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루먹은 말의 멍에 혹은 꽃과 열매의 시적 의지
박기수(문학평론가, 한양대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운화(雲華), 꽃과 열매의 시적 의지
운화(雲華)의 메타포(metaphor)는 절묘한 떨림이다. 옛사람들이 차나무꽃을 운화라고 불렀다는데, 차나무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데에는 1년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열매는 다음해에 피는 꽃과 같이 매달리는 시적인 상봉을 하게 된다고 한다. 꽃과 열매 사이의 1년이라는 오롯한 시간 차이가 동시에 매달려 시작과 다됨을 무한 반복하게 되는 둘 사이의 부단한 긴장, 그것을 생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일이다.
김용범의 시에서 차나무꽃의 부단한 긴장, 꽃과 열매가 함께 이루어내는 시간의 섞임과 부단한 변화의 의지를 보는 일은 경이로운 기쁨이다. 변화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원초적 특성이며 살아있음의 다른 이름임을 1974년 등단 이후 지속적인 실험과 성찰을 통해 구현해온 김용범의 시에서 운화는 ‘변화’이며 동시에 ‘변화의 과정’이고 무엇보다 ‘정체(停滯)를 거부하는 강한 의지’의 세련된 메타포이기 때문이다. 이미 열 세권의 시집을 내고 780여 편의 시를 발표한 시력(詩歷) 40년의 시인에게서 또 다른 실험을 발견하는 즐거움이나 자아와 타자에 대한 심층의 성찰 그리고 그것을 다양한 층위의 구현된 언어적 충돌과 긴장을 만나는 일은 차라리 경이로움이다.
등단 이후 40년 동안 김용범의 언어는 언제나 젊고 싱싱했다. 특유의 명징한 언어와 빈틈없는 레토릭(rhetoric)으로 세계를 향한 물러서지 않는 의지를 흐트러짐 없이 단단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면서도 가까이는 일상과 예술을, 멀리는 고구려의 거침없고 건강한 남성적 기상까지 그의 관심은 거침이 없었고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그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자유와 사랑으로 수렴되는 것들이었다. 더구나 시에서 출발한 김용범의 글쓰기는 극시, 창극, 오페라 리브레토, 장편소설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거침없이 이루어져왔다. 어느 것 하나 독립적인 전문 장르가 아닌 것이 없건만 거침없이 그 모든 장르에서 자유롭게 그만의 예술세계를 확장해왔다. 이와 같은 김용범의 시력을 섬세하게 읽어온 사람으로서 그가 열네 번째 시집 《열개의 멍에를 짊어진 비루먹은 말에 대한 시-노마십가(駑馬十駕)》(이하 노마십가)에서 보여준 실험과 성찰 역시 자못 기대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김용범의 이번 시집은 시인이 평소 탐닉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즐기고 있는 3취(趣)와 3향(香), 즉 차(茶)와 책(冊)과 예(藝)를 세 줄기로 해서 1부 다향(茶香), 2부 서권향(書卷香), 3부 예향(藝香)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시집은 차로 우려내는 내적 성찰을 따라낸 1부 다향, 책을 매개로 접속한 세계와의 대화를 들려준 2부 서권향, 예술의 전 장르와 나눈 인연과 사연을 통화 세계와의 소통과 성찰을 모둠은 3부 예향에 이르기까지 김용범의 세계를 오롯하게 모두고 있다. 이번 시집에 담겨 있는 3취와 3향를 천박한 상상력의 소유자들은 호사가의 취미나 자랑 정도로 여길 수 있겠지만, 이번 시집을 읽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섣부른 판단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 시집을 읽은 사람들은 3취와 3향이 그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 그 자체이며 동시에 그것을 우리고, 읽고, 향유하는 과정의 풍요로운 기록임을 알게 될 것이다.
