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1년 미국에서 연구년을 보내면서 가족과 여행한 기록이다. 이번 아니면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라 생각하고(얼마나 절박한가) 시도했던 무모했던 여행의 기록이다. 200자 원고지 1600장의 기록은 여행중 기록했던 A4 50장에서 출발한 것이다.

2장은 미국횡단여행을 하기 전 예행연습격의 여행이었고, 3부는 21일간의 미국횡단여행기다. 자동차 여행의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던, 잘 몰라서 무모했고 씩씩한 맹목이었던 기록이다. 벌써7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지만 의미있는 기록이라 생각하고, 저지름의 불쏘시개 역할이라도 되기를 희망한다.

초등학생이었떤 둘째는 고등학교 3학년, 중학교 3학년이던 첫째는 대학교 3학년이 되었다. 그들만큼 많이 변한 나는 이제 오십대 중반으로 달리고 있으니 세월이 휘발되지 않게 거칠고 모자른 글이라도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에 기록한다.

2018. 07. 11

박기수

블로그 이미지

홑섬

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

목차

 

. 길에서 길을 묻다

 

. 길을 떠나려는 사람은

마음 준비: 하고 싶은 일과 해야 만할 일 사이

첫 번째 여행: 광란의 매혹 혹은 매혹의 광란

두 번째 여행: 낯선 곳에서 배우는 삶의 속도

세 번째 여행: 흐르는 강물처럼, 살아서 강성한 것들

떠날 준비: 먼 길을 떠나려는 사람의 준비

 

. 길이 데려다 준 길

01일 여행 중 떠나는 여행

02일 세 개의 브로큰 애로우(Broken Arrow)

03일 알 수 없는 나라

04일 걷는 것이 언제나 옳은 이유

05일 세 개 주를 달리다

06일 오클라호마에서 울다

07일 서부 개척은 없다

08일 행복한 미술관 혹은 버드와이저

09일 밥은 힘이 세다

10일 어떤 길도 버릴 길은 없다

11일 시카고를 기억하는 가장 황홀한 방법

12일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

13일 너에게서 나를 보다

14일 보스턴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15일 참 지독한 도시의 유령

16일 언제나 오늘로 기억될 오늘

17일 끝내 답을 얻지 못한 의문

18일 비 오는 날의 필라델피아

19Freedom is not Free

20일 오늘에 답하지 않는 역사는

21일 길은 그리움을 낳는다

 

. 떠나야할 길이 있는 당신은

블로그 이미지

홑섬

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

길에서 길을 묻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집 앞으로 신작로가 있었다. 맑은 날이면 길가의 먼지가 신작로 아스팔트 위로 달려들었다. 저녁 무렵 이남박에 쌀을 팔아 오시던 서른여섯 어머니, 그 뒤를 따라오던 신작로는 늘 마른 바람이 불었다. 팔아온 쌀로 이남박에 물을 받아 부지런히 씻으시던 어머니는 건강했고 따듯했다. 그 따듯함은 넉넉한 국이 되거나 따듯한 밥이 되어 다섯 아이들의 숟가락을 채웠다.

 

차들이 많던 시절은 아니었어도 차들은 부지런히 속리산 방향으로 달렸다. 이따금 어느 집 아이가 차에 치였다는 말이 들렸고,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아이의 사연은 늘 극적인 안타까움이었다. 그 안타까움이 절절할수록 할머니는 신작로에 나가지 못하게 하셨다. 외아들인 아버지가 위로 누이 둘을 낳고 얻은 아들이 나였으니 신작로로 나서지 말라는 할머니의 염려와 경계는 단호할 수밖에 없었다. 오래된 기억 속의 나는 집 앞에 앉아 신작로를 질주하는 트럭이며 승용차들에 넋을 빼앗길 뿐이었다. 서울로 이사 와서는 곳곳이 신작로였지만 누구도 그 길을 신작로라고 부르지 않았다. 서울 골목들은 똑같이 생겨서 마치 도시 전체가 나를 가두거나 놀려주려는 것만 같았다. 유난히 길을 잘 잃어버렸던 나는 청주 살 때나 서울에 올라와서도 이사하는 곳마다 번번이 길을 잃었다. 길을 잃을 때마다 할머니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신작로가 두려울 나이도 아니고 길을 잃을 나이도 아니지만 떠나지 못했다. 마음은 늘 낯선 이름의 고장을 자전거로 달리거나 걷고 있었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보니 아내는 나보다 더 겁쟁이였다. 여행다운 여행을 제대로 떠날 수 없는 조건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질 뿐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린 떠난 것이다. 신작로보다 더 크고 끝을 알 수 없는 길을, 아내와 함께 어린 아이들 둘을 데리고 남루한 짐을 꾸리어 떠난 것이다.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무엇을 꼭 이루겠다고 떠난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은 우리의 예상보다 더 부지런히 자라고, 그들이 자랄수록 함께할 시간이 더욱 없어질 것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더구나 한국에 돌아오고 나면 나는 나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분주할 것인데, 언제 이렇게 온 가족이 3주간 여행을 해볼 수 있겠는가 하는 소박한 생각이었다. 소박한 것은 생각뿐, 계획을 짜고 경비를 마련하는 일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나라도 다 돌아보지 못했는데 낯선 남의 땅을 굳이 횡단까지 해야 될 이유는 무엇이냐? 횡단계획이 구체화될수록 그만두어야할 이유는 그보다 더 구체적인 설득력을 가지고 다가왔다. 그러다가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니 꼭 해보자고 서로 다독이며 무모하게 출발했던 횡단이었다. 가는 곳마다 온통 낯설었고, 낯선 만큼 어려웠지만, 정확히 그만큼 보고 느끼고 생각할 것들을 만날 수 있었다. 더구나 낯선 길 위에서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오롯이 우리뿐이었다. 그것만으로 족했다.

 

미국은 언제나 막연했다. 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에도 미국은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과 어긋나 있었다.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할 뿐이었다. 더구나 이 터무니없이 큰 나라는 좀처럼 그 끝을 보여주지 않았다. 미국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갈수록 섣불리 안다고 할 수 없다는 것만 매순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횡단여행을 통해서 미국의 가장 아픈 역사의 현장들을 돌아보면서 아주 조금 알게 되었지만, 그마저도 책으로 좀 더 살펴보아야 할 것의 작은 일부일 뿐이었다. 중부를 지날 때 만났던 집 앞의 거대한 십자가와 집집마다 걸렸던 성조기의 의미를 이제 겨우 짐작하게 되었다. 더할 수 없이 부러웠던 것들과 또 그보다 더 많이 걱정스러웠던 것들은 섣불리 예단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이 책에서 조금 무모하게 이야기해야만 했다.

 

이 책은 미국 횡단 여행의 기록이다. 그토록 바라보기만 하던 어린 시절의 신작로는 아니지만 그 비슷한 길을 참 오랫동안 멀리 달려온 기록이다. 시간적 여유나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미국에 머무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다. 달린 만큼 보고, 본 만큼 생각하고, 생각한 만큼 행복해질 수 있기를 기대하며 출발했던 무모한 도전의 기록이다. 무모한만큼 거칠고 성길 수도 있겠지만 쉬지 않고 부지런히 다녔다. 이 책은 지독히 낯설거나 너무도 낯익거나 한 것들이 내게 남긴 기록이기 때문에 혼잣말 수준을 넘어설 수 있을지 기록하는 내내 두려웠다. 독자들의 눈을 밝혀줄 깊이 있는 식견이나 감성을 울릴만한 언어를 가지고 있을 리 만무한 사람이 기록한 것이라 출간이 더욱 망설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기억의 휘발을 막기 위해서 그날의 기록을 꼼꼼하게 남기는 아내의 일기와 가는 곳마다 챙겨온 아이들의 풍성한 자료 그리고 매일 소심하게 기록해두었던 나의 A4 50장 분량 메모의 진솔함을 믿기로 했다. 1만 장이 넘는 사진을 찍었지만 그 수준은 1만 번의 부끄러움이 되었을 뿐이다. 그중에 겨우 분간할 수 있는 것들만 책에 실었다.


이 책은 떠나기 전에 기획된 것이 아니다. 횡단 여행을 시작한지 이삼일 될 무렵 페이스 북에 올린 거친 글을 좋게 봐주신 분들이 여행기를 꾸려보자고 제안을 했고, 얼떨결에 그러자고 하다가 일이 커졌다. 이 책 덕분에 우리는 좀 더 충실한 여행을 하게 되었고 불확실한 기억이 아니라 소박하게라도 기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에 기록된 언어는 내 것이 없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것에서부터 아버지, 어머니, 장모님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기웃대서 가져오지 않는 곳이 없다. 그들의 사랑이 고여서 언어가 되고, 난 단지 거칠게 기록했을 뿐이다. 부족한 것은 내 기록이고 넘치는 것은 그들의 언어다.

 

201112

Irvine에서 汎山 拜

블로그 이미지

홑섬

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

하고 싶은 일과 해야 만할 일 사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은 늘 꼭 해야 하는 일에 밀리고 만다. 게다가 하고 싶은 일이 지금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냐고까지 물으면, 그것의 우선순위는 더 뒤로 밀리고 만다. 그래서인지 나이가 들수록 하고 싶은 일은 그저 하고 싶은 일로만 남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구나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나 해야만 할 일의 이유가 자신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나 주변 환경과 관계된 일이다보면, 하고 싶은 일은 말 그대로 하고 싶은 일일 뿐이다.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려 밤낮 없이 뛰면서 스스로 열심히 산다고 자부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다. 잘 살기 위해서는 물론 열심히 살아야 하지만, 열심히 살았다는 말이 잘 살았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매순간 숨이 턱에 차오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더 열심히 달려야 한다고 스스로를 몰아세우며 또 달릴 뿐이었다. 돌아보면, 왜 그렇게 죽기 살기로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지, 왜 그토록 일에만 매달려야하는지, 가족들과 잘 살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했지만 정작 가족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심지어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늘 잘 사는 것은 현재를 희생해서 막연한 내일을 기약하는 기만에 가까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저 열심히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믿으며 스스로를 몰아세우기에 급급했다.

늘 해야만 할 일은 하고 싶은 일보다 많았고 갈급했다. 가족들은 늘 양해의 대상이었다. 아침에 연구실에 출근하면 밤 10시가 넘어서 연구실을 나서는 일상이었다. 토요일에도 강의 때문에 밤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일요일에도 논문과 원고 핑계로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방학이 되면 방학이기 때문에 해야만 할 일들이 기다렸다. 하루하루가 빈틈없이 돌아가고, 그렇게 한 주가 한 달이 되고, 한 해가 갔다. 하지만 그냥 해만 간 것은 아니었다. 그 사이 아이들은 아빠의 시간과 상관없이 부지런히 컸고, 그 뒷바라지는 오롯이 아내 혼자의 몫이었다. 게다가 몇 해 전부터인가 몸은 내게 지속적으로 적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대상포진, 결석, 고지혈증 등으로 강도를 높여가며 경고하는 몸을 약으로 다스려왔지만, 몸도 마음도 지쳐가고 있었다. 이렇게 해야만 할 일에 가려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었는지도 희미해질 무렵 연구년이 찾아왔다.

연구년이라고 해야만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과감하게 모든 것을 접기로 했다. 지금 아니면 할 수 없을 것이 너무도 많았다. 첫째가 중학교 3학년에, 둘째가 초등학교 5학년에 올라가고 있었기 때문에 자칫 시기를 놓치면 아이들 학교문제로 연구년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내게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문화콘텐츠 환경을 밖에서 살펴보아야할 시간이 아주 절실했다. 다행스럽게도 미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중심인 LA와 인접한 얼바인(Irvine)에 있는 UCI(University of California, Irvine)로 갈 수 있었다.

출발 전날 보고서 때문에 밤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나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인천공항으로 가는 길에 내리던 눈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생각만 어지럽게 흩날렸다. 일 년 동안 해야만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은 화수분처럼 솟아오르는데 과연 그 둘을 모두 잘 해낼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집을 구하고, 아이들 학교를 배정받고, 은행 계좌를 만들고, 간단한 가구를 구하고, 미국 운전면허를 따는 등 생활의 기본적인 요소들이 어느 정도 갖춰지자, 나는 UCI에서 마련해준 연구실에 규칙적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집필 중인 책의 원고를 써야했고, 연구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으며, 그동안 관심 있던 분야의 자료들을 찾아서 정리해야만 했다. 해야만 할 일의 관성이 어느새 한국에 있을 때와 똑같은 생활을 강요하고 있었다. 아내의 말처럼 그럴 거면 뭐 하러 미국까지 왔단 말인가?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연구년을 지내는 동안 하고 싶은 일해야만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과감하게 지금 이곳에서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들을 하자고 마음먹었다.

미국에서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은 큰 것이 아니다. 조금 일찍 집으로 돌아와 저녁 준비를 함께하고, 주말이면 아내와 같이 장을 보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오고 반납하고, 규칙적으로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피트니스센터에 가서 운동하고, 시간 날 때마다 근처에서 가볼만한 곳을 가족들과 찾아다니는 것만으로도 모두들 즐거워했다. 그러는 사이 날씨 변화가 거의 없는 얼바인에도 봄이 오고 있었다.

 

블로그 이미지

홑섬

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

광란의 매혹 혹은 매혹의 광란

- 라스베이거스(219~21)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솔이네[각주:1]는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아이들 학교가 시작되면 시간이 없으니 그전에 여행을 많이 다녀야 한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야기를 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막막해하다가 그의 말처럼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시작하자 아이들 시간 때문에 여행은 더욱 어려워지고 말았다. 그러던 중 프레지던트 데이(President Day)[각주:2]가 돌아와 자연스럽게 219일부터 21일까지 연휴가 되었다. 마침 연구보고서를 하나 마무리 한 시기였고, 더 이상 여행을 미루다가는 집에서 안위를 보장받을 수 없는 분위기라서 첫 번째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첫 번째 여행지를 라스베이거스로 정한 것은 주어진 시간이 짧았고, 별도의 계획을 가지지 않더라도 공연을 비롯한 다양한 엔터테인먼트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물론 그 사이 당일코스로 LA, 샌디에이고 등의 도시를 다녀오거나 집근처의 라구나비치, 뉴포트비치, 디즈니랜드 등을 다녀오기는 했지만, 숙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들은 라스베이거스 여행을 첫 여행이라고 여겼다.

라스베이거스는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얼바인에서 동쪽으로 조금 멀리 움직이려면 대부분 라스베이거스를 거쳐 가야만 한다. 얼바인에서 라스베이거스까지는 승용차로 4시간 3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4시간 30분을 가까운 거리라고 쓰는 것은 이 정도 거리는 미국에서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8-9시간 운전은 보통이니 4시간 30분은 가까운 거리가 아니겠는가? 물론 한국에서였다면 분당집에서 부산쯤 가는 시간이니 결코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그래서였는지 여행 중에 장시간 운전으로 지루해지면, 남은 거리를 보고 대구쯤 남았다”, “이제 대전에서 출발하는 거야!”, “부산까지 왕복하면 되는 거리야!” 등으로 혼잣말하듯 가족들을 위로하고는 했다. 신기하게도 그러면 그 막막하고 지루한 길이 견딜만해지곤 했다.

라스베이거스는 집과의 거리도 거리였지만, 말로만 듣던 세계적인 수준의 호텔이나 그들의 도박 문화 그리고 화려한 쇼를 보고 싶은 욕심이 컸다. 더구나 라스베이거스는 아내가 좋아하던 <CSI: 라스베이거스>의 그리섬 반장이 활약하는 곳이고, 강의 시간에 자주 활용하는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Leaving Las Vegas, 1995)의 배경이 되는 지독한 욕망의 도시가 아니던가? 다만 걱정스러웠던 것은 아이들에게 이 메마른 도시에서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라스베이거스에는 가족 관광객들을 위한 쇼 프로그램이 아주 풍성했다. 각종 유료공연뿐만 아니라 호텔별로 프로모션을 위해 준비했다는 무료공연까지, 경비와 시간의 문제였지 콘텐츠는 풍요롭기 그지없었다.

숙소로 정한 몬테카를로 호텔은 기대만 못했다. 연휴 기간이어서 평소보다 비싼 가격도 가격이었지만, 무엇보다 <오션스 일레븐>(Ocean's Eleven, 2001)과 같은 할리우드 영화들이 보여주었던 화려한 이미지의 숙소가 아니었다.[각주:3] 물론 같은 이치로 우리 가족 역시 그러한 영화에 등장하는 백만장자는 아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다행스러운 것은 다른 호텔에 비해서는 조용하고 카지노도 번잡스럽지 않았다. 저녁을 먹기 위해 내려간 뷔페는 소박했다. 여행안내 책자에 가볼만한 곳으로 소개된 뷔페였는데 음식 종류나 수준은 실망스럽기만 했다. 가족들 모두 라스베이거스 뷔페에 앉아서 분당집 주변의 뷔페를 그리워하고 있었으니 웃지 못 할 풍경이었다.

라스베이거스의 유명한 3대 쇼[각주:4] 중에서 비교적 저렴한 <KA> 공연을 예약하고, 라스베이거스 스트립(Strip)을 중심으로 늘어선 호텔들을 구경하며 볼만한 무료공연의 스케줄을 확인해서 동선을 짜서 돌았다. 호텔과 뷔페는 기대만 못했지만, 호텔 어느 곳을 가든 카지노를 거쳐야 하는 동선 통제와 자연스럽게 도박을 권하는 다양한 전략은 눈여겨 볼만했다. 미성년자는 카지노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그곳을 거치지 않고는 뷔페를 갈 수도 없었고, 쇼를 보러 갈 수도 없었다. 그러니 아이들이 지나다녀도 별다른 제지는 없었지만, 도박을 하는 테이블 가까이 가면 직원들이 나이를 물으며 제지했다. 하지만 슬롯머신이나 도박 테이블 사이로 이동해야지만 식사나 쇼 관람을 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제지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드러내고 감추고, 허용하면서 금지하는 이중적인 성격의 공간이었다.

<KA>쇼는 무대 장치쇼에 가까웠다. 태양의 서커스단이 보여주는 아크로바틱한 연기도 연기였지만 무대가 수직으로 서면서 엄청난 양의 모래가 바닥으로 떨어지거나, 이층으로 분리되거나, 앞뒤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무대장치의 효과적인 활용은 압도적이었다.[각주:5]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관객으로 찾아오니 대사가 중심이 되거나 심도 있는 갈등의 전개는 어려웠을 것이고, 결국 기예와 무대장치의 스펙터클이 중심이 되는 넌버벌(nonverbal) 공연으로 갈 수밖에 없었으리라. <KA> 공연 내내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은 좋은 콘텐츠의 개발과 그것의 장기 공연을 위한 전용관의 문제, 더불어 지속적으로 관객을 소구할 수 있는 장소성 개발 등의 문제였다. 공연이 끝나고 나오면서 직원에게 객석의 규모를 물었더니 2,000석이 넘는단다. 하루 2회 공연에 우리가 구입했던 입장권이 제일 저렴한 것이었는데 77달러였고, 제일 좋은 좌석은 우리 것의 2배 가까운 금액이었으니 얼추 하루 수익을 계산할 수 있었다. 상설 공연으로 무대장치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가능할 것이고, 공연 연습 과정에서 배우들에게 투입되는 고정비용을 줄일 수 있고, 가족단위 카지노 방문객들에게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다는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있었다.

