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포터, 스토리텔링으로 서다

 

박기수(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전 세계적으로 10년간 32천만부 이상을 판매한 <해리포터>시리즈가 완결되었다. 해리포터라는 이 작은 꼬마가 소설과 같이 성장하며 일구어낸 신화들, , 초당 23권의 경이적인 판매 부수를 보였다거나, 완결판의 보완을 위하여 블룸스베리출판사는 190억원을 들여 보완체제를 개편했다거나, 이 책을 출간한 국내 출판사가 향후 50년간 책을 찍지 않아도 충분할 만큼의 돈을 벌었다는 등의 이야기들은 이제 더 이상 새롭지 않다. 그렇다고 게임에 빠져 있던 아이들의 독서습관을 기르는데 도움이 되라고 부모들이 구입한 덕이라는 등의 구태의연하고 당위적인 주장도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해리포터> 시리즈를 살펴보고 그것의 미덕과 한계를 점검해보려 한다.

많은 자본이 들어가는 문화콘텐츠에서는 실패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대중성과 시장성이 검증된 텍스트와 windowing이나 One Source Multi Use를 원활히 수행할 수 있는 텍스트를 원천콘텐츠로 선호한다. 원천콘텐츠는 대중성뿐만 아니라 향유를 활성화할 수 있는 다양한 요소를 지니고 있어야 하며 거점콘텐츠로의 전환(adaptation)이 용이한 구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해리포터>시리즈는 원천콘텐츠로서 다양한 미덕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책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영화의 예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퀴디치, 호그와트 교복, 마술봉, 마술 빗자루 등 향유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미시콘텐츠들이 거시콘텐츠의 내러티브 구조 안에 유기적으로 잘 구조화됨으로써 텍스트의 완성도를 제고하는 동시에 부가상품화 가능성을 극대화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미시콘텐츠의 활성화는 해당 콘텐츠의 수익 증가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거시콘텐츠에 대한 관심을 상기시키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효한 전략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 시리즈가 흥미로운 것은 기본 생활은 영국식 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극적 사건 전개에 필요한 악당이나 괴물들은 서구의 신화들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특수성과 보편성을 절묘하게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규모의 경제를 확보해야 하는 문화콘텐츠 시장에서 문화할인율을 고려한 다양한 배려는 기획 단계부터 시도된다는 측면에서 <해리포터> 시리즈는 양질의 벤치마킹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존 피스크가 말한 대중문화콘텐츠의 3가지 차원의 생산성을 고려한다면, 이 시리즈는 보편적 신화의 특수한 재맥락화를 통한 기호학적 생산성과 향유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언술행위의 생산성을 활성화시키고 있다는 점, 그리고 다양한 텍스트적 생산을 통하여 그것을 지속강화하는 전형적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거칠게 단순화한다면 <해리포터> 시리즈는 익숙하고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는 서구의 신화와 전설 등을 참신한 캐릭터의 복수담과 미스터리담, 그리고 무엇보다 캐릭터들의 성장담으로 전환시킨 이야기이다. 익숙함과 참신함의 8:2로 배분하는 할리우드식 문화콘텐츠 대중화 전략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하지만 좀 더 섬세하게 말하자면 이 시리즈가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위와 같은 다양한 미덕을 하나의 텍스트에 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우수한 스토리텔링을 생산할 수 있었던 기저에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오늘도 끊임없이 스토리텔링을 고민하고 있다는 영국 내 2만 개에 달하는 스토리텔링 클럽에 있다. 다양한 문화적 역량을 지니고 있는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이 자기방식으로 대중성을 획득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하여 수시로 찾는다는 스토리텔링 클럽! 문화콘텐츠의 금과옥조처럼 이야기하는 개인의 창의력이란 바로 이러한 지속적인 노력과 양질의 향유공동체를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이 시리즈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해리포터> 시리즈는 완결되었지만 이것을 원천콘텐츠로 하는 거점콘텐츠화 사업은 앞으로 몇 년간 우리를 또 흥분시키며, 그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불려줄 것이다. 지금 이곳에서 이국의 낯선 이름들 대신 <미르가온>처럼 낯익은 우리 꼬마들이 펼치는 마법과 모험의 판타지를 기다려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2007년 <한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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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이 힘이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트랜스포머>, <스파이더맨 >, <디워>의 공통점은 내용중심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시각적인 놀라움과 즐거움이 압도적인 영화라는 점이다. 서사론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전통적인 의미의 내러티브에서 탈피하여 비주얼스토리텔링을 향유의 중심에 둔 영화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세 영화 모두 올 여름 극장가를 강타했다는 점이다. 특히, <디워>를 둘러싼 논쟁은 우리의 스토리텔링에 대한 관심과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준 사건이었다.


<디워>의 내러티브 부재를 지적했던 사람들은 옳았지만 틀렸다. 분명 <디워>의 내러티브 부재를 꼬집었던 그들의 지적은 옳았지만, 그 정당한 지적은 <디워>를 향유한 800만 이상의 관객들의 즐거움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틀렸다. <디워>의 국내 흥행 대박을 비주얼스토리텔링에 대한 향유가 본격화된 징후로 보아야 한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 역시 비주얼스토리텔링이 압도적인 콘텐츠였지만 완성도 높은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까닭에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그것이 내러티브가 부재한 <디워>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스토리텔링은 비주얼스토리텔링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스토리텔링은 스토리’(story)말하기’(tell) 그리고 현장성과 상호작용성(ing)으로 구성된 것이다. , 스토리텔링은 디지털 문화 환경의 도래와 뉴미디어의 발달로 인하여 스토리만큼이나 그것을 말하는 방식과 구현하는 방식이 중요하게 되었고, 그 결과 2의 구술성 시대의 도래가 가능해짐으로써 상호작용성에 기반한 향유의 극대화 과정이 더욱 부각된 결과다. 쉽게 말하자면 이제 말하는 내용만큼이나 말하는 방식과 구현 방식에 주목하게 되었고, 어떻게 향유를 극대화하느냐를 중시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유희성이 전면화되었다는 것이다.

원더걸스의 <텔미> 열풍도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외모나 가창력 면에서 압도적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원더걸스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텔미>라는 노래와 춤이 절묘하게 결합하여 구현된 결과다.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텔미> UCC 동영상을 보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다양하게 재생산하고 있는 <텔미> UCC 동영상들은 향유자들이 이 노래에서 즐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강변하고 있다. 특히 절묘한 시점에 공개된 원더걸스 프로듀서이기도 한 박진영의 <텔미> 춤의 원본 UCC를 보면, 이 열품이 얼마나 정교한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흥미로운 것은 향유자들이 이 각각의 것들을 <텔미>라는 노래와 함게 즐기지만, 노래만을 즐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노래의 텔링에 해당할 수 있는 곡 해석력이나 가창력 등은 물론 춤이나 구성원들의 연출된 이미지 그리고 심지어 제작과정의 비화까지를 매우 주도적인 자세로 통합적으로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콘텐츠의 근간은 스토리텔링이다. 스토리텔링은 향유자들이 텍스트와 소통하는 기본 회로라는 점에서 중요하며, 특히 One Source Multi Use틀 통한 문화콘텐츠 수익 실현과정에서 중심이 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텍스트의 완성도와 대중적 소구를 결정짓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토리텔링은 기존의 내러티브 논의와 같이 해석 중심의 의미 탐구가 아니라 생산을 위한 전략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에서 전개되어야만 한다.

문화콘텐츠가 많은 자본(high-cost)을 요구하는 까닭에 위험이 많은(high-risk) 분야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문제는 위험을 어떻게 줄이고 성공 가능성을 높일 것이냐에 있는데, 그 중심에 스토리텔링이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리텔링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수준은 그리 높아보이질 않는다. 객관적이고 정치한 선행사례 분석을 통하여 보다 양질의 스토리텔링을 생산하려는 노력보다는 한 작가나 기획자의 발상이나 감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전근대적인 마인드가 아직도 만연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미드처럼 시즌제를 기반으로 6개월 제작 6개월 방영의 주기적 순환을 통하여 제작 일정의 안정적 확보가 어려운 우리의 현실을 고려할 때, 스토리텔링의 생산성을 극대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문화콘텐츠의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다양한 전략의 연구와 생산의 노력이 시급하다. 이러한 모든 노력의 토대가 스토리텔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지속적인 창작을 수행할 수 있는 우수한 인력을 양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화중심도시 광주에서 스토리텔링 아카데미를 개설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선택과 집중에 의한 과감한 교육모델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더구나 광주는 풍부한 예술 역량을 도시 속에 내재화하고 있고, 숱한 이야기꾼들의 아기집 노릇을 해왔다는 점에서 스토리텔링 아카데미에 거는 우리의 기대가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광주가 아시아문화중심도시로서, 동시에 문화콘텐츠의 생산 허브로서 우뚝 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광주가 지닌 스토리텔링 역량을 결집시키고 구체화해야할 것이다. 정부와 시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아직 광주의 문화콘텐츠 생산 역량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노력들을 수렴하고 하나로 꿰어낼 수 있는 구심점이 없기 때문이다. 문화콘텐츠의 다양한 영역과 분야 그리고 미디어들의 소통회로가 스토리텔링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스토리텔링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한 스토리텔링 역량을 강화하려는 노력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스토리텔링과 상관한 광주의 문화 역량을 모으고, 광주 지역 소재 대학들의 유관학과와 연계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산학협력을 기반으로 연구-교육-생산의 체계를 구축하며, 멘토링 시스템을 통한 실천적인 노력을 경주한다면, 오늘 우리의 기대는 멀지 않은 미래의 현실이 될 것이다. 광주가 스토리텔링을 선점하고 특화시킬 수 있을 때, 광주를 중심으로 한 문화콘텐츠 성공모델이 등장할 것이고, 그것은 다시 90%이상 서울에 몰려 있는 문화콘텐츠 기업들의 광주행 러시로 이어질 것이다. 지식기반사회를 선도할 문화콘텐츠에 대한 기대가 이제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에 대한 관심과 실천으로 구체화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2007년 <광주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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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과 상실을 대면하는 법

