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힘이 세다.

85일 세인트루이스-시카고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시카고는 이번 여행의 중간지점이다. 동부와 서부의 경계는 세인트루이스였지만, Route66의 시작인 시카고까지를 Route66 여행, 시카고 이후부터 워싱턴까지를 동부여행이라고 구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열흘 동안 2,566마일(4,106)[각주:1]을 달려서 시카고에 도착을 했다. 여행의 전반부를 마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을까, 아내를 제외한 가족 모두는 감기몸살까지 시카고에 데려왔다.

세인트루이스에서 334마일(534)을 달려오면서 나랑 유진이는 콧물을 훌쩍이며 추워하고, 뒷좌석의 아내와 효진이는 뒤창으로 들어오는 강한 햇빛 때문에 더위를 호소했다. 같은 차를 타고 있으니 에어컨을 끌 수도 켤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더구나 시카고 초입부터 교통체증으로 막혀서 우회하는 바람에 7시간 30분 정도를 꼼짝없이 차를 타고 있어야했다. 급한 대로 후드로 반바지 입은 다리를 감싸고, 유진이는 후드를 입기도 했지만 시카고에 도착할 때쯤은 근육통과 함께 몸살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안타까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정에 맞추어 숙소를 모두 미리 예약해둔 형편이었고, 하루 일정이 어그러지면 다음 일정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쉴 수가 없는 처지였다. 물러설 곳이 없으면 앞으로 나가게 된다.

이동하는 날은 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까워서 조금 일찍 세인트루이스를 떠났다. 볼 것이 많은 시카고이니 일찍 도착해서 조금이라도 봐두면 내일 일정이 한결 여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제 밤에 검색을 하다가 링컨 기념관이 도중에 있다는 정보를 얼핏 보았다. 링컨기념관은 워싱턴에서 돌아볼 예정이었기 때문에 메모도 해두지 않고 들를 예정도 없었다. 세인트루이스를 떠나자마자 어제 일정이 조금 힘들었는지 몸살기운 때문인지 모두들 차 안에서 조용히 잠들었다. 한참을 달리다보니 하나둘 잠에서 깨어났다. 마침 그때 표지판이 보였다. 어제 인터넷에서 본 것이 저것인가 망설이다가 조금 쉴 요량으로 길을 내려섰다. 박물관이나 기념관이 있을 줄 알고 찾아갔는데, 건물은 보이지 않고 고즈넉한 숲길만 계속되었다. 한참 만에 발견한 입구를 발견하고 보니 조용한 숲이었다.

Lincoln Memorial Garden 트레킹 코스(), ‘The better part of one's life consists of his friendship'()

‘Abraham Lincoln Memorial Garden and Nature Center’라는 표지가 입구에 서 있는 숲이었다. 안내문을 보니 링컨이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이 숲은 링컨이 머물렀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곳이란다.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미국인들이 얼마나 링컨을 존경하고 흠모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이 정도의 연관에도 링컨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어 하고, 그것을 크게 허물하지 않는 분위기만 보아도 그들의 링컨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퇴임 후에 존경 받는 대통령이 별로 없는 우리 현실을 생각할 때 부럽지 않을 수 없었다.

가족들이 근처를 둘러보고 잠시 쉬는 사이 나는 시카고에 지사장으로 나와 있는 고등학교 동창 형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미리 간다고 전화를 해야 했지만, 가족 전체가 움직이고 있고, 친구가 부담을 가질까봐 연락을 하지 않고 출발을 했었던 것이다. 그래도 시카고를 들르는데 연락하지 않는 것도 서운한 일일 것 같아서 전화를 했다. 친구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 숙소도 따로 잡아두었으니 얼굴 정도 보면 될 일이었다. 형식은 몇 년 전에 뉴욕지사에 근무하다가 귀국해서 몇 년을 근무하고 나서 다시 시카고 지사에 지사장으로 나와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가장 많이 찾아가던 집이 이 친구 집이었다.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였고, 부모님은 가게에 계셔서 집에는 착한 동생들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외도 학원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방과 후에 이 친구 집으로 가서 라면도 끓여먹고 수다도 떨면서 놀았던 기억이 지금까지 새롭다. 형식은 당시 우리들 사이에서는 가장 팝음악에 정통해서 이따금 귀한 팝음반을 구해서 들려주며 설명을 해주기도 했었다. 가족들에게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시카고로 달렸다.

사만다가 알려주는 바로는 시카고가 불과 30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금요일 오후기 때문인지 대도시 입구라서 그런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차가 좀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사만다는 차가 막히면 우회로를 권한다. 얼바인에서 LA를 오갈 때에는 사만다의 우회가 현명할 때가 많았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서 망설이다가 길에서 시간을 보내느니 돌면서 구경이라도 하자는 심산으로 사만다가 권하는 길로 내려섰다.

우회도로를 내려서고 보니 시카고의 다양한 표정을 볼 수 있었다. 큰 정원수와 멋스러운 단독주택들이 늘어서 있는 럭셔리한 주택단지에서부터 조악한 그라피티(graffiti)로 흉물스러워진 초라한 건물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르게 사는 모습이 가는 곳곳마다 이어져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도로의 상태와 사는 모습이 일치했던 것인데, 럭셔리한 주택가의 도로와 그렇지 못한 곳의 도로 상태가 사는 모습과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 도로는 대가를 치루지 않더라도 그 혜택에서 배제할 수 없는 말 그대로 공공재(public goods)가 아니던가? 극과 극을 아주 자연스럽게 품고 있는 시카고에 우리는 그렇게 들어가고 있었다.

시카고 금요일 오후 정체(), 전철과 도로가 함께 달리고 멀리 시어스 타워가 보이는 시카고()

시카고는 미국 3대 도시이고 가장 미국적인 도시로 불리지만, 내게는 <ER>[각주:2]의 춥고 외로운 도시일 뿐이었다. <ER>은 어둡고 안개가 낀 병원 밖의 풍경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병원 안의 긴박함이 늘 대비되는 드라마였다. 근무를 마치고 지친 모습으로 전철에 오르던 마크 그린의 모습이 유독 춥고 외로워 보였었다. 그래서인지 시카고 시내에 접어들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마크 그린이 서 있을 것 같은 도로와 나란히 서 있는 전철역이었다. 아내에게 <ER>이야기를 하자 아내도 <ER>을 함께 보던 그 시절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몸도 마음도 무척 분주했고 무엇이든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 외에는 분명한 것이 없었던 그 막막했던 시절이 생각났다. 과로와 박봉에 시달리면서 자기 일에 충실하기 위해서 결혼마저 희생하고 있던 마크 그린을 보면서 근거 없는 동류의식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매력적인 배우인 조지 클루니가 맡았던 더글라스 로스보다 머리도 벗어지고 유약해 보이는 마크 그린에게 매력을 느낀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을까?

<언터처블>의 계단 장면으로 유명한 유니언역(), 시카고 시내()

본격적으로 시카고 시내에 진입하자 독특한 건물들이 압도해왔다. 1871년에 시카고 화재(Great Chicago Fire)가 일어나서 도심의 반 이상이 소실되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새롭고 실험적인 건축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오히려 그 건축물들이 시카고를 대표하는 명물이 되었으니 새옹지마(塞翁之馬)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행운이든 불행이든 그것을 맞이하는 변방 늙은이(塞翁)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쉽지는 않으리라. 1871년 화재를 당했던 사람들에게 2011년 시카고의 모습이 뽕나무밭(桑田)이든 바다(碧海)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것은 그곳에서 불행이 아닌 행운을, 절망이 아닌 희망을 읽으려는 인간의 의지와 결의가 아닐까?

시카고의 무서운 주차비(), 미리 정산을 하고 나가야 하는 주차시스템()

시카고 시내의 중심으로 다가갈수록 어느 하나 똑같은 것이 없다는 듯 제각기 개성을 뽐내며 대형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여행안내 책자에서 보았던 건물들을 찾았고, 찾을 때마다 환호했다. 이미 6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을 둘러볼 시간은 없었고, 야간 투어를 한다는 네이비 피어(Navy Pier)로 갔다. 인근 주차장에 주차를 하는데 주차비가 1시간까지는 12달러, 1시간에서 2시간까지는 16달러, 2시간에서 3시간까지는 20달러다. 시카고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알 카포네(Al Capone)가 아니라 주차비였다.[각주:3] 그나마 공사 중인 도로가 많고, 일방통행로가 많아서 몇 바퀴 돈 끝에 네이비 피어 안에서 주차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인근에 주차 가능한 건물에 주차를 한 것이다. 입구 쪽에서 112달러로 보고 들어갔는데, 주차하고 내려와서 표지를 보니 1시간까지가 12달러다. 세인트루이스에서는 비싸도 하루에 5달러였기 때문에 그 기준으로 보다가 착각한 것이다.

