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지독한 도시의 유령

811일 보스턴뉴욕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드디어 뉴욕에 도착했다.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쌓아가고 있던 보스턴을 떠나면서 아쉬웠던 것은 그 시간의 질서에 온전히 몸과 마음을 맡겨보지 못한 것이었다. 아무 것도 들지 않고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걸어서 돌아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는 도시에서 볼 것에 쫓겨 다니다 떠나는 아쉬움은 생각보다 컸다. 그만큼 보스턴은 매력적인 도시였다.

뉴욕에서는 숙소보다 라과디아 공항(La Guardia Airport)에 먼저 들러야 했다. 숙소로 정한 민박집에 주차 시설이 없고, 뉴욕의 교통지옥 속에서 운전을 하고 다닐 자신이 없어서 렌터카를 반납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뉴욕에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필라델피아로 떠날 때 다시 새로운 차를 렌트하려는 것이다. 문제는 렌터카 회사에서 알려준 주소를 사만다에게 알려줘도 사만다가 정확하게 위치를 잡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 라과디아 공항으로 목적지를 설정하고, 근처에 가서 다시 찾아볼 생각이었다. 라과디아 공항으로 가는 화이트스톤 브리지(Whitestone Bridge)에 올라서면서부터 사만다가 당황하기 시작해서, 할 수 없이 표지판만 보고 공항 내에 렌터카 회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렌터카 회사를 찾아서 차를 반납했다. 렌터카 회사 직원은 차의 여기저기를 살피며 마지막으로 기름을 체크했다. 기름을 가득 채워서 반납해야 했는데 공항 주변에 주유소가 없어서 그냥 왔다가 추가요금 42.97달러를 더 냈다. 주유소의 기름 값보다 2배 이상 비싼 금액이었다.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되도록 공항 가까이 가서 주유를 하겠다고 생각하다가 막상 공항주변으로 오니 주유소도 없고, 차를 돌리기도 어려운 길이어서 그냥 반납한 탓이다. 안타깝지만 또 하나 배웠다. 문제는 배움에는 늘 대가가 따른다는 것이다.

반납하고 렌터카 회사 직원이 건네준 영수증을 보니 얼바인에서 뉴욕까지 3,948마일(6,353)을 달렸다. 처음에 구글 지도를 보며 워싱턴까지 예상했던 거리를 뉴욕까지 오는데 모두 써버린 것이다. 더 달린 만큼 많이 보았을 것이니 나쁘지 않은 결과라고 생각했다. 처음에 그렇게 낯설던 자동차가 이제는 내차처럼 익숙해졌는데 막상 반납을 하려고 하니 같이 고생한 정 때문인지 아쉽기만 했다. 차에 싣고 있던 짐을 모두 내리고 보니 난민이 따로 없었다. 볼품없는 트렁크와 여행 동안 어설프게 줄어든 짐 그리고 기념품 등으로 늘어난 가방을 아이들까지 동원되어 나누어 들고 있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뉴욕 숙소를 예약하는데 공항에서 픽업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해서 부탁을 해두었다. 도착 1 시간 전에 연락을 달라고 해서 연락을 하니 시간을 맞추어 공항으로 온단다. 픽업 하러 오기로 했던 분은 렌트카 회사가 있는 곳을 몰라서 몇 차례 전화를 하더니 30분쯤 늦게 도착을 했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국 분이셨는데, 공항에서 맨해튼 숙소까지 오는 동안 자신의 이민사(移民史)를 들려주셨다. 재미는 있었는데 중간중간 지나치게 욕을 많이 해서 아이들 보기가 민망했다.

맨해튼의 교통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나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뉴욕에서 민박은 대부분 다른 사람 건물의 방을 빌려서 하는데, 불법이란다. 그러니 집에 드나들 때 관광객처럼 하지 말고 당당하게 다니란다. 불법인데 어떻게 당당하란 말인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 줄 돈 다 주고도 불법이라니 황당했다. 뉴욕의 호텔 가격이 워낙 비싸고, 민박도 한 번 체험하는 것도 좋을 듯하여 선택한 것인데 처음부터 꼬였다. 픽업도 민박집에서 서비스로 해주는 줄 알고 있었는데, 자신은 민박집과는 상관없는 사람이라며 45달러를 내란다.

