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별을 넘어서는 차이의 황홀한 相關

이상호, 웅덩이를 파다, (모아드림, 2001)

 

박기수(문학평론가, 한양대 강사)

 

사람들은 제 각각의 속도’(速度)를 가졌다. 그것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속력’(速力)과는 다르다.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그 속도의 주체가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는 뜻이다. 세계의 시간에 일방적으로 휩쓸려 달려야하는 근대적 시간관은 직선적이며 따라서 속도보다는 속력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직선적인 운동 안에서는 세계의 현기증 나는 속력이 주체의 속도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주변의 일체의 사물들을 지우며 끝 모를 소실점을 향해 질주하는 이와 같은 롤러코스터로부터 내려설 수 있는 방법은 서정적(抒情的) 세계인식이 아닐까?


서정적 세계인식은 주체와 타자간의 역동적인 대화를 전제로 한다. 대화는 발화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주체와 타자가 활발하게 자리를 바꾸며, 그러한 자리바꿈의 결과가 동화(同化). 그것은 주체가 타자를 일방적으로 동화시킨다는 기존의 인식을 넘어서려는 것이다. 일방적인 동화의 경우, 결국 주체로 수렴되는 탓에 동화 과정이 지니는 역동적인 힘을 거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동적 대화과정을 동화라고 할 때, 그것은 주체가 타자로 스미는 과정이며 동시에 타자를 빨아올리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동화는 양자를 동일성의 도그마로 묶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양자의 차이성을 드러냄으로써 복수성(複數性)과 타자성(他者性)을 긍정하기 위한 시도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이상호의 다섯 번째 시집 웅덩이를 파다는 매우 소중하다. 눈썰미 있는 독자라면 金環蝕, 그림자도 버리고, 시간의 자궁 속, 그리운 아버지로 이어지는 그의 시력(詩歷)에서 삶의 상처와 고통을 긍정과 조화의 눈으로 담아내는 따듯한 구도를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작업의 연장선에서 볼 때도 이번 시집은 소중하다.

하지만 보다 소중한 것은 이번 시집이 1) 양가성(Ambivalenz)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고, 2) ‘구별을 넘어서는 차이의 상관망을 구성하고 있으며, 3) 이것을 일상의 곳곳에서 찾아냄으로써 성찰적 인식을 일구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굳이 페터 지마의 양가성에 대한 해석을 빌지 않더라도, 양가성은 결합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개의 가치들이 동시적으로 결합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질과 양, 강한 것과 약한 것, 고귀한 것과 비천한 것, 선과 악이 결합될 때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이와 같은 대립쌍들은 사실 대립적인 측면보다는 상관(相關)’을 통해 의미를 생산하기 때문에, 양자는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일 수도 있는 양가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용어는 이분법적인 구별을 무화(無化)시키고 상호 주체적 상관망을 구축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다.

 

오르는 길 내내 

아래로만 내닫는 물소리가 들린다 


 내려가는 것이 오르는 길이라는 듯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내려가는 물 


물길 끊어진 곳에 솟아오른 

한 채의 소슬한 

적막

<古刹> 전문(원문자 인용자)

 

연에서 주체의 오르는 길아래로 내닫는 물의 대립과 연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오르는 서정적 자아내려가는 물이 상동적(相同的)으로 보이지만,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발화의 중심이 서정적 자아()에서 내려가는 물()로 옮겨갔음을 알 수 있다. 연과 연에서 발화 주체가 전이됨으로써 상호 주체적 상관망이 형성되고 그 속에서 화자의 복수성타자성을 드러낸다. 이와 같은 다성성(多聲性)의 공간에서 연의 소슬한 적막을 맞을 수 있는 것이다. ‘소슬한 적막연과 연의 상이한 발화 주체들의 구별이 에서 사라져 버림으로써 획득된 것이다. 이 말은 소슬한 적막속에서는 주체와 타자의 구분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 주체적 관계의 네트를 형성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인식은 에서 의 관계나, 하루살이에서 하루살이웅덩이의 관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루살이들

눈에도 잘 띄지 않는 날개로

잘게 허공을 끊으며

올라간다 

검은 웅덩이가 멀거니 

그들의 기나긴 일생의 

하루를 

들여다보고 있다.

<하루살이>부분

 

에서는 허공을 잘게 끊는 하루살이와 그렇게 그의 전 생애인 하루를 수없이 사는서정적 자아, 그리고 에서 하루살이를 바라보는 검은 웅덩이와 그것을 바라보는 서정적 자아의 상관이 흥미롭다. 이와 같은 상관 속에서 주체와 타자의 자리바꿈이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그러한 자리바꿈을 통해 인위적인 분별이나 구분이 아니라 제 각각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배제와 차별이라는 동일성의 자장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며, <다람쥐>에서처럼 자기 반어적, 자기 반성적 인식에 이르기 위한 시도다.

그렇다면 왜 지금 여기서 차이가 문제인가? 그것은 과잉 소모되는 욕망의 <뚱뚱한 몸>이거나 욕망의 질주로 인해 제 속도를 상실한 <칠월의 코스모스>이거나, 빌딩만 발기하는 <테헤란로>이거나, 가망 없는 희망들로 즐비한 <희망백화점>이 바로 지금 이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차이의 상관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1. 내가 일어나 새벽 신문을 보기 시작하는 시각에

비로소 

아들은 인터넷을 

닫고 잠자리에 들기 시작한다


2. 흰색물감으로 머리에 한껏 멋을 부린 아들의 

부드러운 손이 

반백의 내 머리에 흑갈색 물을 들여주고 있다.

<세대차이> 전문

 

1에서 자칫 불화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깨어나고 / 잠들고’, ‘신문 / 인터넷등의 아버지와 아들의 어긋남이 단지 차이이거나 다름에 불과하다고 2에서 장면 하나로 처리하고 있다. 반백의 아버지를 흑갈색으로 염색하여 아버지의 세월을 지워주는, 검은머리를 흰색으로 물들인 아들의 부드러운 손.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살아온 시간과 아들이 살아온 시간만큼의 차이를, 부자가 함께 공유하는 시간만큼의 이해로 서로 다름을 인정해주는 화해의 모습인 것이다. 세대차이는 감옥의 안과 밖처럼, 단절이거나 소외일 수 없고 오히려 서로의 욕망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인정해줌으로써 차이나는 시간만큼 서로를 긍정하려는 노력이며, 이것이 차이가 지니는 역동적인 긍정과 조화의 힘인 것이다.

 

가둬도  

가둬도  

가둘 수 없는

바람처럼 


울어도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 

강물처럼 


싱싱한 

금빛 사랑 

한 접시 


그대와 나의 

경계를 

지우는 


닳지 않는 

고무 지우개 

하나

<가락지> 전문

 

차이가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긍정과 조화의 힘은 결국 그대와 나의 / 경계를 지우는데 모아질 것이며, 그것은 가둘 수 없는 자유로움과 강물 같은 부단한 역동의 싱싱한 금빛 사랑이 되는 것이다. , 여기서 그대와 나의 경계를 / 지우는일이 그대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만약 그렇게 하나가 될 수 있다면 가락지는 무슨 소용이겠는가? 오히려 경계를 지우는 행위는 주체와 타자의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 주체적인 상관으로 읽어야할 것이다. 바로 그 황홀한 상관 속에서 서정의 역동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고 동화(同化)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시집은 이상호의 속도를 읽게 해 준다. 섣부른 속력으로 현혹하려들지 않고, 어설픈 가속으로 소음을 만들지 않는 그의 행보. 그의 걸음마다 지워지는 경계와 차이가 빚어내는 황홀한 상관. 다시 한번 기대는 늘 새롭다.(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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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루먹은 말의 멍에 혹은 꽃과 열매의 시적 의지

 

 

박기수(문학평론가, 한양대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운화(雲華), 꽃과 열매의 시적 의지

 

운화(雲華)의 메타포(metaphor)는 절묘한 떨림이다. 옛사람들이 차나무꽃을 운화라고 불렀다는데, 차나무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데에는 1년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열매는 다음해에 피는 꽃과 같이 매달리는 시적인 상봉을 하게 된다고 한다. 꽃과 열매 사이의 1년이라는 오롯한 시간 차이가 동시에 매달려 시작과 다됨을 무한 반복하게 되는 둘 사이의 부단한 긴장, 그것을 생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일이다.

