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웃음의 서사, <개그 콘서트>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아하 그렇구나 웃거나 말거-!”

네 살 먹은 둘째가 식탁에 앉아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귀엽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해서 아내와 함께 웃어라도 주면 제 깜냥에는 잘한다는 것인 줄 알고 몇 번씩 되풀이하곤 합니다. 아내의 이야기로는 첫째와 둘이 앉아서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대사나 몸짓 혹은 말투와 노래를 거의 모두 흉내를 낸답니다. 나가 있어!, 옥동자에요, 원투쓰리포, 띠리띠리 등등. 급기야 오늘은 첫째와 둘째가 앉아서 김지선이 핸드폰을 받으면서 어머 어머라고 외치며 몸을 흔들고 나오는 것을 마주보고 했답니다. 아내는 두 녀석에게 흉내를 내면 <개그콘서트> 안 보여준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개그맨 흉내를 내는 아이들의 버릇을 개그프로를 통해 제어해야하는 이 웃지 못 할 상황에 자꾸 웃음이 났습니다.

저는 최근 논문에서 1) 비서사적 요소의 전면화, 2) 자기 완결성의 포기, 3) 계열체적 서사로의 개방으로 드러나는 <개그콘서트>의 서사 파괴현상을 지적했습니다. 즉 전통적인 의미의 서사는 사라지고 개인기를 보여주기 위한 최소한의 서사만 남겨 두었다는 것입니다. 가령, ‘우비삼남매의 정체성은 서사를 통해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세 인물의 개인기를 통해 드러날 뿐입니다. 그렇다고 개인기를 통해 살아있는 캐릭터를 구현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단지 캐릭터 역시 그들의 개인기를 보여주기 위한 전제일 뿐입니다. 옥동자와 노통장의 성대모사, 무림남녀의 무술, 박준형의 무갈기, 댄서킴의 쭉쭉춤, 김지선의 섹시댄스, 김다래의 성대모사 등이 대표적인 개인기입니다. 심지어 미션임파서블에서는 어설픈 개인기를 웃음의 중심 코드로 활용하기도 합니다.

개인기는 반복을 통해 관객 혹은 시청자를 학습시키며, 그 학습의 결과가 각 코너별 넘나들기를 가능하게 하고, 웃음의 전제가 되는 심리적 공유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봉숭아 학당세바스찬이 웃기는 것은 그렇습니다에서 보여주었던 땅그지캐릭터 때문인데, 코너의 독립성과는 상관없이 필요에 따라 세바스찬땅그지캐릭터가 뒤섞이기도 합니다. 캐릭터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독립적인 서사가 필요한데, 오히려 여기서는 그 독립성을 파괴하고 각 코너별로 넘나들게 함으로써 캐릭터의 허구성과 작위성을 노골화시키는 특성을 드러냅니다. 이를 통해 세바스찬땅그지그리고 유치원생의 캐릭터는 임혁필을 중심으로 필요에 따라 수렴/발산을 반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개그콘서트>의 모든 코너들은 관객들의 적극적인 개입을 유도합니다. 이 과정에서 관객들은 그 코너의 순서나 흐름을 학습하고, 학습한 정도만큼 그 코너의 흐름에 몰입하는 것이죠. 관객들이 반복되는 대사나 개인기를 익히고, 그것을 실제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과정을 통해 해당 코너에 대한 충성도는 높아집니다. 이러한 관객들의 개입은 <개그콘서트> 관련 커뮤니티를 통해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진행되며, 이것은 다시 <개그콘서트>로 피드백 되어 관객들의 향유 내용이 실제 코너에 개입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향유를 극대화할 수 있는 모든 회로를 확보하려는 것이지요.

<개그콘서트>의 웃음은 무겁지 않습니다. 어설픈 계몽이나 현실에 대한 싸늘한 조소 그리고 날카로운 풍자 따위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습니다. 동사적인 의미에서 웃음을 터트릴 수 있느냐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며, 명사적 의미의 내용에는 철저하게 무관심한 것이지요. 저는 이것을 비판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개그콘서트>의 전략이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호응을 얻고 있는가에 대하여 주목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프로의 파괴된 서사를 분석해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징후와 예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징후가 드러났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즘이 발현되는 문화 공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근대적 인식 방법과 향유 형태를 가지고서는 지금 이곳의 문화로부터 소외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합니다. 텅 빈 웃음, 반복과 학습, 향유와 유대의 메커니즘, 상호텍스트성의 극대화, 아우라의 공유 등 <개그콘서트>의 변별적 자질을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살인의 추억><지구를 지켜라>가 흥행의 극단을 보이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임을 <개그콘서트>의 읽으며 생각합니다.

나가 이-!”

혀 짧은 소리로 봐서 둘째입니다. 아내의 분위기로 보아 아마 둘째는 제 방으로 나가 있어야할 것 같습니다. 경박하지도 경쾌하지도 않는 그저 가벼운 지금 이곳입니다.

