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1년 미국에서 연구년을 보내면서 가족과 여행한 기록이다. 이번 아니면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라 생각하고(얼마나 절박한가) 시도했던 무모했던 여행의 기록이다. 200자 원고지 1600장의 기록은 여행중 기록했던 A4 50장에서 출발한 것이다.

2장은 미국횡단여행을 하기 전 예행연습격의 여행이었고, 3부는 21일간의 미국횡단여행기다. 자동차 여행의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던, 잘 몰라서 무모했고 씩씩한 맹목이었던 기록이다. 벌써7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지만 의미있는 기록이라 생각하고, 저지름의 불쏘시개 역할이라도 되기를 희망한다.

초등학생이었떤 둘째는 고등학교 3학년, 중학교 3학년이던 첫째는 대학교 3학년이 되었다. 그들만큼 많이 변한 나는 이제 오십대 중반으로 달리고 있으니 세월이 휘발되지 않게 거칠고 모자른 글이라도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에 기록한다.

2018. 07. 11

박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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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길에서 길을 묻다

 

. 길을 떠나려는 사람은

마음 준비: 하고 싶은 일과 해야 만할 일 사이

첫 번째 여행: 광란의 매혹 혹은 매혹의 광란

두 번째 여행: 낯선 곳에서 배우는 삶의 속도

세 번째 여행: 흐르는 강물처럼, 살아서 강성한 것들

떠날 준비: 먼 길을 떠나려는 사람의 준비

 

. 길이 데려다 준 길

01일 여행 중 떠나는 여행

02일 세 개의 브로큰 애로우(Broken Arrow)

03일 알 수 없는 나라

04일 걷는 것이 언제나 옳은 이유

05일 세 개 주를 달리다

06일 오클라호마에서 울다

07일 서부 개척은 없다

08일 행복한 미술관 혹은 버드와이저

09일 밥은 힘이 세다

10일 어떤 길도 버릴 길은 없다

11일 시카고를 기억하는 가장 황홀한 방법

12일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

13일 너에게서 나를 보다

14일 보스턴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15일 참 지독한 도시의 유령

16일 언제나 오늘로 기억될 오늘

17일 끝내 답을 얻지 못한 의문

18일 비 오는 날의 필라델피아

19Freedom is not Free

20일 오늘에 답하지 않는 역사는

21일 길은 그리움을 낳는다

 

. 떠나야할 길이 있는 당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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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길을 묻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집 앞으로 신작로가 있었다. 맑은 날이면 길가의 먼지가 신작로 아스팔트 위로 달려들었다. 저녁 무렵 이남박에 쌀을 팔아 오시던 서른여섯 어머니, 그 뒤를 따라오던 신작로는 늘 마른 바람이 불었다. 팔아온 쌀로 이남박에 물을 받아 부지런히 씻으시던 어머니는 건강했고 따듯했다. 그 따듯함은 넉넉한 국이 되거나 따듯한 밥이 되어 다섯 아이들의 숟가락을 채웠다.

 

차들이 많던 시절은 아니었어도 차들은 부지런히 속리산 방향으로 달렸다. 이따금 어느 집 아이가 차에 치였다는 말이 들렸고,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아이의 사연은 늘 극적인 안타까움이었다. 그 안타까움이 절절할수록 할머니는 신작로에 나가지 못하게 하셨다. 외아들인 아버지가 위로 누이 둘을 낳고 얻은 아들이 나였으니 신작로로 나서지 말라는 할머니의 염려와 경계는 단호할 수밖에 없었다. 오래된 기억 속의 나는 집 앞에 앉아 신작로를 질주하는 트럭이며 승용차들에 넋을 빼앗길 뿐이었다. 서울로 이사 와서는 곳곳이 신작로였지만 누구도 그 길을 신작로라고 부르지 않았다. 서울 골목들은 똑같이 생겨서 마치 도시 전체가 나를 가두거나 놀려주려는 것만 같았다. 유난히 길을 잘 잃어버렸던 나는 청주 살 때나 서울에 올라와서도 이사하는 곳마다 번번이 길을 잃었다. 길을 잃을 때마다 할머니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신작로가 두려울 나이도 아니고 길을 잃을 나이도 아니지만 떠나지 못했다. 마음은 늘 낯선 이름의 고장을 자전거로 달리거나 걷고 있었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보니 아내는 나보다 더 겁쟁이였다. 여행다운 여행을 제대로 떠날 수 없는 조건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질 뿐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린 떠난 것이다. 신작로보다 더 크고 끝을 알 수 없는 길을, 아내와 함께 어린 아이들 둘을 데리고 남루한 짐을 꾸리어 떠난 것이다.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무엇을 꼭 이루겠다고 떠난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은 우리의 예상보다 더 부지런히 자라고, 그들이 자랄수록 함께할 시간이 더욱 없어질 것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더구나 한국에 돌아오고 나면 나는 나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분주할 것인데, 언제 이렇게 온 가족이 3주간 여행을 해볼 수 있겠는가 하는 소박한 생각이었다. 소박한 것은 생각뿐, 계획을 짜고 경비를 마련하는 일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나라도 다 돌아보지 못했는데 낯선 남의 땅을 굳이 횡단까지 해야 될 이유는 무엇이냐? 횡단계획이 구체화될수록 그만두어야할 이유는 그보다 더 구체적인 설득력을 가지고 다가왔다. 그러다가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니 꼭 해보자고 서로 다독이며 무모하게 출발했던 횡단이었다. 가는 곳마다 온통 낯설었고, 낯선 만큼 어려웠지만, 정확히 그만큼 보고 느끼고 생각할 것들을 만날 수 있었다. 더구나 낯선 길 위에서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오롯이 우리뿐이었다. 그것만으로 족했다.

 

미국은 언제나 막연했다. 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에도 미국은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과 어긋나 있었다.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할 뿐이었다. 더구나 이 터무니없이 큰 나라는 좀처럼 그 끝을 보여주지 않았다. 미국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갈수록 섣불리 안다고 할 수 없다는 것만 매순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횡단여행을 통해서 미국의 가장 아픈 역사의 현장들을 돌아보면서 아주 조금 알게 되었지만, 그마저도 책으로 좀 더 살펴보아야 할 것의 작은 일부일 뿐이었다. 중부를 지날 때 만났던 집 앞의 거대한 십자가와 집집마다 걸렸던 성조기의 의미를 이제 겨우 짐작하게 되었다. 더할 수 없이 부러웠던 것들과 또 그보다 더 많이 걱정스러웠던 것들은 섣불리 예단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이 책에서 조금 무모하게 이야기해야만 했다.

 

이 책은 미국 횡단 여행의 기록이다. 그토록 바라보기만 하던 어린 시절의 신작로는 아니지만 그 비슷한 길을 참 오랫동안 멀리 달려온 기록이다. 시간적 여유나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미국에 머무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다. 달린 만큼 보고, 본 만큼 생각하고, 생각한 만큼 행복해질 수 있기를 기대하며 출발했던 무모한 도전의 기록이다. 무모한만큼 거칠고 성길 수도 있겠지만 쉬지 않고 부지런히 다녔다. 이 책은 지독히 낯설거나 너무도 낯익거나 한 것들이 내게 남긴 기록이기 때문에 혼잣말 수준을 넘어설 수 있을지 기록하는 내내 두려웠다. 독자들의 눈을 밝혀줄 깊이 있는 식견이나 감성을 울릴만한 언어를 가지고 있을 리 만무한 사람이 기록한 것이라 출간이 더욱 망설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기억의 휘발을 막기 위해서 그날의 기록을 꼼꼼하게 남기는 아내의 일기와 가는 곳마다 챙겨온 아이들의 풍성한 자료 그리고 매일 소심하게 기록해두었던 나의 A4 50장 분량 메모의 진솔함을 믿기로 했다. 1만 장이 넘는 사진을 찍었지만 그 수준은 1만 번의 부끄러움이 되었을 뿐이다. 그중에 겨우 분간할 수 있는 것들만 책에 실었다.


이 책은 떠나기 전에 기획된 것이 아니다. 횡단 여행을 시작한지 이삼일 될 무렵 페이스 북에 올린 거친 글을 좋게 봐주신 분들이 여행기를 꾸려보자고 제안을 했고, 얼떨결에 그러자고 하다가 일이 커졌다. 이 책 덕분에 우리는 좀 더 충실한 여행을 하게 되었고 불확실한 기억이 아니라 소박하게라도 기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에 기록된 언어는 내 것이 없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것에서부터 아버지, 어머니, 장모님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기웃대서 가져오지 않는 곳이 없다. 그들의 사랑이 고여서 언어가 되고, 난 단지 거칠게 기록했을 뿐이다. 부족한 것은 내 기록이고 넘치는 것은 그들의 언어다.

 

201112

Irvine에서 汎山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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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란의 매혹 혹은 매혹의 광란

- 라스베이거스(219~21)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솔이네[각주:1]는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아이들 학교가 시작되면 시간이 없으니 그전에 여행을 많이 다녀야 한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야기를 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막막해하다가 그의 말처럼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시작하자 아이들 시간 때문에 여행은 더욱 어려워지고 말았다. 그러던 중 프레지던트 데이(President Day)[각주:2]가 돌아와 자연스럽게 219일부터 21일까지 연휴가 되었다. 마침 연구보고서를 하나 마무리 한 시기였고, 더 이상 여행을 미루다가는 집에서 안위를 보장받을 수 없는 분위기라서 첫 번째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첫 번째 여행지를 라스베이거스로 정한 것은 주어진 시간이 짧았고, 별도의 계획을 가지지 않더라도 공연을 비롯한 다양한 엔터테인먼트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물론 그 사이 당일코스로 LA, 샌디에이고 등의 도시를 다녀오거나 집근처의 라구나비치, 뉴포트비치, 디즈니랜드 등을 다녀오기는 했지만, 숙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들은 라스베이거스 여행을 첫 여행이라고 여겼다.

라스베이거스는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얼바인에서 동쪽으로 조금 멀리 움직이려면 대부분 라스베이거스를 거쳐 가야만 한다. 얼바인에서 라스베이거스까지는 승용차로 4시간 3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4시간 30분을 가까운 거리라고 쓰는 것은 이 정도 거리는 미국에서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8-9시간 운전은 보통이니 4시간 30분은 가까운 거리가 아니겠는가? 물론 한국에서였다면 분당집에서 부산쯤 가는 시간이니 결코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그래서였는지 여행 중에 장시간 운전으로 지루해지면, 남은 거리를 보고 대구쯤 남았다”, “이제 대전에서 출발하는 거야!”, “부산까지 왕복하면 되는 거리야!” 등으로 혼잣말하듯 가족들을 위로하고는 했다. 신기하게도 그러면 그 막막하고 지루한 길이 견딜만해지곤 했다.

라스베이거스는 집과의 거리도 거리였지만, 말로만 듣던 세계적인 수준의 호텔이나 그들의 도박 문화 그리고 화려한 쇼를 보고 싶은 욕심이 컸다. 더구나 라스베이거스는 아내가 좋아하던 <CSI: 라스베이거스>의 그리섬 반장이 활약하는 곳이고, 강의 시간에 자주 활용하는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Leaving Las Vegas, 1995)의 배경이 되는 지독한 욕망의 도시가 아니던가? 다만 걱정스러웠던 것은 아이들에게 이 메마른 도시에서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라스베이거스에는 가족 관광객들을 위한 쇼 프로그램이 아주 풍성했다. 각종 유료공연뿐만 아니라 호텔별로 프로모션을 위해 준비했다는 무료공연까지, 경비와 시간의 문제였지 콘텐츠는 풍요롭기 그지없었다.

숙소로 정한 몬테카를로 호텔은 기대만 못했다. 연휴 기간이어서 평소보다 비싼 가격도 가격이었지만, 무엇보다 <오션스 일레븐>(Ocean's Eleven, 2001)과 같은 할리우드 영화들이 보여주었던 화려한 이미지의 숙소가 아니었다.[각주:3] 물론 같은 이치로 우리 가족 역시 그러한 영화에 등장하는 백만장자는 아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다행스러운 것은 다른 호텔에 비해서는 조용하고 카지노도 번잡스럽지 않았다. 저녁을 먹기 위해 내려간 뷔페는 소박했다. 여행안내 책자에 가볼만한 곳으로 소개된 뷔페였는데 음식 종류나 수준은 실망스럽기만 했다. 가족들 모두 라스베이거스 뷔페에 앉아서 분당집 주변의 뷔페를 그리워하고 있었으니 웃지 못 할 풍경이었다.

라스베이거스의 유명한 3대 쇼[각주:4] 중에서 비교적 저렴한 <KA> 공연을 예약하고, 라스베이거스 스트립(Strip)을 중심으로 늘어선 호텔들을 구경하며 볼만한 무료공연의 스케줄을 확인해서 동선을 짜서 돌았다. 호텔과 뷔페는 기대만 못했지만, 호텔 어느 곳을 가든 카지노를 거쳐야 하는 동선 통제와 자연스럽게 도박을 권하는 다양한 전략은 눈여겨 볼만했다. 미성년자는 카지노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그곳을 거치지 않고는 뷔페를 갈 수도 없었고, 쇼를 보러 갈 수도 없었다. 그러니 아이들이 지나다녀도 별다른 제지는 없었지만, 도박을 하는 테이블 가까이 가면 직원들이 나이를 물으며 제지했다. 하지만 슬롯머신이나 도박 테이블 사이로 이동해야지만 식사나 쇼 관람을 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제지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드러내고 감추고, 허용하면서 금지하는 이중적인 성격의 공간이었다.

<KA>쇼는 무대 장치쇼에 가까웠다. 태양의 서커스단이 보여주는 아크로바틱한 연기도 연기였지만 무대가 수직으로 서면서 엄청난 양의 모래가 바닥으로 떨어지거나, 이층으로 분리되거나, 앞뒤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무대장치의 효과적인 활용은 압도적이었다.[각주:5]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관객으로 찾아오니 대사가 중심이 되거나 심도 있는 갈등의 전개는 어려웠을 것이고, 결국 기예와 무대장치의 스펙터클이 중심이 되는 넌버벌(nonverbal) 공연으로 갈 수밖에 없었으리라. <KA> 공연 내내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은 좋은 콘텐츠의 개발과 그것의 장기 공연을 위한 전용관의 문제, 더불어 지속적으로 관객을 소구할 수 있는 장소성 개발 등의 문제였다. 공연이 끝나고 나오면서 직원에게 객석의 규모를 물었더니 2,000석이 넘는단다. 하루 2회 공연에 우리가 구입했던 입장권이 제일 저렴한 것이었는데 77달러였고, 제일 좋은 좌석은 우리 것의 2배 가까운 금액이었으니 얼추 하루 수익을 계산할 수 있었다. 상설 공연으로 무대장치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가능할 것이고, 공연 연습 과정에서 배우들에게 투입되는 고정비용을 줄일 수 있고, 가족단위 카지노 방문객들에게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다는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있었다.

라스베이거스의 야경과 벨라지오 호텔의 분수쇼. 벨라지오 호텔의 분수쇼는 디즈니랜드의 <World of Color>에 비하면 소박했지만 수준과 규모가 결코 만만한 쇼는 아니었다.

라스베이거스는 도박을 중심으로 한 도시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을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하여 각종 엔터테인먼트를 유치하고 개발함으로써 매혹적인 도시를 만들었다. 사실 미국 전역에 카지노 없는 곳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황량한 사막까지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유는 도박만큼이나 압도적인 다양한 즐길 거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도박, 공연, 컨벤션, 쇼핑, 휴식, 놀이 등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도록 구성해놓은 도시 전체가 폐장하지 않는 테마파크였다.

라스베이거스 스트립을 중심으로 차별화된 테마로 꾸며 놓은 호텔들만 돌아보아도 하루가 모자랐다. 더구나 호텔별로 자신들의 테마에 맞는 무료쇼를 시간별로 보여주고 있어서 도시 전체가 유기적으로 구성된 하나의 콘텐츠였다. 아내가 시간대별로 무료쇼의 스케줄을 메모해둔 덕분에 그것에 맞추어 호텔들을 둘러보고, 대표적인 쇼들을 가급적 많이 보려고 부지런히 다녔다. 물론 무료쇼가 세계적인 수준의 유료쇼를 압도할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길을 가다가 잠시 발길을 멈추고 둘러볼만한 수준은 이미 넘어 선 것들이었다.

라스베이거스를 스트립을 중심으로 둘러보면서 우리는 다소 아쉬워하고 있었다. 테마별로 차별화하기 위해 꾸며 놓은 호텔 외관이나 소품들이 다소 경박하고 저렴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외관만 놓고 평한다면, 조악하게 흉내내놓은 질 낮은 테마파크를 보는 느낌이었다. 더구나 화려한 네온사인과 소란스러운 음악과 낯 뜨거운 호객 그리고 미국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취객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리의 혼잡과 광란도 긍정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스트립의 호텔들을 둘러보다가 프리몬트 스트리트 익스피어리언스’(Fremont Street Experience)를 보기위해서 다운타운으로 갔다. ‘프리몬트 스트리트 익스피어리언스460m 길이의 아케이드 천장에 1,600만개의 LED55만 와트의 음향기기가 어우러지는 쇼인데 라스베이거스에 가면 꼭 보아야할 쇼이다. 우리는 다른 곳을 둘러보다 마지막 공연을 보러갔는데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서 헤매다가 결국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아쉬웠지만 다음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지나치게 욕심을 내서 조금 더 많이 보려다가 정작 꼭 봐야할 것을 놓친 경우였다.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보느냐가 아니라 꼭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싶은 만큼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항상 과욕이 문제다.

라스베이거스의 호텔 숙박료는 시설 대비 매우 저렴한 편이다. 평일에 방문하면 일반적인 인(Inn)보다도 싼 경우를 흔하게 만날 수 있다. 저렴한 숙소를 제공하고 세계적인 공연을 유치하여 사람들을 불러 모은 후에는 카지노로 수익을 내는 전략이다. 그런 이유로 카지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모든 것이 카지노를 중심으로 짜여 있다. 도시 전체에서 놀라운 동선 통제와 시간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단 카지노에 들어서면 의지가 아주 굳은 사람이 아니라면 나갈 때에는 지갑을 비워주고 나가야만 하는 구조였다. 그래서인지 아침을 먹으러 가다보면 밤샘을 한 얼굴로 마지막 남은 얼마 안 되는 돈을 슬롯머신에 밀어 넣고 신경질적으로 버튼을 눌러대는 사람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 옆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똑같은 표정으로 돌아다니며 주류와 음료수를 가져다주는 아가씨의 표정은 야속하리만치 평온했다.

라스베이거스 주변에 위치한 명품 아울렛 역시 이 도시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매혹적인 브랜드의 공습이라는 표현 외에는 딱히 다르게 표현할 수 없는 공간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고, 들어서는 곳마다 세일에 세일을 더해주고 있었다. 필요해서가 아니라 사지 않고서는 견디기 어려운 욕망이 차고 흘러 넘쳤다. 욕망하는 모든 것들의 끝을 보려는 듯 매혹은 광란이 되고, 광란은 다시 매혹이 되어 무엇을 즐기고 있는지조차 잊게 되는 도시였다.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에서 알코올중독자인 벤이 왜 이곳에서 죽으려했는지, 거리의 여자인 세라가 왜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상처 있는 남자들의 위안이 되려하는지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 도시는 콘텐츠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둘러보아야할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매혹의 요소나 몰입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통제를 통해 자연스럽게 즐기게 만드는 스토리텔링 전략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광란의 매혹과 매혹의 광란을 이토록 집약적으로 동시에 체험할 공간은 라스베이거스밖에는 없는 까닭이다. 우리 과 학생들이 자꾸 생각나는 이유였다.