라스베이거스의 야경과 벨라지오 호텔의 분수쇼. 벨라지오 호텔의 분수쇼는 디즈니랜드의 <World of Color>에 비하면 소박했지만 수준과 규모가 결코 만만한 쇼는 아니었다.

라스베이거스는 도박을 중심으로 한 도시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을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하여 각종 엔터테인먼트를 유치하고 개발함으로써 매혹적인 도시를 만들었다. 사실 미국 전역에 카지노 없는 곳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황량한 사막까지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유는 도박만큼이나 압도적인 다양한 즐길 거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도박, 공연, 컨벤션, 쇼핑, 휴식, 놀이 등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도록 구성해놓은 도시 전체가 폐장하지 않는 테마파크였다.

라스베이거스 스트립을 중심으로 차별화된 테마로 꾸며 놓은 호텔들만 돌아보아도 하루가 모자랐다. 더구나 호텔별로 자신들의 테마에 맞는 무료쇼를 시간별로 보여주고 있어서 도시 전체가 유기적으로 구성된 하나의 콘텐츠였다. 아내가 시간대별로 무료쇼의 스케줄을 메모해둔 덕분에 그것에 맞추어 호텔들을 둘러보고, 대표적인 쇼들을 가급적 많이 보려고 부지런히 다녔다. 물론 무료쇼가 세계적인 수준의 유료쇼를 압도할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길을 가다가 잠시 발길을 멈추고 둘러볼만한 수준은 이미 넘어 선 것들이었다.

라스베이거스를 스트립을 중심으로 둘러보면서 우리는 다소 아쉬워하고 있었다. 테마별로 차별화하기 위해 꾸며 놓은 호텔 외관이나 소품들이 다소 경박하고 저렴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외관만 놓고 평한다면, 조악하게 흉내내놓은 질 낮은 테마파크를 보는 느낌이었다. 더구나 화려한 네온사인과 소란스러운 음악과 낯 뜨거운 호객 그리고 미국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취객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리의 혼잡과 광란도 긍정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스트립의 호텔들을 둘러보다가 프리몬트 스트리트 익스피어리언스’(Fremont Street Experience)를 보기위해서 다운타운으로 갔다. ‘프리몬트 스트리트 익스피어리언스460m 길이의 아케이드 천장에 1,600만개의 LED55만 와트의 음향기기가 어우러지는 쇼인데 라스베이거스에 가면 꼭 보아야할 쇼이다. 우리는 다른 곳을 둘러보다 마지막 공연을 보러갔는데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서 헤매다가 결국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아쉬웠지만 다음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지나치게 욕심을 내서 조금 더 많이 보려다가 정작 꼭 봐야할 것을 놓친 경우였다.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보느냐가 아니라 꼭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싶은 만큼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항상 과욕이 문제다.

라스베이거스의 호텔 숙박료는 시설 대비 매우 저렴한 편이다. 평일에 방문하면 일반적인 인(Inn)보다도 싼 경우를 흔하게 만날 수 있다. 저렴한 숙소를 제공하고 세계적인 공연을 유치하여 사람들을 불러 모은 후에는 카지노로 수익을 내는 전략이다. 그런 이유로 카지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모든 것이 카지노를 중심으로 짜여 있다. 도시 전체에서 놀라운 동선 통제와 시간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단 카지노에 들어서면 의지가 아주 굳은 사람이 아니라면 나갈 때에는 지갑을 비워주고 나가야만 하는 구조였다. 그래서인지 아침을 먹으러 가다보면 밤샘을 한 얼굴로 마지막 남은 얼마 안 되는 돈을 슬롯머신에 밀어 넣고 신경질적으로 버튼을 눌러대는 사람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 옆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똑같은 표정으로 돌아다니며 주류와 음료수를 가져다주는 아가씨의 표정은 야속하리만치 평온했다.

라스베이거스 주변에 위치한 명품 아울렛 역시 이 도시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매혹적인 브랜드의 공습이라는 표현 외에는 딱히 다르게 표현할 수 없는 공간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고, 들어서는 곳마다 세일에 세일을 더해주고 있었다. 필요해서가 아니라 사지 않고서는 견디기 어려운 욕망이 차고 흘러 넘쳤다. 욕망하는 모든 것들의 끝을 보려는 듯 매혹은 광란이 되고, 광란은 다시 매혹이 되어 무엇을 즐기고 있는지조차 잊게 되는 도시였다.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에서 알코올중독자인 벤이 왜 이곳에서 죽으려했는지, 거리의 여자인 세라가 왜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상처 있는 남자들의 위안이 되려하는지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 도시는 콘텐츠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둘러보아야할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매혹의 요소나 몰입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통제를 통해 자연스럽게 즐기게 만드는 스토리텔링 전략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광란의 매혹과 매혹의 광란을 이토록 집약적으로 동시에 체험할 공간은 라스베이거스밖에는 없는 까닭이다. 우리 과 학생들이 자꾸 생각나는 이유였다.

 

  1. 솔이네는 내 연구년보다 UCLA방문학자로 6개월 먼저 얼바인에 와 있다가 먼저 귀국한 박사과정 제자 가족을 말한다. 솔이네는 우리가 미국에 안착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집을 구하는 일에서부터 은행계좌를 만들고 운전면허를 따는 일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솔이 아빠는 이미 스케줄을 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지 선정에서부터 좀 더 저렴한 숙소 예약 방법 등을 소상히 알려주고, 자신이 다녀온 곳들은 자신이 짜놓았던 여행 스케줄을 미리 제공해주어, 우리 여행이 실수 없이 효과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안내해 주었다. 제자인 솔이 아빠뿐만 아니라 솔이 엄마 역시 늘 넘치는 사랑과 정으로 우리를 위로해주고 도와주었다. 외로울라치면 자신의 집으로 초대를 하거나 우리 집으로 달려오던 솔이네가 있어서 낯선 곳에서의 시간을 외롭지 않고 따듯하게 보낼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본문으로]
  2. Presidents Day(Presidents' Day로도 표기함)는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과 16대 대통령인 아브라함 링컨을 기리기 위해 1980년대 중반에 제정한 날이다. Presidents Day는 2월 셋째 주 월요일로 원래는 조지 워싱턴의 생일(2월 22일)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는데, 머리 좋은 미국사람들 셋째 주 월요일로 정하여 자연스럽게 연휴를 만들어버렸다. 연휴만 만든 것이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 대규모 세일이 이루어지는 쇼핑의 광풍이 부는 시기기도 하다. [본문으로]
  3. 이후에도 라스베이거스에 몇 차례 더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뉴욕뉴욕, 엑스칼리버, 베네치아 등에서 숙박을 했었는데, 베네치아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웠지만 다소 비쌌고, 뉴욕뉴욕은 모던하고 깔끔했는데 다만 카지노가 지나치게 혼잡스러웠다. 엑스칼리버는 가격이 저렴했던 만큼 최악의 호텔이었다. [본문으로]
  4. 일반적으로 라스베이거스 3대 쇼라고 말하는 것은 MGM그랜드 호텔의 쇼, 벨라지오 호텔의 쇼, 윈 호텔의 쇼이다. 미국에서의 쇼핑이 대부분 그렇듯, 제값을 다주고 하는 경우는 드물다. 라스베이거스 쇼 역시 미리 할수록 저렴하게 관람할 수 있다. 인터넷에 라스베이거스 쇼 티켓 관련 사이트를 찾아서 가장 저렴한 것을 택하면 된다. 가급적 미국 현지 사이트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본문으로]
  5. 나중에 다른 기회에 벨라지오 호텔의 쇼를 보았는데 무대 장치와 연기의 유기적인 조화가 경탄스러울 정도였다. 짧은 시간 안에 물과 무대장치를 이용한 역동적인 연기는 보는 내내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쇼에 비하면 쇼는 소박한 수준이었지만, 쇼를 보기 전에 쇼를 보았기 때문에 그 놀라움은 대단한 것이었다. [본문으로]
블로그 이미지

홑섬

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

낯선 곳에서 배우는 삶의 속도

- 요세미티 국립공원샌프란시스코버클리몬트레이캐멀(419~23)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첫 번째 여행으로 자신이 생긴 것은 나만이 아니었나보다. 가족들은 4월 아이들 봄방학 무렵이 되자 샌프란시스코와 그 주변으로의 두 번째 여행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샌프란시스코를 언제 가본 것도 아니 것만,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들만으로도 충분히 혼잡스럽고 번거로웠기 때문이다. 막연한 두려움은 출발부터 예사롭지 않은 조짐을 보여주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샌프란시스코에 잔뜩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여행 계획을 짜고 적당한 위치에 숙소를 예약해야하는 입장에서 보면 역시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가격 대비 숙소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예약조차 쉽지 않았다. 예약 사이트를 돌아보다보니 숙소에서 심지어 주차비를 받는 곳까지 있었으니 좋은 인상을 가지고 떠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더구나 샌프란시스코까지 갔으니 그 주변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생각에 요세미티 국립공원, 몬트레이, 캐멀, 버클리 등을 포함시키다보니 45일의 일정은 빡빡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 봄방학 기간을 이용해서 샌프란시스코를 다녀오자는 계획이었기 때문에 여행 기간을 무한정 늘려 잡을 수가 없었다. 사실 아이들의 봄방학이 418일부터 23일까지였으니 그 전 주 토요일인 416일에 떠나면 여유 있는 일정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UCI에서 봄 학기 강의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화요일 강의를 마치자마자 학교에서 바로 떠나는 것이 최선이었다. 구글 지도 위에서 몇 번을 시뮬레이션한 결과 우리의 여정은 요세미티 국립공원샌프란시스코버클리몬트레이캐멀 순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얼바인에서 요세미티 국립공원까지는 6시간 30분쯤을 예상했는데, 쉬엄쉬엄 달려서 예상보다 시간은 조금 더 걸렸지만 다행스럽게도 해가 아직 남아 있을 때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얼바인에서는 북쪽으로 LA까지밖에 가보지 못한 우리는 LA를 벗어나자 마치 알 수 없는 자유를 느끼고 있었다. 잘 모르는 지역의 장거리 운전도 부담이었지만 길 위에서 벌어질지도 모르는 돌발 상황들을 적잖이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을 LA에 던져두고 온 듯한 묘한 해방감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맥락 없는 해방감은 다소 흥분되었다는 의미다. 과도한 흥분은 뜻하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 오크허스트(Oakhurst)의 숙소에 거의 도착할 무렵, 창밖으로 달려드는 풍광에 이미 마음을 빼앗기도 있었다. 흥분한 상태에 마음까지 빼앗겼으니 노란신호가 보였겠는가? 급하게 노란신호를 인지하는 순간 급정거를 했는데, 뒤에서 한껏 속도를 올리며 바툼하게 달려오던 빨간색 스포츠카가 아슬아슬하게 급정거를 했다. 뒤차는 추돌을 면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방향을 옆으로 틀어서 갓길로 내려서면서 급정지했다. 정말 사고가 나도 뭐라고 할 수 없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옆 차를 살펴보니 운전석의 중년 여성은 사고를 피해서 다행이라는 의미인지 자신의 빼어난 순간 대처 능력을 알라달라는 것인지 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차 안을 살펴보니 다행스럽게 가족들은 노란 신호에 소심한 아빠가 급정거한 것으로만 아는 모양이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뒤차 운전자가 순간적으로 정확하게 판단하고 기지를 발휘하지 않았다면, 우리 여행은 거기에 끝났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인근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으며 진정하고 침착하게 운전을 하리라 다짐을 했지만, 숙소에 가까이 갈수록 달려드는 풍광에 빼앗긴 마음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요세미티 국립공원까지는 차로 40여분 더 가야했지만, 숙소 주변은 이미 우리가 사는 얼바인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얼바인 인근은 건조한 스텝지대여서 울창한 수목의 산과 들은 기대할 수 없었는데, 요세미티는 어린 시절 <딱따구리>에서 보았던 국립공원의 모습 그대로였다. 산은 산대로 들은 들대로 연두와 초록을 내뿜고 있었고, 이름 모를 나무들은 제몫의 크기로 올곧게 서 있었다. 정주하여 땅에 뿌리내린 것들만이 가질 수 있는 생명의 기운은 유장하고 아득했다.

미국도 우리처럼 유명 관광지일수록 숙소 가격은 물론 예약조차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요세미티도 예외가 아니어서 숙소 가격도 비쌌고 예약 자체가 어려웠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요세미티 국립공원 인근의 오크허스트에 숙소를 잡았다. 밤에 도착해서 잠만 자고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가로질러 샌프란시스코로 넘어갈 것이므로 40여분의 이동 거리는 큰 부담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행을 하면서 무엇보다 신선했던 것은 그들의 여행 문화였다. 여행지 곳곳에서 만난 그들의 여행 문화는 미리미리 준비하여 가장 경제적인 방법을 찾고, 자연 속에서 휴식 중심의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그들의 모습은 무척 인상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급하게 일정을 잡고, 최소한의 계획을 가지고 무리하게 떠나던 나의 여름휴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캠핑카 뒤에 자동차나 보트를 달고 다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소형 트레일러를 하나 더 달고 다니는 그들의 모습은 여행지에서 그리 낯선 것이 아니었다. 자동차를 뒤에 달고 가는 이유는 여행지에서 돌아다니기는 덩치 큰 캠핑카보다는 자동차가 더 용이하고 경제적이기 때문이며, 뒤에 소형트레일러를 달고 가는 것은 아주 소소한 것들까지 모두 싸가지고 다니는 그들의 여행 습관이었다. 미국의 관광지에는 우리나라에서처럼 식당이 많지 않기 때문에 아이스박스나 지퍼백에 음식을 가득 싣고 다니는 것이 일상적인 그들의 모습이었다.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미국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이와 같은 여행의 풍경은 그들이 우리보다 여행을 자주 즐기기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였다. 주말에 여행을 떠나지 못하면 자기 집 앞마당에 텐트를 치고 캠핑 분위기를 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생각하는 여행과 휴식이 우리와 참 많이 다르다는 것을 자주 느낄 수 있었다.

오크허스트 숙소에 도착하고 저녁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왔지만 아주 작은 마을이어서 그런지 마땅한 식당을 찾지 못했다. 인터넷 검색 중에 발견한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있다고 해서 찾아간 식당의 간판이 재미있었다. ‘Kyoto Kafe, Japanese restaurant’이라고 영문으로 적혀있고 그 아래로 우동 京都 SUSHI BBQ’라고 적혀 있었다. 간판만 봐서는 식당의 정체를 알기 어렵고 맛은 크게 기대 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낯선 곳에서 국물음식이 해줄 수 있는 위로까지 저버린 것은 아니었다. 실내는 아주 소박했고 멕시칸으로 보이는 손님들 몇몇이 창가에 앉아 있었다. 우동, 짬뽕, 치킨 데리야키 등을 시켰는데 아내와 내가 기대했던 맛은 아니었지만 전생에 늑대였음이 분명한 첫째는 치킨 데리야키를 맛있게 먹었다. 걸어서 숙소로 돌아오면서 작은 마을 묘지며 교회를 볼 수 있었다. 숙박업소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은 전체적으로 낮고 조용했다. 관광지임에도 소박하고 순한 마을이었다. 오크허스트의 밤이 데려온 어둠은 이미 더할 수 없이 짙고 무거운 포즈로 내려와 있었다.

다음날 일찍 거대한 자이언트 세콰이어 숲으로 이루어진 마리포사 글로브(Mariposa Grove)를 보기 위해 서둘러 달렸다. 마리포사 글로브 주차장이 작아서 사람들이 몰리면 주차할 곳이 없어서 고생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른 시간 탓인지 다행히 마리포사 글로브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지난겨울 내려서 녹지 않는 눈만 켜켜이 쌓여 있었다. 수령이 2000년 이상 된다는 세콰이어는 직경 3m 이상 되는 것들도 많을 정도로 컸고, 세콰이어 숲의 규모는 압도적이었다. 그 자리에 서서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의 시간을 건너왔을 세콰이어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높이까지 올곧게 뻗어 올랐고, 뻗어 오른 만큼 든든한 밑동으로 땅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미 2000년을 건너온 세콰이어를 우리가 보러 온 것인지, 세콰이어가 우리를 보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우리보다 더 오랜 시간을 살아왔고 도 그 이상 살아갈 세콰이어를 우리가 보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가소로운 일일지도 모른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에게 살아 있는 시간의 길이는 모든 것에 선행할 만큼 위력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마리포사 글로브를 나와서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본격적으로 둘러보았다. 마침 국립공원 이용객들에게 감사한다는 의미로 무료입장하는 기간이라서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기쁜 마음으로 들어선 요세미티 국립공원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는 습했고 살아있는 날것의 냄새가 났다. 비가 내리는 요세미티에서는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이 일시에 제 빛깔을 뿜어내는 민감한 합창이 열리고 있었다. 제가 지닌 것들을 소리 내고, 흘려보내고, 풀어내놓는 모든 것들로 인하여 차고 넘치는 생명의 향연은 비가 내릴수록 더욱 포근하고 아늑했다. 비가 내리고 그 사이사이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 안개 사이로 요세미티를 만나는 사람들의 속도도 느리고 여유로웠다. 그들은 더 보기보다는 충분히 체험하는 여유를 택하고 있었다. 트레킹하는 사람들은 비가 내려서 더 재미있다는 듯 유쾌하고 소란스럽게 걷고 있었다. 그 모습에 끌려 샌프란시스코로 가야 하는 일정을 미루고서라도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을 따라 가고 걷고 싶었다.

미국 국립공원들을 즐기는 방법은 각자의 취향만큼이나 다양하다. 요세미티 국립공원도 트레킹을 하거나 자동차로 돌거나 자전거로 자유롭게 돌거나 각자 자신이 즐기고 싶은 대로 즐기면 된다. 어떤 방식으로 즐기든 간에 입구에서 나눠주는 안내 지도는 매우 유용한 것이어서,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봐야할 것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안내판과 뷰포인트 설정이 잘 되어 있었고, 뷰포인트에는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어서 차로도 불편 없이 즐길 수 있었다. 이곳은 어떻게 즐겨라가 아니라 주어진 시간, 형편, 목적에 따라서 각자 알아서 즐기라는 의미였다. 요세미티 국립공원 곳곳에서 캠핑중인 사람들이나 캠핑카를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잠시 보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 안에서 그것과 동화되어 여유를 즐기는 모습은 부럽지 않을 수 없었다. 국립공원의 아름다운 풍경에 압도되어 보는 것만 아니라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쉬고 지내다 오는 것도 그들이 그곳을 찾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은 충청북도 크기라고 하는데, 샌프란시스코로 출발해야하는 우리가 그것을 다 볼 수는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른 일정 모두 접고 요세미티 국립공원 곳곳에서 캠핑을 하면서 천천히 돌아보고 싶었다. 미국인들의 경우 이곳을 한 번에 다 돌아보지 않고 아주 천천히 조금씩 즐기면서 몇 년에 걸쳐 돌아본다고 한다. 결국 우리가 돈 것은 요세미티 국립공원 전체가 아니라 요세미티 벨리지역이었다. 요세미티 벨리지역만이라도 제대로 즐기려면 며칠은 족히 걸릴 규모였다. 모두들 아쉬웠는지 기회가 된다면 가을에 꼭 다시 오자고 약속을 했다.