유디트 바니스텐달,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미메시스, 2013.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소멸은 사라지는 자의 몫이고 상실은 남겨진 자의 몫이다. 유디트 바니스텐달의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는 죽음을 둘러싼 소멸과 상실의 기록이다. 죽음은 거부할 수 없는 보편성과 생명으로부터 기원하는 개별성의 이율배반적 긴장 안에 있다. 언제든 함께할 수 있지만 딱 한 번의 체험만 허락되는 것이기에 두려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막막함이 죽음이라는 단어에는 깃들어 있다. 그래서인지 죽음은 그것을 맞닥뜨린 사람의 몫일뿐만 아니라 그를 지켜보아야 하는 사람들의 몫이 되고는 한다. 하여 죽음은 늘 함께하지만 한두 걸음 비껴 서있는 듯하고, 현재일 때 유효하지만 과거이거나 미래로 다가온다.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각자의 위치에서 생각하고 수용하는 과정의 이야기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죽음의 어김없는 실체와 구체를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때론 절절하게, 때론 낭만적으로 아름답게 그려냄으로써 죽음의 충만한 의미값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 미덕의 기반에는 후두암으로 죽어가는 다비드의 투병과 죽음을 대면하는 미리암, 타마르, 파울라, 다비드의 시점이 있다. 각자의 시선으로 다비드의 죽음을 사유하고 수납하려는 시도는 탁월한 선택이다.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굳이 죽음이라는 단어를 제목에서 빼놓고, 아버지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미리암과 타마르의 시점에 더욱 비중을 두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더구나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 작품은 목차 대신 다비드를 중심으로 한 가계도롤 제시하고 있다. 다비드의 죽음과 관련된 기록에 그보다 확실한 소멸과 상실의 계보도가 또 있을까?

이 작품에서 읽어야 할 것은 단지 소멸과 상실만이 아니라 그것의 어우러짐이 빚어내는 진실의 조각들이다. 그 진실의 조각들은 분명하고 일관된 메시지를 발신한다기보다는 모호하고 변덕스럽게 드러나거나 사라진다. 그것은 죽음을 대면한 삶의 모습이 그러한 까닭이며 삶을 둘러싼 죽음의 진면목이 그러한 까닭이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고, 누구도 돌이킬 수 없다는 유일한 사실과 삶의 맞은편에 있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삶에 간섭하고 개입하려드는 모순된, 그 온통의 확실성으로 우리 곁을 떠돌고 있다는 자명함. 그 막막하고 두려운 확실성 앞에서 비로소 실존의 충만한 진실을 만나게다.


후두암에 걸린 아버지(다비드)의 투병과 죽음을 대면하는 두 딸과 아내 그리고 자기 자신의 상처와 사랑을 이 작품은 이야기한다. 과장된 감정으로 죽음의 고통과 슬픔을 어둡게만 그리기보다는 담담하지만 속 깊게 죽음이라는 현실을 만나게 한다. 그것은 상처나 슬픔보다는 오히려 치유나 사랑에 가까워보인다. 후두암 발병 사실을 아버지로부터 듣는 미리암과 우연하게 듣게 되는 타마르, 그것을 유머러스하게(아빠한테는 손녀만 중요해. 우리도 소중한 딸이라고요) 표현하는 딸이나 어린 타마르를 안심시키는 아버지의 모습(그림1)은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죽음을 담담하게 배워가며 수납하는 아홉 살 타마르의 이야기는 동화 같은 발랄함과 아련함을 가지고 있다. 친구 맥스와 함께 아빠를 미라로 만들어 살리겠다거나, 풍선에 매달아 편지를 보낸다고 믿거나 인어에게 아빠와 죽음이라는 말의 뜻을 풀이해주거나, 맥스와 함께 썰매를 끌고 병원에 오는 장면은 이 작품이 죽음으로만 경사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준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대면해야하는 가족의 이야기가 과도하게 감상적이거나 일방적으로 비관적이지 않고 따듯하고 진솔하다.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가 죽음에 대한 따듯한 진실을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의 시각이 아니라 모두의 시각으로, 각자의 관점으로 그것을 수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과 관련된 슬픔은 개별적이고 실존적이다. 누군가의 죽음 그 자체가 슬픈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와 관계되어 있고, 죽음이 실체로서 내게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탓이다. 죽음으로부터의 슬픔은 풍화되지 않고 점점 더 그것이 오롯한 자신만의 몫이며, 자신에게 닿기 전에는 결코 멈추지 않고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할뿐이다. 수납할 수밖에 없음을 타자의 죽음을 통하여 절실하게 느끼는 순간, 그것은 슬픔이라기보다는 절절한 현실, 절박한 현재, 적막한 고독이 된다. 그것을 통해 깨닫는 처연한 시간의 연민과 연민을 넘어서는 고요한 평안을 이 작품에서 만날 수 있다.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에서는 루이즈-타마르-미리암-파울라-다비드를 통해 생애 전주기의 연령으로 죽음을 대면하게 한다. 또한 후두암 발병소식과 루이즈의 탄생을 연결함으로써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그리고, 그 끝나지 않을 순환으로 영원을, 영원으로 모든 순간의 소중함을 이야기한다. 피할 수 없는 누구나의 상수항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슬픔보다는 오히려 그 맞은편에 있는 삶의 매순간의 소중함, 그 순간을 채워내야할 위로와 사랑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부각시킨다. 정작 두려워해야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순간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헛되이 시간을 보내거나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아니겠는가?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은 아름답고 서정적인 그림에 있다. 그것은 우아하면서도 발랄하고, 내면적 깊이와 역동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오브제의 과감한 생략과 선택, 캐릭터의 상황과 심리에 따라 자유롭게 변화하는 선과 색의 조화는 자칫 무겁거나 우울해질 수 있는 이야기의 무게와 속도를 조절하고 깊은 정서적 울림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작품 전체를 관류하는 일관된 분위기나 캐릭터별로 변별되는 색이나 선이라기보다는 개개의 캐릭터가 처한 상황이나 심리에 부합하는 선과 색의 구사를 선택했다. 이 작품에서 개개의 캐릭터와 그가 처한 상황이나 심리의 조합이 다양한 만큼 선과 색의 구사는 자유롭다. 분명하고 간결한 선으로 묘사한 상황과 흐릿하거나 여러 번 덧칠한 듯한 선으로 묘사한 장면만 비교해보아도 텍스트 전체의 서사적 맥락을 따갈 수 있을 정도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주장처럼 애니메이션은 움직임만으로도 즐거움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만화는 그림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움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만화의 고유한 문법에 최적화된 그림이 주는 즐거움은 다양한 방식의 자유로운 표현을 통해서다. 일상을 낯선 방식으로 재정의하여 자동화된 인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시도가 만화의 기저에 깔린 예술적 요구라면 그림은 무엇보다 중요한 표현 기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디트 바니스텐달의 그림은 주목할 만하다. 사실적인 묘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표현의 다양한 영역이 지속적으로 탐색되고 있는 그의 그림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풍성하고 미학적이다. <그림 3>을 보면 파울라가 다비드를 보내는 마지막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의 중심은 파울라에 두고 있지만 내레이션은 다비드에게 할애하고, 파울라의 움직임은 최소화하지만 다비드의 내레이션은 담백하지만 절절하게 울리게 하는 이러한 묘사는 정서적 울림의 깊이는 물론 공감을 부른다. 아울러 텍스트의 전체를 함께해온 독자들의 슬픔과 우울을 위로하고 있지 않은가?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말은 얼마나 감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레토릭인가라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는 내내 그것이 얼마나 경직되고 편협한 생각이었는지 느끼게 되었다. 거부할 수 없다는, 벗어날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수납하고 준비할 것이냐가 아닐까? 죽음이라는 이별이 단지 슬프거나 두렵지만은 않게 매순간을 긍정하고 그 위에 자신의 삶을 포개어 위로하며 사랑할 수는 없을까? 죽음 앞에 초라해지는 것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아니라 삶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 사랑해야하는 것들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 시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목소리를 잃고 더 이상 어떤 대화도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메모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다비드의 절절함은 늘 무의미한 말을 숱하게 쏟아내면서도 정작 전하지 못하는 사랑이나 위로의 말들에 닿아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한다. 당신의 죽음은 어떤 모습으로 어디쯤 와 있는가? 그래서 당신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만화 규장각> 201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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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상실의 닻 혹은 덫

제프 르미어, 수중 용접공미메시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가지고 있는 것은 잃은 것의 맞짝이고, 기억하는 것은 잊은 것의 맞짝이다. 잃은 것은 찾으려 하고 잊은 것은 기억하려 애를 쓰지만, 정작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잃은 것을 찾으려하고 잊은 것을 기억해내려 하는 것은 가지고 있는 것과 기억하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의미가 있는 행위다. 잃은 것과 잊은 것을 찾고 상기한다한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 모든 일들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제프 르미어의 수중 용접공은 정체모를 환상이 소환하는 잃어버린/잊어버린 것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잃어버린/잊어버린 것이 소환한 것은 단지 아버지나 회중시계에 대한 기억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것들에 집착함으로써 외면하려 했던 지금 이곳의 삶이다. 시추선에서 수중 용접공으로 일하는 잭 조지프는 오롯이 혼자일 수밖에 없는 해저에서 정체모를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해저에 있는 잭에게는 너무도 절박하고 생생했던 순간 지상에서는 사고로 인지된다. 정체모를 소리가 소환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의 죽음과 사라진 회중시계에 관한 것이었다.

