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일과 해야 만할 일 사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은 늘 꼭 해야 하는 일에 밀리고 만다. 게다가 하고 싶은 일이 지금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냐고까지 물으면, 그것의 우선순위는 더 뒤로 밀리고 만다. 그래서인지 나이가 들수록 하고 싶은 일은 그저 하고 싶은 일로만 남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구나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나 해야만 할 일의 이유가 자신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나 주변 환경과 관계된 일이다보면, 하고 싶은 일은 말 그대로 하고 싶은 일일 뿐이다.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려 밤낮 없이 뛰면서 스스로 열심히 산다고 자부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다. 잘 살기 위해서는 물론 열심히 살아야 하지만, 열심히 살았다는 말이 잘 살았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매순간 숨이 턱에 차오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더 열심히 달려야 한다고 스스로를 몰아세우며 또 달릴 뿐이었다. 돌아보면, 왜 그렇게 죽기 살기로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지, 왜 그토록 일에만 매달려야하는지, 가족들과 잘 살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했지만 정작 가족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심지어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늘 잘 사는 것은 현재를 희생해서 막연한 내일을 기약하는 기만에 가까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저 열심히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믿으며 스스로를 몰아세우기에 급급했다.

늘 해야만 할 일은 하고 싶은 일보다 많았고 갈급했다. 가족들은 늘 양해의 대상이었다. 아침에 연구실에 출근하면 밤 10시가 넘어서 연구실을 나서는 일상이었다. 토요일에도 강의 때문에 밤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일요일에도 논문과 원고 핑계로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방학이 되면 방학이기 때문에 해야만 할 일들이 기다렸다. 하루하루가 빈틈없이 돌아가고, 그렇게 한 주가 한 달이 되고, 한 해가 갔다. 하지만 그냥 해만 간 것은 아니었다. 그 사이 아이들은 아빠의 시간과 상관없이 부지런히 컸고, 그 뒷바라지는 오롯이 아내 혼자의 몫이었다. 게다가 몇 해 전부터인가 몸은 내게 지속적으로 적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대상포진, 결석, 고지혈증 등으로 강도를 높여가며 경고하는 몸을 약으로 다스려왔지만, 몸도 마음도 지쳐가고 있었다. 이렇게 해야만 할 일에 가려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었는지도 희미해질 무렵 연구년이 찾아왔다.

연구년이라고 해야만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과감하게 모든 것을 접기로 했다. 지금 아니면 할 수 없을 것이 너무도 많았다. 첫째가 중학교 3학년에, 둘째가 초등학교 5학년에 올라가고 있었기 때문에 자칫 시기를 놓치면 아이들 학교문제로 연구년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내게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문화콘텐츠 환경을 밖에서 살펴보아야할 시간이 아주 절실했다. 다행스럽게도 미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중심인 LA와 인접한 얼바인(Irvine)에 있는 UCI(University of California, Irvine)로 갈 수 있었다.

출발 전날 보고서 때문에 밤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나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인천공항으로 가는 길에 내리던 눈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생각만 어지럽게 흩날렸다. 일 년 동안 해야만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은 화수분처럼 솟아오르는데 과연 그 둘을 모두 잘 해낼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집을 구하고, 아이들 학교를 배정받고, 은행 계좌를 만들고, 간단한 가구를 구하고, 미국 운전면허를 따는 등 생활의 기본적인 요소들이 어느 정도 갖춰지자, 나는 UCI에서 마련해준 연구실에 규칙적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집필 중인 책의 원고를 써야했고, 연구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으며, 그동안 관심 있던 분야의 자료들을 찾아서 정리해야만 했다. 해야만 할 일의 관성이 어느새 한국에 있을 때와 똑같은 생활을 강요하고 있었다. 아내의 말처럼 그럴 거면 뭐 하러 미국까지 왔단 말인가?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연구년을 지내는 동안 하고 싶은 일해야만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과감하게 지금 이곳에서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들을 하자고 마음먹었다.