김용범의 시에서 차나무꽃의 부단한 긴장, 꽃과 열매가 함께 이루어내는 시간의 섞임과 부단한 변화의 의지를 보는 일은 경이로운 기쁨이다. 변화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원초적 특성이며 살아있음의 다른 이름임을 1974년 등단 이후 지속적인 실험과 성찰을 통해 구현해온 김용범의 시에서 운화는 변화이며 동시에 변화의 과정이고 무엇보다 정체(停滯)를 거부하는 강한 의지의 세련된 메타포이기 때문이다. 이미 열 세권의 시집을 내고 780여 편의 시를 발표한 시력(詩歷) 40년의 시인에게서 또 다른 실험을 발견하는 즐거움이나 자아와 타자에 대한 심층의 성찰 그리고 그것을 다양한 층위의 구현된 언어적 충돌과 긴장을 만나는 일은 차라리 경이로움이다.

등단 이후 40년 동안 김용범의 언어는 언제나 젊고 싱싱했다. 특유의 명징한 언어와 빈틈없는 레토릭(rhetoric)으로 세계를 향한 물러서지 않는 의지를 흐트러짐 없이 단단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면서도 가까이는 일상과 예술을, 멀리는 고구려의 거침없고 건강한 남성적 기상까지 그의 관심은 거침이 없었고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그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자유와 사랑으로 수렴되는 것들이었다. 더구나 시에서 출발한 김용범의 글쓰기는 극시, 창극, 오페라 리브레토, 장편소설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거침없이 이루어져왔다. 어느 것 하나 독립적인 전문 장르가 아닌 것이 없건만 거침없이 그 모든 장르에서 자유롭게 그만의 예술세계를 확장해왔다. 이와 같은 김용범의 시력을 섬세하게 읽어온 사람으로서 그가 열네 번째 시집 열개의 멍에를 짊어진 비루먹은 말에 대한 시-노마십가(駑馬十駕)(이하 노마십가)에서 보여준 실험과 성찰 역시 자못 기대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김용범의 이번 시집은 시인이 평소 탐닉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즐기고 있는 3()3(), 즉 차()와 책()과 예()를 세 줄기로 해서 1부 다향(茶香), 2부 서권향(書卷香), 3부 예향(藝香)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시집은 차로 우려내는 내적 성찰을 따라낸 1부 다향, 책을 매개로 접속한 세계와의 대화를 들려준 2부 서권향, 예술의 전 장르와 나눈 인연과 사연을 통화 세계와의 소통과 성찰을 모둠은 3부 예향에 이르기까지 김용범의 세계를 오롯하게 모두고 있다. 이번 시집에 담겨 있는 3취와 3향를 천박한 상상력의 소유자들은 호사가의 취미나 자랑 정도로 여길 수 있겠지만, 이번 시집을 읽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섣부른 판단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 시집을 읽은 사람들은 3취와 3향이 그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 그 자체이며 동시에 그것을 우리고, 읽고, 향유하는 과정의 풍요로운 기록임을 알게 될 것이다.

김용범의 시가 넓혀온 경계를 읽어온 독자라면 노마십가에서 몇 가지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3취와 3향과 관련된 그의 고급한 취향이나 너른 지식의 깊이가 아니라 레토릭과 융합이 빚어내는 다층성(多層性)과 다성성(多聲性)이다. 초기 시를 압도했던 레토릭의 팽팽한 긴장을 표면적으로는 이완시키면서 심층적으로는 낯선 것들 사이에 이물감(異物感)을 형성시킴으로써 빚어내는 레토릭의 이완과 긴장의 이율배반은 이번 시집 전체를 주도하는 중심 전략 중 하나다. 또 하나 두드러지는 것은 장르 간 융합이 빚어내는 다성성(polyphony)이다. 그 다성성은 시 안에 사진과 텍스트의 결합을 통해 발생하는데, 텍스트는 그림, 조각, 도예, 사진, , 오페라, 창극, 연극, 노래 등의 다양한 장르를 소재로 하여 신문기사, , 도록 등의 다양한 전거(典據)를 본문, 각주, 미주 등의 다양한 형태로 의도적으로 노출시키는 과정에서 각자의 소리로 소란스럽게 드러난다. 노마십가의 이와 같은 전략은 표면적으로는 평이하지만 심층적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깊이를 드러내고 있으며, 그 새로운 실험의 양상은 낯선 만큼 절박하고 절박한 만큼 전투적인 결연한 의지를 읽을 수 있게 한다.

운화가 아름다운 이유는 꽃과 열매를 함께 달고 있기 때문이다. 열매를 기약하는 꽃과 꽃을 증거하는 열매가 보여주는 함축은 부단한 변화와 일신(日新)의 노력이다. 고착되거나 굳어져버리는 일체의 것들은 이전의 정당성과 무관하게 교조적인 관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시인이 위대한 것은 순간순간 삶의 정수를 포착하는 혜안과 포착된 그것을 구현하는 언어적 지혜를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언제나 새로운 영역과 시각을 확보하려는 정신적 유목을 멈추지 않는 까닭이다. 노마십가에서 우린 유목의 정수를 만날 수 있다.

 

 

레토릭의 이완과 긴장, 이율배반의 근력

 

노마십가의 레토릭은 이완과 긴장의 이율배반성을 지향한다. 김용범의 시를 읽어온 독자라면 그의 레토릭에 대한 초식(招式)과 내공(內功)의 빼어남을 알 수 있을 것인데, 이번 시집에서 다소 특이한 레토릭의 전략을 보여주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힘을 빼고 늦추어 한껏 이완시키면서도, 심층적으로는 텍스트 구성요소들의 충돌과 구현 어법의 어긋내기 등을 통하여 낯선 긴장을 고조시키는 것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표면구조와 심층구조의 서열화된 체계인 익숙한 사람들이 기대하는 우등/열등이나 중심/주변의 서열체계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독립적이고 다층적인 양상으로 병존한다는 점이다. , 이러한 특성은 향유자의 리터러시(literacy) 수준이나 취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으며, 그 다름()의 상태를 그대로 인정해야한다는 시인의 강한 의지로 읽힌다.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을 듣고 있으면 노곤해져, 아득하게 졸려. 망연히 석양을 바라보거나 석양을 받고 있는 외로운 나무 한 그루와 눈이 마주 칠 때 나는 케냐 더블 에이(AA)원두를 갈아 커피 한 잔을 내리지. 찬찬히커피를 마시며 나는 조금씩 명료해져. 점점 더 명명백백(明明白白) 해져. 하루에 마시는 다섯 잔의 커피. 뒤 끝이 깨끗하게 살기위해 나는 커피를 마셔. 그 뿐이야.

