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나라

730일 앨버커키산타페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어젯밤 앨버커키(Albuquerque)에 자정을 한참 지나 도착해서 씻고 정리하다 늦게 잠든 탓에 다들 아침이 힘든 모양이었다. 앞으로 묶게 될 숙소들에 비해 무척 럭셔리한 앨버커키 숙소에서는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정작 숙소에 머물 시간이 없어서 아쉬웠다. 조금 늦게 일어나 씻고 나갈 준비를 마치니 9시였다.

한참 외모에 신경 쓸 나이인 딸이 둘이다보니 아침에 나갈 준비하는 하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 게다가 미국에 와서는 머리를 자르지 못한 탓에 머리를 감고 말리는 시간이 상당했다. 평소 효진이는 밤에 머리를 감고 아침에는 빗고만 나가는 고육지책을 쓰는데, 어제는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머리를 감지 못하고 잠이 들었고, 덕분에 아침이 더욱 분주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어린 시절 우리 집 아침 풍경이 떠올랐다. 누나 둘, 여동생, 남동생 그리고 나까지 매일 아침 북새통을 떨었을 모습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났다. 마당에 있는 수돗가에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서는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던 초등학교 시절, 샴푸가 막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누나들은 머리를 감기 위해 물을 끓여야 했고 그만큼 더 분주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금처럼 드라이어가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누나들의 아침은 얼마나 더 분주했으랴? 누구보다 아침밥과 도시락을 준비하시며 오남매의 등교준비를 도와주시던 할머니의 고생은 또 오죽했으랴?

빨리 출발해야 한다는 아빠의 분주한 마음과는 상관없이 앨버커키 쉐라톤 호텔 로비에 놓인 매력적인 체스판을 떠나지 못하는 아이들.

혼자서 옛날 생각을 하는 동안 얼추 준비가 끝난 모양이었다. 체크아웃을 하기 위해서 호텔 로비로 나서는데 커다란 체스판이 보였다. 장식용인지 실제 경기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새 아이들은 체스판 앞에 앉아 있었다. 출발이 급했던 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몇 번의 성화 끝에 결국 체스판에서 일어났다.

이곳 호텔에서는 아침을 무료로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어제 호텔로 들어오면서 식당을 찾아보았는데, 마침 근처에 I-HOP[각주:1]가 있었다. I-HOP에는 아침인데도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원래 가격도 비싼 편은 아니지만 아침 메뉴는 더 저렴한 편이고, 근처에 패스트푸드점을 제외하고는 마땅한 식당도 없었기 때문이다. I-HOP도 대부분의 미국식당이 그렇듯 음식 주문 전에 음료수 주문을 먼저 받았다. 커피를 주문했더니 I-HOP 특유의 스테인리스 보온병에 가득 커피를 담아다 줬다. 5-6잔을 따라 마시고 리필을 부탁하면 다시 가득 채워다 줬다.

패스트푸드점에서 흔히 만나는 무한리필 음료수대다. 이 근처에 앉아있으면 풍요가 왜 병이 될 수밖에 없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미국에서 무한 리필이 새로울 것은 없었다. 대부분의 패스트푸드점에 가면 음료수는 무한리필이다. 아예 음료수 기계를 객장 쪽으로 설치해두고 계산대에서는 컵만 나누어준다. 재미있는 것은 컵 사이즈별로 가격이 다르다는 점이다. 어차피 무한리필인데 컵 사이즈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어쨌든 그들은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라지 사이즈 컵에 가득 콜라를 따라 마시며 몇 번이나 리필해서 마신다. 고열량의 음식을 섭취하면서 끊임없이 탄산음료를 마셔대는 그들의 몸은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뚱뚱하다. “미국인의 61% 정도가 과체중이고, 그 가운데 27% 정도가 비만환자로서 미국에서 비만은 이미 흡연보다 중대한 질병[각주:2]으로 취급되고 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미국에서는 풍요가 병이 되고 있었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입고 쓰는 모든 것이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저렴하고 넉넉하다. 곳간이 그득해서 넉넉하게 먹고 쓴다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이야기할지는 모르겠으나 정말 이 모든 것이 그들의 노력으로 쌓아둔 그들의 곳간에서만 나오는 것일까? 그들만의 풍요는 이민자들의 저임금 노동과 제3세계의 보이지 않는 희생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만의 풍요를 위해 타자의 희생을 강요하고 그 결과 자신들의 건강까지 해치고 있는 아이러니의 중심에는 미국이라는 국가가 아닌 이제는 그들도 어쩌지 못하는 거대 자본의 무한 증식 논리가 있는 것이다.

 

앨버커키 도심의 현대적 건물과 그 사이사이 멕시코 전통문양이 삽입된 장식. 시내 곳곳에 자신들의 고유 문양을 다양한 방식으로 꾸며 놓고 있다. 인디언의 땅에 스페인이 도시를 건설하고, 멕시코의 지배를 받다가 지금은 미국인 땅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고민하게 하는 도심이었다.

아침을 먹고 바로 산타페(Santa Fe)로 떠나기로 했다. 그래도 아쉬워 앨버커키 시내라도 보자고 가다보니 뉴멕시코 대학교(University of New Mexico, UNM) 앞까지 가게 되었다. Route66이 앨버커키 도심을 관통하기 때문인지 현대식 건물과 다소 쇠락한 분위기의 시가가 학교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1706년 스페인인 사람들에 의해 이 도시는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곳인들 왜 원주민이 없었을까마는 그들 역시 인디언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역사에서 지워져 버렸다. 앨버커키는 1880년 철도가 건설되고, 1930년대 Route66이 이곳을 관통하면서 도시로서 발전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 인텔(Intel)이 인근에 들어오면서 급성장을 했다고 한다.

뉴멕시코 대학교에 대해서는 인류학과 사진학으로 유명하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러니 시간을 내서 둘러보면 좋으련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뉴멕시코 대학교는 어도비 양식의 건물들로 자신들의 정체와 지향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학교 앞은 여느 대학의 거리처럼 자유롭고 활기찬 분위기였다. 앨버커키가 자랑하는 올드타운 플라자(Old Town Plaza)와 앨버커키 국제 열기구 축제(Albuquerque International Balloon Fiesta)는 시간이 부족하고 시기가 맞지 않아서 명성만 듣고 떠나야 했다.

뉴멕시코 대학교 앞의 풍경. 만화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벽화, 어머니의 음식 다음으로 맛있는 식당이라는 대학가다운 레스토랑 간판, 오래된 모자점, 정체는 알 수 없지만 개성만점의 벽화가 돋보이는 상점. 뉴멕시코 대학교의 어도비 양식의 건물들과 상반되는 화려하고 대담한 색상의 사용이 두드러졌다. 

앨버커키에서 산타페까지는 85마일(136)로 이번 여행의 평균 이동거리를 생각해보면 이동이랄 것도 없는 거리였다. 게다가 고속도로는 한산해서 예상보다 빨리 산타페에 도착했다. 고속도로를 내려서자마자 패션 아울렛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산타페 초입에 패션아울렛이 있으니 도시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쇼핑도 관광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어색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한국에 비해서 미국의 옷값은 무척 저렴한 편인데, 아울렛의 가격은 그것보다 더 저렴하니 경제적인 쇼핑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아울렛 입구에서 두 개의 할인쿠폰과 아울렛 라디오 홍보 티셔츠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할인쿠폰 한 장은 100달러 이상 구입하면 20%를 깎아준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쿠폰북이었다. 마침 세일 기간이어서 매장마다 할인을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추가로 더해주는 할인쿠폰이니 더욱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울렛 정상 가격의 30%를 할인해주는 매장에서 쇼핑을 하고 100달러가 넘어서 20% 쿠폰을 내고 계산을 하려는 순간, 아내가 25% 할인쿠폰을 내밀었다. 250달러가 넘으면 25%를 할인해주는 쿠폰이 쿠폰북 안에 있었던 것을 그제야 발견한 것이다. 추가 할인쿠폰은 두 개를 동시에 적용할 수 없으니, 좀 더 할인 폭이 큰 25%쿠폰으로 바꾸어 달라고 했더니 계산하던 직원이 당황을 했다. 잠시 후 그 직원보다 상급 직원이 와서 계산을 하더니 25% 할인을 했단다. 아무래도 미심쩍어서 정말 25%를 할인한 것 맞느냐고 몇 차례 물었고, 그들이 카운터의 계산기로 계산하는 것을 보았으니 믿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 와서 다시 계산해보니 역시 맞지 않았다. 몇 번을 계산해보아도 20% 할인을 했을 뿐, 25% 할인을 한 것이 아니다. 400달러 정도 쇼핑을 했으니 5%20달러 정도의 차이가 났다. 돈도 돈이지만 바보 취급을 당한 것 같아서 기분이 우선 나빴다. 다시 매장으로 갔다. 가서 그들 앞에서 계산이 잘못되었다고 했더니, 계산했던 그 직원은 정작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몰랐다. 보는 앞에서 20%25%를 계산해주었더니 그제야 자신의 계산이 틀렸음을 시인하고, 매장 책임자를 불렀다. 한국에서라면 간단하게 그 자리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책임자까지 부른 것이다. 매장의 책임자가 와서 전후사정을 듣더니 한 번 기계가 읽고 입력한 것은 쿠폰교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그들에게 화가 나서, 그렇다면 모두 환불하겠다고 하자, 그제야 25% 쿠폰으로 교체하여 주었다.

세도나와 알버커키에서 볼 것을 적은 아내의 메모

황당한 일이었다. 계산하는 직원이 전자계산기로 20%25% 계산도 하지 못한다는 것, 돌발 상황에 스스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점, 책임자 역시 앞의 주문을 취소하고 다시 계산하면 해결될 수 있는 일을 융통성 있게 처리하지 못한다는 점에 아내와 나는 놀랐다. 하지만 미국에 와서 겪어본 그들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모국어와 문화적 토양 위에서 영어를 사용하다보니 일정수준 이상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다보니 업무처리가 매뉴얼화 되지 않으면 효과적인 운영과 관리가 불가능한 것이다. 모든 것이 매뉴얼화 되어 있고 미국 사람들은 그것을 고집스러울 만큼 잘 따른다. 도로공사[각주:3]나 신호등 없는 교차로의 진행 순서[각주:4]와 같은 일에서부터 심지어 남자 화장실 예절[각주:5]에 이르기까지 매뉴얼을 숙지시키고 철저하게 지켜간다. 그러다보니 매뉴얼에 대한 숙지가 떨어지거나, 매뉴얼의 예외 사항에 대해서는 잘못 처리했을 경우, 책임은 오롯이 당사자의 몫[각주:6]이 된다. 아울렛에서의 소동은 유쾌한 일은 아니었지만 미국의 또 다른 면을 체험했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 있는 일이었다.