주차장을 나와서 고가도로 밑을 지나서 네이비 피어까지 걸었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는데 몸은 물 먹은 솜이었다. 어깨에 메고 있는 카메라가 무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붉은 벽돌로 교각을 만들어놓은 고가도로가 시카고의 이미지와 잘 어울렸다. 그 아래에 거리의 악사라도 있으면 더 멋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보니 색소폰을 연주하는 흑인악사가 보였다. 사진을 찍었는데 밤이고 빛이 부족한 공간이라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가 연주하는 재즈의 분위기처럼 느껴졌다. 시카고는 단단해 보이는 붉은 벽돌, 마크 그린의 겨울 전철, 미시건호의 안개와 바람의 이미지였는데, 고가도로 덕분에 거기에 흑인 거리 악사와 그가 연주하는 재즈의 이미지를 더하게 생겼다.

네이비 피어 입구 쪽의 양쪽 흉상 NICE(), SHOE()과 안쪽의 브론즈()

네이비 피어의 게이트웨이 파크(Gateway Park) 입구 쪽에 구두를 입에 물고 있는 ‘SHOE’와 가면을 쓴 것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NICE’가 양쪽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그 안쪽으로 3-4인용 청동 소파와 일인용 소파가 거실처럼 놓여 있었다. 구두 한 짝을 입에 물고 있는 신사의 모습이 재미가 있었는지 아이들은 ‘SHOE’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입구에 나란히 양쪽으로 설치된 점과 타이를 맨 신사라는 점 등으로 보아 두 작품은 독립된 작품이지만 동시에 한 세트처럼 보였다. 구두를 입에 문다는 관용적인 표현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구두의 관습적인 의미가 결코 좋을 리 없을 것이고 입은 말과 상관된다고 할 때, ‘SHOE’는 말의 신뢰도나 수준에 대한 비판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NICE’에서는 두 개의 어긋남이 보였다. 활짝 웃고 있지만 가면처럼 느껴지는 얼굴의 어긋남과 그 상태를 ‘NICE’라고 표현하는 또 다른 어긋남이 그것이다. 그래서인지 내게는 ‘NICE’가 무척 그로테스크한 느낌으로 오래 기억되었다. ‘SHOE’가 구두 한 짝에 포인트를 두는 제목이라면, ‘NICE’는 웃음/가면의 어긋남이라는 상황에 대한 비틀기라는 점에서 대비가 되고, 그래서 한 세트로서 즐길 수 있는 작품들처럼 느껴졌다. 그 안쪽의 청동으로 거실처럼 꾸며 놓은 작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무척 유쾌한 작품이었다. 처음에는 앉는 것이 작품을 훼손하는 것이 아닌가 했는데 안내문을 보니 앉으란다. 이 작품은 사람들이 그곳을 즐기는 과정을 통하여 완성되는 설치미술 작품이었다. 이렇게 향유자들이 자연스럽게 앉아서 작품을 즐기는 것은 보면 이 작품은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구부러진 호’(Tilted Arc)[각주:4]와는 달리 대중성을 제대로 파악한 작품임에 틀림이 없었다. 설치미술과 대중적 요구의 상관관계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면서 네이비 피어로 들어갔다.

시카고는 거대한 호수인 미시건호를 끼고 있다. 처음 본 사람들이 바다로 착각할 정도로 넓다는 미시건호를 즐길 수 있게 만든 것이 네이비 피어다. 네이비 피어에는 아키텍처 크루즈(Architecture Cruises)와 수상택시(Water taxi) 등을 운행하는 선착장과 놀이기구 그리고 식당과 각종 상점들이 즐비했다. 우리는 미시건호에서 출발해서 시카고 강을 따라 올라갔다 내려오며 강변의 건축물들을 즐기는 아키텍처 크루즈(Architecture Cruises)를 타기로 했다. 저녁을 먼저 먹고 야경을 볼 것인지 615분 것을 바로 탈 것인지 고민하다가 그래도 해가 있을 때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615분 티켓을 끊었다. 여러 종류의 크루즈가 있었지만 사람들이 가장 많아 보이는 Shoreline Sightseeing Cruises를 선택했는데, 어른은 31.61달러, 어린이는 16.35달러였다. Shoreline Sightseeing Cruises는 대표적인 아키텍처 크루즈로서 60분 동안 시카고 강 주변에 유명 건축물들을 둘러보는 투어였는데, 동승한 가이드가 건물의 내력과 현재 어떻게 활용되는지 등을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소개해주었다.

출항 전 주의사항을 들려주는 선장과 수화로 통역하는 가이드(), 열정적인 설명으로 압도하는 가이드()

선착장에서 승객이 모두 탑승하자 선장이 운행 중 주의 사항을 뱃머리에 나와서 직접 설명을 해주었는데, 그 옆에 가이드가 서서 그 내용을 일일이 수화로 전달해주었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유난히 돋보이는 곳이 미국이다 보니 이제는 이런 모습이 당연하게 보인다. 디즈니랜드에서 뮤지컬 <알라딘>을 볼 때, 두 가지에 놀란 적이 있었다. 하나는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수화로 공연 내용을 전달해주는 모습이었고, 다른 하나는 휠체어를 타고 공연을 하는 뮤지컬 배우의 모습이었다. 역동적인 춤을 춰야하는 뮤지컬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전동휠체어를 타고 연기하는 배우도 배우였지만, 그러한 배우를 차별 없이 기용하는 디즈니에 더욱 놀랐던 기억이 났다. 이러한 예외 없는 배려는 1990년 통과된 미국 장애인 보호법’(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의 결과라고 한다. 미국에서 대부분의 화장실에 장애인용이 없는 것은 모든 화장실이 장애인의 편의를 기준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란다. ‘미국 장애인 보호법은 일상생활에서 불편과 차별을 겪지 않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특히 교육, 취업, 교통 등과 관련해서 구체적이고 엄격한 적용이 시행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일반적인 생활공간은 물론 관광지나 놀이공원 등에서 활동적인 장애인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미국이 부러운 몇 안 되는 이유 중의 하나다.

Architecture Cruises에서 만난 건물들

배가 출발하자 가벼운 농담으로 시작한 가이드는 시카고 화재와 그 극복 과정을 이야기해주었다. 강을 따라 배가 움직일 때마다 어김없이 건물 내력담이 소개되었고, 어느 것 하나 눈길을 끌지 않는 것이 없었다. 유명 건축가들의 건축물들이 60분 동안 끊임없이 등장했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현대적인 건축물들과 유서 깊은 건축물들 사이의 조화였다. 시카고 건축물의 놀라움은 그것이 높거나 현대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똑같은 것이 없다는 데 있었다. 그것의 차별적 우위는 모두가 다르다는 것, 다르기 때문에 어우러질 수 있다는 조화의 역설에 있었다. 우리배의 가이드는 히딩크의 압박축구처럼 60분 내내 끊임없이 열정적으로 압박해왔다. 겨드랑이에 땀이 밸 정도로 쉬지 않고 무엇 하나라도 더 설명하려던 가이드의 모습에서 열정이 느껴졌다. 아내도 그것을 느꼈는지 사진을 찍느라 가이드가 가리키는 곳을 보지 않는다고 내게 몇 차례 핀잔을 주었다.

배는 여러 개의 다리 밑을 통과했는데, 그때마다 다리 위의 사람들과 다리 위의 소리가 자연스럽게 섞였다. 다리 구조물들은 페인트가 벗겨지고 벗겨진 만큼 부식되고 있었고, 석조교각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해가 저물 무렵이 되어서인지 갈 때와 올 때의 빛의 각도가 다르고 건물에 반사되는 모습이 달라서 같은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사진을 부지런히 찍었지만 배가 가볍게 흔들리며 계속 움직였고, 더구나 빛까지 수시로 바뀌다보니 사진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가이드는 더 열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배를 돌아다니며 웃고 떠들며 사진을 찍는 인도인들 때문에 모두들 눈살을 찌푸렸다. 모두들 자기들 때문에 불쾌해하고 있다는 것을 아마 당사자들만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크루즈를 마치고 나니 몸 상태가 더 좋지 않았다. 그래도 네이비 피어에 내일 다시 오기 어려우니 볼 것은 보고 가야만했다. 피어는 미시건호를 따라서 길게 늘어선 식당들과 각종 상점들과 그 앞으로 넉넉하게 걸어 다닐 수 있는 넓은 보도로 이루어 져 있었다. 즉흥 연주와 춤을 추기도 한다는데, 볼 수는 없었다. 저녁을 먹으려고 식당을 찾다보니 대부분 패스트푸드였다. 마땅한 것을 찾으려고 상가 안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서 ‘Build-A-Bear Workshop’이라는 재미있는 인형 DIY샵을 발견했다. 인형을 직접 만들고, 이름을 붙여주고, 출생증명서를 발급받고, 각종 옷과 액세서리 등을 구입할 수 있는 인형 DIY샵이었는데 아이도 아이였지만 어른들이 더 많았다. ‘One for you and your bear’라는 콘셉트로 인형의 출생과 소유를 연관 지을 수 있는 각종 이야기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Build-A-Bear Workshop에서 곰인형이 완성되는 과정

지난 봄 샌프란시스코를 여행할 때 Pier39 Bear Factory에서 효진이가 곰인형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을 그냥 데리고 나왔는데,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아내가 효진이에게 하나 골라보라고 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는 인형을 많이 사주고, 관련 업체에서 받은 것들을 가져다주고는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것도 짐이 되는지 아내가 정리를 시작했고, 어느새 인형은 구입금지 품목이 되었다. 유진이의 춘옥이가 낡고 오래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어쨌든 아내는 아이들에 관해서만은 늘 선명한 기억을 가졌다. 언니가 안고 자는 춘옥이를 늘 부러워하더니 효진이가 드디어 새로운 곰인형을 얻게 된 것이다.

