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비평, 정체와 역할 그리고 변별성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이 글은 지금 이곳 만화의 변화에 적극 대응하고 선도할 수 있는 만화비평론을 구성하기 위한 시론(試論)의 성격을 지닌다. 기존의 해설중심의 의전비평, 주례사 비평이 아니라 도발적인 문제제기와 무모할 정도의 다채로운 시도를 통하여 독립적인 텍스트로서 즐길 수 있는 만화비평을 생산하고, 그 과정에서 보다 생산적이고 실천적인 형태의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 역동적인 만화담론의 장(場)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소란스럽고 다채로운 그래서 살아있는 만화담론을 생산하기 위한 만화비평의 시론을 도모한다.
1. 만화비평의 구조적 부재
다소 도발적인 문제 제기일지는 몰라도 ‘만화비평은 부재중’이다. 열정적으로 비평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비평가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만화비평은 구조화된 침묵이거나 부재다. 만화비평의 정체, 방법론, 역할 등에 대한 뚜렷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느냐/없느냐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만화비평이 신뢰할만한 매체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양적인 측면이나 질적인 측면에서 만화와 생산적인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웹툰을 포함한 만화산업 전체의 폭발적인 성장내지 변화에 비추어 본다면 만화비평의 오늘은 차라리 부재에 가깝다.
비평은 콘텐츠와 유기적인 상관속에서 긴장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그 존재 가치를 확보하며 상호 성장하는 것인데, 콘텐츠의 성장만 독주할 뿐 비평이 자기 정체나 역할을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는 어떤 관점에서도 결코 긍정하기 어려운 기형적인 양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최근 영화 등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비평의 형질 변환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겁고 진지한 분석 및 해석 중심의 비평에서 가볍고 쉬운 정보 중심의 비평으로의 전환이거나, 문자 텍스트 중심에서 비평가와 향유자의 직접 만남을 통한 비평방식의 변화이거나 또는 다양한 매체를 통한 새로운 형태의 비평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그것의 긍/부정 가치 평가를 떠나서) 비평의 부재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의 경우에는) 비평으로서의 자기 정체와 역할에 대한 변별적인 인식을 기반으로 하는 만화비평이 선행했다고 보기 어려운 현실임을 고려할 때, ‘지금 이곳’에서 만화비평의 침묵은 오히려 부재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실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은 내재적 측면과 외재적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내재적 측면에서는 만화비평에 대한 변별적 자의식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과 만화비평의 토대가 되어야할 만화미학에 대한 탐구가 부족했기 때문에 만화와의 건강한 긴장관계 형성에 실패했다는 점 등을 그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아울러 외재적 측면에서는 만화비평의 생태계를 제대로 구축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전문 발표 매체와 다양한 관점과 이론적 토대를 갖춘 전문가 집단을 지속적으로 육성하고 유지하지 못함으로써 만화와의 비판적 거리 및 권위 확보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금 이곳’ 만화산업 생태계에서 만화비평의 산업적 필요성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점이다. 판매부수로 그 가치를 평가받는 만화산업이나 클릭수나 댓글수로 대중성을 평가받고 있는 웹툰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만화비평 그 자체의 산업적 수요는 미시적 차원에서 결코 높지 않다. 더구나 다양한 플랫폼과 디바이스로 만화의 향유가 가능해짐으로써 향유가 축적되고, 그로 인한 일정 수준의 팬덤(fandom)이 형성됨으로써 향유자는 준전문가 수준의 정보와 지식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향유자들은 블로그나 SNS 등을 통하여 적극적인 형태로 작품에 대한 자유로운 품평을 다양한 차원에서 시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적극적인 형태의 향유를 통하여 비평의 저변이 넓어졌다거나 비평이 민주화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필연적으로 비평의 정체가 모호해지고 그 수준이 하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하여 가뜩이나 그 정체가 분명하지 않았던 만화비평의 정체는 더욱 혼란스러워졌고, 동시에 전문 비평가 집단의 비평에 대한 산업적 차원의 수요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만화비평의 산업적 수요는 현격하게 감소하였고, 그나마도 본격 비평을 전개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원고 분량을 요구하다보니 정치한 분석과 풍부한 해석을 기반으로 하는 심도 있는 비판이나 평가보다는 단순 정보 제공 수준의 비평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지금 이곳 만화 생태계는 이글에서 당위적으로 요구할 분명한 자의식을 지닌 비평을 굳이 요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최초의 만화비평이라고 일컬어지는 1927년 권구현의 <신문 삽화 만평>에서부터 대중문화론과 함께 주목받게 되는 1970년대 김현과 오규원의 비평을 건너 1990년대 만화비평의 대중적 확산에 이르는 과정에 주목해보면, 비평의 부재를 비판하는 현재 상황이 왜 심각한 것인지 알 수 있다. 