점을 들어 <구인회>의 세대의식에 주목한다. 이것은 몇 가지 주목을 요한다. 1) 비판이 어조와 논점에 있어서 편차는 있지만, 모두 기성문인들의 창작의 침체와 부진함, 통속화의 경향, 창작태도의 안이함 등을 비판하는 한편 그들의 뼈아픈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것은 비판의 과정을 통해 그들 스스로 세대의식을 자연스럽게 표방하게 되는 것이다. 2) 이처럼 선배문인들의 창작의 침체와 부진을 질타하던 자신들도 그들이 요구했던 만큼의 수준 높은 작품들을 써내지 못했다는 자기모순의 문제이다. 따라서 그들의 비판은 새로운 문학을 추구한다는 자긍심과 자부심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3) 비판이 대상으로 선정된 작가들이 모두 민족주의 문학을 표방하거나 그 언저리에서 창작의 동기를 찾던 작가들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이것은 민족주의 진영의 작가들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자신들이 바로 민족주의 문학의 비판적 계승자임을 자인한 것이 된다고 평가하고 있다.

<구인회>에 대해 카프측에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못한 이유를 두 가지로 지적한다. 첫째 <구인회>가 등장할 시기에 카프의 세력이 현저히 약화되어 이미 와해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 카프측의 비판에 대해서 <구인회>측에서 철저하게 방관자적 태도를 취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저자는 좋은 작품을 써서 오직 작품으로 승부를 걸겠다는 <구인회>동인들의 결의에 따라 카프측의 비판에 대해 시종일관 무반응,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 그 자체는 <구인회>의 문학적 이념이나 특성을 시사해주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저자는 <구인회>가 한국문단에 이바지한 공적은 <구인회> 자체의 단체적 활동이나 그 역할 때문이 아니라, <구인회>가 구성원 개개인으로 하여금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소신껏 발휘할 수 있도록 그 구심체 역할을 담당했다는 데에서 찾아야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구인회>의 문학적 성과는 30년대 후반 이른바 김동리, 최명익, 허준 등 신세대 작가들에게 그대로 계승되고 나아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보았다.

저자는 결론을 대신하여 <구인회>의 문학사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구인회> 작가들은 무엇을이야기할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이야기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전대의 공리주의적인 목적문학의 한계에 대한 반발이라는 문학 내적 요인과 편내용주의적인 프로문학의 퇴조라는 문학외적 요인이 결과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문학은 그 자체로 고유한 가치를 지닌 자율적인 존재라는 문학에 대한 이들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자각에서 찾아야한다. 이는 그들이 미적 자의식을 체계적으로 수립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했다. 이와 같은 형식에 대한 관심은 문학의 일차 재료인 언어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 것이다.

둘째 모더니즘문학의 선봉장 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이태준, 박태원, 이상 등의 <구인회>작가들은 작품뿐 아니라 평론, 기타 잡문 등을 통해서 언어문법기법에 이르는 모더니즘 이론을 적극 수용소화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셋째, <구인회>작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역사사회 속에서 개인의 의미를 탐구하기보다는 역사사회로부터 유리된 개인의 삶의 모습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작품을 통해 지식인의 실직과 궁핍함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주목하고 있으면서도 당대 식민지 상황이나 사회구조적인 모순은 배제시킨 채, 작중 인물의 복잡 미묘한 내면 심리의 분석과 존재론적인 본질이 추구라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보인다고 보았다. 저자는 이러한 특성이 <구인회>작가들의 소극적인 세계인식의 결과기도 하지만, 집단적이고 총체적인 역사인식에서 비롯되는 공동체적 삶에 대한 관심 자체가 차단되고 봉쇄되던 당대의 현실상황을 고려해 보면, 작품 속에 구현된 <구인회> 작가들의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세계관을 단순히 현실 도피적이라고 폄하하기 어렵다고 했다. 즉 당대 식민지 상황에 대한 <구인회>작가들의 하나의 대처방식으로 수긍해야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저자의 이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끝내 수긍하기 어려운 것은 이것이 세계 대응방식으로 이해될 경우, 그 미학적 토대에 대한 논의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생략된 채 이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현실추수의 일상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게 된다. 문제는 이해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얼마나 세계인식과 대응에 유효한가이다.

넷째, <구인회>작가들은 모방론적 또는 반영론적 관점에 의거한 소설관을 부정하고 표현론적 관점에 의한 소설관을 견지하고 있다. 즉 표현과 묘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론적 소설관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소설이란 인간의 모습을 반영해내는 것이 아니라 언어라는 재료를 통해 작가의 독특한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인식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구인회>의 등장으로 소설에 대한 전문적인 예술가 의식 내지는 장인의식의 강조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창조적인 개성과 주관성 발휘를 중시하는 전문가의식장인의식이 <구인회>에 와서 본격화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 및 독자들의 문학에 대한 인식의 변화라는 요인을 갖고 있다.

저자는 <구인회>의 문학사적 의의를 1) 시문학파의 모더니즘적 이론과 해외문학파의 전문적인 예술가의식이라는 문학적 태도를 그대로 계승발전시킨 점, 2) 문학본래의 자율성을 중시하여 작품의 형식적인 측면에 보다 관심을 두었다는 점, 3) 30년대 후반 신세대 작가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묘사와 표현이 중심이 된 이태준의 문장 미학은 김동리황순원에게 이어졌고, 박태원이상의 심리주의적인 소설 기법은 허준최명익에게로 연결되어 <34문학>파와 <단층파>의 출형을 본다는 점을 찾아냈다.

그러면서 저자는 1) 지나치게 형식의 측면에만 관심을 모았다는 것, 2) <구인회>연구가 핵심 세 명에게만 국한되어 있다는 점 등을 이 연구의 미비점으로 지적한다.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면서, <구인회>의 성격을 먼저 규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작품과의 연관을 찾겠다는 저자의 의도는 매우 선행적인 의의를 갖는다. 안전한 기존의 방법론에서 한발구도 벗어 나려하지 않는 안일한 연구자들을 일깨우기에 충분할 것이다. 다만 다소 아쉬운 것은 저자도 밝히고 있지만, 연구 대상이 핵심인물 세 명 외의 동인들까지 함께 고찰해야 <구인회>의 대표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구인회>의 성격 자체가 통일된 강령 하에서 단일한 경향의 창작을 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다양하고 자유스런 분위기가 오히려 작품에 있어서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다양한 모습을 온전히 다 고찰했을 때, 저자가 의도했던 연구 성과를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형식적인 고찰 외에도 미학적인 고찰이 지나치게 소홀히 다루어졌고, 문학사적으로 모더니즘의 사적인 연관에 대한 규명이 다소 미흡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각을 지속적으로 견지하려하고, 철저하게 실증적인 작업이 이루어졌고, 무엇보다 <구인회>와 그 작품간의 연관을 밝히는 선구적인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유용한 참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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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연대를 건너려는 당찬 시도

1970년대 문학연구(소명출판사, 2000)

 

박기수(문학평론가,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지금 이곳의 좌표에 따라 역사에 대한 평가는 달라진다. 그것은 현재의 관점에 따라 과거사의 실체가 변하기 때문이 아니라 과거사에 주목하는 이유와 수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문학사도 역사의 이러한 진행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따라서 문학사 연구는 시작은 있으되 끝이 없는 연구이며, 과거에 눈을 돌려 오늘을 보고자하는 노력이다.

그러나 문학연구, 특히 문학사 연구의 행보는 매우 더디고 조심스럽기만 하다. 연구의 대부분이 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그 결과 연구 주제나 연구 방법에 있어서 현실적인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다. 위의 관점에서 이것을 판단해본다면, 결국 오늘의 문학이 과거 문학사를 다시 평가할만한 나름의 안목이나 전망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염두에 둘 때, 민족문학사연구소 현대문학분과의 1970년대 문학연구는 매우 소중한 작업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각기 다른 학교의 연구자들이 모여서 일정 기간 학습과 세미나를 거쳐 20여 편의 견실한 연구 논문을 수확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뜻 깊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작업을 보다 생산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관점에서 접근해야만 한다. 이 책이 1) ‘1970년대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 문학사라는 점, 2) 공동연구의 성과물이라는 점, 3) 비교적 소장 연구자들의 연구물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2000년 오늘, 우리에게 1970년대는 아직 살아 숨쉬는 연대이다. 역사의 시간은 그저 물리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주체에 의해 변화할 때, 비로소 흐른다고 했던가? 역사는 단지 시간이 흘러갔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마디마디에 대한 기록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1970년대는 아직 살아 있는 시대인 것이다. 그것은 단지 유신의 주체였던 세력들이 아직 정치권에 지도적인 위치에 남아,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수라는 이름으로 휘두르고 있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그것은 1970년대적 모순이 극복된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오히려 심화은폐됨으로써 저항과 견제의 어떠한 시도도 꿈꿀 수 없는 보다 열악하고 야만적인 정세를 맞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1970년대는 어떠한 연대였나? 정치적으로는 유신 독재의 전횡과 그에 대한 민중들의 주체적 자각과 저항, 미국의 제3세계 전략의 하나인 반공 이데올로기를 이용한 군부의 권위주의적 통치가 이루어졌던 시기였고, 경제적으로는 성장위주의 산업화로 인한 비인간적 수탈과 억압체계의 확대와 자본주의의 정착과 그 역기능이 동시에 등장하던 시기가 아니었던가. 부의 양극화 현상과 계급 모순의 심화, 농촌 붕괴로 인한 급속한 공동체적 전통의 붕괴, 개발 우선 정책으로 인한 환경 파괴라는 자본주의의 역기능이 유신체제라는 상부구조와 유기적으로 결탁하고 있었던 시기가 아니었던가. 이와 같은 노골적인 억압과 수탈 그리고 기만의 시기에 문학은 다소 방법의 차이는 있었지만 적극적인 현실 대응에 임했었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딱히 제기할 반론이 없을 정도로 일반적인 설득력을 지니는 것이지만, 그만큼 상투적이라는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바로 이것이 문학사로서 1970년대 문학연구에 대해 제기하고 싶은 문제다. 이 책의 머리말에서 연구자들은 “70년대 한국문학은 정체성을 잃은 혼돈의 한국문학이 자기 갱신을 이루어 가는 데 있어 가장 좋은 교과서(p.4)”이기 때문에 민족 문학적 관점에서 70년대 한국문학의 전체 상을 재구성하려 노력했다고 밝히고 있다. , 1970년대의 문학을 민족 문학적 관점에서 재구함으로써 정체성을 잃은 한국문학의 자기갱신에 이바지하겠다는 의지다. 여기저기 발표했던 논문들이 일정 부피가 되면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출간하는 것에 익숙한 이 땅의 연구자들에게, 분명 이와 같은 시도는 신선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이 문학사로서 좀더 생산적인 작업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첫째, 민족 문학적 관점이 2000년 오늘의 한국문학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둘째, 민족 문학적 관점에서 70년대 문학을 재구하여 오늘의 문학을 갱신하겠다는 의지가 자칫 본질주의적인 접근에 빠지는 것은 아닌가, 셋째, 1970년대 문학에 대한 연구가 오늘의 문학에 과연 생산적으로 반영되었는지 확인해야만 한다.