요세미티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길은 미국에서 만나본 여러 아름다운 길 중에서도 최고였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위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소와 말의 모습에서부터 아무리 달려도 끝나지 않는 오렌지 농장과 아몬드 농장에 이르기까지 보이는 것들은 모두 크고 넉넉했다. 그렇게 마음을 뺏기고 달리는데 오렌지 농장 부근 길가에서 오렌지를 팔고 있었다. 지방 국도 변에서 그 지역 특산품들을 파는 한국의 풍경과 비슷해서였을까, 차는 자연스럽게 그곳에서 멈췄다. 두 자루를 6달러에 판다는 표지를 붙여놓고 있었지만 양이 너무 많았다. 한 자루에 20개 이상은 족히 들어보였으니 한 자루만으로도 여행 내내 먹고도 남을 양이었다. 첫째를 앞세워 3달러에 한 자루만 구입을 했다. 차 안에서 바로 까먹어 보았는데, 오렌지는 기대했던 것보다 더 달고 시원했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넘어오는 길에 만난 수많은 풍력발전기의 모습.

캘리포니아의 대부분 농장들이 그렇지만 이곳의 농장 규모도 어마어마했다. 그러다보니 기계의 힘을 빌리거나 싼 임금의 멕시코 노동자들의 손을 빌리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물론 농장 초기에는 이민자들이나 1930년대 미국 대공황과 황진(黃塵) 피해를 견디지 못하고 서부로 이주해야만 했던 농민들의 희생이 있었다. 혹자는 당시 그나마 이곳의 일자리가 그들을 살렸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정당한 거래였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달리는 동안 차 안에서 아이들에게 존 스타인벡(John Ernst Steinbeck)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 1939)와 지독한 풍요를 유지시키는 보이지 않는 희생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희생의 대상들만 달라졌을 뿐 희생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분명한 사실도 함께 들려주었다.

샌프란시스코는 관광지답게 비용대비 숙박시설은 엉망이었고, 바가지 상혼이 곳곳에서 보였다. 도착하자마자 저녁을 먹으로 찾아간 피셔맨스 워프(Fisherman's Wharf)에서 들뜬 기분에 호객꾼에게 이끌려 이탈리안이 운영하는 랍스타 식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제시한 가격 정도면 이번 여행에서 한 번쯤 호사를 부려도 좋겠다는 생각에 주문해서 먹고 보니 계산이 잘못되었다. 그래서 다시 주인을 불러서 금액을 정정하고 나왔다는데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계좌에 청구된 금액을 보니 잘못된 금액 그대로 나온 것이다. 차이나타운에서도 거리에서 할인 쿠폰을 나눠줘서 그곳으로 갔었는데, 나중에 계산할 때보니 쿠폰을 적용하지 않은 금액으로 청구서가 나왔다. 그래서 다시 주인을 불러서 금액을 정정하고 계산을 하고 나오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가 관광지여서 그런 것인지 랍스타 식당을 운영하는 이탈리아계나 중국음식점을 운영하는 중국계 사람들의 성향이 그런 것인지는 알 수는 없으나, 그것이 유쾌하지 않은 일인 것만은 분명했다.

피어39에서 만난 바다사자들, 샌프란시스코의 명물이라는 보댕의 크램차우더와 샌드위치, 케이블카와 버스를 자유롭게 탈 수 있는 1일권 패스,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발견한 멋진 책장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이블카, 피셔맨스 워프, 피어39, 베이 크루즈, 금문교, 노브힐, 러시안 힐, 롬바드르 스트리트의 풍경과 보댕(Boudin)의 사워 도우(Sourdough)나 클램 차우더(clam chowder) 등은 그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기라델리 스퀘어에서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한 시간 이상을 기다리며 거리 악사의 연주나 그들의 퍼포먼스에 박수를 보내던 사람들의 여유와 결코 편리하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케이블카를 위해서 고갯길에서 한참을 멈추어 기다리는 차들도 오래 기억될 것이다. 고풍스러운 건물 위로 붉게 타오르던 노을과 노을을 되비추어주던 샌프란시스코의 바다는 현실이 아니라 차라리 몽환이었다.

피어39에서 크루즈를 타고 알카트라즈섬과 금문교를 다녀왔다. 악명 높았던 감옥을 관광지로 활용하고 있는 알카트라즈는 잔혹했던 과거의 흔적과 안락한 현재의 평온이 묘하게 교차함으로써 매혹적인 공간이 되었다. 이러한 매혹은 <더 록>(The Rock, 1996)을 통해 한 번 더 확대 재생산됨으로써 팬시의 공간이 될 수 있었다. 과거의 알카트라즈가 아니라 현재적 유용으로 브랜드화된 섬은 그렇게 금문교 앞에 떠 있었다. 크루즈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간 보댕은 유명한 만큼이나 혼잡스러웠지만 샤워 도우의 맛만은 기대를 넘어서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다소 위험해 보이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는 위험한 것이 분명한 케이블카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돌아다녀야 할 곳은 누구나 보는 곳이 아니라 그런 누구나가 살고 있는 곳이라 믿으며 다니다보니 차이나타운이었다.

금문교와 함께 형성되었다는 차이나타운, 중국인들을 괴롭히던 갱스터를 죽이고 그 목을 입구에 걸어둔 이후, 중국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차이나타운은 샌프란시스코답게 낡고 지저분했지만 그 활기만은 대단했다.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 감독의 <차이나타운>(Chinatown, 1974)은 샌프란시스코가 아니라 LA를 배경으로 한 것이지만, 끝내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은폐된 현실의 메타포로서의 차이나타운은 바로 샌프란시스코의 몫이며 현재 중국의 얼굴이 아닐까?.

샌프란시스코를 떠나면서 인근의 UC버클리(UC Berkely)에 들려서 그들의 상징이라는 황금곰(Golden Bear)을 보았다. 미국 내에서 가장 진보적인 대학 중의 하나로 꼽히는 UC 버클리에 들른 것은 아이들에게 세계적인 대학을 보여주겠다는 지극히 소박한 마음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아이들이 UC버클리의 무엇을 볼 수 있을까마는 그저 분위기만이라도 느껴보라고 데려간 것이다. 기대와는 달리 아이들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고, 아내와 나만 아쉬울 뿐이었다. 학교 앞에 한글로 떡볶이라는 단어가 보여서 반가운 마음에 들어가 보니 한국인이 운영하는 작은 음식점이었다. 한국 학생들이 많아서 떡볶이 메뉴를 내놓았다는 주인아주머니는 친절했고, 떡볶이의 맛은 감동적이었다.

떡볶이의 맛에 한껏 들떠서 버클리를 출발하려는데 뒤차의 흑인들이 창밖으로 손짓을 했다. 무슨 일인가하고 창을 열었더니 타이어가 펑크 났다고 알려주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막 고속도로에 올라서려는 순간이었으니 그것도 모르고 달렸다가 큰 사고가 날 뻔 했다. 마침 카센터 앞이어서 그곳에 차를 대고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자기네는 타이어를 취급하지 않으니 타이어 전문점으로 가라고 했다. 그때까지 나는 미국에서도 한국처럼 카센터에서 타이어 교체를 해주는 줄 알고 있었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여행객이고 타이어가 완전히 주저앉은 것을 본 주인은 안타까웠는지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나섰는데, 휠 너트 렌치가 헛돌았다. 휠 너트 렌치 앞에 우리 차전용으로 끼우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데, 한국에서 몇 번 타이어를 교체해본 나로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한참을 찾다가 차를 인수하면서 무심결에 받아 넣어둔 것이 생각나서 꺼내어 보니 딱 맞았다. 아마 바퀴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전용 끼우개를 만든 모양이었다. 그렇게 스페어타이어로 교체하고 근처의 타이어 전문점에서 타이어를 교체했다. 타이어 교체를 위해서 트렁크의 짐을 모두 꺼내놓고 나니 문득 가족들에게 미안했다. 며칠 간 자동차 여행을 떠나면서 타이어 점검도 하지 않았고, 타이어 교체에 필요한 도구조차 점검하지 않은 나의 안일함이 몹시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기 일도 아닌데 굳이 창을 내려서 큰소리로 알려준 흑인들을 보면서 처음에는 온갖 나쁜 상상을 했었던 것도 몹시 부끄러웠다. 낯선 세계에 대한 안일한 접근과 편협한 선입견에 사로 잡혀있던 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덕분에 버클리에서 갈아 끼운 것은 타이어만은 아니었다.

버클리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구글이 있었다. 그래서 말로만 듣던 구글을 견학하기 위해 그곳을 찾아갔지만, 아는 구글 직원이 있어야 견학이 허락된다고 했다. 산호세에 있는 몇몇 아는 분들의 도움을 받을까 하다가 그러기에는 일이 너무 번거로워질 것 같아서 구글 견학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안을 제대로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구글의 분위기는 정원과 거침없이 오고가는 자전거 그리고 세그웨이(Segway)를 탄 직원들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느껴질 만한 것이었다.

몇 해 전에 그곳에서 연구년을 보내고 돌아오신 선배 교수님과 미국에 와서 만난 많은 분들의 강력한 추천만으로도 몬트레이는 우리의 기대를 더할 수 없이 키워놓았다. 그래서인지 몬트레이까지 가는 길이 아름다웠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평범해보였다. 이야기는 기대를 만들고 기대는 늘 현실을 넘어서나 보다.

여유 있는 은퇴자들의 천국답게 올드 피셔맨스 워프 한 쪽에 정박되어 있는 요트들, 치열한 생활의 공간인 다른 한 쪽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는 바다사자, 이제는 쇼핑센터로 변한 엣날 통조림 공장, 엔터테인먼트가 가미된 식당 부바 검프의 재미난 주문판.

미국인들이 은퇴하고 가장 살고 싶어 한다는 몬트레이에 도착했다. 압도적인 볼거리보다는 여유로운 휴양 그 자체가 콘셉트인 도시였다. 존 스타인벡의 소설 통조림 공장 골목(Cannery Row, 1945)의 배경이 된 캐너리 로우의 통조림 공장은 쇼핑센터로 바뀌어 있었고, 존 스타인벡은 왁스 뮤지엄 간판 앞에서 조악한 초상으로 서 있었다. 그는 올드 피셔맨스 워프 한 쪽에서도 청동 위로 세월을 흘리며 작품도 모르고 그가 누군지도 모르는 관광객들의 의미 없는 포토 스팟(Photo Spot) 동상으로 쓸쓸하게 서 있기도 했다.

올드 피셔맨스 워프는 ‘The Fish Hopper’의 새우 칵테일과 클램 차우더의 맛이나 부바 검프에서 먹은 해물과 로컬 맥주의 맛이 선명했다. 부두 곳곳에 나와 앉아 있던 바다사자들의 일광욕은 한가로운 여유였다. 그것에 비하면 항구에 가득했던 화려한 요트들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풍경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여느 관광지나 마찬가지로 숙소는 가격보다 아래에 있었고, 설상가상 인도인 주인은 지독하게 불친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번다한 것들이 몬트레이 바다의 풍경과 여유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몬트레이에서 돌아오는 날, 몬트레이에 가면 꼭 들러야 한다는 17마일 드라이브 길을 달렸다. 아름다운 것은 분명했지만 10달러의 입장료를 내고 달릴만한 길은 아니라고 투덜댔지만, 해변에서 만나는 바닷새의 자유와 바다사자의 여유는 돈을 주고서라도 꼭 사오고 싶은 것들이었다. 17마일 드라이브의 곳곳을 보면서 우리 동해안의 절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이곳에는 그 풍경과 어우러진 생물들이 그곳에서 생활을 함으로써 더욱 빛나고 있었다. 생물들은 숨고 풍경만 살아 있는 공간이 아니라 생물들의 생활로서 완성되는 풍경은 가슴 먹먹한 감동이었다.

17마일 드라이브에서 만난 버드록(bird rock) 위의 바다 사자들

17마일 드라이브를 돌아보고 캐멀로 가는 길에 캐멀 미션 바실리카 성당(Carmel Mission Basilica)을 만났다. 1771년에 세워졌다는 캐멀 미션 바실리카 성당은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더욱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성당이 인간을 압도할만한 규모나 장식으로 화려한 곳이 아니라 소박하고 따듯한 안식의 공간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지만 성당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의 흔적과 그것이 빚어내는 소박하지만 따듯한 안식과 평화에 어느새 젖어들고 있었다.

캐멀은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작은 마을 같았다. 여행 정보에는 크린트 이스트우드 (Clint Eastwood)가 시장을 했던 곳이라고 소개되어 있었지만, 정작 캐멀에서 걷다보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이후 예술가들이 정착하면서 조성된 도시라는데 그래서 그런지 아주 천천히 걸으며 돌아보기 좋았다. 아담하고 소박하지만 각각의 멋이 어우러진 작은 상점들, 그 사이를 아주 천천히 소요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작은 소음들마저도 캐멀에서는 평화로웠다. 점심을 먹기 위해서 들어간 곳은 식당과 바를 겸하는 곳이었는데 음식의 맛과 분위기가 아주 좋았고 가격마저 착했다.

캐멀의 분위기에 취해서 예정보다 출발이 조금 늦어졌다. 늦은 출발이었지만 매력적인 와이너리(winery)들의 등장에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도 와이너리에 가보고싶다고 해서 충동적으로 그곳으로 들어갔다. 와인을 별로 즐기는 편이 아니지만 와이너리의 이국적인 느낌을 체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와이너리에서는 프린트된 종이를 나누어 주고 그곳에 적힌 와인을 조금씩 따라주면서 맛보게 하고, 마음에 드는 것을 구입하도록 했다. 와인뿐만 아니라 와인관련 상품들이 매장에 가득했다. 운전 때문에 주로 아내가 많이 맛을 보았고 아이들은 옆에서 나누어주는 과자를 먹으면서 즐거워했다. 시간이 늦어서 와인 시음은 곧 끝이 났다. 서부개척시기의 분위기와 멕시코 마을 같은 분위기가 공존하는 와이너리 정원에서 아이들과 사진을 찍으며 즐겁게 놀았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즐거움이었다. 결국 돌아오는 차 안에는 세 병의 와인이 실려 있었지만 소중한 시간이었다. 집을 향해 7시간 넘게 운전하는 동안 가족들의 이야기와 어둠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분주히 내리고 있었다.

 

블로그 이미지

홑섬

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

흐르는 강물처럼, 살아서 강성한 것들

- 라스베이거스솔트레이크시티옐로우스톤코디솔트레이크시티라스베이거스(619~26)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세 번째 여행은 아이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다녀온 옐로우스톤이었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이 무척 인상 깊었고 그만큼 아쉬웠던 가족들은 옐로우스톤을 몹시 기대하고 있었다. 게다가 귀국을 얼마 앞두지 않는 솔이네가 옐로우스톤을 꼭 다녀와야 한다고 잔뜩 부추겼다. 솔이네는 한 달 전에 예약을 해둔 비행기를 타고 솔트레이크시티로 가서 차를 렌트해서 옐로우스톤을 돌아볼 것이라고 했다. 구글 지도로 측정해보니 자동차로 가능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섰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길 위에서 만나는 풍경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라스베이거스솔트레이크시티옐로우스톤코디솔트레이크시티라스베이거스의 78일 간의 일정을 계획했다. 솔트레이크시티까지 하루에 달리지 못할 거리는 아니었으나 운전이 상당히 부담이 되는 거리임에는 분명했고[각주:1]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어서 라스베이거스를 경유하기로 했다.

라스베이거스 가는 프리웨이에서 쉼터()와 황량하기만한 도로(). 한국식 휴게소가 아닌 화장실만 갖추고 있는 미국 프리웨이의 쉼터는 설렁하기 이를 데 없다.

라스베이거스는 첫 여행에서 다녀온 터라 새로울 것도 없었고, 다른 곳으로 가는 길에 하루 묶어가는 곳으로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소란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 묶을 곳으로 라스베이거스를 택한 것은 가격 대비 숙소의 질이 좋았기 때문이다. 잠만 자고 떠날 곳이라는 생각에 저렴한 곳으로 고르고 골라서 엑스칼리버 호텔을 정했는데, 가격이 왜 저렴한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호텔 입구에서 방까지 소란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고, 객실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금연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담배냄새까지 났으니 다른 기대는 갖기 어려운 곳이었다.

구글 지도 위에서 세워둔 계획과는 다르게 라스베이거스에서 솔트레이크시티까지는 7시간 이상이 소요되었다. 그나마 밤 운전을 피하고 싶어서 조금 일찍 출발을 한 덕분에 7시 조금 넘어 솔트레이크시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 해가 남아 있어서 급한 마음에 시내를 먼저 둘러보았다. 마침 모르몬교 사원과 유타(Utah)주 주의사당 주변으로 노을이 타오르고 있었다. 의사당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면서 우리도 노을에 젖었다.

유타주 주의사당 주변 주택들은 차를 세우고 한참을 바라볼 만큼 아름다웠다. 화려하거나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은 은근한 매혹이었다. 솔트레이크시티 서쪽으로 둘러선 오키르 산맥에는 6월 중하순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눈이 남아 있었고, 붉은빛으로 선명하게 타오르는 노을과 어우러져 더욱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동계 올림픽이 열릴만한 곳이었다.

솔트레이크시티 시내와 노을이 내리고 있는 유타주 의사당, 유타주 의사당 앞에 있는 재미있는 표지판과 솔트레이크시티를 감싸고 있는 오키르 산맥. 6월말임에도 눈이 남아 있는 오키르 산맥 위로 아름답게 번져가는 노을.

솔트레이크시티에는 종교적 자유를 찾아서 아이오와 시티로부터 1,350마일(2,160km)을 이동해왔다는 모르몬교[각주:2]의 경건한 의지가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었다. 도시는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깨끗했으며 모르몬교도의 성도(聖都)답게 템플스퀘어(Temple Square)에서 뿜어내는 아우라(Aura)가 낯선 여행자를 압도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특히 숙소였던 햄프턴 인과 크리스털 인[각주:3]은 가격 대비 만족도뿐만 아니라 조용하고 나름의 격조를 느낄 수 있었던 곳이었다. 숙소에서 챙겨주는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우리는 아침 일찍 옐로우스톤으로 떠났다.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은 입구에 있는 숙박업소들의 폭리를 모두 불식시킬 만큼 경이로웠다. 1872년 세계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곳은 수많은 관광객과 활발한 화산활동으로 많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곧 문을 닫고, 자연에 복원의 시간을 준다고 한다. 옐로우스톤과 함께 미국의 3대 국립공원이라는 요세미티국립공원이나 그랜드캐니언의 경우에는 이곳처럼 화산활동이 활발하지 않아서 그나마 훼손 정도가 심하지 않다고 했다.

길을 가로 막고 걸어가는 바이슨을 뒤따르는 자동차들과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의 전경올드 페이스풀의 용출 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간헐천(geyser)이 곳곳에서 각기 다른 크기와 높이에서 서로 다른 정도로 용출되고 있었다. 대부분의 간헐천이 살아있는 것들이어서 주변 지반이 약할 수 있기 때문에 끝없이 이어지 나무다리를 통해서 접근하고 그 위에서만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간헐천 주변에는 땅에 내려서지 말라는 경고 문구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간헐천이 용출되는 덕분에 주변의 나무들은 모두 고사(枯死)하고, 주변은 온통 잿빛이지만 정작 간헐천은 사파이어 빛으로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그것은 주변의 생명을 거두어 제 빛으로 풀어내는 잔혹한 매혹이었다.