새 식구 골디를 침대에 앉혀놓은 효진이. 막내는 나이를 먹지 않나보다.

30여 종의 곰돌이 모양 앞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안에 솜을 넣어주는 청년에게 가면, 청년은 아이에게 곰인형의 이름은 무엇으로 할 것인지를 묻고, 그것을 적어서 곰인형 가슴에 넣고, 아이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라고 이야기하면서 곰인형의 속을 채워주고, 열린 부분을 간단하게 꿰매어준다. 효진이, 유진이 그리고 아내가 서서 청년의 설명을 듣는 모습이 무척 행복해보였다. 완성된 곰인형을 받고 돌아서면 옷가지와 다양한 액세서리를 구입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였다. 그렇게 옷과 액세서리까지 구입하고 나면 주변에 놓인 컴퓨터로 가서 출생신고를 하고 증명서를 발부받는 것이다. 매장을 둘러보고 곰인형이 탄생하는 과정을 지켜보니 곰인형 자체가 매력적인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것을 살아나게 하는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매력적인 것이었다. 역시 이야기의 힘은 위대하다. 그렇게 우리는 새 식구 골디를 맞았다.곰인형을 안고 상점을 나와서 둘러보아도 저녁 먹을 곳이 마땅하지 않았다. 게다가 나와 유진이는 계속 몸이 으슬으슬 춥고 머리가 띵하고 근육통이 심해졌다. 뜨듯한 국물 있는 것으로 원기를 보충하자고 결정한 후, 출발 전에 시카고에서 한식을 한번 먹자며 미리 찾아온 우래옥으로 가기로 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이미 830분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에 만약 찾아갔다가 문을 닫았으면 낭패였다. 전화를 해보니 10시까지 영업을 하는데, 9시까지는 와야 한단다. 다행히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였다. 부지런히 달려가 보니 우래옥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고, 늦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로 가득했다. 고기 굽는 소리와 우리말이 소란스럽게 어우러져 향기로웠다.

메뉴를 받아든 우리는 약간 흥분상태였다. 먹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았다. 집 떠난 지 아흐레 동안 한식은 구경도 못했으니 메뉴만 보아도 좋았다. 몸살 기운이 있는 아이들과 나는 뜨듯한 국물로 갈비탕, 아내는 냉면을 시키고, 망설이다 찜닭까지 시켰다. 워낙 먹성 좋은 우리 가족이지만 조금 많지 않을까 했는데 기우였다. 모두들 신나서 먹고 있는데, 몸이 많이 안 좋은지 유진이가 거의 먹지 못하고 있어서 국물에 밥을 말아서 김치며 깍두기를 얹어주니 먹기 시작했다. 우리가 늘 전생에 늑대였을 것이라고 놀릴 정도로 닭은 좋아하는 녀석이 찜닭도 제대로 먹지 못해서 뼈까지 발라 주었는데도 많이 먹지 못했다. 나도 입맛은 없었지만 빨리 원기를 찾기 위해 부지런히 먹었다. 감기몸살은 잘 먹고 쉬면된다고 하니까 잘 먹고 푹 쉬면 낳을 것이라고 가족들을 위로하며 먹다보니 과식을 했다. 그래도 한식을 먹어서인지 조금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역시 밥은 힘이 세다.

모처럼 한식으로 포식을 하고 숙소로 돌아와 보니 11시가 넘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예약을 하면서 보니 시카고 시내는 숙소의 질에 비해서 가격이 비쌌다. 시카고 같은 대도시에서 숙소를 예약할 때는 도심에서 가까울수록 숙박비가 비싸고, 가격대비 시설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공항 근처에 숙소를 정한 것이다. 어차피 차로 이동을 하는 우리 입장에서 몇 마일 떨어진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숙소를 시카고 시내에서 떨어진 오헤어 국제공항(O'Hare International Airport) 근처의 하얏트 호텔로 잡은 것이다. 하얏트 호텔은 모든 시설이 좋았는데 인터넷이 유료로 사용하는 기기 하나당 9.9달러를 받겠단다. 여행 중 모든 숙소가 인터넷이 무료였는데 이곳만 유료였다. 본인들의 방침이니 그럴 수 있겠다 싶었지만 기기 하나당 요금을 받겠다는 것은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메일을 체크하고 내일 동선을 다시 점검해야하니 우리 입장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유진이가 쓰는 아이팟 와이파이는 이곳에서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들과 나는 감기몸살 약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형식이네 식구와 아침을 먹기로 했는데 그때까지는 기운을 차려야 했다. 모두들 침대에 누워서 이러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아내의 이야기에 모두 빵 터졌다. 그것은 오늘 우래옥에서 먹은 저녁에 대한 아내의 평가였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더니앞으로는 먹는 것에 집중하자!”

앞뒤가 맞지 않는 문구였는데, 우리는 모두 공감하며 내일부터의 식사를 기대하니 흐뭇했다. 경비는 내가 집행하지만 매일매일 사용내역을 정리하면서, 당초 계획과 대비하고 있는 아내였다. 여행예산이라는 것이 늘 계획과 어긋나게 마련인데, 불필요한 지출을 최대한 막아야지만 그 어긋남의 폭을 줄일 수 있었다. 그동안 먹는 것으로 어긋난 부분을 메워왔기 때문에 아내의 이 말은 내일부터 조금 나은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숙소의 창밖으로 화려한 불빛들이 밤새도록 깜박였다. 창밖을 내다보니 거대한 주차장에 차가 가득했다. 길 건너 대형 카지노 주차장이었다. 여행 내내 가는 곳마다 카지노가 성황이었다. 이곳 시카고도 예외는 아닌가보다. 그토록 조용한 미국의 밤 문화에 카지노만 성황이었다. 미국의 오늘을 보는 것 같아서 씁쓸했다.

 

  1. 이동한 거리는 매일 자동차의 적산거리계(Odometer)를 확인하고 기록해둔 결과다. [본문으로]
  2. 1994년 NBC에서 방영되어 인기를 끌던 의학드라마로 한국에서는 1998년에 SBS에서 방영된 바 있다. [본문으로]
  3. 동부에 비해서 서부에서는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차비가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동부 쪽 대도시의 경우에는 주차문제 때문인지 주차비가 상당했다. 다음날에는 우노 피자 먹으러 가서 27달러짜리 피자를 먹기 위해 주차비 25달러를 지불하거나, 그 다음날은 밀레니엄파크에서 30달러의 주차비를 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주차비는 아까웠다. 하지만 어쩌랴 내게 차를 이고 다니거나 접어서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을……. [본문으로]
  4. ‘구부러진 호’는 1981년 미국 연방시설청(GSA)의 ‘건축 속의 미술기금’으로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에 의해 창작된 작품이다. 세라의 ‘구부러진 호’는 높이 3.6m 길이 36m의 작품으로 뉴욕 연방광장에 설치되었는데, 이로 인해 통행에 불편을 겪는다는 사람들의 청원에 따라 몇 년간의 소송과정을 거쳐 1989년 철거되었다. 시간과 장소의 특수성과 철의 소재적 특성에 주목했던 이 작품은 연방광장을 오가는 사람들을 통하여 완성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연방광장을 가로지르지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들, 시간에 따라서 작품을 비추는 빛과 그림자의 변화, 연방광장이라는 ‘장소 특정성’, 시간에 예민하게 반응하지만 무겁고 거친 느낌의 철이라는 소재적 특성이 어우러져서 완성되는 설치미술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향유자들의 거부로 폐기된 작품이다. 공공 설치미술 작품의 미학적 논쟁, 예술에 있어서 향유자의 몫, 대중성의 정체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작품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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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길도 버릴 길은 없다

86일 시카고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감기약 기운 때문인지 몸이 침대 밑으로 한없이 가라앉았다. 어젯밤 약을 먹고 잠이 들면서 춥기도 했지만 땀을 흠뻑 빼고 나면 개운해지리라는 생각에 긴팔 후드티를 입고 잠이 들었다. 옆에서 자고 있던 유진이가 아파서 새벽에 잠이 깼다. 약을 챙겨주었지만 유진이도 좀처럼 몸살을 떨치지 못했다. 빡빡한 여행 일정에 먹는 것은 부실한데, 날씨는 더워서 에어컨을 계속 틀고 달린 것이 화근이었다. 약을 먹고 땀을 흘린 덕에 조금 나아진 듯했지만 나도 순간순간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곤 했다. 본격적으로 시카고 시내를 돌아보기로 했는데 내가 아프면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 아무리 아파도 일정은 진행해야만 했다. 더구나 아침에는 형식이 부부와 아침을 같이하기로 약속을 했으니 더욱 기운을 내야만 했다.