위에서 첫째로 제기한 문제는 민족문학이 과연 2000년 오늘 한국문학에 의미가 있을까없을까 하는 연구 관점에 대한 문제 제기가 아니다. 그것은 이 연구가 보다 설득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민족 문학적 관점과 2000년 한국문학과의 상관성을 구체적으로 규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 양자의 상관관계를 규명하지 못한다면, 이 연구들은 개별 연구 그 이상이 될 수 있을지언정 연구자들이 말하는 생산적인 문학사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 같은 작업이 문학을 본질주의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본질주의적 접근이란 복잡한 전체의 여러 속성 가운데 가상의 내적 진리나 본질에 준거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방법을 말한다. , 다양성과 가변성을 생명력으로 하는 문학을 단일하고 통일적인 가상의 내적 진리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환원주의적이며, 그것을 작품성의 척도로 제시함으로써 결정론적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책의 연구자들이 주장한 ‘70년대 문학이 정체성을 잃고 헤매는 오늘의 문학에 좋은 교과서가 될 것이라는 주장은 70년대 문학이 근대의 밝음과 어두움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한 문학이라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1) 2000년 오늘의 문학이 정말 정체성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것인지, 2) 70년대 문학이 근대의 밝음과 어두움에 과연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한 문학인지, 3) 그러한 주장의 근거인 민족문학론이 문학이라는 측면과 현재성의 측면에서 과연 유효한 것인지에 대한 대답을 먼저 주어야한다. 1)2)의 문제는 3)으로 수렴할 수 있다. 따라서 1)2)의 답을 얻기 위해서는 3)이 문제가 선결되어야한다. , 민족문학론이 과연 한국 문학의 정오표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은 회의적이다.

 

70년대의 민족문학은 이 저항, 특히 민중의 저항에 주목했다. 그럼으로써 70년대 민족문학은 분단 자본주의에 맞선 저항의 전위가 되었다. (……) 그것은 70년대 민족문학이 반체제운동의 가장 급진적인 흐름을 이루고 있음을 뜻한다. 70년대 민족문학의 이러한 급진성은 80년대의 민족문학과 비교하더라도 그렇다. 필자는 90년대에 들어와 민족문학이 침체에 빠진 내적 요인 가운데 결정적인 것이 지나친 급진성이 아니라 오히려 급진성의 상실이라고 생각한다. 80년대 민족문학은 노동해방문학이나 민족해방문학으로 가면서 스탈린주의에 침윤되었고, 스탈린주의는 민족문학에서 유토피아적 충동을 거세시켰다.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는 가장 자기 완결적인, 그래서 자기 갱신을 허용하지 않는 폐쇄적 담론이다. (……) 그처럼 자기 완결적인 폐쇄적 틀 속에서 유토피아적 충동이 발붙일 수 있겠는가.(p.18)

 

여기서 드러난 바와 같이, 그것은 민족문학의 전개과정에서 80년대 민족문학의 스탈린주의로의 경사, 90년대 이후 현재적 적합성의 상실 등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문학이 꿈꾸는 영원한 유토피아적 충동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80년대 이후 상실된 급진성의 회복이 절실하다며, 그것의 좋은 예를 70년대 문학에서 찾을 수 있다는 하정일의 주장은 나름의 타당성을 지닌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민족문학론의 활로 모색이라는 측면에서는 의의를 지닐지 모르겠으나, 본질주의적이라는 한계를 극복한 것은 아니다.

셋째는 이 책의 연구들에서 과연 오늘의 문학에 생산적으로 반영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1부 총론의 논문을 제외하고는 그와 같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논문을 발견하기 어렵다. 명시적인 항목으로 설정되지는 못하더라도 오늘의 문학에 어떻게 생산적인 반영을 이룰 수 있는지 문제 제기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이 책의 머리말에서 밝힌 생산적인 반영에 조금이라도 부합하는 것은 아닐까?

앞에서 밝힌 바처럼 문학사는 과거에 눈을 돌려 오늘을 보고자 하는 노력이기 때문에 그것은 진행형의 작업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것이 영원한 진행형으로서 생명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현재적 가치와 적합성에 의한 좌표 설정과 의견 제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형적인 형태였지만 자본주의가 자리를 잡아가고, 유신 체제의 폭압적인 상화 속에서 민중들의 주체로서의 자각을 이루었던 70년대 문학의 의의를 다양한 방향에서 접근하고 있고, 그것이 2000년 오늘이 문학에 생산적 방영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획은 이 책의 미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그것이 본질주의적 접근이었다는 점, 그것이 작품 연구 등을 통해서 규명되는 데에는 미흡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이 책의 두 번째 특징은 공동 연구의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사실 이전에도 공동 연구서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일정 기간에 동안의 학습과 세미나를 걸쳐 그것을 일정한 기획 의도 아래 출간한 연구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연구자들의 개인적인 작업 성향, 각기 다른 학풍 속에서 공부해왔다는 점, 그리고 공통된 테마를 선정하기 어렵다는 점들이 원인이었다. 따라서 이 연구서는 값진 성과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책을 좀더 애정을 갖고 읽다보면, 좀더 짜임새 있는 기획이 부족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전체가 3부로 구성되었는데, 적어도 각 부의 서두에는 각론의 기준이 제시되어야 했다. , 총론의 5개의 논문은 어떤 기준에 의해 배분되었는지, 주제론의 10개의 논문은 총체적인 조망을 위해 어떤 원칙을 견지하고 있는지, 작가론에서 언급된 8명의 작가들은 어떤 기준에 의해 채택된 것인가에 대한 언급이 필요했다. 또 연구 성과를 하나의 연구서로 묶는 것을 전제로 했다면, 각각 논문에서 중첩되고 있는 시대 상황에 대한 대동 소이한 언급과 중첩되는 작품 설명 따위는 배제했어야 했다. 좀더 욕심을 내보자면, 각 논문간의 유기적인 연관이 매우 미흡했다는 점이다.

이제 디지털이라는 말이 접두사처럼 쓰이는 시대가 되었지만, 이 시대의 중심 화두인 디지털의 키워드 중의 하나가 NET가 아닌가? 이 말은 남과 다르게그러나 남과 함께라는 공동 작업(co-work)을 강조하는 말이다. 공동 작업의 당위성을 인정한다면 남는 것은 이제 그것을 어떻게 짜임새 있게 엮어내는 것이 아닐까?

공동작업에 대한 아쉬움은 그만큼의 기대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각기 다른 연구자이 이 정도의 성과를 내었으니 다음 연구서에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같은 기대를 말하는 것이다.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소장연구자들의 성과물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소장 연구자들의 도전적이고 새로운 방법론의 접근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미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보면 이런 기대는 싸늘하게 식어버린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 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소장 연구자들의 연구물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주목할만한 새로운 시각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 기존의 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은 이 연구가 1970년대에 대한 초기연구에 속한다는 점에서 자칫 기존의 논의를 고착시켜버릴 위험마저 내포하고 있다.

가령, 1970년대 모더니즘 시의 겨우, 그 텍스트를 기존의 문학과 지성사의 텍스트로 한정지음으로써, 문학과 지성이나 창작과 비평의 문화 자장 밖에 머물렀던 유수의 시인들의 작품이 배제시켜 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과연 70년대 한국 시단의 모더니즘 시는 문학과 지성사의 텍스트를 넘어서고 있지 못하는가? 그렇지 않다. 김현의 평론이 많은 시인들을 발굴해낸 것도 사실이고, 문학과 지성70년대 한국문학의 한 축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에 시선에서 배제됨으로써 마치 한국문학사의 미아처럼 취급되는 숱한 시인과 작가 군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또한 작가론의 경우, 황석영, 조세희, 이청준, 최인호, 김지하, 신경림, 황동규, 정현종만을 다룸으로써 스스로 참신한 시각을 봉쇄시켜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이 작가들에 대한 기존의 숱한 평론과 연구들과 별반 새로울 것도 없는 연구를 여기서 굳이 되풀이 할 필요가 무엇이란 말인가? 오히려 훌륜한 작품을 가지고있으면서도 아직 조명 받지 못한 작가나 시인들을 발굴하고 재조명하는 작업이 참신하지 않는가? 물론 예의 작가나 시인들이 70년대 한국문학을 대표한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소장 연구자들이 기존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안일한 연구 태도는 분명한 문제점으로 지적되어야만 한다. 현금의 문화권력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면서 왜 그 모태가 되고 잇는 70년대의 문화권력에 대해서는 그렇게 관대한지 아쉽기만 하다.