 

  1. 솔이네는 내 연구년보다 UCLA방문학자로 6개월 먼저 얼바인에 와 있다가 먼저 귀국한 박사과정 제자 가족을 말한다. 솔이네는 우리가 미국에 안착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집을 구하는 일에서부터 은행계좌를 만들고 운전면허를 따는 일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솔이 아빠는 이미 스케줄을 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지 선정에서부터 좀 더 저렴한 숙소 예약 방법 등을 소상히 알려주고, 자신이 다녀온 곳들은 자신이 짜놓았던 여행 스케줄을 미리 제공해주어, 우리 여행이 실수 없이 효과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안내해 주었다. 제자인 솔이 아빠뿐만 아니라 솔이 엄마 역시 늘 넘치는 사랑과 정으로 우리를 위로해주고 도와주었다. 외로울라치면 자신의 집으로 초대를 하거나 우리 집으로 달려오던 솔이네가 있어서 낯선 곳에서의 시간을 외롭지 않고 따듯하게 보낼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본문으로]
  2. Presidents Day(Presidents' Day로도 표기함)는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과 16대 대통령인 아브라함 링컨을 기리기 위해 1980년대 중반에 제정한 날이다. Presidents Day는 2월 셋째 주 월요일로 원래는 조지 워싱턴의 생일(2월 22일)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는데, 머리 좋은 미국사람들 셋째 주 월요일로 정하여 자연스럽게 연휴를 만들어버렸다. 연휴만 만든 것이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 대규모 세일이 이루어지는 쇼핑의 광풍이 부는 시기기도 하다. [본문으로]
  3. 이후에도 라스베이거스에 몇 차례 더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뉴욕뉴욕, 엑스칼리버, 베네치아 등에서 숙박을 했었는데, 베네치아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웠지만 다소 비쌌고, 뉴욕뉴욕은 모던하고 깔끔했는데 다만 카지노가 지나치게 혼잡스러웠다. 엑스칼리버는 가격이 저렴했던 만큼 최악의 호텔이었다. [본문으로]
  4. 일반적으로 라스베이거스 3대 쇼라고 말하는 것은 MGM그랜드 호텔의 쇼, 벨라지오 호텔의 쇼, 윈 호텔의 쇼이다. 미국에서의 쇼핑이 대부분 그렇듯, 제값을 다주고 하는 경우는 드물다. 라스베이거스 쇼 역시 미리 할수록 저렴하게 관람할 수 있다. 인터넷에 라스베이거스 쇼 티켓 관련 사이트를 찾아서 가장 저렴한 것을 택하면 된다. 가급적 미국 현지 사이트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본문으로]
  5. 나중에 다른 기회에 벨라지오 호텔의 쇼를 보았는데 무대 장치와 연기의 유기적인 조화가 경탄스러울 정도였다. 짧은 시간 안에 물과 무대장치를 이용한 역동적인 연기는 보는 내내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쇼에 비하면 쇼는 소박한 수준이었지만, 쇼를 보기 전에 쇼를 보았기 때문에 그 놀라움은 대단한 것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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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을 떠나려는 사람의 준비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23일부터 시작했던 미국에서의 여행이 78일까지 늘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한국에서도 여행은 늘 내 일 때문에 34일이면 족했고, 그나마도 가족들은 집을 떠나면 아프거나 화장실 등의 문제로 곤란을 겪곤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툰 미국이 아니던가? 78일 여행을 마치고 가족들은 모두 제 각기 제법 자신감이 생긴 모양이었다.

사실 미국 횡단 여행은 내가 한국에서부터 생각해온 것이었다. 평소에 중앙아시아 횡단을 늘 입버릇처럼 말해왔지만 항상 시간과 자금 그리고 가족의 동의가 문제였다. 중앙아시아 횡단을 이야기하면 아내는 늘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었고, 그나마 타협한 것이 가려면 혼자가라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미국횡단이란 말을 꺼내기조차 어려워 기회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차 안에서 슬쩍 가족들에게 방학 중에 미국 횡단을 하면 어떨까라고 운을 떼었더니, 아내의 저항이 예상보다 적었다. 아이들은 좋다고 했으니 됐고, 아내만 설득하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캐멀에서 얼바인으로 돌아오며 7-8시간 정도의 운전은 견딜만하다고 이야기하며 다시 횡단 여행의 군불을 지폈다. 아내도 낯선 곳에서 몇 번의 여행으로 그것이 걱정하는 만큼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계획을 좀 더 구체화시킨 것은 옐로우스톤 여행 계획을 짜던 6월초였다. 얼바인에서 옐로우스톤으로 가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솔트레이크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서 거기서 렌터카로 도는데, 예약은 이미 늦어서 항공료가 지나치게 비싸고, 솔트레이크까지의 자동차로 달리면서 만날 수 있는 것들을 놓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여행 기간을 2-3일 정도 더 잡고 자동차로 떠날 것을 계획하고, 이번 여행을 하면서 과연 횡단여행이 가능할 것인지 가늠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정작 횡단여행이 결정된 것은 옐로우스톤 여행을 다녀와서가 아니라 떠나기 전이었다. 아이들 방학 중 스케줄을 점검하고는 떠날 날과 돌아올 날을 가늠해보고, 가야할 곳을 지도에 표시하며 소요 시간 등을 구글로 확인하고, 예산을 짜다보니, 어느새 횡단여행 계획이 되었고, 떠나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횡단여행 진행도

횡단여행 계획을 짜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횡단 루트를 정하는 일이었다. Route66을 따라서 얼바인세도나앨버커키산타페오클라호마시티세인트루이스시카고까지 간 후에 시카고에서 클리블랜드나이아가라보스턴뉴욕필라델피아워싱턴까지 가기로 횡단 루트를 결정했다. Route66은 철저히 나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고, 동부 쪽 루트는 아내와 아이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중심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막상 계획을 세우면서 지도에 경로를 표시하다보니 남부지역까지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존 스타인벡도 주문제작한 캠핑카인 로시난테를 몰고 남부를 포함해서 4개월간 동안 돌지 않았던가?[각주:1] 하지만 방학과 함께 둘째의 독서 캠프가 시작되고, 방학 후반기에는 첫째의 마칭밴드 캠프가 시작되기 때문에 더 이상 시간을 낼 수가 없을뿐더러 여행경비도 문제였다. 그렇다면 주어진 시간 안에 최대한 이동을 하면서 많은 곳들을 보거나 아니면 중요 도시를 중심으로 깊이 있게 보는 방식 중 한 가지를 택해야만 했지만, 우리는 두 방식의 절충안을 선택했다. Route66을 따라가는 길은 가급적 많은 도시를 둘러보고, 동부에서는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은 상대적으로 꼼꼼하게 보는 방식이었다.

아이들의 방학 중 스케줄로 주어진 시간은 21일이니 그것을 전제로, 거리와 소요 시간을 측정하고 그곳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를 결정하면서 일정을 짰다. 그러다보니 자동차로는 돌아올 시간을 확보할 수가 없어서 워싱턴에서는 비행기로 돌아오는 것으로 결정했다. 자동차로 21일 간 달린 거리를 비행기로 5시간 30분 만에 돌아오는 다소 허무할 수도 있는 계획이었다. 숙소를 알아보다보니 뉴욕에서는 주차가 힘들고 차를 가지고 이동하는 것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래서 뉴욕에서는 도착하는 날 차를 반납하고, 떠나는 날 다시 차를 렌트하기로 결정하니, 장기 렌트의 혜택을 포기하더라도 주차비, 렌트비, 연료비를 고려하면 약 200달러 정도 예산을 절약할 수 있었다. 물론 안전하면서도 저렴한 차를 렌트하기 위해서 인터넷 사이트에서 예약과 취소를 네 번쯤 반복한 결과였다.[각주:2]

비행기의 경우, 미국의 큰 도시는 비행장이 여러 개일 수 있기 때문에 구글에서 비행장의 위치를 확인 한 후, 여행 사이트에서 가격을 비교한 후 가장 저렴한 것으로 선택을 했다. 워싱턴(Ronald Reagan Washington National Airport)에서 얼바인(John Wayne Airport)까지로 경로를 확정하고, 덴버공항에서 환승하는 조건의 저가항공인 프론티어 항공(Frontier Airline)을 선택했다. 저가항공의 경우 빨리 예약할수록 착한 가격에 좋은 자리를 선택할 수 있고, 우리가 이용해야 하는 시기가 제일 성수기여서 미리미리 예약을 해야만 했다. 문제는 저가 항공의 경우, 따로 부치는 짐에는 하나당 20달러의 추가 요금이 붙기 때문에, 큰 캐리어 2개에 모든 짐을 싣고, 노트북, 카메라 가방, 아이들 개인 가방, 아내의 가방[각주:3]은 각자 기내에 가지고 타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덕분에 자동차 여행에 필수품인 아이스박스나 기타 여행 중에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기기들을 가지고 갈 수 없었다.

여행 경로를 정하고 나서는 그곳에서 무엇을 보아야할지를 여행안내 책자, 아이들의 의견, 인터넷 여행 후기, 여행 사이트 등을 통해서 며칠에 걸쳐 파악하고 정리해 두었다. 동부의 주요도시는 여행 책자를 비롯해서 각종 사이트 등에 다양하게 소개되어 있었고, 효과적인 여행을 할 수 있는 팁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Route66 코스는 몇몇 도시를 제외하고는 무엇을 보아야할지 시간을 들여서 꼼꼼하게 찾아야만 했다. 덕분에 미리 해당 도시의 역사, 지리, 특성 등을 파악할 수 있어서 횡단 내내 아주 유용한 정보가 되었다.

여행 경로와 무엇을 볼 것인지를 결정하고 나서 숙소를 예약했다. 일정에 따라서 1박 할 곳과 2박 할 곳, 3박 이상 할 곳 등을 결정하고, 보아야할 곳과의 거리 등을 고려해서 숙소를 정했지만, 그보다 먼저 고려한 것은 가격 대비 숙소의 쾌적함이었다. 몇 번의 여행을 통해서 자동차가 있으니 어느 정도의 거리는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소위 관광지의 형편없는 숙소에서 터무니없는 가격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최고급 호텔을 잡기에는 가격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짧은 여행도 아니고 2021일 동안 돌아다녀야 하고, 동부 주요 도시의 살인적인 물가를 고려할 때, 아낄 수 있는 것은 Route66코스의 숙소 비용뿐이었다. 그래서 가급적 아침을 제공하고 가격이 저렴한 인(Inn)[각주:4]과 아침은 제공하지 않지만 저렴하고 쾌적한 공항 근처의 호텔을 주로 잡게 되었다. 숙소에서 아침을 제공해주면 비용면에서도 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미국은 한국처럼 어딜 가나 저렴하고 맛있는 식당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아침을 먹기 위해서 식당을 찾는 일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동안 몇 번의 여행으로 다양한 숙소를 예약하다 보니 중심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도 공항 근처의 호텔들은 어디나 가격도 저렴하고 쾌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터넷에서 여행 사이트의 정보를 모아보니 유명 관광지나 주요 도시의 숙박비가 살인적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 인근에 대체할만한 지역과 숙소가 소개되어 있어서, 그것을 적극 활용했다. 어차피 걸어 다닐 거리는 아니고 자동차로 움직여야 한다면, 10분 이동하나 20분 이동하나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캠핑카나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는 것도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어린 딸 둘과 아내에게 야영을 하며 미국 횡단을 하자고 할 용기도 나지 않았고, 무엇보다 안전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여름에 장기간 진행되는 여행인데다가 여자가 셋이다 보니 무엇보다 빨래와 샤워가 중요한 문제였기에 인터넷에 제공된 사진을 통해 샤워시설이나 방의 분위기, 침대, 숙소의 규모, 사용 후기 등을 꼼꼼하게 따져서 결정했다. 횡단 도중에 수시로 정보를 확인하고 이메일 등을 체크하기 위해서 인터넷이 무료로 제공되는지도 확인해야만 했다. 미국의 대부분 숙소는 아주 빠른 와이파이(Wi-Fi)를 무료로 제공한다고 선전하지만, 한국의 놀라운 인터넷 환경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그 속도는 지독히도 느리고 심지어 일부 숙소는 24시간 기준 기기당 이용료를 요구하기도 했다.

특히 여행을 차질 없이 진행하기 위하여 대부분의 숙소는 환불이 되지 않는, 그래서 저렴한 환불 불가(non refundable)’ 옵션을 선택했다. 예약한 곳이 환불이 되지 않으니 무조건 갈 수밖에 없도록 하여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한 것이다. 물론 예약은 가격을 비교해서 가장 저렴한 사이트를 이용했고, 몇몇 곳은 자동차 보험을 들고 있는 AAA(American Automobile Association)에서 제공하는 10% 할인을 받기도 하였다. 덕분에 뉴욕을 제외하면[각주:5] 1박에 평균 91달러, 뉴욕을 포함하면 1박에 평균 112달러에 이용할 수 있었다. 세금까지 포함된 이 금액이 아주 저렴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비교적 괜찮은 아침식사까지 포함되었고, 관광객들이 몰리는 곳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비싸다고도 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6월 중순 옐로우스톤 여행을 준비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시작된 준비였기 때문에 조금 여유롭게 이것저것 고려할 수 있었다. 몇 번의 여행으로 가져가야할 것과 현지에서 조달할 것 등을 나눌 수 있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주말 세일 등을 통하여 가격을 비교해 가면서 경제적으로 준비할 수 있었다. 미국에 와서 유난히 밥을 더 찾는 아이들 때문에 햇반과 3분 카레, 컵라면, 김 등은 한인마트 세일 하는 기간에 구입해 두었고, 필요한 생수와 간단한 간식은 코스트코(Costco)에서 준비했다. AAA에 가서 주요 도시의 지도와 안내책자를 받았다. 지도와 안내 책자의 부피는 예상보다 크고 무거웠다. 여행지별로 AAA회원들을 위한 할인매장 등이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기 때문인데, 실제로 여행지에 가면 할인되는 곳들은 AAA표시가 붙어 있어서 굳이 가져갈 이유는 없었다.[각주:6]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각 도시별 이동 경로를 구글 지도로 시뮬레이션해보고, 우리의 희망 경로와 비교하여 조정하고 나서 출력해두었다. 숙소 예약 확인 메일과 이동 경로를 각각 출력하고 보니 크기가 작은 책만 해졌다. 숙소 예약 확인 메일은 보통의 경우 필요하지 않지만, 혹시라도 잘못된 경우 매우 유용한 증거가 되기 때문에 출력해 둔 것이었다.

뉴스에서는 폭염으로 동부에서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얼바인도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던 7월말, 우리 차창 앞에 붙어서 고집스런 말투로 길을 안내하던 사만다를 떼어서 렌터카에 옮겨달면서 횡단여행은 시작되었다.

 

  1. 존 스타인 벡 / 이정우 역, 《찰리와 함께한 여행》 궁리, 2006. [본문으로]
  2. 미국의 렌터카 회사들은 7일 단위의 렌트에 할인 혜택을 준다. 애초 계획대로 21일 동안 빌렸다면 상당한 할인혜택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프로모션을 위해서 수시로 핫딜 상품이 나오기 때문에 수시로 예약과 취소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한 차를 렌트할 때, 세금이나 보험까지 꼼꼼하게 계산하여 결정해야지만 가장 저렴한 차를 빌릴 수 있다. 메이저 렌터카 회사들의 경우, 대부분 새 차이기 때문에 차의 성능이나 상태가 매우 좋으며, 전국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고장 시 서비스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처음에 연료가 가득했던 차들은 반드시 가득 채워 반납해야 하는데, 공항에서 반납할 경우 대부분 주유소를 찾지 못해서 그대로 반납하게 된다. 그럴 경우 시중 가격보다 두 배쯤 비싼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 [본문으로]
  3. 횡단 여행에 필요한 일정표, 약, 지도, 간식, 휴지 등이 들어 있어서 아이들은 아내의 가방을 ‘도라에몽 가방’이라고 불렀다. [본문으로]
  4. 미국에서의 인(Inn)은 말 그대로 경우마다 천차만별이다. 프랜차이즈 인일 경우에도 이름만 같을 뿐, 지역과 위치에 따라서 요금, 시설, 서비스 등은 제각각이다. 요금이 40달러에서부터 200달러 이상까지 제각각이지만, 시설이나 서비스가 반드시 요금에 따라 결정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지역과 위치에 따라 정해진다고 보아야 한다. [본문으로]
  5. 뉴욕은 다른 도시들에 비해 과도하게 숙소비가 비싸서 민박을 했는데, 민박 역시 호텔에 비해서는 저렴했지만 다른 도시에 비해서는 거의 2배 이상의 비용을 지불해야했다. 따라서 평균 숙박비를 산정할 때, 뉴욕이 포함될 경우 다소 금액의 왜곡이 있을 수 있다. [본문으로]
  6. 몇몇 곳에서는 할인되는 줄 몰랐는데 계산을 하려고 지갑을 여는데, 직원이 거기에 꽂혀있는 AAA카드를 보고 할인을 해주기도 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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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 떠나는 여행

728일 얼바인세도나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아침 7시에 렌터카를 인수하기로 했다. 렌터카 회사가 집에서 10마일(16)쯤 떨어져 있으니 우리차로 가서, 렌터카는 내가 몰고, 우리 차는 아내가 몰고 와야 했다. 미국에서 처음 차를 렌트하려다 보니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나보다 영어가 원활한 첫째를 태우고 가야했고, 그러다보니 둘째만 집에 둘 수가 없어서 결국 온 가족이 가야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졌다. 여행 전날이라고 이것저것 준비하며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들은 일찍 자라는 말에도 흥분이 되는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는 눈치였다. 밤이 길어지면 아침이 분주하다. 결국 분주한 만큼 출발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405도로를 타고 10여분쯤 달리다가 빠져나와서 우회전을 하려는데, 뒤에 있던 BMW가 슬그머니 와서 우리 차를 받았다. 추돌 사고였다. 미국에서 이런 일을 처음 당하는 일이라 황망해하며 내렸다. 뒤에 BMW로 가보니 운전자는 창문도 내리지도 않고 안에서 혼자서 떠들 뿐이었다. 일단 갓길로 대라고 손짓을 하니 그제야 뒤따라왔다. 교통사고가 나면 어떤 경우에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을 이곳에 오자마자 들었는데, BMW 운전자는 느릿느릿 내리더니 역시 미안하다는 말이 없다. 화가 났지만 내차에 큰 이상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가라고 했더니 그제야 미안하단다.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나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하지만 횡단여행을 떠나는 첫 날이 아니던가? 아침, 첫날, 새봄 등등 처음 시작하는 것에 유난히 큰 의미를 부여하는 버릇이 있는 나를 알기에, 여행을 시작하며 화를 내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스스로 타이르고 있었다. 더구나 길거리에서 그를 잡고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아이들 보기에 볼썽사나울뿐더러 이미 놀라 있는 아이들은 더욱 불안해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람의 태도를 문제 삼아 사과를 받아내기에는 불행히도 나의 영어실력이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저 횡단여행의 액땜을 했다고 믿기로 했다.