<매디프렌> 2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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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우리들이 두렵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재범이 출국했다. 잘 나가던 아이돌 그룹의 리더였던 그가 사과문을 발표하고 쫓기듯이 출국했다. 이유가 무섭다. 미국 내 네트워킹 사이트인 마이스페이스2005, 2007년에 올린 글에서 한국을 비하하는 내용이 있었다는 것이다. 한 네티즌이 캡처해서 자기 스타일로 번역하여 올린 글이 삽시간에 나라 전체를 압도했다. 번역 방식이나 어감 차이 혹은 현지의 관용적인 표현 등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다르게 읽힐 수 있는 글이었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이토록 일사분란하게 평가하고 단죄하는 우리 사회의 맹목적인 기민함은 두렵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그의 출국 이후, 소속사와 나머지 멤버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또 얼마나 단정적이고 기민했던가?

야구를 참 즐겁게 했던 정수근이 돌연 은퇴를 했다. 소속팀의 열혈팬이 거짓 신고를 했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구단은 방출을 통보했고, KBO는 그에게 자신의 무죄를 법적인 차원에서 스스로 증명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그는 결국 젊은 나이에 그라운드를 떠나야했다. 크고 작은 사고를 일으켰었다는 전력과 소속팀에 대한 열혈팬의 과도한 충정 그리고 책임지지 않으려는 팀과 KBO의 안일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실에 대한 이성적 판단이나 그것의 검증에 필요한 토론 과정보다는 선정적 결과물에 맹목이 되어버리는 우리의 현재를 볼 수 있게 한 사건이었다.

건강한 사회는 다양한 소리’(多聲)다른 소리’(異聲)로 충만하고, 그 안에서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바탕으로 조화와 합의의 과정이 시스템화된 사회다. ‘하나의 소리다양한 소리를 압도하고, ‘똑같은 소리다른 소리를 윽박지르는 우리 사회의 이러한 모습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해야만 하는 우리 안의 파시즘이다. ‘단결결속을 뜻하는 파쇼(fascio)를 어원으로 하고 있는 파시즘(fascism)은 현재적 불안의 결과다. 지금의 안온한 일상이 깨질 수도 있다는 불안, 그 불안은 서로를 결속시키고 단결시킬 수 있는 요소들을 과도하게 강화함으로써 일사분란함을 얻지만 이성적 판단을 잃는다.

파시즘이 두려운 것은 그것이 항상 희생의 제물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인종, 국가, 지역, 종교, 사회적 공익, 도덕적 명분 등을 앞세워 희생의 제의를 치르고 그 과정을 통하여 사회적 결속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모파상의 <비곗덩어리>를 상기해보자. 절박한 고비에서 자신들을 위해 프로이센 장교에게 몸을 팔 것을 요구하고, 이후에는 그 매춘부를 경멸하는 역마차 안의 사람들. 자신들의 비겁한 타협을 잊기 위해 일사분란하게 그 매춘부를 비난하고 경멸하던 그 사람들의 지독한 파시즘. 그 매춘부에 비해 자신들이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묵시적으로 합의해버리는 이기의 폭력.

난 우리들이 두렵다. 어린 여가수의 허벅지를 꿀벅지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불러대면서도 누군가의 말실수를 용서하지 않는, 과거의 실수로 현재를 집요하게 단죄하는, 자신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윽박지르는 우리들의 함성이 두렵다. 그러한 과정에서 어떠한 토론도 용납되지 않는 우리들의 맹목과 누군가의 입을 모두의 입으로 닫아버리는 우리들의 반성하지 않는 정의(正義)가 두렵다. 오늘 난 우리들이 두렵다.