산타페 관광의 중심이라는 플라자(The Plaza)에 도착하고 보니 7월 내내 열리는 스페인 마켓이 열리고 있어서 매우 혼잡했다.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서 플라자를 중심으로 몇 바퀴를 돌다가 걸어서 10분쯤 떨어진 길가에 주차를 하고 성 프랜시스 대성당(St. Francis Cathedral)으로 갔다. 성 프랜시스 대성당이 거의 문 닫을 시간이어서 급하게 둘러보아야 했다. 성당으로 들어서자 햇빛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제 빛을 버리고 경건하게 아주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성당 안 중앙부의 가장 높은 곳에 걸려 있는 예수상은 양쪽의 아치형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과 고유의 붉은 빛이 어우러져 고통의 순간을 오히려 따듯하게 느껴지도록 만들고 있었다.

성 프랜시스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성당 중앙의 예수상, 성당의 외관, 어도비 양식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로마네스크양식의 성당 전경. 각도와 시간에 따라 빛을 달리는 성당의 모습도 무척 이채롭다. 

현재의 성 프랜시스 대성당은 라미 대주교(Archbishop Jean Baptiste Lamy)1869년에 시작해서 15년만인 1884년에 완성했단다. 성 프랜시스 대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주변과 차별화되고 있지만 주변의 빛깔을 수납하며 위압하지 않는 권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특히 성당 앞에는 최초의 인디언 출신 성자인 카레리 데카크위타(Kateri Takakwitha)의 모습은 정복자의 성자가 아닌 피지배자의 성자로서 위안을 주고 있었다.

성당 앞 광장에서는 7월 동안 스페인 마켓이 열리고 있어서 성당 쪽으로 차량 진입을 막고, 그곳에 천막을 치고 전통 수공예품과 예술작품을 비롯해서 음식들을 팔고 있었다. 걷기도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많은데다가 폐장 시간이 가까이 오니 좌판을 정리하는 분위기여서 더욱 어수선 했지만, 아이들 손을 잡고 천천히 둘러보니 정겨웠다. 소박한 수준의 것에서 매우 정교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의 좌판에서는 수공예로 제작된 가톨릭 성물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스페인 마켓 좌판에서 판매되고 있는 가톨릭 성물과 기념품점에서 판매되는 토착신앙이 결합된 성물 수공예품. 이 땅이 산타페(거룩한 믿음)이길 원했던 정복자들과 자신의 믿음을 지키려 했던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혼합된 결과다. 

산타페는 멕시코-미국 전쟁(Mexican-American War, 1846-1848)으로 미국의 영토가 되었지만, 푸에블로 인디언 문화와 히스패닉 문화가 결합한 독특한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원래 이 땅의 주인이었던 푸에블로 인디언들은 이곳을 햇살이 춤추는 곳이라고 불렀었는데, 정복자였던 스페인사람들은 산타페’, 거룩한 믿음(Holy Faith)’으로 불렀다고 한다. 각기 부르는 이름의 차이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푸에블로 인디언과 스페인 사람들의 이 땅에 대한 인식은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원래 주인이었던 푸에블로 인디언에게 이 땅은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 축복의 땅이었음에 비해, 정복자인 스페인 사람들의 눈에는 개종시켜야할 야만의 땅으로 대상화되었기 때문이다.

로레토 교회 전경과 로레토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모습. 

비교적 조화를 이루며 잘 지내던 이들이 갈등을 빚게 된 것도 푸에블로 인디언의 종교 의식을 악마의 의식으로 인식한 가톨릭의 관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멕시코에서는 16세기에 이러한 종교적 갈등[각주:7]으로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한 엄청난 대량 학살이 자행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가톨릭이 지배적인 종교가 되고 생활의 곳곳에서 절대적인 힘을 행사하는 것을 보면서 지독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복자들의 핍박으로 절대자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던 원주민의 비참한 삶과 그 결과 원주민들이 정복자의 종교로 들어가 그 안에서 평안을 갈구하는 아이러니한 순환의 고리가 씁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17세기 이후 가톨릭이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만나는 푸에블로 인디언의 문화와 종교적 색채가 그 안으로 스며들었고, 이것이 바로 산타페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로레토 교회 앞의 소박한 예수상과 기적의 계단을 안내하는 표지판

성 프랜시스 대성당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로레토 교회(Loretto Chapel)[각주:8]가 있었다. 교회 옆에 어른 서너 명이 맞잡아야 간신히 안을 수 있는 은행나무와 아주 소박하게 조각한 예수상이 좌우에서 정겨운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교회가 고딕양식(Gothic style)으로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색채가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런 풍경과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로레토 교회는 기적의 계단(Miraculous Staircase)과 못을 사용하지 않고 지은 건물로 유명하다. ‘기적의 계단은 성가대 자리와 연결된 나선형 모양의 계단으로 별도의 통로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갈 수 있는데, 우리는 주차가 늦어지면서 문을 닫아 볼 수 없었다. 이 교회는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나무로만 만들어진 것으로 유명하지만, 내게는 그보다 해질 무렵 내려앉은 석양과 어우러진 교회의 풍경이 더 인상적이었다. 교회 옆으로 청동으로 만든 기발한 형상의 바람개비들이 부지런히 돌고 있었고, 그 옆으로 작은 천막의 노점에서는 사람들의 작은 웃음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유쾌한 관광객들은 은행나무의 둘레에 서서 손을 맞잡고 웃고 있었고, 바람은 은행잎을 소리 내어 흔들고 있었다. 때마침 교회에서는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다. 덕분에 교회 내부를 볼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어서는 신부의 아름다운 미소와 그 뒤로 축복하듯 두 팔을 벌리고 선 소박한 예수상이 성스러웠다.

산타페 다운타운 상가의 멋스러운 간판들 

로레토 교회 근처의 다운타운 상가는 아주 독특한 활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다운타운의 멋스러운 상점이나 갤러리 등에서 사진을 찍어도 좋으냐고 물으면 예외 없이 밝고 활기찬 모습으로 허락해주었다. 상점마다 개성 만점의 간판을 내걸고 있었고, 표지판마다 재치가 넘쳤다. 다운타운의 상가나 노점에서 만나는 상인들은 대부분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특히 노점의 원주민들은 영어로 말을 건네도 스페인어로 답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건은 예상보다 비쌌지만 거침없고 유쾌한 수공예품들은 아주 매력적인 것이었다.

 

고추를 매달아 귀신을 물리치고 손님을 부른다는 리스트라()와 봄과 풍요를 약속하는 음악의 신인 코코펠리()

고추를 길게 묶어 걸어놓은 리스트라(ristra)나 호피족의 수호신이라는 코코펠리(Kokopelli)는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었다. 리스트라는 매운 것을 좋아하는 이곳 원주민들의 식생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지만, 귀신을 물리치고 손님을 환영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멕시코 음식점에 가면 붉은 고추를 길게 묶어놓은 리스트라를 보면서 그 의미를 물으면 대부분 그냥 고추 말리는 것이라고 맥 빠진 대답을 듣고는 했었는데, 산타페에 와서야 제대로 된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코코펠리는 봄과 풍요를 약속하는 음악의 신이란다. 코코펠리는 곱사등인데, 곱사등 안에 씨앗과 노래가 들었다는 호피족의 수호신이다. 리스트라와 코코펠리의 상상력은 즐겁고 간절한 희원이었다. 그 상상력은 절실한 만큼 소박하고, 신실한 만큼 재미있었다. 코코펠리는 캐릭터상품의 관점에서 보아도 디자인과 스토리텔링이 아주 뛰어난 캐릭터였다.

예술가의 도시답게 산타페 다운타운 곳곳에서 예술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어도비 건물이 늘어선 다운타운 거리에는 노점들이 내어놓은 수공예품과 함께, 예술작품들이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만지지 말고 눈으로만 보라는 어처구니없는 경고 문구 대신 자유롭게 보고, 만지고 즐기라는 듯이 거의 모든 작품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산타페 다운타운에서 만난 예술작품들

산타페 다운타운은 어도비(Adobe) 양식의 보고(寶庫)였다. 어도비는 원래 햇빛에 잘 말린 벽돌을 의미하는 말인데, 사막처럼 건조하고 일교차가 심해서 효과적인 단열이 필요한 지역에서 주로 활용을 했단다. 어도비는 모래, 진흙, , 나뭇가지, 거름 등을 넣어 만드는데 거름은 방충 작용을 한다고 한다. 어도비 양식은 저렴할 뿐만 아니라 내구성도 뛰어나 콘크리트보다 5-10배 정도 강하고, 기온과 습도를 유지하는 데에도 탁월한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유럽의 건축양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전통적인 푸에블로 인디언의 양식을 유럽에서 가져간 것이란다. 1950년대부터 뉴멕시코 주 정부는 산타페에서는 어도비 양식으로만 건물을 짓게 하고, 3층 이상의 건물을 짓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산타페 다운타운의 어도비 양식의 건물들

산타페 다운타운의 어도비 양식의 건물을 따라 걷다보면 유쾌한 작품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대부분의 수공예품들이 밝고 화려한 색깔로 치장하고 있으며, 표정과 몸짓이 더할 수 없이 즐거운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현실의 가혹한 면을 가사에 담고, 그 지독한 현실을 넘어서기 위한 의지는 후렴구에 담아 부름으로써 현실의 고뇌를 넘어서려했던 <청산별곡>처럼, 그들도 현실의 고단한 삶을 작품 속의 웃음을 통해 건너려 했던 것은 아닐까? 상점의 주인들도 대체로 밝고 친절한 모습이었지만, 노점에 나와 있는 원주민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거의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더할 수 없이 즐거운 표정과 몸짓을 보여주는 수공예품을 팔고 있는 모습은 무척 어색한 조화였다.

산타페 다운타운 상가에서 만난 춤추는 인디언()와 춤추는 곰()

숙소로 돌아오는 길의 시가지는 다운타운의 멋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낡고 쇠락한 것들이었다. 낡고 오래된 어도비 양식의 건물들이 쓰러질 듯 서 있었고, 간판들은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한 채 매달려 있었다. 붉은 색칠을 한 낡은 기차에는 흑백의 그림이 강렬하게 그려져 있었는데, 현대 원주민 예술 박물관(Museum if Contemporary Native Arts)에서 보았던 절제된 분노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 절제된 분노를 아는지 모르는지 도로 한 복판으로 기차가 지나고 있었다.

다운타운을 벗어난 산타페의 외곽은 또 다른 모습이었다. 붉은 기차에 흑백으로 그려진 원주민()과 부츠를 닦아준다고 써 붙인 원주민의 낡은 벤은 다운타운 노점에서 만났던 원주민의 무거운 표정처럼 느껴졌다. 