지도를 받기 위해 찾아간 안내센터에서 알려준 것처럼, 우리는 중심부를 8자로 도는 그랜드 루프 로드(Grand Loop Road)를 따라서 이틀 동안 부지런히 돌아보았다. 남한 면적의 1/11정도 크기인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은 자동차로 아무리 빨리 돌아보아도 온전히 이틀은 소요되는 규모였다. 옐로우스톤은 6월에 찾았음에도 고지대에는 눈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 넓이의 압도도 압도였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동시에 보여주는 높이의 경이 역시 대단한 것이었다. 마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보여주려는 듯 넉넉한 넓이와 높이를 지니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들뿐만 아니라 죽어서 삶을 증거 하는 동물들의 시신, 산불로 서서 죽은 나무들, 간헐천의 고사목들까지 죽음은 고스란히 그대로였다.

길이 이끄는 곳은 모두 낯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고, 그것을 가능한 한 그대로 보존하며 즐기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곳곳에서 돋보였다. 주변의 간헐천이 모두 모여드는 옐로우스톤 호수(Yellowstone Lake)의 규모와 빛깔과 바람, 65분마다 규칙적으로 용출하는 올드 패이스플(Old Faithful)에서 용출의 순간을 보기 위해 그 주변에 삥 둘러앉아서 기다리던 300-400명의 사람들,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산불로 인해 불타버린 나무들을 그대로 두고 새로운 생명이 돋아나기를 기다리는 인내 등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옐로우스톤 곳곳을 누비는 바이슨

먹이를 찾아 이동하는 바이슨 때문에 곳곳에서 도로가 막히는 바이슨 트래픽(Bison traffic)이 발생하여도 사람들은 모두 숨죽여 그들이 지날 때까지 기다렸다. 즐기는 사람 위주가 아니라 자연을 중심에 놓고 자연의 일부가 되어서 자연을 즐기려는 그들의 모습은 감동이었다. 1872년 국립공원 지정 당시에 수백만 마리였던 바이슨이 30년도 되지 않아서 스물세 마리로 줄어들었다가 지금은 사천 마리 정도의 개체수를 유지한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늑대와 함께 춤을>(Dances With Wolves, 1990)에서 가죽을 얻기 위해 바이슨을 대량으로 학살한 백인들의 잔혹함에 치를 떠는 인디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30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수백만 마리를 스물세 마리로 줄여놓은 백인들의 탐욕은 경악을 넘어선 죄악이었다.

동물들을 촬영하기 위해 삼각대를 세우고 기다리는 사람들.

옐로우스톤의 이러한 관리와 관람객들의 태도가 늘 긍정적인 결과만 낳은 것은 아니어서, 야생동물에 의한 인명사고가 종종 일어나고는 한다. 우리가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보도를 보니 캠핑하던 부부 중 남편이 곰에게 생명을 빼앗기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곰보다는 바이슨에 의한 사고가 더 빈발한다고 하니 아무래도 야생은 야생인가보다. 그래서 옐로우스톤 레인저들은 초식동물은 25야드(23m), 곰이나 늑대는 100야드(91m) 의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미국 사람들 이런 규칙은 참 잘 지키는데도 불구하고 곰에게 목숨을 잃는 것은 나름 사연이 있다고 한다. 옐로우스톤에서 곰의 개체수가 늘면서 먹이가 부족해진 곰들이 생겼고, 초기에 인위적으로 먹이를 공급하자 곰들은 야생성을 잃어 버렸고, 그 결과 많이 죽어갔단다. 그 이후 옐로우스톤에서는 곰들에게 음식을 주는 행위를 철저하게 금지시키고 있고, 곰이 열 수 없도록 튼튼하게 제작된 쓰레기통을 설치하고, 캠핑하는 사람들의 음식을 보관하게 하는 철제 보관함도 설치해 두는 등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이를 찾아 내려오는 곰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트래킹을 하는 사람들이 곰들과 마주치는 일이 종종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트래킹 참가자들은 대부분 곰 스프레이를 가지고 다닌다. 곰에 희생된 부부의 경우에는 스프레이를 소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옐로우스톤에서 차를 달리다 문득 속도가 줄어드는 곳에는 여지없이 야생동물을 보기 위해 차들이 정차해 있었다. 누구도 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차를 멈추고 내려서 카메라 셔터마저 조심스레 누르는 풍경이 아름다웠다. 대부분 삼각대를 세워두고 몇 시간씩 동물의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인내와 끈기는 사진에 담길 동물만큼이나 신선했다. 바이슨, 여우, , 무스, 엘크까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만나는 동물들은 우리에게 반가운 정차를 요구하곤 했다.

옐로우스톤 호수 전경, 코디로 가는 길에 만난 산불로 타버린 삼림을 그대로 둔 모습

옐로우스톤에서 가장 이색적이었던 것은 물론 표현을 무색하게 하는 압도적인 자연이었지만 슬그머니 눈길을 끄는 것은 캠핑카였다. 서부 쪽 고속도로에 올라서면 다양한 형태와 종류의 캠핑카를 쉽게 만나게 된다. 승용차를 뒤에 매달고 달리는 버스형 캠핑카, 캠핑트레일러를 짐칸에 얹고 달리는 트럭, 뒤에 배를 매달고 달리는 SUV, 두 개의 작은 가트를 달고 달리는 캠핑카 등등 캠핑카의 다양한 모습은 그 자체가 볼거리였다. 미국사람들은 놀고 즐기는데 참 결사적이라고 가족들에게 웃으면서 이야기했지만, 부러운 풍경이었다. 적은 비용을 들이고 자신이 원하는 위치에 최대한 가깝게 가서 자연 속에서 즐기다 오는 일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캠핑을 가기 위해 시간을 내고, 계획을 짜고, 준비를 하는 일도 만만한 일이 아니지만, 캠핑을 가기 위해 단지 짐을 꾸리고, 돌아와 다시 푸는 일만으로도 번거롭기 그지없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부지런히 꾸리고 부지런히 달리고 있은 것이다. 이따금 캠핑카의 내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참 별 것을 다 챙겨서 싣고 다닌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퍼백의 나라답게 음식들을 거의 대부분 싸가지고 다니고, 아이들 베개에 애완동물까지 빠짐없이 데리고 다니는 모습은 경이로워 보일 정도였다. 정말 놀고 즐기는 것에는 더할 수 없이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옐로우 스톤 강에서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 1992)을 연상시키는 송어낚시꾼들을 보았다. “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전한 사랑을 할 수는 있습니다라는 대사가 들려오는 듯, 어두워지는 강 위를 걸으며 낚싯줄을 던지는 그들의 모습이 강한 실루엣으로 남았다. 영화 속 노먼의 내레이션처럼 모든 존재와 자신의 영혼 그리고 기억이 어우러져 강을 이루고 흐르는 듯, 물줄기의 강성함에 비해 그 소리는 거의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도 역광으로 잡힌 그들의 평화로운 실루엣이 너무 강하게 다가와 소리를 들으면서도 듣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옐로우스톤에서는 가는 곳마다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고, 감각을 놓아버려 늘 예상보다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풍경도 풍경이었지만 그것이 자극하는 감각적 체험들도 쉽게 잊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들짐승과 날짐승이 살아서 내는 모든 소리들과 간헐천의 수증기와 함께 다가오는 유황냄새 그리고 곳곳에서 시간의 흔적이 빚어내는 압도적인 이미지들은 좀처럼 우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떠나는 날에도 옐로우스톤 호수의 규모와 에메랄드와 사파이어가 곳곳에 잠겨있는 듯한 물빛에 넋을 놓고 있다가 느지막이 코디(Cody)로 출발했다.

카우보이의 도시로 유명한 코디는 옐로우스톤 동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옐로우스톤 동쪽 입구를 벗어나 코디로 향하는 길은 아주 한적했다. 서부영화에서 많이 보았던 계곡과 강물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풍경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속력을 높일 수 없는 길이었다. 천천히 보면서 달리지 않는다면 아주 오랫동안 후회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코디에서 벌어지는 로데오 경기

이 마을은 와일드 웨스트 쇼’(Wild West Show)로 유명한 버펄로 빌 코디(Buffalo Bill Cody)의 공으로 와이오밍에 댐을 세우고 철도를 놓았다고 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코디라고 명명했단다. 도착해서 안내센터를 찾아가 관련 정보를 받고, 이곳에서 1919년부터 해왔다는 로데오 경기를 보았다. 코디에서는 6월부터는 8월까지 3개월 동안 매일 열리는데 이것을 ‘Cody Nite Rodeo’라고 부른다. 이 외에도 주로 7월에 며칠 간 열리는 ‘Cody Stampede Rodeo’가 있으며, 미국전역에서 엄청난 인파가 몰린다고 한다.

코디를 기억하게 해주는 스테이크

로데오 관람 문의를 하자 숙소에서는 자신들에게서 입장권을 구입할 수 있다고 적극적으로 알려주었지만, 의심 많은 여행자는 결국 안내센터에서 입장권을 구입했다. 로데오를 보러가기 전에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스테이크와 바이슨 햄버거를 시켰는데 둘 다 감동적이었다. 저렴한 가격에 넉넉한 스테이크의 맛은 내가 먹어본 것 중에서 최고였다. 온 가족이 그 맛에 이끌려 하나를 더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은 저렴했고, 텍스는 캘리포니아의 1/3정도 수준이서 더욱 좋았다. 옐로우스톤에서 보았던 바이슨을 패티로 쓴 바이슨 햄버거도 무척 담백했지만, 최고는 스테이크였다.

TV에서 몇 번 보면서 남성적이고 낭만적인 요소가 있는 것처럼 보였던 로데오 경기는 지독한 현실이었다. 로데오 경기장에 도착해보니 화면으로는 절대 맡을 수 없었던 소똥과 말똥 냄새가 진동했다. 낮에는 자신의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만 경기에 참가하는 카우보이들은 물론 중고생쯤으로 보이는 소녀들이 입장권과 식음료를 팔고, 어린 소년들은 팸플릿을 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카우보이의 어린 아이들은 로데오 중간 쇼에 관객인 야 등장하거나 어린이 로데오에 참여하였다.

어린이 로데오 경기는 보면서 위험하지 않을까 했는데, 결국 어린이 카우보이는 경기 중에 떨어져 울었다. 그 옆에서 별 것 아니라는 듯 아이를 일으켜 세우는 어른들의 모습이 단호했다. 그게 현실이었다. 그저 시간이 남아서 하는 공연이 아니라 현실적인 생활을 이어가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로데오였다. 그러니 어른이나 청소년들은 물론 어린 아이들까지 온 가족이 참여하여 로데오를 일구어내는 것이다. 그 아이가 청소년이 되고, 그 청소년이 어른이 되어 앞으로 로데오 경기를 끌어가야하니 경기 중에 떨어졌다하여 보듬어줄 수가 없는 것이다. 떨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우고 다시 태우는 모습이 단호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단호함이 아이가 어른이 되어 홀로 밥을 마련해야할 때, 사라지지 않을 밥이 될 것이라는 예견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로데오 경기는 밧줄로 송아지를 잡아서 묶기(Tie Down Roping), 달리는 송아지 넘어트리기(Steer Wrestling), 거친 말 위에서 오래 버티기(Saddle bronc), 말안장 없이 오래 버티기 (Bareback), 세 개의 원통을 빠르게 도는 배럴 경주(Barrel Racing), 황소 위에서 오래 버티기(Bull Riding)등이 있는데, 이것이 차례로 진행된다. 카우보이들은 목이 부러지지 않도록 목보호대를 하고, 황소의 급소를 줄로 단단히 동여맴으로써 황소를 난폭하게 만든다. 소와 말을 이용한 로데오 경기는 아주 역동적이었다.

로데오 경기는 카우보이의 신화를 강화하는데 일조했다고 한다. 역사가 일천한 미국에서 영웅을 만들어낸 것이 서부 개척기의 카우보이였다.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 인니언의 공격을 막아내고 남성다움을 성취하는 소몰이꾼, 악당들로부터 가족과 이웃을 지켜주는 정의의 사도라는 영웅상이 수렵된 것이 카우보이였다. 이러한 신화화는 서부를 동경하는 동부에서 확대재생산 되고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향수됨으로써 더욱 견고해진다. 하지만 현실의 그들은 텍사스에서 철도 운송이 가능한 미주리 주의 세딜리아, 와이오밍 주의 샤이안, 캔자스 주의 닷지시티와 아빌레네까지 소떼를 몰아다주는 고단한 임금 노동자들일뿐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일거리도 1890년대 북부초원에서도 황소가 사육이 가능하다는 것이 알려지고, 소들을 가둘 수 있는 철조망이 도입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로데오 경기는 카우보이의 여기에서 출발해서 그들의 신화를 강화하는 기제로 활용되고, 이제는 상실된 남성성, 서부개척시대의 향수 등으로 즐기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로데오 경기 중간에 카우보이의 아이들을 관객인양 꾸며서 진행하는 퍼포먼스와 경기 후에 간객에게 팬서비스 차원에서 사인과 사진 촬영을 제공한다.

로데오 경기가 끝나고 나오는데 카우보이 광대와 잘생긴 카우보이 청년 둘이 경기장 밖에서 사인해주고, 사진을 찍자고 하면 아주 예의 바르게 일어나 포즈를 취해주는 모습이 코디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했다. 아직 서부 개척기의 전통과 분위기가 많이 남아 있다는 이 도시는 하나같이 입고 있는 풀 먹인 셔츠처럼 단아해보였다.

이날 로데오 경기장에서 우연히 우리 앞자리에 있던 아미시(Amish) 공동체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해리슨 포드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위트니스>(Witness, 1985)에서 처음 보았던 아미시 공동체 사람들을 바로 앞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보수적인 프로테스탄트 교파의 일종이라는 아미시는 새로운 문명을 거부하고 19세기 유럽 농촌의 생활을 준거로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위트니스>는 탐욕과 폭력으로 무질서한 도시의 삶을 대표하는 존 부크 형사와 관용과 절제 그리고 비폭력을 상징하는 아미시 공동체의 질서를 대비하고,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아미시의 미망인 레이첼을 통하여 지금 이곳의 문제에 대안을 모색했던 스릴러였다. 더구나 이 작품은 시나리오를 강의할 때 플롯과 캐릭터 구조화의 예로 자주 드는 작품이기도 했다.

모두 세 쌍의 젊은 부부였는데, 두 부부는 어린 아이들을 안고 있었다. 공동체에서 자체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옷의 디자인은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옷 색깔은 화사했지만 천은 거칠어 보였고, 연결부위 여기저기에 옷핀을 꽂고 있는 것이 특이했다. 안고 있는 아이가 울 때면 조용히 엄마가 안고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는데, 그것을 지켜보는 아빠는 그의 수북한 턱수염만큼이나 완고해보였다. 그들은 로데오 경기를 보는 내내 그 흔한 탄성 한 번 지르지 않고 아주 조용히 관람만 할뿐이었다.

버펄로 빌 역사박물관 내에 전시된 총잡이들과 버펄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 포스터 그리고 총기들

이튿날 찾아간 버펄로 빌 역사박물관(Buffalo Bill Historical Center)에는 서부의 옛 모습, 버펄로 빌에 대한 기록과 와일드 웨스트 쇼관련 유물, 인디언들의 생활상과 서부 개척기에 인디언들에게 저지른 만행, 전설적인 총잡이들의 기록 등이 사실적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일상과 분리된 박물관이 아니라 마을의 정체성을 부여하고 유지시켜줌으로써 양자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한 박물관의 사례로서 주목할 만 곳이었다. 특히 인디언들에 대한 만행을 아주 상세하게 문제의식을 가지고 구성해 놓은 부분이 돋보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옆에서는 그들을 침략하고 박해하는 과정에서 활용되었음직한 총 전시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이 두 모순된 구성이 인디언에 대한 오늘 미국의 인식이 아닐까? 과거 인디언들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에서 자유롭기 위해 대통령이 사과까지 했지만 그들에게 총을 앞세운 서부의 시대는 건강하고 남성적인 쟁취의 시대로 기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돌아오는 길에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유명한 빙험 캐니언 구리광산(Bingham Canyon Cooper Mine)을 어렵게 찾아갔다. 광산 인근에서 사만다가 길을 잃었기 때문에 근처에서 물어물어 찾아간 것이다. 그곳은 제임슨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Avatar, 2009)에 나오는 판도라 행성의 광산 기지의 모습과 매우 유사했다. 1회에 320톤을 실을 수 있다는 초대형 트럭과 포토 스팟에 제공된 그 바퀴를 보면서 <아바타>가 떠오른 것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광산은 1863년부터 채굴이 시작되어 아직도 진행 중인 세계 최대의 노천 구리광산이라고 한다. 인간이 만든 건축물 중에 만리장성과 함께 인공위성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이 광산이라고 하는데,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이 광산이 지름 4,000m, 깊이 1,200m라고 하니 수긍하지 못할 주장도 아니다. 미국에 와서 느끼는 규모의 압도는 여기서도 여지없었다. 홍보영상을 상영하며 간단한 전시물을 갖추고 있는 홍보관과 소박하게 꾸려진 기념품점 그리고 그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구리 광산이 전부였다. 미국의 자부심과 맹목에 가까운 애국심에 대한 강요 등이 홍보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빙험 캐니언 구리 광산의 모습320톤을 싣는다는 초대형 트럭. 1863년부터 채굴이 시작된 이 광산은 광석을 파내기 위해 계단식으로 길을 내놓은 모습이 그 규모만큼이나 이채롭다.

주어진 시간 안에 많이 보아야 한다는 욕심이 과했는지 중간에 다시 먹통이 된 사만다 탓인지, 돌아오는 길은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늦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햇반과 맥도날드 햄버거 등으로 식사를 해결해온 터라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돌아오는 길에 라스베이거스 최고급 호텔인 윈(Wynn) 호텔에서 뷔페를 사주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문제는 출발이 늦어지면서 뷔페 마감 시간을 맞추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뷔페시간에 맞추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자 차는 슬슬 과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차는 75마일(120km)이 제한 속도인 I-1590마일(144km) 이상으로 달리고 있었다.

사만다가 보여주는 도착시간이 점점 단축되는 것을 즐기면서 한참을 달리고 있는데, 고속도로 순찰차가 경광등을 울리면서 뒤에 붙었다. 우리는 아니겠지 하고 속도를 줄여서 계속 달리고 있는데, 순찰차가 계속 따라와서 길가에 차를 붙였다. 과속에 정지 명령까지 어겼단다. 관광객이라고 우기고 국제운전면허증을 보여주면 훈방이 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고, 교통 범칙금 금액의 살인적인 액수를 모르는 바가 아니어서 사정을 설명하리라고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일은 다른 방향으로 급하게 결론이 났다. 이곳에 온지 얼마나 되었느냐는 경관의 말에 조수석에 타고 있던 첫째가 6개월쯤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바람에 임시 운전면허증을 내주어야만 했다. 과속도 과속이지만 정지 명령을 어겼다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였다. 첫째가 사정을 설명했더니 교통경찰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는 자신의 동료가 우리처럼 정지 명령에도 서지 않는 차에서 쏜 총탄에 일주일 전에 이곳에서 총상을 입었다며 우리가 만약 더 달렸다면 자신이 발포했을 거라고 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이었다.