미국에서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은 큰 것이 아니다. 조금 일찍 집으로 돌아와 저녁 준비를 함께하고, 주말이면 아내와 같이 장을 보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오고 반납하고, 규칙적으로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피트니스센터에 가서 운동하고, 시간 날 때마다 근처에서 가볼만한 곳을 가족들과 찾아다니는 것만으로도 모두들 즐거워했다. 그러는 사이 날씨 변화가 거의 없는 얼바인에도 봄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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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란의 매혹 혹은 매혹의 광란

- 라스베이거스(219~21)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솔이네[각주:1]는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아이들 학교가 시작되면 시간이 없으니 그전에 여행을 많이 다녀야 한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야기를 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막막해하다가 그의 말처럼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시작하자 아이들 시간 때문에 여행은 더욱 어려워지고 말았다. 그러던 중 프레지던트 데이(President Day)[각주:2]가 돌아와 자연스럽게 219일부터 21일까지 연휴가 되었다. 마침 연구보고서를 하나 마무리 한 시기였고, 더 이상 여행을 미루다가는 집에서 안위를 보장받을 수 없는 분위기라서 첫 번째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첫 번째 여행지를 라스베이거스로 정한 것은 주어진 시간이 짧았고, 별도의 계획을 가지지 않더라도 공연을 비롯한 다양한 엔터테인먼트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물론 그 사이 당일코스로 LA, 샌디에이고 등의 도시를 다녀오거나 집근처의 라구나비치, 뉴포트비치, 디즈니랜드 등을 다녀오기는 했지만, 숙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들은 라스베이거스 여행을 첫 여행이라고 여겼다.

라스베이거스는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얼바인에서 동쪽으로 조금 멀리 움직이려면 대부분 라스베이거스를 거쳐 가야만 한다. 얼바인에서 라스베이거스까지는 승용차로 4시간 3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4시간 30분을 가까운 거리라고 쓰는 것은 이 정도 거리는 미국에서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8-9시간 운전은 보통이니 4시간 30분은 가까운 거리가 아니겠는가? 물론 한국에서였다면 분당집에서 부산쯤 가는 시간이니 결코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그래서였는지 여행 중에 장시간 운전으로 지루해지면, 남은 거리를 보고 대구쯤 남았다”, “이제 대전에서 출발하는 거야!”, “부산까지 왕복하면 되는 거리야!” 등으로 혼잣말하듯 가족들을 위로하고는 했다. 신기하게도 그러면 그 막막하고 지루한 길이 견딜만해지곤 했다.

라스베이거스는 집과의 거리도 거리였지만, 말로만 듣던 세계적인 수준의 호텔이나 그들의 도박 문화 그리고 화려한 쇼를 보고 싶은 욕심이 컸다. 더구나 라스베이거스는 아내가 좋아하던 <CSI: 라스베이거스>의 그리섬 반장이 활약하는 곳이고, 강의 시간에 자주 활용하는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Leaving Las Vegas, 1995)의 배경이 되는 지독한 욕망의 도시가 아니던가? 다만 걱정스러웠던 것은 아이들에게 이 메마른 도시에서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라스베이거스에는 가족 관광객들을 위한 쇼 프로그램이 아주 풍성했다. 각종 유료공연뿐만 아니라 호텔별로 프로모션을 위해 준비했다는 무료공연까지, 경비와 시간의 문제였지 콘텐츠는 풍요롭기 그지없었다.

숙소로 정한 몬테카를로 호텔은 기대만 못했다. 연휴 기간이어서 평소보다 비싼 가격도 가격이었지만, 무엇보다 <오션스 일레븐>(Ocean's Eleven, 2001)과 같은 할리우드 영화들이 보여주었던 화려한 이미지의 숙소가 아니었다.[각주:3] 물론 같은 이치로 우리 가족 역시 그러한 영화에 등장하는 백만장자는 아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다행스러운 것은 다른 호텔에 비해서는 조용하고 카지노도 번잡스럽지 않았다. 저녁을 먹기 위해 내려간 뷔페는 소박했다. 여행안내 책자에 가볼만한 곳으로 소개된 뷔페였는데 음식 종류나 수준은 실망스럽기만 했다. 가족들 모두 라스베이거스 뷔페에 앉아서 분당집 주변의 뷔페를 그리워하고 있었으니 웃지 못 할 풍경이었다.