정지를 명령하는 붉은 신호등 옆으로 “DO NOT STOP IN BOX”라는 글귀가 쓸쓸한 위협처럼 쓰여 있었다. 문득 산타페에서 본 것과 보고도 보지 못한 것을 생각했다. 산타페는 많은 것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지만 미처 읽어내지 못한 것이 더 많다는 생각에 혼란스러워졌다. 숙소 옆 공터에서 부츠를 닦아준다는 원주민의 밴을 보면서 노점에서 만난 원주민의 무거운 얼굴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산타페의 밤은 아주 천천히 왔다. 아내와 아이들은 산타페의 오후에 깊게 매료된 표정으로 내일 만나게 될 산타페의 맨 얼굴을 기대하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가 만났던 산타페의 오후를 기록하고 정리하느라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1. 우리 가족은 I-HOP에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효진이가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레크리에이션 센터에서 상으로 30달러짜리 I-HOP상품권을 받아왔다. 레크리에이션 센터에서 가끔씩 상품을 걸고 재미있는 경연을 벌이는데, 그림을 그려서 받았단다. 그것을 가지고 토요일 점심에 온가족이 만족스러운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가격도 적당하고 음식도 좋았던 그 때의 기억을 되살려 아침은 I-HOP에서 먹기로 했다. [본문으로]
  2. 강인규, 앞의 책, p.77. [본문으로]
  3. 미국에서 도로공사를 할 경우, 경고 표지판 개수와 설치 위치 및 유도등에 대한 매뉴얼에 따라서 설비를 안전하게 설치한 이후에 작업을 한다. 이러한 매뉴얼은 작업의 규모와 상관없이 철저하게 지켜진다. [본문으로]
  4. 미국에서는 신호등 없는 교차로에서는 먼저 온 순서대로 진행을 한다. 처음에는 서툴고 불편하기만 했는데, 익숙해지니 무척 합리적인 방법이다. [본문으로]
  5. 미국 남자 화장실에서 소변기를 사용하는 순서에 대한 화장실 예절이 블로그나 웹사이트 등에서 종종 화제가 된다. 가령 다섯 개의 소변기가 있다면 첫 번째 사람은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의 소변기를 사용해야 하며, 두 번째 사람은 그와 가장 먼 소변기를 선택해야하고, 세 번째 사람은 가운데 변기를 고르는 것이 예의라고 한다. (강인규, 앞의 책, pp.59-61참고) [본문으로]
  6. 일 년 동안 있으려면 미국 운전면허를 발급받아야 한다고 해서 DMV(Department of Motor Vehicles)에 아내와 갔더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내는 면허시험 신청이 안 된단다. 같이 같던 솔이 엄마가 다른 창구에서 하면 될 것이라고 해서 다시 번호를 받아서 다른 창구로 갔더니 문제없이 면허신청을 할 수 있었다. 같은 사무실에서도 창구 담당자별로 다른 기준을 적용한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매뉴얼에 비추어 책임질 수 있는 한도까지만 책임을 지려고 하기 때문에, 각자의 책임 범위가 달라지고 그에 따라 사람마다 다른 기준이 적용된 예이다. [본문으로]
  7. 비가 내리길 기원하는 제사에서 산 사람의 심장을 꺼내서 신께 바치는 행위를 로마 교황청은 악마의 의식으로 판단하고 강력하게 금지시키고, 개종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8. 주교가 상주하는 대성당을 ‘Cathedral’이라고 부르고, 성채가 없는 예배당을 성당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에 교회 정도의 의미로 ‘Chapel’로 부른다고 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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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일 산타페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오늘은 이동하지 않고 산타페에 하루 더 머물렀다. 산타페에 대한 정보는 이미 떠나기 전부터 차고 넘쳤다. 어젯밤에 오늘 움직일 동선을 구글 지도로 확인을 해두었기 때문에 그대로 움직이면 될 일이었다. 다만, 사만다가 심통을 부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긴 심통을 부린다면 예상했던 길 밖의 길을 만날 테니 그것도 크게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산타페 Comfort Inn 간판. 실내풀장과 맛있고 따듯한 아침 그리고 와이파이 무료 제공. 다만 질은 보장하지 못한다.

숙소(Comport Inn)에서는 아침을 제공해줬다. 인터넷 예약 사이트에는 블랙퍼스트 뷔페(Breakfast Buffet)라고 적혀 있었고, 입구의 간판에 커다랗게 ‘Delicious Hot Breakfast’라는 표현이 있었지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대부분 숙소에서 제공하는 아침은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콘티넨탈 블랙퍼스트(Continental Breakfast)로 제공한다던 몬트레이의 숙소에서는 코스트코에서 파는 머핀을 4등분한 것이었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비닐봉지에 담긴 빵을 커피가 전부였다. 콘티넨탈 블랙퍼스트가 원래 점심때까지 허기를 달래기 위한 간단한 빵과 음료라지만, 코스트코 머핀 4등분이나 비닐봉지 빵은 조금 심했다. 덕분에 이제는 숙소를 예약하기 전에 반드시 블랙퍼스트 뷔페나 아메리칸 블랙퍼스트(American Breakfast)[각주:1]라고 표시 된 것을 선택하게 되었다.

옐로우스톤에서는 아침 식사를 하면서 웃지 못 할 일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아메리칸 블랙퍼스트를 제공해주었다. 숙소에서는 별도의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식사의 양과 질 면에서 모두 만족스러웠다. 계산대에서 식사티켓을 냈더니, 식사는 무료인데 1인당 46센트의 세금과 팁 2달러는 내야 한다고 했다. 12달러 정도의 식사는 무료로 제공받고 세금과 팁은 부담해야 한다는 상황에 웃음이 나왔다. 사실 진짜 웃지 못 할 상황은 주문과정에서 있었다. “How would you like your eggs?”라고 묻는 웨이트리스의 질문에 아무 생각 없이 “Well done!”이라고 답한 것이다. 대충 무슨 뜻인지 알 수도 있었으련만 그 웨이트리스는 정확한 답이 나올 때까지 같은 질문만 계속했다. 마치 정답을 맞힐 때까지 절대 주문을 끝낼 수 없다는 듯이. 결국 거꾸로 물어서 주문을 마칠 수 있었다. 언제 미국 식당에서 계란 요리를 먹어봤어야지 'Sunny side up!', 'Over easy!', ‘Over hard!’란 말을 알 것 아닌가? 어쨌든 덕분에 하나 배우기는 했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산타페 숙소의 블랙퍼스트 뷔페는 자못 진지했다. 토스트, 베이글, 와플, 삶은 계란, 해시 브라운 포테이토(hash brown potatoes), 에그 스크럼블, 두 종류의 주스, 두 종류의 커피, 네 가지 시리얼, 바나나, 사과, 오렌지, 요구르트에 대기하는 직원까지 있었다. 맛은 잘 모르겠지만 아침식사다운 식사라서 먹으면서 힘이 났다. 그런데 6시부터 9시까지로 식사시간이 넉넉하게 주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8시 무렵 사람들이 몰려서 식당에 자리가 부족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람들 음식접시를 들고 나와서 로비의 소파에 앉아서도 먹고, 주차장에 나가서 먹으면서도 웃고 떠들며 아침을 즐긴다는 점이다. 마치 우리에게 어디서 먹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먹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아침을 먹는데 입이 짧은 효진이가 제대로 먹지 못했다. 아내와 내가 이것저것 가져다주면서 그것이 얼마나 몸에 좋고 맛있는 것인지를 설명하며 먹이려 해도 제 입에 맞지 않으면 먹으려 들지 않았다. 음식은 체험인데, 체험을 해야 좀 더 다양한 것을 먹어볼 수 있는데, 효진이의 입맛은 아주 소극적이다. 제가 좋아하는 것만 먹는 것도 걱정이지만, 그것 때문에 다른 음식체험을 제대로 하지 못해 음식의 즐거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할까봐 걱정이었다. 효진이는 어려서 심하게 편식을 하던 나를 닮은 모양이었다. 편식 때문에 할머니와 어머니 속을 많이도 썩여드렸는데, 그것을 고스란히 효진에게서 돌려받고 있는 것이다. 

국제 민속예술 박물관 전경(), 인디언 예술문화 박물관 전경(), 국제 민속예술 박물관 입구()

배불리 먹고 텀블러에 커피를 가득 담아서 사만다의 지시에 따라 박물관으로 갔다. 산타페 외곽으로 벗어나 산길을 따라 한참을 간 것 같은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다운타운과 가까운 거리였다. 어도비 양식으로 멋스럽게 만들어진 국제 민속예술 박물관(Museum of International Folk Art)과 인디언 예술문화 박물관(Museum of Indian Arts & Culture)은 같은 공간에 다른 건물로 붙어 있었다. 박물관 건물은 어도비 양식의 탁월한 건축물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직접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Portable Altars를 가지고 다니는 볼리비아인()Portable Altars의 모습()

국제 민속예술 박물관 입장권은 인디언 예술문화 박물관을 포함해서 어른만 15달러(하나만 본다면 9달러)이고 16세 미만은 무료였다. 박물관이 가치 있는 문화유산들을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거나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세워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사설 박물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공공자금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데 어린 학생들에게 입장료를 또 받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좀 더 많은 학생들이 자주 박물관을 찾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일이 우선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산타페를 비롯한 미국의 몇몇 도시에서 시행하고 있는 어린 학생들의 박물관 무료입장은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국제 민속예술 박물관은 세계 최대의 민속공예 박물관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 100개 이상 국가의 디오라마(diorama)[각주:2]와 민속예술품을 135,000점 이상을 소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침 국제 민속예술 박물관에서는 안데스 민속예술(Folk Art of the Andes)’생존의 예술(The Arts Of Survival)’ 특별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안데스 민속예술전시는 가톨릭과 결합된 민속예술이 대부분이었다. 안데스 문명은 남미의 3대 문명이라고 하는 잉카문명, 아스텍문명, 마야문명 중의 하나인 잉카문명을 말하는 것으로 현재의 페루, 볼리비아 등의 기반이 되었다. 안데스 문명은 16세기 스페인의 침공으로 아주 철저히 붕괴되고 말살된다. 그러한 문명의 붕괴와 말살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Eduardo Hughes Galeano)불의 기억에서 말하고 있듯이 기억의 강탈을 낳는다.

 

스페인 군대와 원주민(), 토착신앙과 결합한 예수상(), 해방신학과 결합된 가톨릭().