뉴욕 숙소 침실, 침실과 붙어있는 기계식 주차장휴대용 가스 버너와 휴지

미드타운에 있는 숙소에 도착해서 보니 생각보다 엉망이었다. 내 돈을 주고 불법이라는 민박에 머무는 것도 언짢은 일인데 숙소는 낡고 지저분했다. 인터넷에서 가격대비 시설이 양호하고 교통이 편리한 곳을 찾다가 발견한 곳이었는데 이 모양이었다. 사진으로 보니 깨끗하고, 취사가 가능하다고 하니 아이들에게 밥을 해서 먹일 수 있겠다 싶었다. 게다가 이용 후기를 읽어보니 좋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서 보니 낡고 지저분했다. 가스레인지도 없고 휴대용 가스버너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예약을 6월 중순에 했으니 두 달 전에 기억이고, 사진과 다소 다를 수 있겠다 싶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한 구석을 보니 직전에 머물렀던 손님들의 트렁크가 놓여 있었다. 뉴욕을 마저 둘러보고 떠나느라 추가 요금을 내고 짐을 맡겨 두었단다. 5시쯤 찾으러 올 거란다. 자기가 기다리고 있다가 짐을 내줄 거라며 양해를 구하기에 그러라고 했다. 낯선 땅에서 한국 사람들끼리 그 정도 편의도 못 봐 줄 이유가 없었다. 우리도 뮤지컬 입장권을 구하고 장도 좀 보아야 하기 때문에 급하게 나와야 할 시간이었다. 더구나 안내를 해주고 있는 사람은 집주인도 아니었고, 아르바이트 학생처럼 보이니 그에게 항의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뉴욕에서의 처음을 따지고 다투면서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타임스퀘어의 모습

일단 숙소 밖으로 나왔는데 어디로 가야하는지 방향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이번 여행에서 사만다의 도움 없이 처음으로 길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일단 우리가 있는 곳의 위치를 먼저 파악해야 했다. 작은 지도에서 우리가 있는 곳을 찾은 후에 타임 스퀘어(Times Square)를 찾아보고 지도를 따라서 걸었다. 가로축과 세로축을 맞추어 우리가 어디 있는지 파악하고, 목적지에 이르는 가장 빠른 코스를 찾아서 걸어갔다. 뉴욕의 악명을 여기저기서 너무도 많이 듣고 온 탓에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아직 해가 남아 있었고, 비교적 큰 길들인데다가 우리는 모두 네 명이니 다소 안심이 되었다. 위급한 상황에서 네 명은 순식간에 한 명의 보호자와 세 명의 보호받아야할 사람으로 바뀌겠지만, 어쨌든 함께가 아니던가?

타임스퀘어는 아이들이 <무한도전>에서 보고, 꼭 가고 싶다던 곳이었다. 꽉 막힌 차들 옆으로 걸어보니, 맨해튼에서는 걷는 것이 제일 빠르다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1904년 뉴욕타임스 본사가 42번가로 오면서 타임스퀘어로 불리기 시작했고, 한때는 성인영화관과 성인용품점 등이 즐비했던 범죄의 소굴이었으나, 1990년대부터 재개발에 들어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탈바꿈했다고 한다. 전 세계 엔터테인먼트의 현재를 볼 수 있다는 타임스퀘어에서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광판들이 어지럽게 점멸하고 있었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타임 스퀘어에서 가장 인기 있는 포에버21이 제공하는 대형전광판 이벤트와 전광판에 비친 우리 가족. 포에버21 전광판 속 아이돌 스타가 우리 사진을 찍어주지 않으니 아빠가 찍을 수밖에 없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타임스퀘어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포에버21이 제공하는 대형전광판 이벤트였다. 포에버21은 이민 온 한국인이 만든 의류회사인데, 미국 내 88위의 부자가 될 정도로 성공한 이민자의 기업이란다. 그것은 대형 전광판 안에 등장하는 아이돌 스타가 전광판을 바라보며 즐기는 행인들 중에서 가장 튀는 사람의 사진을 찍어주는 인터랙션 이벤트였다. 아주 짧은 주기로 남녀 스타가 번갈아 나오면서 행인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찍힌 사진이 대형 전광판에 바로 공개가 되기 때문에 행인들이 무척 즐겁게 참여하고 있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찍히려니 어지간히 튀지 않고서는 어림도 없었다. 우리 가족은 아무래도 어림도 없는 쪽에 가까웠다. 아무리 과한 몸짓을 해도 다른 사람들만 찍혔다. 그럴수록 아이들은 재미있어 했고, 그냥 두면 밤새도록 그러고 있을 모양이었다. 가서 빨리 뮤지컬 입장권을 구해야했기 때문에, 내 카메라로 전광판에 비친 우리 모습을 찍었다. 아이들은 아쉬워했지만 어쨌든 찍은 것은 찍은 것이다.