렌터카 회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예정보다 30분쯤 늦었다. 예약을 확인하고 서류를 작성하고 났더니 하루 15달러를 추가부담하면 보험이 가능하단다. 렌터카 보험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225달러의 예상하지 못한 경비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보험을 들지 않고 횡단을 시도하는 것은 또 얼마나 무모한 일이겠는가?

모든 서류 처리를 끝내고 차를 인수하고 보니 전에 설명했던 차가 아니었다.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고 아내와 풀 사이즈 카’(full-size car)의 크기가 얼마만한지, 그보다 한 사이즈 작은 스탠더드 카’(standard car)급과의 연비 차이는 얼마가 되는지, 그리고 MP3는 사용 가능한지 등을 알아보기 위하여 렌터카 회사를 미리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담당자 말이 어느 차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도요타 캠리나 닛산의 알티마2.5[각주:1] 정도가 될 것인데, 캠리는 예약 상 없을 듯하고 알티마2.5가 될 것이라고 했다. MP3는 사용 가능할 것이고, ‘스탠더드 카급과의 연비 차이는 크게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알티마2.5겠지 했는데 느닷없이 브라운색 마즈다6. 알티마2.5가 마즈다6보다 좋은 차인지 아닌지는 몰아본 적이 없는 내가 알 턱이 없었지만, 예상했던 것이 아니라서 다소 실망스러웠다.

마즈다6의 기어인데 D로 출발을 했어야 했는데, M에 놓고 출발을 해서 엄청난 소음과 저속을 경험하였다. 운전한지 20년이 넘었는데 낯선 것은 낯선 것이다.

차량 외부와 6,000마일(9,650) 정도 주행한 것으로 보아 새 차인 것은 분명한데, 차량 내부를 보니 마치 5-6년은 운행한 차처럼 보였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른 차가 없냐고 하니까 없단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모든 숙소 예약이 끝나있는 상황이고, 오늘 달려야 할 거리와 시간은 그렇지 않아도 넉넉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내와 둘째를 우리차로 보내고, 나는 첫째와 그 차를 몰고 나왔다. 그런데 조금 달리다보니 차량소음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몇 번을 달리고 서고를 반복해보았는데, 이 차로는 횡단은 둘째 치고 집까지 가는 것도 어려웠다. 차를 돌려 다시 렌터카 회사로 가서 차량 소음이 너무 심하니 다른 차로 바꾸어 달라고 했다. 직원이 나와서 시동을 걸더니 무슨 소음이 나냐고 묻는다. 혹시 D가 아니라 M에다 놓고 운행한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저속기어에 두고 운전을 했으니 그 소음이 오죽했으랴, 추돌 사고와 마음에 들지 않는 차, 떠나려는 바쁜 마음이 겹쳐서 바보 같은 짓을 한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 차는 싫었다. 그래서 다시 강력하게 차를 바꾸어달라고 하자 직원은 난감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편도(one-way)로 뉴욕까지 가는 우리에게 좋은 차를 주기 싫어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더욱 강력하게 요구했다. 만약 다른 차가 없다면 하나 아래의 스탠더드 카급의 차라도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이해할 수 없다며 코발트색 마즈다6을 보여주었다. 5,000마일(8,046) 정도를 달린 새 차인데 내부도 비교적 깨끗한 편이었고, 운전을 해보니 앞에 차보다 편했다. 이 차로 하겠다고 했더니 처음부터 서류를 모두 다시 꾸며야 한단다. 그제야 직원이 왜 그렇게 싫은 기색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같은 차종인데 그냥 타지, 왜 서류를 다시 꾸미게 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뉴욕까지 15일을 같이 해야 할 차인데 마음에 들지 않는 차로 찝찝한 기분에 달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차에는 MP3 연결잭이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조수석 햇빛 가리개에 끼워놓고 들었더니 소리가 제법 들을만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동안 여행에서 운전의 피로를 풀어주던(때론 피로를 가중시키던) 유진이의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예약하면서 몇 번을 확인했는데, 그 때에는 MP3 연결 잭이 있다고 해놓고서 막상 차를 받고 보니 없었던 것이다. 횡단하면서 듣겠다고 유진이가 며칠 전부터 음악파일을 다운 받고, 정리해 놓은 터였다. 운전하는 나도 나였지만 차 안에서 장시간을 견뎌야 하는 가족들이 더 큰 문제였다. 무엇보다 유진이의 실망이 걱정 되었다. 유진이에게 미안해서 이거 어떻게 하지?”라고 했더니, 아이는 추돌 사고에 차 교환 등으로 이미 놀라고 지쳐있었다.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이팟 자체 스피커로 들으면 된단다. 아이가 아빠보다 현명했다. 고민 끝에 아이팟을 조수석 햇빛 가리개에 끼워 놓고 음악을 듣기로 했다. 손에 쥐고 있을 때보다 위에서 소리가 나니 훨씬 음량이 좋았다. 다소 옹색하긴 했지만 어쩔 것인가, 없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하면 통()한다.

집으로 돌아와 짐을 실었다. 떠나 있는 기간에 비례해서 짐은 늘고, 여정이 진행될수록 짐으로 인한 수고도 는다. 큰 캐리어 하나, 작은 캐리어 하나, 12개들이 햇반 두 상자, 카레를 비롯한 즉석 요리 24, 6개들이 컵라면 세 박스, 노트북, 카메라 가방, 아이들 작은 가방, 1리터 생수 24개 한 상자, 약과 간식이 들어 있는 아내의 가방, 여행 중 아이스박스 역할을 해 줄 방수 가방 등이 전부였다. 21일 간의 여행이지만 캐리어와 카메라 가방, 노트북 등을 제외하고는 가는 도중 모두 먹어 없어질 것들이었다. 비행기로 돌아올 때 짐을 최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옷은 가급적 적게 가지고 가기로 했다. 나는 마치 난파선에서 짐을 꺼내어 물품을 확인하는 15소년 표류기[각주:2]의 소년들과 같은 기분이 되어 다소 흥분하고 있었다.

먼 길 떠난다고 옆집에 사시는 이 교수님 사모님은 짐을 싣는 내내 곁에서 도와주시며 배웅을 해주셨다.[각주:3] 얼바인을 벗어난 차는 평균 시속 70마일(112)로 달리면서 점차 내게 익숙해졌다. 차가 익숙해지자 마음이 놓이면서 차 안의 장치들이 궁금해졌다. 특히 내 차에도 있지만 활용하지 못하고 있던 크루즈(Cruise) 기능이 눈에 들어왔다. On 버튼을 누르고 가속 스위치를 올리니 크루즈 기능이 작동되었다. 옐로우스톤 여행에서 돌아오다가 라스베이거스 근처에서 과속으로 벌금을 문 이후로 정속운전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프리웨이에서 속도를 내다보면 어느새 과속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크루즈 기능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허용되는 최대속도에 크루즈 기능을 설정해두면, 과속 염려도 없을뿐더러 엑셀을 밟지 않아도 되니 일석이조였다. 덕분에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영락없는 나비족으로 만들어주는 팔토시다. 그렇다면 팔토시가 아바타인가? 빼는 것을 잊고 차에서 내리면 여지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하는 패션 아이템이다.

동부에서는 화씨 117(섭씨 47)까지 올라가는 기록적인 찜통더위로 33명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전해졌지만, 우리가 있는 서부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의 여름을 생각하면 쾌적한 편이었다. 기온은 높이 올라가도 건조한 날씨 때문에 그늘에 있으면 오히려 서늘했다. 낮에 무방비로 햇빛에 노출되는 것만 피하면 더위는 큰 문제가 아니어서 여름 내내 냉방기를 한 번도 틀지 않고 지냈으니 말이다. 문제는 우리의 여행이 서부에서 동부로 간다는 것이고, 더구나 낮 시간 동안 사막지대를 건너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막지대의 열기는 살인적인 것이었는데, 네바다 사막지대를 달리다보면 차가 과열 될 수 있으니 에어컨을 끄라는 경고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정도였다. 기온뿐만 아니라 차창으로 내리쬐는 자외선도 큰 문제였다. 피부가 까맣게 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화상을 입기 십상이었다. 더구나 8시간쯤 달려야 한다면 자외선 차단제로는 한계가 분명했다. 그래서 미리 한인마트에서 특수소재로 만들었다는 쿨토시(팔토시)를 준비했다. 토시를 끼면 손가락 두 마디만 남기고 손부터 시작해서 팔뚝까지 온전히 덮을 수 있었다. 게다가 특수소재라 가볍고 얇을뿐더러 시원하기까지 했다. 재미있는 것은 팔토시의 색깔이 파란색이어서 그것을 끼고 나면 영락없는 <아바타>(Avatar, 2009)의 나비족이었다. 팔토시는 보기보다 시원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민망했다I-15를 타고 가다가 주로 I-40을 달렸다. 우리가 달리는 길옆으로 Route66이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Route66은 도로의 형태나 기능을 잃은 곳이 많았고, 새로 만든 표지판만 어색하게 선명했다.

존 스타인벡이 ‘The Mother Road’로 명명한 Route66은 시카고에서부터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까지 2,200마일(3,500)에 이르는 동부와 서부를 잇는 동맥으로서 미국의 역사와 함께 한 도로였다. Route661925국가 고속도로 시스템 구축 계획이 발표된 이후, 각 주정부에 의해 건설되었고, 1940년 이전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리노이 주-미주리 주-캔자스 주-오클라호마 주-텍사스 주-뉴멕시코 주-애리조나 주-캘리포니아 주를 이어준 Route66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서처럼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 떠나던 절박한 길이었고, 2차 세계 대전에는 전장으로 가는 병사들을 실어 나르던 의무와 명분의 길이었으며, 전후에는 자동차와 함께 개인의 자유를 구가하던 낭만의 길이기도 했다. 그렇게 미국의 역사와 함께 영욕의 세월을 건너던 Route66은 속도와 효율이라는 이름 앞에 낡은 도로가 되어 갔고, 마침내 1985년 공식적으로 폐쇄되었다. Route66은 도로건설 기술이 현재와 같이 발전하기 이전에 건설된 도로였고, 주정부가 건설하다보니 도로의 이용률을 높이기 위해 주요 도시의 중심도로로도 쓸 수 있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횡단도로로서의 효율성 면에서는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Route66은 속도와 효율의 시대를 건널 수 없었고, 최단 거리, 최단 시간의 고속도로들에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워버린 Route66을 살려낸 것이 존 라세터(John Lasseter)의 애니메이션 <>(Cars, 2006)였다. <>Route66의 어느 한 마을인 듯한 라디에이터 스프링스를 배경으로 단지 레이스에서 이기는 것 말고도 삶에는 더 중요한 것이 많다는 메시지를 전해준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성취, 효율, 속도만을 강조하는 현재의 삶에 대비하여 과정, 즐거움, 여유로 상징되던 Route66의 추억을 상기시켜주었다.

픽사 애니메이션 스토리텔링을 분석하기 위하여 존 라세터에 관한 자료를 모으다가 <Cars>의 제작 동기에 대한 언급이 눈에 뜨였다. 2001년 존 라세터의 아내는 가족 여행을 제안하며 가족에게 좀 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모르는 사이에 아이들이 훌쩍 자라 우리를 떠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가족의 소중한 부분을 영영 잃고 말 것이라고 했단다. 그 말은 마치 내 아내가 나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아내와 존 라세터의 아내가 서로 통화하는 사이도 아닐 터이고 보면, 일 때문에 가족들에게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하는 것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나보다. 아내의 그 말을 들은 존 라세터는 인생이라는 여정은 인간에게 주어진 상과 같다. 성취한다는 건 참 멋진 일이지만 축하해줄 가족과 친구가 없다면 모든 게 무의미하지 않겠는가?”라며, 가족들과 두 달 동안의 트레일러 여행을 떠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Cars>를 제작했단다.

아마 그때였으리라, 연구년을 미국으로 간다면 반드시 가족들과 Route66을 함께 여행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횡단여행이 시작되었다. 21일 동안 오롯이 가족들과 함께 달려가야 할 즐거운 여정이다. 지금 이곳이 아니라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서로의 모습과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서로의 얼굴에서 자신을 볼 수 있으리라는 느슨한 기대를 품어본다.

Route66은 이제 다른 도로 아래에서 달리거나 끊어져 있다. I-40표지판 옆에 Route66이 함께하는 것은 그런 이유다. 표지를 따라 내려서면 쇠락한 마을이거나 끊어진 길의 어디쯤이다. 시대적 효용을 잃는 것들의 쓸쓸한 모습과 같다.

Route66은 달리던 그 시간에 멈추어 있었다. 멈춘 시간을 멈춘 그대로 두었다면 그 시간은 차라리 나름대로 흐를 수 있지 않았을까? 멈춘 시간을 현재의 시간 위에서 색칠하려다 보니 그것은 추억 없는 기억이 되거나 아주 천박하게 화려해진 슬픔이 되고 말았다. 길은 사라지고 도로표지만 살아서 관광객들을 부르고 있었지만 싸구려 기념품으로는 추억을 만들 수는 없었다. 지금 이곳의 Route66이 추억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그 길과 같은 시대를 달리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길을 달리던 시대의 미덕들이 가뭇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경쟁, 효율, 성취라는 목표지향적인 삶의 속도는 협력, 여유, 과정의 미덕을 야유할 뿐이었다. 그 야유 속에서 소중한 것들은 서로의 곁을 떠나거나 흔적 없이 사라져 가고 말았다. 존 라세터가 <>에서 그리워하며 복원하고 싶어 했던 것은 낡은 도로의 추억이 아니라 그곳을 달리던 시대의 미덕들이 아니었을까? 낡은 Route66은 그렇게 길 아래로 나란히 달리며 부서지고 있었다.

Route66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곳곳에서 내려서 달려보았지만, 길은 현재도 과거도 아닌 어정쩡한 시제로 바람에 날릴 뿐이었다. Route66 옆으로 달리는 I-40은 지평선이 이끌고 있었다. 길은 높낮이와 곱고 굽음의 차이가 있을 뿐 집요하게 지평선을 향해 있었고, 지평선은 끝 모를 하늘을 향해 앞으로만 달리고 있었다.

서부쪽의 고속도로는 대부분 지평선을 보고 달려간다. 지평선을 이끄는 것은 늘 하늘이다.

캘리포니아에서 멀어질수록 사막과 스텝의 중간지대가 끝없이 이어지고, 이따금 마을들이 달려왔지만 빠르게 뒤로 달아날 뿐이었다. 몇 시간을 줄곧 앞으로만 달리는 길이니 사만다는 긴 침묵에 빠져 들었다. 여행을 떠난다는 마음에 밤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던 아이들은 차가 캘리포니아를 벗어나자 각자의 취향대로 잠이 들었다. 자기는 음악을 틀어야 한다며 아내 대신 굳이 조수석에 앉은 유진이는 의자를 잔뜩 눕힌 채 다리를 대쉬보드에 올리고 목베개를 하고 잠이 들었고, 효진이는 언제나 그렇듯 아내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 물론 강한 햇빛은 햇빛 가리개로 모두 가리고, 아내의 도라에몽 가방에서 나온 간식을 배불리 먹은 뒤의 일이었다.

지나치는 풍경이 아까워 밖을 보라고 깨우려다가 그대로 두었다. 살아가면서 아무런 걱정 없이 배불리 먹고 엄마 무릎 베고 따듯하게 잠들 날이 또 앞으로 몇 날이나 될 것인가? 그래 많은 것을 보는 것만 여행의 풍미겠는가? 자기 취향대로 느끼고 가져가 두고두고 따듯해할 수 있는 기억을 일구는 일이 여행의 기쁨 아니겠는가? 여행준비로 피곤했던 아내도 졸릴 것이 분명한데 운전하는 내가 졸까봐 룸미러로 나를 훔쳐보며 계속 이야기를 걸고 있었다. 서너 시간쯤 달린 후, 유진이가 깨서 음악을 틀자 안심이 되었는지 아내도 스르르 잠이 들었다.

서부 쪽 고속도로[각주:4]에는 한국식 휴게소가 없다. 서부 쪽 고속도로는 무료로 운영되기 때문에 길에 올라서고 내려서는 일이 비교적 자유롭다. 그래서인지 굳이 고속도로에 휴게소를 만들지 않고, 고속도로 진출입로 주변에 음식점, 주유소, 숙박시설을 표시해둘 뿐이다. 물론 고속도로 위에 아주 드물게 쉼터(Rest Area)를 두지 않는 것은 아니나 간격이 너무 멀고, 화장실과 피크닉이 가능한 식탁 정도가 놓여 있을 뿐이니 한국식 휴게소와는 거리가 멀다. 반면, 동부 쪽 고속도로들은 유료도로(Pike, Turnpike)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한국식 휴게소와 비교적 유사한 휴게소들이 고속도로 위에 있다.

캐나다 마트의 전경이다. 주유소와 마트가 결합된 미국의 전형적인 주유소이다. 건물을 압도하는 타이포그래피가 오히려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더해주던 곳이다.

가족들이 모두 잠에서 깬 것은 다섯 시간 넘게 달리고 주유하기 위해 애리조나 주 킹맨(Kingman)에서 고속도로를 내려섰을 때였다. ‘캐나다 마트라는 생뚱맞은 이름의 작고 낡은 마트는 주유소도 함께 하고 있었다. 이곳은 휘발유 가격이 1갤런에 3.38달러로 얼바인에서 가장 싸다는 코스트코 주유소의 3.67달러에 비해 29센트나 저렴했다. 그깟 29센트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횡단의 거리를 생각하면 이 금액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12갤런을 주유했으니 3.48달러를 아낀 것이다. 빠듯한 여행 경비도 절약해야 했지만, 동부의 대도시로 가면 이곳에서 아낀 기름 값만큼 혹은 그 이상 지출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미국에서는 주유소와 편의점을 함께 운영하며, 화장실은 편의점 안에 있기 때문에 주유를 하고서는 편의점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고속도로 위에는 한국식 휴게소가 없으니 주유할 때 반드시 화장실을 가야만 한다. ‘캐나다 마트라는 곳은 일반 관광객보다는 트럭기사들이 주 이용객들인 것처럼 보였다. 화장실에는 독립적인 샤워부스가 여러 개 설치되어 있었지만 화장실 시설은 오히려 아주 소박했다. 마트 안팎으로 Route66을 강조하고 있었지만, 관련성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소박한 수준의 Route66 기념품뿐이었다.

킹맨에서 세도나(Sedona)까지는 세 시간쯤의 거리였다. 잠에서 깬 아내와 아이는 이번 여행의 기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유진이는 자기가 미리 조사해둔 몇몇 곳을 꼭 들러줄 것을 요구했고, 효진이는 수업시간에 배운 보스턴과 워싱턴의 몇몇 유적지를 구체적으로 대면서 꼭 보아야 한다고 했다. 아내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뉴욕을 가장 많이 기대하는 눈치였다. 나는 구체적인 어떤 곳이라기보다는 달리는 동안 만나게 될 풍경들과 차 안에서 나누게 될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말 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여행 출발 전에 약속했던 여행의 기록을 각자 어떤 식으로든 남기자고 제안했다. 아내는 신혼여행부터 꼼꼼하게 기록해왔으니 말하지 않아도 그럴 것이고, 아이들도 모두 좋다고 했다. 아내는 첫 여행부터 냉장고 자석을 모으고 있었고, 유진이는 엽서와 각종 팸플릿들을 모아왔는데 이번에는 효진이도 그러겠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동방신기의 노래를 몇 번쯤 듣는 사이 표지판은 세도나 인근의 플래그스태프(Flagstaff)를 가리키고 있었다.