 2009년 <한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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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문화, 즐거움의 전략화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B급 문화는 부족한 조건에서 넘치는 자극을 생산한다. 다시 말해 B급 문화는 적은 예산, 인지도 낮은 주인공, 낮은 기술 수준, 저급한 감정과 어설픔이라는 부족한 조건을 기반으로 욕설과 폭력의 노골적인 남발과 섹스의 적나라한 묘사라는 넘치는 자극을 생산한다.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감각의 분출과 자극의 과잉은 A급 문화의 견고한 깊이와 의미의 강박으로부터 탈주를 부추기고, 화석화된 엄숙주의와 권위주의를 조롱한다. B급 문화는 갖추어야 할 것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그 어느 것에도 구속되지 않으며, 역설적으로 아무 것도 갖추지 못한 까닭에 문화 권력의 제도적 억압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그 자유가 즐거움을 창출하고 즐거움은 경쾌한 놀이로 구체화되는데, 이러한 놀이의 즐거움이 B급 문화의 창조적 동력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B급 문화라는 말은 개념화된 공식적인 용어는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식적인 용어로 개념화 되었다면 그것은 이미 B급의 거친 생명력을 잃은 A급 문화이기 때문이다. 개념을 정립하기 위한 일관된 특성이나 뚜렷한 목적을 갖추지 못한 저렴한 욕망의 노골적인 문화적 분출 양상 정도로 B급 문화의 정의에 합의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곳에서 B급 문화에 주목해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Tell me'에서 시작된 원더걸스 열풍은 'Nobody'까지 거침없이 이어지고, <무한도전><12><패밀리가 떴다>라는 클론을 만들고, <무릎팍 도사><라디오 스타>와 독한 방송 경쟁을 하면서 시청률을 선도하는 지금 이곳에서 어쩌면 B급 문화는 더 이상 B급 문화가 아닐지도 모른다. 비디오 가게를 음험한 공간으로 만들었던 붉은 딱지의 에로비디오나 고속도로 위에서 졸음을 쫓던 카 라이브뮤직처럼 A급 문화의 틈새를 공략하던 B급 문화가 아니라, B급 문화의 특성을 차별화 전략으로 활용한 B급 문화의 공세적 제도권 진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탓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B급 문화의 다양한 양상들이 A급 문화 영역의 주도적 전략으로 채택되고 이것이 확대 재생산 됨으로써 문화의 중심적인 징후로 급하게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 간 20-30%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무한도전>의 프로그램 포맷은 포맷 없음이다. 이와 같은 프로그램 포맷의 역설은 <무한도전>을 기존 프로그램과 차별화시키는 가장 두드러진 변별점이다. 그것은 특정한 틀이나 형식을 지향하기 보다는 시청자들의 즐거움을 극대화할 수 있는 요소나 방식을 발굴해서 평균 이하의 캐릭터들이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을 즐기는 지극히 단순한 포맷이다.

<무한도전>의 이러한 차별화 전략은 무식, 무능력, 유치함으로 각기 특화된 캐릭터들의 무한 이기심이나 무모한 도전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남으로써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이 과정에서 즐거움을 극대화한다. 평균 이하의 열등한 캐릭터를 독립적으로 설정하고, 재미 외에는 별다른 성과를 기대할 수 없는 무모한 도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무한 이기심과 유치함이 이 포맷의 특성이다. 메뚜기, 하찮은 형, 정중앙, 돌아이, 꼬마, 잔진(이상 무한도전), 은초딩, 허당승기, 강파치노(이상 12), 덤앤더머, 꽈당, 김계모, 천데렐라, 큰형님, 달콤 살벌 예진 아씨(패밀리가 떴다) 등과 같이 각각 설정한 캐릭터에 맞는 별명을 짓고, 그 캐릭터를 식사 해결과 같은 원초적인 임무나 지하철과의 경주와 같은 무모한 도전, 목욕탕 물 퍼내기와 같은 쓸모없는 대결이나 막무가내 영어와 같이 무식한 미션 수행을 통해 구현하는 방식이다. 그 과정에서 각각의 캐릭터는 자신의 설정에 맞는 무한 이기심을 발휘하고, 이로 인한 작은 소동이 웃음을 유발한다. 또 다른 두드러진 특징은 평균 이하의 캐릭터로 고정 출연진을 구성하고, 국내외 A급 스타를 등장시켜 그의 장기를 평균 이하의 캐릭터들로 하여금 수행하게 함으로써 극단적인 비교를 꾀하고, 이를 통해 캐릭터를 희화화시키는 전략을 적극 활용한다는 점이다. 독립된 부분 요소로서 캐릭터나 상황 설정이라는 최소한의 전제만 합의하고 그 외의 부분에 대해서는 현장성을 극대화하는 방식을 채택하기 때문에, 각 요소들이 거시 서사에 종속되어 기능하는 전통적인 의미의 서사 전략은 기대할 수 없다. 작위적인 중간 이하의 캐릭터 설정과 지속적인 구현, A/B급의 극단적 대비와 B급 문화의 전면화, 어설픈 계몽과 함께 사소하고 무용한 것들에 목숨을 거는 상황, 자신들만의 생경한 조어와 말 줄이기, 끊임없이 이어지는 유치한 장난의 맥락 없음, 어처구니없는 무식과 그것의 희화화 과정을 통한 웃기기는 열등한 것들의 과도한 드러냄이라는 측면에서 B급 문화의 특성을 강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B급 문화가 지금 이곳의 예능 프로그램을 압도하며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현상이 B급 문화의 양적인 주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A급의 가치, 깊이, 성찰, 중심, 진지, 권위, 공적 영역 등을 견제하거나 전복시키기 위한 문화 정치적 맥락에서 B급 문화의 강력한 드라이브가 걸렸다고 보기도 어렵다. 오히려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B급 문화의 주도 현상은 B급 문화의 내재화이며, 문화 권력에 기반한 서열화를 포기한 B급 문화의 주류화로 볼 수 있다. B급 문화의 주류화를 선도하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구체화문화콘텐츠의 급부상이다. 1990년대 이론으로 앞서가던 포스트모던은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 비로소 다양한 구체적인 현상으로 드러나는데, B급의 주류화도 그 하나로 볼 수 있다. 중심/주변으로 대변되는 이분법적 서열체계를 거부하고 중심의 지배적 권위를 회의하며 소외된 주변부 것들의 다양성에 주목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이 B급 문화의 부상 배경과 일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한 디지털 문화 환경을 바탕으로 급부상한 뉴미디어는 다양한 문화콘텐츠의 등장을 가능하게 하였고, 상대적 우위를 확보하려는 콘텐츠의 경쟁적 차별화 전략을 강화시켰다. 차별화 전략의 일환으로 좀 더 강하고 자극적인 요소들이 요구되었고, 현실원칙을 넘어서는 강박 없는 즐거움이 보편된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문화의 놀이적 기능이 강화된 점도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다. 현실의 이해(利害)와 무관하고, 허구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며, 즐기는 자를 매료시키고, 현실을 가장하지만 가장 현실적인 관계를 드러내며, 창조성에 대한 탐구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 놀이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무한도전>을 비롯한 B급 문화의 일반적 특성과 다르지 않다.