특히 전문 잡지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양질의 텍스트가 쏟아지던 1990년대 초반을 상기해보자. 대중적인 호응과 다양한 이론적 배경을 지닌 비평가들이 대거 등장하여 (거시적 차원에서 평가해보면 문화연구라는 맥락이었지만) 각자의 관점으로 만화비평을 풍요롭게 생산했고, <스포츠 서울> 신춘문예를 통해 젊은 비평가들이 본격적으로 데뷔함으로써 비평의 황금기를 구가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많던 비평가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토록 풍성했던 관점과 해석의 지평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만화비평에 대한 접근이 단행본 한 권이나 비평 하나 정도 수준의 지속성이라면 아마추어리즘이라는 말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지속성이 보장되지 않은 외재적인 이유는 능히 추측할 수 있다. 전문적인 비평발표 매체가 부족하거나 없었다는 점, 보상이 만족스럽게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 만화비평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조금 더 냉정하게 만화비평의 내재적 측면을 생각해보자. 1990년대 비평의 황금기라고 이야기하던 그 시절이 정말 비평의 황금기였다면, 만화비평의 정체와 역할 그리고 변별적인 특성에 대한 고민이 전개되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만화비평에 대한 분명한 자의식이 전제되지 않고 생산된 비평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사라지고 난 후 만화비평은 다시 원론 수준으로 소박하게 돌아간 것은 아닐까? 더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들은 만화비평이 아니라 문화연구의 일환으로 대중문화, 하위문화의 첨병이라고 회자되는 만화를 선택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들의 비평에서 만화 장르 자체에 대한 도발적인 자의식보다는 만화를 통한 문화비평의 흔적이 더 발견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만화비평의 부재는 단지 비평가들의 비평에 대한 자의식이나 역량이 부족해서 초래된 결과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것은 오히려 만화생태계라는 거시적 차원과 만화비평생태계라는 미시적 차원의 문제가 유기적으로 얽혀있다는 점을 고려한 공시적 접근과 만화비평 역량의 축적 과정이라는 통시적 차원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만 한다. 따라서 만화비평의 부재는 현재적인 문제, 만화비평만의 문제, 비평가만의 문제가 아닌 지극히 종합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의 문제다.
2. 만화 비평의 정체와 역할 그리고 변별성
비평은 ‘차가운 글 읽기’와 ‘따뜻한 의혹’의 산물이다. ‘차가운 글 읽기’란 섬세하게 작품을 읽는 데서 출발하며, 예리한 푸른 날의 칼로 마지막까지 결을 내는 분석 과정이다. 아울러 ‘따뜻한 의혹’이란 푸른 날로 조각 낸 섬세한 결들 속에서 삶의 편린들을 엮고 그 심층적 의미를 파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지금 이곳’의 삶을 견제하고 성찰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과정이다. 이 두 행위 모두 텍스트에 대한 뜨거운 애정에서 비롯됨은 물론이다. 이와 같은 차갑고 따뜻한 긴장 속에서 작품의 의미 지평은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삶과의 연관은 자기 증식한다. 그러므로 비평은 텍스트와의 지속적인 대화 과정이다. 그 대화는 텍스트 안으로 스스로의 정체를 성찰하고 밖으로 다른 텍스트와 차이를 규명하여 그 가치를 가늠하고 평가하려는 노력이다. 섬세한 독법으로 꼼꼼하게 텍스트를 분석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텍스트의 깊이를 탐구하고 넓이를 확장하는 지속적인 과정인 이유다.
만화비평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만화의 변별적 특성을 바탕으로 만화비평의 역할과 상관하여 조형적(plastic)인 관점에서 그 변별성을 파악해야 한다. 만화비평의 정체라는 것이 고유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화의 형질 변화와 비평에 요구하는 역할에 따라서 조형적으로 구성해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만화비평의 정체에 대한 고민은 비평가의 만화비평에 대한 자의식의 다른 이름이다. 만화비평가의 자의식은 해당 텍스트를 비평을 해야 할 이유에서 출발하여 만화에 대한 이해와 애정 그리고 향유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기반으로, 텍스트가 놓인 컨텍스트와의 비판적 거리의 긴장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러므로 만화비평에 대한 비평가의 자의식은 지금 이곳 만화에 대한 애정 어린 의혹에서 시작하여 텍스트의 넓이와 깊이를 확보하려는 부단한 긴장이다.
