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8월 10일 보스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밤새도록 그렇게 쏟아지던 비가 그쳤다. 비는 문득, 간단하게 그쳐버렸다. 밤새도록 사위는 온통 빗소리뿐이더니 비가 그친 아침은 온통 초록이다. 비가 내리고 어두워서 어제 밤에는 몰랐는데 숙소는 유난히 나무가 많은 숲에 포옥 안겨 있었다.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숲에 안겨서 그렇게 숲과 더불어 나이를 먹고 있었다. 시간이 데려간 것은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뿐이라고 생각하니 초록의 숲길은 오히려 적막했다.
우리도 서두른다고 서둘러 숙소 식당으로 갔는데 벌써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어제 본 중국 학생 관광단인 줄 알았는데, 그들 사이에서 얼핏얼핏 우리말이 들렸다. 중국 학생 관광단 말고도 개인적으로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모두들 중고생 자녀들과 함께인 가족들이었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따듯한 음식이 고마웠다. 무엇보다 숙소 주변에는 숲만 있을 뿐 딱히 식당을 찾을 수도 없었다. 캠브리지까지 나오는 길은 1차선이 한참 이어졌고, 도로가 2차선으로 넓어진 곳에서 차들은 그 이상 늘어나서 정체가 심했다. 예상치 못한 정체덕분에 길가에 오래된 주택들과 낡은 건물들을 천천히 지켜볼 수 있었지만, 시간은 예상보다 40분 이상 지체되고 있었다.
MIT(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인근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조금 걸어가니 도서관이 보였다. 마침 그곳에서 한국인 가이드가 안내를 해주고 있었다. 우리도 그를 따라서 도서관부터 본관 앞 잔디마당까지 차분히 설명을 들으며 따라 다녔다. 그런데 본관 앞에서 열심히 설명하던 가이드가 다음 일정을 이야기했다. 차에 올라서 점심을 먹은 후에 하버드로 간단다. 우리는 MIT에서 제공하는 가이드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한국 단체 관광객들을 인솔하고 투어 중이던 가이드였던 것이다. 순간, 우리 가족은 머쓱해서 뒤로 빠지면서 우리끼리 한참을 웃었다.
MIT에서 발견한 김우중 회장의 사진과 거북선 모형
도서관을 돌다보니 눈에 익은 사진이 보였다. MIT 기계공학과에 많은 기부금을 낸 8명의 사진이었는데, 그 중에서 전 대우그룹 총수였던 김우중 회장 부부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을 보고 있으려니 가이드가 정보 하나를 더 준다. 그 사진 속 주인공들의 공통점은 거액 기부 이후에 모두 망한 기업가들이란다. 김 회장이 MIT에 얼마를 기부했는지는 몰라도, 차입경영으로 무너진 대우를 기억하는 내게는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돈이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대우사태로 인하여 부실해진 은행을 세금으로 매워주었으니 그것은 국민의 고혈(膏血)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씁쓸했다. 대우의 몰락 이후 대우는 물론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겪어야했던 고통들은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가 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읽으며 가슴 뛰는 경험을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느껴야 했던 배신감과 열패감도 지독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우리나라 샐러리맨의 신화가 아니었던가? 자신만 똑똑하면 언제든 불끈 일어서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 자기 근면과 성실에 대한 낙관을 대표하던 그가 무너진 것은 대우라는 그룹이 무너진 것 이상의 충격이었다. 그것 때문인지 낯선 나라 대학 도서관 벽에 걸린 그의 자랑스러워야할 사진이 안쓰럽고 부끄러웠다. 더구나 거액을 기부 했던 사람으로 칭송되다가 실패한 사업가로 기억되는 그의 모습은 더없이 아이러니했다.
도서관 안을 둘러보다 선박 전시관에서 거북선을 발견했다. 주변에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한국인들이라면 거북선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닌데, 굳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환한 얼굴을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찍고 싶은 것이 거북선인지 MIT 안에 거북선이 있다는 사실인지 모호했다. 거북선을 우리 스스로 자부하며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MIT가 인정해서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아닐지…내 생각은 또 삐딱해졌다.