아침부터 조금씩 비가 내리더니 그쳤다. 약속시간에 맞추어 형식이 부부가 숙소 로비로 왔다. 근처 한식당에서 아침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형식은 우리 아이들을 어렸을 때 보고 처음 보는 것이다. 그가 뉴욕지사 근무를 하느라 미국에 있는 동안 세월은 부지런히 갔고, 돌아왔을 때에는 아이들이 커서 제 각각의 일정을 소화하느라 가족끼리 만나는 모임을 별로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형식은 훌쩍 자란 유진이와 효진이 모습을 보고 놀라워했다. 더불어 우리 가족이 무모한 횡단여행을 감행하고 있는 모습에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고등학교 동창인 우리는 대학교 졸업 이후 각자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느라 늘 분주했다. 그러다보니 한국에서는 바쁘게 뛰느라 늘 피곤한 모습으로 만나곤 했었다. 그런데 시카고 지사로 나온 불과 몇 달 사이에 형식은 건강과 여유를 찾은 모습이었다. 형식의 눈에 나도 아마 그렇게 비춰졌으리라. 남의 나라에 와서 비로소 몸과 마음의 건강을 되찾은 것을 보면 한국에서 우리 생활이 가파르긴 가파른가보다. 치열하고 분주하기만한 우리네 일상의 정체를 남의 나라에 와서야 볼 수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형식이나 나나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이었다.

형식과의 인연은 중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로 다른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과외를 하면서 서로 알게 되었다. 형식은 그때나 지금이나 착하고 순해서 늘 주변에 친구들이 많았다. 중학교 2학년 3, 어렵게 부모님을 설득해서 평생 처음 과외를 막 시작했는데 바로 과외금지조치가 내려졌기 때문에 더 보지 못하다가,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친해졌던 친구다. 늘 함께 다니던 고등학교 친구들은 학교를 마치면 형식이네 집에 우르르 몰려가서 자주 놀았다. 과외도 학원도 없던 시절, 친구들과 만나면 딱히 무엇을 하고 노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형식의 집을 그대로 그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자주 다닌 만큼 그곳에서의 추억은 언제나 화수분이었다.

아침밥을 먹으며 형식은 내게 출발 전에 미리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핀잔을 했다. 친구에게 부담을 주는 것도 싫고, 무엇보다 우리로 인해 번거로워지는 것은 아내나 나나 딱 질색이었다. 형식의 아내는 집에 와서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먹은 것으로 하자고 사양했다. 내일 일정이 바쁘기도 했지만 갑자기 찾아와서 번거롭게 하는 것이 미안했기 때문이다. 그저 형식의 얼굴 보았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시카고는 보아야할 것이 많았다. 그중에서 뉴욕이나 워싱턴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은 빼고 시카고에서만 볼 수 있는 것 중에서 우선순위를 정했다. 아이들이 과학 산업 박물관(Museum of Science and Industry)을 보고 싶어 해서 먼저 그곳으로 갔다.

시카고 산업과학박물관 전경()과 뒤쪽 공원에서 주말을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과 임시로 설치한 놀이기구()

과학 산업 박물관은 1893년 시카고 만국 박람회 메인 회의장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라서 그런지 규모도 크고 고풍스러운 건축양식이 돋보였다. 건물도 건물이었지만 그 주변으로 조성된 공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주차를 하기 위해서 건물 뒤쪽으로 가보니 숲과 잔디밭이 큰 규모로 조성되어 있었는데, 주말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이 그곳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한가하게 즐기고 있었다. 음악을 틀어 놓고 가볍게 춤을 추는 사람들, 아이들을 위해 공기를 불어넣어 놀이기구를 설치하고 있는 사람들, 바비큐를 만드는 사람들, 앉거나 누워서 햇빛을 즐기는 사람들, 가벼운 운동을 하는 사람들……한가하고 평화로운 주말 풍경이었다. 제 각기 자신의 취향대로 즐기는 모습이 자유로워 보였다.

이렇게 주말을 즐기는 이곳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참 적극적으로 쉰다는 점이다. 한나절 쉬겠다고 차일부터 테이블, 의자, 간이침대, 앰프, 음악 믹싱기, 이동식 놀이기구, 엄청난 양의 음료와 음식을 트럭에 싣고 와서 일일이 그것을 설치하고 즐기는 모습이 놀라웠다. 그 많은 짐을 트럭에 싣고 내리는 일만해도 보통일이 아니었을 테고, 그것을 일일이 설치하는 일은 또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가? 거기에 바비큐 그릴을 설치하고 엄청난 양의 고기를 구우면서 마시고 노는 그들의 모습은 유쾌하고 건강해보였다. 아내와 늘 하는 말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쉬고 노는 것에 참 결사적이다.

산업과학박물관 내부(), 비상구에 새겨진 닐 암스트롱의 경구(), 로봇 팔을 체험하는 아이들()

미국 중서부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박물관이라더니 정말 산업과학박물관은 입구부터 사람들이 많았다. 어른 15달러, 어린이 10달러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서니 우주선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고 나올 때 찾아가란다. 물론 선택사항이다. 어디를 가나 이렇게 사진을 찍어주고 20-30달러를 요구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크루즈를 타기 전에 사진을 찍었는데, 크루즈를 마치고 나오니 금문교와 합성해서 멋진 사진을 만들어 두었었다. 크고 작은 사진과 작은 액자까지 포함해서 30달러에 판매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사진이 낯선 곳에 걸려 있다가 폐기되는 것이 꺼림칙해서 구입한 이후로는 이런 식의 사진은 찍지 않았다. 더구나 이곳에서 완성된 사진은 그리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박물관을 돌다보니 항목별로 몇 군데 사진촬영 장소가 더 있었다. 입장료 외에 수익을 내기 위한 노력이었다.

돌아보니 모든 전시물이 체험중심이다.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관람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만지고, 타보고, 조정하는 것이다. 전시물들은 대부분 초등학생들이 메인 타깃으로 보였다. 그러니 효진이가 좋아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유진이까지 좋아하니 다행이었다. 전시된 콘텐츠도 콘텐츠지만 그것을 즐기게 하는 방식에 빠져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해보면 나도 방학 숙제하느라 서울국립과학관을 찾았던 나이가 유진이보다 한 살 어릴 때였으니 1980년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책으로만 보고 외우고 평가하던 것들을 직접 체험한다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 일이었던지그때의 감동이 생각났다. 방학숙제 하느라 친구와 세운상가에 가서 라디오 조립 키트를 구입한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었는데, 서울국립과학관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배고픈 것도 모르고 문 닫을 때까지 있다가 집에 늦게 돌아와 꾸중을 들었던 기억까지 나면서 그때 같이 갔던 친구 우정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낯선 시카고에서 느닷없이 1980년 서울을 만났다.

미국식 유머인 샌드위치(), 동작센서에 의해 인터랙션하는 체험(), 공기분사 체험()

산업과학박물관은 기대했던 것보다 흥미진진했다. 박물관 초입에 놓여있던 몇 개의 전시물은 언어유희를 기반으로 추측해보는 것이었는데, 모래(sand) 위에 마녀(witch)가 날고 있는 모습을 보고 샌드위치(sandwich)를 연상하는 식이었다. 몇 개는 답을 찾고 아이들과 웃었는데, 몇 개는 도통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양한 종류의 과학실험도 실험이었지만 일상 속에서 궁금했던 것들을 중심으로 체험코스가 구성되어 있었다. 가령 대형 트랙터와 영상을 결합하여 옥수수를 어떻게 수확하는지를 보여주는 체험 프로그램의 경우에는 옥수수대를 자르고 낱알을 수확하는 일련의 과정이 기계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실물의 단면을 잘라서 보여주고, 트랙터를 실제로 조정해볼 수 있게 하였다. 1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의 군함과 상선을 5,000척 이상 격침시켰다는 독일 잠수함 U보트(U-boat)의 실물을 전시하고 내부도 둘러볼 수 있게 하였다. U보트는 역사적 맥락을 누락한 채 전설의 잠수함으로 전시도리 뿐이었다. U보트 전시관 끝에는 예상대로 U보트 관련 상품들을 팔고 있었다.