이제 마무리하자. 2000년 오늘, 이 책의 문제제기는 매우 시의 적절한 것이며 유효한 것이다. 또한 앞으로 이와 같은 작업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도 가져볼만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문제제기가 구체적인 연구성과로 구체화되지 않는다면, 그 또한 하나의 소문에 불과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공동연구의 장점을 보다 짜임새 있는 기획으로 극대화시켜야 한다는 것, 그리고 소장연구자들의 보다 비판적이고 도전적인 자세의 연구가 절실하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 《한국문학평론2000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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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懷疑)가 만나는 자유 셋

 

박 기 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문학은 늘 위태롭다. 위기 운운하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최근 더욱 가파라지고 있다. 이 겨울, 문학을 더욱 위태롭게 하는 것은 경제한파 등의 외적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내부에 있다고 한다. 대중적인 시류에 영합하기 위해 끝없이 시도되는 일탈의 기록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선정주의의 질주는 그 끝을 우울하게 가늠하게 한다. 그래서 조건상, 황충상, 박청호의 다양한 목소리가 반가운 것이다.

 

1. 깊고 따뜻한 시선 --- 조건상, 이웃사람 엄달호

 

조건상의 시선은 깊고 따뜻하다. 10여년 시간의 간극을 두고 서 있는 8편의 작품 모두 사람에 대한 이해와 신뢰로 그 온기를 발한다. 아랫목 담요 속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던 한 주발의 밥처럼 그 적당한 따스함으로 읽는 이의 가슴을 넉넉히 덥히고 있다.


한 주발의 밥이 그렇듯 그의 이야기는 화려하지 않다. 그저 일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과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이다. 요즘 젊은 작가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꼼꼼한 일상의 재구(再構)와 인과성(因果性)에 대한 애착은 그의 소설문법이 전통적인 방법에 기대고 있는 탓도 있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은근한 사랑과 관심의 결과에 다름 아니다.

<떠도는 혼><중공에서 온 손님>은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작품들이다. 내가 나를 비추어 볼 수 있는 공간, ‘돌아가야 할당위의 공간이기는 하지만 돌아갈만 하지는 못하게변해버린 공간인 고향. 이처럼 작가가 고향의 공간에 집착하는 것은 그곳이 시간을 거슬러 오늘의 나를 찾을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고향을 찾는 과정을 중심으로 그리고 있지만, 작가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곳은 그 고향에 살고 있는 오늘 우리의 모습이다. 종군위안부 문제가 아직 사회적으로 공론화 되지 못한 채 대중소설의 선정적인 소재로 전락해 있던 시기에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 그리고 국교수립 이전에 이미 중국 조선족 동포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선구성(先驅性)에 주목해야만 한다. 그것은 단지 소재적인 선구성이 아니라 그들의 문제가 곧 오늘 우리의 문제라는 성찰의 선구성 때문이다. <떠도는 혼>에서는 종군위안부의 문제를 그들이 겪는 경제적사회적 어려움이나 또는 과거의 아픈 기억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는 고향에 대한, 고향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에 주목하고 있다. 보상금이니 일왕(日王)의 사과니 하는 문제로 모든 시선이 쏠려있는 현실에서 정작 필요한 것은 고향 사람들이 따뜻한 손이라고 작가는 강변하고 있다. <중공에서 온 손님>에서는 이제는 손님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동포가 찾아간 고향, 즉 오늘 우리의 각박한 세태에 대한 성찰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그의 말은 작품이 쓰여진지 10년이 안돼서 현실로 드러나지 않았는가? 그의 혜안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신선한 예감 하나>는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는 세계에 대한 소심한 나의 힘겨운 응전이다. <인사 이동>은 우울한 대학의 풍경을 냉소적으로 그리고 있다. 체험에서 비롯되는 작가의 목소리가 작품의 구조적인 긴장을 이완시키는 아쉬움이 있다.

<민통선 하늘에 걸린 새벽달>요령에 의하여 얻어진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에 대한 고발적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대대장의 허위 만들기는 죽은 자를 제외한 살아있는 모든 자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만 허위일 따름이다. 진실과 허위의 상투적인 갈등보다는 고발적 성격이 강한 탓도 있겠지만, 화자인 가 좀더 치열하게 허위와 대결하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다. 허위에 대한 묵인이나 방조 역시 허위일 뿐이다. 화자의 진실에 대한 의지와 내적 갈등이 너무도 쉽게 무너짐으로써 자신과는 무관한 고발이 되어 버린다. 고발은 수정을 전제로 해야한다. 나와 무관한 고발이란 무책임한 질책일 뿐이기 때문이다.

<솔바람 소리>는 아들의 장애를 인정하지 못하는 부모가 아들의 죽음으로 비로소 장애를 받아들이고 진정한 사랑을 회복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장애아의 문제를 그리면서 장애아가 아닌 부모의 일그러진 마음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장애아를 돌보는 부모의 가파른 심리를 섬세하게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 부모인 동시에 모순된 인간일 뿐임을 이해함으로써 그 모순을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다. , 모순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을 껴안음으로써 그 모순을 넘어서고자 하는 노력이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성찰의 결과이며 동시에 인간의 모순을 없애야할 것으로 몰아대는 모든 억압적 체계에 대한 비판이다.

<옥탑위의 까치집>은 평자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다. 외로운 여인의 상처를 감싸 안는 과정에서 자신의 외로움을 깨닫는 화자, 사랑은 탈색되고 관계만 남은 아내와의 관계, 새집으로 표상 되는 온전한 일상에 찾아든 까치집 같은 사랑을 통하여 작가는 가족적인 관계의 망이 아닌 존재로서의 인간을 돌아보고 있다. 부모이거나 남편이기 이전에 존재로서 느끼는 외로움에 대한 성찰과 사랑을 통해 발견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남편도 없이 십여년 동안 홀로 키워 온 딸을 외국으로 떠나 보낸 그날 밤, 묵은 인연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고 있는 여인의 삭정이처럼 바싹 마른 마음을 다치지 않으려고 나는 조심스레 몸을 놀렸고, 여인은 여인대로 떨떠름한 내 마음을 헤아리고나 있는 듯이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들의 벗어버린 알몸처럼 아무런 꾸밈새도 없이 나를 편안하게 받아줌으로써 어떤 굴레 속에 갇혀서 자꾸만 작아지려는 나에게 적당한 용기와 뻔뻔스러움을 부추겨주고 있었다.(192)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중년 남녀의 사랑은 오히려 자기 찾기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언젠가는 허전한 빈둥지만 상처처럼안고 있을 자신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다. 하여 화자는 오히려 자신이 상처를 다스려준 여인이 자기에게 아늑한 숲이며 외로움을 씻어주는 강물임을 깨닫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의 인간에 대한 따뜻한 이해를 엿볼 수 있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은 따뜻하기에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상처 감싸기의 연장선상에 <이웃사람 엄달호>가 놓인다. 벼락 상승한 P동의 오늘에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는 원주민 엄달호 일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월남전에서 미군들을 구하려다가 성불구가 된 엄달호나 성추행을 당해 다른 이의 아이를 갖게된 부인이 가해자일 뿐인 냉혹한 현실을 건널 수 있는 것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추행을 당해서 갖게된 아이에게서 희망을 발견하려는 그들의 노력은 감동적이다. 어긋난 인연에 대한 희망은 또다른 사랑 만들기이며 아울러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의 결과이다.

모순된 존재로서 인간을 인정하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려는 노력이 조건상의 시선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화려하진 않지만 따뜻하다. 모질게 추운 것이 날씨 탓만이 아닌 이번 겨울, 조건상의 이웃사람 엄달호와 함께 건너는 것도 이 겨울을 따뜻하게 나는 방법이 될 것이다.

 

2. 없음으로 깨닫는 있음 --- 황충상, 나는 없다

 

향을 태운다. 꼿꼿한 자세로 시선을 붙잡고 있지만 아직 아무 것도 아니다. 불을 붙이고 그것이 텅빈 공간으로 사라질 때 비로소 향이 되는 것이다. 없음으로 깨닫는 있음의 세계. 그래서 황충상의 소설에서는 향이 난다. 작품에서 유난히 없다는 것의 영원한 아름다움이 강조되는 것도 그러한 깨달음이 데려다놓은 곳에서 사물의 배후에 있는 아픔을 감싸 안으려는 그의 구도적(求道的)인 글쓰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가 얼마나 없음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이번 작품집의 제목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없다>, <殺作家>, <아버지는 없다>, <아버지의 사리> 등이 그것이다. ‘없다’, ‘등의 없음의 직접적인 진술에서부터 사리라는 없음의 증명에 이르기까지 그는 집요하게 천착한다. 게다가 <악어춤>까지도 그것이 죽음의 순간을 묘사한 표현이고 보면 없다는 것의 의미는 그에게 남다른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그의 없음을 만나보자.

<나는 없다>는 중년 작가의 자기 찾기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동안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것을 모두 떨치고 앞으로 남은 시간과 정직하게 대결하기 위해 그는 집을 떠나 자신만의 방으로 들어온 것이다. 상희와의 대화를 통해 세 개의 삽화가 등장한다. 첫째 삽화는 천상의 영감을 주기 위해 그를 찾아온 베로니카를 통해 베로니카의 보살행을 깨닫는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薩 下化衆生)의 정신으로 육신은 껍데기이며 진정한 내가 아니라는 것을 베로니카는 깨우쳐준 것이다. 둘째 삽화는 믿음을 잃고 헤어진 상희부부의 이야기이다.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떠도는 남편과 그를 감싸주지 못하는 상희, 모든 것의 배후는 슬픔이기에 서로의 상처를 감싸지 못하는 아픔이다. 그리고 집을 나온 5년간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천녀와의 문답으로 답하며 눈멀고 귀 멀고 마음으로만 가는 길을 통해 구도적인 글쓰기에 이를 것임을 암시한다. 셋째 삽화는 정오가 남기고 간 나는 없다라는 화두이다. 그 화두를 통해 껍데기 속의 나를 깨닫는다. 그 빈곳을 통해 없다는 것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다.