전시장의 거북선을 보면서 김훈의 《칼의 노래》가 떠오른 것도 그러한 맥락이리라. 이 작품을 수사(修辭)만 앞선다고 혹평하는 이도 있지만, 대상에 대한 온전한 제압 없이 나올 수 있는 수사가 어디 있겠는가? 수사가 빼어나다는 말은 그만큼 대상에 대한 파악이 진지하고 절절했다는 말이다. 인간적으로 아파하고 고뇌하는 인간 이순신을 그려낸 김훈의 이 빼어난 작품을 읽으면서 나를 아프게 했던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그의 상황이었다. 무능한 임금과 조정대신들을 생각하면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겠지만, 적의 칼과 배고픔에 억울하게 죽어가는 백성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상황, 더구나 그 둘이 분리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가 견뎌낼 뿐 표현할 수 없었던 고뇌는 좀처럼 가늠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한 상황이 그의 시대에서 끝났다고는 말할 수 없는 현재이고 보면, 낯선 나라의 전시장에서 만난 조그마한 거북선 앞에서 결코 밝게만 웃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MIT 본관과 도서관
입학식과 졸업식을 진행하다는 잔디 광장을 사이에 두고 MIT 본관과 찰스 강이 마주보고 있었다. MIT를 알게 된 것은 중학생 시절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읽으면서부터였을 것이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소개된 MIT 졸업생들의 기행(奇行) 기사는 서울 변두리 중학생이었던 내게 너무도 신나는 충격이었다. 졸업식을 앞두고 기숙사 방안에 차를 옮겨놓는다거나 돔 위에 경찰차를 올린다는 기사는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당시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The Paper Chase)이라는 외화시리즈가 인기였는데, 밤샘 공부를 하고 가서 킹스필드 교수의 질문공세에 쩔쩔매면서도 자신의 의견으로 대답하는 하트의 모습만큼이나 그것은 대견한 일탈이고, 짜릿한 특권이었다. 그러한 기행의 현장이 본관 돔이란다.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학생들이 졸업을 앞두고 경찰 순찰차, 황소 등 특이한 것들을 돔에 올렸다는 사실이다. 경찰 순찰차를 헬기로 내렸다고 하니 올린 기발한 방법이 자못 궁금하다. 돔 위에 이러한 것들을 올리는 비법은 4학년들에게만 전수가 된다고 하니 재미있는 전통임에 틀림이 없다. 4년 동안 죽기 살기로 공부하고 졸업을 앞두고 그 정도의 이벤트는 귀엽기까지 했다. 다만, 올리기는 학생들이 올리는데 내리는 것은 교직원들이 내리려니 어려움이 많단다. 천재들이 올린 것을 보통사람인 교직원들이 내리려니 그 어려움이야 오죽하랴? 졸업식에서 본관 앞에 올라가 있는 경찰 순찰차를 보는 일은 또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는가? 물론 그것이 황소여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과 손(Mens et Manus) 조형물 앞에서 어색한 아이들. 아이들에게 MIT방문이 얼마나 맥락 없고 어색한 아빠의 욕심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다.
도서관과 학생회관 사이에 있는 ‘마음과 손’(Mens et Manus) 조형물 앞에 아이들을 세우고 보니 영 어색했다. 그러고 보니 MIT를 돌면서 아이들 반응이 시큰둥했다. 효진이야 어려서 그렇다 해도 유진이의 반응은 다소 의외였다. 이유는 아이들이 MIT를 전혀 몰랐고, 별다른 관심 없는 분야의 학교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보고 듣는 것에서 감흥이 생길 리 만무했다. 숙소에서 만났던 중국 학생 관광단이 생각났다. 아마 그들도 이곳을 다녀갔거나 다녀가리라. 세계에서 손꼽히는 명문 대학을 보여주고, 아이들이 그곳에 진학하길 바라는 마음이야 부모 된 사람으로서 탓할 일은 아니지만,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는 기대는 부모만의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문득, 이곳에 왜 왔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소박하게 세계적인 대학이니 보고 느끼라는 마음이었는데, 마음 저 밑에는 더 큰 욕심이 있었나보다. 아이들에게 그런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안쪽으로 더 보아야 할 것이 많이 남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아서 시간을 핑계로 그만 보기로 했다. 바로 보스턴 시내로 들어가서 시내를 볼까 생각하는데, 그래도 여기 캠브리지까지 와서 그냥 가는 것도 어색한 동선이었다.
