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힘이 세다.
8월 5일 세인트루이스-시카고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시카고는 이번 여행의 중간지점이다. 동부와 서부의 경계는 세인트루이스였지만, Route66의 시작인 시카고까지를 Route66 여행, 시카고 이후부터 워싱턴까지를 동부여행이라고 구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열흘 동안 2,566마일(4,106㎞) 1을 달려서 시카고에 도착을 했다. 여행의 전반부를 마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을까, 아내를 제외한 가족 모두는 감기몸살까지 시카고에 데려왔다.
세인트루이스에서 334마일(534㎞)을 달려오면서 나랑 유진이는 콧물을 훌쩍이며 추워하고, 뒷좌석의 아내와 효진이는 뒤창으로 들어오는 강한 햇빛 때문에 더위를 호소했다. 같은 차를 타고 있으니 에어컨을 끌 수도 켤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더구나 시카고 초입부터 교통체증으로 막혀서 우회하는 바람에 7시간 30분 정도를 꼼짝없이 차를 타고 있어야했다. 급한 대로 후드로 반바지 입은 다리를 감싸고, 유진이는 후드를 입기도 했지만 시카고에 도착할 때쯤은 근육통과 함께 몸살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안타까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정에 맞추어 숙소를 모두 미리 예약해둔 형편이었고, 하루 일정이 어그러지면 다음 일정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쉴 수가 없는 처지였다. 물러설 곳이 없으면 앞으로 나가게 된다.
이동하는 날은 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까워서 조금 일찍 세인트루이스를 떠났다. 볼 것이 많은 시카고이니 일찍 도착해서 조금이라도 봐두면 내일 일정이 한결 여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제 밤에 검색을 하다가 링컨 기념관이 도중에 있다는 정보를 얼핏 보았다. 링컨기념관은 워싱턴에서 돌아볼 예정이었기 때문에 메모도 해두지 않고 들를 예정도 없었다. 세인트루이스를 떠나자마자 어제 일정이 조금 힘들었는지 몸살기운 때문인지 모두들 차 안에서 조용히 잠들었다. 한참을 달리다보니 하나둘 잠에서 깨어났다. 마침 그때 표지판이 보였다. 어제 인터넷에서 본 것이 저것인가 망설이다가 조금 쉴 요량으로 길을 내려섰다. 박물관이나 기념관이 있을 줄 알고 찾아갔는데, 건물은 보이지 않고 고즈넉한 숲길만 계속되었다. 한참 만에 발견한 입구를 발견하고 보니 조용한 숲이었다.
Lincoln Memorial Garden 트레킹 코스(상), ‘The better part of one's life consists of his friendship'(하)
‘Abraham Lincoln Memorial Garden and Nature Center’라는 표지가 입구에 서 있는 숲이었다. 안내문을 보니 링컨이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이 숲은 링컨이 머물렀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곳이란다.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미국인들이 얼마나 링컨을 존경하고 흠모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이 정도의 연관에도 링컨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어 하고, 그것을 크게 허물하지 않는 분위기만 보아도 그들의 링컨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퇴임 후에 존경 받는 대통령이 별로 없는 우리 현실을 생각할 때 부럽지 않을 수 없었다.
가족들이 근처를 둘러보고 잠시 쉬는 사이 나는 시카고에 지사장으로 나와 있는 고등학교 동창 형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미리 간다고 전화를 해야 했지만, 가족 전체가 움직이고 있고, 친구가 부담을 가질까봐 연락을 하지 않고 출발을 했었던 것이다. 그래도 시카고를 들르는데 연락하지 않는 것도 서운한 일일 것 같아서 전화를 했다. 친구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 숙소도 따로 잡아두었으니 얼굴 정도 보면 될 일이었다. 형식은 몇 년 전에 뉴욕지사에 근무하다가 귀국해서 몇 년을 근무하고 나서 다시 시카고 지사에 지사장으로 나와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가장 많이 찾아가던 집이 이 친구 집이었다.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였고, 부모님은 가게에 계셔서 집에는 착한 동생들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외도 학원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방과 후에 이 친구 집으로 가서 라면도 끓여먹고 수다도 떨면서 놀았던 기억이 지금까지 새롭다. 형식은 당시 우리들 사이에서는 가장 팝음악에 정통해서 이따금 귀한 팝음반을 구해서 들려주며 설명을 해주기도 했었다. 가족들에게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시카고로 달렸다.