항상 눈이 먼저 현혹되고 만다. 사만다의 안내가 없었음에도 플래그스태프 표지판을 보자마자 차는 벌써 길을 내려서고 있었다. 사만다는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우리가 미웠는지 잠시 먹통이 되었다가 플래그스태프를 한 바퀴 돌 때쯤 비가 조금씩 내리자 정신을 차렸다. 사만다가 일러주는 길을 몇 번 놓친 끝에 Arizona 89A를 만나서 오크 크릭 캐니언(Oak Creek Canyon)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Midgley Bridge의 전경이다. 아래로 트레킹 코스가 위험스런 유혹을 하지만 위로는 평온한 다리일 뿐이다.

슬라이드 록 주립공원(Slide Rock State Park)에 들어서자 이미 붉은색의 강한 기운이 산과 절벽들로 이어진 풍경을 압도하고 있었다. 하늘은 흐린 날씨 탓인지 먹구름이 몰려들어 석양과 좀처럼 어울리지 못하고 사나운 표정이었다. 달려드는 풍경에 이끌려 몇 번인가 위험을 무릅쓰고 차를 세웠다. 갓길이라기에는 너무 협소한 곳에 차를 세우고 몇 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기대했던 것만큼의 풍경이 잡히질 않았다. 광각렌즈로 바꾸어 보았지만 렌즈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사진이 될 만한 뷰 포인트는 모두 유료화 되어 있었고, 그곳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온전히 풍경을 담을 수 없었다. 트레킹을 하며 풍경 안으로 좀 더 들어가야 얻고 싶은 사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시간이 없었다. 날은 흐리고 해는 이미 지고 있었다.

오크 크릭 캐니언에서 세도나로 들어서는 길에 미즐리 브리지(Midgley Bridge)를 만났다. 평소에는 주차하기가 쉽지 않다던데 늦은 시간이어서인지 두세 대만 주차해 있었고 그마저도 금방 떠났다. 미즐리 브리지 옆으로 몇 개의 트레일(trail)이 지나고 있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어서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미즐리 브리지는 윌슨 캐니언(Wilson Canyon)과 오크 크릭 캐니언을 이어주고 있다고 설명이 되어 있었지만, 막상 두 캐니언을 바라보니 이름과 구분은 그저 인간의 몫일뿐이었다.

미즐리 브리지를 넘어서 얼마가지 않으니 업타운 세도나(Uptown Sedona)였다. 먼저 안내 센터에 들러야 했지만 시간은 벌써 저녁 8시가 가까웠고, 이미 490마일(784km) 이상을 달린 상태였다.

숙소 직원이 붉은 펜으로 설명해준 세도나 지도

숙소로 잡은 스카이 렌치 랏지(Sky Ranch Lodge)는 업타운 세도나를 지나서 산 위쪽으로 한참 올라간 곳에 있었다. 세도나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고 노을이 가장 아름답다는 에어포트 메사(Airport Mesa)가 바로 숙소 앞에 있었다. 에어포트 메사는 세도나의 대표적인 볼텍스 (Vortex) 지점 중의 하나라는데 내게는 그보다 노을이 더 매력적인 곳이었다. 노을을 기대하고 부지런히 달려갔지만 간간이 비가 내리고 이미 너무 어두워졌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밤이 내리는 세도나의 풍경만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세도나의 자연환경 보호를 위해 기부를 권하는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우리에게 일본어와 우리말로 인사를 건넸다. 환한 얼굴로 기부를 권하고 있었지만 내리는 비 때문에 황급하게 차로 돌아와야 했다. 체크인을 하면서 세도나 안내지도를 부탁하니 약간 여성스러운 남자 직원이 친절하게 붉은 펜으로 표시하며 설명까지 해주었다. 멕시코 풍의 숙소는 정성들여 가꾼 정원과 신경 쓴 소품들로 낡은 느낌이 오히려 멋스러웠다. 방에 들어와 짐을 풀고 저녁 준비를 했다. 딱히 근처에 저녁을 먹을 곳이 마땅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져온 햇반과 즉석 카레 그리고 컵라면을 준비했다. 햇반은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즉석 카레는 물 끓이는 기구로 데우고, 물을 따로 끓여 컵라면에 부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전자레인지와 물 끓이는 기구의 코드를 꽂는 순간 전기가 나갔다. 전자레인지를 돌리면서 물을 끓이려하니 과부하가 걸려서 퓨즈가 나간 것이다. 사무실에 가서 이야기를 하니 즉시 사람을 보내주어 바로 고쳤는데, 전자레인지를 돌리니 전기가 또 나갔다. 이번에는 전화로 사정을 설명하니 사람을 또 보내주어 불은 들어왔지만 전자레인지를 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방안에 불도 불필요한 것들은 모두 끄고 전자레인지만 돌리니 돌아갔다. 햇반과 카레를 데우고, 컵라면 물을 끓여서 간신히 저녁을 먹었다. 첫날이어서 그런지 달려온 거리에 비해서는 모두 활력이 넘쳤다.

웃고 떠드는 아이들을 씻게 하고, 찍은 사진을 노트북으로 내려서 정리를 했다. 페이스북에 간단한 경과를 올리고, 내일 일정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볼 것을 선택해야했고, 보아야할 곳의 동선을 잘 짜야했다. 아이들은 첫날의 흥분 때문인지 낮에 차에서 잤던 탓인지 여행 일기를 적고나서도 한참을 떠들다 자정이 지나서야 잠이 들었다.

오늘은 I-40Route66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달리고 또 달려왔다. 출발할 때는 낯설었던 차가 숙소에 도착하니 어느새 익숙해졌다. 미국에서 일 년 동안의 연구년은 조금 긴 여행이다. 돌아갈 곳이 분명한, 돌아가기 위해 떠나는 것은 여행 그 이상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횡단 여행은 미국에서의 일 년 여행 중에 떠난 또 다른 여행이었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아침에 인수한 차처럼 이제 조금 익숙해졌을 뿐인데, 무엇을 찾아 무모하게 횡단을 감행하는 것인지 아직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일 년 간 미국으로의 여행이 그동안 소홀했던 가족들과 함께하면서 잃어버린 것, 놓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듯, 횡단여행을 통해 낯선 공간에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해볼 뿐이다. 내일은 세도나를 보고 앨버커키(Albuquerque)로 달릴 것이다. 늘 밤은 낮보다 시간이 더디 흐른다.

 

  1. 개인적으로는 익숙한 소나타가 있었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Hertz에는 소나타가 없었다. 렌터카를 예약하는 사이트에서는 풀 사이즈 카 급의 차로 Chevrolet Impala급이라고만 되어 있어서 어떤 차가 배정될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본문으로]
  2.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기》는 초등학교 시절 내가 가장 신나게 읽었던 소설이다. 아이들끼리 무인도에서 2년 간 생활하는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을 어린 시절 무척 좋아했다.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 내가 열여섯 번째 소년이 되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본문으로]
  3. 21일 간 집을 비워야 하기 때문에 우편물 등을 옆집의 이 교수님 댁에 부탁을 하고 떠나야했다. 이 교수님은 나처럼 UCI에 교환교수로 나와 계셨고, 우리처럼 딸 둘이 있어서 여러모로 처지가 비슷했다. 이 교수님 댁과는 평소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우편물도 우편물이었지만 집을 떠나면서 돌아올 곳에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푸근함이 더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4. 한 면적의 100쯤에 달하는 미국의 동맥 역할을 하는 것은 소위 프리웨이(free way)라고 부르는 자동차 도로들이다. 처음에는 서부 고속도로가 무료이기 때문에 프리웨이인 줄 알았는데, 미국인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도로라는 의미에서 프리웨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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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나라

730일 앨버커키산타페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어젯밤 앨버커키(Albuquerque)에 자정을 한참 지나 도착해서 씻고 정리하다 늦게 잠든 탓에 다들 아침이 힘든 모양이었다. 앞으로 묶게 될 숙소들에 비해 무척 럭셔리한 앨버커키 숙소에서는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정작 숙소에 머물 시간이 없어서 아쉬웠다. 조금 늦게 일어나 씻고 나갈 준비를 마치니 9시였다.

한참 외모에 신경 쓸 나이인 딸이 둘이다보니 아침에 나갈 준비하는 하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 게다가 미국에 와서는 머리를 자르지 못한 탓에 머리를 감고 말리는 시간이 상당했다. 평소 효진이는 밤에 머리를 감고 아침에는 빗고만 나가는 고육지책을 쓰는데, 어제는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머리를 감지 못하고 잠이 들었고, 덕분에 아침이 더욱 분주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어린 시절 우리 집 아침 풍경이 떠올랐다. 누나 둘, 여동생, 남동생 그리고 나까지 매일 아침 북새통을 떨었을 모습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났다. 마당에 있는 수돗가에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서는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던 초등학교 시절, 샴푸가 막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누나들은 머리를 감기 위해 물을 끓여야 했고 그만큼 더 분주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금처럼 드라이어가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누나들의 아침은 얼마나 더 분주했으랴? 누구보다 아침밥과 도시락을 준비하시며 오남매의 등교준비를 도와주시던 할머니의 고생은 또 오죽했으랴?

빨리 출발해야 한다는 아빠의 분주한 마음과는 상관없이 앨버커키 쉐라톤 호텔 로비에 놓인 매력적인 체스판을 떠나지 못하는 아이들.

혼자서 옛날 생각을 하는 동안 얼추 준비가 끝난 모양이었다. 체크아웃을 하기 위해서 호텔 로비로 나서는데 커다란 체스판이 보였다. 장식용인지 실제 경기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새 아이들은 체스판 앞에 앉아 있었다. 출발이 급했던 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몇 번의 성화 끝에 결국 체스판에서 일어났다.

이곳 호텔에서는 아침을 무료로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어제 호텔로 들어오면서 식당을 찾아보았는데, 마침 근처에 I-HOP[각주:1]가 있었다. I-HOP에는 아침인데도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원래 가격도 비싼 편은 아니지만 아침 메뉴는 더 저렴한 편이고, 근처에 패스트푸드점을 제외하고는 마땅한 식당도 없었기 때문이다. I-HOP도 대부분의 미국식당이 그렇듯 음식 주문 전에 음료수 주문을 먼저 받았다. 커피를 주문했더니 I-HOP 특유의 스테인리스 보온병에 가득 커피를 담아다 줬다. 5-6잔을 따라 마시고 리필을 부탁하면 다시 가득 채워다 줬다.

패스트푸드점에서 흔히 만나는 무한리필 음료수대다. 이 근처에 앉아있으면 풍요가 왜 병이 될 수밖에 없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미국에서 무한 리필이 새로울 것은 없었다. 대부분의 패스트푸드점에 가면 음료수는 무한리필이다. 아예 음료수 기계를 객장 쪽으로 설치해두고 계산대에서는 컵만 나누어준다. 재미있는 것은 컵 사이즈별로 가격이 다르다는 점이다. 어차피 무한리필인데 컵 사이즈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어쨌든 그들은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라지 사이즈 컵에 가득 콜라를 따라 마시며 몇 번이나 리필해서 마신다. 고열량의 음식을 섭취하면서 끊임없이 탄산음료를 마셔대는 그들의 몸은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뚱뚱하다. “미국인의 61% 정도가 과체중이고, 그 가운데 27% 정도가 비만환자로서 미국에서 비만은 이미 흡연보다 중대한 질병[각주:2]으로 취급되고 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미국에서는 풍요가 병이 되고 있었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입고 쓰는 모든 것이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저렴하고 넉넉하다. 곳간이 그득해서 넉넉하게 먹고 쓴다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이야기할지는 모르겠으나 정말 이 모든 것이 그들의 노력으로 쌓아둔 그들의 곳간에서만 나오는 것일까? 그들만의 풍요는 이민자들의 저임금 노동과 제3세계의 보이지 않는 희생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만의 풍요를 위해 타자의 희생을 강요하고 그 결과 자신들의 건강까지 해치고 있는 아이러니의 중심에는 미국이라는 국가가 아닌 이제는 그들도 어쩌지 못하는 거대 자본의 무한 증식 논리가 있는 것이다.

 

앨버커키 도심의 현대적 건물과 그 사이사이 멕시코 전통문양이 삽입된 장식. 시내 곳곳에 자신들의 고유 문양을 다양한 방식으로 꾸며 놓고 있다. 인디언의 땅에 스페인이 도시를 건설하고, 멕시코의 지배를 받다가 지금은 미국인 땅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고민하게 하는 도심이었다.

아침을 먹고 바로 산타페(Santa Fe)로 떠나기로 했다. 그래도 아쉬워 앨버커키 시내라도 보자고 가다보니 뉴멕시코 대학교(University of New Mexico, UNM) 앞까지 가게 되었다. Route66이 앨버커키 도심을 관통하기 때문인지 현대식 건물과 다소 쇠락한 분위기의 시가가 학교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1706년 스페인인 사람들에 의해 이 도시는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곳인들 왜 원주민이 없었을까마는 그들 역시 인디언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역사에서 지워져 버렸다. 앨버커키는 1880년 철도가 건설되고, 1930년대 Route66이 이곳을 관통하면서 도시로서 발전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 인텔(Intel)이 인근에 들어오면서 급성장을 했다고 한다.

뉴멕시코 대학교에 대해서는 인류학과 사진학으로 유명하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러니 시간을 내서 둘러보면 좋으련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뉴멕시코 대학교는 어도비 양식의 건물들로 자신들의 정체와 지향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학교 앞은 여느 대학의 거리처럼 자유롭고 활기찬 분위기였다. 앨버커키가 자랑하는 올드타운 플라자(Old Town Plaza)와 앨버커키 국제 열기구 축제(Albuquerque International Balloon Fiesta)는 시간이 부족하고 시기가 맞지 않아서 명성만 듣고 떠나야 했다.

뉴멕시코 대학교 앞의 풍경. 만화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벽화, 어머니의 음식 다음으로 맛있는 식당이라는 대학가다운 레스토랑 간판, 오래된 모자점, 정체는 알 수 없지만 개성만점의 벽화가 돋보이는 상점. 뉴멕시코 대학교의 어도비 양식의 건물들과 상반되는 화려하고 대담한 색상의 사용이 두드러졌다. 

앨버커키에서 산타페까지는 85마일(136)로 이번 여행의 평균 이동거리를 생각해보면 이동이랄 것도 없는 거리였다. 게다가 고속도로는 한산해서 예상보다 빨리 산타페에 도착했다. 고속도로를 내려서자마자 패션 아울렛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산타페 초입에 패션아울렛이 있으니 도시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쇼핑도 관광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어색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한국에 비해서 미국의 옷값은 무척 저렴한 편인데, 아울렛의 가격은 그것보다 더 저렴하니 경제적인 쇼핑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아울렛 입구에서 두 개의 할인쿠폰과 아울렛 라디오 홍보 티셔츠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할인쿠폰 한 장은 100달러 이상 구입하면 20%를 깎아준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쿠폰북이었다. 마침 세일 기간이어서 매장마다 할인을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추가로 더해주는 할인쿠폰이니 더욱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울렛 정상 가격의 30%를 할인해주는 매장에서 쇼핑을 하고 100달러가 넘어서 20% 쿠폰을 내고 계산을 하려는 순간, 아내가 25% 할인쿠폰을 내밀었다. 250달러가 넘으면 25%를 할인해주는 쿠폰이 쿠폰북 안에 있었던 것을 그제야 발견한 것이다. 추가 할인쿠폰은 두 개를 동시에 적용할 수 없으니, 좀 더 할인 폭이 큰 25%쿠폰으로 바꾸어 달라고 했더니 계산하던 직원이 당황을 했다. 잠시 후 그 직원보다 상급 직원이 와서 계산을 하더니 25% 할인을 했단다. 아무래도 미심쩍어서 정말 25%를 할인한 것 맞느냐고 몇 차례 물었고, 그들이 카운터의 계산기로 계산하는 것을 보았으니 믿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 와서 다시 계산해보니 역시 맞지 않았다. 몇 번을 계산해보아도 20% 할인을 했을 뿐, 25% 할인을 한 것이 아니다. 400달러 정도 쇼핑을 했으니 5%20달러 정도의 차이가 났다. 돈도 돈이지만 바보 취급을 당한 것 같아서 기분이 우선 나빴다. 다시 매장으로 갔다. 가서 그들 앞에서 계산이 잘못되었다고 했더니, 계산했던 그 직원은 정작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몰랐다. 보는 앞에서 20%25%를 계산해주었더니 그제야 자신의 계산이 틀렸음을 시인하고, 매장 책임자를 불렀다. 한국에서라면 간단하게 그 자리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책임자까지 부른 것이다. 매장의 책임자가 와서 전후사정을 듣더니 한 번 기계가 읽고 입력한 것은 쿠폰교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그들에게 화가 나서, 그렇다면 모두 환불하겠다고 하자, 그제야 25% 쿠폰으로 교체하여 주었다.

세도나와 알버커키에서 볼 것을 적은 아내의 메모

황당한 일이었다. 계산하는 직원이 전자계산기로 20%25% 계산도 하지 못한다는 것, 돌발 상황에 스스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점, 책임자 역시 앞의 주문을 취소하고 다시 계산하면 해결될 수 있는 일을 융통성 있게 처리하지 못한다는 점에 아내와 나는 놀랐다. 하지만 미국에 와서 겪어본 그들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모국어와 문화적 토양 위에서 영어를 사용하다보니 일정수준 이상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다보니 업무처리가 매뉴얼화 되지 않으면 효과적인 운영과 관리가 불가능한 것이다. 모든 것이 매뉴얼화 되어 있고 미국 사람들은 그것을 고집스러울 만큼 잘 따른다. 도로공사[각주:3]나 신호등 없는 교차로의 진행 순서[각주:4]와 같은 일에서부터 심지어 남자 화장실 예절[각주:5]에 이르기까지 매뉴얼을 숙지시키고 철저하게 지켜간다. 그러다보니 매뉴얼에 대한 숙지가 떨어지거나, 매뉴얼의 예외 사항에 대해서는 잘못 처리했을 경우, 책임은 오롯이 당사자의 몫[각주:6]이 된다. 아울렛에서의 소동은 유쾌한 일은 아니었지만 미국의 또 다른 면을 체험했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 있는 일이었다.

산타페 관광의 중심이라는 플라자(The Plaza)에 도착하고 보니 7월 내내 열리는 스페인 마켓이 열리고 있어서 매우 혼잡했다.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서 플라자를 중심으로 몇 바퀴를 돌다가 걸어서 10분쯤 떨어진 길가에 주차를 하고 성 프랜시스 대성당(St. Francis Cathedral)으로 갔다. 성 프랜시스 대성당이 거의 문 닫을 시간이어서 급하게 둘러보아야 했다. 성당으로 들어서자 햇빛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제 빛을 버리고 경건하게 아주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성당 안 중앙부의 가장 높은 곳에 걸려 있는 예수상은 양쪽의 아치형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과 고유의 붉은 빛이 어우러져 고통의 순간을 오히려 따듯하게 느껴지도록 만들고 있었다.