아내의 계획에 따르면 오늘밤이 아니면 뮤지컬 공연을 볼 시간이 마땅하질 않단다. 사실 미리 숙소 측에 공연 예약은 가능한지를 문의했었는데, 도착해서 표를 구해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고 하여 그냥 온 것인데, 예정보다 도착 시간이 늦어지면서 몸도 마음도 급해진 것이다. 타임스퀘어로 먼저 갔다. 타임스퀘어에 있는 안내센터를 먼저 찾아갔다. 공연 관련 정보와 예매가 가능했는데, 유진이가 보고 싶어 하는 <오페라의 유령>은 가장 좋은 위치인 137달러 좌석만 남아 있었다. 유진이는 이 작품을 꼭 보고 싶어 했다. 안내센터 직원에게 이곳 말고 다른 곳에서 표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공연장은 이미 매진된 상태라고 확인을 해주면서, 혹시 길거리에서 입장권을 파는 사람들에게는 있을 수도 있다고 알려주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밖으로 나와 메리어트 호텔 앞에 있던 입장권 판매원에게 물어보니 61달러와 115달러 좌석이 있단다. 그런데 61달러 좌석의 경우에는 입장권이 없을 수 있다는 말에 115달러짜리 오케스트라 뒷좌석을 구입하였다. 안내센터에서 말했던  137달러 좌석을 이곳에서는 115달러에 판매하고 있던 것이다. 공식적인 입장권 판매 장소였던 안내센터보다 메리어트호텔에 소속된 입장권 판매원의 판매가가 어떻게 더 낮을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입장권 판매원까지 써가면서 더 저렴하게 파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들 이야기로는 메리어트호텔에서 투숙객들에게 서비스 차원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라고 했다. 미루어 짐작해보면 극장 측과 연간 계약을 맺어서 좀 더 저렴한 가격에 입장권을 구매할 수는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유진이가 보고 싶어 하는 공연을 조금 저렴한 가격에 가장 좋은 좌석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자신들이 극장에 가서 입장권을 구매해 놓을 터이니 7시에 다시 와서 입장권을 받아가란다. 남는 1시간 정도의 시간 안에 한인마트에 가서 장을 보기로 했다. 타임스퀘어에서 한인마트까지는 생각보다 멀었다. 조금씩 지쳐가는 아이들을 데리고 부지런히 걸어서 그곳에 가보니 얼바인에서 일반적으로 H마트라고 부르는 한아름이었다. 김치, , 삼겹살, 스팸, 계란 등의 식료품을 구입하고 보니 얼바인보다 가격이 거의 두 배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을. 구입한 식료품을 들고 거의 뛰다시피 해서 숙소에 가져다 놓고, 허겁지겁 메리어트 호텔로 달려갔다.

입장권판매원이 손으로 써 준 메모의 따듯함에 감동하다.

호텔에서 입장권을 받아 나오면서 입장권을 확인하는데 봉투 안에 작은 메모가 들어 있었다. 입장권판매소 직원이 입장권과 함께 넣어준 직접 손으로 쓴 카드였다. 알 수 없는 감동이 전해졌다. 아마 다시 브로드웨이를 찾는다면 가격과 상관없이 나는 분명히 이곳에 와서 다시 입장권을 구입할 것이다. 그건 작은 메모 이상의 신뢰였다.