-. 서권향 중 <18 커피견문록> 중에서

 

이 시는 찻집에서 커피를 나누며 소소한 일상을 진술하듯 시적 화자는 작고 차분한 어조의 평이한 진술을 보여준다. 표면적으로 제시된 정보만을 연결해도 아프리카 어느 지역의 건조한 사바나를 배경으로 커피를 마시는 시적인 풍경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좀더 섬세하게 읽다보면 이 시에는 절묘한 감각의 전이와 개개의 오브제가 지닌 아우라가 개별적으로 빛나면서 동시에 결합되어 커피로 수렴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분명 2악장이었을)을 들으면서 시드니 폴락 감독의 영화 <Out Of Africa>를 메마른 사바나의 석양을 떠올리고, 그 석양을 받고 있는 외로운 나무의 심상에 침잠하면서, 킬리만자로의 동쪽에서 재배되는 유럽인들이 가장 선호한다는 최상급 커피 케냐AA를 떠올린다. AA라는 알파벳 대문자의 시각적 압도는 얼마나 또 단호한가? 흥미로운 것은 케냐AA 원두를 간다는 진술에서 거친 원두 가는 소리와 그 진한 커피향이 동시에 느껴지고, 내린다는 표현에서 시청각적 이미지가 증폭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굳이 천천히가 아닌 찬찬히라는 시어를 선택하고, 찬찬히의 정조(情調)는 명료해진다는 표현을 통해 사유로 이어진다. 시의 진행은 사유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내 명명백백(明明白白) 해진다는 표현에서 절정을 이룬다. 사바나의 석양에서 출발해서 커피의 짙은 색이 압도하고 있던 시의 색감은 명명백백(明明白白)이라는 표현을 통해 아주 장난스러우면서도 단호하게 흰색으로 대비된다. 그것을 다섯 잔의 커피로 환원시키면서 다시 뒤 끝이 깨끗하게 살기위해라는 설명적 진술을 덧붙이지만 감각적으로는 커피의 뒷맛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의 시들에 비해서 훨씬 레토릭의 긴장을 풀고 있는 듯 보이지만 층위별로 읽어가다 보면 레토릭이 심층구조 안으로 절묘하게 스며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섬득할 정도의 절창이 아닐 수 없다.

 

오래 전 신선들이 살았음이 분명한 仙府4년간 칩거하며 대령숙수 안순환의 이야기를 뼈대로 다섯 권 분량의 소설을 불철주야 긁었습니다. 筆耕. 식솔들의를 끼니를 위한 나의 농사방법 이었습니다.

-. 서권향 중 <20 美食素食> 중에서

 

이 시에서는 학습-인지-일탈의 언어유희(fun)적 전개 과정이 구현되어 있다. 안산에 있는 선부동(仙府洞)에 거주했다는 정보에다 신선이 살았음이 분명하다는 정보를 제공하고, 인지시키기 위해 한자 그대로 제시한 후에 다시 소설을 불철주야 긁었습니다라며 필경(筆耕)의 의미를 축자적(literal meaning) 으로 풀어 식솔들의 끼니를 위한 나의 농사법이라고 연결한다. 짧은 두 문장 안에서 언어유희를 통해 신선계/인간계, 예술(소설)/현실(필경), 대령숙수의 고급 음식/끼니 등의 대비적인 세계가 넘나들면서 삶의 절박한 진실과 직시하게 된다. 이와 같이 그는 시의 제목처럼, 노마십가에서 과식이나 폭식의 레토릭이 아니라 소식의 레토릭을 통해 미식의 경지를 보여주려 한다.

 

이준식의 초록은 늘 모호해. 가늘게 눈을 뜨고,

명징하게 바라보려 할수록 더욱 흐려져

오다가다 길에서 만난 그의 풍경한 점을 거실에 걸고

흐려진 시력에 맞춰 살기로 했어.

안경알을 닦으며 바흐를 듣던 성춘이형의 나무들처럼

겨울 쪽으로 기우러지기로 했어.

이순(耳順).

앞날은 늘 안개속이야.

-. 예향 중 <4 이준식의 사진작품을 거실에 걸고> 중에서(밑줄, 원문자 인용자)

 

이 시에서는 의도된/의도되지 않은혼란이 시의 전개와 맞물려 또 다른 레토릭으로 구현된다. 사진가 이준식의 핀을 놓친듯한 사진을 텍스트 안에 삽입하고 시적 화자는 이준식의 초록은 모호해라고 진술하고, ‘명징하게 바라보려 할수록 더욱 흐려진다는 패러독스를 보여주며, ‘흐려진 시력에 맞주처 살기로했다는 다짐과 이순(耳順)에도 앞날은 늘 안개속이야라는 진술로 맺고 있다. ‘초록이순의 전후 대비가 모호해안개속이라는 유사한 의미망 안으로 수렴하면서, ‘흐려진 시력에 맞춰 살기로 한 것이 단지 나이로 인한 것이 아니라 위에 진술된 명징하게 바라보려 할수록 더욱 흐려지기 때문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가 주목되는 가장 큰 이유는 김용범의 시에서 이따금 발견되는 오타(의도된 혹은 의도되지 않은)의 레토릭이다. 는 상식적으로는 풍경 한 점이 옳지만, 이 시에서처럼 풍경한 점으로 보면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풍경 한 작품으로 읽히는 것이 상식이지만 풍경한 점모호해’, ‘흐려져등의 시와 어울려 풍경스러운 점으로 읽혀도 무방할뿐더러 오히려 맛깔스럽다. 안경알을 닦으며 바흐를 듣던 성춘이형의 나무들처럼이라는 구절도 안경알을 닦는 것이 성춘이형인지 성춘이형의 나무들인지 모호한 것이 더욱 맛이 난다. 상식적으로야 전자가 옳지만 시적으로는 후자가 훨씬 재미있지 않은가? 이러한 재미는 겨울 쪽으로 기우러지기로 했어.’라는 단아한 레토릭을 통해서 정돈되는 효과를 갖는다는 점에서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이상에서 읽어본 것처럼, 은빛으로 늘 빛나던 김용범의 레토릭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양한 층위를 지향하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의식적으로 자신의 레토릭의 긴장을 풀어놓음으로써 처음 만나는 독작들에게는 좀 더 쉽게 그의 시에 다가오게 하고, 섬세하고 눈 밝은 애독자들에게는 또 다른 층위에 도사린 레토릭을 발견하는 재미까지 배려한 그의 이번 실험은 그런 의미에서 더욱 주목하게 된다. 그가 노마십가전체에서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장르간 융합과 그것들이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다양한 소리에 주목하는 것도 이러한 실험과 맥이 닿아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융합의 다성성, 다성성의 푸른 활기

 

노마십가의 핵심 열쇠말은 융합이다. 융합은 다름()을 전제로 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자세를 바탕으로 하며, 다른 것들을 만나게 하여 새롭거나 나아질 수 있다는 신뢰에서 출발한다. 이 시집에서 드러나는 융합의 양상은 매우 다양해서 그 폭과 깊이를 가늠하고, 분류하고 정돈하는 일이 만만하지 않다. 이러한 융합은 시 텍스트 안에서 사진과 문자 텍스트를 결합시키고 있고, 텍스트와 각주와 미주를 상이한 양상으로 엮고 있으며, 텍스트 안에서는 신문기사, , 인터넷 정보 등을 전거로 적극 활용하고 있으며, 다양한 장르를 시 안으로 수렴하고 있으며, 일상과 예술의 영역을 교직(交織)시키고 있고,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을 활성화시켜 텍스트의 의미지평을 열어놓고 있으며, 감각에 있어서도 활발한 전이를 보여주고 있다.