김용범의 시가 넓혀온 경계를 읽어온 독자라면 《노마십가》에서 몇 가지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3취와 3향과 관련된 그의 고급한 취향이나 너른 지식의 깊이가 아니라 레토릭과 융합이 빚어내는 다층성(多層性)과 다성성(多聲性)이다. 초기 시를 압도했던 레토릭의 팽팽한 긴장을 표면적으로는 이완시키면서 심층적으로는 낯선 것들 사이에 이물감(異物感)을 형성시킴으로써 빚어내는 레토릭의 이완과 긴장의 이율배반은 이번 시집 전체를 주도하는 중심 전략 중 하나다. 또 하나 두드러지는 것은 장르 간 융합이 빚어내는 다성성(polyphony)이다. 그 다성성은 시 안에 사진과 텍스트의 결합을 통해 발생하는데, 텍스트는 그림, 조각, 도예, 사진, 춤, 오페라, 창극, 연극, 노래 등의 다양한 장르를 소재로 하여 신문기사, 책, 도록 등의 다양한 전거(典據)를 본문, 각주, 미주 등의 다양한 형태로 의도적으로 노출시키는 과정에서 각자의 소리로 소란스럽게 드러난다. 《노마십가》의 이와 같은 전략은 표면적으로는 평이하지만 심층적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깊이를 드러내고 있으며, 그 새로운 실험의 양상은 낯선 만큼 절박하고 절박한 만큼 전투적인 결연한 의지를 읽을 수 있게 한다.
운화가 아름다운 이유는 꽃과 열매를 함께 달고 있기 때문이다. 열매를 기약하는 꽃과 꽃을 증거하는 열매가 보여주는 함축은 부단한 변화와 일신(日新)의 노력이다. 고착되거나 굳어져버리는 일체의 것들은 이전의 정당성과 무관하게 교조적인 관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시인이 위대한 것은 순간순간 삶의 정수를 포착하는 혜안과 포착된 그것을 구현하는 언어적 지혜를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언제나 새로운 영역과 시각을 확보하려는 정신적 유목을 멈추지 않는 까닭이다. 《노마십가》에서 우린 유목의 정수를 만날 수 있다.
레토릭의 이완과 긴장, 이율배반의 근력
《노마십가》의 레토릭은 이완과 긴장의 이율배반성을 지향한다. 김용범의 시를 읽어온 독자라면 그의 레토릭에 대한 초식(招式)과 내공(內功)의 빼어남을 알 수 있을 것인데, 이번 시집에서 다소 특이한 레토릭의 전략을 보여주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힘을 빼고 늦추어 한껏 이완시키면서도, 심층적으로는 텍스트 구성요소들의 충돌과 구현 어법의 어긋내기 등을 통하여 낯선 긴장을 고조시키는 것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표면구조와 심층구조의 서열화된 체계인 익숙한 사람들이 기대하는 우등/열등이나 중심/주변의 서열체계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독립적이고 다층적인 양상으로 병존한다는 점이다. 즉, 이러한 특성은 향유자의 리터러시(literacy) 수준이나 취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으며, 그 다름(異)의 상태를 그대로 인정해야한다는 시인의 강한 의지로 읽힌다.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을 듣고 있으면 노곤해져, 아득하게 졸려. 망연히 석양을 바라보거나 석양을 받고 있는 외로운 나무 한 그루와 눈이 마주 칠 때 나는 케냐 더블 에이(AA)원두를 갈아 커피 한 잔을 내리지. 찬찬히…커피를 마시며 나는 조금씩 명료해져. 점점 더 명명백백(明明白白) 해져. 하루에 마시는 다섯 잔의 커피. 뒤 끝이 깨끗하게 살기위해 나는 커피를 마셔. 그 뿐이야.