사만다가 알려주는 바로는 시카고가 불과 30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금요일 오후기 때문인지 대도시 입구라서 그런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차가 좀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사만다는 차가 막히면 우회로를 권한다. 얼바인에서 LA를 오갈 때에는 사만다의 우회가 현명할 때가 많았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서 망설이다가 길에서 시간을 보내느니 돌면서 구경이라도 하자는 심산으로 사만다가 권하는 길로 내려섰다.
우회도로를 내려서고 보니 시카고의 다양한 표정을 볼 수 있었다. 큰 정원수와 멋스러운 단독주택들이 늘어서 있는 럭셔리한 주택단지에서부터 조악한 그라피티(graffiti)로 흉물스러워진 초라한 건물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르게 사는 모습이 가는 곳곳마다 이어져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도로의 상태와 사는 모습이 일치했던 것인데, 럭셔리한 주택가의 도로와 그렇지 못한 곳의 도로 상태가 사는 모습과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 도로는 대가를 치루지 않더라도 그 혜택에서 배제할 수 없는 말 그대로 공공재(public goods)가 아니던가? 극과 극을 아주 자연스럽게 품고 있는 시카고에 우리는 그렇게 들어가고 있었다.
시카고 금요일 오후 정체(상), 전철과 도로가 함께 달리고 멀리 시어스 타워가 보이는 시카고(하)
시카고는 미국 3대 도시이고 가장 미국적인 도시로 불리지만, 내게는 <ER> 2의 춥고 외로운 도시일 뿐이었다. <ER>은 어둡고 안개가 낀 병원 밖의 풍경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병원 안의 긴박함이 늘 대비되는 드라마였다. 근무를 마치고 지친 모습으로 전철에 오르던 마크 그린의 모습이 유독 춥고 외로워 보였었다. 그래서인지 시카고 시내에 접어들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마크 그린이 서 있을 것 같은 도로와 나란히 서 있는 전철역이었다. 아내에게 <ER>이야기를 하자 아내도 <ER>을 함께 보던 그 시절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몸도 마음도 무척 분주했고 무엇이든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 외에는 분명한 것이 없었던 그 막막했던 시절이 생각났다. 과로와 박봉에 시달리면서 자기 일에 충실하기 위해서 결혼마저 희생하고 있던 마크 그린을 보면서 근거 없는 동류의식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매력적인 배우인 조지 클루니가 맡았던 더글라스 로스보다 머리도 벗어지고 유약해 보이는 마크 그린에게 매력을 느낀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을까?
<언터처블>의 계단 장면으로 유명한 유니언역(상), 시카고 시내(하)
본격적으로 시카고 시내에 진입하자 독특한 건물들이 압도해왔다. 1871년에 시카고 화재(Great Chicago Fire)가 일어나서 도심의 반 이상이 소실되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새롭고 실험적인 건축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오히려 그 건축물들이 시카고를 대표하는 명물이 되었으니 새옹지마(塞翁之馬)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행운이든 불행이든 그것을 맞이하는 변방 늙은이(塞翁)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쉽지는 않으리라. 1871년 화재를 당했던 사람들에게 2011년 시카고의 모습이 뽕나무밭(桑田)이든 바다(碧海)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것은 그곳에서 불행이 아닌 행운을, 절망이 아닌 희망을 읽으려는 인간의 의지와 결의가 아닐까?
시카고의 무서운 주차비(상), 미리 정산을 하고 나가야 하는 주차시스템(하)
시카고 시내의 중심으로 다가갈수록 어느 하나 똑같은 것이 없다는 듯 제각기 개성을 뽐내며 대형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여행안내 책자에서 보았던 건물들을 찾았고, 찾을 때마다 환호했다. 이미 6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을 둘러볼 시간은 없었고, 야간 투어를 한다는 네이비 피어(Navy Pier)로 갔다. 인근 주차장에 주차를 하는데 주차비가 1시간까지는 12달러, 1시간에서 2시간까지는 16달러, 2시간에서 3시간까지는 20달러다. 시카고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알 카포네(Al Capone)가 아니라 주차비였다. 3 그나마 공사 중인 도로가 많고, 일방통행로가 많아서 몇 바퀴 돈 끝에 네이비 피어 안에서 주차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인근에 주차 가능한 건물에 주차를 한 것이다. 입구 쪽에서 1일 12달러로 보고 들어갔는데, 주차하고 내려와서 표지를 보니 1시간까지가 12달러다. 세인트루이스에서는 비싸도 하루에 5달러였기 때문에 그 기준으로 보다가 착각한 것이다.