시집 전체에 고르게 등장하는 것은 사진과 문자 텍스트의 결합이다. 사진과 문자 텍스트 역시 단순하지 않은데, 사진은 시인이 현장에서 직접 찍은 것과 대중매체를 통해 보도된 보도사진, 인터넷에 있는 사진 등등 다양한 층위의 것들이 등장하고, 사진의 개수 역시 한 장에서부터 여러 장까지 자유롭다. 문자 텍스트 역시 신문기사, , 인터넷 정보 등 다양한 요소들이 문자 텍스트 안에 도사리고 있다. 이와 같이 사진과 문자 텍스트의 다양한 요소들이 다양한 버전으로 낯설게 결합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익숙하고 평이한 듯한 요소를 낯설게 조합함으로써 매우 다양한 층위를 만들어 내는 또 다른 전략인 것이다. 한 눈에 정보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사진이지만 낯선 컨텍스트(context) 위에서 새롭게 조합함으로써 전혀 다른 울림과 체험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찰나의 순간을 영원히 정지시켜버림으로써 정보를 객관화하여 확정했다고도 볼 수 있는 사진을 애매성(ambiguity)의 시 텍스트 안으로 위치시켜서 정지된 순간의 새로운 관점과 해석을 가능하게 하려는 전략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집에서는 오히려 거꾸로 문자 텍스트로 구현된 내용을 강화하거나 일정 정도 거리두기를 요구하는 양상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3 허파 말리기>처럼 시인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들은 그 현장성을 소환함으로써 문자의 이면에 컨텍스트를 살펴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진들과의 결합은 보다 복잡하고 흥미로운 양상으로 드러난다. <1 마른 빵 한 조각 보다 차 한 잔이 더욱 더 절실한 사람>에서는 로이터통신의 사진을 게재한 아시아뉴스통신이라는 문자가 선명하게 박혀있는 사진을 시 모두에 배치한다. 저작권과 복제불허를 분명하게 밝힌 사진을 불법복제하여 사용했다고 당당하게 밝히면서 자신은 엄청난 법적 처벌을 받게 될 것이지만 자신이 받아야할 처벌은 불복복제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페트병을 잘라서 만든 용기로 차를 마시는 파키스탄의 노인의 모습에 주목하고, 그동안 허영의 그릇에 차를 마셨다고 성찰한다. 이 작품을 텍스트만 읽게 되면 아주 소박하고 구조적인 결함 운운할 수 있겠지만, 사진과 결합시켜 제공함으로서 전혀 다른 울림을 만들어 낸 것이다. 더구나 사진은 아시아뉴스통신이라는 문구가 사진에 노골적으로 박혀 있는, 즉 보도 기사의 일부로서만 사용될 수 있도록 제한을 둔 사진을 굳이 가져오고, 굳이 캡션에서 그 원출처까지 밝히고, 다시 본문에서 자신의 처벌 운운한 것은 시의 후반에 언급한 페트병 찻잔과 허영의 그릇이 대비시킨 것과 결합하어 그 심층의 맥락에 닿는다. 진위의 시비나 분별의 노력 그리고 작은 이해를 따르는 부자유의 맥락을 사진과 텍스트의 이종결합을 통하여 행간의 의미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8 게의 눈, 새우의 눈, 물고기의 눈과 길거리 화가의 물방울 세알>에서는 두 개의 사진이 대비되고, 물방울은 찻물로 전환되고, 찻물과 상관된 각주가 활용되고 있다. 거리 화가가 팔고 있는 물방울과 김창렬의 물방울이 일화의 형식으로 대비되고, 찻물의 세 단계 형상과 그것에 대한 각주와 작은 충돌을 보이는데, 이것은 비로소 표낭(豹囊)의 행복이라는 구절로 단아하게 수렴된다. 물론 <12 해리스 알렉슈 (Haris Alexiou) ‘기차는 8시에 떠나네’>에 각주를 통해 그리스어 원문으로 제시된 가사가 주는 이물감(異物感)은 얼마나 불편한 경각인가?

김용범은 노마십가에서 각주와 미주를 전략적으로 구분하여 사용한다. 각주와 미주의 혼용을 통해 각 기능을 분별하고 있는데, 특히 미주에 기술된 인연의 기술은 단지 사연의 첨언이 아니라 시와 하나가 되거나 이격되는 이중의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

<19 흰 뫼여 한가람이여>에서는 두 개의 미주와 한 개의 각주를 매우 재미있게 활용하고 있다. 제목 위에 붙은 미주는 이 작품과 연관된 오래된 일화를 소개하고 있으며, 뒤에 각주와 미주는 잡보장경의 인용구절의 원문(각주)과 그것의 해석(미주)으로 서로 다른 거리에서 같은 내용을 부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각주와 미주가 위치하는 시간적 차이에 주목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며, 그러한 시간적 간격을 통한 향유의 폭에 대한 인식을 촉구하려는 전략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예는 <4 이준식의 사진작품을 거실에 걸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미주의 내용을 살펴보면 시 텍스트와는 무관한 듯 그저 이준식이 왜 그런 사진을 찍는가에 대한 진술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시 텍스트와 결합될 때에는 전혀 다른 형질을 만나기 때문이다. 더구나 각주가 아닌 미주처리를 함으로써 텍스트 향유와 미주 읽기 사이에 의식적으로 시간 차이를 두게 함으로써 시 텍스트와 미주를 각기 독립된 형태로 즐기게 하고 다시 엮어서 향유하게 하는 두 층위의 향유가 가능하게 하는 것도 흥미롭다.

시에서는 담백하고 간결하게 구사된 시어를 제시하고, 그것과 얽힌 사연들이 미주에서 아주 상세하게 더해지면서 두 형질은 묘한 조화이거나 이질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두 텍스트 사이의 거리가 만들어내는 시간의 간격이지만 동질과 이질의 두 층위가 낯설게 어우러지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김용범은 독자 스스로 향유하며 그 간격을 메우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산문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현실과의 관계를 통해 얻어진 것이라면 시의 그것은 그러한 것들을 안으로 삭여내는 과정의 결과물일 터인데, 그는 지금 이 두 이질적인 요소들은 소재나 인물과의 인연을 진술하는 미주를 통해서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눈이 밝은 독자라면 연관된 시와 진술이 전혀 다른 체험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느끼겠지만 눈이 어두운 독자라면 후일담 정도로 들을 수 있는 두 층위의 향유도 가능해진다. 바로 여기게 그의 노림수가 있다. 이전 시들의 단단한 구조나 수사를 슬쩍 풀고 친절하게 설명하면서도 낯선 실험으로 또 다른 시적 긴장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마십가의 융합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상호텍스성의 활용이다. 상호텍스트성이란 독립된 텍스트 사이의 상호 연관을 통하여 새로운 형질의 의미망을 구축하는데 유용하다. 그것은 특히 텍스 간의 대화를 활성화시켜 규범화된 예술형식의 한계를 탈피하여 새로운 미적 혁명을 시도하는 전환과 전복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요소를 갖는다. 이러한 인식은 텍스트가 완성되고 고정된 작품이 아니라 가변적이고 역동적인 요소들 지닌 유기적인 생명체와 같고, 창작과 향유의 경계가 불분명하며 상호 넘나들기가 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노마십가에서 구현된 상호텍스트성은 다양한 장르의 텍스트가 형식적인 제약을 넘어서는 풍성한 대화관계를 구축함으로써 드러난다.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의 대화뿐만 아니라 작품 속 허구와 일상의 실재가 넘나들고, 시공간을 오고가는 연관성을 마련함으로써 전혀 다른 형질의 새로운 텍스트망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기차는 8시에 떠나네(To Treno Fevgi Stis Ochto)>는 조수미의 노래로 들어서는 안 돼.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맑아. 게다가 소설가 신경숙의 번안은 시작부터 잘못되어 있어 첫줄의 번안이 노래 부르기에 적합하지 않아, 남녀 간의 값싼 사랑과 이별만 있을 뿐, 가슴에 칼을 품고 음습한 안개 속에서 비장하게 기차를 기다리는 레지스탕스의 깊은 고뇌가 없어. 그 노래는 원래 그대로 가사의 내용만을 머리에 넣은 채 그리스어로 들어 그래야 그 속에 스며있는 레지스탕스 출신 작곡가 미키스 데오도라키스의 고뇌와 삶이, 목로에 혼자 앉아 마시던 보드카보다 독한 술 우오조(ouzo)의 독기가 품어져 나와. 그 노래는 만돌린보다 청아한 부주키(bouzouki)의 반주로 듣는 해리스 알렉슈 (Haris Alexiou)거나 차라리 가사를 걷어내고 빗소리를 배경으로 듣는 김지연의 바이올린 독주가 옳아. <기차는 8시에 떠나네>는 조수미의 노래로 들어서는 안 돼.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맑아.