체험할 것이 많다보니 관람 속도는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실내는 냉방이 너무도 잘되고 있어서 몸살을 앓고 있는 나는 몹시 추웠다. 몸이 으슬으슬 거리고 이곳저곳이 쑤셔왔다. 무리했다가는 나머지 일정과 내일 이동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았다. 그렇다고 관람을 멈출 수는 없고, 아내에게 잠깐만 차에 가서 쉬고 오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차로 돌아갔다. 직사광선으로 차 안은 무척 더웠다. 창을 조금 내리고 직사광선은 조금 가리고 한 시간쯤 그곳에서 몸을 데웠다. 마치 샌프란시스코나 몬트레이에서 만났던 바다사자가 햇볕에 몸을 데웠던 것처럼. 그래서인지 평소 같았으면 찜통처럼 느껴졌을 차 안이 오히려 고마웠다. 한 시간쯤 차 안에서 기운을 차리고 다시 산업과학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산업과학박물관은 그곳에 가야만 볼 수 있는 유니크한 아이템을 전시했다거나 굉장한 과학현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인기가 높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일상 속에서 궁금해 하는 것을 직접 체험하게 함으로써 스스로 이해할 수 있게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산업과학박물관의 모든 프로그램은 직접 만지고, 타보고, 체험하게 하는 것들이었다. 관람자 수가 연간 400만 명에 달한다니 그 체험의 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울러 과학과 산업을 절묘하게 통합하고 있다는 점과 박물관과 외부의 공원이 유기적으로 잘 연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가족 전체가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보아야할 부분이었다. 박물관도 보고 가벼운 피크닉도 즐길 수 있다면 주말 프로그램으로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빼어난 것은 시설이나 전시물이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고 연출하는 힘임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산업과학박물관을 보다가 또 점심때를 놓쳤다. 이미 4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밀레니엄 파크나 시카고 미술관을 보기에는 시간이 애매하고, 몸도 좋지 않으니 시카고의 명물이라는 우노 피자를 먹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일종의 여행 중 조퇴였다. 그러지 않고서는 내일 일정을 장담하기 어려운 몸 상태였기 때문이다.

미시건 호를 따라서 달리는 도로()와 미시건호 주변에서 세그웨이를 즐기는 사람들()

차로 달리면서 보니 미시건호 주변에서 다양한 레포츠를 즐기고 있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다양한 레포츠를 즐기는 모습이 여유로워보였다. 오클라호마 과학관에서 체험했던 세그웨이를 타고 호수도로를 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평화로웠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잔디밭에 누워서 햇빛을 즐기는 사람들, 가벼운 공놀이를 하는 사람들, 멀리 요트를 타고 나간 사람들까지 한가로운 주말의 풍경이었다.

시카고에서 보아야할 것이 어디 한가롭게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일까 마는 내게는 그 모습이 제일 눈에 들어왔다. 어디로 달려가는지도 모르고 분주하기만한 한국에서의 내 생활 때문이었을까? 평소에도 보면 미국인들은 평일 저녁에도 운동장에 불을 켜고 운동을 즐긴다. 어디 그뿐인가, 야구, 축구, 농구, 아이스하키 등을 시즌별로 나누어 일 년 내내 직접 즐기는 모습은 부러움을 넘어서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우리는 업무를 마치고도 업무의 연장인 약속이 계속되고, ‘월화수목금금금이 반복되는 생활인데, 여기서는 그런 경우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 단지 마음가짐의 차이만은 아니리라. 사회적 합의와 분위기가 그런 시스템을 구축하였을 것이다.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일하고 노력하는 것일 텐데 본말이 전도된 것 같아 자꾸 그들의 모습과 견주어 보게 되었다.

시카고 시내(), 보도 위에 새겨진 이정표(), 주차 표지판()

시카고에 가면 피자를 꼭 먹어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우노 피자나 지오다노 피자가 그것인데, 이왕이면 우노 피자를 먹어보라고 했다. 시간이 된다면 둘 다 먹어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구글 지도로 확인해보니 우노 피자를 먹을 수 있는 피제리아 우노’(Pizzeria Uno) 레스토랑과 지오다노 피자를 먹을 수 있는 지오다노’(Giordano's)는 그리 멀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피제리아 우노에서 피자를 먹고, 이어서 지오다노로 가서 피자를 먹겠다는 행복한 계획을 세웠다. 우선 피제리아 우노로 갔다.

피제리아 우노는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비교적 저렴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이곳은 주차장이 없어서 근처에 블루밍데일즈 백화점에 주차를 했다. ‘피제리아 우노앞에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이미 많았다. 생각보다 레스토랑의 규모는 크지 않았고, 테라스에서도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예약을 해주는 아가씨가 1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예약을 하고 블루밍데일즈 백화점에서 아이쇼핑을 하다가 시간이 되어서 갔더니 기다리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조금 기다리는 사이 먼저 주문을 하란다. 그러면 자리와 동시에 피자가 나온단다. 주문을 하고 있으려니 바로 자리가 났다. 1943년에 처음 영업을 시작한 장소라서 그런지 낡은 건물과 소박한 인테리어가 오히려 정겨웠다. 실내는 조금 어두운 편이었고, 테이블 사이가 그리 넓은 편은 아니었지만 다행히 우리는 비교적 넓은 자리에 앉게 되었다.

피제리아 우노(), Numero Uno 피자()

옆 테이블에서 젊은 아가씨 혼자서 피자를 먹고 있었는데 그 두께와 양을 보고 놀랐다. 메뉴에는 딥 디쉬(Deep Dish) 피자라고 적혀있었는데 옆 테이블을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피자 팬의 깊이가 무척 깊었기 때문이다. 양이 넉넉해 보였지만 먹성 좋은 우리 가족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고 믿고 Numero Uno Pizza 라지 사이즈로 시켰다. 피자가 나온 것을 보니 양이 생각보다 더 많았다. 게다가 효진이는 미트볼 스파게티, 유진이는 샐러드를 시켰으니 양이 더 많아졌다. 아이들이 오늘은 제대로 먹는 날이라고 판단한 모양인지, 아니면 어제 아내의 말을 기억한 것인지 모두 시키고 싶은 것들을 시켰다. 음식은 예상대로 모두 양이 넉넉했다. 특히 피자 반죽이 아니라 파이 반죽으로 만든다는 두툼한 도우(dough)의 양이 많다보니 결국 피자는 1/2밖에 먹지 못하고 가져와야 했다. 미트볼 스파게티는 미트볼은 맛이 있었으나 스파게티는 싱거워 기대만 못했지만 샐러드는 야채와 소스가 신선했다. 물론 피자의 맛은 아주 감동적이었다. 조금 많다싶을 정도로 넉넉한 토핑의 신선한 풍미와 치즈의 식감 그리고 두툼한 도우의 바삭함이 어우러져 일품이었다.

사람들은 피자를 먹으며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 삭스 간의 야구경기 중계를 보고 있었다. 이곳이 시카고니 당연히 이만수 감독이 한국인 최초의 유급코치로 활동하던 시카고 화이트 삭스 경기를 볼 줄 알았는데, 뉴욕과 보스턴의 경기를 보는 그들의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미국인들에게는 영원한 라이벌인 뉴욕 양키즈와 보스톤 레드삭스가 가장 인기 있는 팀이라고 들었는데, 시카고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었다. 각자 피자를 먹거나 맥주를 마시면서 응원하는 팀의 안타나 호수비에 조금씩 흥분하는 그들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나는 시카고 맥주를 한 잔 시켜서 피자와 같이 먹었다. 시카고 맥주는 가벼운 느낌이었지만 향이 깊은 묘한 맛이었다. 물맛이 중요한 맥주는 반드시 현지 맥주를 먹어야 그 맛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시킨 것은 한 잔이었지만 500cc 정도 되는 양이 나왔다. 피자도 그렇고 맥주도 그렇고 양이 참 넉넉했다. 이탈리안 식당 특유의 넉넉함이었을까? 운전을 해야 했기 때문에 아내와 나누어서 천천히 마셨다. Numero Uno Pizza 라지 사이즈 가격이 27.29달러니 한국 피자 가격을 생각하면 그리 비싼 것은 아니었다. 피자를 먹고 나자 우리 중 누구도 지오다노 피자를 먹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가 두 곳의 피자를 다 먹겠다고 세웠던 계획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지 다 먹지 못하고 싸온 우노 피자가 알려주고 있었다.

주차비를 정산하고 보니 25달러였다. 조금만 더 지체했으면 피자 값보다 주차비가 더 클 뻔했다. 토요일인데도 시카고 시내를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곳곳에 공사 중이어서 사만다의 데이터가 어긋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카고 외곽에서는 교통체증으로 사만다가 우회로를 택했는데, 거기서 헤매는 바람에 평소보다 일정을 빨리 마쳤음에도 늦게 숙소로 돌아왔다. 갈 때 길과 올 때 길이 달랐으니 좀 더 많은 것을 본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길을 잃고 헤매면서 발견하는 길들은 대체로 나름의 운치와 체험을 주는 것들이었는데, 시카고도 예외는 아니었다. 살면서 버릴 경험이 없듯 어떤 길도 버릴 길은 없었다.