특정 문화의 급부상은 마니아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다수의 열성팬의 등장을 배경으로 하지만, 지금 이곳의 B급 문화는 오히려 대중들의 폭넓은 지지를 기반으로 한다. 소수의 취향공동체를 중심으로 생산/향유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된 콘텐츠가 소비될만한 일정 규모의 뚜렷한 시장과 이러한 시장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발표 매체(platform)를 기반으로 하는 거점콘텐츠를 중심으로 형성된 다수 대중의 보편적 취향을 토대로 한다. 깊이의 강박에서 자유로운 쾌락을 지향하는 B급 문화 장르(무협, 판타지, SF, 추리소설 등)의 보편화와 유치, 천박 등 A급 문화에서 억압된 욕망을 강박 없는 놀이와 즐거움의 강렬한 유혹으로 자극하고 있는 B급 문화는 이제 보편적 취향이 되어버렸다는 점에 주목해야만 한다. 이 말은 주류문화에서 억압된 근원적 욕망을 B급 문화를 통해 배설하고자 하는 대중들의 성향에 대해 그것이 위협적이라고 과장된 호들갑을 떨자는 것이 아니다. 강박 없는 즐거움은 문화의 생산 동력이며, 즐거움의 유혹은 딱딱하고 무거운 것에 익숙한 우리에게 오히려 신선한 긴장이 되면 됐지 결코 해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물론 A급이 거세된 B급만의 획일성은 A급의 문화 권력만큼이나 위험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정말 문제는 B급 문화의 정체나 차별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낙관적 기대를 갖거나 우울한 전망을 하는 것이다. B급 문화의 주류화가 진행 중이라면, 기대와 한계에 대한 실천적인 탐구가 가장 우선적이고 절실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 B급 문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의미와 성찰이라는 문화 본연의 몫을 포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즐거움을 전략화하여 모든 것에 선행시킴으로써 문화의 무게를 가볍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굳이 경박이나 경쾌라는 말대신 가볍다는 가치중립적인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그것의 특징이 가치의 개입과는 분명한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익숙한 복고풍 리듬, 다소 촌스럽다는 느낌을 강조한 원색 중심의 스타일, 멤버 간의 조화보다는 개성적인 불일치, 쉽고 편안하게 반복할 수 있는 노래가 새롭지만 지극히 편안한 B급 감성의 원더걸스에게 저속하다거나 키치적인 요소가 느껴진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오히려 원더걸스, 싸이, DJ D.O.C와 같이 B급 취향을 앞세운 캐릭터나 <무한도전>, <12>, <패밀리가 떴다>, <무릎팍 도사>, <라디오스타>, <명랑히어로>, <해피투게더> 같은 예능 프로그램이나 <디워>, <다찌마와리> 같은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B급 취향이 주류문화의 보편적 코드로 등장하고 내재화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원색중심의 촌스러운 복장과 점집을 형상화한 세트장, 맥락 없는 웃음을 만드는 올밴이나 상대의 치부를 들추며 즐기는 건방진 도사 그리고 인터뷰 대상을 면전에서 까발리는 <무릎팍도사>를 보자. A급 스타를 B급으로 설정된 고정 캐릭터들이 소위 까대는 이 프로그램의 경쟁력은 적나라한 까발림편집자의 자막 개입에 있다. 향유자는 까발림과 편집자의 자막 개입 과정에서 MC와 편집자와 향유자의 선택적 동일시를 이룬다. 출연한 스타의 사생활이나 내력에 대한 까발림 과정에서 향유자는 MC와 동반자적 시점을 유지하며, 메인MC와 보조MC의 상호 견제 그리고 편집자의 자막을 통한 개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향유자의 몰입을 탄력적으로 운용하는 전략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에서 A급 스타와 B급 캐릭터의 경계가 사라지고, A급 스타에 대한 노골적인 야유와 조롱, 스타의 변명이 순간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무거운 과거나 치명적인 스캔들은 경쾌한 즐거움으로 휘발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출연하는 A급 스타의 입장에서도 이렇게 합법적인 방식으로 안정적으로 확보된 변명이나 발언의 기회가 어디 있겠는가? 일본 귀화 문제로 비난받던 추성훈이 한 곡의 노래와 변명으로 가장 사랑받는 한국 격투기 선수로 등극한 기형적인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B급 공간, 캐릭터, 이야기, 취향 등이 충만한 가운데 A급 스타의 변명은 ‘B급 수준에서 용인되고 B급 문화 특유의 강한 전염성을 통해 그를 더 이상 일본인이 아닌 가장 한국적인 격투기 선수로 각인 시킨 것이다. B급이 지닌 이와 같은 감성적인 설득력과 강력한 전염성은 전략화된 즐거움을 앞세워 맹목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는다.