-. 예향 중 . <12 해리스 알렉슈 (Haris Alexiou). ‘기차는 8시에 떠나네.’> 중에서(각주 생략)

 

이 작품은 <기차는 8시에 떠나네>를 중심으로 연관된 텍스트 사이의 상관망이 향유의 핵심이다. 해리스 알렉슈의 원곡과 조수미의 노래 그리고 신경숙의 소설에 드러난 가사, 김지연의 바이올린 독주 등이 상호텍스트성을 형성하게 된다. 서로 다른 시공간적 현재성을 토대로 해리스 알렉슈와 조수미가 부른 두 개의 텍스트가 되고, 소설이나 바이올린 독주라는 다른 언어로 구현한 또 다른 두 개의 텍스트가 된다. 거기에 그러한 상이한 네 개의 텍스트를 시적으로 형상화한 이 시까지 또 다른 상호텍스트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구현된 상호텍스트성은 각기 다른 네 개의 텍스트를 얼마나 향유했는가에 따라서 그 넓이와 깊이가 달라지고, 향유자의 사회문화적 맥락에 따라서 또 달라지는 매우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향유로 확대될 수 있다.

<7 데자뷰. 라 보엠-이중섭거리에서>에서 구현된 상호텍스트성을 보다 구체적이고 역동적이다.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은 이중섭이 등장하는 밀다원 시대로 환치되고, 이것은 다시 김용범 자신의 오페라 <나는 이중섭이다>와 연결됨으로써 보다 구체화된 대화를 형성한다. 예술과 가난한 현실 속에서 갈등하는 젊은 예술가들의 성장과 좌절을 매개로 세 텍스트가 상관됨으로써 좀더 풍성한 텍스트성을 확보하게 된다.

김용범은 이와 같은 다양한 융합을 통하여 다성성을 지향하고 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제 각각의 목소리로 소란스럽고, 그 소란스러운 만큼의 다양성으로 우리 삶의 지평이 확장되고 깊어질 수 있는 그런 다성성의 세계는 그가 최근 다다른 또 다른 언덕이다. 그것은 선형적인 전개를 보이며 어딘가를 향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개개의 존재, 존재의 각자 몫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지지하는 매우 다원적(多元的)이고 리좀(rhizome)적인 전개에 가깝다. 어디가 중심이 아니라 모두가 중심일 수 있는 자유로운 사고와 지평! 그런 까닭에 김용범의 융합의 다성성에는 푸른 활기가 있다. 하지만 그 활기는 완숙의 경지에 이르러서 비로소 발견한 푸른 활기라는 점에서 미숙한 젊음의 그것과는 다르다. 하여 그가 노마십가에서 보여주는 시들은 자유롭고 넉넉하지만 그 안의 긴장을 유지하고 있으며, 개개의 작품 모두 각기 독립적인 세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지고 가는 멍에의 의지

 

노마십가는 정리나 마무리가 아닌 또 다른 시작의 알림이며 날마다 새로워지겠다는 시인의 의지다. 그는 서문에서 노마십가’(駑馬十駕)의 의미를 비록 무거운 멍에를 짊어지고 있는 비루먹은 말일지라도 한 걸음 한걸음 쉬지 않고 간다면, 빠른 말이 하루에 간 그 거리만큼 끝내 따라 갈 수 있으리라는 金言이라고 했다. 혹자는 여기서 겸손을 읽을지 모르겠으나 오랫동안 그의 시를 읽어온 필자에게는 단호한 의지로만 보였다. 그것은 끝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번 시집에서 그가 보여준 준열한 시적 긴장과 치열한 실험 그리고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변경을 찾아가려는 유목의 정신에 기인한 것이다. 항상 열매와 꽃을 함께 달고 있는 운화(雲華의 메타포는 그동안 십여 권의 시집마다 보여주었던 변화와 갱신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제 우리는 김용범이 지난 온 시의 영토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지나온 40년의 시력도 시력이지만 앞으로 스스로 멍에를 지고 찾아갈 새로운 영토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 기대는 지난 40년간 그의 시가 보여주었던 단단한 열매와 지금도 피우고 있는 꽃에 대한 신뢰이기도 하다. 그의 표현에 의지해서 표현해본다면, 김용범의 시를 읽는 일은 수 억 만 개 별들로 / 우려낸 차 한 잔을 만나는 것이기에 지독하고 아름다운 현기(眩氣)’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 비루먹은 말이라 칭하며 자신의 멍에를 지고 쉬지 않고 가겠다는 그의 선언은 그의 스승인 목월선생의 향나무 연필처럼 밤마다 유목의 변경을 끊임없이 떠돌며 시어를 벼리겠다는 아름다운 멍에의 의지. 스스로 짊어지고 가는 멍에의 역설, 그 아름다운 멍에를 향한 지독한 의지에서 노마십가의 이정(里程)을 가늠해 볼 것이다. 하여 나는 낮은 소리로 지워지고 있는 바람의 후면을 읽거나 겨울 쪽으로 기우러져안개 속을 차갑게 걸어갈 그가 낯선 영토에서 순해진 귀(耳順)로 듣고 이야기해줄 그의 시가 아직도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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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과 굴절로서의 여성 이미지

- 아오마메와 은교 사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1.

문학은 세계를 언어화하여 재현하려는 욕망의 발현이다. 재현은 세계의 상상적 재구조화를 통하여 현실의 재맥락화를 기도하는 가치 지향적이고 정치적인 성격을 지닌다. 문학은 세계 안으로 들어가서 세계를 회의견제하고, 세계는 다시 문학을 견인해내는 상호침투적 양상을 고려할 때, 재현을 통한 세계의 이해는 현실의 가치와 권력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더구나 문학은 물론 여타 장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재현이 언어를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점에 주목해볼 때, 그 발현은 내재적이고 심층적인 양상을 드러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세계를 언어로 재현하는 과정에서 언어에 내재해 있는 가치체계를 바탕으로 세계를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기존의 가치체계와 사유방식을 자연스럽게 언어를 통해 수용하고,[각주:1] 이를 기반으로 세계를 인식하며 그 결과를 구현해낸 것이 텍스트라고 할 때, 텍스트를 읽는 행위 자체가 이미 기존 가치체계의 확대 재생산의 한 축으로서 기능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 가치체계와 세계 인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재현의 순환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확보하고 있는 비판적 거리나 회의적 각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글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이 글은 우리사회가 다양한 이름으로 다양한 층위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드러내고 있는 음란한 판타지에 주목하고, 그러한 공모를 적극적으로 합리화하고 있는 여성 이미지의 왜곡과 굴절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2.