성 프랜시스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성당 중앙의 예수상, 성당의 외관, 어도비 양식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로마네스크양식의 성당 전경. 각도와 시간에 따라 빛을 달리는 성당의 모습도 무척 이채롭다. 

현재의 성 프랜시스 대성당은 라미 대주교(Archbishop Jean Baptiste Lamy)1869년에 시작해서 15년만인 1884년에 완성했단다. 성 프랜시스 대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주변과 차별화되고 있지만 주변의 빛깔을 수납하며 위압하지 않는 권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특히 성당 앞에는 최초의 인디언 출신 성자인 카레리 데카크위타(Kateri Takakwitha)의 모습은 정복자의 성자가 아닌 피지배자의 성자로서 위안을 주고 있었다.

성당 앞 광장에서는 7월 동안 스페인 마켓이 열리고 있어서 성당 쪽으로 차량 진입을 막고, 그곳에 천막을 치고 전통 수공예품과 예술작품을 비롯해서 음식들을 팔고 있었다. 걷기도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많은데다가 폐장 시간이 가까이 오니 좌판을 정리하는 분위기여서 더욱 어수선 했지만, 아이들 손을 잡고 천천히 둘러보니 정겨웠다. 소박한 수준의 것에서 매우 정교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의 좌판에서는 수공예로 제작된 가톨릭 성물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스페인 마켓 좌판에서 판매되고 있는 가톨릭 성물과 기념품점에서 판매되는 토착신앙이 결합된 성물 수공예품. 이 땅이 산타페(거룩한 믿음)이길 원했던 정복자들과 자신의 믿음을 지키려 했던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혼합된 결과다. 

산타페는 멕시코-미국 전쟁(Mexican-American War, 1846-1848)으로 미국의 영토가 되었지만, 푸에블로 인디언 문화와 히스패닉 문화가 결합한 독특한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원래 이 땅의 주인이었던 푸에블로 인디언들은 이곳을 햇살이 춤추는 곳이라고 불렀었는데, 정복자였던 스페인사람들은 산타페’, 거룩한 믿음(Holy Faith)’으로 불렀다고 한다. 각기 부르는 이름의 차이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푸에블로 인디언과 스페인 사람들의 이 땅에 대한 인식은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원래 주인이었던 푸에블로 인디언에게 이 땅은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 축복의 땅이었음에 비해, 정복자인 스페인 사람들의 눈에는 개종시켜야할 야만의 땅으로 대상화되었기 때문이다.

로레토 교회 전경과 로레토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모습. 

비교적 조화를 이루며 잘 지내던 이들이 갈등을 빚게 된 것도 푸에블로 인디언의 종교 의식을 악마의 의식으로 인식한 가톨릭의 관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멕시코에서는 16세기에 이러한 종교적 갈등[각주:7]으로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한 엄청난 대량 학살이 자행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가톨릭이 지배적인 종교가 되고 생활의 곳곳에서 절대적인 힘을 행사하는 것을 보면서 지독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복자들의 핍박으로 절대자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던 원주민의 비참한 삶과 그 결과 원주민들이 정복자의 종교로 들어가 그 안에서 평안을 갈구하는 아이러니한 순환의 고리가 씁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17세기 이후 가톨릭이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만나는 푸에블로 인디언의 문화와 종교적 색채가 그 안으로 스며들었고, 이것이 바로 산타페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로레토 교회 앞의 소박한 예수상과 기적의 계단을 안내하는 표지판

성 프랜시스 대성당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로레토 교회(Loretto Chapel)[각주:8]가 있었다. 교회 옆에 어른 서너 명이 맞잡아야 간신히 안을 수 있는 은행나무와 아주 소박하게 조각한 예수상이 좌우에서 정겨운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교회가 고딕양식(Gothic style)으로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색채가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런 풍경과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로레토 교회는 기적의 계단(Miraculous Staircase)과 못을 사용하지 않고 지은 건물로 유명하다. ‘기적의 계단은 성가대 자리와 연결된 나선형 모양의 계단으로 별도의 통로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갈 수 있는데, 우리는 주차가 늦어지면서 문을 닫아 볼 수 없었다. 이 교회는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나무로만 만들어진 것으로 유명하지만, 내게는 그보다 해질 무렵 내려앉은 석양과 어우러진 교회의 풍경이 더 인상적이었다. 교회 옆으로 청동으로 만든 기발한 형상의 바람개비들이 부지런히 돌고 있었고, 그 옆으로 작은 천막의 노점에서는 사람들의 작은 웃음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유쾌한 관광객들은 은행나무의 둘레에 서서 손을 맞잡고 웃고 있었고, 바람은 은행잎을 소리 내어 흔들고 있었다. 때마침 교회에서는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다. 덕분에 교회 내부를 볼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어서는 신부의 아름다운 미소와 그 뒤로 축복하듯 두 팔을 벌리고 선 소박한 예수상이 성스러웠다.

산타페 다운타운 상가의 멋스러운 간판들 

로레토 교회 근처의 다운타운 상가는 아주 독특한 활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다운타운의 멋스러운 상점이나 갤러리 등에서 사진을 찍어도 좋으냐고 물으면 예외 없이 밝고 활기찬 모습으로 허락해주었다. 상점마다 개성 만점의 간판을 내걸고 있었고, 표지판마다 재치가 넘쳤다. 다운타운의 상가나 노점에서 만나는 상인들은 대부분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특히 노점의 원주민들은 영어로 말을 건네도 스페인어로 답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건은 예상보다 비쌌지만 거침없고 유쾌한 수공예품들은 아주 매력적인 것이었다.

 

고추를 매달아 귀신을 물리치고 손님을 부른다는 리스트라()와 봄과 풍요를 약속하는 음악의 신인 코코펠리()

고추를 길게 묶어 걸어놓은 리스트라(ristra)나 호피족의 수호신이라는 코코펠리(Kokopelli)는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었다. 리스트라는 매운 것을 좋아하는 이곳 원주민들의 식생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지만, 귀신을 물리치고 손님을 환영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멕시코 음식점에 가면 붉은 고추를 길게 묶어놓은 리스트라를 보면서 그 의미를 물으면 대부분 그냥 고추 말리는 것이라고 맥 빠진 대답을 듣고는 했었는데, 산타페에 와서야 제대로 된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코코펠리는 봄과 풍요를 약속하는 음악의 신이란다. 코코펠리는 곱사등인데, 곱사등 안에 씨앗과 노래가 들었다는 호피족의 수호신이다. 리스트라와 코코펠리의 상상력은 즐겁고 간절한 희원이었다. 그 상상력은 절실한 만큼 소박하고, 신실한 만큼 재미있었다. 코코펠리는 캐릭터상품의 관점에서 보아도 디자인과 스토리텔링이 아주 뛰어난 캐릭터였다.

예술가의 도시답게 산타페 다운타운 곳곳에서 예술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어도비 건물이 늘어선 다운타운 거리에는 노점들이 내어놓은 수공예품과 함께, 예술작품들이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만지지 말고 눈으로만 보라는 어처구니없는 경고 문구 대신 자유롭게 보고, 만지고 즐기라는 듯이 거의 모든 작품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산타페 다운타운에서 만난 예술작품들

산타페 다운타운은 어도비(Adobe) 양식의 보고(寶庫)였다. 어도비는 원래 햇빛에 잘 말린 벽돌을 의미하는 말인데, 사막처럼 건조하고 일교차가 심해서 효과적인 단열이 필요한 지역에서 주로 활용을 했단다. 어도비는 모래, 진흙, , 나뭇가지, 거름 등을 넣어 만드는데 거름은 방충 작용을 한다고 한다. 어도비 양식은 저렴할 뿐만 아니라 내구성도 뛰어나 콘크리트보다 5-10배 정도 강하고, 기온과 습도를 유지하는 데에도 탁월한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유럽의 건축양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전통적인 푸에블로 인디언의 양식을 유럽에서 가져간 것이란다. 1950년대부터 뉴멕시코 주 정부는 산타페에서는 어도비 양식으로만 건물을 짓게 하고, 3층 이상의 건물을 짓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산타페 다운타운의 어도비 양식의 건물들

산타페 다운타운의 어도비 양식의 건물을 따라 걷다보면 유쾌한 작품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대부분의 수공예품들이 밝고 화려한 색깔로 치장하고 있으며, 표정과 몸짓이 더할 수 없이 즐거운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현실의 가혹한 면을 가사에 담고, 그 지독한 현실을 넘어서기 위한 의지는 후렴구에 담아 부름으로써 현실의 고뇌를 넘어서려했던 <청산별곡>처럼, 그들도 현실의 고단한 삶을 작품 속의 웃음을 통해 건너려 했던 것은 아닐까? 상점의 주인들도 대체로 밝고 친절한 모습이었지만, 노점에 나와 있는 원주민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거의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더할 수 없이 즐거운 표정과 몸짓을 보여주는 수공예품을 팔고 있는 모습은 무척 어색한 조화였다.

산타페 다운타운 상가에서 만난 춤추는 인디언()와 춤추는 곰()

숙소로 돌아오는 길의 시가지는 다운타운의 멋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낡고 쇠락한 것들이었다. 낡고 오래된 어도비 양식의 건물들이 쓰러질 듯 서 있었고, 간판들은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한 채 매달려 있었다. 붉은 색칠을 한 낡은 기차에는 흑백의 그림이 강렬하게 그려져 있었는데, 현대 원주민 예술 박물관(Museum if Contemporary Native Arts)에서 보았던 절제된 분노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 절제된 분노를 아는지 모르는지 도로 한 복판으로 기차가 지나고 있었다.

다운타운을 벗어난 산타페의 외곽은 또 다른 모습이었다. 붉은 기차에 흑백으로 그려진 원주민()과 부츠를 닦아준다고 써 붙인 원주민의 낡은 벤은 다운타운 노점에서 만났던 원주민의 무거운 표정처럼 느껴졌다. 

정지를 명령하는 붉은 신호등 옆으로 “DO NOT STOP IN BOX”라는 글귀가 쓸쓸한 위협처럼 쓰여 있었다. 문득 산타페에서 본 것과 보고도 보지 못한 것을 생각했다. 산타페는 많은 것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지만 미처 읽어내지 못한 것이 더 많다는 생각에 혼란스러워졌다. 숙소 옆 공터에서 부츠를 닦아준다는 원주민의 밴을 보면서 노점에서 만난 원주민의 무거운 얼굴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산타페의 밤은 아주 천천히 왔다. 아내와 아이들은 산타페의 오후에 깊게 매료된 표정으로 내일 만나게 될 산타페의 맨 얼굴을 기대하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가 만났던 산타페의 오후를 기록하고 정리하느라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1. 우리 가족은 I-HOP에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효진이가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레크리에이션 센터에서 상으로 30달러짜리 I-HOP상품권을 받아왔다. 레크리에이션 센터에서 가끔씩 상품을 걸고 재미있는 경연을 벌이는데, 그림을 그려서 받았단다. 그것을 가지고 토요일 점심에 온가족이 만족스러운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가격도 적당하고 음식도 좋았던 그 때의 기억을 되살려 아침은 I-HOP에서 먹기로 했다. [본문으로]
  2. 강인규, 앞의 책, p.77. [본문으로]
  3. 미국에서 도로공사를 할 경우, 경고 표지판 개수와 설치 위치 및 유도등에 대한 매뉴얼에 따라서 설비를 안전하게 설치한 이후에 작업을 한다. 이러한 매뉴얼은 작업의 규모와 상관없이 철저하게 지켜진다. [본문으로]
  4. 미국에서는 신호등 없는 교차로에서는 먼저 온 순서대로 진행을 한다. 처음에는 서툴고 불편하기만 했는데, 익숙해지니 무척 합리적인 방법이다. [본문으로]
  5. 미국 남자 화장실에서 소변기를 사용하는 순서에 대한 화장실 예절이 블로그나 웹사이트 등에서 종종 화제가 된다. 가령 다섯 개의 소변기가 있다면 첫 번째 사람은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의 소변기를 사용해야 하며, 두 번째 사람은 그와 가장 먼 소변기를 선택해야하고, 세 번째 사람은 가운데 변기를 고르는 것이 예의라고 한다. (강인규, 앞의 책, pp.59-61참고) [본문으로]
  6. 일 년 동안 있으려면 미국 운전면허를 발급받아야 한다고 해서 DMV(Department of Motor Vehicles)에 아내와 갔더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내는 면허시험 신청이 안 된단다. 같이 같던 솔이 엄마가 다른 창구에서 하면 될 것이라고 해서 다시 번호를 받아서 다른 창구로 갔더니 문제없이 면허신청을 할 수 있었다. 같은 사무실에서도 창구 담당자별로 다른 기준을 적용한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매뉴얼에 비추어 책임질 수 있는 한도까지만 책임을 지려고 하기 때문에, 각자의 책임 범위가 달라지고 그에 따라 사람마다 다른 기준이 적용된 예이다. [본문으로]
  7. 비가 내리길 기원하는 제사에서 산 사람의 심장을 꺼내서 신께 바치는 행위를 로마 교황청은 악마의 의식으로 판단하고 강력하게 금지시키고, 개종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8. 주교가 상주하는 대성당을 ‘Cathedral’이라고 부르고, 성채가 없는 예배당을 성당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에 교회 정도의 의미로 ‘Chapel’로 부른다고 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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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길도 버릴 길은 없다

86일 시카고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감기약 기운 때문인지 몸이 침대 밑으로 한없이 가라앉았다. 어젯밤 약을 먹고 잠이 들면서 춥기도 했지만 땀을 흠뻑 빼고 나면 개운해지리라는 생각에 긴팔 후드티를 입고 잠이 들었다. 옆에서 자고 있던 유진이가 아파서 새벽에 잠이 깼다. 약을 챙겨주었지만 유진이도 좀처럼 몸살을 떨치지 못했다. 빡빡한 여행 일정에 먹는 것은 부실한데, 날씨는 더워서 에어컨을 계속 틀고 달린 것이 화근이었다. 약을 먹고 땀을 흘린 덕에 조금 나아진 듯했지만 나도 순간순간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곤 했다. 본격적으로 시카고 시내를 돌아보기로 했는데 내가 아프면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 아무리 아파도 일정은 진행해야만 했다. 더구나 아침에는 형식이 부부와 아침을 같이하기로 약속을 했으니 더욱 기운을 내야만 했다.

아침부터 조금씩 비가 내리더니 그쳤다. 약속시간에 맞추어 형식이 부부가 숙소 로비로 왔다. 근처 한식당에서 아침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형식은 우리 아이들을 어렸을 때 보고 처음 보는 것이다. 그가 뉴욕지사 근무를 하느라 미국에 있는 동안 세월은 부지런히 갔고, 돌아왔을 때에는 아이들이 커서 제 각각의 일정을 소화하느라 가족끼리 만나는 모임을 별로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형식은 훌쩍 자란 유진이와 효진이 모습을 보고 놀라워했다. 더불어 우리 가족이 무모한 횡단여행을 감행하고 있는 모습에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고등학교 동창인 우리는 대학교 졸업 이후 각자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느라 늘 분주했다. 그러다보니 한국에서는 바쁘게 뛰느라 늘 피곤한 모습으로 만나곤 했었다. 그런데 시카고 지사로 나온 불과 몇 달 사이에 형식은 건강과 여유를 찾은 모습이었다. 형식의 눈에 나도 아마 그렇게 비춰졌으리라. 남의 나라에 와서 비로소 몸과 마음의 건강을 되찾은 것을 보면 한국에서 우리 생활이 가파르긴 가파른가보다. 치열하고 분주하기만한 우리네 일상의 정체를 남의 나라에 와서야 볼 수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형식이나 나나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이었다.

형식과의 인연은 중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로 다른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과외를 하면서 서로 알게 되었다. 형식은 그때나 지금이나 착하고 순해서 늘 주변에 친구들이 많았다. 중학교 2학년 3, 어렵게 부모님을 설득해서 평생 처음 과외를 막 시작했는데 바로 과외금지조치가 내려졌기 때문에 더 보지 못하다가,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친해졌던 친구다. 늘 함께 다니던 고등학교 친구들은 학교를 마치면 형식이네 집에 우르르 몰려가서 자주 놀았다. 과외도 학원도 없던 시절, 친구들과 만나면 딱히 무엇을 하고 노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형식의 집을 그대로 그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자주 다닌 만큼 그곳에서의 추억은 언제나 화수분이었다.

아침밥을 먹으며 형식은 내게 출발 전에 미리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핀잔을 했다. 친구에게 부담을 주는 것도 싫고, 무엇보다 우리로 인해 번거로워지는 것은 아내나 나나 딱 질색이었다. 형식의 아내는 집에 와서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먹은 것으로 하자고 사양했다. 내일 일정이 바쁘기도 했지만 갑자기 찾아와서 번거롭게 하는 것이 미안했기 때문이다. 그저 형식의 얼굴 보았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시카고는 보아야할 것이 많았다. 그중에서 뉴욕이나 워싱턴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은 빼고 시카고에서만 볼 수 있는 것 중에서 우선순위를 정했다. 아이들이 과학 산업 박물관(Museum of Science and Industry)을 보고 싶어 해서 먼저 그곳으로 갔다.

시카고 산업과학박물관 전경()과 뒤쪽 공원에서 주말을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과 임시로 설치한 놀이기구()

과학 산업 박물관은 1893년 시카고 만국 박람회 메인 회의장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라서 그런지 규모도 크고 고풍스러운 건축양식이 돋보였다. 건물도 건물이었지만 그 주변으로 조성된 공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주차를 하기 위해서 건물 뒤쪽으로 가보니 숲과 잔디밭이 큰 규모로 조성되어 있었는데, 주말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이 그곳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한가하게 즐기고 있었다. 음악을 틀어 놓고 가볍게 춤을 추는 사람들, 아이들을 위해 공기를 불어넣어 놀이기구를 설치하고 있는 사람들, 바비큐를 만드는 사람들, 앉거나 누워서 햇빛을 즐기는 사람들, 가벼운 운동을 하는 사람들……한가하고 평화로운 주말 풍경이었다. 제 각기 자신의 취향대로 즐기는 모습이 자유로워 보였다.

이렇게 주말을 즐기는 이곳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참 적극적으로 쉰다는 점이다. 한나절 쉬겠다고 차일부터 테이블, 의자, 간이침대, 앰프, 음악 믹싱기, 이동식 놀이기구, 엄청난 양의 음료와 음식을 트럭에 싣고 와서 일일이 그것을 설치하고 즐기는 모습이 놀라웠다. 그 많은 짐을 트럭에 싣고 내리는 일만해도 보통일이 아니었을 테고, 그것을 일일이 설치하는 일은 또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가? 거기에 바비큐 그릴을 설치하고 엄청난 양의 고기를 구우면서 마시고 노는 그들의 모습은 유쾌하고 건강해보였다. 아내와 늘 하는 말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쉬고 노는 것에 참 결사적이다.