소자본으로 제작되는 B급 문화는 주류문화 중심에서 벗어나 있고, 더구나 적은 자본으로 대중의 관심을 모아야 하기 때문에 좀더 적나라하고 솔직한 표현을 과도하게 구사하며, 주류문화 바깥이기 때문에 A급 문화의 검열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앞에서 밝힌 바 있다. 따라서 B급 문화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것의 유혹에 약할 수밖에 없으며, 그만큼 맹목과 저속화의 걱정은 더욱 커진다. 그것이 지금 이곳처럼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이며 내재화된다면 문제의 심각성은 더욱 증가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원천콘텐츠로서의 만화의 수요가 급성장하고 있고, 수익의 직접적인 결과에 절대적으로 좌우되는 문화콘텐츠 영역에서 B급 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수요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 우려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급 문화에서 비관보다는 낙관을 읽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의 건강한 창조성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특히 지금 이곳의 B급 문화가 A급 문화의 엄숙주의나 권위주의를 조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극대화하기 위한 요소로 적극 활용된다는 점에서 우리의 낙관은 설득력을 얻는다. 싸이의 천박한 몸짓과 노골적인 가사의 낯설음은 주류문화의 엄숙주의와 권위주의에 대한 직/간접적인 풍자만큼이나 전략화된 즐거움을 생산한다. 원더걸스의 댄스는 선정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전염성 강한 경쾌한 즐거움을 창출한다. 주말 황금시간대를 장악한 <무한도전>와 유사한 포맷의 <12><패밀리가 떴다>가 선사하는 즐거움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그것이 B급 감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B급 감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맥락화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익숙하지만 낯선 즐거움을 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이곳의 B급 문화가 A급 문화와의 경계를 허물면서도 나름의 견제와 긴장을 즐겁게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다름’()을 바탕으로 한 창조성에 기인한다.

다름은 우열이 아닌 차이를 의미한다. A급 문화가 우열을 기반으로 하는 서열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면, B급 문화는 다름의 다양성과 역동성이 만들어내는 즐거운 창조에 중심을 두고 있다. 차브(chav)로 대표되는 문화현상 즉, 하류계급의 문화적 취향의 포괄, 촌스러움의 상품화, 사업적 경쟁력 확보는 마이너의 쿨한 포즈를 흉내내는 메이저의 문화로 평가되지만, 다양성의 측면에서 충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현상이다. 바로 이러한 다양성은 문화 권력과 무관한 역동적인 문화생산의 중심 동인이 된다. 다만 지금 이곳의 B급 문화 대부분이 일정 규모 이상의 자본과 상관되어 있고 강력한 유통조직과 밀접한 연관을 보인다는 점을 고려할 때, 다름에 기반한 창조가 문화 창조의 순수한 동기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기서 주목하는 다름은 오히려 문화콘텐츠의 기획 단계부터 충분히 고려된 즐거운 차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전략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UCC를 예를 들어보자. UCC의 경쟁력은 차별적 우위와 즐거움이다. 이것은 다름을 기반으로 하는데, 그것은 A급 문화의 가치 중심의 경쟁과는 구별되는 B급 문화의 다름을 뽐내고, 검증하고, 대중을 장악하는 자발적인 창조행위로서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말하는 다름은 1) 대중을 전제로 한(향유자 중심), 2) 눈앞의 직접적인 검증(문화 권력으로부터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3) 절대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는 attention gather(문화적 가치의 변화)의 특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특성은 기존의 문화 권력의 중심을 이루고 있던 과거, 역사, 전문가 검증으로부터 자유로운 문화적 원시성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의미를 갖는다. 문화적인 야생이 살아나면서 창조성이 강화되는 측면과 함께 성기고 거친 양상이 동시에 드러나는 것이다.