한류[각주:2]라는 호명(Interpellation)을 통하여 소녀들을 어린 여성으로 환치하고, 섹스 어필할 수 있는 이미지를 전면화하는 과정을 정당화하고 더 나아가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만드는 지금 이곳의 질서는 주체적인 여성, 주도적인 여성, 완벽한 여성 따위로 포장된 타자성의 극단에 다름 아니다. 한류1999<북경청년보>에서 중국 내 급부상한 한국 대중문화의 주도적인 흐름을 지칭했던 말인데, 이것이 문화콘텐츠 산업의 사회문화 경제적 가치와 한국 문화의 세계화라는 다소 실체가 불분명한 국가주의적 발상이 교묘하게 어우러지면서 한국 문화콘텐츠 시장 정체를 호명한 결과이다.

이러한 호명의 결과는 우리 문화 콘텐츠임에도 불구하고 중심 타깃이 밖으로 향해 있거나 자본 및 시장에 의한 텍스트 지배와 같은 기형적인 결과를 낳고 있기도 하다. 특히 심각한 것은 문화콘텐츠의 왜곡과 편중화 현상이다. 초기 한류는 <사랑이 뭐길래>, <별은 내가슴에>, <겨울연가>, <대장금> 등이 가부장권을 내면화한 가족주의, 순애(純愛)의 향수, 주도적 여성 이미지의 전면화 등으로 시장에 접근하고 주도했었다.[각주:3] 이러한 흐름은 소위 아이돌 그룹, 걸그룹이라는 이름으로 롤리타의 분위기는 확보하면서도 윤리적 부담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도록 15-17세 전후의 어린 여성을 20대 초반의 멤버들 사이에 포진시키는 전략과 섹스 어필의 단일 코드로 퍼포먼스를 구성해내는 전략으로 전환되었다.

걸그룹 멤버들의 이러한 선정적인 코드는 꿀벅지”, “하의 실종등과 같은 신조어로 보편화되고 자연스러운 수용을 요구한다. 꿀벅지는 핥으면 꿀맛 날 것 같은 허벅지, 꿀처럼 달콤한 허벅지, 꿀을 바른 듯한 매끄러운 허벅지 등 다양한 해석들이 제기되고 있으나, 현재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뜻은 가늘고 마른 허벅지가 아닌 탄탄하고 건강미가 있는 허벅지(밑줄과 원문자는 인용자)[각주:4]를 의미한다고 한다. 위키디피아의 정의도 섬세하게 읽어보면 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패티시즘(fetishism)으로로 읽을 수 있는 의 의미를 내포적으로 함유하고 있으면서도 사회적으로는 의 의미를 전면화할 수 있는 의미의 이중 구조가 그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이중구조는 2007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원더걸스의 <Tell me> 안무인 가슴털기 춤에서도 잘 드러난다. 2007년 당시 중학생 멤버부터 십대 후반의 멤버들과 20대 초반으로 구성되었던 원더걸스는 선정성을 전면화한 그룹이가기보다는 풋풋한 소녀그룹으로 포지셔닝 되었다. 이러한 포지셔닝은 그들이 추는 가슴털기 춤이라는 다소 선정적일 수 있는 안무를 이중의 구조로 즐기게 하였다. 가슴털기 춤의 성적 코드는 내면화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소녀그룹의 귀여운 안무로 치환시킴으로써 윤리적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원더걸스의 성공 이후 소녀시대의 <Gee>를 비롯한 일련의 노래와 안무, 카라가 <미스터>에서 보여준 맥락 없이 노골적인 엉덩이춤 등 수다한 걸그룹들의 선정적이며 섹스 어필하는 안무는 꿀벅지, 하의실종 등의 신조어로 중화됨으로써 보편화되는 결과를 낳았다.[각주:5]

 원더걸스의 가슴털기 춤()과 카라의 엉덩이춤()

문제는 그것이 선정적인 코드를 전면화하고 있다는 사실보다는 그러한 단일 코드의 전면화 과정에서 여성 이미지는 철저히 타자의 이미지로 드러나게 되고, 그것은 여성 주체의 왜곡을 결과한다는 점이다. 더구나 그러한 왜곡이 걸그룹, 한류, 문화콘텐츠 등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경제적 부가가치의 놀라운 성과 등에 의해서 포장되는 지금 이곳의 주도적 흐름은 우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 대중문화의 영역 안에서 이러한 타자화는 피할 수 없는 숙명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속성이 주도적인 흐름을 이루고, 그것이 예외 없는 단일코드로 전면화될 때 그것의 영향이 현실로 침투해 들어올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자발성에 기반한 향유가 대중문화의 대표적인 속성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대중문화의 영역 안으로 공급되는 여성 이미지의 획일화와 타자화 현상은 왜곡된 모습으로 현실에 전면적인 공세를 가할 것이 분명하다.

 

3.

은교[각주:6]에는 은교가 없다. ‘위대한 시인이적요의 가슴을 흔들어놓은 은교는 불멸의 처녀성을 상징한다지만, 정작 은교에는 은교가 없다. 이 작품에서는 은교 대신 이적요의 은교를 향한 뜨거운 갈망과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의 긍정 그리고 현재적 시간의 자기 부정이 들끓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이적요의 이율배반적 갈망의 시선 사이사이를 은교를 매개로 한 서지우의 오이디푸스적 도발이 가로 지른다. 거기에 3자적 시선으로 은교를 바라보는 Q변호사의 시선이 더해질 뿐이다. 따라서 은교에서 은교는 남성 욕망의 등가물이거나 남성적 시선의 구성물일 뿐, 은교 그 자신은 아니다.

 

영숙이나 영자가 아닌, 여자로 생각하지 않게 하는 중성적인 느낌이어서 은교라고 이름 지었다. 은교는 롤리타와 다르다. 은교는 열일곱이 아니라 스물다섯이어도 되고, 서른이어도 된다. 심지어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중요치 않다. 열망하는 절대적인 존재다.[각주:7]

 

남주인공은 70세고 여주인공은 17세 소녀죠. 평생 자기 절제를 해온 노시인에게 나타난 은교는 단순히 젊은 아이가 아니에요. 불멸의 처녀성을 뜻하지요. 처녀가 늙어 애 낳고 시집가고 그러는 것은 노인의 머릿속에 없는 거예요.[각주:8]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은교는 보부아르가 2의 성에서 이야기 했던 타자성의 영역에서 파악할 수 있다. 타자성의 논리에 따르면 자아에 대한 의식은 타자와의 대립관계 속에서 파악할 수 있으며, 타자는 자아가 긍정적인 정체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타자는 스스로 뚜렷한 정체를 드러냄으로써 분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아와의 대립적 분별에 의해 구성된다. 이적요의 노트와 서지우의 일기를 중심 매개로 구현되는 은교는 그것을 기록하는 이적요와 서지우의 타자이며, 그 궁극에는 이적요와 서지우의 자아에 대한 구성 인식이 깔려 있다.

가 남성 욕망의 판타지 안에 존재하는 절대적 타자로서의 은교 이미지라면 는 텍스트의 맥락 위에서 이적요의 갈망을 설득하기 위한 은교의 이미지다. 문제는 든 간에 은교 스스로 발현하는 은교의 이미지가 아니라 은교를 통해 보고 싶어 하는 갈망의 대상으로서의 은교 이미지라는 점이다. 특히 의 구현 과정에서 서지우의 서사가 개입됨으로써 은교는 질투와 욕망의 대상으로 드러남으로써 은교의 실체는 점점 더 모호해진다. 작가가 작품 곳곳에서 은교의 입으로 발화시키고 있는 유행어들은 이적요와의 시간을 드러내기 위한 기제로 사용된 것이지만, 그것이 은교의 캐릭터를 구성하지는 못한다.