주차장을 나와서 고가도로 밑을 지나서 네이비 피어까지 걸었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는데 몸은 물 먹은 솜이었다. 어깨에 메고 있는 카메라가 무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붉은 벽돌로 교각을 만들어놓은 고가도로가 시카고의 이미지와 잘 어울렸다. 그 아래에 거리의 악사라도 있으면 더 멋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보니 색소폰을 연주하는 흑인악사가 보였다. 사진을 찍었는데 밤이고 빛이 부족한 공간이라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가 연주하는 재즈의 분위기처럼 느껴졌다. 시카고는 단단해 보이는 붉은 벽돌, 마크 그린의 겨울 전철, 미시건호의 안개와 바람의 이미지였는데, 고가도로 덕분에 거기에 흑인 거리 악사와 그가 연주하는 재즈의 이미지를 더하게 생겼다.
네이비 피어 입구 쪽의 양쪽 흉상 NICE(상), SHOE(중)과 안쪽의 브론즈(하)
네이비 피어의 게이트웨이 파크(Gateway Park) 입구 쪽에 구두를 입에 물고 있는 ‘SHOE’와 가면을 쓴 것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NICE’가 양쪽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그 안쪽으로 3-4인용 청동 소파와 일인용 소파가 거실처럼 놓여 있었다. 구두 한 짝을 입에 물고 있는 신사의 모습이 재미가 있었는지 아이들은 ‘SHOE’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입구에 나란히 양쪽으로 설치된 점과 타이를 맨 신사라는 점 등으로 보아 두 작품은 독립된 작품이지만 동시에 한 세트처럼 보였다. 구두를 입에 문다는 관용적인 표현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구두의 관습적인 의미가 결코 좋을 리 없을 것이고 입은 말과 상관된다고 할 때, ‘SHOE’는 말의 신뢰도나 수준에 대한 비판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NICE’에서는 두 개의 어긋남이 보였다. 활짝 웃고 있지만 가면처럼 느껴지는 얼굴의 어긋남과 그 상태를 ‘NICE’라고 표현하는 또 다른 어긋남이 그것이다. 그래서인지 내게는 ‘NICE’가 무척 그로테스크한 느낌으로 오래 기억되었다. ‘SHOE’가 구두 한 짝에 포인트를 두는 제목이라면, ‘NICE’는 웃음/가면의 어긋남이라는 상황에 대한 비틀기라는 점에서 대비가 되고, 그래서 한 세트로서 즐길 수 있는 작품들처럼 느껴졌다. 그 안쪽의 청동으로 거실처럼 꾸며 놓은 작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무척 유쾌한 작품이었다. 처음에는 앉는 것이 작품을 훼손하는 것이 아닌가 했는데 안내문을 보니 앉으란다. 이 작품은 사람들이 그곳을 즐기는 과정을 통하여 완성되는 설치미술 작품이었다. 이렇게 향유자들이 자연스럽게 앉아서 작품을 즐기는 것은 보면 이 작품은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의 ‘구부러진 호’(Tilted Arc) 4와는 달리 대중성을 제대로 파악한 작품임에 틀림이 없었다. 설치미술과 대중적 요구의 상관관계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면서 네이비 피어로 들어갔다.
시카고는 거대한 호수인 미시건호를 끼고 있다. 처음 본 사람들이 바다로 착각할 정도로 넓다는 미시건호를 즐길 수 있게 만든 것이 네이비 피어다. 네이비 피어에는 아키텍처 크루즈(Architecture Cruises)와 수상택시(Water taxi) 등을 운행하는 선착장과 놀이기구 그리고 식당과 각종 상점들이 즐비했다. 우리는 미시건호에서 출발해서 시카고 강을 따라 올라갔다 내려오며 강변의 건축물들을 즐기는 아키텍처 크루즈(Architecture Cruises)를 타기로 했다. 저녁을 먼저 먹고 야경을 볼 것인지 6시 15분 것을 바로 탈 것인지 고민하다가 그래도 해가 있을 때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6시 15분 티켓을 끊었다. 여러 종류의 크루즈가 있었지만 사람들이 가장 많아 보이는 Shoreline Sightseeing Cruises를 선택했는데, 어른은 31.61달러, 어린이는 16.35달러였다. Shoreline Sightseeing Cruises는 대표적인 아키텍처 크루즈로서 60분 동안 시카고 강 주변에 유명 건축물들을 둘러보는 투어였는데, 동승한 가이드가 건물의 내력과 현재 어떻게 활용되는지 등을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소개해주었다.