바다 속 보물을 찾으면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것이라며 현실은 크게 개의치 않고 수중 탐사에만 몰두 하던 아버지의 모습은 만삭인 아내를 홀로 두고 맹목적으로 일과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집착하는 잭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보물과 일에 대한 몰두라기보다는 오히려 지금 이곳의 일상으로부터의 도피에 가깝다. 누군가의 남편이 되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는 부담감, 그것은 단지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된다는 의미를 넘어서는 책임감에 관한 것이다. 가장이든 아버지든 간에 그것은 나를 중심으로 했던 욕망을 괄호 속에 묶고 한층 성숙해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스스로의 성숙도나 책임감에 확신을 갖지 못했던 아버지나 곧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잭의 현실에서 조금 비껴난 행동들은 일종의 방어기제와 같다. 가정을 이루고 누군가의 아버지가 됨으로서 경제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아이의 삶을 지탱해주고 준거가 되어야 한다는 묵직한 책임감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욕망이 스스로 합리화시킬 수 있는 명분을 보물탐사와 수중용접에서 찾은 것이다. 잭이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갑자기 해저에서 아버지의 기억을 소환한 까닭이다.

잭은 수중의 절대 고독 속에서 일종의 환청과 환각으로 어린 시절의 자신과 그 시절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만난다. 그 과정에서 잭은 아버지의 죽음과 회중시계의 연관 고리를 찾고, 아버지 죽음의 또 다른 원인이 자신에게 있었음을 깨닫는다. 아울러 그것은 잭이 몰두하던 해저, 잠수, , 과거 등으로부터 지금 이곳의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다. 바로 그 순간이 텍스트 전체에 걸쳐 아버지와 변주된 데칼코마니처럼 유사성을 보이던 잭이 아버지와 완전히 분리되는 순간이며 동시에 아버지와 함께하던 어린 시절의 자신과 분리를 통해 성장하는 순간이다. 이러한 분리는 지금 이곳의 삶에 대한 직시이며, 보다 성숙한 자아로서 현실 수납을 의미한다.

수중 용접공에서는 집/시추선, 육지/수중, 현재/과거의 분리가 선명하다. 전자가 현실의 질서라면 후자는 아버지의 질서로 대변되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며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둔 잭 자신만의 세계이다. 아버지는 보물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현실과 거리를 두었지만 잭은 자신의 일에 몰두한다. 잭의 그런 모습은 현실에 충실한 듯 보이지만 아버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와 잭이 찾는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외면하려는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 다만 잭의 경우는 그러한 외면의 동기 저변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이 죄책감이 있었다는 것은 작품 뒤에서 발견할 수 있다. 결국 아버지는 끝까지 보물찾기를 이야기하지만 그가 우선 찾아야 했던 것은 그가 가장 사랑했던 보물인 아들 잭이 좋아하는 회중시계였다는 사실이 절묘한 메타포를 만들어낸다. 아버지의 보물찾기가 침몰한 스페인함선의 금화들이 아니라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단순화한다면 지극히 소박한 서사에 머물 뿐이겠지만, 그것을 아들 잭의 출산 즈음에 환상으로 연결함으로써 서사의 울림을 다양화한다. 자칫 잘못 읽으면 이 작품은 집/시추선, 육지/수중, 현재/과거의 이분적인 구도에서 전자만을 긍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아버지와 아들 잭의 데칼코마니 구도와 잭이 체험하는 환상의 내용을 연결해보면 양자가 비로소 잭의 온전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치 닻(anchor)이 배가 떠내려가지 않고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게 도와주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것이 자유롭게 떠날 수 없는 덫(snare)이 되기도 한다는 삶의 이율배반(antinomy)을 이해할 때, 그 이해 위에서 스스로 성인으로서 온전한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흥미로운 것은 수중 용접공을 읽으며 강도하의 큐브릭과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이 떠올랐다. 강도하의 큐브릭에서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미우의 죄의식이 만들어낸 자기방어기제를 잭의 회중시계에 대한 기억에서 떠올렸다면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의 과잉일까?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에서처럼 소중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찾는 과정은 마치 미스터리를 풀 듯 텍스트의 마지막까지 긴장을 유지함으로써 극적재미를 배가시킨다.

이 작품은 작화 면에서 상당히 과감한 시도를 한다. 텍스트 전체를 하나의 작화스타일로 유지하기보다는 장면과 상황에 적합한 자유로운 작화스타일을 선택하고 있다. 이것은 장면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서사 전체의 흐름을 작가 스스로 제어할 수 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며 시도다. 거기에 대사의 많고/적음이나 완급에 맞추어 작화스타일을 선택하고 있는 점도 무척 매력적이다. 이러한 작화스타일은 텍스트 전체를 잭과 동반자적 시점으로 전개하는 과정에서 긴장의 유지뿐만 아니라 서사에 대한 몰입에 크게 기여한다.


아버지나 아버지와 관련된 기억들이나 그것을 찾아가는 잭의 모습이 수직 구도로 구현되고 있다면 현실이나 일상은 수평구도를 선호하고 있는 것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다. 특히 현재의 삶, 자신을 기다리는 일상을 스스로 발견하는 장면(196-197)의 연출은 백미다. 시추선을 향해 나아가는 잭을 중앙에 배치하고 Z축을 중심으로 설정하고 동시에 자신의 아이와 함께하게 될 장면을 X축으로 설정함으로써 잭의 깨달음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출은 현재의 혼란스러운 잭 자신을 Y축으로 중심에 두고 과거의 아버지와 자신을 X축으로 연결하여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는 장면(112-113)에서 시도하여 학습하게 함으로써 그 효과를 배가한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와 화해하고(207)를 그를 수면위로 끌고 올라오는 장면(212)은 또 얼마나 환상적인 연출인가? 회중시계와 아버지 죽음을 연결시켜가는 과정에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분리시킴으로써 지금 잭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만들고, 회중시계를 매개로 분리되었던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를 화해하게 함으로써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와 어떻게 돌아와야 하는지를 열려주는 효과적인 연출이기 때문이다.

발문에서 데이먼 린들로프가 환상특급 운운한 것은 오히려 텍스트 리터러시에 장애가 된다. 환상적인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이 환상특급이 주는 분위기나 효과를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잭의 내면심리에 집중하여 읽어가는 것이 보다 현명한 일이 될 것이다. 자신이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시기에 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소환함으로써 아버지의 죽음의 비밀을 이해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함으로써 아버지의 기억으로부터는 자유로워지는 다소 안정적인 서사구조와 보수적인 주제의식을 지향하고 있는 까닭이다.

수중 용접공을 읽는 내내 박흥용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 등장하는 기저귀의 메타포가 떠올랐다. 사랑은 빨래하는 어머니가 아가의 허리춤에 매어둔 기저귀처럼 보호하는 것인지 구속하는 것인지, 그것이 닻인지 덫인지? “……이 모든 게 내 잘못이었던 거야.”(188)라고 깨닫는 장면의 배경이 러스티 앵커인 것을 근거로 수중 용접공이 닻에 비중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면 해석의 과잉일까? 사랑은 역시 어렵다.

<만화규장각> 20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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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형님>, 칭찬해? 칭찬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나이가 들수록 소란스러운 것이 싫다. 채널을 바꾸다 만나게 되는 <아는 형님>은 언제나 소란스러웠다. 교복을 입는 설정도 그리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었고, 연예인 신변 퀴즈를 풀며 정답을 맞히는 과정도 무례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진득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본 적이 없다가 지난 주말 마침내 <아는 형님>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게 되었다. 우연히 접한 프로모션 클립이 하도 유쾌해서 찾아본 것이었다. 게스트였던 걸스데이의 털털함과 리액션도 그 유쾌함에 한 몫을 차지했지만 무엇보다 그 이유는 프로그램 포맷의 차별성에 있었다.


교실을 배경으로 전학생이 오면서 서로 알아간다는 콘셉트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메인 MC와 보조 진행으로 구분하지 않고 일곱 명의 집단 진행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 그러다보니 게스트가 진행을 주도하는 역할 역전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점, 각자의 캐릭터 설정에 따라 게스트가 빛날 수 있게 조력자로서 충실한 뒷받침을 수행한다는 점, 포맷 속 캐릭터와 실재 캐릭터 간의 경계를 탄력적으로 조정함으로써 출연진을 탈신비화하고 있다는 점, 교실이라는 공간을 토크, 퍼포먼스, 기타 활동의 무대로 효율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 차별화 전략으로 두드러진다. 뿐만 아니라 <아는 형님>이라는 제목에서도 드러나고 있듯이 진행자의 관점이 아니라 게스트의 관점이 부각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게스트가 자신을 일방적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돕는다는 설정이 아니라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전학생과 재학생이 함께 어우러져 놀 수 있는 장()을 만들고 시청자는 그 모습을 즐긴다는 설정으로 차별화하고 있다. 더구나 전체를 반말로 진행함으로써 출연진의 연령 차이와 그에 따른 서명 등이 자연스럽게 소거됨으로써 거침없고 솔직한 발언을 이끌어낼 수 있게 한다.

<아는 형님>의 가장 큰 경쟁력은 특정 포맷을 고집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새로운 포맷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기저에는 퀴즈와 노래방 문화를 결합시켜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한 경우처럼, 다양한 장르나 포맷을 즐거움을 중심으로 결합시키는 과감한 도전이 있다. <아는 형님>의 대부분 코너는 어디서 봄직한 익숙한 것들이지만 그것이 전혀 다른 맥락(context)에서 구현됨으로써 새로운 즐거움을 창출할 수 있도록 과감한 도전을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차별화의 도전은 지금까지 즐거웠던 만큼 앞으로 더욱 더 큰 기대를 갖게 한다.