일반적인 남성적 시선 속에서 여성의 이미지는 유혹하는 여성, 더 연약한 그릇, 완벽한 여성, 악녀[각주:9] 등으로 범주화할 수 있다고 한다. 유혹하는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고 도덕적인 책망이나 징벌을 받아야 하는 인물이며, 더 연약한 그릇은 자손 생산의 지배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말하며, 완벽한 여성은 육체적 순결과 복종이라는 남성적 강요를 온전히 충족시키는 여성을 의미하고, 악녀는 매력적이지도 순종적이지도 않지만 남자를 원하는 여성으로 처벌의 대상이 되는 여성의 이미지를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은교는 어느 한 이미지로 고착되지 않고 네 요소를 조금씩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이미지로 제시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에서 은교는 스스로 드러내기보다 이적요나 서지우 심지어 Q변호사의 시선을 통해서 재현되고 있는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 이적요를 몰매로부터 지켜 준 D나 얼을 낳은 친구의 동생이나 오십대의 그를 만나던 M 그리고 안마시술소의 여자 등 모두 여성의 구체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남성 판타지 안에 전형들로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시선과 인식은 은교가 은교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은교를 매개로 한 늙고 병들어가는 남성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늙어감에 대한 성찰을 은교를 한 축으로 육체와 욕망의 문제에 대하여 전개하고 있다면, 오이디푸스적 애증을 드러내는 서지우와의 갈등을 통해서 사회적 자아의 페르소나를 성찰하고 있다. 서지우와의 갈등의 마디마디 마다 은교를 매개함으로써 은교의 중심이 늙고 노쇠해가는 육체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수용하고 싶지 않은 부단한 욕망의 발기에 대한 문제를 다양한 층위로 드러내고 있다. 은교가 이적요의 불멸의 처녀성이 되는 이유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신화화된 여성(Woman)'은 남성들의 꿈과 이상, 공포들이 발생하는 상상의 장소이다. 여러 문화들에서 여성성은 자연이나 아름다움, 순수, 선을 나타낼 뿐 아니라 악이나 마력, 타락, 죽음을 묘사한다. 보브아르에 따르면 남성들이 끊임없이 여성들을 그들의 타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남성들에 의해 재현되는 여성이중적이고 기만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다. 그녀는 선한 것으로부터 악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미덕들뿐만 아니라 그 미덕들에 반대되는 것들도 구현하고 있다.남성은 자신이 욕망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 또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을 동시에 여성에게 투사한다.[각주:10]

 

은교의 중심은 이적요 자신이다. 은교는 그 욕망의 고갱이로서 노쇠함에 대한 분노와 공포, 젊음에 대한 갈망, 무능력한 젊음에 대한 질투와 분노, 문학적 권위에 대한 비아냥과 부정 등을 드러내는 중심 매개일 뿐 살아있는 은교 자신은 아니다. 이적요가 꿈꾸는 젊음과 사랑의 갈망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로망이라는 절망적 인식과 한계를 가장 밑바닥에 두고 서지우와의 오이디푸스적 긴장을 보여주는 이 작품의 완성도를 결정지은 것은 그 모든 것이 은교를 매개로 전개되어 간다는 점이다. 그것이 구현하고 있는 은교의 이미지가 관절 인형처럼 진공의 의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결정적인 아쉬움을 갖지만 그것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작품의 매듭과 결만은 결코 만만한 내공이 아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다만, 이 둘이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러한 양자 사이의 불균형은 작가의 실존적 고뇌가 이적요에게 지나치게 투사된 결과라고 하더라도 중심 매개인 은교를 진공의 상태로 두고서는 어떠한 답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작품의 끝부분에 이적요의 노트와 서지우의 일기를 태워버리는 장면에서 비로소 은교가 실존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실존의 한계를 거부하는 갈망의 답을 어디서 찾을 수 있으며, 남성 판타지 안의 관절인형과 같은 은교가 무슨 답을 줄 수 있다는 말인가?

은교를 만나는 내내 영화 <은교>의 구성과 이미지가 떠나지 않았다. 소설이 지니고 있던 이적요와 서지우의 오이디푸스적 긴장을 소거시키고 은교를 매개로 한 일차원적 갈등만을 전면화하고, 은교에 대한 이적요의 갈망을 설득하기 위해 다소 지루할 정도의 서사 전개를 보여준 영화 <은교>는 선택적이고 분명하다는 점에서 전략적인 텍스트임에 분명하다. 다소 작위적이었지만 70살 노인의 남루한 육체를 극단화하기 위해 무기력한 성기를 노출한다거나 17살 여자아이의 생기발랄한 육체와 젊음을 보여주기 위해 수줍은 듯 드러나는 체모 역시 지극히 전략적인 배치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교의 다층적이고 내면화된 갈망의 정체나 갈등이 전혀 드러나지 못함으로써 은교의 몸만 앞으로 전면화 되고, 소설에서 가져온 에피소드임에도 불구하고 설득의 맥락을 놓쳐버림으로써 소설이 지닌 다층적인 의미 맥락을 모두 훼손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작품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기보다는 원천콘텐츠의 매력적인 요소들 중에서 은교의 투명한 젊음을 전면화하려는 선택이 전략적 유효성을 확보하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4.

 

은교를 읽으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와 천명관의 고래가 떠오른 것도 참 맥락 없는 일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와는 대필이라는 소재적 유사성과 신비함의 베일에 가려진 후카에리와 강건한 육체와 정신으로 주체적인 삶을 지향하지만 자폐적 공간을 고집하는 아오마메의 이미지에 압도되었고, 천명관의 고래는 금복과 춘희라는 강렬한 캐릭터의 이미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은교의 은교가 텅 빈 타자의 기표라면 1Q84고래의 그녀들은 삶의 주인으로서 자신들의 문제에 대면함으로써 자아의 정체를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기표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자아의 정체는 사건과 대면하면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고 구축된다는 의미에 보다 더 가깝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만나야 할 남성들을 주도적으로 선택하고 그들과의 성관계 역시 주체적으로 전개하며, 옳고 그름의 판단에 있어서 자신이 중심이 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과 부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종교 공동체로부터 탈출하고, 리틀피플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소설을 구술하고, 덴고에게 대필을 허락하는 후카에리의 모습이나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하여 킬러가 되고, 자기 취향의 남자를 취하여 성관계를 나누고, 심지어 처녀수태의 상황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출산을 결정하는 아오마메의 이미지는 주체적이다. 남성적 시선 안에 갇혀 기술되는 타자로서의 이미지가 아니라 스스로의 이미지를 만들고 구축해나가는 여성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고래의 금복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해 나가면서 견고한 남성들의 질서 안에서 스스로의 주인으로 살아남는다. 금복에게서 어머니로서의 기표를 소거시키고, 그 트라우마로 자기 안의 세계에 갇혔지만 스스로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춘희 역시 지금껏 보아온 여성 이미지와는 동떨어져 있다. 성욕, 사냥, 성취, 주체적 결정, 이성적 사고 등등 남성적 기표를 드러내고 있는 금복과 춘희는 전통적인 여성 이미지에 전략적으로 저항하고 있다. 그녀들은 순결한 처녀나 창녀, 불감증 아니면 색광, 순결하거나 음탕하다는 여성에 대한 극단의 성적 규제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면서 주도적으로 성욕을 해소하고 성 관계를 만들어가는 모습이 차라리 당당하고 건강해 보이는 것도 이채롭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천명관이 보여주는 낯설지만 당당하고 주체적인 여성의 이미지는 남성에 의한 여성적 재현이 남성 권력의 확대재생산이나 성취될 수 없는 갈망의 판타지의 매개로 설정되는 여성 이미지와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지점이다. 다만, 이러한 전복적이고 저항적인 이미지가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이미지로 다가오는 것은 공공한 남성 권력과 언어의 재현으로 학습된 편견의 결과이거나 그들이 처한 맥락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은 아닐까? 아오마메가 스스로 규정했듯이 1984년이 아닌 1Q84의 공간, 금복이나 춘희가 살고 있는 다소 우화적인 공간 설정도 역시 비현실적 시공간 설정을 통하여 타자가 아닌 자아의 정체에 다가가려는 전략적 선택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저항과 전복 그리고 갱신의 시도는 시에서 성()을 매개로 래디컬하게 전개된 바 있다.