사람들이 세상 모든 길을 다녀보았다고 해도 세상에는 늘 아직 다녀보지 않은 더 많은 길들이 있게 마련이다. 길은 언제나 새로 생기고 없어짐으로써 새로운 길이 되는 까닭이다. 중요한 것은 길이 아니라 그 길을 걷고 있는 내 자신이다. 어느 길이든 볼 것이 있고 없고를 결정하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그 위를 걷는 자의 체험이다. 항상 체험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다. 하여 단지 두 지점을 연결할 뿐인 속도의 길은 길이 아니라 도로일 뿐이다. 도로는 속도를 이야기할 뿐 그 안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들은 대체로 새롭거나 내게 변화를 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던가?

다행스럽게도 횡단을 통해 만나는 그 모든 길들은 아직 우리에게 길로 기억되고 있다. 체험으로 구성되는 우리의 길들이 어떠한 새로움과 변화를 가져올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올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러한 나의 낙관적 기대가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지금 가고 있는 이 길과 관계되리라는 것은 안다. 아직은 그것으로 족하다.

몸이 아프니 상념만 깊어진다. 사위는 온통 어둠인데 의식은 또렷해질 뿐이다. 조바심은 집에 두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길 위에 오르고 나니 그 몹쓸 습벽이 살아나나보다. 하지만 굳이 따라온 녀석을 내칠 일도 아니리라. 그게 우리의 길이고 여행의 스타일이라면 우리 스타일대로 따르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당위적인 답안을 가지고 출발한 여행이 아니지 않는가? 길이 데려다 주는 곳에서 우리가 함께 어우러지는 자연스러운 속도가 횡단여행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하니 이제 조바심도 따라온다면 데리고 다녀야겠다.

내일은 밀레니엄 파크와 시카고 미술관을 들렸다가 클리블랜드까지 달려야 한다. 오늘 몸 상태로 봐서는 내일 일정이 결코 만만하지 않으리라. 며칠째 먹고 있는 감기약은 독할 뿐 좀처럼 감기를 떨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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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를 기억하는 가장 황홀한 방법

87일 시카고클리블랜드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어제 남겨온 피자로 아침을 해결하고 호텔을 나설 때까지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 비가 내려주니 반가운 일이었지만 몸살기운이 아직 남아 있는 상태다보니 그리 반가운 것만은 아니었다. 다행히 비는 밀레니엄 파크로 이동하는 중에 그쳤다.

오늘은 클리블랜드까지 371마일(594)을 이동을 해야 하니 서둘러야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에서는 딱히 볼 것을 정하지 못한 상태라서 밀레니엄 파크(Millenium Park)와 시카고 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을 보고 시카고에서 느지막이 떠나기로 했다.

여행계획을 짤 때도 클리블랜드가 문제였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추신수 선수 외에는 클리블랜드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는 형편이다 보니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은 아니었다. 게다가 시카고에서 나이아가라까지 10시간 정도 거리니까 무리하면 못 달릴 거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일정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만약 지체되면 클리블랜드를 생략하고 나이아가라로 가서 시간을 벌어볼 요량으로 설정해 둔 것이 클리블랜드였다. 다행히 여행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으니 가능한 한 시카고에서 늦게 출발하고, 클리블랜드에서는 잠만 자고 일찍 나이아가라로 이동하자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의 기억이 정말 좋았던 우리는 시카고 미술관을 꼭 들러보기로 했다. 또 시간이 된다면 밀레니엄파크도 보려고 했는데, 마침 두 곳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어서 별 어려움 없이 두 곳을 모두 관람할 수 있었다.

사실 시카고에 도착하면서부터 사만다가 거의 패닉상태였다. 여기저기 공사하는 곳도 많았고, 유난히 많은 고가도로 밑에서는 수신이 원활하지 못해서 결정적인 순간에 길을 잃고는 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어서 시카고 시내로 진입하면서부터 사만다는 다급해지거나 침묵했다. 물론 두 경우 모두 사만다의 도움이 절실한 순간들이었다.

길을 잃고 다시 만난 길(), 그 와중에 만난 시카고 극장()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는 일은 새로운 길을 만나는 일과도 같다. 시카고에서 사만다는 자주 길을 잃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사만다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저 길을 잃으면 새 길을 만날 수 있겠구나 위로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보니 문득 시카고 극장 앞이었다. 1921년에 개관한 시카고 극장은 미국 최초의 대형 극장이라고 한다. 파리의 개선문을 축소한 모양인데 특히 건물 앞에 걸린 초대형 붉은 간판이 선명했다. 그 앞에서 롭 마샬 감독의 영화 <시카고>(Chicago, 2002)[각주:1]가 떠오른 것도 그 붉은 간판의 선명함 때문이리라. 영화 <시카고>에서 보여준 뜨거운 욕망을 지금 이곳시카고에서 보기에는 머물 시간이 너무 짧았다. 주중에 그토록 분주하고 혼잡스러웠던 시카고의 일요일 오전은 서울의 그것처럼 한가하고 차분해서 오히려 처연한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처연한 기분은 밀레니엄 파크에 도착하면서 이내 사라졌다. 밀레니엄 파크 건너편 시카고 미술관 옆에서 음악공연이 있어서 공연 몇 시간 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흥성스러운 분위기로 차고 넘치고 있었다.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 지도

밀레니엄 파크(Millenium Park)는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기념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완공은 2004년에 했다고 한다. 음악공연 관계로 경찰들이 교통을 통제하고 있었고, 밀려드는 차들로 정신이 없었는데, 다행히 밀레니엄 파크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할 수 있었다. 밀레니엄 파크는 야외 음악당인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Jay Pritzker Pavilion), 크라운 분수(Crown Fountain), 루리가든(Lurie garden), 크라우드 게이트(Cloud Gate, 일명 Bean)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차를 하고 올라오니 왼쪽으로 루리가든(Lurie garden)이었다. 피에 아우돌프(Piet Oudolf)가 설계했다는 루리가든은 부단히 변해가는 자연의 모습을 일 년 내내 보여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고 해서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나중에 보니 입구는 남쪽 끝에 있었는데 우리는 주차장에서 바로 북쪽으로 걸어가서 찾았으니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선 곳을 중심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그것이 전부라고 우기는 일상의 실수를 다시 한 번 반복한 것이다. 어쩌면 이미 마음을 시카고 미술관에 빼앗기고 있어서 입구를 찾지 못했었는지도 모른다.

루리가든 앞쪽으로 걸어가 보니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설계했다는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Jay Pritzker Pavilion)이 등장했다. 웅장한 스테인리스 스틸 구조물을 머리에 얹고 있었는데 그 앞으로 객석과 대규모 잔디밭(Great Lawn)을 두고 있었다. 특이했던 것은 잔디밭 위까지 스테인리스 봉 구조물이 그물처럼 감싸고 있었다.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Jay Pritzker Pavilion) 전경과 지붕

잔디밭을 덮고 있는 스테인리스 봉 구조물에는 조명이 매달려 있었고, 그 사이로 근처의 고층빌딩들이 들어와 있었다. 공연장을 포함해서 전체적으로 누에고치 모양을 이루고 있는 스테인리스 봉 구조물은 지붕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봉과 봉이 만들어내는 프레임 사이로 주변의 고층건물들이 들어오고, 그것은 보는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프레임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러한 연출은 밀레니엄 파크가 시카고 다운타운의 스카이라인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마련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공연장 지붕을 덮고 있는 조형물만큼이나 이 봉 구조물의 다채로운 프레임이 신선하고 매력적이었다. 평소에는 잔디밭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운동을 하는 모양이었는데, 비가 온 뒤라서 그런지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텅 빈 공연장만큼 스산한 풍경은 없다. 일요일 오전, 비가 내린 후의 야외 공연장은 그저 푸른 잔디밭일 뿐이었다.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은 공연장으로 설계된 것이지만,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에 의해 매일매일 새 작품으로 탄생하고 있다. 공연장에서 연출되는 공연의 내용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보는 사람의 위치와 시간에 따라서 달라지는 공연장의 조형물뿐만 아니라 스테인리스 봉 구조물도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통합적인 프레임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곳을 즐기는 사람들까지 공연장과 잔디밭을 오간다면 더할 수 없이 훌륭한 설치미술작품이 아니겠는가?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을 보고 잔디밭을 가로지르면 애니쉬 카푸(Anish Kapoor)가 만든 크라우드 게이트(Cloud Gate)가 나타났다. 크라우드 게이트를 보는 순간 일단 그 크기(높이 10m, 너비 13m, 길이 20m)에 압도된다. 밀레니엄 파크의 방문 인증샷에 반드시 등장하는 이유를 보고나서야 알 수 있었다. 이 작품은 110톤이 넘는다는 무게와 크기도 크기였지만 무엇보다 스테인리스를 이음매 없이 이렇게 만들어냈다는 것에 한 번 놀라고, 바람과 안개 그리고 추위로 유명한 시카고의 일기를 생각할 때, 반사가 가능할 수 있도록 유지되는 표면에 두 번 놀라고,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 달라지는 모습에 세 번 놀라게 된다.