만화비평의 자의식 부재가 초래한 결과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늘 게재할 수 있는 작품이나 비평해야할 작품보다 게재하고 싶어 하고 비평의 대상이 되고 싶은 작품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권위 있는 신뢰할만한 매체에 작품이 실리는 것은 그 자체로 그 작품의 우수성을 인정받는 것이며, 더구나 비평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그러한 효과를 증폭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형 포털이나 출판사의 의뢰에 의한 의전비평이나 주례사 비평은 단기적으로는 성과를 거둘지 모르겠으나 장기적으로는 비평 자체의 권위를 치명적으로 훼손시키는 얄팍한 전술이다. 이와 같이 만화비평에 대한 자의식이 없는 비평의 현재적 양상을 수렴해보면, 대부분 비평가의 관점은 은폐된 채 해설 중심으로 전개되며, 텍스트에 대한 평가가 맹목에 가까운 긍정과 칭찬으로 구성된다.
이와 같은 만화비평에 대한 자의식이 없는 비평으로 인하여 건강한 비평담론 생산이 차단되고, 텍스트에 대한 온전한 평가가 불가능해진다. 이 과정에서 비평가는 스스로 권위를 상실하게 됨으로써 정작 비평이 기능해야 할 상황에서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
1997년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 선정성 논란을 상기해보자. 작가가 필생의 역작으로 야심차게 기획했던 <천국의 신화>가 어처구니없는 선정성 논란에 휩싸였을 때, 비평은 과연 무엇을 했는가? 더구나 만화와 연관하여 가장 많은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선정성에 대한 이론적 연구나 텍스트 중심의 탐구를 통한 선제적 대응은 고사하고 그 어떤 비평도 옹호의 반대논리를 펴지 못하지 않았던가. 과연 비평이 텍스트에 대한 섬세한 읽기와 심도 있는 해석을 진행하고 제대로 된 평가를 내렸었다면, 선정성에 대한 비평의 선제적 탐구가 있었다면,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선정성이라는 소박한 기호에 치명적인 폄훼를 당했을까? 한국을 대표하는 거장이 만화의 비전문가인 20대의 새파란 검사로부터 일본만화를 베낀다는 모욕을 당하고 있었을까? 2012년 귀귀의 <열혈초등학교>가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폭력성 논란에 휩싸였을 때 그것을 적극적으로 옹호할 만큼의 만화 리터러시를 고민했던 비평이 있었는가? 비평이 제몫을 다했다면 <열혈초등학교>의 표면에 드러난 폭력성이 그 자체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고, 그 심층의 메타포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보수언론의 공격을 막아주었을 것이다. 귀귀의 B급 정서와 표현이 그만의 표현 전략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그것이 구체화된 것이 이 텍스트에 드러난 폭력의 컨텍스트였음을 읽어주었어야 했다.
새로운 미디어 플랫폼의 변화와 디바이스의 발전을 소박하게 인식하고 있다가 모바일 만화 시장을 무료화했던 2009년의 네이버 웹툰 논란을 상기해보자. 웹툰시장의 지배적인 사업자인 네이버의 일장적인 앱툰 무료화의 부당성에 대하여 비평은 무슨 의견을 제시했는가? 웹툰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무료라는 기형적인 시장구조를 만든 것도 어이없는 일이지만 심지어 앱툰시장 마저 다시 무료화하는 상황은 만화가 비평을 키우지 않으면 앞으로 또 어떤 일을 당할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2011년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나 2015년 레진코믹스 사태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다른 의도로 관심을 환기시키거나 어린이를 볼모로 부모를 위협할 때, 그것의 첫 타겟이 만화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하여 비평은 생태계적 차원에서 고민해야만 한다.