라스베이거스의 유명한 3대 쇼[각주:4] 중에서 비교적 저렴한 <KA> 공연을 예약하고, 라스베이거스 스트립(Strip)을 중심으로 늘어선 호텔들을 구경하며 볼만한 무료공연의 스케줄을 확인해서 동선을 짜서 돌았다. 호텔과 뷔페는 기대만 못했지만, 호텔 어느 곳을 가든 카지노를 거쳐야 하는 동선 통제와 자연스럽게 도박을 권하는 다양한 전략은 눈여겨 볼만했다. 미성년자는 카지노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그곳을 거치지 않고는 뷔페를 갈 수도 없었고, 쇼를 보러 갈 수도 없었다. 그러니 아이들이 지나다녀도 별다른 제지는 없었지만, 도박을 하는 테이블 가까이 가면 직원들이 나이를 물으며 제지했다. 하지만 슬롯머신이나 도박 테이블 사이로 이동해야지만 식사나 쇼 관람을 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제지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드러내고 감추고, 허용하면서 금지하는 이중적인 성격의 공간이었다.

<KA>쇼는 무대 장치쇼에 가까웠다. 태양의 서커스단이 보여주는 아크로바틱한 연기도 연기였지만 무대가 수직으로 서면서 엄청난 양의 모래가 바닥으로 떨어지거나, 이층으로 분리되거나, 앞뒤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무대장치의 효과적인 활용은 압도적이었다.[각주:5]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관객으로 찾아오니 대사가 중심이 되거나 심도 있는 갈등의 전개는 어려웠을 것이고, 결국 기예와 무대장치의 스펙터클이 중심이 되는 넌버벌(nonverbal) 공연으로 갈 수밖에 없었으리라. <KA> 공연 내내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은 좋은 콘텐츠의 개발과 그것의 장기 공연을 위한 전용관의 문제, 더불어 지속적으로 관객을 소구할 수 있는 장소성 개발 등의 문제였다. 공연이 끝나고 나오면서 직원에게 객석의 규모를 물었더니 2,000석이 넘는단다. 하루 2회 공연에 우리가 구입했던 입장권이 제일 저렴한 것이었는데 77달러였고, 제일 좋은 좌석은 우리 것의 2배 가까운 금액이었으니 얼추 하루 수익을 계산할 수 있었다. 상설 공연으로 무대장치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가능할 것이고, 공연 연습 과정에서 배우들에게 투입되는 고정비용을 줄일 수 있고, 가족단위 카지노 방문객들에게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다는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있었다.

라스베이거스의 야경과 벨라지오 호텔의 분수쇼. 벨라지오 호텔의 분수쇼는 디즈니랜드의 <World of Color>에 비하면 소박했지만 수준과 규모가 결코 만만한 쇼는 아니었다.

라스베이거스는 도박을 중심으로 한 도시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을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하여 각종 엔터테인먼트를 유치하고 개발함으로써 매혹적인 도시를 만들었다. 사실 미국 전역에 카지노 없는 곳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황량한 사막까지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유는 도박만큼이나 압도적인 다양한 즐길 거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도박, 공연, 컨벤션, 쇼핑, 휴식, 놀이 등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도록 구성해놓은 도시 전체가 폐장하지 않는 테마파크였다.

라스베이거스 스트립을 중심으로 차별화된 테마로 꾸며 놓은 호텔들만 돌아보아도 하루가 모자랐다. 더구나 호텔별로 자신들의 테마에 맞는 무료쇼를 시간별로 보여주고 있어서 도시 전체가 유기적으로 구성된 하나의 콘텐츠였다. 아내가 시간대별로 무료쇼의 스케줄을 메모해둔 덕분에 그것에 맞추어 호텔들을 둘러보고, 대표적인 쇼들을 가급적 많이 보려고 부지런히 다녔다. 물론 무료쇼가 세계적인 수준의 유료쇼를 압도할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길을 가다가 잠시 발길을 멈추고 둘러볼만한 수준은 이미 넘어 선 것들이었다.

라스베이거스를 스트립을 중심으로 둘러보면서 우리는 다소 아쉬워하고 있었다. 테마별로 차별화하기 위해 꾸며 놓은 호텔 외관이나 소품들이 다소 경박하고 저렴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외관만 놓고 평한다면, 조악하게 흉내내놓은 질 낮은 테마파크를 보는 느낌이었다. 더구나 화려한 네온사인과 소란스러운 음악과 낯 뜨거운 호객 그리고 미국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취객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리의 혼잡과 광란도 긍정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스트립의 호텔들을 둘러보다가 프리몬트 스트리트 익스피어리언스’(Fremont Street Experience)를 보기위해서 다운타운으로 갔다. ‘프리몬트 스트리트 익스피어리언스460m 길이의 아케이드 천장에 1,600만개의 LED55만 와트의 음향기기가 어우러지는 쇼인데 라스베이거스에 가면 꼭 보아야할 쇼이다. 우리는 다른 곳을 둘러보다 마지막 공연을 보러갔는데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서 헤매다가 결국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아쉬웠지만 다음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지나치게 욕심을 내서 조금 더 많이 보려다가 정작 꼭 봐야할 것을 놓친 경우였다.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보느냐가 아니라 꼭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싶은 만큼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항상 과욕이 문제다.