식민지 건설이라는 세속적인 목적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는 종교적 사명이 결합된 스페인의 폭력적인 문명 말살정책은 철저하게 원주민들의 기억을 유린했다. 그 이후 300년의 통치 기간 동안 가톨릭은 잉카문명의 토착신앙과 결합되어, 민속문화의 일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자신들의 문명을 파괴하고 자신들의 삶을 유린했던 지배자로부터 벗어나려고 끊임없이 투쟁함으로써 정치적 독립은 얻을 수 있었지만, ‘기억의 강탈로 인하여 끝내 언어와 종교는 돌려놓지 못했다. 더구나 독립 이후에도 빈부 격차와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는 오히려 더 심각해짐으로써 그들의 종교에 대한 의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안데스 민속예술의 상당 부분은 이러한 신크레티즘(syncretism)[각주:3]과 관련된 성물들이었고, 그것의 변형된 문화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정복자의 종교가 수탈과 강압의 역사를 강요하고 자신들의 고유문화를 지워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받아들여 현실의 고통을 이길 수 있도록 내면화한 것이다.

따라서 안데스인들의 가톨릭의 내면화 과정에 대한 비판은 유보되어야 한다. 그러한 비판 이전에 그들이 견디고 건너야 했던 불평등과 부조리에 대한 공동체적 이해와 성찰을 나눌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있는 그대로 가치중립적인 관점에서 그들의 종교를 보아야만 하는 이유는 왜곡의 여지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들의 현실에서는 최적화된 방식의 종교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좀 더 냉철하게 판단하고 고민해야 할 것은 그들이 그러한 종교에 의지해서 견뎌야 했던, 아니 견디고 있는 침략과 수탈, 부조리와 불평등의 현실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한 관점이 수반되지 않는 비판과 성찰은 잉카문명과 종교에 대한 소재주의나 이국취미(exoticism)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왜곡이거나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이다.

 

The Arts Of Survival 기부 홍보 전단(), Support 홍보 팔찌(), Vision of January 12th, 2011()

생존의 예술(The Arts Of Survival)’은 재난지대에서 민속예술로 표현된 작품들을 전시한 것이었다. 인도네시아(화산폭발), 파키스탄(홍수), 아이티(지진), 멕시코만(허리케인)의 재난의 참상을 소개하고, 그것을 민속예술로 표현한 작품들을 전시함으로써 재난지역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있었다. 재난과 시련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표현된 전시물들은 소박하지만 절박하고, 절박하지만 과장하지 않는 진정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소 그로테스크한 형태의 작품들은 재난을 과장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민속예술의 성격과 관련된 것으로 보였다. 아이티의 지진과 관련된 작품으로 ‘Vision of January 12th, 2011’의 경우가 그러했는데, 이것은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마스크 문화와 상관된 것이었다. ‘안데스 민속예술전시에서 만났던 샤먼들의 마스크나 신들의 마스크와 기본적인 정조를 같이하고 있었다. , , 대지, 바람의 재난으로 나누어 재난이 어느 특정 지역만의 불행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것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 것도 인상적인 시도였다.

안데스 보부상()Noisemaker(). 팔 수 있는 것을 지닐 수 있을 만큼만 가지고 다니며 팔았을 보부상의 모습과 자신들의 생활환경의 특성을 반영한 악기를 개발한 그들의 모습에서 안데스의 얼굴을 본다.

목숨은 기어코 아름다운 것이어서 그것이 처한 상황이 아무리 남루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살아있음을 표현한다. 아니 어쩌면 그러한 표현을 통하여 그 상황을 견디고 살아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살아야 할 곳은 온전히 부서져 버리고, 주검은 일상으로 널려있는 재난의 현장에서 그 슬픔과 절망을 표현함으로써 넘어서려 했던 사람들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인간이길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상황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을 지키려는 그들의 의지는 결연하고 숙연한 것이었다. 온몸 가득 상품을 매달고 안데스의 곳곳을 누볐을 보부상에게서 피로와 힘겨움 대신 유쾌하고 환한 웃음을 보고자했던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은 노력이었으리라.

국제 민속예술 박물관의 압권은 세계 각국의 민속문화를 구현한 디오라마(diorama) 전시였다. 각국의 생활문화를 정교하게 축소하여 재현한 디오라마에는 만든 이의 소박한 유머가 곳곳에 녹아 있었다. 지배계층의 화려한 고급예술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만나는 생활문화를 진솔하게 재현함으로써 보면서 슬며시 미소 짓게 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곳에 전시된 디오라마는 배경을 정교하게 축소해놓고 그 안에 각기 다른 다수의 인물들을 꼼꼼하게 제 각각의 표정으로 구현하고 있었다. 나무, 점토 등 주변의 재료를 활용하여 제작한 디오라마는 생활공간을 중심으로 삶의 풍부한 표정들을 진솔하게 담아낸 것들이다. 애니메이션 캐릭터 피규어(figure)를 수집하는 내게 이곳의 디오라마는 신선했고, 그만큼 매혹적이었다. 한 작품 안에 수십 명의 인물들이 각기 다른 복색과 표정으로 배경과 어우러진 모습은 플라스틱 피규어로는 구현할 수 없는 유일함과 진솔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투우장(), 시장(), 제단()을 표현한 디오라마. 생활공간의 구현과 인물들의 다양한 삶의 표정이 백미인 작품들

디오라마가 구현해 놓은 세계 각국의 문화는 전시장을 이어가며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전시장 벽면은 물론 중앙 홀에도 앞뒤에서 관람이 가능할 수 있도록 동선이 짜여 있었다. 대부분의 디오라마는 스페인 문화와 원주민 문화가 어우러진 뉴멕시코 문화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그 외에 유럽, 중국, 일본, 인도, 인도네시아 문화가 배경이 된 디오라마도 있었지만 한국 문화를 배경으로 한 것은 찾을 수 없었다. 다양한 국가와 숱한 인종, 그만큼의 다문화가 뒤섞인 미국에서 한국 것을 찾는 것이 편협한 국수주의적 관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안타까운 것은 안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적인 반응을 자제하고 좀 더 객관적으로 본다면, 세계 속에서 우리문화의 위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문화의 수준이나 질적 가치와는 무관한 것일지도 모른다.

국내 언론에서는 K-POP을 중심으로 한 한류로 미국 전체가 떠들썩한 것처럼 호들갑이지만, 아직은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많고,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한국 음악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즐길만한 음악이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안타깝다 라거나 정부가 나서서 국가브랜드를 홍보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물론 정부가 거시적 관점에서 국가브랜드를 체계적으로 홍보하는 것은 사회문화경제적으로 매우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좀 더 주체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한다거나 그들의 평가에 우리를 꿰어 맞추려는 안타까운 인정투쟁의 몸부림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각주:4]

만물을 창조하는 여성의 현빈(玄牝, ), 풍요를 기원하며 제작된 교미하는 소(이상은 인디언 예술문화 박물관 소장, ), 인디언 수난사를 그린 그림(Cody Historical Museum 소장, ) 

인디언 예술문화 박물관은 국제 민속예술 박물관과 정원을 공유하고 있었다. 인디언 예술문화 박물관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문화와 예술을 소개하는 박물관이다. 그런데 인디언의 예술과 문화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원시적 거주지나 도자기 정도만을 소개하고 있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출산과 양육 등과 상관된 여성적 이미지[각주:5]의 것들이었다. 그들의 예술과 문화가 성립될 수 있었던 생활문화나 그것이 누구에 의해, 왜 파괴되었고, 현재의 모습은 무엇인지 등의 맥락이 온전히 누락되어 있었다. 현실과 역사의 맥락이 누락된 유물은 그저 소박한 토기와 조악한 세트에 불과해 보였다. 옐로우스톤 여행에서 들렸던 코디 역사박물관’(Cody Historical Museum)에서 인디언의 생활상뿐만 아니라 그들의 수난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던 것과는 무척 대조적이었다. ‘Here, Now and Always’라는 전시테마가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였다.

박물관을 나와서 캐니언 로드(Canyon Road)를 찾아갔다. 캐니언 로드에 들어서면서 나는 내심 주차가 걱정스러웠다. 길의 폭으로 보나 주차금지 표지로 보나 노상 주차가 어려워 보였고, 갤러리는 독립된 주차장을 갖기에는 협소해보였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 일요일이라서 이면도로에는 차를 댈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얼바인에서 견인 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무조건 유료주차장을 찾아서 주차를 했다.[각주:6]

캐니언로드 전경

유료임에도 주차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심한 우리는 주차장에 붙은 안내문 따라서 In Art Gallery에 찾아가 5달러를 내고 확인티켓을 받아 대쉬보드에 올려놓고 나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런데 주차비를 내면서 이것저것 묻다보니 어느새 주인은 자신의 갤러리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녀의 안내로 In Art Gallery부터 본격적인 갤러리 관람을 시작할 수 있었다.

갤러리 앞마다 놓여 있는 의자들. 앉지 않더라도 보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는 풍경이다.

캐니언 로드가 산 미구엘 교회(Chapel of San Miguel)가 있는 드 베이거스(De Vagas)에서 동북쪽으로 이어진 거리라고 설명하는 것은 지도로만 가본 사람들의 방식이다. 캐니언 로드는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진 갤러리들이 길가에 늘어선 풍경 그 자체가 이미 갤러리인 거리다. 아니다, 이것도 지나치게 문자적인 표현이다. 캐니언 로드는 걷기를 권하는, 걸을 수밖에 없는, 걸으며 즐거워지는 길이었다.

캐니언 로드를 만들고 있는 어도비 양식의 갤러리들

 캐니언 로드는 아름다운 속도를 지녔다. 차로는 느낄 수 없는 걷기의 속도를 캐니언 로드가 만들어 내고 있었다. 1차선 이상이 될 것 같지 않은 도로 곁으로 길과 함께 넉넉해졌을 나무들은 그늘을 드리운 채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협소한 도로에는 많은 차들이 오갔지만 모두 걷는 사람의 속도와 방향에 따라 멈추거나 달렸다.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빼앗겨 사진 촬영을 위해 차도로 내려서면 달려오던 모든 차들이 조용히 멈추어 주었고, 미안하다는 손 인사에 괜찮다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걸어가는 사람들의 조용한 미소가 평화로웠다.

캐니언 로드는 길이 만든 길이 아니라 갤러리가 만든 길이었다. 어도비 양식의 기본을 유지하면서 작품의 성격에 맞는 개성적인 연출이 돋보이는 갤러리들이 길 자체가 되어, 캐니언 로드를 만들었다. 거의 모든 갤러리들은 커다란 나무나 아름다운 정원과 어우러져 있었고, 입구에는 예외 없이 밖으로 의자가 놓여 있었다.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쉬라고 내준 것인지, 오고가는 사람들을 보기 위해 내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고단한 일상에서 어딘가 앉을 곳이 있고, 누군가 앉게 할 수 있는 배려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여유롭고 푸근한 풍경이었다.

캐니언 로드에서 만나는 우편함들. 열어보면 문득 나를 기다리는 러브레터라도 들었음직한 풍경이다.