교통경찰은 우리가 미국에 익숙하지 않은 것을 참작해 준 것인지, 아니면 예쁜 첫째의 상냥함에 반한 것인지 몰라도 벌금을 깎아주겠다며, 가장 싼 270달러짜리 스티커를 끊어주었다. 모처럼 아이들에게 맛있는 것을 먹이겠다는 생각으로 과속한 덕분에 여행 내내 아끼며 지내왔던 것들이 일시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조심조심 달려서 간신히 뷔페 시간에 맞추어 식사를 했으나, 이미 맛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지경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맛있게 먹었다. 그나마 교통경관이 훈남에다 친절하기까지 했으니 그것만도 다행이고, 빨리 잊고 맛있게 먹자고 모두 의견을 모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쓰린 속은 어쩔 수 없었다.

저녁을 먹고 우리가 머물게 된 뉴욕뉴욕 호텔로 돌아왔다. 솔트레이크시티부터 옐로우스톤과 코디에 이르기까지 가는 곳마다 시간이 아쉬웠다. 가슴 뛰지 않는 곳이 없었지만 특히 옐로우스톤에서 느꼈던 살아있는 것들의 그 강성함은 감동 그 이상의 것이었다. 삶과 죽음이 시간과 함께 끊임없이 순환하고, 동식물은 물론 간헐천의 역동적인 용출까지 서로 맞물려 현재를 살아내는 치열한 삶의 순간순간들. 변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생명을 놓은 것들뿐, 모든 것이 꿈틀대며 변화해가는 그곳의 기운이 온몸에 가득 차올라왔다. 귀국 전에 그럴 기회는 없겠지만, 겨울에 꼭 다시 찾아가고 싶어지는 것도 그 지독한 계절을 건너는 살아있는 것들의 호흡을 느끼고 싶어서이다. 집으로 돌아오며 다시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몇 안 되는 여행이었다.

 

  1. 얼바인에서 솔트레이크시티까지는 구글 지도와는 다르게 달려보니 절대로 하루에 달릴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본문으로]
  2. 모르몬교는 말일성도예수그리스도교라고도 하는데 1823년 조지프 스미스가 뉴욕에서 창설했다. 교세를 확장하면서 스미스는 1834년 일부다처제를 주장했고 이에 분개한 사람들의 박해가 이어졌다. 1844년 폭도들에 의해 스미스가 살해당하자 브리검 영(Brigham young)의 영도 아래 종교적 자유를 찾아서 그레이트 솔트레이크유역으로 이동해온다. 모르몬교도들의 이러한 이동으로 개척된 통로는 이후 서부로 통하는 주요 통로로 활용되었고, 모르몬교도들은 황금을 찾아서 캘리포니아로 향하던 사람들로부터 상당한 수익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 [본문으로]
  3. 갈 때는 햄프턴 인에 머물렀고 올 때는 크리스털 인에 숙박을 했다. [본문으로]
블로그 이미지

홑섬

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

먼 길을 떠나려는 사람의 준비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23일부터 시작했던 미국에서의 여행이 78일까지 늘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한국에서도 여행은 늘 내 일 때문에 34일이면 족했고, 그나마도 가족들은 집을 떠나면 아프거나 화장실 등의 문제로 곤란을 겪곤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툰 미국이 아니던가? 78일 여행을 마치고 가족들은 모두 제 각기 제법 자신감이 생긴 모양이었다.

사실 미국 횡단 여행은 내가 한국에서부터 생각해온 것이었다. 평소에 중앙아시아 횡단을 늘 입버릇처럼 말해왔지만 항상 시간과 자금 그리고 가족의 동의가 문제였다. 중앙아시아 횡단을 이야기하면 아내는 늘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었고, 그나마 타협한 것이 가려면 혼자가라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미국횡단이란 말을 꺼내기조차 어려워 기회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차 안에서 슬쩍 가족들에게 방학 중에 미국 횡단을 하면 어떨까라고 운을 떼었더니, 아내의 저항이 예상보다 적었다. 아이들은 좋다고 했으니 됐고, 아내만 설득하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캐멀에서 얼바인으로 돌아오며 7-8시간 정도의 운전은 견딜만하다고 이야기하며 다시 횡단 여행의 군불을 지폈다. 아내도 낯선 곳에서 몇 번의 여행으로 그것이 걱정하는 만큼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계획을 좀 더 구체화시킨 것은 옐로우스톤 여행 계획을 짜던 6월초였다. 얼바인에서 옐로우스톤으로 가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솔트레이크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서 거기서 렌터카로 도는데, 예약은 이미 늦어서 항공료가 지나치게 비싸고, 솔트레이크까지의 자동차로 달리면서 만날 수 있는 것들을 놓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여행 기간을 2-3일 정도 더 잡고 자동차로 떠날 것을 계획하고, 이번 여행을 하면서 과연 횡단여행이 가능할 것인지 가늠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정작 횡단여행이 결정된 것은 옐로우스톤 여행을 다녀와서가 아니라 떠나기 전이었다. 아이들 방학 중 스케줄을 점검하고는 떠날 날과 돌아올 날을 가늠해보고, 가야할 곳을 지도에 표시하며 소요 시간 등을 구글로 확인하고, 예산을 짜다보니, 어느새 횡단여행 계획이 되었고, 떠나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횡단여행 진행도

횡단여행 계획을 짜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횡단 루트를 정하는 일이었다. Route66을 따라서 얼바인세도나앨버커키산타페오클라호마시티세인트루이스시카고까지 간 후에 시카고에서 클리블랜드나이아가라보스턴뉴욕필라델피아워싱턴까지 가기로 횡단 루트를 결정했다. Route66은 철저히 나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고, 동부 쪽 루트는 아내와 아이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중심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막상 계획을 세우면서 지도에 경로를 표시하다보니 남부지역까지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존 스타인벡도 주문제작한 캠핑카인 로시난테를 몰고 남부를 포함해서 4개월간 동안 돌지 않았던가?[각주:1] 하지만 방학과 함께 둘째의 독서 캠프가 시작되고, 방학 후반기에는 첫째의 마칭밴드 캠프가 시작되기 때문에 더 이상 시간을 낼 수가 없을뿐더러 여행경비도 문제였다. 그렇다면 주어진 시간 안에 최대한 이동을 하면서 많은 곳들을 보거나 아니면 중요 도시를 중심으로 깊이 있게 보는 방식 중 한 가지를 택해야만 했지만, 우리는 두 방식의 절충안을 선택했다. Route66을 따라가는 길은 가급적 많은 도시를 둘러보고, 동부에서는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은 상대적으로 꼼꼼하게 보는 방식이었다.

아이들의 방학 중 스케줄로 주어진 시간은 21일이니 그것을 전제로, 거리와 소요 시간을 측정하고 그곳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를 결정하면서 일정을 짰다. 그러다보니 자동차로는 돌아올 시간을 확보할 수가 없어서 워싱턴에서는 비행기로 돌아오는 것으로 결정했다. 자동차로 21일 간 달린 거리를 비행기로 5시간 30분 만에 돌아오는 다소 허무할 수도 있는 계획이었다. 숙소를 알아보다보니 뉴욕에서는 주차가 힘들고 차를 가지고 이동하는 것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래서 뉴욕에서는 도착하는 날 차를 반납하고, 떠나는 날 다시 차를 렌트하기로 결정하니, 장기 렌트의 혜택을 포기하더라도 주차비, 렌트비, 연료비를 고려하면 약 200달러 정도 예산을 절약할 수 있었다. 물론 안전하면서도 저렴한 차를 렌트하기 위해서 인터넷 사이트에서 예약과 취소를 네 번쯤 반복한 결과였다.[각주:2]

비행기의 경우, 미국의 큰 도시는 비행장이 여러 개일 수 있기 때문에 구글에서 비행장의 위치를 확인 한 후, 여행 사이트에서 가격을 비교한 후 가장 저렴한 것으로 선택을 했다. 워싱턴(Ronald Reagan Washington National Airport)에서 얼바인(John Wayne Airport)까지로 경로를 확정하고, 덴버공항에서 환승하는 조건의 저가항공인 프론티어 항공(Frontier Airline)을 선택했다. 저가항공의 경우 빨리 예약할수록 착한 가격에 좋은 자리를 선택할 수 있고, 우리가 이용해야 하는 시기가 제일 성수기여서 미리미리 예약을 해야만 했다. 문제는 저가 항공의 경우, 따로 부치는 짐에는 하나당 20달러의 추가 요금이 붙기 때문에, 큰 캐리어 2개에 모든 짐을 싣고, 노트북, 카메라 가방, 아이들 개인 가방, 아내의 가방[각주:3]은 각자 기내에 가지고 타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덕분에 자동차 여행에 필수품인 아이스박스나 기타 여행 중에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기기들을 가지고 갈 수 없었다.

여행 경로를 정하고 나서는 그곳에서 무엇을 보아야할지를 여행안내 책자, 아이들의 의견, 인터넷 여행 후기, 여행 사이트 등을 통해서 며칠에 걸쳐 파악하고 정리해 두었다. 동부의 주요도시는 여행 책자를 비롯해서 각종 사이트 등에 다양하게 소개되어 있었고, 효과적인 여행을 할 수 있는 팁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Route66 코스는 몇몇 도시를 제외하고는 무엇을 보아야할지 시간을 들여서 꼼꼼하게 찾아야만 했다. 덕분에 미리 해당 도시의 역사, 지리, 특성 등을 파악할 수 있어서 횡단 내내 아주 유용한 정보가 되었다.

여행 경로와 무엇을 볼 것인지를 결정하고 나서 숙소를 예약했다. 일정에 따라서 1박 할 곳과 2박 할 곳, 3박 이상 할 곳 등을 결정하고, 보아야할 곳과의 거리 등을 고려해서 숙소를 정했지만, 그보다 먼저 고려한 것은 가격 대비 숙소의 쾌적함이었다. 몇 번의 여행을 통해서 자동차가 있으니 어느 정도의 거리는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소위 관광지의 형편없는 숙소에서 터무니없는 가격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최고급 호텔을 잡기에는 가격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짧은 여행도 아니고 2021일 동안 돌아다녀야 하고, 동부 주요 도시의 살인적인 물가를 고려할 때, 아낄 수 있는 것은 Route66코스의 숙소 비용뿐이었다. 그래서 가급적 아침을 제공하고 가격이 저렴한 인(Inn)[각주:4]과 아침은 제공하지 않지만 저렴하고 쾌적한 공항 근처의 호텔을 주로 잡게 되었다. 숙소에서 아침을 제공해주면 비용면에서도 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미국은 한국처럼 어딜 가나 저렴하고 맛있는 식당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아침을 먹기 위해서 식당을 찾는 일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동안 몇 번의 여행으로 다양한 숙소를 예약하다 보니 중심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도 공항 근처의 호텔들은 어디나 가격도 저렴하고 쾌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터넷에서 여행 사이트의 정보를 모아보니 유명 관광지나 주요 도시의 숙박비가 살인적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 인근에 대체할만한 지역과 숙소가 소개되어 있어서, 그것을 적극 활용했다. 어차피 걸어 다닐 거리는 아니고 자동차로 움직여야 한다면, 10분 이동하나 20분 이동하나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캠핑카나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는 것도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어린 딸 둘과 아내에게 야영을 하며 미국 횡단을 하자고 할 용기도 나지 않았고, 무엇보다 안전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여름에 장기간 진행되는 여행인데다가 여자가 셋이다 보니 무엇보다 빨래와 샤워가 중요한 문제였기에 인터넷에 제공된 사진을 통해 샤워시설이나 방의 분위기, 침대, 숙소의 규모, 사용 후기 등을 꼼꼼하게 따져서 결정했다. 횡단 도중에 수시로 정보를 확인하고 이메일 등을 체크하기 위해서 인터넷이 무료로 제공되는지도 확인해야만 했다. 미국의 대부분 숙소는 아주 빠른 와이파이(Wi-Fi)를 무료로 제공한다고 선전하지만, 한국의 놀라운 인터넷 환경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그 속도는 지독히도 느리고 심지어 일부 숙소는 24시간 기준 기기당 이용료를 요구하기도 했다.

특히 여행을 차질 없이 진행하기 위하여 대부분의 숙소는 환불이 되지 않는, 그래서 저렴한 환불 불가(non refundable)’ 옵션을 선택했다. 예약한 곳이 환불이 되지 않으니 무조건 갈 수밖에 없도록 하여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한 것이다. 물론 예약은 가격을 비교해서 가장 저렴한 사이트를 이용했고, 몇몇 곳은 자동차 보험을 들고 있는 AAA(American Automobile Association)에서 제공하는 10% 할인을 받기도 하였다. 덕분에 뉴욕을 제외하면[각주:5] 1박에 평균 91달러, 뉴욕을 포함하면 1박에 평균 112달러에 이용할 수 있었다. 세금까지 포함된 이 금액이 아주 저렴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비교적 괜찮은 아침식사까지 포함되었고, 관광객들이 몰리는 곳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비싸다고도 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6월 중순 옐로우스톤 여행을 준비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시작된 준비였기 때문에 조금 여유롭게 이것저것 고려할 수 있었다. 몇 번의 여행으로 가져가야할 것과 현지에서 조달할 것 등을 나눌 수 있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주말 세일 등을 통하여 가격을 비교해 가면서 경제적으로 준비할 수 있었다. 미국에 와서 유난히 밥을 더 찾는 아이들 때문에 햇반과 3분 카레, 컵라면, 김 등은 한인마트 세일 하는 기간에 구입해 두었고, 필요한 생수와 간단한 간식은 코스트코(Costco)에서 준비했다. AAA에 가서 주요 도시의 지도와 안내책자를 받았다. 지도와 안내 책자의 부피는 예상보다 크고 무거웠다. 여행지별로 AAA회원들을 위한 할인매장 등이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기 때문인데, 실제로 여행지에 가면 할인되는 곳들은 AAA표시가 붙어 있어서 굳이 가져갈 이유는 없었다.[각주:6]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각 도시별 이동 경로를 구글 지도로 시뮬레이션해보고, 우리의 희망 경로와 비교하여 조정하고 나서 출력해두었다. 숙소 예약 확인 메일과 이동 경로를 각각 출력하고 보니 크기가 작은 책만 해졌다. 숙소 예약 확인 메일은 보통의 경우 필요하지 않지만, 혹시라도 잘못된 경우 매우 유용한 증거가 되기 때문에 출력해 둔 것이었다.

뉴스에서는 폭염으로 동부에서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얼바인도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던 7월말, 우리 차창 앞에 붙어서 고집스런 말투로 길을 안내하던 사만다를 떼어서 렌터카에 옮겨달면서 횡단여행은 시작되었다.

 

  1. 존 스타인 벡 / 이정우 역, 《찰리와 함께한 여행》 궁리, 2006. [본문으로]
  2. 미국의 렌터카 회사들은 7일 단위의 렌트에 할인 혜택을 준다. 애초 계획대로 21일 동안 빌렸다면 상당한 할인혜택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프로모션을 위해서 수시로 핫딜 상품이 나오기 때문에 수시로 예약과 취소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한 차를 렌트할 때, 세금이나 보험까지 꼼꼼하게 계산하여 결정해야지만 가장 저렴한 차를 빌릴 수 있다. 메이저 렌터카 회사들의 경우, 대부분 새 차이기 때문에 차의 성능이나 상태가 매우 좋으며, 전국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고장 시 서비스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처음에 연료가 가득했던 차들은 반드시 가득 채워 반납해야 하는데, 공항에서 반납할 경우 대부분 주유소를 찾지 못해서 그대로 반납하게 된다. 그럴 경우 시중 가격보다 두 배쯤 비싼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 [본문으로]
  3. 횡단 여행에 필요한 일정표, 약, 지도, 간식, 휴지 등이 들어 있어서 아이들은 아내의 가방을 ‘도라에몽 가방’이라고 불렀다. [본문으로]
  4. 미국에서의 인(Inn)은 말 그대로 경우마다 천차만별이다. 프랜차이즈 인일 경우에도 이름만 같을 뿐, 지역과 위치에 따라서 요금, 시설, 서비스 등은 제각각이다. 요금이 40달러에서부터 200달러 이상까지 제각각이지만, 시설이나 서비스가 반드시 요금에 따라 결정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지역과 위치에 따라 정해진다고 보아야 한다. [본문으로]
  5. 뉴욕은 다른 도시들에 비해 과도하게 숙소비가 비싸서 민박을 했는데, 민박 역시 호텔에 비해서는 저렴했지만 다른 도시에 비해서는 거의 2배 이상의 비용을 지불해야했다. 따라서 평균 숙박비를 산정할 때, 뉴욕이 포함될 경우 다소 금액의 왜곡이 있을 수 있다. [본문으로]
  6. 몇몇 곳에서는 할인되는 줄 몰랐는데 계산을 하려고 지갑을 여는데, 직원이 거기에 꽂혀있는 AAA카드를 보고 할인을 해주기도 했다. [본문으로]
블로그 이미지

홑섬

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

여행 중 떠나는 여행

728일 얼바인세도나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아침 7시에 렌터카를 인수하기로 했다. 렌터카 회사가 집에서 10마일(16)쯤 떨어져 있으니 우리차로 가서, 렌터카는 내가 몰고, 우리 차는 아내가 몰고 와야 했다. 미국에서 처음 차를 렌트하려다 보니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나보다 영어가 원활한 첫째를 태우고 가야했고, 그러다보니 둘째만 집에 둘 수가 없어서 결국 온 가족이 가야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졌다. 여행 전날이라고 이것저것 준비하며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들은 일찍 자라는 말에도 흥분이 되는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는 눈치였다. 밤이 길어지면 아침이 분주하다. 결국 분주한 만큼 출발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405도로를 타고 10여분쯤 달리다가 빠져나와서 우회전을 하려는데, 뒤에 있던 BMW가 슬그머니 와서 우리 차를 받았다. 추돌 사고였다. 미국에서 이런 일을 처음 당하는 일이라 황망해하며 내렸다. 뒤에 BMW로 가보니 운전자는 창문도 내리지도 않고 안에서 혼자서 떠들 뿐이었다. 일단 갓길로 대라고 손짓을 하니 그제야 뒤따라왔다. 교통사고가 나면 어떤 경우에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을 이곳에 오자마자 들었는데, BMW 운전자는 느릿느릿 내리더니 역시 미안하다는 말이 없다. 화가 났지만 내차에 큰 이상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가라고 했더니 그제야 미안하단다.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나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하지만 횡단여행을 떠나는 첫 날이 아니던가? 아침, 첫날, 새봄 등등 처음 시작하는 것에 유난히 큰 의미를 부여하는 버릇이 있는 나를 알기에, 여행을 시작하며 화를 내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스스로 타이르고 있었다. 더구나 길거리에서 그를 잡고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아이들 보기에 볼썽사나울뿐더러 이미 놀라 있는 아이들은 더욱 불안해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람의 태도를 문제 삼아 사과를 받아내기에는 불행히도 나의 영어실력이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저 횡단여행의 액땜을 했다고 믿기로 했다.

렌터카 회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예정보다 30분쯤 늦었다. 예약을 확인하고 서류를 작성하고 났더니 하루 15달러를 추가부담하면 보험이 가능하단다. 렌터카 보험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225달러의 예상하지 못한 경비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보험을 들지 않고 횡단을 시도하는 것은 또 얼마나 무모한 일이겠는가?