비로소 나는 내 지도를 찢어버려야 하리. 욕심부리고, 성내고, 어리석음으로만 찾았던 길, 믿음소망사랑으로만 찾아내려던 길, 철학종교도덕의 길이 어떻고 저떻고, 이제 그것들 그 길에 다 두고, 홀로 간다는 마음도 벗어두고, 나는 가리. 그러면 자연의 마음에 가 닿으리. 사슴이 하늘을 달리고, 꿩이 땅속을 날고, 북한산이 파도소리를 낸다. 이 장엄한 소식 전하기 위해 내 마음속에서 무어라 이름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뛰쳐나간다.(78)

그곳에서 차이와 분별이 없는 자유를 만나는 것이다. 모든 분별을 놓아야하는 마음자리에 현실의 고통을 건너는 <殺作家>가 있다. 빵을 해결하기 위해 헤매는 자신을 죽이고 온전한 작가가 되리라는 것이다. <殺作家>가 깨달음으로 끝났다면 <아버지는 없다>에서는 그 실천행이 드러난다. 생활을 위한 빵이 빵을 위한 생활로 전도된 상황에서 문득 돌아본 자신의 모습, 그곳에 아버지는 없다. 이 부정의 상황에서 평상심을 회복하고 적멸(寂滅)의 체험을 통해 긍정의 세계를 만난다. 모든 아버지를 부정함으로써 부활하는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다. 부정을 긍정으로 전화시키는 방법으로 그는 참선수행을 들었지만, 그것은 세계의 아픔을 나누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아픔을 나눈다는 것은 하나가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괜찮다, 지금 너는 아비의 아픔을 쪼아내고 있어. 조만간 아픔 없는 아비의 상을 완성시키겠지. 그걸 보고 싶다. 그 기대에 잠겨 있으면 배길만해. 어서 네 일이나 하렴.“(146)

실체의 아버지를 쪼아 부재의 아버지를 완성하는 <아버지의 사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공유하는 아픔에 주목해야 한다. 앞의 작품들에서 다소 관념적이고 공소하게 들렸을지도 모를 없음의 지혜를 구체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예술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던 앞의 주인공들의 다짐이 이 작품을 통해 완성되고 있다. 현실의 아픔인 아버지의 병마를 쪼아내는 아들의 예술 세계가 분별이 사라지고 하나가 됨으로써 온전한 예술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한다.

없다는 것의 영원한 아름다움”. 이제 이 작품집의 화두를 풀어야한다. 삶과 예술, 있음과 없음, 육체와 정신, ()과 속() 등의 분별이 사라짐으로써 떠오르는 세계의 아름다움. 그곳에 이 작품집의 근력(根力)이 있다. 다만 임영봉의 지적처럼, 그의 글쓰기가 탈속의 경지로 나아가면서 현실이 지워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남는다. ‘세속으로만 존재하는 현실은 뛰어 넘어야할 것이지 살아내야 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처럼 경박함과 극단적인 일탈을 그리는 것이 소설인 것처럼 대접받는 시기에 황충상의 없음의 미학은 분명 소중한 것이다. 더구나 그의 불교로의 몰두는 우리 소설계에선 매우 이채로우며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집요한 작가를 만날 때 우리의 일상은 그 속내를 풀어놓을 수밖에 없다.

 

3. 회의(懷疑)가 만나는 자유 --- 박청호, 소년 소녀를 만나다

 

만나다라는 말에는 미래의 의미가 없다. ‘만났다만났었다는 무난히 수용하면서 유독 만날 것이다라는 말만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만나다라는 말에는 소통 혹은 이해의 의미가 있다. 만날 것이다, 만나서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개선 가능성이 제거된 말, 만나다. 박청호의 소설집 소년 소녀를 만나다는 그래서 우울한 빛이다. 하지만 그 우울의 밑그림은 소통을 희망하는 몸짓, 그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미래다. 이 글이 이매진에 발표된 199712월도 훨씬 지나서. 내가 라푼젤을 만난 것은 바로 거기서였다.(12)

이처럼 <라푼젤의 두 번째 물고기>에서는 서사가 완성된 후에 사건을 발생시킴으로써 현실의 시간과 질서를 교란하고 있다. 또한 소설 속의 주인공을 소설 밖으로 걸어 나오게 함으로써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파괴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운명과 숱한 이야기들과 그 사람들과 그 이야기를 잇는 구조가 세상이고 리바이던이며, 세상은 자기 자신을 집어삼키고 있다는 인식. 그래서 더이상 아무런 이야기도 만들지 않고 살아야한다는 인식의 결과물이 이 작품 자체가 되고 있다. 하여 서사의 인과적 고리나 현실과 소설의 경계 따위는 철저히 파괴한다. 이 낯선 세계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나와 라푼젤의 24시간의 동화 같은 사랑 때문이다. 그들의 행동은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상상에 대한 믿음으로 가능하다. 현실에서 이륙한 그들의 행동은 자유롭고 아름답다. ‘이륙하고 싶은 현실을 괄호 치고 이륙한 현실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륙하고 싶어하는 현실은 어떤 모습인가? <죽은 시인의 사회><빚을 갚기 위하여>에서 구체화된다. 시인의 삶이 아닌 죽음에 관심 있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않는 한 모든 것이 진실이고 모든 것이 가짜가 될 수도 있는 현실이 그것이다. 카메라를 통해 눈앞에 보여줌으로써 가장 확실한 듯 보이지만 카메라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기록하고 편집하는 자들의 정치성에 따라 달라지는 현실. 더욱 섬찍한 것은 필요에 의해 언제든지 나의 삶이 관찰되고, 그 진실이 편집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빚을 갚기 위하여>사랑이름으로 자행되는 무자비한 폭력에 대한 고찰이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이나 어머니의 집요한 비난은 모두 자신들의 질서로 타인의 삶을 재편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가족들이 서로의 허물을 감싸주기보다는 오히려 서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뿐이다.

80년대 식으로 말하자면 사회 안정을 위해 싹쓸이도 가능하다는 식의 전도된 가치관으로서 가족 구성원들의 통일된 평안을 위해 개인적인 사생활은 완전히 무시되는 게 우리의 가족이다. 그런 탓에 그 어느 구성원들도 가족 앞에서 정직하거나 진실 되지는 않았다. 거기서는 다른 가족 구성원에 대한 배려나 관심이 전혀 없었다.(206)


이러한 싹쓸이식 논리가 사회에도 확대 적용된 것이 한스의 이야기이다. 가족과 다른 것은 사랑대신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자행된다는 점뿐이다. 하여 현실은 갑자기라는 의외성과 돌발성으로 다가오며, 그전까지 지루하게 반복관리될 뿐이다. 사랑과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 어린 시절: 여자이야기>는 이런 소통 불가능한 세계의 상처를 그렸다.


쩌면 나는 아버지와 남동생으로부터 한 발짝 비켜나 진짜 혼자가 되기 위하여 어머니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72)

어머니가 섬에 다니러 왔다가 돌아갈 때의 느낌도 그랬다. 내가 섬에 있다는 사실이 못 견딜 것처럼 싫었지만 방문객인 어머니가 떠날 때면 나는 평온해지기까지 했다. 또 어머니를 기다리리라. 그리고 여기서 계속 혼자 살게 되겠지. 이런 이중적인 감정이 어린 시절의 나를 지배했었다.(78)

기다림혼자라는 의식의 이율배반성이라는 유년의 상처는 현재까지 계속된다. 사랑이라기엔 아픔과 그리움 그리고 익숙해진 불행으로 반복되며, 그녀 자신도 타인이 들어와 쉴 수 있는 그늘을 마련하지 못한다. 특히 그녀의 연인들이 그저 남자로 묶일 뿐 개별적인 연인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녀의 사랑이 아직도 기다림혼자되고 싶다는 의식사이에서 진동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사랑하는, 나의 사랑에서 비롯되는 존재로서의 연인이기에 그저 남자라는 그 이상일 수 없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이라는 의식의 공간을 통해 과거로 가득찬 미래가 반복되고, 그녀는 어머니의 삶을 되풀이한다. 치료로써의 연애는 그녀를 점점 더 병들게 하고 타인과의 소통 불가능만 확인할 뿐이다. 섬은 그러한 상태로 찾아드는 퇴행의 공간이다.

<한 착한 남자의 불행>은 가족성원들 모두 서로에게서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사랑하는데도 서로가 서로에게 철저하게 외로운. 이 같은 소통 불가능한 관계는 그가 병든 어머니에게 독백처럼 쏟아내는 말들과 전화 자동응답기 그리고 경아의 독백이 그것이다. 마치 희곡을 연상시키듯 어머니에 대한 독백이 중심을 이루는 점도 소통 불가능한 상황을 가장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어머니 시신 앞에서의 정사는 다소 위악적인 제스처로 이해될 수 있는 어머니 넘어서기의 한 형태이다. 그가 돌아온 이유는 어머니의 밥을 먹고 곁에 눕고 싶어서인 동시에 어머니 아닌 다른 여자를 찾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외적인 소통 가능성이 폭력적인 현실 앞에서 좌절되었을 때, 그가 찾을 수 있는 것은 모태 회귀거나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있는 또다른 자궁을 꿈꾸는 것이다. 그곳에 마지막 정사가 위치한다.

<펄프 픽션>을 연상시키는 구조의 <담뱃가게 이야기>는 각각의 인물을 일정한 거리에서 훑고 지나간 뒤, 그것을 마지막으로 종합하기 전까지 독자들의 자의적인 종합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의 경우 장순호와 장미래의 사랑이 죽음을 통한 부재 증명으로써 불멸하려는 시도였다면 그것이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졌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소통이 불가능한 시대에 사랑을 통해 그것을 건너려는 작가의 시도는 그것이 비록 죽음의 형태로밖에 나타나지 못할지라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소통의 가장 기본적이면서 가장 최종적인 형태가 사랑이기 때문이다.