산업과학박물관 내부(), 비상구에 새겨진 닐 암스트롱의 경구(), 로봇 팔을 체험하는 아이들()

미국 중서부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박물관이라더니 정말 산업과학박물관은 입구부터 사람들이 많았다. 어른 15달러, 어린이 10달러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서니 우주선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고 나올 때 찾아가란다. 물론 선택사항이다. 어디를 가나 이렇게 사진을 찍어주고 20-30달러를 요구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크루즈를 타기 전에 사진을 찍었는데, 크루즈를 마치고 나오니 금문교와 합성해서 멋진 사진을 만들어 두었었다. 크고 작은 사진과 작은 액자까지 포함해서 30달러에 판매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사진이 낯선 곳에 걸려 있다가 폐기되는 것이 꺼림칙해서 구입한 이후로는 이런 식의 사진은 찍지 않았다. 더구나 이곳에서 완성된 사진은 그리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박물관을 돌다보니 항목별로 몇 군데 사진촬영 장소가 더 있었다. 입장료 외에 수익을 내기 위한 노력이었다.

돌아보니 모든 전시물이 체험중심이다.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관람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만지고, 타보고, 조정하는 것이다. 전시물들은 대부분 초등학생들이 메인 타깃으로 보였다. 그러니 효진이가 좋아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유진이까지 좋아하니 다행이었다. 전시된 콘텐츠도 콘텐츠지만 그것을 즐기게 하는 방식에 빠져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해보면 나도 방학 숙제하느라 서울국립과학관을 찾았던 나이가 유진이보다 한 살 어릴 때였으니 1980년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책으로만 보고 외우고 평가하던 것들을 직접 체험한다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 일이었던지그때의 감동이 생각났다. 방학숙제 하느라 친구와 세운상가에 가서 라디오 조립 키트를 구입한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었는데, 서울국립과학관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배고픈 것도 모르고 문 닫을 때까지 있다가 집에 늦게 돌아와 꾸중을 들었던 기억까지 나면서 그때 같이 갔던 친구 우정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낯선 시카고에서 느닷없이 1980년 서울을 만났다.

미국식 유머인 샌드위치(), 동작센서에 의해 인터랙션하는 체험(), 공기분사 체험()

산업과학박물관은 기대했던 것보다 흥미진진했다. 박물관 초입에 놓여있던 몇 개의 전시물은 언어유희를 기반으로 추측해보는 것이었는데, 모래(sand) 위에 마녀(witch)가 날고 있는 모습을 보고 샌드위치(sandwich)를 연상하는 식이었다. 몇 개는 답을 찾고 아이들과 웃었는데, 몇 개는 도통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양한 종류의 과학실험도 실험이었지만 일상 속에서 궁금했던 것들을 중심으로 체험코스가 구성되어 있었다. 가령 대형 트랙터와 영상을 결합하여 옥수수를 어떻게 수확하는지를 보여주는 체험 프로그램의 경우에는 옥수수대를 자르고 낱알을 수확하는 일련의 과정이 기계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실물의 단면을 잘라서 보여주고, 트랙터를 실제로 조정해볼 수 있게 하였다. 1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의 군함과 상선을 5,000척 이상 격침시켰다는 독일 잠수함 U보트(U-boat)의 실물을 전시하고 내부도 둘러볼 수 있게 하였다. U보트는 역사적 맥락을 누락한 채 전설의 잠수함으로 전시도리 뿐이었다. U보트 전시관 끝에는 예상대로 U보트 관련 상품들을 팔고 있었다.

체험할 것이 많다보니 관람 속도는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실내는 냉방이 너무도 잘되고 있어서 몸살을 앓고 있는 나는 몹시 추웠다. 몸이 으슬으슬 거리고 이곳저곳이 쑤셔왔다. 무리했다가는 나머지 일정과 내일 이동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았다. 그렇다고 관람을 멈출 수는 없고, 아내에게 잠깐만 차에 가서 쉬고 오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차로 돌아갔다. 직사광선으로 차 안은 무척 더웠다. 창을 조금 내리고 직사광선은 조금 가리고 한 시간쯤 그곳에서 몸을 데웠다. 마치 샌프란시스코나 몬트레이에서 만났던 바다사자가 햇볕에 몸을 데웠던 것처럼. 그래서인지 평소 같았으면 찜통처럼 느껴졌을 차 안이 오히려 고마웠다. 한 시간쯤 차 안에서 기운을 차리고 다시 산업과학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산업과학박물관은 그곳에 가야만 볼 수 있는 유니크한 아이템을 전시했다거나 굉장한 과학현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인기가 높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일상 속에서 궁금해 하는 것을 직접 체험하게 함으로써 스스로 이해할 수 있게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산업과학박물관의 모든 프로그램은 직접 만지고, 타보고, 체험하게 하는 것들이었다. 관람자 수가 연간 400만 명에 달한다니 그 체험의 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울러 과학과 산업을 절묘하게 통합하고 있다는 점과 박물관과 외부의 공원이 유기적으로 잘 연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가족 전체가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보아야할 부분이었다. 박물관도 보고 가벼운 피크닉도 즐길 수 있다면 주말 프로그램으로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빼어난 것은 시설이나 전시물이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고 연출하는 힘임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산업과학박물관을 보다가 또 점심때를 놓쳤다. 이미 4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밀레니엄 파크나 시카고 미술관을 보기에는 시간이 애매하고, 몸도 좋지 않으니 시카고의 명물이라는 우노 피자를 먹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일종의 여행 중 조퇴였다. 그러지 않고서는 내일 일정을 장담하기 어려운 몸 상태였기 때문이다.

미시건 호를 따라서 달리는 도로()와 미시건호 주변에서 세그웨이를 즐기는 사람들()

차로 달리면서 보니 미시건호 주변에서 다양한 레포츠를 즐기고 있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다양한 레포츠를 즐기는 모습이 여유로워보였다. 오클라호마 과학관에서 체험했던 세그웨이를 타고 호수도로를 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평화로웠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잔디밭에 누워서 햇빛을 즐기는 사람들, 가벼운 공놀이를 하는 사람들, 멀리 요트를 타고 나간 사람들까지 한가로운 주말의 풍경이었다.

시카고에서 보아야할 것이 어디 한가롭게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일까 마는 내게는 그 모습이 제일 눈에 들어왔다. 어디로 달려가는지도 모르고 분주하기만한 한국에서의 내 생활 때문이었을까? 평소에도 보면 미국인들은 평일 저녁에도 운동장에 불을 켜고 운동을 즐긴다. 어디 그뿐인가, 야구, 축구, 농구, 아이스하키 등을 시즌별로 나누어 일 년 내내 직접 즐기는 모습은 부러움을 넘어서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우리는 업무를 마치고도 업무의 연장인 약속이 계속되고, ‘월화수목금금금이 반복되는 생활인데, 여기서는 그런 경우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 단지 마음가짐의 차이만은 아니리라. 사회적 합의와 분위기가 그런 시스템을 구축하였을 것이다.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일하고 노력하는 것일 텐데 본말이 전도된 것 같아 자꾸 그들의 모습과 견주어 보게 되었다.

시카고 시내(), 보도 위에 새겨진 이정표(), 주차 표지판()

시카고에 가면 피자를 꼭 먹어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우노 피자나 지오다노 피자가 그것인데, 이왕이면 우노 피자를 먹어보라고 했다. 시간이 된다면 둘 다 먹어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구글 지도로 확인해보니 우노 피자를 먹을 수 있는 피제리아 우노’(Pizzeria Uno) 레스토랑과 지오다노 피자를 먹을 수 있는 지오다노’(Giordano's)는 그리 멀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피제리아 우노에서 피자를 먹고, 이어서 지오다노로 가서 피자를 먹겠다는 행복한 계획을 세웠다. 우선 피제리아 우노로 갔다.

피제리아 우노는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비교적 저렴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이곳은 주차장이 없어서 근처에 블루밍데일즈 백화점에 주차를 했다. ‘피제리아 우노앞에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이미 많았다. 생각보다 레스토랑의 규모는 크지 않았고, 테라스에서도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예약을 해주는 아가씨가 1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예약을 하고 블루밍데일즈 백화점에서 아이쇼핑을 하다가 시간이 되어서 갔더니 기다리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조금 기다리는 사이 먼저 주문을 하란다. 그러면 자리와 동시에 피자가 나온단다. 주문을 하고 있으려니 바로 자리가 났다. 1943년에 처음 영업을 시작한 장소라서 그런지 낡은 건물과 소박한 인테리어가 오히려 정겨웠다. 실내는 조금 어두운 편이었고, 테이블 사이가 그리 넓은 편은 아니었지만 다행히 우리는 비교적 넓은 자리에 앉게 되었다.

피제리아 우노(), Numero Uno 피자()

옆 테이블에서 젊은 아가씨 혼자서 피자를 먹고 있었는데 그 두께와 양을 보고 놀랐다. 메뉴에는 딥 디쉬(Deep Dish) 피자라고 적혀있었는데 옆 테이블을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피자 팬의 깊이가 무척 깊었기 때문이다. 양이 넉넉해 보였지만 먹성 좋은 우리 가족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고 믿고 Numero Uno Pizza 라지 사이즈로 시켰다. 피자가 나온 것을 보니 양이 생각보다 더 많았다. 게다가 효진이는 미트볼 스파게티, 유진이는 샐러드를 시켰으니 양이 더 많아졌다. 아이들이 오늘은 제대로 먹는 날이라고 판단한 모양인지, 아니면 어제 아내의 말을 기억한 것인지 모두 시키고 싶은 것들을 시켰다. 음식은 예상대로 모두 양이 넉넉했다. 특히 피자 반죽이 아니라 파이 반죽으로 만든다는 두툼한 도우(dough)의 양이 많다보니 결국 피자는 1/2밖에 먹지 못하고 가져와야 했다. 미트볼 스파게티는 미트볼은 맛이 있었으나 스파게티는 싱거워 기대만 못했지만 샐러드는 야채와 소스가 신선했다. 물론 피자의 맛은 아주 감동적이었다. 조금 많다싶을 정도로 넉넉한 토핑의 신선한 풍미와 치즈의 식감 그리고 두툼한 도우의 바삭함이 어우러져 일품이었다.

사람들은 피자를 먹으며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 삭스 간의 야구경기 중계를 보고 있었다. 이곳이 시카고니 당연히 이만수 감독이 한국인 최초의 유급코치로 활동하던 시카고 화이트 삭스 경기를 볼 줄 알았는데, 뉴욕과 보스턴의 경기를 보는 그들의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미국인들에게는 영원한 라이벌인 뉴욕 양키즈와 보스톤 레드삭스가 가장 인기 있는 팀이라고 들었는데, 시카고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었다. 각자 피자를 먹거나 맥주를 마시면서 응원하는 팀의 안타나 호수비에 조금씩 흥분하는 그들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나는 시카고 맥주를 한 잔 시켜서 피자와 같이 먹었다. 시카고 맥주는 가벼운 느낌이었지만 향이 깊은 묘한 맛이었다. 물맛이 중요한 맥주는 반드시 현지 맥주를 먹어야 그 맛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시킨 것은 한 잔이었지만 500cc 정도 되는 양이 나왔다. 피자도 그렇고 맥주도 그렇고 양이 참 넉넉했다. 이탈리안 식당 특유의 넉넉함이었을까? 운전을 해야 했기 때문에 아내와 나누어서 천천히 마셨다. Numero Uno Pizza 라지 사이즈 가격이 27.29달러니 한국 피자 가격을 생각하면 그리 비싼 것은 아니었다. 피자를 먹고 나자 우리 중 누구도 지오다노 피자를 먹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가 두 곳의 피자를 다 먹겠다고 세웠던 계획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지 다 먹지 못하고 싸온 우노 피자가 알려주고 있었다.

주차비를 정산하고 보니 25달러였다. 조금만 더 지체했으면 피자 값보다 주차비가 더 클 뻔했다. 토요일인데도 시카고 시내를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곳곳에 공사 중이어서 사만다의 데이터가 어긋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카고 외곽에서는 교통체증으로 사만다가 우회로를 택했는데, 거기서 헤매는 바람에 평소보다 일정을 빨리 마쳤음에도 늦게 숙소로 돌아왔다. 갈 때 길과 올 때 길이 달랐으니 좀 더 많은 것을 본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길을 잃고 헤매면서 발견하는 길들은 대체로 나름의 운치와 체험을 주는 것들이었는데, 시카고도 예외는 아니었다. 살면서 버릴 경험이 없듯 어떤 길도 버릴 길은 없었다.

사람들이 세상 모든 길을 다녀보았다고 해도 세상에는 늘 아직 다녀보지 않은 더 많은 길들이 있게 마련이다. 길은 언제나 새로 생기고 없어짐으로써 새로운 길이 되는 까닭이다. 중요한 것은 길이 아니라 그 길을 걷고 있는 내 자신이다. 어느 길이든 볼 것이 있고 없고를 결정하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그 위를 걷는 자의 체험이다. 항상 체험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다. 하여 단지 두 지점을 연결할 뿐인 속도의 길은 길이 아니라 도로일 뿐이다. 도로는 속도를 이야기할 뿐 그 안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들은 대체로 새롭거나 내게 변화를 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던가?

다행스럽게도 횡단을 통해 만나는 그 모든 길들은 아직 우리에게 길로 기억되고 있다. 체험으로 구성되는 우리의 길들이 어떠한 새로움과 변화를 가져올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올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러한 나의 낙관적 기대가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지금 가고 있는 이 길과 관계되리라는 것은 안다. 아직은 그것으로 족하다.

몸이 아프니 상념만 깊어진다. 사위는 온통 어둠인데 의식은 또렷해질 뿐이다. 조바심은 집에 두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길 위에 오르고 나니 그 몹쓸 습벽이 살아나나보다. 하지만 굳이 따라온 녀석을 내칠 일도 아니리라. 그게 우리의 길이고 여행의 스타일이라면 우리 스타일대로 따르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당위적인 답안을 가지고 출발한 여행이 아니지 않는가? 길이 데려다 주는 곳에서 우리가 함께 어우러지는 자연스러운 속도가 횡단여행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하니 이제 조바심도 따라온다면 데리고 다녀야겠다.

내일은 밀레니엄 파크와 시카고 미술관을 들렸다가 클리블랜드까지 달려야 한다. 오늘 몸 상태로 봐서는 내일 일정이 결코 만만하지 않으리라. 며칠째 먹고 있는 감기약은 독할 뿐 좀처럼 감기를 떨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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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를 기억하는 가장 황홀한 방법

87일 시카고클리블랜드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어제 남겨온 피자로 아침을 해결하고 호텔을 나설 때까지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 비가 내려주니 반가운 일이었지만 몸살기운이 아직 남아 있는 상태다보니 그리 반가운 것만은 아니었다. 다행히 비는 밀레니엄 파크로 이동하는 중에 그쳤다.

오늘은 클리블랜드까지 371마일(594)을 이동을 해야 하니 서둘러야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에서는 딱히 볼 것을 정하지 못한 상태라서 밀레니엄 파크(Millenium Park)와 시카고 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을 보고 시카고에서 느지막이 떠나기로 했다.

여행계획을 짤 때도 클리블랜드가 문제였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추신수 선수 외에는 클리블랜드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는 형편이다 보니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은 아니었다. 게다가 시카고에서 나이아가라까지 10시간 정도 거리니까 무리하면 못 달릴 거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일정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만약 지체되면 클리블랜드를 생략하고 나이아가라로 가서 시간을 벌어볼 요량으로 설정해 둔 것이 클리블랜드였다. 다행히 여행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으니 가능한 한 시카고에서 늦게 출발하고, 클리블랜드에서는 잠만 자고 일찍 나이아가라로 이동하자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의 기억이 정말 좋았던 우리는 시카고 미술관을 꼭 들러보기로 했다. 또 시간이 된다면 밀레니엄파크도 보려고 했는데, 마침 두 곳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어서 별 어려움 없이 두 곳을 모두 관람할 수 있었다.

사실 시카고에 도착하면서부터 사만다가 거의 패닉상태였다. 여기저기 공사하는 곳도 많았고, 유난히 많은 고가도로 밑에서는 수신이 원활하지 못해서 결정적인 순간에 길을 잃고는 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어서 시카고 시내로 진입하면서부터 사만다는 다급해지거나 침묵했다. 물론 두 경우 모두 사만다의 도움이 절실한 순간들이었다.

길을 잃고 다시 만난 길(), 그 와중에 만난 시카고 극장()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는 일은 새로운 길을 만나는 일과도 같다. 시카고에서 사만다는 자주 길을 잃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사만다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저 길을 잃으면 새 길을 만날 수 있겠구나 위로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보니 문득 시카고 극장 앞이었다. 1921년에 개관한 시카고 극장은 미국 최초의 대형 극장이라고 한다. 파리의 개선문을 축소한 모양인데 특히 건물 앞에 걸린 초대형 붉은 간판이 선명했다. 그 앞에서 롭 마샬 감독의 영화 <시카고>(Chicago, 2002)[각주:1]가 떠오른 것도 그 붉은 간판의 선명함 때문이리라. 영화 <시카고>에서 보여준 뜨거운 욕망을 지금 이곳시카고에서 보기에는 머물 시간이 너무 짧았다. 주중에 그토록 분주하고 혼잡스러웠던 시카고의 일요일 오전은 서울의 그것처럼 한가하고 차분해서 오히려 처연한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처연한 기분은 밀레니엄 파크에 도착하면서 이내 사라졌다. 밀레니엄 파크 건너편 시카고 미술관 옆에서 음악공연이 있어서 공연 몇 시간 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흥성스러운 분위기로 차고 넘치고 있었다.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 지도

밀레니엄 파크(Millenium Park)는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기념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완공은 2004년에 했다고 한다. 음악공연 관계로 경찰들이 교통을 통제하고 있었고, 밀려드는 차들로 정신이 없었는데, 다행히 밀레니엄 파크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할 수 있었다. 밀레니엄 파크는 야외 음악당인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Jay Pritzker Pavilion), 크라운 분수(Crown Fountain), 루리가든(Lurie garden), 크라우드 게이트(Cloud Gate, 일명 Bean)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차를 하고 올라오니 왼쪽으로 루리가든(Lurie garden)이었다. 피에 아우돌프(Piet Oudolf)가 설계했다는 루리가든은 부단히 변해가는 자연의 모습을 일 년 내내 보여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고 해서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나중에 보니 입구는 남쪽 끝에 있었는데 우리는 주차장에서 바로 북쪽으로 걸어가서 찾았으니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선 곳을 중심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그것이 전부라고 우기는 일상의 실수를 다시 한 번 반복한 것이다. 어쩌면 이미 마음을 시카고 미술관에 빼앗기고 있어서 입구를 찾지 못했었는지도 모른다.