MIT에서 하버드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하버드까지 가는 길은 아침에 우리가 지나온 길에서처럼 오래된 건물들과 주택들이 소박하게 모여 있었다. 주차를 하기 위해 학교 근처를 몇 바퀴 돌면서 보니 미국 중소도시의 주택 밀집지역처럼 학교를 중심으로 밀집되어 있는 주택들이 정겹게 보였다. 겉모습은 조금 다르지만 우리 학교 부근의 원룸이나 하숙 밀집 지역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남의 대학을 보면서 문득 우리대학이 그리워졌다.
그렇게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서 한참을 헤매다가 학교에서 조금 먼 곳에 코인 주차를 했다. 아내는 어떻게 알았는지 안내 센터에서 ‘셀프 서비스 투어 가이드’를 구입했다. 영어 버전을 우리말로 번역했는지 다소 어색한 표현이 많이 보이기는 했지만, 무척 유용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그것을 들고 하나하나 확인하듯이 하버드 곳곳을 둘러보았다. 방학 중임에도 많은 학생들이 오가고 있었고 그보다 더 많아 보이는 관광객 투어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래드클리프 캠퍼스까지 다 돌아보지는 못했으나 건물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아우라는 압도되기에 충분했다.
하버드 야드에서 책을 보는 학생
하버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하버드 야드에 의자 두 개를 붙이고 책을 읽고 있는 학생의 모습이었다. 어제 비가 내려서 볕이 그리웠는지, 관광객들로 소란스러운 광장에서 소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책을 보고 있었다. 처음에 미국에 와서 놀랐던 것 중에 하나도 학생들이 아무 곳에서나 공부를 한다는 것이었다. 노트북을 연결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책과 노트북을 펴고 공부를 하고, 심지어 노천광장에 놓인 탁자에 앉아서도 공부하는 모습은 내게는 낯선 모습이었다. 여러 개의 도서관에 좌석이 꽉 찬 것도 아닌데 야외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앉아서 책을 보고 공부하는 모습은 처음에는 무척 낯선 모습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좌석과 좌석 사이에 칸막이가 세워진 독서실 같은 분위기의 도서관에 앉아야지만 공부가 되는 것은 또 아니지 않는가? 어디든 자신이 편안하게 집중할 수만 있다면 장소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물론 이 말이 하버드 대학 도서관이 비어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버드의 중앙도서관에 해당하는 와이드너 도서관
하버드의 중앙도서관에 해당하는 와이드너 도서관(Widener Library, 1914)은 80㎞에 달하는 서가와 350만권 이상의 장서로 유명하다. 와이드너 도서관은 1912년 타이타닉호에서 사망한 하버드 졸업생 해리 엘킨스 와이드너를 기리기 위해 그의 어머니가 거금을 기부하여 1914년 완공되었다고 한다. 와이드너 도서관의 내력담은 필라델피아의 거부, 하버드 졸업생, 희귀서적 수집가, 타이타닉호 침몰로 인한 사망, 어머니의 기부 등 극적인 서사의 좋은 구성요소를 지녔다. 더구나 ‘타이타닉호 침몰’은 두 차례 영화로 제작될 정도로 극적인 구조를 이미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와이드너의 어머니가 하버드 졸업생들이 자기 아들과 같은 불행을 겪지 않도록 졸업 전에 반드시 수영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한다는 기부조건을 걸었다는 것이다. 1920년 이후 실제로 하버드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한 수영 테스트가 있었으니 상당히 그럴듯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란다. 수영 테스트는 하버드만 했던 것도 아니고, 1차 세계 대전 시기에 전 국민에게 수영을 보급했던 일과 관계된 것이란다. 결국 와이드너 도서관에 얽힌 극적 서사가 브랜드가 되어, 추가적인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됨으로써 스스로 이야기를 증식하고 있는 것이다.