입장권판매소 직원의 작은 호의에 문득 따듯해졌다. 이번 여행에서 뉴욕은 내게 내내 불안한 장소였다. 뉴스나 영화를 통해서 이미지화된 뉴욕은 말 그대로 고담시(Gotham City)였다. 탐욕과 부패와 범죄로 타락한 도시를 상징하는 <배트맨>의 고담시 이미지가 지나치게 강했던 탓인지 뉴욕은 불안하고 어두운 이미지였다. 그런데 입장권판매소 직원의 작은 메모가 그 어둡고 불안한 이미지를 씻어낸 것이다.

공연 시작까지는 4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숙소 때문에 기분 나빠지고, 일정보다 늦어지면서 종종대느라 피곤했는데, 메모 덕분에 모두들 유쾌해진 모습이었다. 공연이 10시가 넘어서 끝나니 공연 시작 전에 무엇을 간단하게라도 먹어둬야 했다. 마침 <오페라의 유령>을 공연하는 매저스틱 극장(Majestic Theatre) 바로 옆에 주니어스(Junior's)가 있었다. 주니어스는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치즈 케이크 집이라는데, 뉴욕에서 꼭 먹어볼 것 중에 하나로 아내가 벼르고 있던 것이었으니 더욱 좋았다. 게다가 늘 가장 먼저 배고프고 입이 까다로운 효진이가 정말 좋아하는 치즈 케이크가 아닌가.

주니어스 치즈케이크 흡입신공의 아이들

음식점 가서 가장 바보스러운 질문은 가장 맛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할 수밖에 없었다. 주문을 받던 직원은 웃으면서 플레인 치즈케이크(Plain Cheesecake)가 제일 맛있단다. 그래서 그것 몇 조각을 샀다. 매장에는 자리가 없어서 가지고 나와서 길거리에서 들고 먹었다. 한 판으로 사면 30달러였는데, 조각으로 사면 6.5달러란다. 다들 좋아하는 것을 한 판 사주고 싶었지만, 그것을 들고 공연을 보러가는 것은 조금 난감한 일이어서 몇 조각을 산 것이다. 사주고보니 정말 맛있게들 먹는다. 가족들이 잘 먹는 것도 복이라고 어머니가 늘 말씀하셨는데, 여행을 다니다보니 그 의미를 알겠다. 가끔은 그 복이 지나치게 넘칠 때도 있지만, 그것은 대부분 나로 인한 것이었다.

브로드웨이 극장가에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타임스퀘어에서는 화려한 불빛이 어둠보다 먼저 소란을 떨었지만, 브로드웨이에서는 어둠이 먼저 물들어왔다. 매저스틱 극장 앞은 마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ime In America, 1984)에 나오는 1930년대 뉴욕 뒷골목의 분위기를 재연한 것 같았다. 나는 1930년대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좋아한다. 지금보다 조금 덜 빠르고 조금 더 인간적이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탓인지, 어린 시절 명화극장을 통해 본 영화들의 배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게는 무척 매력적인 시대였다.[각주:1]

아직 어둠이 온전히 제압하지 못한 매저스틱 극장 앞에는 차들은 느리게 정지했고, 기마경찰과 삼륜의 경찰차가 정물처럼 서 있었다. 기마경찰은 관광객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해주거나 사람들에게 미소를 던져주는 정도의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브로드웨이 분위기와 무척 잘 어울렸다.

브로드웨이의 기마경찰

극장마다 천천히 불이 들어오고, 그 앞으로 약속이나 한 듯이 사람들이 줄을 섰다. 우리처럼 폴로셔츠에 반바지 차림의 관광객에서부터 보타이(bow tie)에 정장을 한 사람까지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제 각기 달랐지만 모두들 밝고 환한 표정만은 같았다. 치즈 케이크로 충분히 행복해진 아이들도 공연을 볼 생각에 들뜬 표정이었다. 약간은 들뜨고 약간은 흥분된 기분으로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 이렇게 천천히 시간이 흘러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매저스틱 극장 전경

