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2와 소주 사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일요일 아침 아내는 좀처럼 잠을 놓아주지 않습니다.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는 두 녀석을 깨워서 씻기고 입히고 먹여서 내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인지, 아침에 나갔다가 늦은 밤을 데리고 들어오는 제가 모처럼 집에 있는 날이어서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아내는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내가 일어나지 않아도 허기는 아이들을 깨우고, 깬 아이들은 저를 깨웁니다. 제가 일요일은 짜파게티 먹는 날이라고 우기는 동안에도 아이들은 만화채널을 넘나들며 애니메이션을 봅니다. 벌써 소파에는 녀석들이 먹었음직한 과자 봉지와 첫째가 제 목숨처럼 아끼는 스티커 북이 멋모르고 제 언니를 따라하는 둘째의 스티커 북과 함께 널려 있습니다. 그것들을 치우는 동안 짜파게티 끓일 물이 끓을 때쯤 햇살은 벌써 소파에 들어와 앉아 있습니다.
일요일 아침 아이들이 먹는 짜파게티 만큼이나 저는 녀석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이 불만입니다. 과장된 몸짓과 감정 표현, 거친 말투, 극단적인 적대적 관계 설정 등이 거침없이 반복되는 그것들을 그만 보게 하고 싶은데, 늘 잠의 유혹은 아버지의 의무보다 달콤합니다. 사실 애니메이션을 가지고 학위논문을 섰던 제가 아이들의 애니메이션에 불만을 갖는 것은 애니메이션에 대한 편견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편향성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은 일본 코믹물이 대부분인데, 그것들의 과장된 몸짓과 감정 표현, 거친 말투, 극단적인 적대적 관계 설정 등을 아이들은 이내 따라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TV에 나오는 내용을 아이들을 보고 따라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지나친 걱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제 아이들의 모방을 보면서 그런 걱정은 지나쳐도 좋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녀석들에게 이런 애니메이션 말고 다른 채널의 애니메이션을 보여줄라치면 녀석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습니다. 무엇보다 좀처럼 그치지 않는 둘째의 울음에 저는 대책이 없습니다. 둘째를 달래기 위해 TV에 피코를 연결해주고, 첫째의 컴퓨터 오락을 묵인해줍니다. SEGA에서 개발한 것을 삼성이 수입 판매한 피코는 원래 첫째의 것인데, 늘 그렇듯 첫째의 것은 둘째의 것입니다. 싱가폴 사는 제 이모가 가져다 준 일제 컴퓨터 게임CD는 첫째의 보물입니다. 두 녀석은 각자의 보물과 꽤 오래 같이 놉니다.
그러다가 그것도 지루해지면 녀석들은 제게 달고나를 해 달라고 조릅니다. 할인매장에서 어린시절이 생각나서 구입해온 달고나 세트는 아이들의 일요일 군입거리입니다. 어설프게 눌러준 뽑기를 손에 들고 이제부터 자신들을 어떻게 즐겁게 해줄 것이냐고 다그치듯이 쳐다보면 저는 둘 중에 하나는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는 아이들과 PS2 게임을 즐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열에 두세 번은 PS2를 설치합니다. PS2게임은 아이들이 어리고, 저도 할줄 아는 게임이 많지 않아서 간단한 철권을 함께합니다. 한글화 되어있지만 음성은 일본어로 나오는 철권을 하다보면 아이가 묻습니다. “아빠, 저 사람들은 왜 싸워?” 게임의 스토리를 설명하려다가 그만둡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아이들의 자전거를 가지고 집근처 공원에 갑니다. 둘째는 자전거를 잘 타지 못하고 어리광이 심해서 세발자전거 앞에 끈을 묶어 끌고 가는 경우 많습니다. 물론 더 심하면 아이를 업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 시간 쯤 놀고 집으로 오는 길에 아이들은 저를 문방구로 데리고 갑니다. 스티커 몇 장을 사달라는 거지요. 국적불명의 캐릭터들의 스티커를 사주고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려주면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더없이 행복한 표정을 지어줍니다. 배가 볼록하게 나올 정도로 두툼해진 아이들의 스티커 북에는 일요일마다 새로운 스티커 캐릭터들이 붙습니다.
올해 전면 개방된 일본문화는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몇몇이 두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일본문화가 아니라 일본문화콘텐츠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얼마 전에 일본에 다녀오신 은사님께서 일본인들이 소주를 술집에 keeping해 두고 마시며, 심지어 소주에 얼음을 타서 마신다며 재미있어 하셨습니다. 함께 웃으며 소주를 마시다가 보아를 떠올렸습니다. 소주는 어떻게 마시든 한국식이라는 이름이 붙겠지만 보아가 부르는 노래에서 한국적인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지 생각했습니다. 한류는 있지만 한국은 없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일본문화의 유입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문화의 일본 진출은 그리 호들갑 떨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무엇을 어떻게 수출할 것이냐가 아닐까요? 또는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정체성에 대한 실체적 탐구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아이들은 스티커 북을 가지고 놀고 있습니다. 아내는 어느새 피코와 PS2를 치운 모양입니다. 제 서재에는 이번 논문의 테마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몬스터 주식회사>, <치킨 런> 등의 CD가 놓여 있습니다. 분석한 메모들도 아내가 정리한 모양입니다. 니콘 디지털 카메라나 도시바 노트북을 가지고 있다는 것보다는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듯, 보아나 <태극기 휘날리며>가 일본에서 각광을 받는다는 사실보다는 그들이 왜 그런 문화코드에 열광하느냐에 주목해야 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해봅니다. 아이들이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는 모양입니다. 봄의 나른한 햇살은 이제 거실 끝까지 들어와 있습니다. 아내는 이제 저녁을 지을 모양입니다. 저는 다시 애니메이션 CD를 노트북에 밀어 넣고 있습니다.
2003년 《오픈아이》 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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