갤러리의 입구나 건물을 따라가다 보면 건물마다 얼굴처럼 소박한 우편함 하나씩을 내밀고 있었다. 대부분 공과금이나 카드요금 청구서가 날아올 우편함이겠지만, 마치 누군가의 따듯한 러브레터가 들어있을 것 같아 가슴이 뛰었다. 이와이 순지(岩井俊二) 감독의 영화 <러브레터>(Love Letter, 1995)가 애틋했던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나서 그가 사랑했던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거나, 중학교 시절 첫사랑을 성인이 되어 그가 죽고 나서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러브레터>의 애틋함은 박인환의 시처럼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때문이 아닐까? 그토록 애틋했던 사랑은 갔지만 옛날은 오롯이 쓸쓸한 기억으로 남게 되는 안타까움, 그것을 기억하는 나는 그 옛날의 내가 아니라는 처연함. 곤 사토시(今敏) 감독의 애니메이션 <천년여우>(Millennium Actress, 2001)의 쓸쓸함과도 같은 맥락이었다.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며 하루에도 몇 번씩 열어보던 중고등학교 시절 우리 집 우편함이 떠오른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어느 갤러리 입구, Jesus Said Buy Fork Art 라는 문구가 재미있다.

갤러리마다 주인들은 작가와 작품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고 때론 차가운 음료를 내주기도 했다. 또한 대부분의 갤러리가 플래시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진 촬영을 허용했고, 촬영을 원하지 않는 곳에서는 작품을 촬영한 포스트카드를 무료로 나누어 주기도 했다. 멀리 떨어져서 그저 바라만 보는 작품이 아니라 가까이 가서 보고, 사진도 찍고, 때론 묻기도 하는 살아 있는 갤러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니언 로드의 모든 갤러리들은 작품을 팔기 위한 곳이라는 성격은 변함이 없었다. 이곳의 예술가들은 대부분 고급 주택에서 우아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예술가들이라면 모두 뉴욕이나 산타페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을 꿈꾼다고 한다. 이 거리를 걸어보니 그들의 소망에 공감할 수 있었다.

산 미구엘 교회.

캐니언 로드에서 산 미구엘 교회(Chapel of San Miguel)까지는 아주 가까웠다. 교회는 오래된 탓인지 공사가 한창이어서 다소 혼잡스러웠다. 산 미구엘 교회는 1692년에 세워진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라는데, 종교적 충돌로 인하여 원주민에 의해 훼손되었다가 1710년에 재건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처음 들어온 스페인사람들은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강권하지 않았었는데, 산 사람의 심장을 제물로 바치는 원주민들의 종교 행위에 강한 반감을 드러내면서 충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종교적 충돌 이전에 스페인인들과 원주민들은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었는데, 종교적 충돌로 인하여 극한 갈등을 빚었고, 그 과정에서 산 미구엘 교회가 파괴되었던 것이다. 이후 스페인이 폭력적으로 원주민을 제압함으로써 산 미구엘 교회는 재건될 수 있었다. 어도비 양식으로 소박하게 지어진 산 미구엘 교회는 시골 예배당처럼 정겨워 보였지만 그 내력을 살펴보면 원주민의 아픈 역사가 남아 있는 장소였다. 모두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라는 데에 방점을 찍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세월동안 그곳에서 어떤 일이 왜 있어났는지 아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인식이 전제되어야지만 가장 오래되었다는 수사(修辭)의 진정한 의미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오래된 집전경(), 산타페 역사재단에서 보존가치를 증명한 명패(), 가장 오래된 집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장난스러운 꼬마()

산 미구엘 교회에서 오른쪽으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집’(The Oldest House)이 있다. 1740-1767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집은 밖에서 보기에는 단지 조금 낡은 평범한 집처럼 보였다. 자세히 보니 산타페 역사재단 명의로 이 건물이 보존 가치가 있는 가장 오래된 집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 예전에는 출입구로 썼을법한 문이 매워진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입구로 들어가니 이 집의 내부를 둘러보기 위해서는 1인당 1달러를 기부해야만 한단다. 이 돈은 올드 성 미카엘 고등학교(Old St. Michaels High School)에 기부된다고 한다. 도네이션을 하고 내부로 들어가 보니 아주 작은 공간에 그 시절의 살림살이가 소박하게 놓여 있었다. 몽골에 갔을 때, 게르(Ger) 안의 살림살이를 보면서 느꼈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사람 사는 데에는 그리 많은 물건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강변하는 듯 보였다. 정면으로는 밖을 볼 수 있는 작은 창문이 있었는데, 우리가 밖을 내다보자 밖에 있던 귀여운 꼬마가 안을 들여다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우리가 여행을 통해 산타페를 잠시 들여다보는 일도 꼬마가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어퍼 크러스트 피자집의 피자 사이즈(), 꼭 라지 사이즈를 먹어야 한다고 우겨서 시킨 피자(), 그것이 많은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한 가족들의 피자 접시()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가장 오래된 집과 거의 붙어있는 어퍼 크러스트 피자(Upper Crust Pizza)집으로 갔다. 산타페의 일반적인 음식점처럼 밖에도 테이블을 내서 음식을 즐길 수 있게 했는데, 피자 굽는 냄새에 끌려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상류층’(Upper Crust)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소박한 실내의 저렴한 세미 셀프서비스 피자집이었다. 미국에 처음 와서 피자가 먹고 싶다는 아이들에게 코스트코에서 만들어주는 피자와 피자헛 피자를 사준 적이 있었는데, 두 번 모두 지독히 짜서 피자는 그 이후로 먹지 않았다. 그런데 이 집 피자는 짜지 않고 넉넉한 양과 다양한 토핑으로 아주 풍부한 맛을 보여주었다. 점심이 늦은 탓에 배도 고프고 목도 말랐다. 눈치 빠른 아내가 사무엘 아담스를 한 잔 시켜주었다. 깊은 맛의 맥주 한 잔과 풍부한 피자의 맛이 어우러져 더할 수 없이 행복해지는 오후였다.

피자를 먹고 아주 행복한 기분이 되어 다시 다운타운 쪽으로 갔다. 어제 보지 못한 기적의 계단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곳에 들르기 전에 나는 먼저 카메라 상점에 들러서 광각렌즈에 끼워져 있는 편광필터를 빼야만 했다. 아이들이 카메라 상점에서 엽서를 고르고 있는 동안 잘생긴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부탁을 하니 그는 웃으면서 아주 간단하게 편광필터를 빼주었다. 편광필터는 끼는 부분이 얇아서 잘 빠지지 않으니 주의해서 빼야 한다고 빼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그는 일러주었다. 그 직원의 친절한 서비스에 고마워서 그곳에서 예정에 없던 필터 케이스를 하나 구입했다. 결국 기적의 계단은 시간이 지나서 보지 못했다.

횡단 여행을 준비하면서 풍경을 찍겠다고 광각렌즈를 구입했다. 지금 쓰고 있는 캐논 40D 바디는 캐논 350D를 쓰던 내게 은사님께서 쓰시던 것을 주신 것이다. 탐론 28-300m 표준줌렌즈로는 풍경을 담는데, 다소 아쉬움이 있어서 아내를 졸라 횡단을 시작하기 전에 광각렌즈인 탐론 11-18m를 구입했다. 마침 아마존에서 편광필터까지 저렴한 패키지로 제공하여 그것을 구입하고, 반가운 마음에 덜컥 끼우고 출발한 것이다. 그런데 사진이 자꾸 어둡게 나왔다. 운전을 하면서 빠르게 이동을 하였기 때문에 사진이 어둡게 나오는 것은 숙소에서 노트북으로 보고나서 알게 되었다. 결국 편광필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고 빼려고 했으나 이게 생각보다 잘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어제 봐둔 카메라 상점으로 와서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사실 편광필터도 필터였지만 조리개 값이나 셔터 스피드를 제대로 조정하지 않았던 데 더 큰 원인이 있었다. 새로운 렌즈와 필터에 마음을 빼앗겨 가장 기본적으로 돌아보아야할 것을 돌아보지 못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생각을 카메라 샵을 나오면서 했다는 것이다. 늘 외양간은 소를 잃고 나서 고치나 보다.

시간을 보니 520분이었다. 산타페 인근에 있다는 피코스 국립역사공원(Pecos National Historical Park)를 둘러볼 수 있을 것이라는 욕심에 급하게 그곳으로 달렸다. 사만다가 한번 심통을 부려서 헤매고, 다시 허겁지겁 찾아갔는데 6시다. 혹시나 했는데 퇴근하는 직원들이 오늘은 문을 닫았으니 내일 오란다. 여행자에게 내일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역시 과한 욕심이었나 보다. 그렇지만 덕분에 산타페의 석양을 온전히 바라보며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바람은 산타페처럼 시원했다.

  1. 일반적으로 아메리칸 블랙퍼스트의 경우에는 계절과일, 주스류, 시리얼, 계란요리, 음료, 케이크류, 빵 종류, 햄, 베이컨, 소시지 등이 나온다. 콘티넨탈 블랙퍼스트라고 적힌 곳은 대부분 독립적인 식당을 갖추지 못한 곳에서 빵과 커피 정도를 제공할 뿐이다. [본문으로]
  2. 일정한 배경 위에 축소모형을 설치하여 하나의 장면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근대에 귀족들이 역사적인 전투를 재현하기 위하여 축소모형을 만들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국제 민속 예술 박물관의 디오라마는 규모나 종류는 물론 질적인 면에서도 민속 예술작품으로 탁월하다. [본문으로]
  3. 종교적 융합을 가리키는 말로서, 침략과 정복 혹은 문화가 교류를 통하여 상이한 종교가 상호 융합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토착종교가 있는 곳에 새로운 종교가 들어와서 상호 융합하는 과정에서 상이한 두 종교는 위계화되거나 결합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안데스 지역의 경우, 잉카문명의 토착신앙을 가톨릭은 부정하면서 종교적 박해를 가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원주민들에게 정착되는 과정에서 토착신앙적 요소가 가톨릭과 결합되는 독특한 양상을 드러내기 때문에 신크레티즘으로 보아야 한다. [본문으로]
  4. 가령 대학평가만 하더라도 해외 언론사나 해외 대학에서 하는 평가는 참고 사항일 뿐이지, 우리가 그 순위를 올리기 위해서 그들의 평가 기준에 맞추어 대학을 재편한다는 것은 얼마나 웃지 못 할 이야기인가? 오히려 세계의 주목을 받고 싶다면 그들과는 차별화된 평가기준으로 우리가 그들을 평가하는 쪽이 승산이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5. 아이를 낳고 있는 여성의 성기를 과장하여 표현한 것은 󰡔도덕경󰡕에서 표현한 현빈(玄牝)과 같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도덕경󰡕에서 만물의 근원으로 꼽는 현빈의 구체화된 모습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러한 현빈을 형상화하여 학교의 발전을 기원했던 한양대학교 50주년 조형물에서도 구현된 바 있어서 무척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본문으로]
  6. UCI에서는 한 달에 55달러를 내면 학교에 주차를 할 수 있다. 아침에 아이들 학교에 데려다 주고 차를 집에 놔두고, 연구실로 나오면 오후에 아이들 픽업은 아내의 몫이었다. 그래야 5시까지 온전히 연구실에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아내가 아프고 나도 몸이 좋지 않아서 차를 학교에 가져간 날이었다. 다른 학생들이 하듯이 UCI 앞 상가 주차장에 차를 대고 강의를 마치고 나오니 차가 없었다. 차를 찾고 있는데 멕시칸으로 보이는 보안요원이 다가와 내 차가 도난을 당했단다. 자세히 들어보니 이 친구 영어가 많이 서툴렀다. 재차 물으니 2시간 이상 주차가 되어 있어서 견인해갔다고 했다. 결국 지인의 차를 얻어 타고 견인사무소까지 가서 160달러의 벌금을 물고 차를 찾아야 했다. 차를 찾으며 벌금이 너무 비싸다고 하니까 다른 도시에서는 300달러가 넘는단다. 다른 도시 벌금이 300달러가 넘든 3000달러가 넘든 나랑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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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 주를 달리다.