<아는 형님>이 미덕으로만 가득 찬 프로그램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즐거움에 프로그램의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아는 형님>이 공허한 말장난, 고착화된 성역할을 확대 재생산, 연예인의 신변잡기중심 진행 등의 비난에서 자유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그들이 시도한 새로움의 도전에 주목해보자는 말이다.

어디 <아는 형님> 뿐이겠는가? 단지 밥 세끼 먹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큰 즐거움을 주었던 <삼시 세끼>, 뚱뚱한 먹보들 네 명이 그저 먹는 과정만 보여주어도 재미있는 <맛있는 녀석들>, 성장과 오디션을 결합시켰던 <프로듀스 101>, 모창 능력자를 찾아 추억 속의 스타를 현재로 소환했던 <히든 싱어> 등 최근 차별성으로 승부했던 포맷들을 상기해보자.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이 프로그램들이 현저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익숙함 속에서 시청자의 향유 코드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거기에 파격적인 차별화의 콘셉트를 과감하게 얹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남을 흉내 내면 표절이고 스스로를 베끼면 매너리즘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다양한 이유로 황량해진 공중파 프로그램을 생각한다. 종편이 엄청난 자금으로 스타PD와 작가들을 스카우트해갔기 때문이라 핑계대지 마라. 스타PD와 작가들이 공중파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열악하고 경직된 제작환경을 먼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경직성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는 가치 있는 즐거운 체험을 지향하는 뼈저린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죽은 것뿐이다. 가장 빠르게 변하는 것이 콘텐츠 시장임을 누구보다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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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 우즈의 지독한 스토리텔링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골프 황제가 섹스머신이 되었다. 골프 황제의 신화를 만들던 대중매체들은 그의 숨겨놓은 여자가 몇 명인지, 라스베가스 VIP룸에서 받았다던 서비스가 무엇인지, 그의 아내가 받게 될 위자료는 얼마인지로 차갑고 단호하게 관심을 돌렸다. 타이거 우즈는 사라지고 그에 관한 스토리텔링만 남았다. 나는 우즈의 일을 통해 일상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이며 환경이란 얼마나 처절하게 변할 수 있는 것인지혹은 ‘1인자의 고독또는 혼외정사의 비윤리성따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타이거 우즈의 스캔들이 지독한 스토리텔링으로 변하는 과정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이야기(story)+말하기(tell)+향유하기(ing)의 합성어인 스토리텔링은 문화는 물론 사회 전반의 화두다. 스토리텔링의 전면화는 하늘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는 고갈의식과 뉴미디어의 눈부신 발전에 따른 말하기 방식의 다양화통합화 그리고 감성적 소통과 체험을 전제로 한 재미의 추구 등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스토리텔링은 이제 무엇을 말할 것인가뿐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즐길만한 것으로 만들 것이냐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우즈의 스캔들은 스토리텔링의 최적화 요소를 지녔다. ‘모범적인 스포츠 스타의 불륜 행각은 스토리로서 뿐만 아니라 기획의 하이컨셉으로서 매우 매력적인 소재다. 골프 황제, 선정적이고 은밀한 직업의 미녀들, 스타의 은밀한 사생활, 엄청난 금액의 위자료 등은 그것을 더욱 즐길만한 것으로 만들고, 수준과 상관없이 전방위적으로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정보와 추측성 기사들을 쏟아내는 매스 미디어의 활약은 가공할만한 즐거움을 생산한다. 그런데 이 지독한 스토리텔링 앞에서 왜 우리는 즐겁지 않은가?

스토리텔링의 핵심은 얼마나 향유를 활성화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향유란 향유자가 텍스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즐거움을 극대화하는 과정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향유의 대상이 즐길만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즈의 이야기는 차라리 두려움이다. 신화가 되길 원했던 신뢰할만한 스포츠 스타의 몰락과 자본 앞에서 이어지는 폭로와 매스컴의 확대재생산 구조,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차별적으로 제공되는 불신의 흔적들. 그것들은 모두 무엇 하나 즐거울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밥이 되지는 않지만 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즐거움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스토리텔링은 즐거움이어야 한다. 스토리텔링의 즐거움 향유 과정을 통하여 스스로를 성찰하는 체험이 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함께 즐거울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 더욱 간절한 계절이다.

2010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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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을 넘어선 스토리텔링의 매혹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의 시대다.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story)가 아니라 어떻게 이야기하고(tell) 즐기게 할 것이냐(ing)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 말이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를 훼손시켜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상대적으로 이야기의 내용만큼이나 어떻게 이야기 하고 어떻게 즐기게 할 것이냐도 중요해졌다는 의미다.

<북극의 눈물>, <한반도의 공룡>, <누들로드>, <차마고도>, <아마존의 눈물> 등등 특별 기획 다큐멘터리는 물론 <다큐멘터리 3>, <인간극장>과 같은 정기적인 다큐멘터리까지 가히 다큐멘터리의 폭주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대중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지상파뿐만 아니라 케이블에 위성까지 다수 채널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채널별로 차별화된 콘텐츠를 생산하지 못하고 저렴한 비용을 투자해서 보다 광범위한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로 경사되고 있는 실정에서 솔직담백한 다큐멘터리의 진지한 행보에 매혹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세계적인 고품격 다큐멘터리를 체험함으로써 리터러시 능력은 물론 기대수준까지 한껏 높아져 있고, 개인의 관심과 취향에 따라 전문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이 지속적으로 시도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지지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무엇보다 지배적인 채널에서 고만고만한 컨셉에 그 얼굴이 그 얼굴인 출연자 그리고 공허하기만한 말장난과 불쾌할 정도의 막말이 난무하는 오락 프로그램과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막장 드라마 그리고 10대들의 전유물이 된 가요 프로그램 등으로의 편향이 최근 다큐멘터리 붐으로 이어지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다큐멘터리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알고 싶으나 알려주지 않던 진실이나 차가운 이성 중심의 지식이 아니라 감성으로 읽어낼 수 있는 지금 이곳의 진실에 대한 뼈아픈 성찰을 다루고 있는 <지식e><다큐프라임>이다. 특히 이 프로그램들은 책으로 다시 출간되어 방송만큼이나 인기를 끌고 있다. 문화콘텐츠 업계에서 소위 말하는 One Source Multi Use의 성공적인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구현 가능한 만화나 소설 등의 도서류가 원천콘텐츠로 먼저 출시되어 시장성 검증을 받으면, 그 결과를 보고 매스 미디어와 결합한 영화, 애니메이션, 드라마 같은 거점콘텐츠로 전환하는 것이 One Source Multi Use 중 장르전환의 예인데, 이들의 경우는 프로그램이 계속 방송되고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노출이 가능하고, 이미 방송을 통해 관심을 끈 아이템에 대하여 문자를 통한 말하기로 보완함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냈다는 점에서 이러한 전개가 가능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스토리텔링 전문가들은 스토리가 내러티브를 낳고, 내러티브가 스토리텔링으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스토리는 구술 언어를 중심으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일정한 컨텍스트를 확보한 상황에서 전달되는 내용중심의 이야기를 말한다.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듣던 이야기를 기억해보자. 밑도 끝도 없이 옛날 옛날에라는 관용구로 시작할 수 있고, 이야기를 듣던 여러분이 잠들면 언제든 끝낼 수 있었던 할머니의 옛날이야기가 가장 대표적인 스토리의 유형 중 하나이다. 이러한 스토리가 문자언어의 발명과 인쇄술의 발달로 익명의 다수 대중들을 향하는 도서의 형태로 바뀌면서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의 컨텍스트를 기대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에 보다 정확하고 효율적인 이야기 방식이 필요했고, 그 결과로 등장한 것이 내러티브다. 정해진 분량 안에서 익명의 다수 대중을 향해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전략의 고안과 활용이 필수적이었다. 더구나 문자라는 매우 제한된 표현방식으로 이러한 효과를 기대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는 더욱 정교하고 전략화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스토리와 내러티브가 디지털 문화환경과 결합함으로써 보다 창조적인 형태의 이야기로 전개된 것이 스토리텔링이다. 쌍방향성, 네트워크성, 통합성이라는 디지털의 특성을 창조적으로 수납함으로써 새로운 단계의 이야기를 구현할 수 있게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단선적인 발전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야기의 내용이나 기대하는 효과에 따라서 이 세 형태는 전략적으로 선택되어 활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지식e>가 방송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도서로서도 전폭적인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는 현상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방송 프로그램은 정해진 시간에 다양한 감각에 호소할 수 있는 요소들을 통합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멀티미디어적 구현이 가장 효과적인 말하기 방식이라고 이야기하기는 곤란하다. 말하려는 내용과 목적 그리고 기대하는 바에 따라서 그것은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방송 시간의 제한은 정보 제공 시간의 제한을 가져온다는 치명적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더구나 그것이 다큐멘터리라고 한다면 그 한계는 더욱 크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e>의 경우에는 멀티미디어적 요소를 지극히 제한적으로 활용하면서 지배소의 선택을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짧은 시간에 강한 메시지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하였다. 정보를 엄격하게 선별하고 이를 완과 급을 조절함으로써 향유자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은 이 과정에서 상술되어야했거나 더 생각해볼 거리를 보완하고 있다. 모든 것을 말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생각해볼 거리에 초점을 맞추어 취사선택하고, 방송을 통해 최적화시킬 수 있는 요소와 책을 통해 최적화시킬 수 있는 요소를 전략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따라서 방송만 보았거나 책만 보았다는 것이 온전한 체험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독립적인 스토리텔링을 즐긴 것이 된다. 물론 둘 다 보았다면 그 가슴울림은 두 배가 되었겠지만.