모든 서류 처리를 끝내고 차를 인수하고 보니 전에 설명했던 차가 아니었다.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고 아내와 풀 사이즈 카’(full-size car)의 크기가 얼마만한지, 그보다 한 사이즈 작은 스탠더드 카’(standard car)급과의 연비 차이는 얼마가 되는지, 그리고 MP3는 사용 가능한지 등을 알아보기 위하여 렌터카 회사를 미리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담당자 말이 어느 차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도요타 캠리나 닛산의 알티마2.5[각주:1] 정도가 될 것인데, 캠리는 예약 상 없을 듯하고 알티마2.5가 될 것이라고 했다. MP3는 사용 가능할 것이고, ‘스탠더드 카급과의 연비 차이는 크게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알티마2.5겠지 했는데 느닷없이 브라운색 마즈다6. 알티마2.5가 마즈다6보다 좋은 차인지 아닌지는 몰아본 적이 없는 내가 알 턱이 없었지만, 예상했던 것이 아니라서 다소 실망스러웠다.

마즈다6의 기어인데 D로 출발을 했어야 했는데, M에 놓고 출발을 해서 엄청난 소음과 저속을 경험하였다. 운전한지 20년이 넘었는데 낯선 것은 낯선 것이다.

차량 외부와 6,000마일(9,650) 정도 주행한 것으로 보아 새 차인 것은 분명한데, 차량 내부를 보니 마치 5-6년은 운행한 차처럼 보였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른 차가 없냐고 하니까 없단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모든 숙소 예약이 끝나있는 상황이고, 오늘 달려야 할 거리와 시간은 그렇지 않아도 넉넉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내와 둘째를 우리차로 보내고, 나는 첫째와 그 차를 몰고 나왔다. 그런데 조금 달리다보니 차량소음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몇 번을 달리고 서고를 반복해보았는데, 이 차로는 횡단은 둘째 치고 집까지 가는 것도 어려웠다. 차를 돌려 다시 렌터카 회사로 가서 차량 소음이 너무 심하니 다른 차로 바꾸어 달라고 했다. 직원이 나와서 시동을 걸더니 무슨 소음이 나냐고 묻는다. 혹시 D가 아니라 M에다 놓고 운행한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저속기어에 두고 운전을 했으니 그 소음이 오죽했으랴, 추돌 사고와 마음에 들지 않는 차, 떠나려는 바쁜 마음이 겹쳐서 바보 같은 짓을 한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 차는 싫었다. 그래서 다시 강력하게 차를 바꾸어달라고 하자 직원은 난감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편도(one-way)로 뉴욕까지 가는 우리에게 좋은 차를 주기 싫어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더욱 강력하게 요구했다. 만약 다른 차가 없다면 하나 아래의 스탠더드 카급의 차라도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이해할 수 없다며 코발트색 마즈다6을 보여주었다. 5,000마일(8,046) 정도를 달린 새 차인데 내부도 비교적 깨끗한 편이었고, 운전을 해보니 앞에 차보다 편했다. 이 차로 하겠다고 했더니 처음부터 서류를 모두 다시 꾸며야 한단다. 그제야 직원이 왜 그렇게 싫은 기색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같은 차종인데 그냥 타지, 왜 서류를 다시 꾸미게 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뉴욕까지 15일을 같이 해야 할 차인데 마음에 들지 않는 차로 찝찝한 기분에 달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차에는 MP3 연결잭이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조수석 햇빛 가리개에 끼워놓고 들었더니 소리가 제법 들을만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동안 여행에서 운전의 피로를 풀어주던(때론 피로를 가중시키던) 유진이의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예약하면서 몇 번을 확인했는데, 그 때에는 MP3 연결 잭이 있다고 해놓고서 막상 차를 받고 보니 없었던 것이다. 횡단하면서 듣겠다고 유진이가 며칠 전부터 음악파일을 다운 받고, 정리해 놓은 터였다. 운전하는 나도 나였지만 차 안에서 장시간을 견뎌야 하는 가족들이 더 큰 문제였다. 무엇보다 유진이의 실망이 걱정 되었다. 유진이에게 미안해서 이거 어떻게 하지?”라고 했더니, 아이는 추돌 사고에 차 교환 등으로 이미 놀라고 지쳐있었다.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이팟 자체 스피커로 들으면 된단다. 아이가 아빠보다 현명했다. 고민 끝에 아이팟을 조수석 햇빛 가리개에 끼워 놓고 음악을 듣기로 했다. 손에 쥐고 있을 때보다 위에서 소리가 나니 훨씬 음량이 좋았다. 다소 옹색하긴 했지만 어쩔 것인가, 없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하면 통()한다.

집으로 돌아와 짐을 실었다. 떠나 있는 기간에 비례해서 짐은 늘고, 여정이 진행될수록 짐으로 인한 수고도 는다. 큰 캐리어 하나, 작은 캐리어 하나, 12개들이 햇반 두 상자, 카레를 비롯한 즉석 요리 24, 6개들이 컵라면 세 박스, 노트북, 카메라 가방, 아이들 작은 가방, 1리터 생수 24개 한 상자, 약과 간식이 들어 있는 아내의 가방, 여행 중 아이스박스 역할을 해 줄 방수 가방 등이 전부였다. 21일 간의 여행이지만 캐리어와 카메라 가방, 노트북 등을 제외하고는 가는 도중 모두 먹어 없어질 것들이었다. 비행기로 돌아올 때 짐을 최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옷은 가급적 적게 가지고 가기로 했다. 나는 마치 난파선에서 짐을 꺼내어 물품을 확인하는 15소년 표류기[각주:2]의 소년들과 같은 기분이 되어 다소 흥분하고 있었다.

먼 길 떠난다고 옆집에 사시는 이 교수님 사모님은 짐을 싣는 내내 곁에서 도와주시며 배웅을 해주셨다.[각주:3] 얼바인을 벗어난 차는 평균 시속 70마일(112)로 달리면서 점차 내게 익숙해졌다. 차가 익숙해지자 마음이 놓이면서 차 안의 장치들이 궁금해졌다. 특히 내 차에도 있지만 활용하지 못하고 있던 크루즈(Cruise) 기능이 눈에 들어왔다. On 버튼을 누르고 가속 스위치를 올리니 크루즈 기능이 작동되었다. 옐로우스톤 여행에서 돌아오다가 라스베이거스 근처에서 과속으로 벌금을 문 이후로 정속운전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프리웨이에서 속도를 내다보면 어느새 과속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크루즈 기능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허용되는 최대속도에 크루즈 기능을 설정해두면, 과속 염려도 없을뿐더러 엑셀을 밟지 않아도 되니 일석이조였다. 덕분에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영락없는 나비족으로 만들어주는 팔토시다. 그렇다면 팔토시가 아바타인가? 빼는 것을 잊고 차에서 내리면 여지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하는 패션 아이템이다.

동부에서는 화씨 117(섭씨 47)까지 올라가는 기록적인 찜통더위로 33명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전해졌지만, 우리가 있는 서부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의 여름을 생각하면 쾌적한 편이었다. 기온은 높이 올라가도 건조한 날씨 때문에 그늘에 있으면 오히려 서늘했다. 낮에 무방비로 햇빛에 노출되는 것만 피하면 더위는 큰 문제가 아니어서 여름 내내 냉방기를 한 번도 틀지 않고 지냈으니 말이다. 문제는 우리의 여행이 서부에서 동부로 간다는 것이고, 더구나 낮 시간 동안 사막지대를 건너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막지대의 열기는 살인적인 것이었는데, 네바다 사막지대를 달리다보면 차가 과열 될 수 있으니 에어컨을 끄라는 경고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정도였다. 기온뿐만 아니라 차창으로 내리쬐는 자외선도 큰 문제였다. 피부가 까맣게 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화상을 입기 십상이었다. 더구나 8시간쯤 달려야 한다면 자외선 차단제로는 한계가 분명했다. 그래서 미리 한인마트에서 특수소재로 만들었다는 쿨토시(팔토시)를 준비했다. 토시를 끼면 손가락 두 마디만 남기고 손부터 시작해서 팔뚝까지 온전히 덮을 수 있었다. 게다가 특수소재라 가볍고 얇을뿐더러 시원하기까지 했다. 재미있는 것은 팔토시의 색깔이 파란색이어서 그것을 끼고 나면 영락없는 <아바타>(Avatar, 2009)의 나비족이었다. 팔토시는 보기보다 시원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민망했다I-15를 타고 가다가 주로 I-40을 달렸다. 우리가 달리는 길옆으로 Route66이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Route66은 도로의 형태나 기능을 잃은 곳이 많았고, 새로 만든 표지판만 어색하게 선명했다.

존 스타인벡이 ‘The Mother Road’로 명명한 Route66은 시카고에서부터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까지 2,200마일(3,500)에 이르는 동부와 서부를 잇는 동맥으로서 미국의 역사와 함께 한 도로였다. Route661925국가 고속도로 시스템 구축 계획이 발표된 이후, 각 주정부에 의해 건설되었고, 1940년 이전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리노이 주-미주리 주-캔자스 주-오클라호마 주-텍사스 주-뉴멕시코 주-애리조나 주-캘리포니아 주를 이어준 Route66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서처럼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 떠나던 절박한 길이었고, 2차 세계 대전에는 전장으로 가는 병사들을 실어 나르던 의무와 명분의 길이었으며, 전후에는 자동차와 함께 개인의 자유를 구가하던 낭만의 길이기도 했다. 그렇게 미국의 역사와 함께 영욕의 세월을 건너던 Route66은 속도와 효율이라는 이름 앞에 낡은 도로가 되어 갔고, 마침내 1985년 공식적으로 폐쇄되었다. Route66은 도로건설 기술이 현재와 같이 발전하기 이전에 건설된 도로였고, 주정부가 건설하다보니 도로의 이용률을 높이기 위해 주요 도시의 중심도로로도 쓸 수 있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횡단도로로서의 효율성 면에서는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Route66은 속도와 효율의 시대를 건널 수 없었고, 최단 거리, 최단 시간의 고속도로들에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워버린 Route66을 살려낸 것이 존 라세터(John Lasseter)의 애니메이션 <>(Cars, 2006)였다. <>Route66의 어느 한 마을인 듯한 라디에이터 스프링스를 배경으로 단지 레이스에서 이기는 것 말고도 삶에는 더 중요한 것이 많다는 메시지를 전해준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성취, 효율, 속도만을 강조하는 현재의 삶에 대비하여 과정, 즐거움, 여유로 상징되던 Route66의 추억을 상기시켜주었다.

픽사 애니메이션 스토리텔링을 분석하기 위하여 존 라세터에 관한 자료를 모으다가 <Cars>의 제작 동기에 대한 언급이 눈에 뜨였다. 2001년 존 라세터의 아내는 가족 여행을 제안하며 가족에게 좀 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모르는 사이에 아이들이 훌쩍 자라 우리를 떠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가족의 소중한 부분을 영영 잃고 말 것이라고 했단다. 그 말은 마치 내 아내가 나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아내와 존 라세터의 아내가 서로 통화하는 사이도 아닐 터이고 보면, 일 때문에 가족들에게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하는 것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나보다. 아내의 그 말을 들은 존 라세터는 인생이라는 여정은 인간에게 주어진 상과 같다. 성취한다는 건 참 멋진 일이지만 축하해줄 가족과 친구가 없다면 모든 게 무의미하지 않겠는가?”라며, 가족들과 두 달 동안의 트레일러 여행을 떠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Cars>를 제작했단다.

아마 그때였으리라, 연구년을 미국으로 간다면 반드시 가족들과 Route66을 함께 여행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횡단여행이 시작되었다. 21일 동안 오롯이 가족들과 함께 달려가야 할 즐거운 여정이다. 지금 이곳이 아니라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서로의 모습과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서로의 얼굴에서 자신을 볼 수 있으리라는 느슨한 기대를 품어본다.

Route66은 이제 다른 도로 아래에서 달리거나 끊어져 있다. I-40표지판 옆에 Route66이 함께하는 것은 그런 이유다. 표지를 따라 내려서면 쇠락한 마을이거나 끊어진 길의 어디쯤이다. 시대적 효용을 잃는 것들의 쓸쓸한 모습과 같다.

Route66은 달리던 그 시간에 멈추어 있었다. 멈춘 시간을 멈춘 그대로 두었다면 그 시간은 차라리 나름대로 흐를 수 있지 않았을까? 멈춘 시간을 현재의 시간 위에서 색칠하려다 보니 그것은 추억 없는 기억이 되거나 아주 천박하게 화려해진 슬픔이 되고 말았다. 길은 사라지고 도로표지만 살아서 관광객들을 부르고 있었지만 싸구려 기념품으로는 추억을 만들 수는 없었다. 지금 이곳의 Route66이 추억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그 길과 같은 시대를 달리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길을 달리던 시대의 미덕들이 가뭇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경쟁, 효율, 성취라는 목표지향적인 삶의 속도는 협력, 여유, 과정의 미덕을 야유할 뿐이었다. 그 야유 속에서 소중한 것들은 서로의 곁을 떠나거나 흔적 없이 사라져 가고 말았다. 존 라세터가 <>에서 그리워하며 복원하고 싶어 했던 것은 낡은 도로의 추억이 아니라 그곳을 달리던 시대의 미덕들이 아니었을까? 낡은 Route66은 그렇게 길 아래로 나란히 달리며 부서지고 있었다.

Route66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곳곳에서 내려서 달려보았지만, 길은 현재도 과거도 아닌 어정쩡한 시제로 바람에 날릴 뿐이었다. Route66 옆으로 달리는 I-40은 지평선이 이끌고 있었다. 길은 높낮이와 곱고 굽음의 차이가 있을 뿐 집요하게 지평선을 향해 있었고, 지평선은 끝 모를 하늘을 향해 앞으로만 달리고 있었다.

서부쪽의 고속도로는 대부분 지평선을 보고 달려간다. 지평선을 이끄는 것은 늘 하늘이다.

캘리포니아에서 멀어질수록 사막과 스텝의 중간지대가 끝없이 이어지고, 이따금 마을들이 달려왔지만 빠르게 뒤로 달아날 뿐이었다. 몇 시간을 줄곧 앞으로만 달리는 길이니 사만다는 긴 침묵에 빠져 들었다. 여행을 떠난다는 마음에 밤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던 아이들은 차가 캘리포니아를 벗어나자 각자의 취향대로 잠이 들었다. 자기는 음악을 틀어야 한다며 아내 대신 굳이 조수석에 앉은 유진이는 의자를 잔뜩 눕힌 채 다리를 대쉬보드에 올리고 목베개를 하고 잠이 들었고, 효진이는 언제나 그렇듯 아내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 물론 강한 햇빛은 햇빛 가리개로 모두 가리고, 아내의 도라에몽 가방에서 나온 간식을 배불리 먹은 뒤의 일이었다.

지나치는 풍경이 아까워 밖을 보라고 깨우려다가 그대로 두었다. 살아가면서 아무런 걱정 없이 배불리 먹고 엄마 무릎 베고 따듯하게 잠들 날이 또 앞으로 몇 날이나 될 것인가? 그래 많은 것을 보는 것만 여행의 풍미겠는가? 자기 취향대로 느끼고 가져가 두고두고 따듯해할 수 있는 기억을 일구는 일이 여행의 기쁨 아니겠는가? 여행준비로 피곤했던 아내도 졸릴 것이 분명한데 운전하는 내가 졸까봐 룸미러로 나를 훔쳐보며 계속 이야기를 걸고 있었다. 서너 시간쯤 달린 후, 유진이가 깨서 음악을 틀자 안심이 되었는지 아내도 스르르 잠이 들었다.

서부 쪽 고속도로[각주:4]에는 한국식 휴게소가 없다. 서부 쪽 고속도로는 무료로 운영되기 때문에 길에 올라서고 내려서는 일이 비교적 자유롭다. 그래서인지 굳이 고속도로에 휴게소를 만들지 않고, 고속도로 진출입로 주변에 음식점, 주유소, 숙박시설을 표시해둘 뿐이다. 물론 고속도로 위에 아주 드물게 쉼터(Rest Area)를 두지 않는 것은 아니나 간격이 너무 멀고, 화장실과 피크닉이 가능한 식탁 정도가 놓여 있을 뿐이니 한국식 휴게소와는 거리가 멀다. 반면, 동부 쪽 고속도로들은 유료도로(Pike, Turnpike)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한국식 휴게소와 비교적 유사한 휴게소들이 고속도로 위에 있다.

캐나다 마트의 전경이다. 주유소와 마트가 결합된 미국의 전형적인 주유소이다. 건물을 압도하는 타이포그래피가 오히려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더해주던 곳이다.

가족들이 모두 잠에서 깬 것은 다섯 시간 넘게 달리고 주유하기 위해 애리조나 주 킹맨(Kingman)에서 고속도로를 내려섰을 때였다. ‘캐나다 마트라는 생뚱맞은 이름의 작고 낡은 마트는 주유소도 함께 하고 있었다. 이곳은 휘발유 가격이 1갤런에 3.38달러로 얼바인에서 가장 싸다는 코스트코 주유소의 3.67달러에 비해 29센트나 저렴했다. 그깟 29센트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횡단의 거리를 생각하면 이 금액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12갤런을 주유했으니 3.48달러를 아낀 것이다. 빠듯한 여행 경비도 절약해야 했지만, 동부의 대도시로 가면 이곳에서 아낀 기름 값만큼 혹은 그 이상 지출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미국에서는 주유소와 편의점을 함께 운영하며, 화장실은 편의점 안에 있기 때문에 주유를 하고서는 편의점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고속도로 위에는 한국식 휴게소가 없으니 주유할 때 반드시 화장실을 가야만 한다. ‘캐나다 마트라는 곳은 일반 관광객보다는 트럭기사들이 주 이용객들인 것처럼 보였다. 화장실에는 독립적인 샤워부스가 여러 개 설치되어 있었지만 화장실 시설은 오히려 아주 소박했다. 마트 안팎으로 Route66을 강조하고 있었지만, 관련성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소박한 수준의 Route66 기념품뿐이었다.

킹맨에서 세도나(Sedona)까지는 세 시간쯤의 거리였다. 잠에서 깬 아내와 아이는 이번 여행의 기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유진이는 자기가 미리 조사해둔 몇몇 곳을 꼭 들러줄 것을 요구했고, 효진이는 수업시간에 배운 보스턴과 워싱턴의 몇몇 유적지를 구체적으로 대면서 꼭 보아야 한다고 했다. 아내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뉴욕을 가장 많이 기대하는 눈치였다. 나는 구체적인 어떤 곳이라기보다는 달리는 동안 만나게 될 풍경들과 차 안에서 나누게 될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말 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여행 출발 전에 약속했던 여행의 기록을 각자 어떤 식으로든 남기자고 제안했다. 아내는 신혼여행부터 꼼꼼하게 기록해왔으니 말하지 않아도 그럴 것이고, 아이들도 모두 좋다고 했다. 아내는 첫 여행부터 냉장고 자석을 모으고 있었고, 유진이는 엽서와 각종 팸플릿들을 모아왔는데 이번에는 효진이도 그러겠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동방신기의 노래를 몇 번쯤 듣는 사이 표지판은 세도나 인근의 플래그스태프(Flagstaff)를 가리키고 있었다.