-Ⅱ. 서권향 중 <18 커피견문록> 중에서
이 시는 찻집에서 커피를 나누며 소소한 일상을 진술하듯 시적 화자는 작고 차분한 어조의 평이한 진술을 보여준다. 표면적으로 제시된 정보만을 연결해도 아프리카 어느 지역의 건조한 사바나를 배경으로 커피를 마시는 시적인 풍경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좀더 섬세하게 읽다보면 이 시에는 절묘한 감각의 전이와 개개의 오브제가 지닌 아우라가 개별적으로 빛나면서 동시에 결합되어 커피로 수렴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분명 2악장이었을)을 들으면서 시드니 폴락 감독의 영화 <Out Of Africa>를 메마른 사바나의 석양을 떠올리고, 그 석양을 받고 있는 외로운 나무의 심상에 침잠하면서, 킬리만자로의 동쪽에서 재배되는 유럽인들이 가장 선호한다는 최상급 커피 케냐AA를 떠올린다. AA라는 알파벳 대문자의 시각적 압도는 얼마나 또 단호한가? 흥미로운 것은 케냐AA 원두를 간다는 진술에서 거친 원두 가는 소리와 그 진한 커피향이 동시에 느껴지고, 내린다는 표현에서 시청각적 이미지가 증폭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굳이 ‘천천히’가 아닌 ‘찬찬히’라는 시어를 선택하고, 찬찬히의 정조(情調)는 명료해진다는 표현을 통해 사유로 이어진다. 시의 진행은 사유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내 명명백백(明明白白) 해진다는 표현에서 절정을 이룬다. 사바나의 석양에서 출발해서 커피의 짙은 색이 압도하고 있던 시의 색감은 명명백백(明明白白)이라는 표현을 통해 아주 장난스러우면서도 단호하게 흰색으로 대비된다. 그것을 다섯 잔의 커피로 환원시키면서 다시 ‘뒤 끝이 깨끗하게 살기위해’라는 설명적 진술을 덧붙이지만 감각적으로는 커피의 뒷맛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의 시들에 비해서 훨씬 레토릭의 긴장을 풀고 있는 듯 보이지만 층위별로 읽어가다 보면 레토릭이 심층구조 안으로 절묘하게 스며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섬득할 정도의 절창이 아닐 수 없다.
오래 전 신선들이 살았음이 분명한 仙府에 4년간 칩거하며 대령숙수 안순환의 이야기를 뼈대로 다섯 권 분량의 소설을 불철주야 긁었습니다. 筆耕. 식솔들의를 끼니를 위한 나의 농사방법 이었습니다.
-Ⅱ. 서권향 중 <20 美食과 素食> 중에서
이 시에서는 학습-인지-일탈의 언어유희(fun)적 전개 과정이 구현되어 있다. 안산에 있는 선부동(仙府洞)에 거주했다는 정보에다 신선이 살았음이 분명하다는 정보를 제공하고, 인지시키기 위해 한자 그대로 제시한 후에 다시 ‘소설을 불철주야 긁었습니다’라며 필경(筆耕)의 의미를 축자적(literal meaning) 으로 풀어 ‘식솔들의 끼니를 위한 나의 농사법’이라고 연결한다. 짧은 두 문장 안에서 언어유희를 통해 신선계/인간계, 예술(소설)/현실(필경), 대령숙수의 고급 음식/끼니 등의 대비적인 세계가 넘나들면서 삶의 절박한 진실과 직시하게 된다. 이와 같이 그는 시의 제목처럼, 《노마십가》에서 과식이나 폭식의 레토릭이 아니라 소식의 레토릭을 통해 미식의 경지를 보여주려 한다.
이준식의 초록은 늘 모호해. 가늘게 눈을 뜨고,
명징하게 바라보려 할수록 더욱 흐려져
오다가다 길에서 만난 그의 ⓐ풍경한 점을 거실에 걸고
흐려진 시력에 맞춰 살기로 했어.
ⓑ안경알을 닦으며 바흐를 듣던 성춘이형의 나무들처럼
ⓒ 겨울 쪽으로 기우러지기로 했어.
이순(耳順).
앞날은 늘 안개속이야.