<오페라의 유령> 중간 휴식시간 극장 내부

라스베이거스에서 공연을 보러갔을 때에는 오랫동안 서서 기다리면서 많이 답답했었다. 대부분의 공연장이 카지노와 연결되어 있었고, 카지노의 탁한 공기와 소란스러움이 번거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브로드웨이에서는 극장마다 줄을 길게 늘어서서 기다리는데 기다리면서 나름 즐기는 모습들이 오히려 여유롭고 한가해 보였다. 기다리는 것은 별다른 차이가 없었지만 공연장 주변 분위기에 따라서 확연히 다른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각자 기다리는 시간을 즐기고 있었고, 우리도 어느새 사진도 찍고 이야기를 나무며 즐기고 있었다.

극장으로 들어가서 보니 낡은 극장은 오히려 푸근한 느낌을 주었다. 매저스틱 극장은 생각보다 크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전용관이 주는 다양한 무대 장치는 돋보였다. 아내는 인기 있는 작품인데도 입장권 가격이 한국보다 싸다고 했다. 아마 전용관에서 상설공연을 하기 때문에 가능한 가격이리라. 전용관과 상설공연은 관객뿐만 아니라 공연을 하는 측에서도 보다 안정적인 준비와 투자가 가능한 시스템이다.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의 배우들에게 지출되는 비용이나 무대장치들은 몇 번 공연을 하나 똑같이 들어가는데, 전용관에서 상설공연을 하는 경우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것은 감소하지만, 한국처럼 공연장 부족으로 단기간 공연에 그치면 공연장을 옮길 때마다 비용이 발생하고, 새로운 공연을 위한 배우들의 준비에 또 추가비용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뮤지컬 공연 관람료가 비싸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구조에서는 우리만의 창작 뮤지컬이 나오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원작료를 주고 외국 작품을 사와야 하니 입장권 가격은 또 오르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최근 몇 년 동안 뮤지컬의 대중적인 지지가 높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인프라가 뒷받침되지 못해서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현실이 이곳에 와서 보니 더욱 안타까웠다.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은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오랫동안 공연되고 있는 작품이다. 막이 오르길 기다리는데 여기저기서 우리말이 들렸다. 이곳에서는 조건반사처럼 우리말이 들리면 뒤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 뒷좌석도 한국인 부부였다. 극장은 만원이었다. 전용관답게 공연은 극장 전체를 무대로 활용하고 있었다. 무대 아래와 뒤편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공간의 변형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같은 레퍼토리를 몇 번씩 볼 수 있는 것이 이러한 공연의 매력이 아닐까? 동일한 작품을 배우나 연출자 그리고 극장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해내는 그 변화를 읽는 것이 공연의 또 다른 매력일 것이다.

공연 중간 휴식시간에 화장실에 가다보니 의외로 턱시도를 입고 온 사람들이 많았다. 평소에는 입기 힘든 드레스를 입고 온 여성들은 물론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격식에 맞춘 옷차림을 한 남성들도 많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동부 쪽 무더위가 대단하다는 뉴스에 짧은 옷만 준비해서 떠난 탓에 폴로티에 반바지를 입고 있는 나와는 너무 대조되었다. 사실 공연문화라는 것이 단지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공연을 보러가는 과정과 그것을 위해 준비하고 참여 방식까지 포함된 것인데, 우리는 너무 여행의 효율성만 생각했었나보다. 좋은 공연을 보러가면서 조금 멋스럽게 꾸미고 가는 것도 즐기는 하나의 방식이 아니겠는가? 공연을 보러 가기 전에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입을까를 고민하고, 그러한 복식에 맞는 행동을 하면서 즐기는 것도 공연의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연을 마칠 때까지 아이들의 몰입은 참 대단했다. 몰입이 대단했던 만큼 그 여운도 오래가는 듯 공연을 보고 나오자마자 뉴욕을 떠나기 전에 또 한 작품을 보면 안 되냐고 묻는다. 아이에게 여행 경비가 빠듯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어서 난감해하는데, 눈치 빠른 아내가 안 된단다. 공연을 하나 더 보면 할 수 없는 일들을 쭉 설명하자 아이들도 납득을 한다. 늘 그렇듯 오늘도 아내는 현명하다.