<지식e>의 스토리텔링은 매혹적이다. 그 압도적 매혹의 가장 중심에는 그것이<지식e>의 컨셉처럼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지식이기 때문이다. 머리가 아닌 가슴을 울릴 수 있는 지식에 대한 목마름, 박제가 되어버린 다른 세계의 지식이 아니라 지금 이곳의 아픔과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는 지식에 대한 갈망이 <지식e>에는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지혜라고 해도 좋을 내용을 <지식e>가 굳이 지식이라고 하는 이유도 실용이라는 이름으로 죽어버린 지식들에 대한 무서운 질책이며 무거운 진혼에 다름 아니다. 지금 이곳의 우리가 그것에 열광하는 이유는 누구나 알고 있거나 안다고 믿고 있지만 나서서 드러내기 어려운 우리의 부끄러움을 그것이 가슴으로 되묻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당신들의 천국이 읽히는 시대는 불행한 시대라던 이청준 선생의 선지적 서문이 기억나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일게다.

2009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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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토럴 시대의 스토리텔링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스토리텔링은 가치 있는 즐거움을 창출하는 능동적인 소통이다. 가치나 즐거움을 지나치게 교조적인 의미나 윤리적인 의미로 해석하지만 않는다면, 가치, 즐거움, 능동적 소통은 스토리텔링의 특성을 드러내는 핵심 요소다. 축자적인 의미에서 스토리텔링은 스토리(story)를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다양한 방식(tell)을 통하여 향유를 강화하는(ing)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좀더 심도 있게 읽어보면, 스토리텔링은 향유자의 적극적인 참여 과정을 통해서 가치 있는 즐거움을 창출할 수 있는 일체의 소통 과정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스토리텔링은 그것이 통용되는 문화권, 적용 분야 및 해당 장르, 구현 미디어 환경, 최종 콘텐츠의 형태 등에 따라 상이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개념에 대한 합의나 실체에 대한 규정은 지극히 개방적인 형태로 설정되어 있다.


존 라세터가 강조한 바와 같이, 현재 구현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로 세계 애니메이션 시장을 압도한 픽사 애니메이션의 핵심은 스토리다. 사실 이 말은 스토리가 아니라 스토리텔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스토리는 단지 이야기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구현 방식 그리고 향유자와의 소통이 어우러지는 일체의 과정, 즉 스토리텔링이다. <토이스토리> 시리즈의 즐거움은 이야기 하는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어린 시절 장난감, 주제가(You've got a friend in me), 성장과 이별의 두려움과 같은 보편적 정서의 유대 요소들과 패러디, 대구와 강화를 통한 안정적 서사 구조 구축, 속편으로 수렴하는 프리퀼(prequel)의 적층적 활용, 집단적인 중심 캐릭터 설정과 편마다 새로운 캐릭터의 보강을 통한 서사의 심화, 애니메이션의 본질인 투명한 액션의 효과적 구현 등을 통해 성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스토리텔링의 문제는 스토리와 구현방식 그리고 향유가 어우러지는 장()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느냐, 가치 있는 즐거움을 창출할 수 있는 소통의 장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느냐에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구현 미디어 환경, 최종 콘텐츠의 형태 등은 스토리텔링 전략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이곳을 압도하고 있는 디지털 문화환경은 정보의 복합성, 쌍방향성, 네트워크성의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 말은 무엇보다 향유자의 능동적인 참여가 중요해졌음을 의미한다.

존 닐슨은 디지털 문화환경 속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형질의 스토리텔러를 디지털 호모나랜스(Digital Homo Narrans)’라고 부른 바 있다. 그들은 디지털 문화 조건을 능동적으로 활용하여 자신만의 차별화된 스토리텔링을 전개한다. 디지털 호모 나랜스는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등의 SNS, 포털, 동호회 등에서 문자·그림·사진·영상 등을 주도적으로 활용하여 스스로 이야기를 생산-공유-전파하는 주체적인 스토리텔러다. 적극적인 생산자이자 향유자인 그들에게 더 이상 생산과 향유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그들은 단지 소통할 뿐이다. 그러한 소통은 가치 있는 즐거움 창출이라는 하나의 목표로 수렴한다.

초당 3,500장의 사진을 업로드하는 페이스북과 분당 72시간의 영상을 업로드하는 유투브는 이미 격렬하게 살아있는 스토리텔링의 장이 되었다. 누가 지시하거나 어떤 물질적인 보상을 전제하지 않는데도 각종 디바이스를 가지고 다양한 플랫폼에 접근하여 자발적으로 생산하는 스토리텔링의 양상은 이전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유전형질을 지녔다. 그 형질의 특성을 읽고 싶다면 당신의 페이스북 계정을 열어보라. 향유자의 체험에 기반한 자발적 생산과 창작 그리고 무한 공유의 스토리텔링이 다양한 층위에서 격렬하게 증식하고, 공유로서 더욱 강력한 맥락을 생산하고, 그만큼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열고 있지 않은가?

헨리 젠킨스도 󰡔컨버전스 컬처󰡕에서 지금 이곳의 향유에 주목하고 주체적인 체험의 생산성과 향유의 자발성 그리고 공유의 즐거움을 강조한 바 있다. 특히 그가 제안한 장르 간, 플랫폼 간, 저자와 독자 간, 생산과 소비 간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transmedia storytelling)은 디지털 문화 환경 속에서 스토리텔링의 핵심을 지적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생산자에 의해 이미 완성된 스토리텔링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향유자에 의한 참여중심, 과정중심, 향유중심의 스토리텔링이다.

그래서 타이 몬터규는 스토리텔링을 넘어선 스토리두잉(story-doing)을 주창한다. 실천으로서의 스토리를 강조하는 스토리두잉에서 핵심은 향유자가 어떻게 그 스토리에 참여-반응-생산-공유하는 실천을 활성화할 수 있느냐이다. 스스로 참여함으로써 스토리를 실천하고 자기화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그동안 향유과정의 이면에 잠재된 형태였지만 이제는 실천을 통해 스토리텔링을 구현하는 필수적이고 노골적인 형태로 기획된다. 스토리두잉은 기업의 마케팅 전략의 일환으로 적극 활용되고 있는데, 신발 한 켤레를 사면 한 켤레를 어려운 이에게 기증한다는 기부 실천행위를 브랜드 전략으로 활용한 탐스, 자신이 만든 디지털콘텐츠를 등록하고 한번 다운로드 받을 때마다 1.25달러씩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식량으로 기부하는 ‘1.25 미라클마켓’, 커피 한 잔을 마시면 남미의 어느 가난한 농부에게 정당한 노동의 댓가를 지불한다는 공정무역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향유자가 어떤 형태로든 스토리에 참여해야함으로써 구현할 수 있는 스토리두잉의 전제는 스토리텔링의 핵심요소였던 가치 있는 즐거움이다. 최근 유명 인사나 스타들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아이스버킷 챌린지(Icebucket challenge)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기부문화를 환기하고 활성화하기 위해 유명 인사나 스타가 참여하고, 그것이 딱딱한 기부행사가 아니라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퍼포먼스로 즐겁게 진행하고, 참여자가 세 명의 다음 사람을 지정하는 기록을 웹에서 공유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기부라는 가치 있는 행위를 간명하게 제시하고 즐거운 퍼포먼스로 3배씩 확산해나가는 스토리텔링 전략은 그 효과면에서도 탁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이곳은 디지토럴의 시대(Digitoral Era). 죠나 삭스가 창안한 디지토럴은 아이디어의 창조와 전파에 향유자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적합한 아이디어만 살아남던 구전전통이 디지털 문화환경과 창조적으로 결합한 양상을 말한다. 구전전통에서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곧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고, 그 과정에서 모든 스토리텔링은 고정되지 않고 향유의 횟수만큼 격렬한 활성화가 이뤄지며, 그 활성화의 정도가 스토리텔링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러한 구전전통의 현재적 구현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디지털 문화 환경 덕분이다.

세계의 콘텐츠 시장을 주도한 디즈니 회장인 로버트 아이거는 디지토럴 시대 스토리텔링이 맞춤화된 경험고치 벗어던지기라는 형태로 구현될 것임을 예언한 바 있다.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및 빅 데이터 등을 기반으로 개인에게 최적화된 맞춤화된 경험을 활성화할 수 있어야 하고, 이러한 경험이 공유의 기술을 통해 고치 벗어던지기를 통해 무한 연결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는 공감 가능한 보편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화 <레미제라블>과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이 좋은 예이다. 공감 가능한 보편성을 확보한 스토리를 최신의 최고 기술로 구현하고, 향유자의 수준과 취향에 소구할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을 텍스트에 수렴하고, 거기에 뮤지컬 넘버들을 삽입함으로써 텍스트 전체가 아니라 뮤지컬 넘버별로 공유 확산할 수 있는 전략을 전면화하였다. 그 결과, 당신은 지금도 <레미제라블><겨울왕국>의 뮤지컬넘버들을 흥얼거리지 않는가?

IT 강국 한국의 스토리텔링 전략을 이야기 하지말자. 디지털 문화 환경을 어떻게 적극 활용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을 기획할 것인가, 향유자별 맞춤화된 경험과 그 경험의 무한 공유를 지속-확산시킬 수 있는 스토리텔링 전략은 무엇인가, 정서적 보편성을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는 어떤 과정을 통해 구현할 수 있을까 등을 고민하자. 다시 문제는 체험, 참여, 공유의 가치 있는 즐거움이다.