크라우드 게이트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자신을 비추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제목을 보면 구름을 형상화한 것인데, 영감은 액체수은에서 얻었다고 하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이것을 콩(Bean)이라고 부르니 재미있다. 어쩌면 이러한 어긋남 혹은 다양성이 이 작품의 힘이 아닐까 생각했다. 작품 밖에서는 도시의 스카이라인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 굴절되어 반사됨으로써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나고 있었다.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이 프레임을 통해 세계를 낯설게 만들었다면, 크라우드 게이트는 되비춤을 통해서 세계를 깨우고 있었다. 게다가 이 두 작품이 밀레니엄 파크라는 동일한 공간 안에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통합적인 체험을 가능하게 했다.

크라우드 게이트(Cloud Gate, 일명 Bean)의 모습과 다양한 상호작용의 사례

크라우드 게이트는 중앙에 3.7m의 움푹 팬 공간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다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언제 다른 사람과 함께 거울 앞에 서 보겠는가? 게다가 그것이 낯선 모습의 나와 너라면 그것은 더욱 매력적이지 않겠는가?

가족들 사진도 찍고 모두들 즐거워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강하게 밀었다. 어디 가나 만날 수 있는 중국인 관광객들이다. 게다가 젊은이들이었다. 무례하고 세련되지 못한 중국의 오늘을 보는 것 같아서 씁쓸했다. 횡단 여행 중 곳곳에서 만나는 그들의 모습은 무례를 넘어 난폭하기까지 했다.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의 지갑으로 바뀌고 있는 중국의 모습이야 뭐랄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쇼핑센터와 아울렛 등을 휩쓸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중국에서 만났던 그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LA 인근 쇼핑센터와 아울렛 등에서는 중국인 전담 종업원을 두고 그들의 취향에 맞는 상품을 구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보니 소위 소공녀소공자라고 불리는 중국 젊은이들의 무례함[각주:2]은 그 끝을 모른다. 뭐라고 한 마디 하려고 뒤를 돌아보니 10여명의 젊은이들이 자기들끼리 원을 만들어 웃고 떠들며 주변은 무시한 채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다. 더 불쾌해질 것 같아서 무시하기로 했다. 더블어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폭력이 폭력을 부르듯 무례는 무례로 대가를 치른다는 것을 그들도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

크라우드 게이트 옆으로 조금 이동하니 크라운 분수(Crown Fountain)가 있었다. 하우메 플렌사(Jaume Plensa)가 설계를 했다는 이 작품은 제작을 위해 천만 달러를 기부했다는 레스터 크라운(Laster Crown)의 이름을 따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15.24m 높이의 두 개 기둥에는 LED 스크린이 설치되어 13분마다 얼굴이 비디오 이미지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두 시카고 시민들이라고 하니 공공미술(public art)의 전범을 보는 것 같았다.

주변과 소통하면서 순간순간 완성과 해체를 거듭하는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과 크라우드 게이트 그리고 크라운 분수까지, 밀레니엄 파크을 구성하고 있는 작품들은 그곳을 찾아 즐기는 사람들에 의해 구현될 수 있는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성과를 보면 새 천년을 기념으로 공원을 조성하며 시카고가 고민했던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더블어함께 하는 상호소통의 장(), 그것이 새천년의 시카고에서 이루어지길 기원한 내용이었으리라. 밀레니엄 파크를 구성하는 개개의 독립적인 작품들뿐만 아니라 작품들 간의 소통은 물론, 주변 환경 그리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과도 상호소통을 통해서 밀레니엄 파크의 지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밀레니엄 파크를 구성하고 있는 작품들을 보면서, 시카고 미술관에는 아직 입장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미술관 안에 벌써 들어와 버린 느낌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작품들의 이름이 대부분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점이었다. 이름까지 좀 더 멋스러운 것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이름을 내주고 이런 작품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어쩌면 그 이름까지 이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도 함께.

시카고 미술관 전경과 입구 그리고 실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보스턴 미술관과 함께 미국 3대 미술관이라는 시카고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은 밀레니엄 파크와 니콜라스 다리(The Nicholas Bridgeway)로 연결되어 있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이어 규모 면에서도 미국 내 2위에 해당한다는 시카고 미술관은 26만점의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연간 180만 명 이상이 다녀간다고 한다. 1866시카고 디자인 아카데미에서 출발하여 시카고 대화재 이후 시카고 아트 아카데미를 거쳐 1882시카고 아트 인스티튜드로 이름을 바꾸고 미술관과 미술교육기관을 구성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893콜럼버스 세계 박람회가 열리자 박람회 이후에 미술관으로 사용하는 조건으로 건축했던 것을 바탕으로 추가 증축한 것이다.

우리는 니콜라스 다리를 통하여 2009년에 증축했다는 현대관으로 들어갔다. 어린이들은 무료고 어른은 18달러의 입장료를 냈다.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은 시민들의 교양을 위해 무료였고, 시카고미술관은 어린이들은 무료인데, 둘 다 신선했다.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문화공간의 무료관람을 우리도 진지하게 고민해야할 때가 아닐까? 1층은 18-19세기 미국 미술, 2층은 미국 모더니즘을 테마로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고호, 세잔, 르노아르, 피카소, 고갱, 모네, 샤갈 등의 그림은 누가 보아도 그들의 그림이 아니던가? 그들의 그림이 전시된 갤러리 밖에서 만난 강렬한 느낌의 그림들은 그림 옆에 붙은 작가의 이름과 작품명 그리고 작품 설명을 보고서야 미국작가들의 작품임을 알았다. 특히 시카고 미술관에서 꼭 봐야한다고 소개된 그림들은 그 소개가 아니더라도 미국적인 색채와 분위기로 인해 그림 앞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Nighthawks>

스로우 호머의 <The Herring Net>

아치볼드 모틀리 주니어의 <Nightlife>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각주:3]<Nighthawks>는 깊은 밤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 작품에서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격식을 차린 복장으로 바에 앉아 있는 사람들, 커다란 유리창으로 밖을 내다볼 수 있는 구도지만 사실은 자신들이 보여지는 아이러니의 공간, 늦은 시간까지 함께 하고 있지만 정작 시선은 모두 어긋나고 있는 관계의 메타포, 텅 빈 듯한 공간의 구도 등이 어우러져 도시의 공허함이 느껴졌다. 아치볼드 모틀리 주니어(Arcibald J. Motley Jr.)<Nightlife><Nighthawks>와는 상반된 분위기였지만 그 역시도 소란스러운 공허가 읽히는 작품이었다. 윈스로우 호머(Winslow Homer)<The Herring Net>는 프레임 안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꽉 찬 두 어부와 청어 그물이 거센 파도와 함께 고된 노동의 압박으로 다가왔다.

미술관에 들어서면서부터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돌면서 같이 보고 그 느낌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들 뒤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따라갔다. 어리기만 하다고 생각한 아이들이 아내와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하는 장면은 감동적이었다. 손을 잡고 때론 어깨를 걸고, 옆에 세우기도 하고 앞에 안기도 하면서 좋은 그림을 가족들이 함께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분명 눈물 날 정도로 고맙고 감동적인 모습이었다.

그런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혼자 감상에 젖어서 내가 미술관을 처음 갔을 때가 언제였을까 생각해보았다. 분명한 기억은 없지만 미술관다운 미술관을 가본 것은 대학교 입학한 이후였을 것이다. 미술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미술책이 전부였던 내에게 미술관은 차라리 강박에 가까웠다. 꼭 가서보아야 한다고 늘 느끼고 있었지만 정작 가서는 낯설고 불편했던 공간이 미술관이었다. 대학원 시절 화집을 사서 모으던 동기가 있었는데, 그 모습에 묘한 질투를 느끼기도 했었다.

아내와 아이가 함께 그림을 보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아이들이 가족과 함께한 이 체험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엄마 품에 안겨서 고갱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는 따듯한 체험은 살면서 그리 흔한 일이 아니지 않는가?