공연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되도록 밝고 큰 길을 찾았다. 10시 넘어서는 걸어 다니지 말라던 여러 사람들의 조언이 생각나서 43번가 쪽으로 가서 숙소로 돌아왔다. 43번가 쪽에는 뉴욕 타임즈 본사와 대형 호텔, 슈퍼마켓, 음식점 등이 이어져 있었는데, 군데군데 성인용품 판매점 등이 있어서 아이들 데리고 걷기가 민망했다. 도대체 치안이 불안한 도시가 어떻게 세계 제1의 도시가 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불안을 씻어줄 수 있는 다른 무엇이 있으니 세계 제1의 도시겠지만, 생각해보면 자유와 안전을 상쇄해줄 가치라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가장 안전하게 인간다움을 키워줄 수 있는 공간이 살기 좋은 곳이 아니던가?

걸어오면서 보니 늦게까지 영업하는 커피전문점들은 아직 불이 환하다. 세련된 옷차림의 뉴요커들이 앉아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커피전문점 앞 보도에는 쓰레기봉투가 어른 가슴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악취도 악취였지만 깔끔하고 환한 커피전문점과 투명유리로 분리되어 쓰레기봉투를 잔뜩 쌓아두고 있는 거리는 지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밤늦은 시간이라 쓰레기 수거를 위해 내놓은 것이겠지만 그래도 너무 흉물스럽고 악취가 지나쳤다. 나와 너, 안과 밖을 분명하게 나누는 이 도시의 정서가 차갑고 안쓰러웠다. 뉴욕의 첫 이미지가 이 쓰레기봉투로만 기억되지는 않겠지만 쉽게 잊혀질 것 같지는 않았다.

숙소로 돌아와서 아이들이 씻는 동안 아내가 저녁을 준비했다. 쌀을 씻어 밥을 하고, 김치도 꺼내어 썰었다. 횡단여행을 떠나면서부터 아이들이 노래하던 삼겹살을 구웠다. 거의 11시가 다되어 가는 시간에 아이들은 참 야무지게 먹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짠하다. 그동안 밥, 김치, 삼겹살이 많이 그리웠었나보다. 어른들이야 어찌 견딘다고 하겠지만 아이들은 힘들었나 보다. 여행을 떠난 지 보름째이니 그럴 만도 했다. 여행 경비도 경비였지만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서 가급적 간편식으로 해결해왔는데, 아이들 밥 먹는 모습을 보니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아내는 오늘 하루 지출한 내역을 정리하며 일기를 적고, 나는 오늘 촬영한 사진을 노트북에 정리했다. 내일 동선을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을 연결하려니 와이파이가 안 된다. 예약할 때 인터넷이 된다고 했는데뭐가 잘못된 것인지 직원에게 문자를 보냈다. 시간이 늦어서 전화를 거는 것은 실례인 듯해서 문자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다.

유진이가 싱크대에서 세수를 했다. 욕실이 깨끗하지 않으니 들어가기가 그랬나보다. 말로는 귀찮아서 그런다고 하지만 이런 곳에서 생활해본 적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침실은 침대 두 개가 거의 붙어 있을 정도로 좁았다. 침구도 그렇게 정갈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숙소와 유료주차장이 붙어있다는 점이다. 24시간 운영되는 이 주차장을 기계식 주차를 하고 있어서 차를 내리고 올릴 때 소음이 고스란히 침실로 전해졌다. 무엇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그러나 돈은 이미 지불했고, 새로 숙소를 구할 요량이 아니라면 이곳에서 견뎌야한다. 다시 한 번 문이 잘 잠겼나 확인했다. TV 등에 나오는 민박만 보고 내가 너무 경솔하게 결정한 모양이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해야했기 때문에 이곳 맨해튼 미드타운에 숙소를 잡을 수밖에 없었는데, 조금 저렴한 호텔이라도 찾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아이들은 오늘 여행의 노획물들을 정리하고 잠이 들었다. 아내도 마음이 좋지 않은지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오늘 조금 만나본 뉴욕은 아직 오리무중이다. 10시 넘어서 숙소까지 안전하게 돌아왔지만 내게 아직은 뉴욕은 고담시다. 고담시는 배트맨이 지켜주었는데, 이곳은 누가 지켜줄 것인지 아직 모르겠다. 시민의 안전과 쾌적이 도시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면, 뉴욕은 기본적인 부분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혹시 내가 뉴욕을 콘텐츠를 통해서 이미지로만 알고 온 것은 아닐까? 아직 세계 제1의 도시라는 이유를 모르겠다. 내게는 오히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갱스 오브 뉴욕>(Gangs Of New York, 2002)에 나오는 뉴욕의 이미지에 가까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이 궁금하다. 왜 이곳이 세계 제1의 도시라고 불리는지 궁금하다. 내일부터 부지런히 다니면서 찾아보아야겠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은 유령의 공간이다. 분명하게 존재하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이 유령이다. 어렴풋하게라도 보이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영화나 뉴스로만 전해온 뉴욕은 이미지였지 구체의 현실이 아니었다. 뉴욕의 맨얼굴을 현실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을 보고 싶다.