루리가든 앞쪽으로 걸어가 보니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설계했다는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Jay Pritzker Pavilion)이 등장했다. 웅장한 스테인리스 스틸 구조물을 머리에 얹고 있었는데 그 앞으로 객석과 대규모 잔디밭(Great Lawn)을 두고 있었다. 특이했던 것은 잔디밭 위까지 스테인리스 봉 구조물이 그물처럼 감싸고 있었다.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Jay Pritzker Pavilion) 전경과 지붕

잔디밭을 덮고 있는 스테인리스 봉 구조물에는 조명이 매달려 있었고, 그 사이로 근처의 고층빌딩들이 들어와 있었다. 공연장을 포함해서 전체적으로 누에고치 모양을 이루고 있는 스테인리스 봉 구조물은 지붕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봉과 봉이 만들어내는 프레임 사이로 주변의 고층건물들이 들어오고, 그것은 보는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프레임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러한 연출은 밀레니엄 파크가 시카고 다운타운의 스카이라인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마련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공연장 지붕을 덮고 있는 조형물만큼이나 이 봉 구조물의 다채로운 프레임이 신선하고 매력적이었다. 평소에는 잔디밭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운동을 하는 모양이었는데, 비가 온 뒤라서 그런지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텅 빈 공연장만큼 스산한 풍경은 없다. 일요일 오전, 비가 내린 후의 야외 공연장은 그저 푸른 잔디밭일 뿐이었다.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은 공연장으로 설계된 것이지만,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에 의해 매일매일 새 작품으로 탄생하고 있다. 공연장에서 연출되는 공연의 내용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보는 사람의 위치와 시간에 따라서 달라지는 공연장의 조형물뿐만 아니라 스테인리스 봉 구조물도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통합적인 프레임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곳을 즐기는 사람들까지 공연장과 잔디밭을 오간다면 더할 수 없이 훌륭한 설치미술작품이 아니겠는가?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을 보고 잔디밭을 가로지르면 애니쉬 카푸(Anish Kapoor)가 만든 크라우드 게이트(Cloud Gate)가 나타났다. 크라우드 게이트를 보는 순간 일단 그 크기(높이 10m, 너비 13m, 길이 20m)에 압도된다. 밀레니엄 파크의 방문 인증샷에 반드시 등장하는 이유를 보고나서야 알 수 있었다. 이 작품은 110톤이 넘는다는 무게와 크기도 크기였지만 무엇보다 스테인리스를 이음매 없이 이렇게 만들어냈다는 것에 한 번 놀라고, 바람과 안개 그리고 추위로 유명한 시카고의 일기를 생각할 때, 반사가 가능할 수 있도록 유지되는 표면에 두 번 놀라고,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 달라지는 모습에 세 번 놀라게 된다.

크라우드 게이트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자신을 비추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제목을 보면 구름을 형상화한 것인데, 영감은 액체수은에서 얻었다고 하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이것을 콩(Bean)이라고 부르니 재미있다. 어쩌면 이러한 어긋남 혹은 다양성이 이 작품의 힘이 아닐까 생각했다. 작품 밖에서는 도시의 스카이라인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 굴절되어 반사됨으로써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나고 있었다.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이 프레임을 통해 세계를 낯설게 만들었다면, 크라우드 게이트는 되비춤을 통해서 세계를 깨우고 있었다. 게다가 이 두 작품이 밀레니엄 파크라는 동일한 공간 안에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통합적인 체험을 가능하게 했다.

크라우드 게이트(Cloud Gate, 일명 Bean)의 모습과 다양한 상호작용의 사례

크라우드 게이트는 중앙에 3.7m의 움푹 팬 공간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다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언제 다른 사람과 함께 거울 앞에 서 보겠는가? 게다가 그것이 낯선 모습의 나와 너라면 그것은 더욱 매력적이지 않겠는가?

가족들 사진도 찍고 모두들 즐거워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강하게 밀었다. 어디 가나 만날 수 있는 중국인 관광객들이다. 게다가 젊은이들이었다. 무례하고 세련되지 못한 중국의 오늘을 보는 것 같아서 씁쓸했다. 횡단 여행 중 곳곳에서 만나는 그들의 모습은 무례를 넘어 난폭하기까지 했다.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의 지갑으로 바뀌고 있는 중국의 모습이야 뭐랄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쇼핑센터와 아울렛 등을 휩쓸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중국에서 만났던 그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LA 인근 쇼핑센터와 아울렛 등에서는 중국인 전담 종업원을 두고 그들의 취향에 맞는 상품을 구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보니 소위 소공녀소공자라고 불리는 중국 젊은이들의 무례함[각주:2]은 그 끝을 모른다. 뭐라고 한 마디 하려고 뒤를 돌아보니 10여명의 젊은이들이 자기들끼리 원을 만들어 웃고 떠들며 주변은 무시한 채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다. 더 불쾌해질 것 같아서 무시하기로 했다. 더블어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폭력이 폭력을 부르듯 무례는 무례로 대가를 치른다는 것을 그들도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

크라우드 게이트 옆으로 조금 이동하니 크라운 분수(Crown Fountain)가 있었다. 하우메 플렌사(Jaume Plensa)가 설계를 했다는 이 작품은 제작을 위해 천만 달러를 기부했다는 레스터 크라운(Laster Crown)의 이름을 따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15.24m 높이의 두 개 기둥에는 LED 스크린이 설치되어 13분마다 얼굴이 비디오 이미지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두 시카고 시민들이라고 하니 공공미술(public art)의 전범을 보는 것 같았다.

주변과 소통하면서 순간순간 완성과 해체를 거듭하는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과 크라우드 게이트 그리고 크라운 분수까지, 밀레니엄 파크을 구성하고 있는 작품들은 그곳을 찾아 즐기는 사람들에 의해 구현될 수 있는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성과를 보면 새 천년을 기념으로 공원을 조성하며 시카고가 고민했던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더블어함께 하는 상호소통의 장(), 그것이 새천년의 시카고에서 이루어지길 기원한 내용이었으리라. 밀레니엄 파크를 구성하는 개개의 독립적인 작품들뿐만 아니라 작품들 간의 소통은 물론, 주변 환경 그리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과도 상호소통을 통해서 밀레니엄 파크의 지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밀레니엄 파크를 구성하고 있는 작품들을 보면서, 시카고 미술관에는 아직 입장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미술관 안에 벌써 들어와 버린 느낌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작품들의 이름이 대부분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점이었다. 이름까지 좀 더 멋스러운 것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이름을 내주고 이런 작품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어쩌면 그 이름까지 이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도 함께.

시카고 미술관 전경과 입구 그리고 실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보스턴 미술관과 함께 미국 3대 미술관이라는 시카고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은 밀레니엄 파크와 니콜라스 다리(The Nicholas Bridgeway)로 연결되어 있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이어 규모 면에서도 미국 내 2위에 해당한다는 시카고 미술관은 26만점의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연간 180만 명 이상이 다녀간다고 한다. 1866시카고 디자인 아카데미에서 출발하여 시카고 대화재 이후 시카고 아트 아카데미를 거쳐 1882시카고 아트 인스티튜드로 이름을 바꾸고 미술관과 미술교육기관을 구성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893콜럼버스 세계 박람회가 열리자 박람회 이후에 미술관으로 사용하는 조건으로 건축했던 것을 바탕으로 추가 증축한 것이다.

우리는 니콜라스 다리를 통하여 2009년에 증축했다는 현대관으로 들어갔다. 어린이들은 무료고 어른은 18달러의 입장료를 냈다.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은 시민들의 교양을 위해 무료였고, 시카고미술관은 어린이들은 무료인데, 둘 다 신선했다.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문화공간의 무료관람을 우리도 진지하게 고민해야할 때가 아닐까? 1층은 18-19세기 미국 미술, 2층은 미국 모더니즘을 테마로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고호, 세잔, 르노아르, 피카소, 고갱, 모네, 샤갈 등의 그림은 누가 보아도 그들의 그림이 아니던가? 그들의 그림이 전시된 갤러리 밖에서 만난 강렬한 느낌의 그림들은 그림 옆에 붙은 작가의 이름과 작품명 그리고 작품 설명을 보고서야 미국작가들의 작품임을 알았다. 특히 시카고 미술관에서 꼭 봐야한다고 소개된 그림들은 그 소개가 아니더라도 미국적인 색채와 분위기로 인해 그림 앞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Nighthawks>

스로우 호머의 <The Herring Net>

아치볼드 모틀리 주니어의 <Nightlife>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각주:3]<Nighthawks>는 깊은 밤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 작품에서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격식을 차린 복장으로 바에 앉아 있는 사람들, 커다란 유리창으로 밖을 내다볼 수 있는 구도지만 사실은 자신들이 보여지는 아이러니의 공간, 늦은 시간까지 함께 하고 있지만 정작 시선은 모두 어긋나고 있는 관계의 메타포, 텅 빈 듯한 공간의 구도 등이 어우러져 도시의 공허함이 느껴졌다. 아치볼드 모틀리 주니어(Arcibald J. Motley Jr.)<Nightlife><Nighthawks>와는 상반된 분위기였지만 그 역시도 소란스러운 공허가 읽히는 작품이었다. 윈스로우 호머(Winslow Homer)<The Herring Net>는 프레임 안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꽉 찬 두 어부와 청어 그물이 거센 파도와 함께 고된 노동의 압박으로 다가왔다.

미술관에 들어서면서부터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돌면서 같이 보고 그 느낌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들 뒤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따라갔다. 어리기만 하다고 생각한 아이들이 아내와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하는 장면은 감동적이었다. 손을 잡고 때론 어깨를 걸고, 옆에 세우기도 하고 앞에 안기도 하면서 좋은 그림을 가족들이 함께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분명 눈물 날 정도로 고맙고 감동적인 모습이었다.

그런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혼자 감상에 젖어서 내가 미술관을 처음 갔을 때가 언제였을까 생각해보았다. 분명한 기억은 없지만 미술관다운 미술관을 가본 것은 대학교 입학한 이후였을 것이다. 미술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미술책이 전부였던 내에게 미술관은 차라리 강박에 가까웠다. 꼭 가서보아야 한다고 늘 느끼고 있었지만 정작 가서는 낯설고 불편했던 공간이 미술관이었다. 대학원 시절 화집을 사서 모으던 동기가 있었는데, 그 모습에 묘한 질투를 느끼기도 했었다.

아내와 아이가 함께 그림을 보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아이들이 가족과 함께한 이 체험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엄마 품에 안겨서 고갱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는 따듯한 체험은 살면서 그리 흔한 일이 아니지 않는가?

나는 아이들이 이렇게 어린 나이에 세계적인 작품들을 코앞에서 직접 보고 있으니 얼마나 설레고 신날까 라고 생각했는데, 몇 개의 갤러리를 돌고나자 아이들의 표정이 아니었다. 의자가 있으면 자꾸 앉으려 하고 몹시 지쳐있었다. 아내와 나는 서운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서 이 작품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일러주고 좀 더 많이 돌아보아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림에 흥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이 작가들을 도통 몰랐다. 어린 효진이는 그렇다고 쳐도 유진이는 알 것이라고 생각하는 작가들조차 모르고 있었다. 요즘 미술시간에는 그런 식으로 배우지 않는단다. 생각해보면 이 작품이 누구의 무슨 작품인지 외울 이유는 또 어디에 있겠는가? 전시회에 가면 작품 옆에 다 적혀있지 않은가? 작품을 보고 좋으면 어느 작가의 작품인지 돌아보면 될 일이었다. 그저 작품을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으면 족할 것이라는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힘들면 엄마랑 아빠가 보는 동안 쉬어도 좋다고 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제법 많은 방을 같이 따라다녔다. 세상에 버릴 체험이 어디 있겠는가? 작품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손잡고 작품을 설명해주던 엄마의 손길, 안고 이야기해주던 엄마의 체취만이라고 기억할 수 있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따듯한 기억이 될 것인가? 세계적인 명화도 명화였지만 그 앞에서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으로도 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외로 시카고 미술관에는 동양 예술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개인들의 소장품을 기증받아 전시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그림이나 도자기가 많았고 우리 것은 거의 없어서 아이들은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는 아이들에게 이 작품들이 모두 합당한 경로로 이곳에 이르렀을까 하는 의문이 던졌다. 전시된 개인 소장품들은 대부분 고서화나 오래된 도자기들이었는데, 그것이 약탈이나 밀반출에 의한 것이라면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소장하게 되었더라도 유실 가능했던 것들이 잘 보존되었다면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가? 약탈이나 밀반출의 결과임이 분명한데도 단지 돈을 지불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개인의 소유로 볼 수 있는가?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그러한 방식으로 박물관을 채우고 그것을 세계 최고 박물관 운운하는 것은 정당한가? 등등.

문화유산이라는 것이 창작된 그 나라에만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다른 나라로 나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납득 가능한 이유와 대가가 지불되어야만 할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일방적인 약탈이나 불법적인 밀반출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의당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적어도 그러한 소유를 부끄럽게 여기지는 못할망정 자랑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사정은 중국이나 일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문화유산을 알리기 위해서 합법적으로 대여한 것이 아니라면, 남의 나라 미술관에서 자기 나라 유물들이 많고 적음을 따지고, 그 결과에 따라 문화적 자존심 운운하는 것은 또 다른 인정투쟁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우리문화를 알리기 위한 노력이거나 합법적인 경로로 마련한 소장품을 전시하는 것이라면 제대로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조차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구태의연한 몇 개의 전시물로 과연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작고 소박한 한국관을 보면서 갑자기 맥락 없는 생각만 많아졌다.

아내와 나는 더 돌아보고 싶은데 유진이가 감기의 여파로 영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효진이가 피곤하다고 투덜대기 시작했다. 원래는 가급적 해가 지기 전에 클리블랜드에 도착하겠다는 생각으로 적어도 2시쯤에는 관람을 마칠 계획이었다. 시카고에서 끝나는 것이 Route66만은 아니었는지 아이들의 체력도 급격히 떨어져 있었다. 좀 더 보겠다는 욕심에 점심을 먹지 않고 돌았는데, 상황이 이러니 다 보지도 못하고 관람을 마쳐야만 했다. 시카고 미술관은 제대로 보려면 2-3일쯤 여유가 필요할 것이라고 아내와 이야기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어쩌면 미술관을 하나의 단위로 보고 책 한 권 읽듯이 다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강박에 가까운 것이리라. 문화에 모두, 전부, 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개개로서 의미가 있고, 그것을 체험하는 향유 자체가 문화가 아니던가?

태평천하를 쓰려고 했던 것 같은데 태평천정이 된 조악한 기념품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미술관을 나서면서 입구의 기념품점에 들렀다. 기억이 될 기념품이 있으면 하나 사려고 했는데 살만한 것이 없었다. 태평천하(太平天下)가 써져 있어야 할 곳에 태평천정(太平天丁)이라고 적힌 기념품을 보면서 저것도 혹시 중국제품이라면 웃지도 못할 상황이 아닐까 라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기도 했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조악한 모조품들이 많아서 실망스러웠는데, 특히 엉터리로 한자를 써놓은 기념품들을 보면서 씁쓸했다. 시카고를 떠나면서 시카고 미술관을 다 둘러보고 가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분명 과욕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더할 수 없는 행운이 되었다. 모든 기억은 그때그곳이 만나는 곳에 있다. 그렇다면 다음에 기회가 되어 다시 이곳을 방문하더라도 이 오늘의 감동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래서 더 욕심나고 더 아쉬웠는지도 모른다.

시카고를 마지막으로 여행의 1단계인 Route66 코스는 마쳤다. 이제 클리블랜드부터는 여행의 2단계에 돌입한다. 본격적인 동부여행이다. 풍광이나 기후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클리블랜드까지 I-90I-80타고 갔다. 이 도로들은 이전까지의 도로들과는 다르게 유료도로기 때문에 서비스플라자(Service Plaza)가 설치되어 도로를 벗어나지 않더라도 쉴 수 있게 만들어졌다. 서비스플라자는 주유소, 패스트푸드점, 커피전문점, 피자집 정도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동안 보아온 주유소나 패스트푸드점과는 브랜드가 바뀌어 있었다. 달리면서 몇 군데 서비스 플라자에 들러보니 대부분 bp주유소, 버거킹, 피자헛, 스타벅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이곳의 서비스플라자도 제품 대비 가격이 다소 비싼 편이었다.

시카고 스카이웨이 톨게이트(), 클리블랜드로 가는 길에 만난 철교()

아직 유료도로가 시작되기 전인 시카고를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아이들 점심을 먹이기 위해 내려섰는데 결국 찾지 못하고, 감기약만 구입해서 올라왔다. 시카고에서 시작된 사만다의 혼란은 여기서도 계속되고 있어서, 일러준 그대로 달려가다 보면 공사 중이거나 막힌 길이었고, 목적지라고 해서 보면 낯선 건물이었다. 그렇다고 사만다를 무시하고 표지판만 보고 음식점을 찾기에는 찾아야할 지역이 너무 넓었다. 그럴 때는 빨리 포기하고 다른 곳을 찾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는 것을 이번 여행에서 뼈저리게 배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료도로를 만나 서비스플라자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마지막 남은 컵라면과 계획보다 많이 남은 햇반

8시가 지나서 클리블랜드에 도착했다. 비교적 저렴한 숙소를 잡았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숙소는 기대보다 괜찮았다. 더구나 아침까지 제공해주니 금상첨화였다. 문제는 저녁이었는데, 딱히 먹을 만한 곳이 없어서 마지막 남은 컵라면 2개와 햇반을 데워 식사를 했다. 이제 슬슬 김치가 그립기 시작했다. 그나마 느끼한 현지식을 견딜 수 있게 해주던 컵라면이 떨어졌으니 큰일이다. 한인마트를 찾아야 구입할 수 있을 텐데, 일정에 쫓기다보니 한인마트 찾기가 쉽지 않다. 이곳까지 오면서 예상보다 컵라면은 많이 먹었고, 햇반과 3분 카레 등은 기대만큼 먹지 않아 많이 남았다. 아이들은 슬슬 햇반의 어정쩡한 온도와 흐물거리는 3분 카레의 식감에 물리나보다. 나도 그러니 어린 것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래도 군말 없이 잘 참아주니 고맙고 대견하다.

내일은 일찍 나이아가라로 출발해야 한다. 일찍 출발할수록 좀 더 많이 보거나 천천히 깊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숙소를 예약하면서 실수로 캐나다 쪽 숙소를 잡은 덕분에 내일은 국경을 넘어야 한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미국 쪽보다 캐나다 쪽이 더 멋있다고 위로하며 출발 전에 학교 인터내셔널 오피스에서 입출국에 필요한 서류를 받아왔다. 미리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미국과 캐나다의 입출국사무소 관리들의 태도가 무척 다르다던데, 기대가 된다. 실수는 대부분 좋은 경험이 된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1. 1924년 시카고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진 연극작품을 1975년 뮤지컬로 만들어져 큰 성공을 거자 2002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은 르네 젤위거, 캐서린 제타 존스, 리차드 기어가 출현한 뮤지컬 영화다. 재즈, 갱, 관능, 쇼 비즈니스 등과 같은 시카고의 이미지와 황색언론, 살인 등의 대중적인 요소들을 통합해서 구현한 뮤지컬영화다. 영화에 등장하는 'All That Jazz'와 'Roxie' 같은 넘버가 유명하다. [본문으로]
  2. 중국의 산아제한 정책으로 가정 당 한 명의 자녀밖에 두지 못하게 되면서, 모든 자녀를 공주와 왕자로 키우는 중국의 세태를 꼬집는 말이다. 친 할머니와 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부모, 이렇게 여섯 명의 어른이 아이 하나를 키우다보니 자기밖에 모르는 왕자와 공주로 성장하게 되고, 이들의 모습을 비꼬아 소공자, 소공녀라고 부른다. [본문으로]
  3. 에드워드 호퍼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들은 알랭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알랭드 보통은 그의 그림에서 고독을 읽고 있지만, 나는 오히려 그 고독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공허에 마음이 울렸다. 횡단 여행을 마치고 나서, 국내 최고의 웹툰 <이끼>와 <미생>의 윤태호 작가와 페이스 북에서 에드워드 호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강렬한 체험을 구현하는 작가의 매혹은 강력한 것이어서 우리 모두 눈을 빼앗기고 가슴에 새기게 되나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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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서 나를 보다

89일 나이아가라보스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면 더위는 식지만 운전이 어려워진다. 더구나 오늘처럼 이렇게 폭우 수준으로 쏟아질 때면 더욱 그렇다. 낯선 고속도로 위에서 폭우를 뚫고 운전하는 일은 가급적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피한다고 딱히 다른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조심조심 달릴 수밖에 없었다.