-Ⅲ. 예향 중 <4 이준식의 사진작품을 거실에 걸고> 중에서(밑줄, 원문자 인용자)
이 시에서는 ‘의도된/의도되지 않은’ 혼란이 시의 전개와 맞물려 또 다른 레토릭으로 구현된다. 사진가 이준식의 핀을 놓친듯한 사진을 텍스트 안에 삽입하고 시적 화자는 ‘이준식의 초록은 모호해’라고 진술하고, ‘명징하게 바라보려 할수록 더욱 흐려’진다는 패러독스를 보여주며, ‘흐려진 시력에 맞주처 살기로’했다는 다짐과 이순(耳順)에도 ‘앞날은 늘 안개속이야’라는 진술로 맺고 있다. ‘초록’과 ‘이순’의 전후 대비가 ‘모호해’와 ‘안개속’이라는 유사한 의미망 안으로 수렴하면서, ‘흐려진 시력에 맞춰 살기’로 한 것이 단지 나이로 인한 것이 아니라 위에 진술된 ‘명징하게 바라보려 할수록 더욱 흐려’지기 때문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가 주목되는 가장 큰 이유는 김용범의 시에서 이따금 발견되는 오타(의도된 혹은 의도되지 않은)의 레토릭이다. ⓐ는 상식적으로는 ‘풍경 한 점’이 옳지만, 이 시에서처럼 ‘풍경한 점’으로 보면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풍경 한 작품으로 읽히는 것이 상식이지만 ‘풍경한 점’은 ‘모호해’, ‘흐려져’ 등의 시와 어울려 ‘풍경스러운 점’으로 읽혀도 무방할뿐더러 오히려 맛깔스럽다. ⓑ의 ‘안경알을 닦으며 바흐를 듣던 성춘이형의 나무들처럼’이라는 구절도 안경알을 닦는 것이 성춘이형인지 성춘이형의 나무들인지 모호한 것이 더욱 맛이 난다. 상식적으로야 전자가 옳지만 시적으로는 후자가 훨씬 재미있지 않은가? 이러한 재미는 ⓒ의 ‘겨울 쪽으로 기우러지기로 했어.’라는 단아한 레토릭을 통해서 정돈되는 효과를 갖는다는 점에서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이상에서 읽어본 것처럼, 은빛으로 늘 빛나던 김용범의 레토릭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양한 층위를 지향하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의식적으로 자신의 레토릭의 긴장을 풀어놓음으로써 처음 만나는 독작들에게는 좀 더 쉽게 그의 시에 다가오게 하고, 섬세하고 눈 밝은 애독자들에게는 또 다른 층위에 도사린 레토릭을 발견하는 재미까지 배려한 그의 이번 실험은 그런 의미에서 더욱 주목하게 된다. 그가 《노마십가》 전체에서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장르간 융합과 그것들이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다양한 소리에 주목하는 것도 이러한 실험과 맥이 닿아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융합의 다성성, 다성성의 푸른 활기
《노마십가》의 핵심 열쇠말은 융합이다. 융합은 다름(異)을 전제로 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자세를 바탕으로 하며, 다른 것들을 만나게 하여 새롭거나 나아질 수 있다는 신뢰에서 출발한다. 이 시집에서 드러나는 융합의 양상은 매우 다양해서 그 폭과 깊이를 가늠하고, 분류하고 정돈하는 일이 만만하지 않다. 이러한 융합은 시 텍스트 안에서 사진과 문자 텍스트를 결합시키고 있고, 텍스트와 각주와 미주를 상이한 양상으로 엮고 있으며, 텍스트 안에서는 신문기사, 책, 인터넷 정보 등을 전거로 적극 활용하고 있으며, 다양한 장르를 시 안으로 수렴하고 있으며, 일상과 예술의 영역을 교직(交織)시키고 있고,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을 활성화시켜 텍스트의 의미지평을 열어놓고 있으며, 감각에 있어서도 활발한 전이를 보여주고 있다.
시집 전체에 고르게 등장하는 것은 사진과 문자 텍스트의 결합이다. 사진과 문자 텍스트 역시 단순하지 않은데, 사진은 시인이 현장에서 직접 찍은 것과 대중매체를 통해 보도된 보도사진, 인터넷에 있는 사진 등등 다양한 층위의 것들이 등장하고, 사진의 개수 역시 한 장에서부터 여러 장까지 자유롭다. 문자 텍스트 역시 신문기사, 책, 인터넷 정보 등 다양한 요소들이 문자 텍스트 안에 도사리고 있다. 이와 같이 사진과 문자 텍스트의 다양한 요소들이 다양한 버전으로 낯설게 결합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익숙하고 평이한 듯한 요소를 낯설게 조합함으로써 매우 다양한 층위를 만들어 내는 또 다른 전략인 것이다. 