나는 아이들이 이렇게 어린 나이에 세계적인 작품들을 코앞에서 직접 보고 있으니 얼마나 설레고 신날까 라고 생각했는데, 몇 개의 갤러리를 돌고나자 아이들의 표정이 아니었다. 의자가 있으면 자꾸 앉으려 하고 몹시 지쳐있었다. 아내와 나는 서운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서 이 작품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일러주고 좀 더 많이 돌아보아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림에 흥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이 작가들을 도통 몰랐다. 어린 효진이는 그렇다고 쳐도 유진이는 알 것이라고 생각하는 작가들조차 모르고 있었다. 요즘 미술시간에는 그런 식으로 배우지 않는단다. 생각해보면 이 작품이 누구의 무슨 작품인지 외울 이유는 또 어디에 있겠는가? 전시회에 가면 작품 옆에 다 적혀있지 않은가? 작품을 보고 좋으면 어느 작가의 작품인지 돌아보면 될 일이었다. 그저 작품을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으면 족할 것이라는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힘들면 엄마랑 아빠가 보는 동안 쉬어도 좋다고 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제법 많은 방을 같이 따라다녔다. 세상에 버릴 체험이 어디 있겠는가? 작품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손잡고 작품을 설명해주던 엄마의 손길, 안고 이야기해주던 엄마의 체취만이라고 기억할 수 있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따듯한 기억이 될 것인가? 세계적인 명화도 명화였지만 그 앞에서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으로도 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외로 시카고 미술관에는 동양 예술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개인들의 소장품을 기증받아 전시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그림이나 도자기가 많았고 우리 것은 거의 없어서 아이들은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는 아이들에게 이 작품들이 모두 합당한 경로로 이곳에 이르렀을까 하는 의문이 던졌다. 전시된 개인 소장품들은 대부분 고서화나 오래된 도자기들이었는데, 그것이 약탈이나 밀반출에 의한 것이라면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소장하게 되었더라도 유실 가능했던 것들이 잘 보존되었다면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가? 약탈이나 밀반출의 결과임이 분명한데도 단지 돈을 지불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개인의 소유로 볼 수 있는가?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그러한 방식으로 박물관을 채우고 그것을 세계 최고 박물관 운운하는 것은 정당한가? 등등.

문화유산이라는 것이 창작된 그 나라에만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다른 나라로 나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납득 가능한 이유와 대가가 지불되어야만 할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일방적인 약탈이나 불법적인 밀반출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의당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적어도 그러한 소유를 부끄럽게 여기지는 못할망정 자랑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사정은 중국이나 일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문화유산을 알리기 위해서 합법적으로 대여한 것이 아니라면, 남의 나라 미술관에서 자기 나라 유물들이 많고 적음을 따지고, 그 결과에 따라 문화적 자존심 운운하는 것은 또 다른 인정투쟁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우리문화를 알리기 위한 노력이거나 합법적인 경로로 마련한 소장품을 전시하는 것이라면 제대로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조차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구태의연한 몇 개의 전시물로 과연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작고 소박한 한국관을 보면서 갑자기 맥락 없는 생각만 많아졌다.

아내와 나는 더 돌아보고 싶은데 유진이가 감기의 여파로 영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효진이가 피곤하다고 투덜대기 시작했다. 원래는 가급적 해가 지기 전에 클리블랜드에 도착하겠다는 생각으로 적어도 2시쯤에는 관람을 마칠 계획이었다. 시카고에서 끝나는 것이 Route66만은 아니었는지 아이들의 체력도 급격히 떨어져 있었다. 좀 더 보겠다는 욕심에 점심을 먹지 않고 돌았는데, 상황이 이러니 다 보지도 못하고 관람을 마쳐야만 했다. 시카고 미술관은 제대로 보려면 2-3일쯤 여유가 필요할 것이라고 아내와 이야기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어쩌면 미술관을 하나의 단위로 보고 책 한 권 읽듯이 다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강박에 가까운 것이리라. 문화에 모두, 전부, 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개개로서 의미가 있고, 그것을 체험하는 향유 자체가 문화가 아니던가?

태평천하를 쓰려고 했던 것 같은데 태평천정이 된 조악한 기념품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미술관을 나서면서 입구의 기념품점에 들렀다. 기억이 될 기념품이 있으면 하나 사려고 했는데 살만한 것이 없었다. 태평천하(太平天下)가 써져 있어야 할 곳에 태평천정(太平天丁)이라고 적힌 기념품을 보면서 저것도 혹시 중국제품이라면 웃지도 못할 상황이 아닐까 라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기도 했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조악한 모조품들이 많아서 실망스러웠는데, 특히 엉터리로 한자를 써놓은 기념품들을 보면서 씁쓸했다. 시카고를 떠나면서 시카고 미술관을 다 둘러보고 가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분명 과욕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더할 수 없는 행운이 되었다. 모든 기억은 그때그곳이 만나는 곳에 있다. 그렇다면 다음에 기회가 되어 다시 이곳을 방문하더라도 이 오늘의 감동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래서 더 욕심나고 더 아쉬웠는지도 모른다.

시카고를 마지막으로 여행의 1단계인 Route66 코스는 마쳤다. 이제 클리블랜드부터는 여행의 2단계에 돌입한다. 본격적인 동부여행이다. 풍광이나 기후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클리블랜드까지 I-90I-80타고 갔다. 이 도로들은 이전까지의 도로들과는 다르게 유료도로기 때문에 서비스플라자(Service Plaza)가 설치되어 도로를 벗어나지 않더라도 쉴 수 있게 만들어졌다. 서비스플라자는 주유소, 패스트푸드점, 커피전문점, 피자집 정도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동안 보아온 주유소나 패스트푸드점과는 브랜드가 바뀌어 있었다. 달리면서 몇 군데 서비스 플라자에 들러보니 대부분 bp주유소, 버거킹, 피자헛, 스타벅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이곳의 서비스플라자도 제품 대비 가격이 다소 비싼 편이었다.

시카고 스카이웨이 톨게이트(), 클리블랜드로 가는 길에 만난 철교()

아직 유료도로가 시작되기 전인 시카고를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아이들 점심을 먹이기 위해 내려섰는데 결국 찾지 못하고, 감기약만 구입해서 올라왔다. 시카고에서 시작된 사만다의 혼란은 여기서도 계속되고 있어서, 일러준 그대로 달려가다 보면 공사 중이거나 막힌 길이었고, 목적지라고 해서 보면 낯선 건물이었다. 그렇다고 사만다를 무시하고 표지판만 보고 음식점을 찾기에는 찾아야할 지역이 너무 넓었다. 그럴 때는 빨리 포기하고 다른 곳을 찾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는 것을 이번 여행에서 뼈저리게 배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료도로를 만나 서비스플라자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마지막 남은 컵라면과 계획보다 많이 남은 햇반

8시가 지나서 클리블랜드에 도착했다. 비교적 저렴한 숙소를 잡았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숙소는 기대보다 괜찮았다. 더구나 아침까지 제공해주니 금상첨화였다. 문제는 저녁이었는데, 딱히 먹을 만한 곳이 없어서 마지막 남은 컵라면 2개와 햇반을 데워 식사를 했다. 이제 슬슬 김치가 그립기 시작했다. 그나마 느끼한 현지식을 견딜 수 있게 해주던 컵라면이 떨어졌으니 큰일이다. 한인마트를 찾아야 구입할 수 있을 텐데, 일정에 쫓기다보니 한인마트 찾기가 쉽지 않다. 이곳까지 오면서 예상보다 컵라면은 많이 먹었고, 햇반과 3분 카레 등은 기대만큼 먹지 않아 많이 남았다. 아이들은 슬슬 햇반의 어정쩡한 온도와 흐물거리는 3분 카레의 식감에 물리나보다. 나도 그러니 어린 것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래도 군말 없이 잘 참아주니 고맙고 대견하다.

내일은 일찍 나이아가라로 출발해야 한다. 일찍 출발할수록 좀 더 많이 보거나 천천히 깊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숙소를 예약하면서 실수로 캐나다 쪽 숙소를 잡은 덕분에 내일은 국경을 넘어야 한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미국 쪽보다 캐나다 쪽이 더 멋있다고 위로하며 출발 전에 학교 인터내셔널 오피스에서 입출국에 필요한 서류를 받아왔다. 미리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미국과 캐나다의 입출국사무소 관리들의 태도가 무척 다르다던데, 기대가 된다. 실수는 대부분 좋은 경험이 된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1. 1924년 시카고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진 연극작품을 1975년 뮤지컬로 만들어져 큰 성공을 거자 2002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은 르네 젤위거, 캐서린 제타 존스, 리차드 기어가 출현한 뮤지컬 영화다. 재즈, 갱, 관능, 쇼 비즈니스 등과 같은 시카고의 이미지와 황색언론, 살인 등의 대중적인 요소들을 통합해서 구현한 뮤지컬영화다. 영화에 등장하는 'All That Jazz'와 'Roxie' 같은 넘버가 유명하다. [본문으로]
  2. 중국의 산아제한 정책으로 가정 당 한 명의 자녀밖에 두지 못하게 되면서, 모든 자녀를 공주와 왕자로 키우는 중국의 세태를 꼬집는 말이다. 친 할머니와 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부모, 이렇게 여섯 명의 어른이 아이 하나를 키우다보니 자기밖에 모르는 왕자와 공주로 성장하게 되고, 이들의 모습을 비꼬아 소공자, 소공녀라고 부른다. [본문으로]
  3. 에드워드 호퍼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들은 알랭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알랭드 보통은 그의 그림에서 고독을 읽고 있지만, 나는 오히려 그 고독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공허에 마음이 울렸다. 횡단 여행을 마치고 나서, 국내 최고의 웹툰 <이끼>와 <미생>의 윤태호 작가와 페이스 북에서 에드워드 호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강렬한 체험을 구현하는 작가의 매혹은 강력한 것이어서 우리 모두 눈을 빼앗기고 가슴에 새기게 되나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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