 

() 온몸에 남은 푸른 이빨자국들을 / 사랑할께요 시퍼렇게 / 사랑할께요 가지말아요 / 버리지 말아요 나의 / 기둥서방 당신 / 붙잡을 바짓가랭이도 없는 당신 / 입에서 항문으로 / 당신의 음경에 / 꼬치 꿰인 채 / 뜨거운 전기오븐 속을 / 빙글빙글빙글 / 영겁회귀 / 돌고 돌께요 간도 / 쓸개도 없이

김언희, <늙은 창녀의 노래2> 부분

 

() 입을 맞춰 줘됐어이젠×핥아기분이 좋아이리와너의 성기를 빨고 싶어냄새가 좋아이젠 너의 것을 내 항문으로집어넣어그렇게이번엔가죽혁띠를 가져와나의 등을 때려세게세게세게…ⓔ어머니의젖을 빨고 자랐을 테지…ⓕ오늘은내 젖무덤에오줌을 갈겨따뜻해됐어…ⓖ네가 더럽혔으니깨끗하게네 입술로 닦아 줘그래그래젖처럼달지어린시절로돌아가는 것같지?

장정일, <늙은 창녀> 부분

 

()에서 시적화자인 늙은 창녀는 이미 대상화되어 있는데, 그것은 꼬치로 꿰이거나 전기오븐에 들어간다는 진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녀는 전기오븐의 회전판이 도는 속도와 방향에 따라 돌아가는 대상화된 존재라는 것이다. 그녀의 기둥서방인 당신은 붙잡을 가랭이도 없지만 󰠏󰠏󰠏 실체를 알 수 없지만 그녀를 자신의 음경으로 입에서 항문까지 꼬치 꿰어 돌릴 수 있는 권력의 소유자이다. 실체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녀를 매달고 대상화시킬 수 있는 것은 남성 권력의 자기 증식적 욕망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는 자신의 의지가 괄호 속에 묶인 것도 모른 채 헛된 욕망의 회로 노릇을 해온 자신에 대한 모멸적인 인식이다. 이러한 모멸적 자기 인식을 통하여 타자화된 자신의 이미지를 조응하고, 언어적 도구의 폭력적 구사를 통하여 그 체계의 허구성에 틈을 내려는 시도다.

()는 포르노적 상상력을 전략적으로 수용하여 자기모멸을 그 극단까지 보낸 경우이다. 이와 같은 포르노적 상상력은, 정상적인 성행위를 거부하고 일탈적인 행위를 요구함으로써 욕망이 은폐하고 있는 낱낱의 실체를 까발리기 위한 것이다. 순수한 욕망의 표현인 에서 자신의 젖무덤에 오줌을 갈기게 함으로써 모욕하고, 와 다시 대비시키는 위악적(僞惡的)인 포즈를 통해서, 의 순순한 욕망을 전복시키는 것이다. , 의 순수하고 본능적인 행위를 의 불결하고 타락한 행위를 의도적으로 요구함으로써 의 행위를 훼손시키려는 전략이다. 의 배설은 를 모욕하기 위한 것이다.[각주:11]

()()는 포르노그라피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성중심의 계몽적 사고와 남성중심의 세계 인식에 연결된 권력과 억압 그리고 재현 체계에 대하여 극단적인 저항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도들이 저항의 단초로서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은교가 남성적 갈망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듯 아오마메나 금복은 1Q84거나 우화적 세계를 전제로 스스로를 갱신하고 있으며, 김언희나 장정일의 창녀들 역시 포르노그라피의 가장 거친 형태의 상상력 안에서만 저항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우리 논의는 다시 천천히 역순으로 돌아와야 한다. 저항적 관점에서의 리터러시를 통하여 견고한 서사 전략 안에 왜곡된 여성적 이미지를 읽어내고, 그 왜곡의 시도가 언어적 재현을 통하여 타자의 영역에서 강요된 정체를 갖게 하려는 지금 이곳의 지배적 질서로부터 발생하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을 바탕으로 유혹하는 여성이 아니라 욕망하는 여성, 연약한 그릇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개별성으로 충일한 여성, 완벽한 여성이 아니라 나와 같은 갈망을 지닌 여성, 악녀가 아니라 그녀로서의 여성상이 좀 더 다양한 차원에서 다양한 맥락과 함께 탐구되어야 한다. 은교에서 은교를 보고 싶은 이유다.

 

  1. 인간은 언어를 벗어나 사고할 수 없기 때문에 언어는 사고를 결정한다. 따라서 ‘지금 이곳’에서 사용되는 언어들은 ‘지금 이곳’의 지배적 사고를 넘어설 수 없고, 오히려 그것들을 바르트가 말하는 신화로서 확대재생산한다. 그 결과가 언어 안에서 생산되고 확장되는 일상의 파시즘이다. [본문으로]
  2. 한류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박기수, 한류의 지속 방안을 위한 인문학적 성찰, 《인문콘텐츠》6호, (2005. 인문콘텐츠학회)를 참고하라. [본문으로]
  3. 한류를 주도했던 드라마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박기수, <겨울연가> 문제는 서사다, 《겨울연가, 콘텐츠와 콘텍스트 사이》 (2005, 다미디어)를 참고하라. [본문으로]
  4. http://ko.wikipedia.org/wiki/%EA%BF%80%EB%B2%85%EC%A7%80 [본문으로]
  5. 물론 그것의 반작용으로 오디션프로그램을 중심으로 하는 노래로만 승부하는 뮤지션들이 등장하게 되고, <나는 가수다>와 같은 실력파 뮤지션들에 대한 갈망을 파악할 수도 있었다 [본문으로]
  6. 박범신, 《은교》 문학동네, 2012. 이 글에서는 소설은 《은교》, 영화는 <은교>로 표기할 것이다. [본문으로]
  7. 고재열, <은교>가 왜? 욕망은 나이가 없다,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24 [본문으로]
  8. 이지은, 젊은 여자들이 지나갈 때 삶이 아득… “꽃이 그냥 저만치에 있는 거지”, 동아일보, 2012.5.23, http://news.donga.com/3/all/20120523/46446697/1 [본문으로]
  9. 팸 모리스 /강희원 역, 《문학과 페미니즘》 문예출판사, 1997, pp.66-67. [본문으로]
  10. 팸 모리스, 앞의 책, p.34 [본문으로]
  11. 박기수, 배설없는 시대의 숙변, 《오늘의 문예비평》 1999년 겨울호 p14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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