지금 이곳의 B급 문화에 대한 평가는 아직 섣부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당대의 문제의식 없이는 역사의 온전한 평가도 없다는 점이다. 목적 없음, 구체적으로 개념화된 특성 없음, 싸구려 욕망의 진솔한 드러내기, 부족한 인력, 자본, 시장을 토대로 한 과도한 즐거움 추구, 의미나 성찰이 부재하는 놀이 등 지극히 개방적인 형태로 B급 문화의 특성은 진행 중이다. 이 말은 B급 문화가 지닌 현재적 경쟁력과 진화의 지속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B급 문화에 대한 문제의식도 역시 함께 진화해야한다. 디지털 중심의 새로운 문화환경과 문화콘텐츠의 급부상 그리고 개인적인 문화 생산 도구의 보급 등을 고려할 때, B급 문화의 내재화와 보편화는 한층 가속화될 것이다. 이런 가속화는 B급 문화에 대한 가치중립적인 다양한 고민과 연구를 요구할 것이다. 특히 전략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문화콘텐츠 분야의 관심은 더욱 그렇다. 이제는 부르디외식 구별짓기의 관점이나 문화 연구자들의 키치적 관점으로는 B급 문화를 재단할 수 없다. B급 문화는 즐거움, 다름(), 문화적 다양성과 역동성, 콘텐츠화 전략 등의 관점에서 시간과 깊이를 확보하고 논의해야할 새로운 경계다. 이것이 논의의 주체 역시, 'Nobody but you'임이 분명한 이유다.

2008년 11월 <쿨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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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 즐거움, 일드와 미드 그리고 한드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텔레비전이 다리를 갖고 있던 시절, 할아버지를 따라서 텔레비전을 보기위해 저녁마다 동냥 시청을 다니곤 했었다. 아버지는 그 모습이 안타까우셨는지 없는 살림에 덜컥 텔레비전을 사오셨고, 덕분에 매일 저녁 <여로>를 집에서 볼 수 있었다. 물론 그 때부터는 동냥시청을 가기 위해 이른 저녁을 먹거나 밤늦게 할아버지 자전거 뒤에 앉아 집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어졌지만, 텔레비전만 본다고 아버지가 외출하실 때에는 텔레비전 장식장을 잠가놓곤 하셨다. <임진왜란>, <암행어사>, <서부소년 차돌이> 등등 텔레비전은 쉬지 않고 매력적인 즐거움을 쏟아놓곤 했다. 이제는 텔레비전이 다리를 잃고 벽에 걸리는 시대가 되었지만 텔레비전, 특히 드라마의 흡입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양과 질 면에서 국내에서 제작되는 드라마의 수준이 높아졌고, 무엇보다 미국 드라마와 일본 드라마와 같은 새로운 드라마콘텐츠들이 다양한 채널을 통해서 무한 공급되기 때문이다.


거실에서는 아내는 그리섬과 함께 라스베가스에서 벌어진 범죄의 진실을 쫓고 있다. 모니터 속 일촌들의 미니홈피에는 기무라 다쿠야나 웬트워스 밀러가 친근한 미소를 짓고, 큰 아이는 주말 저녁 디즈니 채널의 시트콤 <Hannah Montana>를 보기 위해 맛있는 외식이나 심지어 <무한 도전>마저도 과감하게 포기하곤 한다. 곰곰이 따져보면 이러한 미국 드라마나 일본 드라마의 압박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사실 1970-80년대 <전투>, <코작>, <초원의 집>, <월튼네 사람들>, <Rich man and Poor man> 등등 기억 저편에 아직도 또렷한 그것들도 미국 드라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드라마와 일본 드라마가 지금 이곳에서 문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의 그것이 생산 역량이나 생산 단가의 문제였다면, 지금의 그것은 드라마의 질과 향유자의 취향 그리고 생산 시스템과 유통 구조 등이 유기적으로 얽힌 매우 복합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다.

드라마는 영화와 함께 가장 대중적인 콘텐츠로 꼽히지만, 영화와는 달리 별도의 금전적 지불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다 대중적 접근이 용이하고, 영향력 있는 콘텐츠다. 단막극을 제외하고 가장 짧은 형태인 미니시리즈의 경우 일반적으로 최소 16회 이상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속적인 노출과 학습효과를 창출함으로써 부가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매력적이다. 뿐만 아니라 드라마는 다양한 창구(window)를 활용한 지속적인 수익 창출은 물론 문화적 향기(cultural odor)의 생산을 통하여 인한 국가 이미지 제고 등의 부가 효과까지 거둘 수 있다는 점도 드라마의 미덕을 꼽힌다. 이와 같은 이유로 드라마는 향유 대상과 시장에 대한 엄밀한 분석을 전제로 치밀한 기획과 스토리텔링의 전략적인 접근이 필수적인 장르다.