라스베이거스의 호텔 숙박료는 시설 대비 매우 저렴한 편이다. 평일에 방문하면 일반적인 인(Inn)보다도 싼 경우를 흔하게 만날 수 있다. 저렴한 숙소를 제공하고 세계적인 공연을 유치하여 사람들을 불러 모은 후에는 카지노로 수익을 내는 전략이다. 그런 이유로 카지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모든 것이 카지노를 중심으로 짜여 있다. 도시 전체에서 놀라운 동선 통제와 시간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단 카지노에 들어서면 의지가 아주 굳은 사람이 아니라면 나갈 때에는 지갑을 비워주고 나가야만 하는 구조였다. 그래서인지 아침을 먹으러 가다보면 밤샘을 한 얼굴로 마지막 남은 얼마 안 되는 돈을 슬롯머신에 밀어 넣고 신경질적으로 버튼을 눌러대는 사람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 옆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똑같은 표정으로 돌아다니며 주류와 음료수를 가져다주는 아가씨의 표정은 야속하리만치 평온했다.

라스베이거스 주변에 위치한 명품 아울렛 역시 이 도시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매혹적인 브랜드의 공습이라는 표현 외에는 딱히 다르게 표현할 수 없는 공간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고, 들어서는 곳마다 세일에 세일을 더해주고 있었다. 필요해서가 아니라 사지 않고서는 견디기 어려운 욕망이 차고 흘러 넘쳤다. 욕망하는 모든 것들의 끝을 보려는 듯 매혹은 광란이 되고, 광란은 다시 매혹이 되어 무엇을 즐기고 있는지조차 잊게 되는 도시였다.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에서 알코올중독자인 벤이 왜 이곳에서 죽으려했는지, 거리의 여자인 세라가 왜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상처 있는 남자들의 위안이 되려하는지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 도시는 콘텐츠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둘러보아야할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매혹의 요소나 몰입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통제를 통해 자연스럽게 즐기게 만드는 스토리텔링 전략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광란의 매혹과 매혹의 광란을 이토록 집약적으로 동시에 체험할 공간은 라스베이거스밖에는 없는 까닭이다. 우리 과 학생들이 자꾸 생각나는 이유였다.

 