출항 전 주의사항을 들려주는 선장과 수화로 통역하는 가이드(상), 열정적인 설명으로 압도하는 가이드(하)
선착장에서 승객이 모두 탑승하자 선장이 운행 중 주의 사항을 뱃머리에 나와서 직접 설명을 해주었는데, 그 옆에 가이드가 서서 그 내용을 일일이 수화로 전달해주었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유난히 돋보이는 곳이 미국이다 보니 이제는 이런 모습이 당연하게 보인다. 디즈니랜드에서 뮤지컬 <알라딘>을 볼 때, 두 가지에 놀란 적이 있었다. 하나는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수화로 공연 내용을 전달해주는 모습이었고, 다른 하나는 휠체어를 타고 공연을 하는 뮤지컬 배우의 모습이었다. 역동적인 춤을 춰야하는 뮤지컬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전동휠체어를 타고 연기하는 배우도 배우였지만, 그러한 배우를 차별 없이 기용하는 디즈니에 더욱 놀랐던 기억이 났다. 이러한 예외 없는 배려는 1990년 통과된 ‘미국 장애인 보호법’(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의 결과라고 한다. 미국에서 대부분의 화장실에 장애인용이 없는 것은 모든 화장실이 장애인의 편의를 기준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란다. ‘미국 장애인 보호법’은 일상생활에서 불편과 차별을 겪지 않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특히 교육, 취업, 교통 등과 관련해서 구체적이고 엄격한 적용이 시행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일반적인 생활공간은 물론 관광지나 놀이공원 등에서 활동적인 장애인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미국이 부러운 몇 안 되는 이유 중의 하나다.
Architecture Cruises에서 만난 건물들
배가 출발하자 가벼운 농담으로 시작한 가이드는 시카고 화재와 그 극복 과정을 이야기해주었다. 강을 따라 배가 움직일 때마다 어김없이 건물 내력담이 소개되었고, 어느 것 하나 눈길을 끌지 않는 것이 없었다. 유명 건축가들의 건축물들이 60분 동안 끊임없이 등장했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현대적인 건축물들과 유서 깊은 건축물들 사이의 조화였다. 시카고 건축물의 놀라움은 그것이 높거나 현대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똑같은 것이 없다는 데 있었다. 그것의 차별적 우위는 모두가 다르다는 것, 다르기 때문에 어우러질 수 있다는 조화의 역설에 있었다. 우리배의 가이드는 히딩크의 압박축구처럼 60분 내내 끊임없이 열정적으로 압박해왔다. 겨드랑이에 땀이 밸 정도로 쉬지 않고 무엇 하나라도 더 설명하려던 가이드의 모습에서 열정이 느껴졌다. 아내도 그것을 느꼈는지 사진을 찍느라 가이드가 가리키는 곳을 보지 않는다고 내게 몇 차례 핀잔을 주었다.
배는 여러 개의 다리 밑을 통과했는데, 그때마다 다리 위의 사람들과 다리 위의 소리가 자연스럽게 섞였다. 다리 구조물들은 페인트가 벗겨지고 벗겨진 만큼 부식되고 있었고, 석조교각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해가 저물 무렵이 되어서인지 갈 때와 올 때의 빛의 각도가 다르고 건물에 반사되는 모습이 달라서 같은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사진을 부지런히 찍었지만 배가 가볍게 흔들리며 계속 움직였고, 더구나 빛까지 수시로 바뀌다보니 사진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가이드는 더 열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배를 돌아다니며 웃고 떠들며 사진을 찍는 인도인들 때문에 모두들 눈살을 찌푸렸다. 모두들 자기들 때문에 불쾌해하고 있다는 것을 아마 당사자들만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크루즈를 마치고 나니 몸 상태가 더 좋지 않았다. 그래도 네이비 피어에 내일 다시 오기 어려우니 볼 것은 보고 가야만했다. 피어는 미시건호를 따라서 길게 늘어선 식당들과 각종 상점들과 그 앞으로 넉넉하게 걸어 다닐 수 있는 넓은 보도로 이루어 져 있었다. 즉흥 연주와 춤을 추기도 한다는데, 볼 수는 없었다. 저녁을 먹으려고 식당을 찾다보니 대부분 패스트푸드였다. 마땅한 것을 찾으려고 상가 안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서 ‘Build-A-Bear Workshop’이라는 재미있는 인형 DIY샵을 발견했다. 인형을 직접 만들고, 이름을 붙여주고, 출생증명서를 발급받고, 각종 옷과 액세서리 등을 구입할 수 있는 인형 DIY샵이었는데 아이도 아이였지만 어른들이 더 많았다. ‘One for you and your bear’라는 콘셉트로 인형의 출생과 소유를 연관 지을 수 있는 각종 이야기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Build-A-Bear Workshop에서 곰인형이 완성되는 과정
지난 봄 샌프란시스코를 여행할 때 Pier39 Bear Factory에서 효진이가 곰인형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을 그냥 데리고 나왔는데,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아내가 효진이에게 하나 골라보라고 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는 인형을 많이 사주고, 관련 업체에서 받은 것들을 가져다주고는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것도 짐이 되는지 아내가 정리를 시작했고, 어느새 인형은 구입금지 품목이 되었다. 유진이의 춘옥이가 낡고 오래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어쨌든 아내는 아이들에 관해서만은 늘 선명한 기억을 가졌다. 언니가 안고 자는 춘옥이를 늘 부러워하더니 효진이가 드디어 새로운 곰인형을 얻게 된 것이다.