남북전쟁에 희생된 하버드 출신을 기리는 메모리얼 홀
메모리얼 홀(Memorial Hall, 1878)은 남북전쟁에 참가해 전사한 졸업생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건물이다. 남북전쟁에서 전사한 136명의 이름이 건물의 양쪽 벽에 새겨져 있다. 이 건물을 보면서 안소니 밍겔라 감독의 <콜드 마운틴>(Cold Mountain, 2003)이 떠오른 것은 왜 일까? 남북전쟁의 비극적인 상황을 중심으로 조명하면서 인종 문제뿐만 아니라 계급의 문제까지 접근했던 이 작품은 강의 시간에도 자주 언급할 정도로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다. 계급 차이에 근거한 상반된 두 캐릭터인 아이다 먼로(니콜 키드먼 분)과 루비(르네 젤위거 분)가 정서적 연대를 이루어가는 모습과 전쟁의 폭력과 야만을 거부하며 사랑하는 여인에게 돌아가는 오디세우스를 연상시키는 인만(주 드로 분)의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 잊히지 않은 작품이다. 그토록 아름다운 산야에서 인간의 가장 마지막을 보여줌으로써 더 처절하게 다가왔던 이 작품의 후반부에 눈 내린 협곡에서 인만을 부르던 아이다의 그 절절한 음성은 오랫동안 귀울림을 만들기도 했었다. 메모리얼 홀을 보면서 <콜드 마운틴>을 떠올리는 것을 보니 오늘도 내 생각은 산만하고 종잡을 수 없다.
MIT보다 하버드에 관광객들이 더 붐볐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별 상관도 없는 하버드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세계 최고의 대학이라고 이야기 하는 곳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겠지만, 그렇다고 MIT처럼 하버드는 건물이나 도서관 등을 개방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들의 교육 노하우를 공개하는 것도 아니고, 설사 공개한다한들 그것을 그 짧은 시간에 알아갈 수도 없는 것이고 보면,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유달리 가족 단위 관광객이 많은 것에 답이 있을 것이다. 미루어 집작하건데 세계 최고의 대학을 보여줌으로써 동기를 부여하여 하버드에 진학하거나 비록 진학은 못하더라도 건강한 자극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부모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하버드를 방문하는 것은 꼭 하버드가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수준의 좋은 학교에 진학하기를 바라는 소망 때문이리라. 그래서인지 하버드 유니버시티홀 정면에서는 웃지 못 할 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존 하버드 목사의 동상. 그의 구두를 만지면 하버드에 갈 수 있다는 속신으로 인하여 구두만 닳았다.