일상과 환각이 교직 되는 탓에 전통적인 독법에 익숙한 독자들은 이 소설집이 낯설 것이다. 낯선 만큼 그것이 흔들고 가는 정서적 파장 역시 만만치 않을 것이다. 늘 아무일 없이 평화롭게 반복되는 일상의 배후에 전혀 소통되지 못하고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폭력과 단절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작품이 신세대 소설가들의 일반적 폐단으로부터 그렇게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현실이 휘발된 세계의 공소함이라든가, 인과성이나 재현성을 포기하고 헤매는 모험의 유효성 여부라든가, 곳곳에서 드러나는 환상적인 요소들이 과연 현실을 충실히 견제하고 있는가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청호의 작업은 소중하다. 끊임없이 시도되는 그의 소설적인 실험은 분명 서사의 영역을 확대시키는 귀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계속 회의한다. 이것은 자신이 보고 말하는 것의 확실성을 지속적으로 회의함으로써 자신의 그것이 또다른 견고한 폭력이 되지 않도록 견제하고 기장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그가 열어 가는 극적 서사의 도입이나 시간의 해체 그리고 소설과 현실의 경계 허물기 등도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기 때문이다.(1999) 

1999년은 등단하고 난 다음 해다. 맹목적인 의욕에 넘쳐 마구 읽고 거칩없이 지르던 시기다. 3권의 신작 소설의 서평을 외뢰받아 쓴 것인데, 지금보니 무모한 의욕만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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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과 만난 세계사의 즐거움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우리는 역사를 쉽게 잊지만 역사는 우리를 결코 잊지 않는다. 때문에 역사는 흘러 간 과거가 아니라 흐르고 있는 현재이며, 앞으로 흐르게 될 오래된 미래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어제이고 오늘이며 내일인 역사를 배우고 삶 속에서 체화시켜야하는 것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세계화를 지향하는 지금 이곳에서 세계사의 중요성은 재산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재미있게 효과적으로 학습할 것이냐에 있다. 바로 이것이 <달력 속에 살아있는 세계사>에 주목하는 이유다.


이 책의 미덕은 역사책 속에서 풍화될 뿐이던 화석화된 세계사를 달력이라는 생활 소품을 활용하여 일상의 세계로 끌고 나왔다는 점이다. 어렵고 외워야하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달력과 함께 부담 없이 즐기는 과정을 통해 살아있는 역사와 끊임없는 대화를 시도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획 의도는 책의 입체적인 구성을 통하여 더욱 빛나고 있다. 해당일의 역사적 사건은 물론 더욱 깊이 있게 탐구할 수 있도록 관련 사건을 연계시켰고, <역사 속 오늘 어떤 일이?>라는 코너를 통하여 독자 스스로 더욱 찾아 읽을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있으며, 화려한 도판과 지도 등을 통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또 하나 이 책의 미덕은 이미 세계적인 지명도를 확보하고 있는 캐릭터인 뿌까의 엔터테인먼트적 확장이라는 점이다. 이 책에서 뿌까는 친숙함으로 독자를 소구하면서도 내용에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독자와 동반자적인 관점을 유지함으로써 학습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캐릭터의 생산적 확장 과정에서 매우 실천적이며 효과적인 전략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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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외로운, 그리고 적요한 신열

 

박기수(문학평론가,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한강의 소설은 읽히지 않고 스민다. 아주 낮은 음성으로 스미는 그녀의 언어는 가벼운 신열이다. 거센 통증은 아니어도 신열은 무엇보다 내가 나를 놓을 때까지 반복되는 집요함이 있다. 서서히 몸으로 스미지만 마침내 온몸을 달구어놓고 마는 그것의 저력을 그녀는 일찌감치 터득하고 있는 것 같다. 더구나 화려하고 기이한 이야기의 소설들이 온갖 찬사의 중심에 있는 요즘, 그녀의 속울음 같은 이야기들은 담백한 속맛을 우려내기에 더욱 소중하다.

한강의 주인공들은 고단한 삶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들의 고단함은 죽음과 관련된 거부할 수 없었던 정신적인 상처(trauma)에서 비롯된다. 이청준 초기 작품에서 보였던 정신적인 외상들이 현실의 가공할 폭력에 대한 방어기제였음을 상기할 때, 한강의 그것은 보다 존재론적이라는 측면에서 변별된다. 그녀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거부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자신과 같은 타인의 죽음을 체험했거나, 자신만 살아 있다는 죄의식으로 시달리거나, 거기에서 비롯되는 고아의식으로 단절되어 있거나, 이곳의 삶을 언제든 털어버릴 수 있다고 믿고있거나, 타인과의 소통을 단절시킨 채 자신의 내부를 향한 집요한 응시만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강의 첫 작품이었던 여수의 사랑을 만나보면 이와 같은 특징들을 손쉽게 그러나 고통스럽게 마주할 수 있다.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반복되는 까닭이고, 고통스러운 이유는 외로움과 고단함이 대항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기 보다는 삶의 근원적인 형질이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여동생의 죽음과 나의 의사 죽음 체험(여수의 사랑), 남동생의 죽음(질주), 배다른 형의 광기와 몰락하고 해체되는 가족(저녁빛), 병신 여동생의 실종과 황씨 딸아이의 죽음(진달래 능선) 등 얼핏 여느 고향동네에서 들었음직한 비극적인 이야기들이다. 지극히 통속적일 수 있는 이야기가 한강의 이야기 속에서는 깊은 울림으로 살아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여수의 사랑>에서 화자는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에 의해 동생이 죽임을 당하고 자신만이 그 죽임으로부터 벗어난다. 혼자 살아남은 죄책감과 아버지에 대한 혐오와 분노로 나는 심한 결벽증에 빠진다. 혼자라는 심리적 고립감을 세상의 모든 것이 더럽다는 인식으로 바꾸어 자신의 혼자있음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더럽고 나만 혼자 깨끗하기에 나의 홀로 있음은 당연한 것이고, 따라서 씻는 행위는 나의 깨끗함을 지키려는 노력이며 동시에 다른 이와 내가 다르다는 징표가 된다. 하지만 결벽이 심해질수록 상처는 덧날 뿐이다. 결벽은 세계와의 단절이며 회피이기에 문제의 본질에 다가설 수 없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상처를 지닌 자흔을 통해 한강은 그 상처가 우리 모두의 근원적인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숨이 턱턱 막혀오는 고단함과 막막한 외로움, 그것을 회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운명.

문제는 그러한 고단함과 외로움을 속병처럼 지닌 채 분주히 헛것을 쫓으며 사는 우리에게 있다. 하여 한강의 주인공들은 그러한 헛것을 떨치기 위해 가족으로부터 튕겨나가 있다. 평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한강 소설의 고아의식이 그것이다. 가족은 나의 나됨을 형성시켜주는 곳이며 동시에 나의 나됨을 방해하는 곳이기도 하다. 앞의 것이 세계와 관계되는 나의 나됨이라면 후자의 그것은 존재론적인 차원의 자기인식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한강이 천착하고 있는 삶의 근원성은 다분히 존재론적 비극과 맞닿아 있다.

여수의 사랑이 상처의 속울음이었다면, 검은 사슴은 그것에 대한 치유의 모색이다. 치유는 상처를 앓고 있는 이들에 대한 비극적인 응시에서 시작된다대낮 8차선 도로 한복판에서 옷과 함께 기억을 놓고 알몸이 되어버린 의선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현재의 옷을 벗어버리는 이와 같은 행위는 다분히 제의적이다. 경찰서를 탈출해서 인영의 방을 찾아오고 그녀를 보살펴주는 행위는 의선의 모습에서 인영이나 명윤 모두 그동안 숨기듯 지녀온 자신들의 상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지점에서 이청준의 <황홀한 실종>을 읽어보면, 20여년의 시간차를 두고 두 작가가 상처를 어떻게 보듬고 있는지 비교할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보살펴주던 의선이 돌연 행방을 감추고 그녀를 찾아 황곡에 이르고, 그 검고 고요한 어둠뿐이 그 낯선도시에서 정신을 놓아버린 의선을 찾는 행위는 결국 애써 잊어왔던 자신들의 어둠을 대면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운명의 상처들로 가위눌린 채 지독스런 자기 유폐로 삶을 견뎌온 자들의 자기 조응. 의선의 행방을 찾고 있지만 결국 길 끝에서 만나게 되는 자기 어둠의 고통스런 직면.

이청준이라는 걸출한 작가가 자주 사요하던 중층구조가 분절이 비교적 분명한 공간적 단절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면, 한강의 이와 같은 기법은 다분히 공시적인 중층구조라 할 수 있다. 더구나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그 결을 감춘 한강만의 직조술은 핍진성에 대한 혐의를 떨치기 어렵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매우 두드러지는 재능임에 틀림없다.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상징인 검은 사슴깊은 땅 속막장 동굴의 암반 사이에서 기어다니며 살고 있다는 이 가상의 동물은 한 번도 자신들의 종족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저마다 자신을 외톨이로 여기며 산다지하를 벗어나 하늘을 보는 것이 평생 소원이지만 끝내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죽고마는 비극적인 운명의 짐승. 어둠 속에서 죽고마는 검은 사슴의 운명처럼 제 각각의 상처는 결국 앓고 있는 저마다의 몫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 그럼에도불구하고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할 것은 의선, 인영, 명윤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있고 서로의 모습에서 자신의 상처를 발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명윤의 열병처럼, 인영의 기차사고로 인한 부상처럼 스스로 앓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 삶의 상처들이 존재의 근원의 그것이라면 그것의 치유 역시 자신말고는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깨달음의 중심에 검은 사슴의 치유가 놓인다.


최근 발간된 내 여자의 열매도 이러한 맥락 위에 있다. 상처 속에서 앓고 있는 영혼이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이전의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속울음을 울거나 옷을 벗고 대로를 횡단하는 광기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이다. 거칠게 단순화시킨다면, 검은 사슴에서 발견했던 치유의 시작이 그 상처와 맞서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구체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상처의 치유에 성공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오히려 이제 한강의 치유가 본격화되고 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그것은 그동안의 상처가 존재론적인 차원의 것이었다면, 이제는 각자의 존재론적인 상처가 차이로 드러나고 그것이 어긋남으로써 다시 상처가 된다는 영역까지 그의 상처와 치유가 확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평생을 외롭게 산 사내는 번잡스럽고 화려한 지역의 아파트에서 정착해서 살고 싶어하고, ‘평생을 정착하지 않고 살고 싶어하는 아내의 단절을 환상적인 기법으로 그려낸 <내 여자의 열매>. 몸의 멍으로 시작하여 끝내 푸른 식물로 변해버린 아내. 멍으로 수렴되는 아내의 외로움, 외롭기에 안정된 가정을 원하는 남편이 정작 자신의 집을 구리고 나서는 아내가 푸른 식물로 변해가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섬득한 단절, 다시는 자신의 힘으로 떠날 수 없는 식물이 되고나서야 아내를 돌아보는 남편의 어리석은 외로움.