<방송작가> 2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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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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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비평, 정체와 역할 그리고 변별성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이 글은 지금 이곳 만화의 변화에 적극 대응하고 선도할 수 있는 만화비평론을 구성하기 위한 시론(試論)의 성격을 지닌다. 기존의 해설중심의 의전비평, 주례사 비평이 아니라 도발적인 문제제기와 무모할 정도의 다채로운 시도를 통하여 독립적인 텍스트로서 즐길 수 있는 만화비평을 생산하고, 그 과정에서 보다 생산적이고 실천적인 형태의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 역동적인 만화담론의 장()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소란스럽고 다채로운 그래서 살아있는 만화담론을 생산하기 위한 만화비평의 시론을 도모한다.

 

 

1. 만화비평의 구조적 부재

 

다소 도발적인 문제 제기일지는 몰라도 만화비평은 부재중이다. 열정적으로 비평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비평가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만화비평은 구조화된 침묵이거나 부재다. 만화비평의 정체, 방법론, 역할 등에 대한 뚜렷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느냐/없느냐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만화비평이 신뢰할만한 매체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양적인 측면이나 질적인 측면에서 만화와 생산적인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웹툰을 포함한 만화산업 전체의 폭발적인 성장내지 변화에 비추어 본다면 만화비평의 오늘은 차라리 부재에 가깝다.

비평은 콘텐츠와 유기적인 상관속에서 긴장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그 존재 가치를 확보하며 상호 성장하는 것인데, 콘텐츠의 성장만 독주할 뿐 비평이 자기 정체나 역할을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는 어떤 관점에서도 결코 긍정하기 어려운 기형적인 양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최근 영화 등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비평의 형질 변환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겁고 진지한 분석 및 해석 중심의 비평에서 가볍고 쉬운 정보 중심의 비평으로의 전환이거나, 문자 텍스트 중심에서 비평가와 향유자의 직접 만남을 통한 비평방식의 변화이거나 또는 다양한 매체를 통한 새로운 형태의 비평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그것의 긍/부정 가치 평가를 떠나서) 비평의 부재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의 경우에는) 비평으로서의 자기 정체와 역할에 대한 변별적인 인식을 기반으로 하는 만화비평이 선행했다고 보기 어려운 현실임을 고려할 때, ‘지금 이곳에서 만화비평의 침묵은 오히려 부재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실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은 내재적 측면과 외재적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내재적 측면에서는 만화비평에 대한 변별적 자의식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과 만화비평의 토대가 되어야할 만화미학에 대한 탐구가 부족했기 때문에 만화와의 건강한 긴장관계 형성에 실패했다는 점 등을 그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아울러 외재적 측면에서는 만화비평의 생태계를 제대로 구축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전문 발표 매체와 다양한 관점과 이론적 토대를 갖춘 전문가 집단을 지속적으로 육성하고 유지하지 못함으로써 만화와의 비판적 거리 및 권위 확보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금 이곳만화산업 생태계에서 만화비평의 산업적 필요성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점이다. 판매부수로 그 가치를 평가받는 만화산업이나 클릭수나 댓글수로 대중성을 평가받고 있는 웹툰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만화비평 그 자체의 산업적 수요는 미시적 차원에서 결코 높지 않다. 더구나 다양한 플랫폼과 디바이스로 만화의 향유가 가능해짐으로써 향유가 축적되고, 그로 인한 일정 수준의 팬덤(fandom)이 형성됨으로써 향유자는 준전문가 수준의 정보와 지식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향유자들은 블로그나 SNS 등을 통하여 적극적인 형태로 작품에 대한 자유로운 품평을 다양한 차원에서 시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적극적인 형태의 향유를 통하여 비평의 저변이 넓어졌다거나 비평이 민주화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필연적으로 비평의 정체가 모호해지고 그 수준이 하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하여 가뜩이나 그 정체가 분명하지 않았던 만화비평의 정체는 더욱 혼란스러워졌고, 동시에 전문 비평가 집단의 비평에 대한 산업적 차원의 수요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만화비평의 산업적 수요는 현격하게 감소하였고, 그나마도 본격 비평을 전개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원고 분량을 요구하다보니 정치한 분석과 풍부한 해석을 기반으로 하는 심도 있는 비판이나 평가보다는 단순 정보 제공 수준의 비평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지금 이곳 만화 생태계는 이글에서 당위적으로 요구할 분명한 자의식을 지닌 비평을 굳이 요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최초의 만화비평이라고 일컬어지는 1927년 권구현의 <신문 삽화 만평>에서부터 대중문화론과 함께 주목받게 되는 1970년대 김현과 오규원의 비평을 건너 1990년대 만화비평의 대중적 확산에 이르는 과정에 주목해보면, 비평의 부재를 비판하는 현재 상황이 왜 심각한 것인지 알 수 있다. 특히 전문 잡지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양질의 텍스트가 쏟아지던 1990년대 초반을 상기해보자. 대중적인 호응과 다양한 이론적 배경을 지닌 비평가들이 대거 등장하여 (거시적 차원에서 평가해보면 문화연구라는 맥락이었지만) 각자의 관점으로 만화비평을 풍요롭게 생산했고, <스포츠 서울> 신춘문예를 통해 젊은 비평가들이 본격적으로 데뷔함으로써 비평의 황금기를 구가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많던 비평가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토록 풍성했던 관점과 해석의 지평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만화비평에 대한 접근이 단행본 한 권이나 비평 하나 정도 수준의 지속성이라면 아마추어리즘이라는 말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지속성이 보장되지 않은 외재적인 이유는 능히 추측할 수 있다. 전문적인 비평발표 매체가 부족하거나 없었다는 점, 보상이 만족스럽게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 만화비평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조금 더 냉정하게 만화비평의 내재적 측면을 생각해보자. 1990년대 비평의 황금기라고 이야기하던 그 시절이 정말 비평의 황금기였다면, 만화비평의 정체와 역할 그리고 변별적인 특성에 대한 고민이 전개되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만화비평에 대한 분명한 자의식이 전제되지 않고 생산된 비평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사라지고 난 후 만화비평은 다시 원론 수준으로 소박하게 돌아간 것은 아닐까? 더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들은 만화비평이 아니라 문화연구의 일환으로 대중문화, 하위문화의 첨병이라고 회자되는 만화를 선택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들의 비평에서 만화 장르 자체에 대한 도발적인 자의식보다는 만화를 통한 문화비평의 흔적이 더 발견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만화비평의 부재는 단지 비평가들의 비평에 대한 자의식이나 역량이 부족해서 초래된 결과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것은 오히려 만화생태계라는 거시적 차원과 만화비평생태계라는 미시적 차원의 문제가 유기적으로 얽혀있다는 점을 고려한 공시적 접근과 만화비평 역량의 축적 과정이라는 통시적 차원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만 한다. 따라서 만화비평의 부재는 현재적인 문제, 만화비평만의 문제, 비평가만의 문제가 아닌 지극히 종합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의 문제다.

 

 

2. 만화 비평의 정체와 역할 그리고 변별성

 

비평은 차가운 글 읽기따뜻한 의혹의 산물이다. ‘차가운 글 읽기란 섬세하게 작품을 읽는 데서 출발하며, 예리한 푸른 날의 칼로 마지막까지 결을 내는 분석 과정이다. 아울러 따뜻한 의혹이란 푸른 날로 조각 낸 섬세한 결들 속에서 삶의 편린들을 엮고 그 심층적 의미를 파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지금 이곳의 삶을 견제하고 성찰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과정이다. 이 두 행위 모두 텍스트에 대한 뜨거운 애정에서 비롯됨은 물론이다. 이와 같은 차갑고 따뜻한 긴장 속에서 작품의 의미 지평은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삶과의 연관은 자기 증식한다. 그러므로 비평은 텍스트와의 지속적인 대화 과정이다. 그 대화는 텍스트 안으로 스스로의 정체를 성찰하고 밖으로 다른 텍스트와 차이를 규명하여 그 가치를 가늠하고 평가하려는 노력이다. 섬세한 독법으로 꼼꼼하게 텍스트를 분석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텍스트의 깊이를 탐구하고 넓이를 확장하는 지속적인 과정인 이유다.

만화비평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만화의 변별적 특성을 바탕으로 만화비평의 역할과 상관하여 조형적(plastic)인 관점에서 그 변별성을 파악해야 한다. 만화비평의 정체라는 것이 고유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화의 형질 변화와 비평에 요구하는 역할에 따라서 조형적으로 구성해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만화비평의 정체에 대한 고민은 비평가의 만화비평에 대한 자의식의 다른 이름이다. 만화비평가의 자의식은 해당 텍스트를 비평을 해야 할 이유에서 출발하여 만화에 대한 이해와 애정 그리고 향유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기반으로, 텍스트가 놓인 컨텍스트와의 비판적 거리의 긴장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러므로 만화비평에 대한 비평가의 자의식은 지금 이곳 만화에 대한 애정 어린 의혹에서 시작하여 텍스트의 넓이와 깊이를 확보하려는 부단한 긴장이다.

만화비평의 자의식 부재가 초래한 결과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늘 게재할 수 있는 작품이나 비평해야할 작품보다 게재하고 싶어 하고 비평의 대상이 되고 싶은 작품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권위 있는 신뢰할만한 매체에 작품이 실리는 것은 그 자체로 그 작품의 우수성을 인정받는 것이며, 더구나 비평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그러한 효과를 증폭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형 포털이나 출판사의 의뢰에 의한 의전비평이나 주례사 비평은 단기적으로는 성과를 거둘지 모르겠으나 장기적으로는 비평 자체의 권위를 치명적으로 훼손시키는 얄팍한 전술이다. 이와 같이 만화비평에 대한 자의식이 없는 비평의 현재적 양상을 수렴해보면, 대부분 비평가의 관점은 은폐된 채 해설 중심으로 전개되며, 텍스트에 대한 평가가 맹목에 가까운 긍정과 칭찬으로 구성된다.