한 눈에 정보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사진이지만 낯선 컨텍스트(context) 위에서 새롭게 조합함으로써 전혀 다른 울림과 체험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찰나의 순간을 영원히 정지시켜버림으로써 정보를 객관화하여 확정했다고도 볼 수 있는 사진을 애매성(ambiguity)의 시 텍스트 안으로 위치시켜서 정지된 순간의 새로운 관점과 해석을 가능하게 하려는 전략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집에서는 오히려 거꾸로 문자 텍스트로 구현된 내용을 강화하거나 일정 정도 거리두기를 요구하는 양상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3 허파 말리기>처럼 시인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들은 그 현장성을 소환함으로써 문자의 이면에 컨텍스트를 살펴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진들과의 결합은 보다 복잡하고 흥미로운 양상으로 드러난다. <1 마른 빵 한 조각 보다 차 한 잔이 더욱 더 절실한 사람>에서는 로이터통신의 사진을 게재한 ‘아시아뉴스통신’이라는 문자가 선명하게 박혀있는 사진을 시 모두에 배치한다. 저작권과 복제불허를 분명하게 밝힌 사진을 불법복제하여 사용했다고 당당하게 밝히면서 자신은 ‘엄청난 법적 처벌을 받게 될 것’이지만 자신이 받아야할 처벌은 불복복제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페트병을 잘라서 만든 용기로 차를 마시는 파키스탄의 노인의 모습에 주목하고, 그동안 ‘허영의 그릇’에 차를 마셨다고 성찰한다. 이 작품을 텍스트만 읽게 되면 아주 소박하고 구조적인 결함 운운할 수 있겠지만, 사진과 결합시켜 제공함으로서 전혀 다른 울림을 만들어 낸 것이다. 더구나 사진은 ‘아시아뉴스통신’이라는 문구가 사진에 노골적으로 박혀 있는, 즉 보도 기사의 일부로서만 사용될 수 있도록 제한을 둔 사진을 굳이 가져오고, 굳이 캡션에서 그 원출처까지 밝히고, 다시 본문에서 자신의 처벌 운운한 것은 시의 후반에 언급한 페트병 찻잔과 허영의 그릇이 대비시킨 것과 결합하어 그 심층의 맥락에 닿는다. 진위의 시비나 분별의 노력 그리고 작은 이해를 따르는 부자유의 맥락을 사진과 텍스트의 이종결합을 통하여 행간의 의미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8 게의 눈, 새우의 눈, 물고기의 눈과 길거리 화가의 물방울 세알>에서는 두 개의 사진이 대비되고, 물방울은 찻물로 전환되고, 찻물과 상관된 각주가 활용되고 있다. 거리 화가가 팔고 있는 물방울과 김창렬의 물방울이 일화의 형식으로 대비되고, 찻물의 세 단계 형상과 그것에 대한 각주와 작은 충돌을 보이는데, 이것은 ‘비로소 표낭(豹囊)의 행복’이라는 구절로 단아하게 수렴된다. 물론 <12 해리스 알렉슈 (Haris Alexiou) ‘기차는 8시에 떠나네’>에 각주를 통해 그리스어 원문으로 제시된 가사가 주는 이물감(異物感)은 얼마나 불편한 경각인가?
김용범은 《노마십가》에서 각주와 미주를 전략적으로 구분하여 사용한다. 각주와 미주의 혼용을 통해 각 기능을 분별하고 있는데, 특히 미주에 기술된 인연의 기술은 단지 사연의 첨언이 아니라 시와 하나가 되거나 이격되는 이중의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
<19 흰 뫼여 한가람이여>에서는 두 개의 미주와 한 개의 각주를 매우 재미있게 활용하고 있다. 제목 위에 붙은 미주는 이 작품과 연관된 오래된 일화를 소개하고 있으며, 뒤에 각주와 미주는 잡보장경의 인용구절의 원문(각주)과 그것의 해석(미주)으로 서로 다른 거리에서 같은 내용을 부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각주와 미주가 위치하는 시간적 차이에 주목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며, 그러한 시간적 간격을 통한 향유의 폭에 대한 인식을 촉구하려는 전략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예는 <4 이준식의 사진작품을 거실에 걸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미주의 내용을 살펴보면 시 텍스트와는 무관한 듯 그저 이준식이 왜 그런 사진을 찍는가에 대한 진술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시 텍스트와 결합될 때에는 전혀 다른 형질을 만나기 때문이다. 더구나 각주가 아닌 미주처리를 함으로써 텍스트 향유와 미주 읽기 사이에 의식적으로 시간 차이를 두게 함으로써 시 텍스트와 미주를 각기 독립된 형태로 즐기게 하고 다시 엮어서 향유하게 하는 두 층위의 향유가 가능하게 하는 것도 흥미롭다.