이와 같은 어긋남은 <어느 날 그는>, <아기 부처> 등에서도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어긋날 대상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자폐적인 자기 유폐에서 벗어난 인물상이라는 점과 그 어긋남을 통해 함께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 그것이 다시 자기 내부를 비움으로써 찾을 수 있다는 인식에 이르고 있다는 점에 이 작품의 성과 중에 하나다.

한강은 집요하게 흐르고 있다. 그녀의 작품을 읽다보면 그녀의 생물학적 연령이나 데뷔년도가 작품을 판단하는데 소용이 닿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집요함은 존재론적인 상처들을 계속 천착하고 있다는 의미 외에도 새로운 각도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또다른 방식으로 그리려고 한다는 점에서 부박하고 혼돈만 가중시키는 몇몇 소설과 대비되어 매우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강은 자신의 삶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동반되지 않는 즐거움은 결코 낙()에 이르지 못할 쾌()일 뿐이라고 소리없이 강변하고 있다.

󰡔BOOKPARK󰡕 200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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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주체로부터 벗어나기

서동욱, 차이와 타자(문학과지성사, 2000)

 

박기수(문학평론가,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을 볼 때 관객들은 그 이야기 끝을 의심하지 않는다. 비교적 느긋한 기분이 되어 행복한 결말을 보장받은 흥미로운 롤러코스터에 몸을 맡기면 되기 때문이다. 명쾌하게 구분되는 두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물은 관객들이 원하는 세계로 성공적으로 편입되며 이야기를 갈무리한다. 인어공주는 인간의 세계로, 야수는 미녀와 함께 할 수 있는 정상적인 인간의 세계로, 타잔은 인간적인 정의의 세계로 등등. 이 분명한 지향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타자에 대한 배제와 동일성에 대한 맹목이다. 맹목의 자세에는 반성이 없다. 인어공주에게 바다는 지상의 삶을 지속적으로 견제해줄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분명하게 버려야될 공간일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바다에서의 삶이 지극히 행복하게 그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버려야만 하는지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왕자가 사는 지상의 세계에 편입되기 위해, 인어로서의 자기정체성을 과감히 포기할 뿐이다.


우리가 이와 같은 견고한 동일성의 신화 속에서 심리적인 안정과 평안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근대적 사유의 양수이기 때문이다. ‘차이다름이 아니며, ‘타자또 다른 주체가 아니라 배제할 것인지 혹은 동화시킬 것인지 결정해야할 대상일 뿐이다. 이와 같은 결정의 한 가운데 근대적 주체가 있다. 차이와 타자; 현대철학과 비표상적 사유의 모험은 그러한 근대적 주체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다양한 사유들의 공통된 정신을 살피고 있다. 그것을 저자는 비표상적 사유의 모험이라고 부른다. 저자는 근대적 주체성은 표상(表象) 활동을 그 본성으로 한다고 했다. 표상은 세계를 주체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서로 차이를 지니는 다양한 것들을 틀어쥐고 동일성의 지평으로 편입시키는 활동이며, 동시에 타자를 늘 지금으로 현재 하는 의식의 현전에 종속시키는 활동이다. 따라서 타자들은 오로지 표상활동의 매개를 거쳐 주체의 지평 위에 종속될 때에만 존립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들뢰즈와 레비나스를 중심으로 비표상적 사유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프로이트, 라캉 등의 이론뿐만 아니라 프루스트, 카프카, 미셸 투르니에, 쿤데라의 작품 등을 통해 비표상적 사유의 다양한 과점을 추적하고 있다.

이 책의 미덕은 우선 전문적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비교적 상세하고 친절하게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용어의 의미와 범위를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발을 무겁게 하는 각주의 나열에 빚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들뢰즈, 레비나스, 칸트, 샤르트르, 프르스트 독법의 내공과 탄탄한 소화력에 기초한 것이다. 생경한 용어로 윽박지르듯 압도하지 않는 저자의 어법은 전문적인 글을 쓰는 다른 이들도 눈 여겨 보아야할 부분이다.

이 책의 중심에 있는 들뢰즈는 최근 소장 연구자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들뢰즈의 사상이 지니는 주변 장르에 대한 유연함이 매력적인 유인요소가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문제는 국내 수용에 있어서 일반 대중들의 접근을 가로막는 것이 그 용어의 문제였다. 그의 중심어인 아이주체그리고 기관 없는 신체등의 용어들은 서양철학 전반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여기서의 명쾌한 정리는 여타의 들뢰즈 관련 독서에 있어서 견실한 주춧돌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만만하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다소의 지적 교양뿐만 아니라 두고두고 참고하며 읽겠다는 느긋한 자세의 독법이 필요한 책이다. 다른 들뢰즈 관련 책들을 볼 때 옆에 두고 참고하며 읽겠다는 마음으로 읽을 대 보다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글쓰기에 최종판이 없듯이, 책읽기에도 끝이 없음을 되새기며 읽을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책을 만나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닐까?

<대구대신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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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순결과 산문의 휘황함

 

박기수(문학평론가,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김훈은 깡마른 샤먼이다. 시리도록 파랗게 벼린 언어의 작두 위에서 그는 뛰어 오르고 올라간 거리만큼 내려서며 굿을 벌인다. 은유의 아름다움과 현상학적 환원을 바탕으로 하는 그의 레토릭은 완과 급을 조절하며 읽는 이를 몰아쳐간다. 그의 단호한 어조는 문장의 단단한 뼈가되고 힘 있는 근육이 되어 신화 속의 사내들을 불러내곤 한다. 그러면 그의 글은 지금 이곳의 사내들이 잃고 있는 억센 완력과 뜨거운 생명력으로 난장이 되고 만다. 그 난장의 생명은 산문의 휘황함으로 빛나는데, 그 빛의 중심에 깡마른 샤먼 김훈이 있다.


산문이 살아 있는 시대는 아직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다. 산문은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과 팽팽한 긴장으로 자신의 몫을 지켜가기 때문이다. 기형적인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가 잃은 가장 뼈아픈 것의 하나가 바로 이 산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지성의 사유나 세계에 대한 통찰 그리고 결코 타협하지 않는 꼿꼿한 정신을 글에서 잃었다. 그러한 산문이 김훈의 글쓰기를 통하여 복원되고 있다.

김훈의 글쓰기는 특정 장르에 구애됨이 없이 종과 횡으로 달린다. 그가 이전에 보여주었던 미학적인 혜안이 빛나던 문학평론은 물론 두 개의 은륜 사이를 달리며 몸으로 써내려간 여행 산문과 현실에 대한 물러서지 않는 정신을 촌철살인의 언설로 일구어낸 세설(世說) 그리고 남성서사의 예를 보여주는 소설 등이 그것이다. 그 중 지난 겨울부터 필자의 책상에 두고 보는 것이 자전거 여행칼의 노래그리고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이다. 세 권 모두 김훈 산문의 미덕을 모두 갖추고 있지만, 특히 칼의 노래는 신열을 앓듯이 읽히는 작품이다.

김훈의칼의 노래는 두 가지 방향에서 즐길 수 있다. 하나는 이순신의 인간적인 내면을 엿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김훈의 산문으로서 즐기는 것이다.

칼의 노래는 이광수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나 박정희의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확대 재생산된 성웅 이순신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을 탐색하고 있다. 이순신을 이용한 민족주의나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의 확대 재생산은 지금도 정치권력에 의해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정치인들이 중대 결심을 앞두고 현충사를 방문하거나, 서울의 핵심부인 세종로를 압도하고 있는 이순신의 동상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신화화가 인간 이순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으며, 그 결과 그에 대한 경외감을 갖게 할지는 몰라도 역사 속에서 살아있는 한 인간으로 만날 수는 없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칼의 노래는 탁월하다. 백의종군에서 이순신이 전사하기까지 이순신의 인간적 고뇌가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왕과 권력층의 견제에 의한 억울한 옥살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전장으로 향해야하는 아들의 슬픔, 자신의 피와 땀으로 일군 수군이 전멸한 상태에서 거대한 적의 수군과 맞서야하는 절망감, 부하들을 먹이지 못하는 지휘관의 무력감, 온 천지에 널린 주검과 굶주림과 적의 칼날 사이에서 대면하는 죽음에 대한 공포 등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 이순신을 작가는 복원하고 있다.

이 작품은 사실적인 묘사와 시적이면서도 단호한 작가의 호흡을 통해 읽는 이를 굶주림과 피비린내가 주검으로 넘실대는 남해의 전장을 끌고 들어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칼의 노래의 또 다른 미덕을 만날 수 있는데, 그것은 그토록 끔직하고 섬뜩한 현장 속에서 작가의 현실과 인간에 대한 통찰을 미학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김훈의 산문 곳곳에서 보이던 향기롭고 찬란한 통찰들이 아름다운 문장으로 살을 얻고, 이순신의 사적(史籍)으로 뼈대를 세워 살아난 것이 바로 칼의 노래인 것이다.

칼의 노래로 이순신은 자유로워졌다. 독재자의 지배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역사속의 인물로 그가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김훈의 산문정신을 통해서였다. 오늘 우린 칼의 노래에서 단순하고 순결했던 한 무장의 칼과 단호하고 꼿꼿한 한 산문가의 고뇌와 통찰을 발견할 수 있다. <창원대신문> 2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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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輪의 길, 산문의

김훈 자전거 여행(생각의 나무, 2000)

 

박기수(문학평론가,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사람이 앞서지 못하는 바퀴와 사람을 앞설 수 없는 바퀴 사이에서 마른 바람을 맞으며 사내가 달린다. 사내는 자신의 자전거를 풍륜(風輪)이라고 부른다. 사내의 풍륜은 세상의 길을 온몸으로 감으며 오르고 감은 길만큼 풀어주며 내려온다. 산이 불러 산까지 데리고 간 길을 내려놓고 어둠을 싣고 데려오고, 어둠을 싣고 가는 날에는 전조등 밝혀 길을 데리고 내려오는 그의 풍륜은 때때로 바다까지 흘러가서 넓고 붉게 물든 노을과 길고 검게 느린 그림자 사이에 서 있곤 한다. 그곳에서 사내는 깊이 밀고 멀리 당기는서해의 관능이나 날카롭고 명징하고 눈부시게일출을 향해 달리는 동해에 이르는 강들의 고단함을 본다. ‘소금이 오는 옥구 염전에서 사내는 짜고 향기로운 소금을 보고, 제 몸을 태워 날아가는 만경강 하구의 도요새에게서 필멸(必滅)의 장엄함을 본다.