항상 눈이 먼저 현혹되고 만다. 사만다의 안내가 없었음에도 플래그스태프 표지판을 보자마자 차는 벌써 길을 내려서고 있었다. 사만다는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우리가 미웠는지 잠시 먹통이 되었다가 플래그스태프를 한 바퀴 돌 때쯤 비가 조금씩 내리자 정신을 차렸다. 사만다가 일러주는 길을 몇 번 놓친 끝에 Arizona 89A를 만나서 오크 크릭 캐니언(Oak Creek Canyon)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Midgley Bridge의 전경이다. 아래로 트레킹 코스가 위험스런 유혹을 하지만 위로는 평온한 다리일 뿐이다.

슬라이드 록 주립공원(Slide Rock State Park)에 들어서자 이미 붉은색의 강한 기운이 산과 절벽들로 이어진 풍경을 압도하고 있었다. 하늘은 흐린 날씨 탓인지 먹구름이 몰려들어 석양과 좀처럼 어울리지 못하고 사나운 표정이었다. 달려드는 풍경에 이끌려 몇 번인가 위험을 무릅쓰고 차를 세웠다. 갓길이라기에는 너무 협소한 곳에 차를 세우고 몇 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기대했던 것만큼의 풍경이 잡히질 않았다. 광각렌즈로 바꾸어 보았지만 렌즈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사진이 될 만한 뷰 포인트는 모두 유료화 되어 있었고, 그곳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온전히 풍경을 담을 수 없었다. 트레킹을 하며 풍경 안으로 좀 더 들어가야 얻고 싶은 사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시간이 없었다. 날은 흐리고 해는 이미 지고 있었다.

오크 크릭 캐니언에서 세도나로 들어서는 길에 미즐리 브리지(Midgley Bridge)를 만났다. 평소에는 주차하기가 쉽지 않다던데 늦은 시간이어서인지 두세 대만 주차해 있었고 그마저도 금방 떠났다. 미즐리 브리지 옆으로 몇 개의 트레일(trail)이 지나고 있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어서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미즐리 브리지는 윌슨 캐니언(Wilson Canyon)과 오크 크릭 캐니언을 이어주고 있다고 설명이 되어 있었지만, 막상 두 캐니언을 바라보니 이름과 구분은 그저 인간의 몫일뿐이었다.

미즐리 브리지를 넘어서 얼마가지 않으니 업타운 세도나(Uptown Sedona)였다. 먼저 안내 센터에 들러야 했지만 시간은 벌써 저녁 8시가 가까웠고, 이미 490마일(784km) 이상을 달린 상태였다.

숙소 직원이 붉은 펜으로 설명해준 세도나 지도

숙소로 잡은 스카이 렌치 랏지(Sky Ranch Lodge)는 업타운 세도나를 지나서 산 위쪽으로 한참 올라간 곳에 있었다. 세도나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고 노을이 가장 아름답다는 에어포트 메사(Airport Mesa)가 바로 숙소 앞에 있었다. 에어포트 메사는 세도나의 대표적인 볼텍스 (Vortex) 지점 중의 하나라는데 내게는 그보다 노을이 더 매력적인 곳이었다. 노을을 기대하고 부지런히 달려갔지만 간간이 비가 내리고 이미 너무 어두워졌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밤이 내리는 세도나의 풍경만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세도나의 자연환경 보호를 위해 기부를 권하는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우리에게 일본어와 우리말로 인사를 건넸다. 환한 얼굴로 기부를 권하고 있었지만 내리는 비 때문에 황급하게 차로 돌아와야 했다. 체크인을 하면서 세도나 안내지도를 부탁하니 약간 여성스러운 남자 직원이 친절하게 붉은 펜으로 표시하며 설명까지 해주었다. 멕시코 풍의 숙소는 정성들여 가꾼 정원과 신경 쓴 소품들로 낡은 느낌이 오히려 멋스러웠다. 방에 들어와 짐을 풀고 저녁 준비를 했다. 딱히 근처에 저녁을 먹을 곳이 마땅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져온 햇반과 즉석 카레 그리고 컵라면을 준비했다. 햇반은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즉석 카레는 물 끓이는 기구로 데우고, 물을 따로 끓여 컵라면에 부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전자레인지와 물 끓이는 기구의 코드를 꽂는 순간 전기가 나갔다. 전자레인지를 돌리면서 물을 끓이려하니 과부하가 걸려서 퓨즈가 나간 것이다. 사무실에 가서 이야기를 하니 즉시 사람을 보내주어 바로 고쳤는데, 전자레인지를 돌리니 전기가 또 나갔다. 이번에는 전화로 사정을 설명하니 사람을 또 보내주어 불은 들어왔지만 전자레인지를 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방안에 불도 불필요한 것들은 모두 끄고 전자레인지만 돌리니 돌아갔다. 햇반과 카레를 데우고, 컵라면 물을 끓여서 간신히 저녁을 먹었다. 첫날이어서 그런지 달려온 거리에 비해서는 모두 활력이 넘쳤다.

웃고 떠드는 아이들을 씻게 하고, 찍은 사진을 노트북으로 내려서 정리를 했다. 페이스북에 간단한 경과를 올리고, 내일 일정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볼 것을 선택해야했고, 보아야할 곳의 동선을 잘 짜야했다. 아이들은 첫날의 흥분 때문인지 낮에 차에서 잤던 탓인지 여행 일기를 적고나서도 한참을 떠들다 자정이 지나서야 잠이 들었다.

오늘은 I-40Route66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달리고 또 달려왔다. 출발할 때는 낯설었던 차가 숙소에 도착하니 어느새 익숙해졌다. 미국에서 일 년 동안의 연구년은 조금 긴 여행이다. 돌아갈 곳이 분명한, 돌아가기 위해 떠나는 것은 여행 그 이상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횡단 여행은 미국에서의 일 년 여행 중에 떠난 또 다른 여행이었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아침에 인수한 차처럼 이제 조금 익숙해졌을 뿐인데, 무엇을 찾아 무모하게 횡단을 감행하는 것인지 아직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일 년 간 미국으로의 여행이 그동안 소홀했던 가족들과 함께하면서 잃어버린 것, 놓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듯, 횡단여행을 통해 낯선 공간에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해볼 뿐이다. 내일은 세도나를 보고 앨버커키(Albuquerque)로 달릴 것이다. 늘 밤은 낮보다 시간이 더디 흐른다.

 

  1. 개인적으로는 익숙한 소나타가 있었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Hertz에는 소나타가 없었다. 렌터카를 예약하는 사이트에서는 풀 사이즈 카 급의 차로 Chevrolet Impala급이라고만 되어 있어서 어떤 차가 배정될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본문으로]
  2.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기》는 초등학교 시절 내가 가장 신나게 읽었던 소설이다. 아이들끼리 무인도에서 2년 간 생활하는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을 어린 시절 무척 좋아했다.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 내가 열여섯 번째 소년이 되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본문으로]
  3. 21일 간 집을 비워야 하기 때문에 우편물 등을 옆집의 이 교수님 댁에 부탁을 하고 떠나야했다. 이 교수님은 나처럼 UCI에 교환교수로 나와 계셨고, 우리처럼 딸 둘이 있어서 여러모로 처지가 비슷했다. 이 교수님 댁과는 평소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우편물도 우편물이었지만 집을 떠나면서 돌아올 곳에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푸근함이 더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4. 한 면적의 100쯤에 달하는 미국의 동맥 역할을 하는 것은 소위 프리웨이(free way)라고 부르는 자동차 도로들이다. 처음에는 서부 고속도로가 무료이기 때문에 프리웨이인 줄 알았는데, 미국인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도로라는 의미에서 프리웨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본문으로]
블로그 이미지

홑섬

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

세 개의 브로큰 애로우(Broken Arrow)

729일 세도나앨버커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살면서 여지없는 것들이 있다. 밥이 그렇다. 밥은 늘 끼니때마다 예외 없이 절실하다. 어제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이 오늘의 허기를 달래주지는 않는다. 야속하리만치 허기는 규칙적이다. 그래서 늘 밥은 어김없는 현실이다. 밥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삶에 진지하다. 그 밥이 어떻게 마련되는지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자기 삶에 태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밥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의 어쭙잖은 오만을 나는 혐오한다. 그래서인지 김훈의 칼의 노래(2001)를 읽다가 이순신이 전투를 치르러 나가는 병사들에게 고구마를 나누어 주며 독려하는 장면에서 나는 속절없이 울기도 했다. 그는 마지막 양식인 고구마를 나누어 주고, 전투에서 이겨 살아 돌아오면 적의 군량미로 밥을 먹을 것이고 죽게 되면 더 이상 끼니가 소용없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아직까지 나는 이보다 더 투명하고 진지한 밥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아침은 허기와 함께 온다. 미국에서 여행을 하다보면 아침은 참 난감한 숙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숙소에서 아침을 제공하지 않으면 아침 식사를 할 곳을 찾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만족할만한 식당을 찾는 것도 일이지만 찾아도 대부분 패스트푸드 가게의 조악한 정크 푸드(junk food)였다. 게다가 그 조악한 음식을 찾으러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또 얼마나 맥 풀리는 일인가? 횡단을 계획하면서 가급적 아침을 제공하는 숙소를 골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군데는 아침이 제공되지 않는 숙소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세도나의 숙소가 그랬다. 더구나 그 높은 숙소 주변에 식당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세도나에서의 아침은 집에서 미리 가져온 빵과 쨈 그리고 우유로 소박하게 마쳤다.

에어포트 메사에서 바라본 세도나 시내의 전경

숙소를 나서면서 보니 전날 제대로 보지 못해 아쉬웠던 에어포트 메사가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에어포트 메사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고, 그보다 먼저 세도나의 전경이 발밑까지 다가와 있었다. 마주보이는 레드 락(red rock)은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아니어도 붉은 빛으로 충만했고, 그 아래로 세도나 시가는 제몫의 나무들을 품에 안고 평화로웠다. 사진을 찍고 떠나려는데 어제의 기부를 권하던 아주머니를 다시 만났다. 결국 주머니에 있던 동전들을 기부함에 넣고, 레드 락으로 출발했다.

해마다 미국의 10대 관광지 중의 하나로 꼽힌다는 세도나에서 브로큰 애로우(Broken Arrow)를 만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원래 브로큰 애로우는 기병대와 인디언 사이에 협상을 진행하던 중, 인디언이 화살을 부러뜨려서 협상의 결렬을 나타낸 것에서 유래했다는 말로 최악의 상황[각주:1]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가장 좋다는 곳에서 최악의 상황을 만나는 것은 좀처럼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가급적 피하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브로큰 애로우는 1853년 참혹한 비극으로 끝난 브로큰 애로우 전투다. 이 전투 이전에도 인디언[각주:2]들은 금과 땅과 바이슨 가죽 등을 원했던 백인들에 의해 19세기 초까지 학살되거나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되어야만 했다. 세도나는 원래는 나바호족, 아파치족, 야바파이족 등 인디언들의 성지(聖地)였는데, 서부개척이라는 명분 아래 자신들의 땅에서 내몰리던 그들은 브로큰 애로우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죽임을 당한다. 브로큰 애로우 전투에서 살아남은 일부 야바파이족과 아파치족이 그랜드 캐니언 일대로 쫓겨나면서, 세도나는 결국 백인들의 땅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자기중심의 명분과 탐욕으로 인디언을 몰살시키거나 내쫓은[각주:3] 브로큰 애로우 전투가 첫 번째 브로큰 애로우다.

1980년대 이후 이곳에서 볼텍스(Vortex)가 나온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관광지로 급부상했고, 그 덕분에 세도나에는 매년 500만 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찾아온단다.[각주:4] 이곳을 찾는 이들의 모습에서 두 번째 브로큰 애로우를 만날 수 있다. 그것은, 왜 세도나가 아메리카 인디언의 성지가 될 수 있었는지는 살피지 않고, 과학적 효능이 입증되지도 않은 볼텍스 운운하며 몰려드는 사람들의 맹목과 오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세도나가 아메리카 인디언의 성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며 영적인 삶을 추구했고, 그것에 세도나의 자연이 반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에는 자연을 거스르는 삶을 살면서 볼텍스만을 믿고 세도나로 몰려와서 그 치유 효과를 기대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언어는 믿음의 시작이다. 세도나는 그런 면에서 자신만의 언어로 믿음을 만들어 신화화하고 있었다. ‘세도나를 처음 보고서 감탄하지 않는다면 그는 다른 일을 하고 있거나 자고 있는 중일 것이라거나 신은 그랜드 캐니언을 창조했지만 그는 세도나에 산다는 말만 들어도 세도나의 자연을 신화화하려는 그들의 노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숙소에서 Arizona 89A를 타고 레드 락 주립공원까지 가는 길은 무척 이채로운 길이었다. 도시 전체가 세도나의 붉은 빛을 유지하면서 멋스러운 어도비(Adobe) 양식의 건축물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사만다가 조금 헤매는 동안 발견한 한적한 길가의 주택들은 하나같이 소박했지만 자기만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그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려는 세도나 전체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지금도 세도나에서는 세계적인 호텔 체인들도 2층 이상 건축할 수 없고, 심지어 맥도날드조차 고유의 노란색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엄격한 규제는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신호등에서부터 도로 표지판까지 자연의 붉은 빛을 거스르지 않는 그들의 노력이 돋보였다.

붉은 빛의 바위들 사이를 이어 달리고 있는 세도나의 도로는 온통 붉은 빛이다. 신호등과 표지판, 심지어 맥도날드조차 세도나의 빛을 입고 있다. 대부분의 건축물들은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져 있고, 2층을 넘어서지 않는다.

세도나의 주립 공원들은 각각 입장료를 받는다. 국립공원의 경우에는 연간회원권(80달러)을 끊으면 언제 어디서나 이용이 가능한데, 주립공원의 경우에는 이것이 통하지 않는다. 레드 락은 10달러, 슬라이드 락(Slide Rock)20달러의 입장료를 받는데, 입장권에 적힌 글을 읽어보니 주립공원 건설에 쓰인단다. 그렇다면 할 말은 없지만 입맛은 쓰다. 세도나의 곳곳이 그렇지만 레드 락도 트레킹 코스가 아주 좋단다. 먼저 안내센터에 갔더니 세도나 홍보 영화를 상영했다. 세도나의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영화였는데, 이게 지나치게 길었다. 앞부분은 세도나의 곳곳에 대한 설명과 즐기는 모습이 제대로 구성되었는데, 후반부에는 세도나의 풍광과 동식물들의 영상이 지루할 정도로 계속되어, 우린 결국 끝까지 보지 못하고 나오고 말았다. 세도나를 보고 7시간쯤 달려서 앨버커키로 넘어가야 하는 날이었고, 세도나에는 보고 싶은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결국 트레킹을 포기할 때쯤 변함없이 또 허기가 찾아왔다.

아침이 소박하면 점심은 알차게 해주어야 한다. 나는 여행을 떠나면 현지식으로 먹어야 한다고 늘 주장해왔다. 음식만큼 그곳의 문화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 없고, 낯선 음식을 즐기는 재미도 여행의 큰 즐거움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이곳 음식을 체험해야한다고 몇 번 시도를 했었는데 결과적으로 실패를 하고, 아내의 표현에 따르면 한국에서보다 더 많이 한식으로 먹고있다. 몇 해 전에 신장 결석을 앓고 난 이후로는 짠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내 탓도 있지만, 이곳 음식이 지나치게 짜고 기름졌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종입맛인 나는 비교적 견딜만했는데 오히려 아이들이 견디질 못했다. 가리는 음식이 많고 새로운 음식을 두려워하는 효진이도 효진였지만, 가리는 것 없고 새로운 음식 도전을 즐기고, 외국에서 1년 생활한 경험도 있는 유진이가 더욱 강경한 것은 의외였다. 그러다보니 정작 이곳 음식을 체험할 기회가 많지가 않았다.

점심을 먹기 위해서 업타운에 있는 멕시코 음식점 오악사카(Oaxaca)에 갔다. 요세미티 국립공원 근처 타코벨(Taco Bell)에서 먹었던 타코와 브리또 맛을 기억하는 아이들이 반기지는 않았지만, 이곳은 패스트푸드가 아니고 다른 메뉴도 있을 것이라고 설득해서 들어갔다. 오악사카에 들어서니 달큼하면서도 매콤한 냄새가 시장기를 견딜 수 없게 하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초와 살사소스를 내주면서 음료주문을 먼저 받았다. 나초와 살사소스는 큰 볼에 두 개나 나왔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들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음식은 사진 먼저 찍고 먹자고 약속했었는데 배가 고팠던 우리는 까맣게 잊고 먹다가 기억해내서 가까스로 사진을 찍었다. 타코와 브리또 그리고 키즈메뉴를 시켰는데, 넉넉한 양도 양이었지만 맛이 탁월했다.

오악사카 레스토랑의 나초. 브리또, 타코

모두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계산서를 받고 보니 처음에 준 나초가 공짜가 아니었다. 주문하지도 않은 나초를 주고 계산서에 포함시키는 것이 불쾌했지만 이곳은 관광지고, 나초의 맛이 감동적이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계산서를 자세히 보니 팁이 이미 포함된 금액이 적혀 있었다. 관광지의 경우 계산서에 팁을 미리 포함해서 요구하는 경우가 있고, 손님 입장에서도 얼마를 주어야 하나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이것이 더 편한 방법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카드를 건네주니 계산을 마쳤는데, 다시 가져온 전표에는 추가 팁(additional tip)란이 또 있다. 추가 팁란을 비워두고 총액을 적고 사인을 해주었다. 참 지독한 관광지다.

미국에 와서 잘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 팁문화다. 보통 금액의 15% 정도를 주면 적당한데, 50달러가 넘으면 20%를 줘야한단다. 그동안은 세금을 포함한 총액의 15%를 주었는데, 알고 보니 세금을 제외한 금액의 15%를 주는 것이란다. 팁문화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이유는 음식값에 서비스 봉사료가 포함되어 있는 한국식 사고에 젖어 있는 탓도 있지만, 딱히 친절한 서비스를 해준 것도 없는 것 같은데 팁을 주어야하나 하는 회의가 들기 때문이다. 물론 얼마를 줘야하나 매번 계산하는 것도 그렇게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몇 해 전에 같이 책을 낸 후 미국에 와서 학술대회에서 우연하게 만났던 펜실베니아주립대학의 강인규 선생의 책[각주:5]에 따르면, 미국에서 팁은 임금의 일부로서 포함되며 심지어 소득세까지 물고 있단다. 팁문화는 소위 고용주가 부담해야할 임금을 소비자가 부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팁 노동자의 저임금은 개선되지 않는 고용주 중심의 불합리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생활화된 미국인들도 팁문화에 대해서 불만이 많다는데 하물며 낯선 한국인의 눈에 비친 팁문화야 오죽했겠는가?

점심을 먹고 어제 오는 길에 지나쳐 온 슬라이드 락을 보러 갔다.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차들이 줄을 서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다 옆에 표지를 보니 입장료가 20달러였다. 어차피 슬라이드 락의 핵심은 흐르는 물에서 슬라이딩하는 것인데 우리는 물에 들어갈 계획이 없었고, 시간상으로 트레킹을 할 수도 없었다. 차 안에서 급하게 회의를 한 결과, 차를 돌리기로 했다. 앨버커키까지 7시간 이상 소요될 것이고, 초행길에 사만다만 믿고 밤길 운전을 하기는 어렸기 때문에 틀라케파케(Tlaquepaque)와 홀리 크로스 채플(Chapel of The Holy Cross)만 보고 떠나기로 결정했다.