  1. 솔이네는 내 연구년보다 UCLA방문학자로 6개월 먼저 얼바인에 와 있다가 먼저 귀국한 박사과정 제자 가족을 말한다. 솔이네는 우리가 미국에 안착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집을 구하는 일에서부터 은행계좌를 만들고 운전면허를 따는 일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솔이 아빠는 이미 스케줄을 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지 선정에서부터 좀 더 저렴한 숙소 예약 방법 등을 소상히 알려주고, 자신이 다녀온 곳들은 자신이 짜놓았던 여행 스케줄을 미리 제공해주어, 우리 여행이 실수 없이 효과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안내해 주었다. 제자인 솔이 아빠뿐만 아니라 솔이 엄마 역시 늘 넘치는 사랑과 정으로 우리를 위로해주고 도와주었다. 외로울라치면 자신의 집으로 초대를 하거나 우리 집으로 달려오던 솔이네가 있어서 낯선 곳에서의 시간을 외롭지 않고 따듯하게 보낼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본문으로]
  2. Presidents Day(Presidents' Day로도 표기함)는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과 16대 대통령인 아브라함 링컨을 기리기 위해 1980년대 중반에 제정한 날이다. Presidents Day는 2월 셋째 주 월요일로 원래는 조지 워싱턴의 생일(2월 22일)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는데, 머리 좋은 미국사람들 셋째 주 월요일로 정하여 자연스럽게 연휴를 만들어버렸다. 연휴만 만든 것이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 대규모 세일이 이루어지는 쇼핑의 광풍이 부는 시기기도 하다. [본문으로]
  3. 이후에도 라스베이거스에 몇 차례 더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뉴욕뉴욕, 엑스칼리버, 베네치아 등에서 숙박을 했었는데, 베네치아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웠지만 다소 비쌌고, 뉴욕뉴욕은 모던하고 깔끔했는데 다만 카지노가 지나치게 혼잡스러웠다. 엑스칼리버는 가격이 저렴했던 만큼 최악의 호텔이었다. [본문으로]
  4. 일반적으로 라스베이거스 3대 쇼라고 말하는 것은 MGM그랜드 호텔의 쇼, 벨라지오 호텔의 쇼, 윈 호텔의 쇼이다. 미국에서의 쇼핑이 대부분 그렇듯, 제값을 다주고 하는 경우는 드물다. 라스베이거스 쇼 역시 미리 할수록 저렴하게 관람할 수 있다. 인터넷에 라스베이거스 쇼 티켓 관련 사이트를 찾아서 가장 저렴한 것을 택하면 된다. 가급적 미국 현지 사이트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본문으로]
  5. 나중에 다른 기회에 벨라지오 호텔의 쇼를 보았는데 무대 장치와 연기의 유기적인 조화가 경탄스러울 정도였다. 짧은 시간 안에 물과 무대장치를 이용한 역동적인 연기는 보는 내내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쇼에 비하면 쇼는 소박한 수준이었지만, 쇼를 보기 전에 쇼를 보았기 때문에 그 놀라움은 대단한 것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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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야할 길이 있는 당신은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횡단여행 경유지마다 가져온 냉장고 자석. 귀국 후에 보니 냉장고표면이 플라스틱이어서 붙이지 못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짐


먼 길을 오랫동안 다녀왔다. 막연한 기대와 성취 사이를 오가며 되풀이해서 가슴으로 꿈꾸던 길이었다. 정작 떠날 때에는 그 모든 것을 집에 두고 떠났다. 가능한 조건보다는 불가능한 여건이 더 많았던 길이었기에 그저 떠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신기하고 고맙게도 그 낯설고 험한 길을 떠나면서도 막연한 두려움조차 없었다. 그저 가족이 함께 먼 길을 떠난다는 가벼운 흥분만 데리고 갈 수 있었다. 무모했지만 고마운 일이었다.

바라기는 걸어서 횡단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아내와 딸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점에서 애초에 불가능한 희망이었다. 시애틀에서 얼바인까지 자전거로 여행을 하겠다는 제시카의 말에 부러워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도 우리의 몫은 아니었다. 기차나 비행기로는 구석구석 보고 싶은 것을 다 볼 수 없을뿐더러 시간에 구애가 너무 컸다. 장시간 운전의 피로만 넘어설 수 있다면 자동차는 기동력과 독립성 면에서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다. 다만 자동차의 속도는 우리들 욕심과 항상 비례하는 것이어서 스스로 다스리지 않으면 여행이 아닌 이동이 될 수 있기에 경계가 필요했다.

여행자에게 허투루 지나칠 것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길이 데려다 준 곳곳마다 눈을 주고 마음을 빼앗겨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계획에 없던 것에 넋을 놓다가 계획했던 것을 놓치기도 했다. 하지만 길 위에 꼭 보아야할 것은 어디 있으며 우연히 만나는 것은 또 어디 있으랴. 만나야할 것은 만나야할 곳에서는 만나는 것이고, 단지 그 모든 것들이 길 위에 있다는 사실에 가슴 설렐 뿐이었다.

횡단 여행 내내 아이들이 아내와 나와 같이 나이를 먹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일은 쓸쓸했고, 기뻤다. 분만실에서 갓 나온 첫째와 둘째의 모습을 보며 울컥거렸던 기억이 아직도 새로운데, 아이들은 제 몫의 시간을 잘 데리고 아빠의 예상보다 더 빨리 더 멀리 나와 있었다. 아이들은 새로운 언어를 구사하고, 낯설고 깜찍한 표정을 짓고, 충만한 기쁨으로 나이테를 하나둘 품어왔건만, 내게 아이들은 아직 보호해야할 어린 새순들이었다. 그렇게 아이들의 시간을 정지시켜놓고 바라보기만 하던 내게 횡단 여행은 아이들의 제 나이를 돌려주었다. 그렇게 제 나이의 아이들을 보는 일은 대견하고 기쁜 일이었지만 유진과 효진의 어린 시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더할 수 없이 쓸쓸한 일이었다. 아이들의 얼굴에서 그 나이 때 내 모습을 자꾸 떠올렸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힘들 때마다 지금 내 나이 때를 건너시던 아버지 모습을 상기하며 위안을 삼는 것과도 닮은 듯 어긋난 맥락이리라.