사내의 풍륜은 본다’. 흐르면서 본다. 산을 보고 들을 보고 바다와 강을 보며 하늘을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척박한 풍요를 수납하며 살아가는 소박한 사람들의 부지런한 생의 시간들을 본다. 사내가 보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들으면 말하게 되고 말하면 논()하게 되는 까닭이다. 논하면 시비에 매이고 시비에 매이면 떠난 길이 단지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길, 그 이상이 되지 못하는 까닭이다. 밖을 봄으로써 안을 비추고, 안을 비춤으로써 스스로를 돌아보며 깊어지는 이치를 사내의 풍륜은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사내의 풍륜은 뒤차를 인도하기 위해 후미 등을 켜고 달리는 것이 아니며 앞차와의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 전조등을 켜는 것도 아니다. 사내의 코앞을 동그랗게 비추어 선도(先導)해주는 전조등이 사내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지라면, 빨갛게 불든 후미 등은 지나온 길의 증거다. 그래서 어둠이 내린 길에서 사내의 풍륜은 의지증거사이를 달린다. 하여 사내의 풍륜이 보는 것은 의지와 증거 사이에 머문다.

달리던 바람이 멎고 풍륜이 자는 밤이면 사내는 원고지에 꾹꾹 눌러 손으로 글을 빚는다. 사내는 풍륜 아래서 풍륜 위의 일들을 기록하고 증언한다. 그래서 사내의 글에서 풍륜이 본 것과 사내가 본 것이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써내려간 것이 거북이 머리를 들고 바다로 나아가는 여수 돌산 향일암에서 서울의 여의도까지 서른 곳이다. 풍륜이 보고 달려온 것들은 사내의 레토릭을 넘지 못하고 사내의 레토릭은 풍륜을 앞서 달리지 않는다. 높은 곳이나 낮은 곳, 들이나 바다, 그 어느 곳 생의 시간들이 다녀간 자리에는 사연이 길을 만들고 길은 내력을 들려주는데, 그곳은 듣는 이가 없어 적막하다. 적막이 만드는 깊이 마다 시간이 고이고 고인 시간에는 사내가 데려간 속기(俗氣)가 부끄럽게 낯을 씻는다. 씻은 낯을 바람에 말리며 사내의 풍륜은 먼지 낀 세상으로 내려오고, 내려온 거리만큼 다시 안개 낀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어 하는 사내의 병은 불치(不治).

아무래도 자전거 여행은 경이롭다. 우선 상업자본에 의해 공공연하게 압도되어 있는 중요 일간지에서 이와 같은 미학적이고 그래서 별로 쓸모가 없는(?) 글을 서른 회나 연재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더욱 필자를 경악케 하는 것은 8개월 만에 이 책이 10쇄를 찍어냈다는 것이다. 이 책은 해리포터처럼 환타지의 몰입 기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책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처럼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교양으로 위협하지 않는다. 이 책이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은 기대할 수조차 없다. 따라서 이 책의 저자 김훈은 조앤 K 롤링이거나 유홍준이 아니다. 물론 그는 김진명이거나 신경숙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책의 대중적인 흡입력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이 책의 곳곳에 스며 있는 시퍼렇게 살아서 뛰어오를 것 같은 문장과 삶의 한복판을 꿰뚫는 것 같은 섬뜩한 레토릭에서 그 까닭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문장이나 수사의 힘만으로 이 낯선 책의 흡입력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일간지에 연재되면서 자연스럽게 홍보가 되었고, 최근 큼직큼직한 양서와 베스트셀러를 외줄을 타 듯 잘 내고 있는 출판사 마케팅의 힘이라기에도 무엇인가 모자란다. 어쩌면 자전거 여행의 성공은 산문의 힘, 그 근력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 그것의 부활이었으면 좋겠다.

산문이 살아야 한다. 지금 이곳에서 소설이 산문 영역을 대표하고 있는 것은 여러모로 불행한 일이다. 소설은 산문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분명한 만큼 그것이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또 얼마나 자명한가? 소설의 가공할 개방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표현하고 있는 세계는 또 얼마나 한정된 것인가? 산문 영역에서 소설의 압도는 다른 형태의 산문들, 즉 곡진한 생활 글이라든가, 날 선 감각의 기행문이라든가, 읽는 이에게 온 마음을 전하는 편지글이라든가, 미더운 주장의 논설이라든가 그 종류는 굳이 한문학의 수다한 종류의 그것을 지적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한 다양한 산문들이 살아야 글이 제 몫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세계에 대한 탐구와 모색, 삶의 비의(秘意)를 캐려는 부단한 시도, 그리고 우리의 삶의 방법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와 성찰, 즉 소위 산문정신의 구현을 소설로 국한하는 것은 아무래도 편협하다. 이러한 편협함은 글을 일부 전문가들의 전유물로 생각하게 만들고, 그러한 글을 읽는 행위도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는 생활의 일부가 아니라 지적 허영이나 호사스런 기호(嗜好) 정도로 전락시켜 버렸다. 산문이 읽히지 않는데 그보다 행간이 넓은 시는 말하여 무엇 하겠는가? 글의 호위를 받지 못하고 걷는 삶의 길들은 얼마나 무모하고 불운한 것이냐?

다시 자전거 기행으로 돌아오자. 이 책이 지닌 몇 가지 중요한 의의는 남성적 글쓰기의 복원, 산문의 현대적 형태 모색, 레토릭을 통한 미적체험의 가능성을 증거하고, 무엇보다 그러한 다양한 시도가 대중성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2001년 동인문학상 작품인 칼의 노래에서도 잘 나타난 바와 같이 김훈 만의 독특한 세계관과 어법이 큰 몫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미덕은 살아있는 아름다운 것들은 나의 기갈에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는 프롤로그의 시작에서부터 갈 수 없는 모든 길 앞에서 새 바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 아무 것도 만질 수 없다 하더라도 목숨은 기어코 감미로운 것이다, 라고 나는 써야 하는가. 사랑이며, 이 문장은 그대가 써다오.”라는 프롤로그의 마지막을 읽는 것만으로도 그 숨 막히는 긴장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이 책의 곳곳에서 왜 길이 도()가 될 수밖에 없는지 시나브로 드러내고 있다. 길은 인간의 것이기에 마을을 떠나 마을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그의 인식은 결국 그가 그 길을 끝없이 달려야하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땅 위의 모든 길을 다 갈 수 없고 땅 위의 모든 산맥을 다 넘을 수 없다 해도,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 나아가는 일은 복되다.”는 실존적 차원의 인식과 의지이며, “자전거는 몸이 확인할 수 없는 길을 가지 못하고, 몸이 갈 수 없는 길을 갈 수 없지만, 엔진이 갈 수 없는 모든 길을 간다는 길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길에 대한 신뢰는 유한한 삶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을 기대하는 것이며, 그러한 기대가 적막한 산야와 처연한 풍광사이로 그의 풍륜을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풍륜이 간다. 이 천박하고 척박한 시대에 붉은 먼지를 일으키며 아직은 안개 낀 들과 강과 바다를 달린다. 은빛 바퀴에서는 그의 수사(修辭)가 커다란 원을 그리며 빛나고, 그 빛은 차가운 금속의 그것이 아니라 풍륜이 보고 달리고 있는 산야와 바다의 것이다. 그래서 풍륜의 바퀴는 반사하지 않고 삼투한다. 금속의 삼투, 삼투의 절묘한 균형, 그 중심에 이 책이 놓인다. 원고지 칸칸이 그가 덖고 있는 글에서 피어나는 향은 물 없이도 그 쌉쌀한 맛을 우려낼 것만 같다.(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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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리별, 위로와 치유의 여행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사랑은 당신의 얼굴에서 나를 보는 과정이다. 사람은 혼자서 온전히 자신을 볼 수 없는 까닭에 자신과 마음을 나누는 이에게서 자신을 얼굴을 보려고 한다. 둘은 서로 상대의 얼굴에서 자신을 보려고 하기 때문에 좀처럼 자신을 볼 수가 없고 늘 조금씩 어긋한 위치에서 틀어진 각도와 차이를 볼 뿐이다. 하여 사랑은 늘 온전히 제 모습을 비추어주지 않는 당신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다. 그 아쉬움의 안달과 조바심으로 결국 당신을 떠나보내고 난 후에 나는 그 텅 빈 당신의 부재를 앞에 두고 나를 보게 된다.

박영주의 고양이 달은 그런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고양이 달은 감상적인 사랑의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바탕으로 희생과 치유의 위로를 이야기한다. 이 작품은 무엇이든 가능한 세계로서 아리별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머리 셋을 한 몸에 지닌 고양이 아리를 동화적으로 설정하지만 캐릭터의 구도와 서사 전개는 현실의 맥락을 심층에 견고하게 구축해놓고 곳곳에 알레고리를 감추고 있는 까닭에 읽을수록 깊은 속내를 드러낸다. 모든 존재는 자신만의 별을 가지고 있다는 소박한 설정은 그것이 자기 눈 안에 들어 있으며 교감을 통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지점에 이르면 그리 간단한 설정이 아님을 알게 된다. 몸 하나에 각기 다른 머리 셋을 가진 고양이 아리의 설정은 일견 그로테스크해 보이지만 얼마나 짜릿하고 적실한 상상력인가? 노아가 만나는 숱한 캐릭터들이 그려내는 창의적인 세계는 알레고리의 심도에도 불구하고 즐겁고 밝은 세계를 보여주는 긴장이 재미있다.