이와 같은 만화비평에 대한 자의식이 없는 비평으로 인하여 건강한 비평담론 생산이 차단되고, 텍스트에 대한 온전한 평가가 불가능해진다. 이 과정에서 비평가는 스스로 권위를 상실하게 됨으로써 정작 비평이 기능해야 할 상황에서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

1997년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 선정성 논란을 상기해보자. 작가가 필생의 역작으로 야심차게 기획했던 <천국의 신화>가 어처구니없는 선정성 논란에 휩싸였을 때, 비평은 과연 무엇을 했는가? 더구나 만화와 연관하여 가장 많은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선정성에 대한 이론적 연구나 텍스트 중심의 탐구를 통한 선제적 대응은 고사하고 그 어떤 비평도 옹호의 반대논리를 펴지 못하지 않았던가. 과연 비평이 텍스트에 대한 섬세한 읽기와 심도 있는 해석을 진행하고 제대로 된 평가를 내렸었다면, 선정성에 대한 비평의 선제적 탐구가 있었다면,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선정성이라는 소박한 기호에 치명적인 폄훼를 당했을까? 한국을 대표하는 거장이 만화의 비전문가인 20대의 새파란 검사로부터 일본만화를 베낀다는 모욕을 당하고 있었을까? 2012년 귀귀의 <열혈초등학교>가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폭력성 논란에 휩싸였을 때 그것을 적극적으로 옹호할 만큼의 만화 리터러시를 고민했던 비평이 있었는가? 비평이 제몫을 다했다면 <열혈초등학교>의 표면에 드러난 폭력성이 그 자체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고, 그 심층의 메타포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보수언론의 공격을 막아주었을 것이다. 귀귀의 B급 정서와 표현이 그만의 표현 전략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그것이 구체화된 것이 이 텍스트에 드러난 폭력의 컨텍스트였음을 읽어주었어야 했다.

새로운 미디어 플랫폼의 변화와 디바이스의 발전을 소박하게 인식하고 있다가 모바일 만화 시장을 무료화했던 2009년의 네이버 웹툰 논란을 상기해보자. 웹툰시장의 지배적인 사업자인 네이버의 일장적인 앱툰 무료화의 부당성에 대하여 비평은 무슨 의견을 제시했는가? 웹툰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무료라는 기형적인 시장구조를 만든 것도 어이없는 일이지만 심지어 앱툰시장 마저 다시 무료화하는 상황은 만화가 비평을 키우지 않으면 앞으로 또 어떤 일을 당할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2011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나 2015년 레진코믹스 사태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다른 의도로 관심을 환기시키거나 어린이를 볼모로 부모를 위협할 때, 그것의 첫 타겟이 만화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하여 비평은 생태계적 차원에서 고민해야만 한다.

만화비평의 정체는 비평 그 자체를 독립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텍스트로 인정할 때 파악 가능하다. 만화 텍스트를 원천으로 출발했고 매우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지만 만화비평은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즐길 수 있는 독자적인 것이다. 이처럼 비평이 독자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만화 자체의 문법과 대타적(對他的) 상관을 유지해야 하며, 그것을 기반으로 한 차별화 요소들을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만화는 큰 변화의 격랑 속에 놓여 있다. 유통 플랫폼, 과금체계, 디바이스의 변화에 다른 텍스트 구현 및 향유 방식의 변화가 그 변화를 주도하고 있으며, 그 결과 텍스트의 형질변화까지 이끌어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창작의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수용 변용함으로써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나는 반면 비평의 부분에서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다. 지금 이곳 만화의 급변에도 불구하고 비평의 방식이나 태도 그리고 그 메커니즘 자체가 변하지 못함으로써 비평의 지체 현상을 초래한다. 그로 인하여 대형 포털 중심의 웹툰 생태계를 추수할 뿐 웹툰에 대한 비판적 긴장을 형성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더구나 웹툰이 원천콘텐츠로서 각광을 받으면서 모든 평가 기준이 대중적 지지를 드러내는 객관적인 지표에 종속되거나 특정 타겟의 취향을 반복 재생산하는 지극히 소모적인 대중 인정투쟁 양상을 드러낸다. 웹툰 시장에 있어서 대형 포털의 권력화는 단지 원고료를 통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요구하는 취향의 인정투쟁으로부터 발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을 비판적으로 견제하기 위해서는 견실한 비평의 뒷받침이 필요한데, 지금 이곳의 비평은 전혀 그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웹툰 생태계의 기형화, 황폐화를 낳고 있다. 지속적인 위기의 수사가 식상할 정도로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그와 무관하게 위기의 양상은 오히려 노골적으로 본격화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그 주요 원인으로 등장하는 비평의 부재라는 비판은 이제는 충격적일 것도 없는 패배주의를 낳고 그만큼 그 종속도는 더욱 가중될 뿐이다. 만화담론을 활발하게 생산하고, 창작을 촉진하며 그것을 견제해야할 만화비평이 스스로의 몫을 방기함으로써 비평 자체는 물론 만화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만화비평은 부단히 변화하고 있는 만화처럼 변해야 한다. 만화가 변하듯 비평의 정체성도 그 역할에 부응할 수 있는 적극적인 변화와 구성의 노력이 필요하며, 그것의 저류에는 만화비평의 변별성을 확보하려는 의지가 흘러야 한다. 만화비평의 변별성은 만화와 비평의 기계적이 교합이 아니라 만화와 비평이 대타적 긴장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구성하고 발견해 나가야할 무엇이다. 왜곡의 미학, 시간과 공간의 상호교차적 대치, 칸사이의 호흡, 글과 그림의 이코노텍스트, 분절의 연속화에 기반한 서사 구성 등과 같은 만화미학의 기본 요소들은 지속적인 변화의 도정(道程) 위에 있다.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살아있다는 말이다. 만화가 살아있듯 만화비평도 살아있기 위해서는 분명한 자의식을 기반으로 만화와의 생산적인 긴장을 확보해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지금 여기 만화비평의 변별성은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3. 만화 비평, 담론의 장을 키우자

 

건강한 만화비평의 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만화비평 담론(discourse)의 장을 구현해야만 한다. 만화비평 담론은 만화미학과 비평윤리의 결합이 빚어낼 수 있는 역동적인 창의성에서 출발한다. 푸코식으로 표현하자면 담론은 특정 대상이나 개념에 대한 지식을 생성시킴으로써 현실에 관한 설명을 산출하는 언표들의 응집력 있는 자기지시적인 집합체이다. 언표와 규칙의 집합체인 담론은 역사적으로 존재하며 물리적 조건에 따라 변화하며, 그것은 개인들 간의 교환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익명성의 층위에 존재한다. 따라서 만화담론은 기존의 존재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구성에 가까우며 만화비평 담론은 만화담론에 기반한 비평담론을 창의적 결합으로 구성해내야 한다. 건강한 담론이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는 역동적인 충돌과 갈등과정에서 만들어진다고 할 때, 만화비평 담론은 신/, 지배/종속, 올드미디어/뉴미디어, 보수/진보, 존재/당위, /그림, 과장/축소 등과 같은 만화담론의 역동적인 대립쌍들이 비평담론과 화학적 결합과정에서 벌어지는 논란과 논쟁, 승인과 거부, 출현과 사라짐 등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 특히 후기자본주의적 시장질서와 뉴미디어의 상보적 결합이라는 시대의 특성을 적극 반영하려는 전략이 담론의 장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될 수 있는지 진지한 관찰을 통해 모색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지배소로 등장하게 될 향유의 활성화를 전략역시 만화비평의 영역에 망설임 없이 넣어야할 부분이다.

만화비평은 비평이 그렇듯 다양한 요소들이 다양한 층위에서 만나서 비평의 장()을 이룬다. 구현 매체, 유통 플랫폼, 장르분법, 지배적 언어, 사회문화적 공인과지지, 사회적/경제적 보상 등이 다양한 조합으로 결합하며, 비평의 성격에 따라서 구성 요소나 층위를 결정한다. 특히 전제 한 바와 같이 만화의 특성을 전략적으로 선택함으로써 만화비평 스스로의 정체와 역할을 구성하고 이를 통해 변별성을 확보한다.