만화비평의 정체는 비평 그 자체를 독립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텍스트로 인정할 때 파악 가능하다. 만화 텍스트를 원천으로 출발했고 매우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지만 만화비평은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즐길 수 있는 독자적인 것이다. 이처럼 비평이 독자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만화 자체의 문법과 대타적(對他的) 상관을 유지해야 하며, 그것을 기반으로 한 차별화 요소들을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만화는 큰 변화의 격랑 속에 놓여 있다. 유통 플랫폼, 과금체계, 디바이스의 변화에 다른 텍스트 구현 및 향유 방식의 변화가 그 변화를 주도하고 있으며, 그 결과 텍스트의 형질변화까지 이끌어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창작의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수용 변용함으로써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나는 반면 비평의 부분에서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다. 지금 이곳 만화의 급변에도 불구하고 비평의 방식이나 태도 그리고 그 메커니즘 자체가 변하지 못함으로써 비평의 지체 현상을 초래한다. 그로 인하여 대형 포털 중심의 웹툰 생태계를 추수할 뿐 웹툰에 대한 비판적 긴장을 형성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더구나 웹툰이 원천콘텐츠로서 각광을 받으면서 모든 평가 기준이 대중적 지지를 드러내는 객관적인 지표에 종속되거나 특정 타겟의 취향을 반복 재생산하는 지극히 소모적인 대중 인정투쟁 양상을 드러낸다. 웹툰 시장에 있어서 대형 포털의 권력화는 단지 원고료를 통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요구하는 취향의 인정투쟁으로부터 발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을 비판적으로 견제하기 위해서는 견실한 비평의 뒷받침이 필요한데, 지금 이곳의 비평은 전혀 그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웹툰 생태계의 기형화, 황폐화를 낳고 있다. 지속적인 ‘위기의 수사’가 식상할 정도로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그와 무관하게 ‘위기의 양상’은 오히려 노골적으로 본격화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그 주요 원인으로 등장하는 ‘비평의 부재’라는 비판은 이제는 충격적일 것도 없는 패배주의를 낳고 그만큼 그 종속도는 더욱 가중될 뿐이다. 만화담론을 활발하게 생산하고, 창작을 촉진하며 그것을 견제해야할 만화비평이 스스로의 몫을 방기함으로써 비평 자체는 물론 만화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만화비평은 부단히 변화하고 있는 만화처럼 변해야 한다. 만화가 변하듯 비평의 정체성도 그 역할에 부응할 수 있는 적극적인 변화와 구성의 노력이 필요하며, 그것의 저류에는 만화비평의 변별성을 확보하려는 의지가 흘러야 한다. 만화비평의 변별성은 만화와 비평의 기계적이 교합이 아니라 만화와 비평이 대타적 긴장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구성하고 발견해 나가야할 무엇이다. 왜곡의 미학, 시간과 공간의 상호교차적 대치, 칸사이의 호흡, 글과 그림의 이코노텍스트, 분절의 연속화에 기반한 서사 구성 등과 같은 만화미학의 기본 요소들은 지속적인 변화의 도정(道程) 위에 있다.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살아있다는 말이다. 만화가 살아있듯 만화비평도 살아있기 위해서는 분명한 자의식을 기반으로 만화와의 생산적인 긴장을 확보해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지금 여기 만화비평의 변별성은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3. 만화 비평, 담론의 장을 키우자
건강한 만화비평의 장(場)을 만들기 위해서는 만화비평 담론(discourse)의 장을 구현해야만 한다. 만화비평 담론은 만화미학과 비평윤리의 결합이 빚어낼 수 있는 역동적인 창의성에서 출발한다. 푸코식으로 표현하자면 담론은 특정 대상이나 개념에 대한 지식을 생성시킴으로써 현실에 관한 설명을 산출하는 언표들의 응집력 있는 자기지시적인 집합체이다. 언표와 규칙의 집합체인 담론은 역사적으로 존재하며 물리적 조건에 따라 변화하며, 그것은 개인들 간의 교환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익명성의 층위에 존재한다. 따라서 만화담론은 기존의 존재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구성에 가까우며 만화비평 담론은 만화담론에 기반한 비평담론을 창의적 결합으로 구성해내야 한다. 건강한 담론이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는 역동적인 충돌과 갈등과정에서 만들어진다고 할 때, 만화비평 담론은 신/구, 지배/종속, 올드미디어/뉴미디어, 보수/진보, 존재/당위, 글/그림, 과장/축소 등과 같은 만화담론의 역동적인 대립쌍들이 비평담론과 화학적 결합과정에서 벌어지는 논란과 논쟁, 승인과 거부, 출현과 사라짐 등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 특히 후기자본주의적 시장질서와 뉴미디어의 상보적 결합이라는 시대의 특성을 적극 반영하려는 전략이 담론의 장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될 수 있는지 진지한 관찰을 통해 모색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지배소로 등장하게 될 향유의 활성화를 전략역시 만화비평의 영역에 망설임 없이 넣어야할 부분이다.