시에서는 담백하고 간결하게 구사된 시어를 제시하고, 그것과 얽힌 사연들이 미주에서 아주 상세하게 더해지면서 두 형질은 묘한 조화이거나 이질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두 텍스트 사이의 거리가 만들어내는 시간의 간격이지만 동질과 이질의 두 층위가 낯설게 어우러지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김용범은 독자 스스로 향유하며 그 간격을 메우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산문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현실과의 관계를 통해 얻어진 것이라면 시의 그것은 그러한 것들을 안으로 삭여내는 과정의 결과물일 터인데, 그는 지금 이 두 이질적인 요소들은 소재나 인물과의 인연을 진술하는 미주를 통해서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눈이 밝은 독자라면 연관된 시와 진술이 전혀 다른 체험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느끼겠지만 눈이 어두운 독자라면 후일담 정도로 들을 수 있는 두 층위의 향유도 가능해진다. 바로 여기게 그의 노림수가 있다. 이전 시들의 단단한 구조나 수사를 슬쩍 풀고 친절하게 설명하면서도 낯선 실험으로 또 다른 시적 긴장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마십가》의 융합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상호텍스성의 활용이다. 상호텍스트성이란 독립된 텍스트 사이의 상호 연관을 통하여 새로운 형질의 의미망을 구축하는데 유용하다. 그것은 특히 텍스 간의 대화를 활성화시켜 규범화된 예술형식의 한계를 탈피하여 새로운 미적 혁명을 시도하는 전환과 전복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요소를 갖는다. 이러한 인식은 텍스트가 완성되고 고정된 작품이 아니라 가변적이고 역동적인 요소들 지닌 유기적인 생명체와 같고, 창작과 향유의 경계가 불분명하며 상호 넘나들기가 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노마십가》에서 구현된 상호텍스트성은 다양한 장르의 텍스트가 형식적인 제약을 넘어서는 풍성한 대화관계를 구축함으로써 드러난다.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의 대화뿐만 아니라 작품 속 허구와 일상의 실재가 넘나들고, 시공간을 오고가는 연관성을 마련함으로써 전혀 다른 형질의 새로운 텍스트망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기차는 8시에 떠나네(To Treno Fevgi Stis Ochto)>는 조수미의 노래로 들어서는 안 돼.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맑아. 게다가 소설가 신경숙의 번안은 시작부터 잘못되어 있어 첫줄의 번안이 노래 부르기에 적합하지 않아, 남녀 간의 값싼 사랑과 이별만 있을 뿐, 가슴에 칼을 품고 음습한 안개 속에서 비장하게 기차를 기다리는 레지스탕스의 깊은 고뇌가 없어. 그 노래는 원래 그대로 가사의 내용만을 머리에 넣은 채 그리스어로 들어 그래야 그 속에 스며있는 레지스탕스 출신 작곡가 미키스 데오도라키스의 고뇌와 삶이, 목로에 혼자 앉아 마시던 보드카보다 독한 술 우오조(ouzo)의 독기가 품어져 나와. 그 노래는 만돌린보다 청아한 부주키(bouzouki)의 반주로 듣는 해리스 알렉슈 (Haris Alexiou)거나 차라리 가사를 걷어내고 빗소리를 배경으로 듣는 김지연의 바이올린 독주가 옳아. <기차는 8시에 떠나네>는 조수미의 노래로 들어서는 안 돼.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맑아.
-Ⅲ. 예향 중 . <12 해리스 알렉슈 (Haris Alexiou). ‘기차는 8시에 떠나네.’> 중에서(각주 생략)
이 작품은 <기차는 8시에 떠나네>를 중심으로 연관된 텍스트 사이의 상관망이 향유의 핵심이다. 해리스 알렉슈의 원곡과 조수미의 노래 그리고 신경숙의 소설에 드러난 가사, 김지연의 바이올린 독주 등이 상호텍스트성을 형성하게 된다. 서로 다른 시공간적 현재성을 토대로 해리스 알렉슈와 조수미가 부른 두 개의 텍스트가 되고, 소설이나 바이올린 독주라는 다른 언어로 구현한 또 다른 두 개의 텍스트가 된다. 거기에 그러한 상이한 네 개의 텍스트를 시적으로 형상화한 이 시까지 또 다른 상호텍스트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구현된 상호텍스트성은 각기 다른 네 개의 텍스트를 얼마나 향유했는가에 따라서 그 넓이와 깊이가 달라지고, 향유자의 사회문화적 맥락에 따라서 또 달라지는 매우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향유로 확대될 수 있다.