설립자인 존 하버드(John Harvard) 목사 동상의 구두를 만지면 하버드에 진학한다는 속신(俗信) 때문에 그것을 만지려고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대부분 그 옆에 서서 구두에 손을 얹고 멋쩍은 표정으로 사진들을 찍고 있었다. 속신에 대한 믿음보다는 재미있는 속신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그런데 속신의 대상이 왜 하필 구두였을까? 구두가 동상의 가장 밑에 있어서 사람들이 쉽게 만질 수 있는 부분이어서 선택되었겠지만, 구두가 일반적으로 세속적인 명예, 부, 굴레, 자기정체성 등을 상징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절묘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세계 최고라는 압도적인 칭호에 압도되지 말고 정말 하버드에서 보아야할 것은 다양성의 존중과 배려, 역사와 전통의 보전, 학문적 자유와 학교 운영의 자율성 보장, 체계화된 후원 시스템, 다양한 방식의 학생 선발 방식 등이 아니었을까? 멋스럽게 세월을 입고 있는 그레이스 홀(Grays Hall, 1863)과 매티우스 홀(Matthews Hall, 1872)을 굳이 신입생 기숙사로 배정하고, 그 옆으로 총장을 비롯한 주요 보직자들이 근무하는 소박한 건물에 눈이 가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리라.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세계 최고 대학이라는 수사를 신뢰하지 않는다. 어떤 기준으로 누가 언제 평가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학교나 나라별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기준이라는 것이 이미 명문화된 대학의 성공 요소들에 근거한 것이라고 보면 기존의 서열 체계를 은밀하게 확정하거나 재생산 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몇몇 언론사들의 대학 평가는 공정성은 차지하고서라도 대학교육의 지향점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나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것이어서 대학교육의 파행을 부추기는 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언론사가 얼마나 오랜 시간 깊이 있는 탐구를 통해 대학을 평가하는지 알 길이 없다. 더구나 그들의 평가가 어떠한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밝히고, 그것이 교육에 어떠한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할 것인지 설득하고, 그것에 대하여 객관적인 검증을 수행한 평가인지 우리는 이제 되물어야 한다. 몇몇 언론사는 해외의 기존 평가기관과 공동으로 대학 평가를 하는 경우도 늘고 있는데, 과연 그들의 평가지표가 얼마나 우리 현실에서 설득력을 지니는 것인지 냉철하게 돌아봐야만 한다. 학교별 특색이나 전공별 차별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인 평가 지표와 평가 자료를 준비하느라 수많은 시간을 허비해야하는 비효율성 그리고 학교별 서열 외에 어떤 정보도 주지 못하는 결과 등의 모순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대학평가를 이제는 과감하게 거부해야할 것이다. 최근 국내 언론사들도 앞 다투어 대학평가를 시행하고 있는데, 대학평가 발표 전후로 해당 언론사에 여러 대학의 전면광고가 실리는 것을 보면, 우리가 대학 평가를 거부해야할 또 하나의 이유를 알게 된다. 영어전용강의 시수 등을 평가항목에 삽입함으로써 전공, 과목 등의 특성은 물론 그 성취 정도와 무관하게 영어전용강의가 강요되고 있는 현실은 슬픈 부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요 언론사의 평가 기준을 따라가느라 기형적인 파행을 거듭하는 대학의 현실도 부조리하기는 마찬가지다. 세계에서 몇 위, 한국에서 몇 위를 따지기 전에 자기 대학만의 분명한 교육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차별화된 교육을 모색하는 것이 대학의 본 모습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히려 거꾸로 자기 대학만의 교육방식과 교육목표를 가지고 세계 대학을 평가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버드 앞 연경, 양이 많았던 볶음국수, 결국 남은 것들은 저녁이 되었다
하버드를 보고나니 점심때였다. 학교 바로 앞에 ‘연경(燕京)’이라는 중국집에 들어갔다. 밖에서 보기보다 규모가 컸고 손님도 많았다. 간신히 자리를 잡고, 오클라호마시티에서 우리에게 위안이 되었던 볶음국수가 생각나서 볶음국수 2개, 볶음밥, 만두를 시켰다. 주문한 음식은 생각보다 많았다. 우리는 1인분씩이라고 생각하고 시켰는데 나온 양을 보니 2인분은 족히 넘는 양이었다. 그러면 우리가 시킬 때 양이 많다고 미리 이야기해주면 좋았으련만, 이 친구들 필요할 때는 입을 닫는다. 음식은 오클라호마시티의 그 집에 비해 좀 더 미국화 된 맛이었지만 우리를 위로해줄만한 맛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거리가 보이고, 왁자한 실내 분위기가 졸업식 날 학교 앞 중국집 분위기가 나서 혼자서 웃었다. 모처럼 배부른 점심을 먹고 났지만 음식이 많이 남아서 싸달라고 했더니 세 개의 상자에 담아다 주었다. 덕분에 그것으로 저녁까지 먹을 수 있었다.