구글 지도에 따르면 보스턴까지 쉬지 않고 달려도 최소 8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게다가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재입국할 때,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니 서둘러야 했다.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은 레인보우 브리지를 통과했다. 멀리서 보기는 더없이 낭만적인 모양으로 캐나다와 미국을 이어주고 있었는데, 막상 달려보니 국경은 국경이었다. 수수료로 3달러를 요구했지만 친절했던 캐나다 쪽과는 다르게 미국 쪽은 고압적이고 불친절했다. 서류를 챙겨서 주었더니 대충 훑어보면서, 창문을 내리라고 하고, 불법적인 물품을 가지고 왔느냐고 묻는다. 여행객이라고 말하니 다시 서류를 훑어보고는 통과를 시켜준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몹시 불쾌했다. 테러가 그렇게 걱정이 되면 내려서 꼼꼼하게 확인을 하든가, 불법적인 물품이 그렇게 염려스러우면 직접 확인하면 될 일이지, 고압적인 자세로 묻고 넘어갈 것을 그렇게 불쾌한 어투와 표정을 지을 것을 또 뭐란 말인가? 그리고 어떤 정신 나간 녀석이 불법적인 물품을 가져오면서 가져온다고 말하겠는가?

몇 년 전부터 미국인들은 살인적인 의료서비스 비용과 약값을 이기지 못해서 캐나다나 멕시코로 가서 의료서비스를 받거나 약품을 사서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날로 늘고 있다고 한다. 국민소득이 40,000달러가 넘는다는 나라에서 약값을 감당하지 못해서 다른 나라로 나라에 약을 사러 다니는 의약난민’(drug refugee)이 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제약사와 보험회사의 이익 그리고 그것을 방치하고 있는 정부의 태만이 맞물려 기형적인 약값의 구조를 만들고 있는 탓이었다. 그러한 의약난민들 때문인지 국경에서 미국 입국심사관들은 불친절하고 고압적인 자세는 나이아가라 폭포만큼 인상적인 것이었다.

나이아가라에서 보스톤으로 가는 I-90

국경을 통과하자마자 폭우가 쏟아져 내리는 I-90위를 달렸다. 쏟아져 내리는 비 때문인지 운전을 하는 내내 답답했고, 같은 차선의 도로임에도 좁게만 느껴졌다. 그동안 달려온 서부 쪽 고속도로와는 다르게 동부 쪽 고속도로들은 길가에 나무들이 울창해서 그 밖을 쳐다볼 수가 없으니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무성한 나무들은 길 밖의 풍경을 잠그고 있었고, 내리는 비는 그 길 위에서 우리 차를 가둘 기세였다.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서부 쪽의 고속도로들에 비해 도로 상태가 양호했다는 것이다. LA나 샌프란시스코 인근 도로를 비롯해서 서부 쪽 고속도로를 달려보면 노면 상태가 엉망인 것을 알 수 있다. 서부 쪽 고속도로는 무료 도로인데 보수할 각 주의 재정상태가 좋지 않아서 그 모양이라고 했다.[각주:1] 동부는 서부에 비해서 재정 상태가 좋은 것인지 아니면 유료도로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도로 상태가 무척 양호했다. 보스턴까지 몇 개의 톨 플라자를 통과했는데, 나중에 합산해 보니 18달러 정도의 톨게이트 비를 물었다. 유료도로기 때문에 내려서고 올라서는 일이 번거로운지라 서부에서는 볼 수 없는 휴게소가 고속도로 위에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휴게소에는 백인과 동양계가 유독 많았다. 백인들은 대체로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이었고, 동양계는 어린 학생들과 부모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방학을 맞아서 동부 명문대학교를 보러가는 가족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보스턴을 방문하는 우리의 목적 중에 하나도 하버드와 MIT를 보는 것이었다. 그들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들 눈에 그렇게 보이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여행은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풍경으로 걸어 들어가 그 안에서 서성이는 나를 꺼내어 되돌아오는 과정이 아니던가? 휴게소에서 만나는 동양계 가족들의 모습에서 우리 가족의 모습을 보고 나니 생각이 많아졌다. 방학이라는 시간동안 아이들에게 미국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게 된 것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직도 내 안에 보고 배워야 할 대상으로서 미국이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다른 것은 몰라도 대학만은 보스턴의 그 유명 대학의 서열을 인정하며, 우리 아이들이 그곳에 진학해주길 바라는 속물근성이 스멀거린 것은 아닐까?

하지만 점심을 먹으며 아이들이 하는 소리를 들어보니 그런 우려는 그저 소심한 아빠의 기우였다. 아이들에게 미국은 그저 다른 나라일 뿐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우리 세대가 가졌던 미국은 없었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어려서부터 집중적으로 영어교육을 받은 탓에 영어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아이들에게 미국은 그저 우리와 다른 나라로 객관화 되어 있었다. 서로 다른 나라일 뿐이고, 그 다른 점 중에서 우리보다 나은 것과 우리보다 못한 것을 아이들은 제 기준으로 나누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차로 돌아와서 보스턴으로 달리면서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래도 한국보다 공부에 대한 압박이 적은 미국에서 공부하는 게 편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유진이는 꼭 그런 것도 아니란다. 한국에서는 공부해야 할 것이 정해져 있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분명했는데, 여기서는 그것을 찾아서 해야 하니 힘들단다. 그리고 영어를 잘한다고 해도 높은 학년으로 올라갈수록 그것에 대한 이해가 이곳 아이들에 비해서는 떨어질 수밖에 없단다. 미국에서도 미국 아이들보다 높은 클래스에서 최고의 영어 성적을 받고 있다며 늘 자부심을 갖는 유진이였지만, 그 한계를 느끼고 있었나보다. 다만, 한국에 비해 즐겁게 공부하는 것은 좋단다. 강압적이고 불필요한 규제와 간섭으로 신경을 써야 하는 한국의 학교보다는 자유롭고 즐겁다고 했다. 유진이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분명 편한 것과 즐거운 것은 다른 문제였다. 편하지는 않으나 즐겁기는 한 공부와 생활,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학교에서 그토록 구현하고 싶어 했던 모습이 아니었을까?

즐거운 학교생활이라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쉽게 수긍할 수 있었다. 아이를 픽업하러 학교에 가면 아이들의 투명한 웃음이 곳곳에서 꽃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봄 같은 시기, 삶의 계산으로부터 아직 자유로운 때에 마음 맞는 친구들과 늘 함께하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꿈으로 신열을 앓는 그 시절이 아니라면 언제 그렇게 빛나는 웃음을 터트릴 수 있겠는가? 환한 웃음보다는 늘 피곤한 얼굴로 학교에 가고 지친 몸으로 학원문을 나서는 아이들의 모습에 더 익숙한 우리 실정을 생각할 때, 아이가 이야기 하는 즐거운 학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합리적인 교칙을 제시하고 그것을 어기면 타협 없이 엄격한 제재를 가하지만 그것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자유와 자율이 보장한다거나, 학업 성취도를 파악하기 위한 시험이 한 학기 내내 진행됨으로써 평소에 꾸준히 공부할 뿐 중간고사, 기말고사에 대한 부담이 적다거나, 특별활동의 비중이 높고 대학 진학에 그것이 반영된다거나, 심지어 한국의 수학능력평가시험에 해당하는 SAT(Scholastic Aptitude Test)도 본인이 시기를 정해서 보고 싶을 때 보면 된다니 한국에서 학교생활을 한 아이 입장에서는 충분히 즐겁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곳 고등학교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대학 등록금 때문에 아주 빼어난 학생이 아니면 상대적으로 등록금이 싼 칼리지(college)에 입학해서 2년을 마치고, 종합대학교로 편입하는 방법을 택하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단다.[각주:2] 유진이 학교의 일부 백인 아이들은 꿈이 동네 빵집에 취직하는 것이라며, 아이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자기가 자란 곳이고, 집에서 가까우니 최고의 직장이 아니겠냐고 이야기했단다. 빵집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적어도 고등학생들이 그런 꿈을 꾸는 것은 본적이 없는 아이로서는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동네 빵집에 취업해도 큰 어려움 없이 잘 살 수 있다는 말은 아닐까? 혹은 그 이후에 자신이 원하며 다른 직업을 얻어서 어렵지 않게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직업의 유연성이 높다는 의미는 아닐까?

유진이의 발 와이퍼 놀이

비는 보스턴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거세졌다. 앞좌석에 탄 유진이는 다리가 아팠는지 대쉬보드 위에 다리를 얹고, 발로 음악에 맞추어 와이퍼처럼 흔들며 논다. 뒷좌석에 효진이는 아내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비가 거세어질수록 시야는 좁아지고 와이퍼는 분주했다. 그렇지만 차 안은 마치 독립된 우주처럼 아늑하기만 했다.

동부로 넘어오면서 분위기가 서부와는 사뭇 달랐다. 도로나 주변 환경은 물론이거니와 사람들의 표정도 달랐다. 서부사람들이 유쾌하게 잘 웃는 것에 비하면 동부사람들은 비장한 얼굴로 좀처럼 잘 웃지 않았다. 톨 플라자 직원, 휴게소 직원, 휴게소에서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잘 웃지도 않아서 그렇지 않아도 낯선 동네가 더 낯설게 느껴졌다. 같은 나라라고는 하지만 동부와 서부의 거리, 주요 구성 인종, 문화적 토양 등을 생각해보면,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카고에서 만났던 친구 형식이의 말로는 이곳 사람들과 비즈니스를 해보면, 원칙과 신뢰를 중시하며, 자신들의 그러한 태도에 대하여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지금이야 워낙 다양한 인종이 섞여서 그 뿌리조차 알기어렵지만, 미국의 시작이 종교적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을 찾았던 청교도적 삶에 뿌리를 두고 있다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수긍이 갔다. 동부를 둘러보는 동안에 좀 더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었다.

10시간 30분쯤 걸려서 드디어 보스턴 숙소에 도착했다. 오면서 식사를 하고, 폭우 때문에 잠시 휴게소에서 쉰 한 시간을 빼면 8시간 20분쯤 소요된 것이니 어떤 날보다도 오래 운전해야했기 때문에 어려웠던 하루였다. 동부로 넘어오면서 고속도로 주변에 큰 나무가 늘어서 있어서 처음에는 상큼한 느낌이 좋았는데, 오랫동안 달리려니 주변을 볼 수 없어서 오히려 더 답답했다. 비도 비였지만 길가의 나무들 때문에 도로 폭이 더 좁고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길 위를 달리는 사람에게는 길 밖이 보여야 한다고 차 안의 가족들에게 말하고 나니 딱히 이유가 없다. 그래서 이청준의 <줄광대>를 이야기 해주었다. 줄 위에 올라서서 줄밖의 세상이 보이지 않으면 예술은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세상을 잃게 되고, 줄 위에 올라서 줄 밖에 눈을 빼앗기면 세상과 타협할 수는 있지만 예술을 이룰 수는 없는 줄광대의 숙명을 아버지 줄광대와 아들 줄광대를 통해서 그려낸 작품이 <줄광대>. 작가는 아들 줄광대의 삶에 보다 애정 어린 시선을 두고 있다. 비록 줄밖의 세상에 눈을 빼앗겨 줄 아래로 떨어졌지만 모두들 승천했다고 믿게 된 줄광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대학시절에 가슴 아파했었다. 그것은 아내를 죽이고 계속 줄을 탔던 아버지 줄광대나 줄보다 사람을 우선에 두고 죽음을 선택하는 아들 줄광대의 모습이 크게 다르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계와의 지속적인 불화를 통해서 세계를 회의하고 긴장시키는 예술가의 천형(天刑)이 안쓰러웠다. 차 안에서 아이들에게 <줄광대>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아이들이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려웠나보다.

지금껏 무료도로만 달리다가 유료도로를 달리려니 웃지 못 할 일들이 벌어졌다. 톨 플라자가 보여서 돈을 준비하면 티켓만 뽑는 데고, 티켓을 뽑으려 하면 돈 내는 곳이었다. 한국에서도 하이패스를 사용한지 몇 년이 되었으니 티켓 뽑고 돈을 내고 하는 것이 낯설기도 했지만, 톨 플라자와 톨 플라자 사이가 너무 멀어서 자꾸 순서를 헷갈린 것이다. 어쨌든 곁에서 지켜보는 아내와 아이들은 그 때마다 우스워 견딜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숙소는 보스턴 외곽에 있었다. 숙소는 생각보다 규모가 큰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대형 관광버스가 여러 대 주차해있었다. 체크인하러 사무실로 들어가면서 버스 앞에 붙은 표지를 보니 중국 학생 관광단이었다. 체크인을 하면서 자세히 보니 학생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보호자까지 함께 온 모양이었다. 동부 쪽 아이비리그를 둘러보는 투어 코스가 있다더니 그들인 모양이었다.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만났던 중국집 주인이 생각났다. 인중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가면서도 종업원을 쓰지 않고 부부끼리 운영하면서 아이에게 튜터를 붙여 공부시키던 모습이나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먼 길을 찾아온 이들의 모습이나 10시간 30분을 달려 보스턴에 도착한 우리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프런트 데스크의 직원은 밀려드는 손님 때문인지 당황한 표정한 표정이 역력했다. 직원이 정신없어 할수록 체크인 시간은 점점 더 길어지고 있었다. 혼자서 전화 받으면서 밀려드는 손님을 빠르게 처리했던 캐나다 숙소의 직원이 떠올랐다. 방 키를 받아서 방에 올라가보니 조금 낡았지만 정갈한 느낌의 방이었다. 숙소의 침대 시트와 이불은 언제나 흰색이 옳다. 여행 중에 보니 지역에 따라서 이불 색깔이 다양했다. 딴에는 보기 좋으라고 했겠지만 어떤 색깔이나 무늬도 흰색의 정갈함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적어도 우리 가족들에게는 침대의 시트와 이불은 언제나 흰색이 옳다.

숙소에 들어오고 나서도 비는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보스턴은 효진이가 꼭 보고 싶어 했던 도시다. 지난 학기에 미국 역사를 배우면서 보스턴에 대해서 이것저것 조사를 하더니 여행 계획을 짜는 내게 보스턴은 꼭 보고 싶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하버드와 MIT를 보여줄 겸 들르려고 했었는데 잘 된 일이었다. 아이가 보고 싶어 하는 곳을 보여주면 늘 보여주는 것보다 더 많이 본다.

숙소로 오는 차안에서 아이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보스턴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우리 역사를 배우기 전에 미국 역사를 먼저 배워버린 아이들의 상황이 안타까웠다. 우리 역사를 정규 교과로 배우지 못한 효진이에게 한국 역사는 책에서 읽은 이야기일 뿐 아직 역사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에 와서 정규교과로 미국 역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의 현장에서 다시 확인하게 되니 혹시라도 혼란스러워하지 않을까 염려 되었다. 역사도 언어처럼 자기 것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전제로 다른 나라의 것들을 배워야지 제대로 된 정보의 선택과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질 수 있을 텐데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때였으니 지금 효진이 나이였을 것이다. 방학 때 작은집에 놀러가서 15권짜리 이야기 한국사에 넋을 놓았던 적이 있었다. 또래의 사촌들과 경쟁하듯 읽어버린 그 책은 15권 그 이상의 충격이었다. 이야기 한국사로 만난 한국사는 역사책 보다 설득력 있었고, 강렬했다. 세로쓰기로 되어 있어서 읽기도 어려웠던 그 책을 읽으면서 문득 어른이 된 느낌이었다. 집에 있던 계몽사판 한국위인전기전집이 가소롭게 보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그러면서 세계문학전집을 읽기 시작한 것을 보면 참 느닷없고 맥락 없는 나의 독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그런 독서 습관을 효진이가 많이 닮았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학교를 다녀오면, 할머니는 가급적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에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책을 보거나 공상하는 일이 전부였다. 그러다보니 책을 닥치는 대로 읽게 되었지만, 그런 나와는 조금 다르게 효진이는 이야기 자체를 좋아했다. 한국에 있을 때도 교보문고, 학교 도서관, 동네 도서관, 이동도서관을 모두 훑고 다녔다. 아내, 유진 그리고 제 몫의 독서 카드를 모두 활용해서 빌릴 수 있을 만큼 책을 빌려와 책상 위에 쌓아놓고 탐식에 가까운 독서를 하곤 했다. 효진이가 읽는 책들은 제 나이에 맞는 것부터 그 이상의 것에 이르기까지 가리는 것이 없었다. 읽는 방법도 빠르게 읽기도 하고 한 권을 몇 번씩 반복해서 읽기도 하는 아주 자유로웠다. 그러던 녀석이 미국에 와서 처음에는 한국책을 구하지 못해서 아내와 내 책을 탐하더니 언제부터인가 학교 도서관과 지역 공립 도서관에서 영어 책들을 빌려다 읽고 있었다. 미국에 와서는 주로 판타지 소설들을 빌려다 읽는 눈치였고, 덕분에 매주 도서관에 책을 빌리고 반납하러 부지런히 태우고 다녀야 했다. 그런 아이에게 이야기처럼 들려진 미국 역사는 얼마나 흥미진진했겠는가? 그런 녀석이 보스턴을 벼르는 것은 당연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아내는 빨래를 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실내에 에어컨이 돌고 있으니 내일 아침이면 뽀송뽀송은 몰라도 바짝 마를 것은 분명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비 때문인지 몸과 마음이 다소 가라 앉아있지만, 내일은 힘내서 보스턴 시내를 돌아볼 것이다. 효진이의 미국 역사와 유진이의 미국 역사를 확인할 수 있으리라. 그러고 보니 미국 역사에 밝지 않은 아내와 내게만 보스턴은 낯선 도시 같다.

내일 일정을 정리하고, 동선을 확인하면서 독한 술 한 잔이 그리웠다. 우리 방이 2층에 있어서 그런지 빗소리가 더 선명했다. 물을 가지러 차에 내려갔더니 비가 뿌려놓은 물비린내가 여린 풀냄새처럼 차 주변에 가득했다. 이렇게 빗소리가 선명한 밤은 도통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속수무책이다. 독한 술 한 잔이 더욱 간절했다

  1. 궁색한 재정은 서부 쪽만의 문제는 아니다. 일부 주에서는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자갈과 같은 자재로 도로를 다시 깔고 있다고 한다. 이런 일들은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앨라배마, 오하이오 등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미시건주 83개 카운티 중에 38개 카운티가 자갈을 깔았다고 한다. (김광기, 《우리가 아는 미국은 없다》 동아시아, 2011, pp.16-17참고) [본문으로]
  2. 한국 유학생들에게 미국 대학 학비에 대한 부담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미국인들보다 2배 가까운 학비를 부담해야하는 한국 유학생들 중 극히 일부의 학생들은 미국 학생들과 결혼하여 그 부담을 덜기도 한다. 극히 일부의 사례라고 믿고 싶지만 학비의 부담이 얼마나 큰지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들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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