<7 데자뷰. 라 보엠-이중섭거리에서>에서 구현된 상호텍스트성을 보다 구체적이고 역동적이다.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은 이중섭이 등장하는 밀다원 시대로 환치되고, 이것은 다시 김용범 자신의 오페라 <나는 이중섭이다>와 연결됨으로써 보다 구체화된 대화를 형성한다. 예술과 가난한 현실 속에서 갈등하는 젊은 예술가들의 성장과 좌절을 매개로 세 텍스트가 상관됨으로써 좀더 풍성한 텍스트성을 확보하게 된다.
김용범은 이와 같은 다양한 융합을 통하여 다성성을 지향하고 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제 각각의 목소리로 소란스럽고, 그 소란스러운 만큼의 다양성으로 우리 삶의 지평이 확장되고 깊어질 수 있는 그런 다성성의 세계는 그가 최근 다다른 또 다른 언덕이다. 그것은 선형적인 전개를 보이며 어딘가를 향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개개의 존재, 존재의 각자 몫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지지하는 매우 다원적(多元的)이고 리좀(rhizome)적인 전개에 가깝다. 어디가 중심이 아니라 모두가 중심일 수 있는 자유로운 사고와 지평! 그런 까닭에 김용범의 융합의 다성성에는 푸른 활기가 있다. 하지만 그 활기는 완숙의 경지에 이르러서 비로소 발견한 푸른 활기라는 점에서 미숙한 젊음의 그것과는 다르다. 하여 그가 《노마십가》에서 보여주는 시들은 자유롭고 넉넉하지만 그 안의 긴장을 유지하고 있으며, 개개의 작품 모두 각기 독립적인 세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지고 가는 멍에의 의지
《노마십가》는 정리나 마무리가 아닌 또 다른 시작의 알림이며 날마다 새로워지겠다는 시인의 의지다. 그는 서문에서 ‘노마십가’(駑馬十駕)의 의미를 “비록 무거운 멍에를 짊어지고 있는 비루먹은 말일지라도 한 걸음 한걸음 쉬지 않고 간다면, 빠른 말이 하루에 간 그 거리만큼 끝내 따라 갈 수 있으리라는 金言”이라고 했다. 혹자는 여기서 겸손을 읽을지 모르겠으나 오랫동안 그의 시를 읽어온 필자에게는 단호한 의지로만 보였다. 그것은 ‘끝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번 시집에서 그가 보여준 준열한 시적 긴장과 치열한 실험 그리고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변경을 찾아가려는 유목의 정신에 기인한 것이다. 항상 열매와 꽃을 함께 달고 있는 운화(雲華‘의 메타포는 그동안 십여 권의 시집마다 보여주었던 변화와 갱신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제 우리는 김용범이 지난 온 시의 영토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지나온 40년의 시력도 시력이지만 앞으로 스스로 멍에를 지고 찾아갈 새로운 영토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 기대는 지난 40년간 그의 시가 보여주었던 단단한 열매와 지금도 피우고 있는 꽃에 대한 신뢰이기도 하다. 그의 표현에 의지해서 표현해본다면, 김용범의 시를 읽는 일은 ‘수 억 만 개 별들로 / 우려낸 차 한 잔’을 만나는 것이기에 ‘지독하고 아름다운 현기(眩氣)’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 비루먹은 말이라 칭하며 자신의 멍에를 지고 쉬지 않고 가겠다는 그의 선언은 그의 스승인 목월선생의 향나무 연필처럼 밤마다 유목의 변경을 끊임없이 떠돌며 시어를 벼리겠다는 아름다운 ‘멍에의 의지’다. 스스로 짊어지고 가는 멍에의 역설, 그 아름다운 멍에를 향한 지독한 의지에서 《노마십가》의 이정(里程)을 가늠해 볼 것이다. 하여 나는 ‘낮은 소리로 지워지고 있는 바람의 후면’을 읽거나 ‘겨울 쪽으로 기우러져’ 안개 속을 차갑게 걸어갈 그가 낯선 영토에서 순해진 귀(耳順)로 듣고 이야기해줄 그의 시가 아직도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