81일 산타페오클라호마시티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오늘은 산타페에서 오클라호마시티로 이동을 했다. 뉴멕시코 주 산타페를 출발해서 텍사스 주를 건너 오클라호마 주 오클라호마시티에 도착하는 531마일(849)의 여정이었다. 구글 지도는 9시간 30분정도를 예상했지만, 휴식시간과 식사시간 등을 합하니 10시간 이상이 걸린 대장정이었다.

세도나에서 욕심을 부리다가 앨버커키에 자정이 넘어서 도착했던 경험 덕분에 여행의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이곳에서 욕심을 부리면 다른 곳을 놓친다는 것, 미국에서의 여행은 해가 있을 때까지만 가능하다는 것,[각주:1] 장시간 운전은 운전하는 나보다 아이들을 먼저 지치게 한다는 점, 아이들이 지치는 순간 여행은 멈춘다는 것 등의 깨달음이었다.

오늘은 온 가족이 아침부터 서둘렀다. 지난 여행의 경험으로 숙소로 가지고 올라갈 짐도 꼭 필요한 것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차 트렁크에 그대로 보관하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배웠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집에서 짐을 쌀 때, 여정에 맞추어 짐을 분리하는 것이 먼저였다. 몇 번의 여행 덕분인지 아내의 노하우가 발휘되었다. 옷 트렁크 하나, 물을 차갑게 보관할 아이스백,[각주:2] 간식과 약 등을 담은 아내의 도라에몽 가방, 노트북과 카메라 가방이 숙소로 가지고 올라간 짐의 전부였다. 그러면 다음 날에도 아내와 내가 후다닥 짐을 싸면 각자 맡은 짐을 가지고 체크아웃 하면 되는 일이었다.

산타페 비지터 센터. 직원과 자원봉사자가 함께 근무하고 있었다.

식당에서 텀블러에 커피를 가득 담아가지고 차로 돌아오니 유진이가 어제 들렀던 비지터 센터를 다시 들러야 한단다. 이번 횡단여행을 하기 전에 아이들에게 각자 어떤 형태로든지 여행의 기록을 남겨보라고 했더니, 효진이는 여행일기를 쓰고 유진이는 관련 자료를 모으고 있는데, 어제 그곳에서 가져오지 못한 자료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미국에서 여행을 하면서 정확한 정보를 가장 손쉽게 효과적으로 얻을 수 있는 곳은 비지터 센터다. 내 경우에도 여행을 떠나기 전에 AAA사무실에 가서 무료지도와 안내 책자를 먼저 받고, 그것을 참고하여 인터넷 예약 사이트에서 숙소 예약을 한다. 그리고 여행지에 가서는 제일 먼저 비지터 센터를 찾아간다. 그곳에 가면 정확한 지역 안내 지도와 함께 효과적인 동선까지 체크해주고, 거기에 내가 더 필요로 하는 것을 물으면 아주 친절하고 꼼꼼하게 대답해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종 현지 여행안내 자료들과 할인 쿠폰 등을 풍부하게 제공받을 수도 있으니 더욱 유용한 곳이 아닐 수 없었다. 옐로우스톤에 갔을 때에는 비지터 센터에서 친절하고 상세한 안내를 받은 후, 어느 식당이 싸고 가장 맛이 좋으냐고 바보 같은 질문을 했었다. 그랬더니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직원이 옐로우스톤의 식당들은 싸지는 않지만 맛은 모두 있다라는 재치 있는 답변으로 우리를 웃게 만들었다.

비지터 센터를 나오면서 나는 캐니언 로드에 잠시만 들렸다가 출발하자고 제안을 했다. 어제 캐니언 로드를 올라가면서 사진을 찍느라 내가 자꾸 뒤처지자, 아내는 편하게 사진을 찍으라며 아이들을 데리고 갤러리를 따로 돌았다. 거리와 풍경을 찍느라 내가 놓친 갤러리에서 아주 재미있는 작품을 보았다는 아내의 말에 출발 전에 꼭 들러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Fleet wood Gallery 전경돠 입구에 전시된 바이슨 그리고 붉은 말

그곳은 Fleet wood Gallery라는 곳이었는데, 너무 이른 시간이라서 문을 열었을까 걱정을 했는데, 마침 정원 문을 열고 있었다. 정원 문을 열고 있는 주인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전시장을 구경할 수 있는지, 구경을 하면서 사진을 찍어도 괜찮겠느냐고 물으니 “Please!”란다. 예상했던 답변이 아니어서 다소 얼떨떨해 있는 내게 유진이가 알려준다. 흔쾌히 허락하는 표현이란다. 상대가 자신에게 허락을 구할 때, 흔쾌히 승낙하며 하는 표현이란다. 나보다 훨씬 영어를 잘하는 유진이에게서 오늘도 하나 또 배웠다.

종이학을 소재로 각기 다른 세 가지 표현이 이채롭다. 철판으로 종이학을 접었다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주변 소재나 조명이라는 맥락에 따라서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는 점도 이채로운 작품이었다.

고맙다고 하고 채 열지도 않는 전시장에 들어가서 문제의 작품들을 보았다. 철판을 소재로 오리가미(origami) 콘셉트의 작품을 만든 것도 기발한데, 작품마다 아이디어가 거침없었다. 어제 효진이가 작품을 보자마자 “Rock-Scissors-Paper!”라고 해서 갤러리 주인을 놀라게 했다는 작품은 언어를 즉물화(卽物化)한 단순한 발상임에도 불구하고 신선했다.

Rock-Scissors-Paper

비행기 설계도와 종이비행기

구겨진 종이 컨셉의 철제 오리가미

비행기 설계도를 정밀묘사 해놓고 그 아래 다시 종이비행기 접는 법을 그려놓아서 두 이미지를 충돌시킴으로써 인식의 틀을 깨고, 그 그림에서 비행기가 접혀서 나오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그림과 실재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발상은 한참 동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인식의 틀 부수기와 즉물적 변환은 마치 잘 만들어진 극적 전환(adaptation)을 보는 것 같았다. 구겨진 종이를 펴는 과정 혹은 반대로 종이를 구기는 과정을 철판으로 보여준 작품은 존재의 시간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존재의 양태를 일시 정지시킴으로써 다시 인식하게 만드는 이 작품의 시도는 사진의 문법과 같은 맥락이었다. 시간을 정지시킴으로써 존재를 시간으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드는 힘, 그것이었다.

작품을 보면서 사진도 찍고 유진이와 이야기 하는 동안 주인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했고, 이따금 눈이 마주치면 환하게 웃어주었다. 질료의 변화와 맥락의 변화를 통하여, 이미지와 실재의 경계를 허물고, 존재의 시간을 보여준 이 작품들을 단순한 발상의 전환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아주 소박한 견해가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Fleet wood Gallery를 마지막으로 산타페를 떠났다. 시작이 그랬던 것처럼 산타페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매력을 마음껏 보여주고 있었다.

텍사스주 스텝에서 만난 회오리바람. 작고 큰 회오리바람 서너 개가 벌판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월요일이어서 그런지 차는 거침없이 잘 달렸다. 뉴멕시코 주를 건너서 텍사스 주에 이르자 풍경은 더욱 삭막해지고, 뜨겁고 메마른 바람은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얼바인에서 여행을 하다보면 라스베이거스가 있는 네바다 주를 자주 건너게 된다. 스텝과 사막 기후인 네바다 주를 건너는 일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건조하고 뜨거운 여름에 이곳의 사막을 건너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럴 때면 아이들은 옆에 달리는 대형트럭의 그늘만으로도 기뻐할 정도였다. 그런데 텍사스를 달려보니 네바다 못지않았다. 메마른 스텝을 가로지르는 I-40위로 마른 바람이 거칠게 불어오더니, 마침내 회오리바람이 되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 회오리바람에 비하면 세도나에서 앨버커키로 가는 길에 만났던 회오리바람은 소박했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규모는 아니더라도 제법 규모가 있는 것이 동시에 벌판을 가로질러 서너 개씩 달려드니 처음에는 경이롭더니 점점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여행을 하면서 동일한 메시지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단조로운 풍경이 지루하게 계속 되었다. 이토록 삭막하고 메마른 지역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텍사스 오스틴에 살고 있는 유진이 친구 서연이에게 전화를 하기로 했다. 서연이는 유진이의 절친인데 우리보다 한 달 전에 미국으로 공부하러 떠났다. 아빠가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태어나서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빠가 텍사스로 의대를 진학하게 되어 서연이도 함께 텍사스로 간 것이었다. 매일 유진이와 카톡으로 대화를 하고, 그것도 부족하면 070전화를 붙잡고 말리지 않으면 언제 끝날지 모르는 통화를 하는 사이였다. 핸드폰을 주고 텍사스를 지나고 있으니 서연이에게 통화를 해보라고 했더니 유진이가 아주 신이 났다. 서연이는 학원 쉬는 시간이라고 했다. 이곳에 와서도 한국 아이들은 바쁘다. 사실 우리에게 텍사스는 낯선 동네다. 내 기억 속의 텍사스는 박찬호가 소속되었던 텍사스 레인저스나,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주지사를 지냈던 동네라거나, 목축지와 유전이 많은 곳이라거나,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기억에는 없지만 나타샤 킨스키(Nastassja Kinski)가 주연을 했던 영화 <파리텍사스>(Paris, Texas, 1984)의 그것이 전부였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그게 미국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사실 딱히 알 이유도 없지 않은가? 미국에 와서 겨우 그것이 지도 어느 자락쯤에 있다는 것과 전에 텍사스공화국이었다는 것 그리고 멕시코-미국 전쟁의 계기가 되었고, 남북 전쟁(American Civil War, 1861-1865) 발발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이다. 그렇게 막연한 관념일 뿐이었던 텍사스는 그것의 가장 북쪽 도로를 달리면서 비로소 실재로 다가왔다.