미국 드라마와 일본 드라마에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이유는 그것의 국적 때문이 아니다. 다국적 자본이 수시로 국경을 넘는 지금의 문화콘텐츠 시장에서 국적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어떻게 문화적 할인율(cultural discount)을 극복하고 우리 드라마 시장에서 대중적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느냐가 문제다. 풍부한 스토리와 다양한 텔링 방식 확보, 장르별 전환(adaptation) 시스템을 통한 스토리텔링의 대중성 검증, 스토리텔링과 스타 비히클(Star Vehicle)의 유기적 결합, 폭 넓고 체계적인 유통망의 전략적 확보와 활용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요인들을 가장 잘 아는 것은 국내 드라마 제작사들이다. , 몰라서라기보다는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국내의 시장의 환경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사전 제작은커녕 촬영 당일 쪽대본에 의지하여 방송 시간 직전에 편집을 마치는 우리 드라마의 현실을 고려할 때, 우리 드라마의 현실은 차라리 선전에 가깝다. 신선한 소재와 매력적인 캐릭터 창출로 인기를 끌면서 작품성에서도 높은 평가 받은 바 있던 <하얀 거탑>의 경우, 마지막 회는 방송시간 10분 전에 편집을 마쳐 넘겼는데 이것마저도 1/2분량에 지나지 않았고, 방영되는 시간 동안 마지막 1/2을 편집하여 방영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졌다. 엄청난 제작비가 투자되었던 <태왕사신기>도 같은 이유로 뉴스가 연장되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한다면 미국 드라마와 일본 드라마는 국내 드라마 시장에서 치명적이다.

하지만 열악한 자본과 유통망을 극복하고 세계 시장에서 당당히 한축을 담당하고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면, 희망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임에 분명하다. 이런 맥락에서 드라마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한류에 대한 과도한 비관적 전망은 근거 없는 기대만큼이나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가 가진 부분과 갖지 못한 부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바탕으로 비관적 전망을 낙관적 기대로 어떻게 바꾸어갈 것이냐가 문제의 핵심인 것이다. 가령, 드라마 제작에 있어서 일본 자본이나 중국 자본의 수용을 비관적으로만 볼 것도 아니다. 일본 자본이 들어오면서 일본에서 인기 있는 특정 배우를 얼마만큼 출연시켜야한다는 식의 개입에 분노할 것이 아니라 그 조건에 맞는 스토리텔링과 전략 수립이 보다 발전적인 자세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드라마콘텐츠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는 규모의 경제가 필요하고, 그 구체적인 시장이 그곳이라면 그곳의 수요에 부응하는 전략 수립은 필수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미국 드라마처럼 시즌제를 도입하여 사전 제작을 완료하고 방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자본의 규모나 특히 가장 열광적인 우리나라 시청자들을 고려한다면 그것이 최선이라고 단정 짓기도 어렵다. 사전 제작을 했을 경우 시청자들의 상호소통적 개입은 상대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미국 드라마나 일본 드라마가 재미있다가 아니라 우리를 열광케 하는 것이 무엇인지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문화할인율이라는 결정적 장벽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드라마가 우리를 압도하는 것은 스토리텔링의 다양성과 그것을 구현해내는 능력이 아닐까? <해리포터><반지의 제왕>이 아니더라도 <태왕사신기><하얀 거탑> 등의 예만 보아도 우리를 열광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이라는 소재를 드라마화했을 때, 중국 시장에서의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판타지적 요소를 강화하고 적대세력으로 내부의 연호개 집안과 화천회라는 가공의 단체를 내세운 <태왕사신기>의 스토리텔링 전략은 매우 유효한 것이었다. 이미 일본에서 두 번이나 드라마화되었던 것을 한국식 정서로 전환을 시도했던 <하얀 거탑>의 경우도 스토리텔링 전략의 승리였다. 열악한 자본과 아직은 부실한 유통 구조를 지닌 우리 드라마의 현실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실천적 방안을 찾아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섹스 엔더 씨티>, <CSI>, <프리즌 브레이크>, <히어로즈> 등의 미국 드라마와 <코쿠센>, <히어로>, <춤추는 대수사선>, <1리터의 눈물>, <언페어> 등의 일본 드라마에 단순히 열광만하는 시기는 지났다. 이제는 그것들로부터 무엇을 벤치마킹할 것이며, 우리 드라마가 어떻게 차별화될 것인지 고민해야할 시기다. 좀더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자세에서 그들의 미덕을 찾아보고, 그것들의 적용 가능성을 탐색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탐구해야 할 시기다. 읽지 못하면 쓰지 못한다. 미국 드라마와 일본 드라마의 열풍은 우리의 리터러시(literacy) 능력을 좀 더 높여준 계기라 믿자. 이제 우리 현실에 맞추어 어떻게 쓸 것인지 고민해야할 때인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할아버지 자전거 뒤에 앉아 동냥 시청을 다니지 않아도 된다. 다리 잃은 텔레비전이 이제는 손 안에 들어와 있다. 바라기는 내가 <임진왜란>을 보며 조선의 역사를 배웠고, <월튼네 사람들>을 보며 가족을 배웠듯이 큰 아이가 DMB폰에서 보는 드라마를 통해 따듯함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곡 그래야할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이 우리 삶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 우리 드라마였으면 더욱 좋겠다. 문을 쓰기 위해 <태왕사신기>를 분석하며 자꾸 할아버지의 자전거 뒷자리가 그리운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 게다.