새 식구 ‘골디’를 침대에 앉혀놓은 효진이. 막내는 나이를 먹지 않나보다.
30여 종의 곰돌이 모양 앞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안에 솜을 넣어주는 청년에게 가면, 청년은 아이에게 곰인형의 이름은 무엇으로 할 것인지를 묻고, 그것을 적어서 곰인형 가슴에 넣고, 아이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라고 이야기하면서 곰인형의 속을 채워주고, 열린 부분을 간단하게 꿰매어준다. 효진이, 유진이 그리고 아내가 서서 청년의 설명을 듣는 모습이 무척 행복해보였다. 완성된 곰인형을 받고 돌아서면 옷가지와 다양한 액세서리를 구입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였다. 그렇게 옷과 액세서리까지 구입하고 나면 주변에 놓인 컴퓨터로 가서 출생신고를 하고 증명서를 발부받는 것이다. 매장을 둘러보고 곰인형이 탄생하는 과정을 지켜보니 곰인형 자체가 매력적인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것을 살아나게 하는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매력적인 것이었다. 역시 이야기의 힘은 위대하다. 그렇게 우리는 새 식구 ‘골디’를 맞았다.곰인형을 안고 상점을 나와서 둘러보아도 저녁 먹을 곳이 마땅하지 않았다. 게다가 나와 유진이는 계속 몸이 으슬으슬 춥고 머리가 띵하고 근육통이 심해졌다. 뜨듯한 국물 있는 것으로 원기를 보충하자고 결정한 후, 출발 전에 시카고에서 한식을 한번 먹자며 미리 찾아온 ‘우래옥’으로 가기로 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이미 8시 30분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에 만약 찾아갔다가 문을 닫았으면 낭패였다. 전화를 해보니 10시까지 영업을 하는데, 9시까지는 와야 한단다. 다행히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였다. 부지런히 달려가 보니 우래옥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고, 늦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로 가득했다. 고기 굽는 소리와 우리말이 소란스럽게 어우러져 향기로웠다.
메뉴를 받아든 우리는 약간 흥분상태였다. 먹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았다. 집 떠난 지 아흐레 동안 한식은 구경도 못했으니 메뉴만 보아도 좋았다. 몸살 기운이 있는 아이들과 나는 뜨듯한 국물로 갈비탕, 아내는 냉면을 시키고, 망설이다 찜닭까지 시켰다. 워낙 먹성 좋은 우리 가족이지만 조금 많지 않을까 했는데 기우였다. 모두들 신나서 먹고 있는데, 몸이 많이 안 좋은지 유진이가 거의 먹지 못하고 있어서 국물에 밥을 말아서 김치며 깍두기를 얹어주니 먹기 시작했다. 우리가 늘 전생에 늑대였을 것이라고 놀릴 정도로 닭은 좋아하는 녀석이 찜닭도 제대로 먹지 못해서 뼈까지 발라 주었는데도 많이 먹지 못했다. 나도 입맛은 없었지만 빨리 원기를 찾기 위해 부지런히 먹었다. 감기몸살은 잘 먹고 쉬면된다고 하니까 잘 먹고 푹 쉬면 낳을 것이라고 가족들을 위로하며 먹다보니 과식을 했다. 그래도 한식을 먹어서인지 조금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역시 밥은 힘이 세다.