메마른 바람만큼이나 벌레도 집요하게 달려들어 죽어갔다. 차창 곳곳에 그들의 흔적이 남아서 주유할 때마다 지워야 했다.

기름을 넣으러 주유소에 내려서서 기름값을 보니 비쌌다. 그렇게 대규모 유전이 많다던 텍사스의 기름값이 얼바인 만큼 비쌌다. 그 주에 유전이 많으니 기름값이 싸야한다는 법은 또 어디 있으랴마는 그래도 유전이 있는 지역이니 싸야하는 것 아닌가? 주유를 하면서 차창에 부딪혀 죽은 벌레들의 흔적을 부지런히 지웠다. <아바타>의 나비족이 되어 햇빛은 피했는데 벌레는 피할 수 없었다. 달리면서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벌레들의 죽은 흔적이 유리창에 남아서 사진에도 남았기 때문이다. 그곳은 인도인이 운영하는 작은 주유소였는데, 식당을 같이하고 있어서 점심 식사를 하려고 보니 음식도 형편없고 지저분해서 다른 곳을 찾아야 했다.

더위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기승을 부렸다. 한 시간에 한 번 정도는 에어컨을 끄고 창을 열고 십 분쯤 달려야 하는데, 창을 열면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게다가 앞좌석의 나와 유진이는 햇빛이 무릎까지 내려서 따가울 정도였고, 뒷좌석의 아내와 효진이는 목 뒤쪽이 익어가고 있었다. 무릎과 목이야 수건 등으로 가리면 되는데, 더위가 문제였다. 문을 열 수가 없으니 에어컨을 계속 틀었고, 덕분에 콧물을 훌쩍이는 앞좌석의 나와 유진이는 후드로 앞섶을 가렸는데, 뒷좌석의 아내와 효진이는 더위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 조그마한 차 안에서도 각자의 위치에 따라서 체감하는 온도가 이렇게 다른데, 성별, 연령, 지역, 계층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각자의 이해와 취향은 또 얼마나 다르겠는가? 그것을 단순화하고 일괄적으로 몰아가며 일사분란함을 질서와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결국 폭력의 다른 이름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난 밤 인터넷으로 확인한 한국의 무상급식 선택투표가 발의 되었다는 뉴스에 마음이 무거웠다. 무상급식 문제는 평등의 문제 이전에 어린 아이들의 밥에 대한 문제라는 점, 밥은 양해하고 넘어갈 수 없는 절박한 문제라는 점, 그래서 밥으로 인한 상처는 깊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번 문제의 핵심이다. 예산의 효율적 사용은 시의 책임자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겠지만, 그 이전에 다른 예산들은 효율적으로 사용되고 있는지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런 후에도 필수불가결한 예산이 있다면 먼저 지출해야 하는 것이 순리 아닌가? 나는 적어도 한강르네상스보다는 아이들의 밥에 먼저 돈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너와 나의 이해를 따지기 이전에, 적어도 밥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각주:3]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달리다가 그래도 가끔씩 에어컨을 껐다. 나와 유진이가 훌쩍인 탓도 있지만 효진이가 에어컨에 아주 약했다. 효진이는 더위를 유난히 많이 타면서도 에어컨만 조금 키면 감기에 걸리거나 더 심한 경우도 생겼었기 때문이다.[각주:4] 그러니 조금 덥더라도 에어컨을 끄고 가끔씩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 더위에도 유진이는 춘옥이를 꼭 껴안고 잔다. 자다 깨서는 춘옥이 일광욕을 시킨다면서 옷을 벗겨 대쉬보드 위에 올려놓는다. 아내와 내가 놀려도 소용없는 일이다. 춘옥이는 유진이의 소중한 곰돌이 인형이다. 그래도 이름이 춘옥이가 무엇인가? 9학년이 무슨 곰돌이 인형이냐고 놀려도 유진이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위안인가보다.

유진이는 초등학교 4학년이던 2006년 이모가 살던 싱가포르에 갔다가 말레이시아까지 가서 1년을 지내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 때 떠나기 전에 외삼촌이 사준 인형이 춘옥이다. 어학연수를 가거나 유학을 떠나는 아이들이 많아지면서 자기 반 아이들이 점점 줄어간다고 하소연하던 유진이는 이모가 싱가포르에 같이 가자는 말에 겁도 없이 그러고 싶다고 해서 우리를 놀라게 했었다. 우리는 어학연수 하는 셈 쳤고, 어려서부터 이웃에서 같이 생활했던 이모에다가 또래 오빠 준성이가 있었고, 늘 딸 하나를 갖고 싶다던 이모부까지……아내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질 않아 싱가포르에 가서 아이가 적응할 때까지 한 달 간 같이 있다가 돌아왔고, 그 후에도  아이가 보고 싶다며 밤마다 눈물로 지새기 일쑤였다. 덕분에 1년 동안 아내는 체중이 7나 빠져 버렸다. 어려서 낯선 곳에서 혼자 생활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도 아이가 보고 싶은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아이는 꿋꿋했다. 아니 여태 그렇다고 알고 있었다

유진이의 춘옥이. 이 녀석이 암놈인지 수놈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유진이의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

초등학교 4학년이라고 해봐야 고작 열 한 살짜리 아닌가? 아무리 이모가 잘해줘도 낯선 나라에서 생활하는 열 한 살짜리에게 무섭고 두려운 것이 왜 없었겠는가? 그 때 자기 방에서 혼자 잘 때 무서워서 춘옥이를 늘 꼭 껴안고 잤단다. 생각해보면 다른 가족과 함께 있던 부모도 아이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는데, 고작 열 한 살의 아이야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이는 그 이야기를 춘옥이에 대한 애착으로 계속 이야기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이제야 알아들었다. 늘 그렇지만 아빠는 바보다.그래서인지 춘옥이에 대한 애착은 아내의 유진이에 대한 그것과 닮았다. 지금도 아침에 일어나면 춘옥이를 욕실까지 데리고 다닌다. 유진이가 돌아오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을 텐데, 늘 언니가 끼고 다니는 춘옥이가 부러웠는지 언니가 수련회에 간 사이에 효진이가 일을 저질러 버렸다. 춘옥이의 자라지도 않는 털을 깎아주겠다고 가위로 가슴에 상처를 낸 것이다.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하면 유진이는 화를 낸다. 어쨌든 유진이의 춘옥이는 그동안 몇 번 세탁을 했음에도 때가 탔다. 요세미티를 다녀와서 아내가 손세탁을 했는데, 건조기에서 눈에 상처가 날지도 모른다고 안절부절못하는 유진이의 모습은 차마 웃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때가 탔다고 이야기했더니, 앞으로는 빨지 않고 일광욕을 시키겠단다. 이제는 차에 타서 생각나면 이렇게 대쉬보드 위에 춘옥이를 올려놓고 일광욕을 시킨다. 일광욕하는 춘옥이를 보면서 바보 아빠는 그 녀석이 문득 고맙다. 우리 집에서는 정말 아빠라고 쓰고 바보라고 읽어야 하나보다.

I-40은 스텝사이를 끝도 없이 달리는 단조로운 길이었다. 덕분에 크루즈를 설정해두고 차 안에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오랫동안 나눌 수 있었다. 살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이 무엇인지 서로 이야기하다보니 결국 내가 유진이에게 당부하는 말이 되어 버렸다. 눈치 빠른 아내가 화제를 돌려서 유진이가 말레이시아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고, 아내는 당시에 내게 서운했었던 것을 이야기했고, 효진이는 과자를 먹으며 이야기를 들었다. 같이 살면서도 서로 가장 잘 안다고 하면서도 속내를 제대로 몰라서 서로 상처 받고, 상처를 주고 있었나보다. 각자 열심히 산다고 뛰어다녔지만 정작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 했구나 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오늘은 이동일, 크게 매력적인 현지식이 없으면 간단히 먹어야 한다. 그래서 버거팅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이들이 버거킹 치킨텐더를 좋아했는데, 작은 조각 20개가 들어간 한 팩이 4.99달러니 아주 저렴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한참을 달려도 사만다는 조용하기만 했다. 사만다가 조용한 것을 보니 길에 큰 변화가 없다는 말이다. 얼마쯤 달렸을까, 체로키(Cherokee)족과 관련된 관광 상품점이나 식당 광고가 늘어나고 있었다. 오클라호마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오클라호마는 촉타오(Choctaw)족의 언어로 빨간색의 사람들’(okla homma)을 말하는데 인디언을 의미하는 말이다.

I-40의 전경(상), 중부지역을 달리다 쉽게 발견하는 대형 십자가(), 이제는 식당 이름으로 남은 체로키()

오클라호마를 인디언과 서부개척의 요람이라고 말하지만, 이 말은 일방적인 폭력에 가까운 것이다. 오클라호마를 개척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이곳에 먼저 강제 이주해 있던 인디언들을 다시 이 땅에서 몰아낸 것을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지아 주에 살던 체로키족 영토에서 금이 발견되자 체로키족을 그곳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1830년 인디언 이주법(The Indian Removal Act)[각주:5]을 제정하고, 서부로 강제 이주시키는데 그 길을 눈물의 길’(Trail of Tears)이라고 불렀다. 강제 이주하는 과정에서 15,000명 중 8,000명의 체로키족이 죽임을 당하면서 도착한 곳이 지금의 오클라호마다. 체로키족을 비롯해 소위 다섯 개의 문명화된 부족이라고 불리는 치카소족, 촉타오족, 크리크족, 세미놀족과 그 밖의 다른 인디언 부족들이 비슷한 연유와 경로로 오클라호마에 강제이주 되어 온다. 오클라호마가 1834년 인디언 왕래 법령(The Indian Intercourse Act)에 의해 인디언구역으로 정해졌던 것이 19세기말 이곳에서 유전이 발견되자, 백인들은 다시 이곳을 빼앗기 위하여 1907년 인디언 구역을 병합하여 오클라호마 주로 승격시킨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인디언 부족들은 모두 인디언 보호구역(Reservation)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현재 미국 내에는 310개의 인디언 보호구역에 202개 부족 1,500,000명이 거주한다고 한다. 그들은 한반도 보다 넓은 인디언 보호구역 내에서 자신들의 정체를 잊고, 국가 지원금으로 생활하고 있지만 높은 실업률, 마약 및 알코올 중독, 도박, 자살 등의 문제로 고사의 위기를 겪고 있다고 한다. 2010년에 미국 정부는 초기 정부가 인디언을 탄압[각주:6]하고 강제 이주 시킨 점에 사과했지만, 현재 진행형인 이들의 문제가 해결될 것인지는 좀 더 두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다른 나라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준열한 미국 정부가 왜 자신들의 현재진행형 문제에 대해서 애써 외면했는지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들의 현재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 그들이 왜 보호구역에 갇히게 되었는지 밝혀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예전 그들의 땅이었던 곳에 대한 소송이 줄을 이을 것이고, 그 결과는 누가 보아도 명백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각주:7]