틀라케파케의 거리와 상점. 1970년대에 지어졌지만 기존의 나무를 그대로 살리면서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멋스러운 풍경을 얻을 수 있었다. 틀라케파케라는 말 그대로 모든 부문에서 최고의 것이 되었다.

틀라케파케는 멕시코 분위기가 압도적인 미국 남서부의 대표적인 예술마을이자 상가였다. 이곳은 스페인 식민지 건축양식으로 지은 건물과 광장을 중심으로 작은 벽돌이 깔린 보도를 따라서 다수의 갤러리와 상가가 연계된 곳이었다. 틀라케파케는 모든 부문에서 최고의 것이라는 의미라는데, 멕시코 과달라하라 인근 예술마을의 이름이란다. 아치형 골목을 따라가면 어도비 양식의 건물들이 이어져 부드럽고, 건물마다 큰 나무를 가슴에 안고 넝쿨로 세월을 얹고 있는 풍경은 아늑했다. 주변을 거스르지 않고 지나가는 세월을 안으로 수납하는 이곳의 건물들은 고즈넉하고 향기로웠다.

틀라케파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어도비 양식의 건물과 그 중심에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이 보여주는 조화였다. 커다란 나무를 중심으로 어도비 양식의 개성적인 건물이 이어지고, 그 사이사이에 다양한 형태의 예술작품들이 어우러졌다. 거기에 근처 식당에서 풍겨오는 멕시코 음식 특유의 넉넉하고 맵싸한 냄새가 더해져 더할 수 없이 따듯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1970년대 초에 만들어졌다는 틀라케파케가 이렇게 오랜 수령의 나무들 사이에 건설될 수 있었던 것은 원래 이곳의 땅주인의 판매 조건 때문이었단다. 원래 땅주인이 이곳의 나무들을 훼손하지 않는 조건으로 땅을 팔았고, 새 주인이 그 뜻에 따라 나무들을 그대로 둔 채로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판 사람이나 산 사람의 아름다운 뜻이 나무의 세월을 살리고, 건물에 시간을 얹었다. 탁 트인 광장과 건물과 건물 사이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나무, 푸근한 높이에서 깊게 울려오는 종소리, 그 나무와 종소리가 만나는 곳마다 멈춰있는 조각들, 조각들을 따라 조용히 늘어선 작은 입구의 갤러리와 수공예품 가게들의 어우러짐이 틀라케파케의 아우라였다.

Chapel of The Holy Cross의 외부 전경과 내부의 전면 유리로 바라본 세도나

틀라케파케를 둘러보는 동안 간간이 비가 내렸고, 카메라를 셔츠 안에 넣고 건물과 건물 사이를 건너다녔다. 갤러리나 수공예품 가게에 들어가면 비가 그쳤고, 밖으로 나와 이동을 하다보면 다시 비가 내려서 근처 가게에 들어가곤 했는데, 들어가는 가게마다 특색 있는 상품들로 한참을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골목이나 광장에서 비를 피해 뛰어다니는 모습은 우아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문득 자유롭고 즐거웠다. 내리는 비로 인해 달콤한 먼지 냄새가 건물 사이에서 번져왔고, 비가 지나간 숲그늘에선 나른한 상념마저 피어올랐다.

클라케파케를 나와 좀 더 짙은 붉은 기운을 따라가다 보니 홀리 크로스 채플이 나타났다. 레드 락 카운티(Red Rock County)답게 붉은 바위 위에 약 27m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건축한 홀리 크로스 채플은 그 자체로 이미 숙연한 묵상이었다.

1956년에 마거리트 브러스위그 스터드(Marguerite Bruswig Staude)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홀리 크로스 채플은 가톨릭 성당의 외양을 갖추고 있지만 종교와 무관하게 창조주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기도와 묵상의 공간으로 개방하고 있단다. 거대한 자연의 압도 위에 성당을 짓겠다는 발상을 갖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그 발상을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거스르지 않고 이루어냈다는 것이 더욱 놀라운 곳이었다.

사다리꼴 외관의 성당 전면은 빛이 충만할 수 있도록 유리로 하고, 그 중심에 거대한 십자가를 전면화한 단순하지만 분명한 이곳의 디자인은 표면적으로는 도저히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룰 수 없을 듯 보였다. 하지만 성당까지 걸어서 올라가다보니 이 조화의 힘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거대한 붉은 바위들이 가까이 혹은 멀리서 성당을 둘러싸고 있고, 성당에 오르는 램프는 구름다리 형식으로 붉은 바위의 곡선을 따라가고 있었으며, 성당까지 오르면 사방이 탁 트여서 하늘과 바로 맞닿은 자신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보면 성당은 아주 단아하고 견고한 희원(希願)처럼 보였다. 성당의 입구 쪽으로 들어서면 중앙의 십자가와 그 주변의 규칙적인 직사각형 무늬로 구분된 전면 유리를 통과한 빛이 성당 내부를 더욱 경건하게 만들었다. 성당 내부에는 누군가의 영혼을 위해 밝혔을 수많은 작은 촛불이 쉼 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성당으로 올라가는 램프, 성당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과 자연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세도나의 꼴불견으로 욕을 먹고 있는 성당 아래 대저택의 전경 그리고 정상의 모습.

성당 밖으로 나왔을 때 흐린 하늘은 더욱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성당 아래에는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서 있는 대저택이 있었는데, 몹시 눈에 거슬렸다. 세도나의 꼴불견으로 불린다는 이 저택은 성당과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대저택은 집 크기와 화려함 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어 보였는데, 그것을 앞세우고 있는 집주인이 오히려 안쓰러웠다.

시간은 이미 4시를 지나고 있었다. 앨버커키까지의 시간을 생각하면 당장 떠나도 벅찬 시간이었지만, 아내는 미티어 크레이터(Meteor Crater)에 들려보고 싶어 했다. 저녁 먹는 시간을 줄이면 30분 정도만 더 늦어질 것이라고 예상이 되었고, 세계 최대의 운석이 떨어진 곳이라는 말이 무척 매력적으로 들렸기 때문에 미티어 크레이터로 향했다. I-40으로 1시간 30분쯤 달려가니 표지판이 보였다. 표지를 보고 내려섰는데 허허벌판에 길만 앞으로 달리고 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들판 위로 새로 포장한 듯한 도로가 7마일(11)쯤 묻지도 않고 앞으로만 내닫고 있었고 그 위로 비가 조금씩 뿌리고 있었다. 표지판 간격이 점점 좁아지더니 텅 빈 사막의 한 가운데 미티어 크레이터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미티어 크레이터의 7마일에 달하는 진입로

7시에 문을 닫는데 530분을 조금 넘어선 시간에 도착하고 보니 마음이 급했다. 어른 15달러, 어린이 8달러의 입장료를 내고 입장하는데, 표를 받는 사람이 안내 영화를 상영하니 꼭 보란다. 상영 시간을 몰라서 기념품점 할아버지께 여쭈어 보니 6시부터란다. 조금 시간이 남아서 기념품을 보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달려와서 이제 영화 상영을 할 텐데, 늦으면 문이 자동으로 닫히니 빨리 가서 보란다. 할아버지의 느닷없는 친절 덕분에 영화를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미티어 크레이터 전경

영화를 보고 밖으로 나가니 운석공(Crater)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와 운석공의 중심까지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있었다. 미티어 크레이터는 5만 년 전에 50-100m 크기의 소행성이 초속 12로 충돌하여 생긴 운석공으로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베린저 운석공이라고도 불린다고 했다. 과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소행성과의 충돌 시 파괴력이 TNT 25백만 톤(히로시마 원폭의 150)이라고 하는데, 그 파괴력은 운석공의 규모(직경 1,200m, 깊이 170m)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 가족들 사진을 찍어주는데 옆에 있던 미국인이 사진을 찍어줄까 라고 묻는다. 미국에 와서 처음에는 낯선 친절의 의도를 파악하느라 어색한 표정으로 거절하기 일쑤였는데, 이제는 그렇게 물으면 웃으면서 사진을 부탁한다. 물론 사진을 찍어주면 반드시 상대에게도 사진을 찍어줄까 라고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례란다. 사진기를 들고 이곳저곳에서 사진을 찍는 내 모습을 보았는지, 전망대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갈지 말지를 이야기하는데 눈치로 알아차리고 사진 찍기 좋으니 꼭 올라가 보라는 관광객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잘 표시하지 않고, 상대가 요구하지 않으면 굳이 나서지 않는 이곳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고마운 일이었다. 이곳 사람들의 관례화된 친절[각주:6]과 선이 분명한 타인과의 경계는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면서도 서로 돕는 합리적인 문화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지만, ()으로 말하는 우리에게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 낯선 애리조나 사막 한 가운데서 낯선 친절을 만나게 되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운석이 떨어지고 있는데도 자기의 망원경에 갇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과학자를 풍자한 그림이다. 이 그림을 보고 아내도 웃고 나도 웃었다. 아마 같은 의미였으리라.

전시관에는 그곳에서 채취한 운석들과 운석공이 생기게 되는 과정을 재구성해놓았고, 운석공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을 재미있는 방식으로 전시하고 있었다. 기본적인 동선의 유도 외에는 별다른 규제를 하지 않고 오히려 자유롭게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전시장은 다소 소란스럽고 무질서해 보였지만 즐거운 분위기였다. 곳곳에 만져보라는 글귀와 함께 체험을 유도하고, 그것을 거침없이 즐기는 과정이 전시물 이상의 즐거움이었다. 시간은 이미 폐관 시간인 7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고, 바로 출발해도 앨버커키에는 자정 안에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흐린 날로 인해 밖은 이미 어둠이 서서히 내리고 있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전시관 내부에 있는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를 사서 차 안에서 먹으며 가기했다. 사실 서브웨이 참사이후로 우리 집에서 서브웨이는 금기어였다. 서브웨이 참사는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들 학교문제로 분주히 다닐 때 벌어졌다. 유진이 학교에서 서류 처리를 하고, 온 가족이 집 앞 쇼핑센터에 있는 서브웨이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당시만 해도 미국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우울해했던 아내를 위한 배려였다. 아내가 한국에서도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좋아했었기 때문이다. 주문을 하려는데 마침 특별 메뉴가 양도 넉넉하고 다양해 보여서 호기롭게 그것을 주문했다. 특별메뉴를 주문했더니 종업원이 당황한 듯 종이를 들고 뛰어나와서 빵의 종류부터 소스까지 상세히 묻고 들어갔다. 가격은 30달러였는데, 한국에서 가격을 생각하고 그 정도면 큰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온전히 나만의 생각이었다. 음식을 기다리면서 계산서를 본 아내가 내게 화를 냈고, 그 와중에 음식이 나왔다. 쟁반만한 사이즈에 3층 높이로 샌드위치가 나왔다. 이 특별 메뉴는 파티용 메뉴였던 것이다. 음식을 보고 놀란 아내는 벌떡 일어서더니 도저히 저 큰 사이즈를 창피해서 이 매장에서는 먹을 수 없으니 집으로 가자고 했다. 내가 분별없이 지출한다고 화가 잔뜩 난 아내는 샌드위치에 손도 대지 않았고, 나에게 다 먹으라고 했다. 아내가 화가 나 있으니 나는 물론 아이들까지도 눈치를 보면서 자기 양보다 많이 먹었는데도, 야속하게도 커다란 샌드위치는 15조각이나 남았다. 그 샌드위치는 모두 자기양보다 많이 저녁으로 먹고 나서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리 집에서 서브웨이는 금기어 아닌 금기어가 되었다.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이다 보니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참사를 기억하는 나는 빠지면서 아내에게 주문을 하라고 했다. 사실 빵의 종류도 많고, 내용물도 다양하고, 소스도 여러 가지다보니 내 깜냥으로는 주문하기 어려웠다. 아내는 빵 전문가답게, 마치 늘 먹는 음식 주문하듯 주문을 하고, 입장권 뒤에 있던 할인권으로 할인까지 받아냈다. 역시 주문은 아내의 몫이다. 이럴 때보면 아내는 마치 대학에서 주문을 전공한 사람 같다.

저녁을 먹으면서 달리다보니 날이 조금 개는 듯 아직 약간의 해가 남아 있었다. 해가 남아 있는 동안 더 많이 달려야 어둠 속에서 달릴 거리를 줄일 수 있다는 생각에 부지런히 달렸다. 평소보다 바람이 조금 세다는 느낌이었는데 멀리서 회오리바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행히 규모가 크지 않았지만 두어 개의 회오리바람이 종잡을 수 없이 대지를 훑고 있었다. 이 황량한 대지를 건너오는 회오리바람은 우리가 비록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 1900)의 도로시는 아니었지만 낯선 오즈의 세계로 데려갈 듯한 기세였다.

회오리바람이 전혀 낯설지 않을 듯한 황량한 들판 저 멀리 낮게 깔린 구름 사이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가 달리는 길옆으로는 마른 회오리바람이 거칠게 부는데 들판 저 앞에서는 비가 세차게 내리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어둠은 순식간에 사위를 감쌌고 천둥을 동반한 번개가 영화처럼 내리고 있었다. 마치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3D 킹콩 어트랙션을 체험하고 있는 듯 지극히 비현실적인 장면이 실사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렇게 어둠이 내리고 헤드라이트 불빛만 어둠을 가를 뿐, 세계는 이미 무거운 어둠에 포획되어 있었다.

아리조나의 회오리바람()은 캔자스의 그것만은 못해도 도로여행자를 위협하기에는 충분했다. 대평원에서 만나는 번개(, 이 사진은 그랜드 캐니언 여행에서 처제가 찍은 것임). 경이와 두려움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앨버커키는 이름처럼 낯설고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도시 같았다. 비는 점점 세차게 내리고 그럴수록 어둠은 더욱 짙어만 갔다. 가로등을 기대할 수 없는 미국 고속도로에서 기댈 수 있는 것은 앞서 달리고 있는 대형트럭뿐이었다. 시원한 불빛으로 앞을 밝혀주는 대형트럭을 따라가는 것은 겉으로는 안전해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대형트럭이 보이지만 대형트럭은 우리가 잘 보이지 않고, 전방의 상황도 잘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어두웠고, 1차선의 승용차들에 비해 대형트럭은 상대적으로 저속으로 운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야간 운전이 두려운 나로서는 평소보다 조금 더 안전거리를 유지하면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고속도로를 340마일(544)정도를 계속 달리다보니 사만다도 조용했고, 이따금 지나치는 도시들의 불빛만 다가왔다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차 안에서 다소 지루해진 우리는 아이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다. 순간순간이 경이였고, 날마다가 기적이었던 아이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언제나 즐거웠다. 아이들도 귀를 쫑긋하고 기억에는 없지만 자기가 일구었다는 그 시절의 이야기 듣기를 좋아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화장실 때문에 쉼터에 정차를 했다. 밖에서는 몰랐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대형 트럭을 위한 쉼터였다. 커다란 주차장에는 대형트럭들만 주차해 있고, 멀리 화장실 불빛만 보였지만 환한 가로등 덕분에 오히려 안전하게 느껴졌다.

앨버커키에 거의 도착했을 때, ‘Route66 카지노의 불빛에 눈이 부셨다. 상당한 규모의 카지노로 보였는데,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Route66 카지노임을 알리고 있었다. 미국인들의 향수와 도박이 결합하여 역사가 팬시화 되는 현장이었다. 할리우드의 수정주의 서부극처럼 역사는 맥락 없이 다시 팬시화 되고 있었다. Route66은 이제 더 이상 ‘The Mother Road’가 아니라 단지 싸구려 브랜드일 뿐이고, 역사가 아니라 팬시상품일 뿐이었다. 추억과 향수를 파는 것이 나쁠 것은 없는 일이지만 그 안에 역사가 함께하지 못하는 일은 참으로 허망하고 공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횡단여행의 출발동기였던 Route66이 이제 경로만 남고 역사와 실체는 사라진 꼴이었다. 이것이 오늘 만난 세 번째 브로큰 애로우였다.

애초에 우리의 횡단여행이 미국의 맨얼굴과 속살을 보기 위한 것이었으니 오늘 만난 세 개의 브로큰 애로우는 차라리 행운이었다. 횡단여행의 전반부를 이끌어줄 것으로 기대했던 Route66이 실망스럽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Route66을 따라 달려갈 것이다. 우리가 비록 존 라세터나 존 스타인벡은 아니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여행에서 그랬듯이 Route66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여행을 디자인할 것이다. 존 라세터가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 그 자체에서 의미를 찾았듯이, 존 스타인벡이 절절한 현실과 고독한 자신을 발견했듯이…….

앨버커키 공항 부근 쉐라톤 호텔에 도착한 것은 자정을 한참 넘기고서였다. 세도나를 출발해서 413마일(660)을 달린 것이다. 체크인하는 카운터 직원이 너무 늦었다며 농담을 했지만 대꾸할 힘조차 없었다. 이번 횡단여행 중 가장 좋은 숙소인 쉐라톤 호텔에서 정작 우리는 머물 시간이 그리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럴수록 앨버커키의 어둠은 더욱 견고해질 뿐이었다.

 

  1. 그래서 미 국방부는 브로큰 애로우를 핵무기 관련 중대한 사고, 즉 핵무기의 허가 없는 발사, 핵무기의 분실이나 폭발, 방사능 오염과 같은 핵무기 사고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하기도 한다. 오우삼 감독의 <브로큰 애로우>(1996)는 이와 같은 중대한 핵무기 사고를 다루고 있다. [본문으로]
  2. 인디언보다는 아메리카 원주민이라는 단어가 보다 객관적인 용어일 것이다. 인도에 도착한 줄 알았던 콜롬버스가 이곳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는 인디언은 타자로 대상화된 명칭이다. 주체인 백인들의 시각에서 오인한 대상을 오인한 채로 부르는 것은 철저히 타자화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메리카 대륙에 원래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아메리카 원주민이라는 중립적인 용어가 더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인디언이라는 말을 현재 관용적으로 써오고 있기 때문에 의미의 혼선을 줄이기 위해서 인디언으로 쓴다. [본문으로]
  3. 수정주의 서부극(revisionist western) 등에서 인디언에 대한 죄의식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미국 정부는 아직도 보호구역 내에서 알코올중독자가 되거나 카지노 산업의 하수인으로 살아가는 현실의 문제는 철저히 외면되고 있다. 세계의 인권을 운운하는 미국이 숨기고 싶어 하는 또 하나의 모순된 얼굴이 아닐 수 없다. [본문으로]
  4. 그래서인지 기아 자동차의 카니발이 미국에서는 세도나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대중적인 지지를 받는 세도나의 긍정적인 이미지 때문이리라. [본문으로]
  5. 강인규,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 인물과 사상사, 2008. [본문으로]
  6. 여기서 말하는 ‘관례화된 친절’은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도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짓는다거나. 인사를 하는 모습이라거나,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뒷사람을 위해서 기다려주는 모습,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제안을 하는 모습들을 말한다. 이것은 우러나오는 친절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관례화된 예절의 일부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함께 사회를 이루고 살기 위한 최소한의 예절일 뿐이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누군가를 위한 특별한 친절은 아닌 것이다. [본문으로]
블로그 이미지

홑섬

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