만화비평은 비평이 그렇듯 다양한 요소들이 다양한 층위에서 만나서 비평의 장(場)을 이룬다. 구현 매체, 유통 플랫폼, 장르분법, 지배적 언어, 사회문화적 공인과지지, 사회적/경제적 보상 등이 다양한 조합으로 결합하며, 비평의 성격에 따라서 구성 요소나 층위를 결정한다. 특히 전제 한 바와 같이 만화의 특성을 전략적으로 선택함으로써 만화비평 스스로의 정체와 역할을 구성하고 이를 통해 변별성을 확보한다.
만화비평의 담론은 만화에 대한 비판과 담론 생산은 물론 특정 사안의 첨병이거나 수호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다양한 맥락과 이론을 수렴해야 한다. 만화담론을 선도하거나 자극에 대한 선제적 대응에 필요한 요소들을 창발적으로 수렴함으로써 현재적 문제는 물론 예견된 갈등에 적극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만화의 현재적 고민은 다양하다. 새롭게 급부상하여 시장지배자로 군림하려는 웹툰과 관련되어서는 그것의 정체와 지향 그리고 기존의 만화와의 차별성 확보, 앱툰과의 변별,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Transmedia Storytelling)의 중심 매개로서의 역할 등은 물론 건강한 생태계 구성을 위한 모색 등이 그것이다. 또한 최근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는 그래픽 노블역시 웹툰과 같은 모색과 탐구의 짐을 지고 있다. 이와 같이 만화를 둘러싼 고민들은 텍스트를 중심으로 한 내재적/외재적 양상으로 드러나고, 텍스트의 완성도뿐만 아니라 콘텐츠로서의 시장 가치 및 확대 방안 등이 모두 포함되는 매우 다양한 양상을 드러낸다. 따라서 만화비평 역시 이러한 다양성에 부응하거나 선도할 수 있는 담론을 포괄해야 한다. 적어도 만화비평이 활성화되고 보다 생산적인 양상으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배제의 시학이 아니라 포괄의 시학에 기반한 수렴적인 담론체계를 지행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만화비평은 만화에 최적화된 비평 방식을 지속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비평이 대상이 다르면 비평의 언어도 달라져야 하고, 무엇보다 개개의 비평은 비평 대상이 되는 콘텐츠의 특성에 최적화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문자 텍스트 중심의 비평은 문학의 것을 빌려온 것 뿐이다. 영화는 최근 문자 텍스트 중심의 비평보다 구술언어 중심 현장전달 중심의 비평이 각광받고 있는데, 이것은 매스미디어의 학습효과를 기반으로 한 것이며, 팟캐스트와 같은 뉴미디어의 부상에 기민하게 대응한 결과다. 가장 산업화된 영화의 발빠른 행보 역시 그들의 생존을 위한 최적화 전략에 다른 아니다. 그러므로 만화와 같은 흥미로운 텍스트를 딱딱하고 무거운 문자중심의 비평으로 한정하는 것은 우울한 일이다. 텍스트에 대한 접근성, 공감의 보편성, 이해의 용이성 등이 어느 무엇보다 높은 만화의 특성에 걸 맞는 새로운 비평방식을 탐구해야함은 물론이다. 만화의 즐거움을 분쇄시키는 비평은 어떤 이유로도 온당하지 못하다. 만화가 즐겁듯 비평도 즐거울 수 있는 독립적인 즐거움 창출이라는 전제로 지속적인 모색이 필요한 이유다.
만화비평의 방법론으로 수렴할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가장 젊은 장르지만 가장 강력한 장르가 된 영화가 강한 이유는 수렴중심의 개방체계에 있다. 경쟁력 있고 소구력 있는 방법은 모두 창조적으로 수렴함으로써 자기화하는 영화의 전략에 주목해보면, 만화비평도 활용가능한 방법론들을 개방적으로 수렴하여 그 적실성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 문화 일반의 보편적 방법론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기존의 역사주의, 형식주의, 마르크스주의, 구조주의, 기호학, 탈구조주의, 실리주의, 독자중심, 페미니즘 등등 텍스트를 풍성하게 하고 심도를 확보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론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만화미학 안에서 통합시켜낼 수 있느냐의 문제는 이제부터 집요하게 탐구해야할 부분이다.
만화비평에 대한 자의식을 구성하고, 이를 토대로 정체와 역할을 모색하고 이를 통해 변별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은 다분히 당위적 요구에 가깝다. 실천의 구체적인 방안과 전략은 이제부터 실천을 통해 고민할 바다. 이제 시작이다.
2015년 <크리틱M>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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