모처럼 한식으로 포식을 하고 숙소로 돌아와 보니 11시가 넘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예약을 하면서 보니 시카고 시내는 숙소의 질에 비해서 가격이 비쌌다. 시카고 같은 대도시에서 숙소를 예약할 때는 도심에서 가까울수록 숙박비가 비싸고, 가격대비 시설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공항 근처에 숙소를 정한 것이다. 어차피 차로 이동을 하는 우리 입장에서 몇 마일 떨어진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숙소를 시카고 시내에서 떨어진 오헤어 국제공항(O'Hare International Airport) 근처의 하얏트 호텔로 잡은 것이다. 하얏트 호텔은 모든 시설이 좋았는데 인터넷이 유료로 사용하는 기기 하나당 9.9달러를 받겠단다. 여행 중 모든 숙소가 인터넷이 무료였는데 이곳만 유료였다. 본인들의 방침이니 그럴 수 있겠다 싶었지만 기기 하나당 요금을 받겠다는 것은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메일을 체크하고 내일 동선을 다시 점검해야하니 우리 입장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유진이가 쓰는 아이팟 와이파이는 이곳에서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들과 나는 감기몸살 약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형식이네 식구와 아침을 먹기로 했는데 그때까지는 기운을 차려야 했다. 모두들 침대에 누워서 이러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아내의 이야기에 모두 빵 터졌다. 그것은 오늘 우래옥에서 먹은 저녁에 대한 아내의 평가였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더니…앞으로는 먹는 것에 집중하자!”
앞뒤가 맞지 않는 문구였는데, 우리는 모두 공감하며 내일부터의 식사를 기대하니 흐뭇했다. 경비는 내가 집행하지만 매일매일 사용내역을 정리하면서, 당초 계획과 대비하고 있는 아내였다. 여행예산이라는 것이 늘 계획과 어긋나게 마련인데, 불필요한 지출을 최대한 막아야지만 그 어긋남의 폭을 줄일 수 있었다. 그동안 먹는 것으로 어긋난 부분을 메워왔기 때문에 아내의 이 말은 내일부터 조금 나은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숙소의 창밖으로 화려한 불빛들이 밤새도록 깜박였다. 창밖을 내다보니 거대한 주차장에 차가 가득했다. 길 건너 대형 카지노 주차장이었다. 여행 내내 가는 곳마다 카지노가 성황이었다. 이곳 시카고도 예외는 아닌가보다. 그토록 조용한 미국의 밤 문화에 카지노만 성황이었다. 미국의 오늘을 보는 것 같아서 씁쓸했다.
- 이동한 거리는 매일 자동차의 적산거리계(Odometer)를 확인하고 기록해둔 결과다. [본문으로]
- 1994년 NBC에서 방영되어 인기를 끌던 의학드라마로 한국에서는 1998년에 SBS에서 방영된 바 있다. [본문으로]
- 동부에 비해서 서부에서는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차비가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동부 쪽 대도시의 경우에는 주차문제 때문인지 주차비가 상당했다. 다음날에는 우노 피자 먹으러 가서 27달러짜리 피자를 먹기 위해 주차비 25달러를 지불하거나, 그 다음날은 밀레니엄파크에서 30달러의 주차비를 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주차비는 아까웠다. 하지만 어쩌랴 내게 차를 이고 다니거나 접어서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을……. [본문으로]
- ‘구부러진 호’는 1981년 미국 연방시설청(GSA)의 ‘건축 속의 미술기금’으로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에 의해 창작된 작품이다. 세라의 ‘구부러진 호’는 높이 3.6m 길이 36m의 작품으로 뉴욕 연방광장에 설치되었는데, 이로 인해 통행에 불편을 겪는다는 사람들의 청원에 따라 몇 년간의 소송과정을 거쳐 1989년 철거되었다. 시간과 장소의 특수성과 철의 소재적 특성에 주목했던 이 작품은 연방광장을 오가는 사람들을 통하여 완성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연방광장을 가로지르지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들, 시간에 따라서 작품을 비추는 빛과 그림자의 변화, 연방광장이라는 ‘장소 특정성’, 시간에 예민하게 반응하지만 무겁고 거친 느낌의 철이라는 소재적 특성이 어우러져서 완성되는 설치미술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향유자들의 거부로 폐기된 작품이다. 공공 설치미술 작품의 미학적 논쟁, 예술에 있어서 향유자의 몫, 대중성의 정체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작품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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