만화비평의 담론은 만화에 대한 비판과 담론 생산은 물론 특정 사안의 첨병이거나 수호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다양한 맥락과 이론을 수렴해야 한다. 만화담론을 선도하거나 자극에 대한 선제적 대응에 필요한 요소들을 창발적으로 수렴함으로써 현재적 문제는 물론 예견된 갈등에 적극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만화의 현재적 고민은 다양하다. 새롭게 급부상하여 시장지배자로 군림하려는 웹툰과 관련되어서는 그것의 정체와 지향 그리고 기존의 만화와의 차별성 확보, 앱툰과의 변별,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Transmedia Storytelling)의 중심 매개로서의 역할 등은 물론 건강한 생태계 구성을 위한 모색 등이 그것이다. 또한 최근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는 그래픽 노블역시 웹툰과 같은 모색과 탐구의 짐을 지고 있다. 이와 같이 만화를 둘러싼 고민들은 텍스트를 중심으로 한 내재적/외재적 양상으로 드러나고, 텍스트의 완성도뿐만 아니라 콘텐츠로서의 시장 가치 및 확대 방안 등이 모두 포함되는 매우 다양한 양상을 드러낸다. 따라서 만화비평 역시 이러한 다양성에 부응하거나 선도할 수 있는 담론을 포괄해야 한다. 적어도 만화비평이 활성화되고 보다 생산적인 양상으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배제의 시학이 아니라 포괄의 시학에 기반한 수렴적인 담론체계를 지행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만화비평은 만화에 최적화된 비평 방식을 지속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비평이 대상이 다르면 비평의 언어도 달라져야 하고, 무엇보다 개개의 비평은 비평 대상이 되는 콘텐츠의 특성에 최적화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문자 텍스트 중심의 비평은 문학의 것을 빌려온 것 뿐이다. 영화는 최근 문자 텍스트 중심의 비평보다 구술언어 중심 현장전달 중심의 비평이 각광받고 있는데, 이것은 매스미디어의 학습효과를 기반으로 한 것이며, 팟캐스트와 같은 뉴미디어의 부상에 기민하게 대응한 결과다. 가장 산업화된 영화의 발빠른 행보 역시 그들의 생존을 위한 최적화 전략에 다른 아니다. 그러므로 만화와 같은 흥미로운 텍스트를 딱딱하고 무거운 문자중심의 비평으로 한정하는 것은 우울한 일이다. 텍스트에 대한 접근성, 공감의 보편성, 이해의 용이성 등이 어느 무엇보다 높은 만화의 특성에 걸 맞는 새로운 비평방식을 탐구해야함은 물론이다. 만화의 즐거움을 분쇄시키는 비평은 어떤 이유로도 온당하지 못하다. 만화가 즐겁듯 비평도 즐거울 수 있는 독립적인 즐거움 창출이라는 전제로 지속적인 모색이 필요한 이유다.

만화비평의 방법론으로 수렴할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가장 젊은 장르지만 가장 강력한 장르가 된 영화가 강한 이유는 수렴중심의 개방체계에 있다. 경쟁력 있고 소구력 있는 방법은 모두 창조적으로 수렴함으로써 자기화하는 영화의 전략에 주목해보면, 만화비평도 활용가능한 방법론들을 개방적으로 수렴하여 그 적실성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 문화 일반의 보편적 방법론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기존의 역사주의, 형식주의, 마르크스주의, 구조주의, 기호학, 탈구조주의, 실리주의, 독자중심, 페미니즘 등등 텍스트를 풍성하게 하고 심도를 확보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론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만화미학 안에서 통합시켜낼 수 있느냐의 문제는 이제부터 집요하게 탐구해야할 부분이다.

만화비평에 대한 자의식을 구성하고, 이를 토대로 정체와 역할을 모색하고 이를 통해 변별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은 다분히 당위적 요구에 가깝다. 실천의 구체적인 방안과 전략은 이제부터 실천을 통해 고민할 바다. 이제 시작이다.


2015년 <크리틱M>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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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융합의 즐거운 무한증식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방탄소년단,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웹드라마 <두 여자>, <상사3>, <미생>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가장 큰 공통점 구현 미디어, 플랫폼, 장르, 언어, 팬덤 형성 방식, 수익구조 등 그동안 독립적인 콘텐츠의 고유성을 결정 짓던 주요 요소들을 가로지르는 과감한 융합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콘텐츠 융합은 콘텐츠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지속적으로 확장하기 위한 시도다. 따라서 융합의 시도는 매우 유연하고 개방적인 차원에서 다양하게 모색될 수 있다. 장르, 미디어, 플랫폼, 구현 기술 등 지금까지 콘텐츠의 고유한 정체와 위상을 규정 짓던 요소들의 경계를 허물고, 콘텐츠가 보다 많은 가치를 보다 오랫동안 창출할 수 있도록 개방적 증식을 지향하는 것이다.


콘텐츠 융합은 네트워크성, 상호작용성, 정보의 통합성이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디지털 문화환경이 콘텐츠 생산과 향유에 있어서 완전히 내재화되었다는 점, 이로 인한 다양한 플랫폼이 급부상하면서 차별적인 콘텐츠 구현을 위한 전략적 탐색이 적극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 새로운 플랫폼과 유통 채널에 최적화된 수익 모델 탐색이 시도되고 있다는 점과 같이 다양한 관점과 차원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원인의 다양성만큼이나 융합의 양상도 매우 다양하며, 현재도 지속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융합이 시도되고 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처럼 기존에 제작사가 확보하고 있는 캐릭터를 활용하여 트랜스미디어 스토리월드 구축이라는 대전제로 수렴하거나, 방탄소년단처럼 ‘Everything is connected!’라 주장하며 소셜 파워(social power)를 기반으로 다른 장르와 영역에서 시도되었던 콘텐츠 노출 및 전개 방식, 스타덤 및 팬덤 전략 등의 유연한 조형을 드러내거나, 웹드라마 기반의 콘텐티브 브랜드를 구현을 시도하거나, <미생>처럼 비동기식 전개로 트랜스미디어 스토리월드를 구현하는 등의 사례만 보아도 융합의 다양한 양상은 한 마디로 확정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와 같이 콘텐츠 융합의 배경이나 양상은 매우 다양하고 다분히 조형적이지만, 융합의 동기는 분명하다. 콘텐츠 융합은 가치 있는 즐거운 체험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트랜스미디어 스토리월드를 구축함으로써 콘텐츠에 대한 만족도 및 충성도를 높이고, 여타 콘텐츠에 비해 차별적 우위를 확보하여 수익을 지속적으로 극대화하기 위한 능동적인 노력이다. 따라서 콘텐츠 융합에서는 기존의 각 장르나 영역이 고수해왔던 고유성은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유를 논리적 배경으로 디지털 문화환경 그리고 콘텐츠 생태계의 역동적 경쟁체제가 함께 어우러짐으로써 창작자, 원작, 독립성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 향유자, 스토리월드, 연결성 중심의 융합의 시도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콘텐츠 융합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디즈니에 의해 42억 달러에 인수된 마블은 단지 만화회사가 아니다. 마블은 확실한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5,000여개의 캐릭터를 보유했고, 그들을 창조적으로 수렴하여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Marvel Cinematic Universe, MCU)라는 트랜스미디어 스토리월드 구축에 성공하였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월드를 구축하여 향유자가 스스로 참여하고 체험할 수 있는 놀이터를 제공함으로써 콘텐츠 수명의 지속적 연장이 가능해졌고, 새로운 콘텐츠의 등장, 이에 따른 수익의 극대화를 꾀할 수 있게 되었다.

방탄소년단은 더욱 놀라운 융합의 사례다. 방탄소년단은 직접 음악을 창작함으로써 그들은 음악을 통해 본인들의 생각이나 이야기를 전달하며, 동시에 그들은 SNS나 다양한 플랫폼으로 통하여 팬들과 직접 소통하는 전략을 취했다. 더구나 그들의 음악의 주제는 동시대, 동세대의 고민을 나누는 내용이 중심으로 이룸으로써 팬들은 방탄소년단과 자신들의 고민을 나누고 있다는 강한 심리적 연대를 형성하게 됨으로서 더욱 강력한 팬덤을 형성할 수 있었다. 방탄소년단은 트위터 최다 활동 남성그룹 부문기네스 세계기록에 오를 정도로 그들은 SNS를 적극 활용하며, 데뷔 전부터 자신들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믹스테잎, 영상, 사진 등을 올리며 팬들과 소통을 시도했다. 가상의 방송국을 개설하여 멤버들이 직접 다양한 포맷의 TV 프로그램에 도전하거나 Mnet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방탄소년단의 아메리칸 허슬 라이프>을 통해 자신들을 지속적으로 노출시킨 것도 그러한 전략의 일환이었다. 그들은 음악과 SNS 그리고 다양한 플랫폼을 가로지르는 전방위적 융합을 시도함으로써 방탄소년단 고유의 스토리월드를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최근에 주목해야할 콘텐츠 융합은 웹드라마와 같은 새로운 장르에서의 시도다. 구현 미디어와 플랫폼의 변화에 따라 형질 변환에 성공한 웹드라마의 약진에도 불구하고, 빈약한 수익구조가 항상 한계로 지적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최근 이러한 한계를 해소하기 위하여 콘텐티드 브랜드전략을 시도하는데, 72TV의 인기 웹드라마 <두 여자>의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한 dxyz 브랜드로의 확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웹드라마의 브랜드 파워를 전면화한 새로운 브랜드를 창출하고, 그와 관련된 콘텐츠는 물론 다양한 파생 상품들로 수익을 창출하는 전략이다. 그 외에도 마블처럼 고유의 원천 IP 콘텐츠를 활용한 콘텐츠 프렌차이즈화를 시도한다거나, KBS가 시도했던 <간서치열전>처럼 웹드라마와 TV드라마의 상생적 결합 방식도 시도된 바 있다. 무엇보다 웹드라마의 케주얼한 특성을 극대화한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구현 시도나 트랜스미디어 스토리월드 구축의 노력은 주목할 만하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은 향유를 지속, 강화, 확산하기 위하여 복수의 매체와 장르를 가로질러 스토리월드를 확장적으로 구축해나가는 스토리텔링 전략 혹은 그러한 세계를 의미한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의 전개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구축/증식하는 스토리세계를 트랜스미디어 스토리월드라고 부른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월드는 다수의 매체와 장르 전개 과정을 통하여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확충하는 현재진행형의 증식성과 개방성을 지향한다. 개별 미디어와 장르를 통해서 자족적인 형태의 콘텐츠로 창작되지만 그것은 보다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세계로서 스토리월드의 구성요소로서 기능하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텐츠 융합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전략적 선택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양질의 콘텐츠인데, 그 중심에 가치 있는 즐거운 체험의 지속적 창출, 즉 향유가 있다. 융합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향유의 놀이터를 마련하는 현재적 대압이 융합에 있다는 점에 주목할 일이다.

 

<콘텐츠 경북> 2018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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