자동차는 지극히 독립적인 공간이어서 오롯이 우리 가족만의 이야기가 되고, 위안이 되어주었다. 폭염은 우리 차를 따라오지 못했고, 사막의 열기도 차 안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이따금 스텝의 회오리바람이 옆에서 위협했지만 두렵기보다는 신기할 뿐이었다. 차창에 부딪혀 횡사한 작은 날벌레를 주기적으로 닦아내야 했지만 그것도 앞으로 달리던 차의 시야를 가리지는 못했다. 며칠을 달려도 지평선은 또 다른 지평선을 보여줄 뿐 그 너머를 보여주지 않았다. 척박한 대지 위로 불모의 바람이 불기도 했지만 그 때에도 예외 없이 하늘은 압도적인 코발트빛이거나 스카이블루였다. 그런 풍경을 보며 몇 시간씩 달리다보면 어느새 길 위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고 소리조차 슬며시 사라져버렸다. 모든 것이 사라지면 오롯이 차 안의 가족들만 남았다.

떠나는 곳과 돌아오는 곳이 같지 않은 출발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낭만적 유목을 꿈꾸지 못하는 이유다. 일상의 평온과 성실을 사랑하는 소시민으로서 여행의 달콤한 일탈을 희망할 뿐이지, 일상을 폐기하는 일탈은 감히 꿈꾸지 못한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희망하지 않는다.

여행을 정리하며 돌아보니 우리의 횡단여행은 우리다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것은 애초에 후지와라 신야(藤原新也)처럼 철학적 방랑이거나, 한비야처럼 자기 확신의 자유이거나, 김훈처럼 풍경을 압도하는 은륜(銀輪)의 언어이거나, 이병률처럼 따듯하고 명징한 감성이거나, 성석제처럼 유쾌한 의뭉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주어진 시간 안에 보고 싶은 것들을 명분이나 목표에 구속되지 않고 돌아본 소박한 길이었다. 언제나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이 부족한 우리 가족에게는 가는 곳마다 새롭고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오히려 모든 길이 고단한 기쁨이 되었다.

길이 매력적인 것은 그곳에 우연과 돌발이 있기 때문이다. 계획할 수는 있으나 확신할 수는 없는 어긋남의 연속, 그 어긋남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여행이다. 길의 곳곳에서 도사리고 있는 돌발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 있을 때 여행은 자유가 된다. 그러한 이유로 우연과 돌발을 잠재운 길은 결코 여행이 될 수 없다. 하여 여행은 길을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길이 나를 데려가야 하는 것이다. 길이 데려가는 길 위에서 새로움과 변화의 자신을 만나는 일, 그것이 여행이다. 그래서 여행은 유연하고 부드럽고 넉넉하다. 여행은 분리나 경계의 단단함보다는 포괄과 탈경계의 유연함과 부드러움을 꿈꾸기 때문이다.

떠나야할 길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고단한 일상에서 기진한 모습으로 황폐해진 나를 꾸역꾸역 버티게 했던 것이 무엇인지 여행을 마치고 나서야 깨닫는다. 다시 길 위에서 짐을 꾸리게 될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나는 행복할 것이다. 이름도 지도 위의 위치도 낯선 그곳에서 만나는 로컬 맥주의 시원한 목 넘김처럼 행복할 것이다.

21일간의 길에 대한 꼼꼼한 진술에도 불구하고 순간의 낯선 황홀과 설렘은 조금도 표현하거나 기록하지 못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빈약한 언어와 거칠고 성긴 감성 그리고 일천하기 그지없는 현실 인식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모자란 것이 며칠 사이에 채워질 성질의 것이 아니고 보면, 부족한대로 드러내는 것이 진솔한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에 부끄러움을 무릅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자면, 21일 동안의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새로운 신열을 앓기 시작했다. 그것은 새로운 길에 대한 기대이며 동시에 그 길을 걷고 있을 그 때의 나에 대한 기대이다. 이 신열로 또 얼마간 난 은밀하지만 달뜬 행복을 즐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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