건국 시기 복장을 한 프리덤 트레일 가이드와 도로에 새겨진 문장
점심을 먹고 캠브리지에서 보스턴으로 들어갔다. 효진이가 꼭 해보고 싶다던 프리덤 트레일(Freedom Trail)을 하기 위해 보스턴 코먼(Boston Common)으로 갔다. 보스턴 코먼은 1634년에 문을 연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이다. 프리덤 트레일은 16개의 건국 사적을 돌아보는 4㎞ 답사인데, 보스턴 코먼을 시작으로 보도에 새겨진 붉은 라인을 따라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걷는 코스다. 미국 건국 시기의 복장을 한 가이드는 정해진 시간에 티켓(어른 13.65달러, 어린이 7달러)을 가져온 사람들을 모아서 투어를 시작한다.
주의사당(상), 킹스채플(중), 올드 사우스 집회소(하)
미국 건국 시기의 복장을 한 원로 가이드는 가는 곳마다 열정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마이크 없이 20명 가까운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 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극적인 묘사에 연기까지 해가면서 역사의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가곤 했다. 이민자의 나라에서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을 할까 궁금했는데, 투어는 생각보다 진지했다. 우리 일행 중에 영국인 가족들이 있었는데, 미국의 독립과정과 영국의 만행 등에 대하여 가이드에게 질문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 무척 진지하게 투어 내내 계속되었다. 가이드는 연배가 지긋하신 분이었는데도 이동 중에도 우리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때론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모습이 무척 열정적으로 보였다. 효진이는 지난 학기에 학교에서 보스턴과 관련된 미국의 역사를 배우고 왔기 때문에 투어 내내 맨 앞자리에서 주의 깊게 듣고는 우리에게 설명해주면서 뿌듯해했다.
프리덤 트레일 코스는 다운타운의 거리 사이에 형성되어 있어서 가이드를 따라 걷다보면 현재 보스턴의 거리도 함께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적들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고, 현재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옛 주의사당’처럼 지금은 다른 용도로 변경된 것도 있었다. 조금 아쉬웠던 것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존 행콕, 사무엘 아담스, 그리고 보스턴 학살사건의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는 ‘그래너리 묘지’는 관리와 정비가 부족해서 황폐한 느낌마저 들었다. 가이드를 따라 돌면서 아내와 나는 미국의 역사보다 고풍스러운 도시를 천천히 산책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마음은 한결 여유로워졌다.
프리덤 트레일을 걷는 내내 가이드는 미국 독립의 정당성과 애국자들의 희생과 용기 그리고 애국심에 대해서 아주 극적으로 설명하며, 영국의 역사적 과오를 지적하기도 했다. 보스턴 학살과 같은 영국의 만행을 상기시키고 그 과정에서 시민들은 얼마나 용기 있는 행동을 했는지 설명했지만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그것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독립전쟁 이후 미국인들이 보여준 비인간적이고 잔혹했던 노예제도나 서부개척이라는 명분으로 인디언과 멕시칸들에게 자행했던 폭력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러한 역사의 현장을 횡단여행 내내 눈으로 확인하며 달려오지 않았는가? 그러한 역사적 과오를 진정한 반성 없이 은폐해 버림으로써 현재에도 세계 곳곳에서 또 다른 과오를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아이들을 데리고 고궁이나 경주를 다녀오기는 했지만 이렇게 상세한 설명을 들으며 여유 있게 걸어본 기억이 없다. 경복궁에 몇 차례 데려간 적이 있었는데 둘 다 어릴 때였고, 크고 나서는 함께할 시간을 내지 못했다. 이제 아이들도 커서 함께 답사를 해도 좋을 나이가 되었다. 다만, 귀국하면 고등학교에 가게 될 큰아이와 다시 분주해질 내 일상을 생각하면 함께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시간이 남아서가 아니라 시간을 내서라도 다녀야할 듯하다. 경복궁을 보러가면서 허균의 《고궁산책》을 읽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의 의미를 새삼 절실하게 느낀 적이 있었다. 그 이후 학생들에게 책을 읽게 하고 경복궁을 다녀오게 하는데, 보는 눈들이 달라져왔다. 이제 아이들도 이 책을 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연구실에 있는 책을 아이들 책꽂이에 먼저 가져다주어야 할 듯하다.