오클라호마는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서 조드 일가가 살길을 찾아서 캘리포니아로 떠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유전이 발견되었지만 몇몇 자본가들의 몫이고, 가난한 농민들은 여전히 가난했고, 척박한 땅과 모진 기후에 언제나 힘들 수밖에 없었던 배경으로 등장하는 곳이 오클라호마다. 삶의 기반을 모조리 처분해서 얻은 돈으로 낡은 트럭에 온 가족을 싣고 떠나는 조드 일가의 모습은 1974년 서울로 올라오던 우리식구들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각주:8] 하지만 그들이 죽을 고생을 하며 도착한 캘리포니아는 척박한 땅이나 모진 기후보다 더 지독한 농장주들의 횡포와 자본의 부조리한 논리가 기다리는 곳이었다. 그들이 캘리포니아의 축복어린 풍요 앞에서도 철저히 소외될 수밖에 없던 이유가 그들의 무지나 게으름 때문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현재도 그러한 소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다만 그 소외의 대상이 이민자들이나 제3세계의 값싼 인력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이토록 엄혹한 자본의 논리에 철저히 길들여진 미국의 농작물과 경쟁해야하는 FTA 이후의 우리 농촌이 걱정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체로키족의 슬픈 사연이나 살기 위해 떠났던 1930년대 빈농의 모습이 이제는 그저 옛이야기처럼 팬시화 되어 거리 곳곳에 관광객을 호객하는 간판으로만 걸려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비극이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도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체로키족이 그랬듯이 신도시 개발, 서울시 뉴타운 정책 등으로 삶의 터전을 하루아침에 잃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낯선 이야기는 아니지 않는가?

여러 시간을 달려왔기 때문에 유진의 아이팟도 밧데리가 다 되었다. 덕분에 지루해하는 가족들에게 영화 <노트북>(The Notebook, 2004)<콜드마운틴>(Cold Mountain, 2003)이야기를 해줄 수 있었다. 미국역사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사랑 이야기로 넘어간 것이다. <콜드마운틴>은 강의 시간에 이야기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자주 활용하는 작품인데 이야기를 하면서 더 감동을 느끼는 작품 중의 하나였다. 그러다 <콜드마운틴>의 감독이었던 안소니 밍겔라(Anthony Minghella)<잉글리시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 1996)와 그가 제작을 맡았던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The Reader, 2008)까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어려서 주말과 일요일 밤이면 볼 수 있었던 <주말의 명화><명화극장>이 떠올랐다. 어려서 우리 집에서는 저녁 7시면 어린이 방송이 끝나고 모두 공부방으로 돌아가 공부를 했었는데, 아버지는 <주말의 명화><명화극장>만은 챙겨서 보여주셨다. 여쭈어 보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영화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물론 그중에는 어린나이에 보기 어려운 영화도 있었고, 보다가 잠들던 영화도 있었다. 이따금 영화를 보다가 아버지 고등학교 때 본 영화라고 이야기를 해주시거나, 출연한 배우의 다른 작품을 이야기 해주시기도 했다. 가족들에게 영화 이야기를 하다말고 문득 그 시절, 아버지와 <명화극장>을 같이 보던 그 때의 아버지 나이를 내가 지금 지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내 아이들이 지금의 내 나이가 되어서 제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며 나를 기억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문득 따듯해졌다.

다행스럽게도 오클라호마에 도착했을 때에는 8시가 넘었는데도 아직 해가 조금 남아 있었다.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가볍게 차에서 내리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마치 20061224일 싱가포르 창이공항(Changi Airport)에 내렸을 때 느꼈던 그 숨 막힘의 압도 같았다. 서울에서는 겨울에 출발했고, 비행기에서는 내내 시원했기 때문에 공항에 내리는 순간, 기대와 어긋나며 문득 느껴지던 숨 막힘! 차에서 내내 에어컨을 틀고 왔으니 밖의 기온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오크라호마시티는 절절 끓고 있었다.

체크인을 하고 방까지 짐을 옮기는데 지열이 엄청났다. 숙소를 예약하면서 오클라호마의 숙소는 매우 저렴한 곳(다른 지역 평균의 1/2 가격)을 골랐는데, 가격 대비 시설은 견딜만한 수준이었다. 방으로 올라와 보니 에어컨은 이미 켜져 있었다. 시원은 했지만 우리가 언제 올 줄 알고 이렇게 에어컨을 켜둔단 말인가? 덕분에 시원하기는 했지만 확실히 풍요가 과한 나라인 것은 분명했다.

오클라호마시티의 숙소

 숙소에서 아내가 손으로 빤 빨래들

오늘은 우리의 계획대로라면 이곳에서 빨래를 해야만 한다. 예약을 할 때, 숙소 정보를 보니 세탁실(Laundry room)이 있다고 해서 빨래를 싸들고 내려갔는데 빨래를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세제도 없었지만 시설이 워낙 낡고 더러웠다. 결국 다시 빨래를 싸들고 방으로 올라와 아내가 손빨래를 했다. 비누로 빨고 몇 번을 헹구어 주면 내가 손으로 짜서 널었다. 아내의 말처럼 살기 위해서 하는 대부분의 중요한 일들은 티도 나지 않는, 매일매일 반복해야 하는 고단한 것들이다.

빨래를 하고 내일 돌아볼 오클라호마시티의 중요 지점과 이동 거리 그리고 동선을 구글 지도에서 확인하고, 아이들을 재우려고 보니 모두 콧물을 훌쩍거린다. 아마도 하루 종일 차 에어컨 바람 앞에 있었고, 숙소의 에어컨 바람이 과했나보다. 약을 찾아서 먹였다. 밤이 깊어도 더위는 좀처럼 식지 않고, 숙소 전체에서 돌아가는 에어컨 소리만 요란했다.

 

  1. 미국인들의 퇴근본능은 거의 신앙 수준이었다. 일과 중에 아이들을 픽업하러 나오는 그들의 모습에 놀라고, 칼같이 지켜지는 그들의 퇴근본능에 질리고, 저녁식사는 가족과 함께라는 그들의 문화가 부러웠다. 이러한 모습에서 무엇을 위해 왜 일하는지 아는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구나 라는 생각과 동시에 “그러면 소는 누가 키우지?”하는 의구심이 일었던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워커홀릭의 한계일까? [본문으로]
  2. 아이스백은 얼바인 요거랜드의 경품으로 얻은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아이스박스를 가져갈 수 없었기 때문에 장거리 운전 시에 물을 차갑게 보관하는데 유용하게 쓰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체크아웃 하기 전에 숙소에서 아이스백 가득 얼음을 채워 와야 했기 때문에 아이스백을 가지고 올라가야 했다. [본문으로]
  3. 일본에서 저소득층을 위한 유치원비 지원 방식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저소득층의 교육비는 국가에서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만약 유치원에서 교육비를 받으면, 누가 돈을 내고 누구는 무상지원을 받는다는 것을 유치원에서 알 게 될 테고, 그러면 혹시라도 차별이 발생하고, 아이들이 상처를 받을 것을 우려한 정부는 유치원 비용을 교육청에서 수납하게 한단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배려가 복지의 시작임을 알아야 할 사람들이 있다. [본문으로]
  4. 2005년 여름휴가를 대구를 거쳐 경주로 갔었는데, 내려가는 차 안에서 에어컨을 계속 켜고 갔었다. 아이는 대구에서 잘 놀고 경주에 도착해서도 풀장에서 잘 놀았다. 다음날 석굴암에 올라가는데 효진이가 자꾸 아프다고 했다. 당시 다섯 살이었으니 그 더위에 조금 많이 걸으니 꾀가 나서 업어달라는 줄 알고, 아내와 번갈아서 아이를 업고 다녔다. 그런데 밤에 숙소에서 아이들을 재웠는데, 아무래도 효진이 숨소리가 이상했다. 덜컥 겁이 나서 아이를 태우고 경주에서 병원을 갔는데, 자신들은 잘 모르겠으니 더 큰 병원에 가라고 해서, 경주동국대병원에 찾아갔더니 폐렴 같단다. 응급조치를 해줄 테니 빨리 서울에 더 큰 병원으로 가란다. 그길로 짐을 꾸려 밤샘 운전을 하며 분당으로 돌아와 집 뒤에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시켰고, 며칠을 그렇게 입원해 있어야만 했다. 무모한 부모 덕분에 아이가 고생했던 사건이다. [본문으로]
  5. 인디언 이주법은 미시시피 강 동쪽에 살던 인디언 부족을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이주시킨다는 법으로1930년 앤드류 잭슨 대통령이 서명했다. 이 법은 인디언 거주 지역의 땅과 금에 대한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산업혁명이후 영국에서 면화수요가 급증하자 호황을 누리던 조지아 주를 비롯한 남부지역에서는 농장 확장을 위해 인디언의 땅이 필요했고, 1928년 조지아 주 인디언 거주지에서 금이 발견되자 인디언을 이주시키고 합법적으로 그 땅을 차지하려는 백인들의 탐욕으로 탄생한 법이다. 이 법으로 약 10만명의 인디언들이 지금의 오클라호마 지역으로 강제 이주하게 된다. 겉으로는 자발적인 동의였지만 거부하면 연방 조약을 파기한 것으로 간주되어 부족이 아닌 개인 단위로 취급되거나 부족의 존망을 위협받는 무력시위에 시달려야했다. [본문으로]
  6. 1890년 미군 제7기병대에 의해 여자와 아이를 포함한 수족 200여명이 항복한 상태에서 무참히 학살당한 운디드니 학살이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다. [본문으로]
  7. 이러한 결론의 근거로는 체로키족의 소송을 들 수 있다. 미시시피 강 동쪽의 체로키 영토를 5,000,000달러에 미국정부에 양도한다는 내용으로 1835년 체결된 뉴이코타 조약이 불법이라고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판결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앤드류 잭슨 대통령의 거부로 집행이 무산된 적도 있었다. [본문으로]
  8. 고향을 떠나야 하는 이유야 달랐지만 낯설고 모진 공간으로 떠나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0년대 서울로 이사해온 이후 끈 떨어진 연처럼 늘 떠돌고 있다는 쓸쓸한 느낌은 당시 서울로 떠나온 사람들의 공통점이 아닐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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