 2008년 1월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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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형님>, 칭찬해? 칭찬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나이가 들수록 소란스러운 것이 싫다. 채널을 바꾸다 만나게 되는 <아는 형님>은 언제나 소란스러웠다. 교복을 입는 설정도 그리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었고, 연예인 신변 퀴즈를 풀며 정답을 맞히는 과정도 무례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진득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본 적이 없다가 지난 주말 마침내 <아는 형님>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게 되었다. 우연히 접한 프로모션 클립이 하도 유쾌해서 찾아본 것이었다. 게스트였던 걸스데이의 털털함과 리액션도 그 유쾌함에 한 몫을 차지했지만 무엇보다 그 이유는 프로그램 포맷의 차별성에 있었다.


교실을 배경으로 전학생이 오면서 서로 알아간다는 콘셉트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메인 MC와 보조 진행으로 구분하지 않고 일곱 명의 집단 진행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 그러다보니 게스트가 진행을 주도하는 역할 역전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점, 각자의 캐릭터 설정에 따라 게스트가 빛날 수 있게 조력자로서 충실한 뒷받침을 수행한다는 점, 포맷 속 캐릭터와 실재 캐릭터 간의 경계를 탄력적으로 조정함으로써 출연진을 탈신비화하고 있다는 점, 교실이라는 공간을 토크, 퍼포먼스, 기타 활동의 무대로 효율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 차별화 전략으로 두드러진다. 뿐만 아니라 <아는 형님>이라는 제목에서도 드러나고 있듯이 진행자의 관점이 아니라 게스트의 관점이 부각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게스트가 자신을 일방적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돕는다는 설정이 아니라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전학생과 재학생이 함께 어우러져 놀 수 있는 장()을 만들고 시청자는 그 모습을 즐긴다는 설정으로 차별화하고 있다. 더구나 전체를 반말로 진행함으로써 출연진의 연령 차이와 그에 따른 서명 등이 자연스럽게 소거됨으로써 거침없고 솔직한 발언을 이끌어낼 수 있게 한다.

<아는 형님>의 가장 큰 경쟁력은 특정 포맷을 고집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새로운 포맷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기저에는 퀴즈와 노래방 문화를 결합시켜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한 경우처럼, 다양한 장르나 포맷을 즐거움을 중심으로 결합시키는 과감한 도전이 있다. <아는 형님>의 대부분 코너는 어디서 봄직한 익숙한 것들이지만 그것이 전혀 다른 맥락(context)에서 구현됨으로써 새로운 즐거움을 창출할 수 있도록 과감한 도전을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차별화의 도전은 지금까지 즐거웠던 만큼 앞으로 더욱 더 큰 기대를 갖게 한다.

<아는 형님>이 미덕으로만 가득 찬 프로그램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즐거움에 프로그램의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아는 형님>이 공허한 말장난, 고착화된 성역할을 확대 재생산, 연예인의 신변잡기중심 진행 등의 비난에서 자유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그들이 시도한 새로움의 도전에 주목해보자는 말이다.

어디 <아는 형님> 뿐이겠는가? 단지 밥 세끼 먹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큰 즐거움을 주었던 <삼시 세끼>, 뚱뚱한 먹보들 네 명이 그저 먹는 과정만 보여주어도 재미있는 <맛있는 녀석들>, 성장과 오디션을 결합시켰던 <프로듀스 101>, 모창 능력자를 찾아 추억 속의 스타를 현재로 소환했던 <히든 싱어> 등 최근 차별성으로 승부했던 포맷들을 상기해보자.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이 프로그램들이 현저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익숙함 속에서 시청자의 향유 코드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거기에 파격적인 차별화의 콘셉트를 과감하게 얹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남을 흉내 내면 표절이고 스스로를 베끼면 매너리즘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다양한 이유로 황량해진 공중파 프로그램을 생각한다. 종편이 엄청난 자금으로 스타PD와 작가들을 스카우트해갔기 때문이라 핑계대지 마라. 스타PD와 작가들이 공중파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열악하고 경직된 제작환경을 먼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경직성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는 가치 있는 즐거운 체험을 지향하는 뼈저린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죽은 것뿐이다. 가장 빠르게 변하는 것이 콘텐츠 시장임을 누구보다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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