고양이 달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간절히 원하지만 누구도 선뜻 내주지 않는 교감, 소통, 이해, 치유, 위로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수렴하고 있다. 동화적인 분위기를 견지하면서도 우화가 되는 것은 거부하고, 그러면서도 곳곳에서 알레고리의 심도를 드러내는 이 작품의 다층적인 특성은 사랑의 수다한 부면을 표현하기 위한 최적화 전략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이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비롯하여 수다한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닮은듯하고, 복잡한 구도와 세계관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것과 유사한듯하지만 고양이 달만의 아우라(aura)를 갖는 이유를 알 수 있을 듯하다. 익숙한 모티브의 창조적 수용과 낯선 변용을 주제의 심도와 특유의 화법으로 수렴하고 만만치 않은 분량의 유려한 호흡으로 이끌어내는 솜씨는 스토리텔러로서 작가의 역량을 능히 가늠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양이 달은 또 다른 기대를 가지게 한다. 그것은 원천콘텐츠로서 기획되고 창작된 작품이라는 점이다. , 이 작품은 독립적인 출판콘텐츠로서의 가치는 물론 멀티북, 뮤직비디오, OST는 물론 이후 애니메이션 등과 같은 거점콘텐츠로의 장르 전환(adaptation)을 전략적으로 견지하면서 창작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장르 전환을 중심으로 한 One Source Multi Use의 매개로서 이 작품의 스토리텔링 전략이 얼마나 지속적인 가치를 창출할지 자못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스토리텔링에 대한 기대가 날로 높아지는 지금 이곳에서 독립된 개별 콘텐츠로서의 가치를 십분 발휘하면서 향후 전개될 장르 전환을 염두에 둔 스토리텔링 그 시도와 결과 모두에 눈과 귀를 빼앗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양이 달의 가장 큰 매력은 이야기 자체의 흡입력에 있다. 낯선 세계를 전혀 낯설지 않게 소구해내고,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의 이야기를 완과 급을 조절하며 풀어내는 작가의 내공이 만만하게 보이지 않는 이유다. 누가 뭐래도 스토리텔링의 핵심은 이야기다. 이야기의 근력이 있어야지만 견실한 텍스트를 만들어낼 수 있고, 이를 기반으로 다양한 장르 전환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디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들 모두, 고양이 달을 아주 천천히 읽으며 그 안에서 자신의 별을 찾고, 자신의 쌍성을 발견하여 우리에게 또 다른 고양이 달을 들려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늘도 나는 당신의 얼굴에서 조금 비껴서 있다.

박영주의 고양이 달추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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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Source Multi Use, 향유가 먼저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One Source Multi Use는 원천소스(One Source)의 창구화, 장르 전환, 관련 상품화, 브랜드 창출(branding) 등을 통해서 부가가치를 극대화하는 마케팅 활동을 말한다.

창구화(windowing)는 콘텐츠를 시간적으로 계열화함으로써 수익을 창출하는 방식이다. 동일한 콘텐츠를 창구별(매체별)로 노출시키는 시점을 달리하여 수익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장르 전환에 비해 변환 비용이 적게 들어 리스크를 줄일 수 있지만, 신규시장 창출 효과가 없기 때문에 기대할 수 있는 수익은 크지 않은 수익 창출 방법이다. 이와 같은 창구화의 결과를 창구효과(Window Effects)라고 하며, 이것은 시간적/공간적 노출의 차별화를 통하여 배급효과를 높이고, 홀드백(Holdback)을 설정하여 개별 창구 간의 충돌을 전략적으로 피하면서 수익을 극대화함으로써 콘텐츠의 수익 창출 기간을 연장하는 효과가 있다. 영화를 극장, 유료TV, VOD, DVD, 공중파TV, 케이블TV 등과 같이 다양한 창구를 통해 향유하게 함으로써 수익을 지속적으로 창출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다.

장르 전환(adaptation)은 콘텐츠를 장르 별로 계열화시켜 신규 시장을 개척함으로써 수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이다. 이미 대중적인 지지를 확보한 소설, 만화, 웹툰 등을 매스미디어와 결합하여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거점콘텐츠로 전환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장르 전환은 향유자들이 전환 전후의 콘텐츠로부터 동일한 정체성을 확보하면서 새로운 즐거움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장르 전환은 동일한 정체성을 유지하지만 독립적인 콘텐츠를 제작하는 것이므로 전환비용이 많이 들고, 선행콘텐츠의 성공이 전환하는 콘텐츠의 성공을 반드시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창구화에 비해 위험도가 높지만, 그만큼 신규시장 창출 효과가 크기 때문에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

상품화(merchandising)는 콘텐츠 내용이나 소재를 상품으로 개발하여 수익을 창출하는 과정이다. 상품화는 캐릭터, 중심 소재, 배경, 이미지, 소품 등과 같이 콘텐츠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 관련 상품(merchandised goods)과 직접적 연관은 없으나 물리적으로 덧붙여진 PPL(Product Placement)과 같은 부가 상품(tie-in)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상품화는 콘텐츠의 성공을 전제로 하지만, 기획 단계부터 상품화 전략을 수립하여 콘텐츠와 유기적인 상관관계를 유지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

브랜드화는 콘텐츠의 인지도와 지속적인 향유를 통해 확보된 충성도를 활용하여 브랜드 가치를 유지, 확장하는 과정을 통하여 지속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해리포터시리즈는 소설, 영화, 게임, 테마파크 등으로 장르 전환하는 과정을 통해 압도적인 브랜드 가치를 창출함으로써 이미 시리즈가 종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콘텐츠 제작이 이루어지고 있다.

One Source Multi Use의 동력은 원천콘텐츠의 후광효과 여부, 원천콘텐츠의 전환 적합성, 거점콘텐츠의 최적화 여부, 연동 콘텐츠 간의 상호 프로모션, 다양한 창구로의 확산, 브랜드 가디언의 효과적인 통제에 의한 상품화, 지속적인 브랜드 아이덴티티 확보 등에 있다. 그동안 콘텐츠 업계는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통하여 강력한 원천콘텐츠의 확보 방안, 전환의 최적화 장르 파악 및 전략 탐색, 상호 프로모션 방안, 상품화 전략 등에 나름의 노하우를 가지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하나는 2012년 이래 가공할만한 신드롬을 낳고 있는 미생이다. 웹툰은 11억 뷰 이상, 책은 250만부 이상, 6-7%대의 드라마 시청률, 콘텐츠파워지수 1위라는 가시적인 성과뿐만 아니라 미생의 사회적 담론을 생산함으로써 미생 법안이라는 웃지 못 할 명명을 낳기도 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미생신드롬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웹툰 <미생>이 대중적 지지를 받으며 연재되는 동안(2012-2013) 단행본 미생이 순차적으로 출간되고, 캔커피, 맥주컵, 종이컵, 노트, 이력서 등의 부가상품이 개발/출시되고(2012-현재), 드라마 <미생 프리퀄>(2013), 웹툰 <미생-사석>(2014), 드라마 <미생>(2014), 패러디 버전인 드라마 <미생물>(2015) 그리고 웹툰 <미생>가 준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생One Source Multi Use는 웹툰 연재 당시부터 비정규직 문제, 직장생활 애환과 불안정성 등을 핍진한 에피소드, 촌철살인의 경구, 이완의 절묘한 서사 전개로 대중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이를 통해 사회적 담론 형성하였다는 점이다. ‘지금 이곳의 문제를 향유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구체적인 퍼포먼스를 통하여 단행본, 부가상품, 드라마, 광고, 패러디 드라마의 연속적인 성공을 이끌었고 연재될 <미생>를 통해 프랜차이즈 콘텐츠의 세계를 구축했다는 점은 반드시 주목해야할 지점이다.

2009년 디즈니가 40억 달러에 인수한 것은 마블이지만, 실제 그들이 원한 것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Marvel Cinematic Universe)였다. 마블은 이미 영화 판권을 팔아버린 원천콘텐츠를 제외하고도 5000여개의 매력적인 캐릭터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이 구축할 수 있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무한한 까닭이다. 이것은 헨리 젠킨스가 주장했던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transmedia storytelling)의 가장 소박한 형태지만 동시에 가장 강력할 수 있는 양상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은 멀티플랫포밍을 통해 개별적인 스토리들이 모여 하나의 서사 세계’(narrative universe)를 구성하는 일종의 상업주의적 팬덤 현상이다. 이와 같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와 유사한 예가 소박하지만 미생을 통해 그 가능성을 보였다는 점이다.

미생신드롬 혹은 미생프랜차이즈화 과정은 One Source Multi Use의 선순환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크다. ‘미생을 통해서 적은 비용으로 대중성 검증이 가능한 스토리성을 풍부한 원천콘텐츠의 확보, 일정 기간 주기적인 노출을 통한 지속적인 향유의 장 마련, 브랜드 가디언에 대한 분명한 자의식,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이 가능한 서사 세계’(narrative universe)의 탄력적 운영, 미디어별, 장르별 특성에 최적화된 전환 전략 탐구 등의 성공적인 사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출판계의 불황이 더욱 심각해졌다고 한다. 불과 10여 년 전 만화도 그랬다. 새로운 플랫폼과 창조적으로 결합하여 웹툰으로 형질변환에 성공함으로써 시장은 3000억 규모로 커졌다. 그런면에서 출판과 유기적으로 연계된 웹툰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영화, 드라마, 게임 등과 같은 거점콘텐츠와 상호연동하려는 One Source Multi Use의 전략은 물론 마블의 예에서 보듯이 보다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이 가능한 서사세계 구축의 시도 역시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아직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지 않아 가능성의 영역에 남아있는 전자책이 본격화될 때, 마치 만화가 웹툰으로 위기를 타개한 것과 같은 새로운 시도들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것은 웹툰이 급부상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충성도 높은 향유자층의 지속적인 참여 유도와 소통의 공간 마련, 원천콘텐츠로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매력적인 이야기성 확보, 거점콘텐츠화 과정에서 보다 유기적인 서사세계 구축의 유연한 자세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낙관적인 전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최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출판사 팟캐스트를 통해서 그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책이 언제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듯이 One Source Multi Use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유연하고 적극적인 출판계의 시도를 꿈꿔본다.


<책&>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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