프리덤 트레일은 퍼네일 홀에서 끝났다. 퍼네일 홀 앞에는 사무엘 아담스의 동상이 있는데, 우리에게는 애국자가 아닌 맥주상표로 알려져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 옆으로 노스마켓(North Market), 퀸시마켓(Quincy Market), 사우스 마켓(South Market)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퍼네일 홀 마켓플레이스(Faneuil Hall Marketplace)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멋스러운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고, 사람들은 축제에 온 것처럼 모두들 즐거운 모습들이었다. 마켓이 다 마켓이지 뭐 별다를 것이 있겠느냐고 생각했는데, 세 개의 마켓이 어울려 있어서 그런지 흥겨운 분위기에 같이 흥겨워지는 곳이었다. 아내는 퀸시마켓에서 먹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처음 와보는 도시인데 아내는 이런 정보를 도대체 어디서 얻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참 잘 안다. 마이크스 패스트리 샵에서 파는 ‘초코릿 칩스 카놀라’가 그것이었는데, 가서 보니 참 먹음직스럽게 생겼다. 그것을 하나 사서 나누어 먹으며 걷다보니 부두였다.
퍼네일 홀과 사무엘 아담스 동상(상), 퀀시 마켓 광장(중), 초코릿 칩스 카놀라(하)
마켓과 부두 사이에 시위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Jobs Not Cuts”라는 피켓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는데, 잔디밭에서는 시위대의 일원들로 보이는 브라스밴드가 연주를 하며 시선을 끌고 있었다. 연방 정부와 주 정부의 예산 문제와 경기 침체로 인한 일자리 창출 실패로 인하여 청년 실업의 문제가 이곳에서도 매우 심각한 수준인 것은 분명했다.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세계화, 시장경제의 극단화된 양극화, 불공정성의 문제가 사회적 합의와 수긍 가능한 수준을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의연한 침묵으로 일관하는 정부에 대한 분노가 터진 것이었다.
Jobs Not Cuts을 들고 시위하는 여성
그런데 이곳의 시위를 보면 참 온건하다. 피켓을 들고 오고가거나 길목에 피켓을 들고 서 있는 정도였다. UCI에서 시위를 하는 것을 보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들의 의사 표시만 할뿐 우리식의 시위는 보지 못했다. 시위로 의사 표시하는 것이 자유이듯 침묵하는 것도 자유라는 그들의 생각이 반영된 모습이었다. UCI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하는 대중 집회를 보고 놀랐던 적이 있었다. 서로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고, 그 주변에서는 발언을 경청하면서 피켓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고, 자유롭게 그 주변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참여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몹시 신선했다. 캠퍼스 폴리스 두어 명만 혹시 있을지 모를 사고에 대비하여 주변에서 지켜볼 뿐, 자유롭게 무척 조용한 가운데 진행되는 집회였다. 싸우자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의견을 개진하고, 대중들을 설득하고,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시위도 자신들의 주장이 무엇인지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데 중심을 두고 있었다. 이들의 시위가 지니는 파괴력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신선한 것만은 분명했다.
저녁이 다되어가는 부두는 조용했다. 크루즈 티켓을 파는 곳도 있었지만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바다는 살아있는 것들의 호흡을 보여주는 듯 규칙적으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부둣가 벤치에 앉아서 웃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 평화로워 사진을 찍으려고 했더니 옆에 있는 사람이 찍어주겠단다. 한국에서 가족끼리 동네 산책하다가 아이들 머리핀을 사고 붕어빵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처럼 여유 있고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가 퀸시마켓 광장을 통과해서 돌아오는데 분위기가 마치 마을 축제 같았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가에 늘어선 보스턴의 시간들은 아주 따듯한 기억처럼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숙소에 다가갈수록 숲이 많아졌고, 숲이 늘어나는 만큼 주변의 소리는 숲으로 숨어들어갔다. 소리가 숨어버린 만큼 주위는 어두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