 

  1. 내게 1930년대는 영화 이미지 그 자체다. 기름 바른 짧고 단정한 머리에 중절모, 조금 넉넉한 더블양복과 롱코트, 그 사이로 당당하게 들고 선 기관단총…<대부>, <언터쳐블>, <좋은 친구들>, <퍼브릭 에너미>, <딕 트레이시> 등 할리우드가 생산한 이미지는 그 내용과 무관하게 낭만적으로 각인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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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오늘로 기억될 오늘

812일 뉴욕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일찍 일어나기 위해서 핸드폰 알람을 맞추어 두었는데, 알람보다 먼저 깼다. 숙소 옆 주차장의 기계음 때문인지 낯선 숙소가 마음에 놓이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 까닭이야 분명하지 않았지만 아내와 내가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피곤한 일정을 강행군하다보니 알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내와 아침을 준비했다. 따듯한 밥과 김치찌개 그리고 스팸만으로도 넉넉하고 배부른 아침이었다. 보잘 것 없는 그릇에 없는 반찬이었지만 아이들이 모처럼 맛있게 밥을 먹는 것을 보니까 흐뭇했다. 어려서 오남매 밥을 챙기는 것에 결사적이셨던 할머니 생각이 났다. 부모님이 밖에서 생활을 하실 때여서 할머니가 우리들 끼니는 챙겨주셨는데, 늘 새벽 4시에 일어나셔서 오남매의 도시락을 싸시고 아침을 꼭 먹이셨다. 잠이 밥보다는 좋을 나이였으니 우리는 잠을 조금 더 자고 싶어 했는데, 할머니는 예외가 없으셨다. ‘밥 괄시하는 놈치고 잘 된 놈 없다는 말씀으로 아침을 꼭 먹게 하셨다. 자리를 보전하시고 누워계실 때에도 손자들 밥걱정을 하시다가 돌아가신 할머니의 역할을 지금은 어머니가 하고 계신다. 그래서인지 나도 아이들 밥에 예민한 편인데, 오늘 이렇게 아이들이 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지는 것을 보면, 나이가 들고 있나보다.

휴대용 버너에 가스가 얼마 남지 않았다. 어제 한인 마트에서도 가스는 보지 못했는데, 어디서 구해야 할지 직원에게 물어보아야겠는데, 어젯밤에 보낸 문자도 답신이 없었다. 아침을 먹고 치우는데 아이들이 소리를 지른다. 욕실 쪽에서 바퀴벌레를 본 모양이다. 워낙 오래된 건물이라 예상했던 일인데 막상 눈으로 보니 화가 났다. 바퀴벌레가 있으면 약을 치든가 미리 약을 준비해 놓아야 할 것 아닌가?

숙소를 나오면서 직원에게 전화를 거니 받지 않는다. 어제 일도 그렇지 않은가? 손님의 짐을 우리 방에 두는데 왜 자기들이 추가요금을 받는가? 어제부터 사용하기로 되어 있는 우리가 양해했으면 되는 일 아닌가?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버스투어를 하기 위해 타임스퀘어로 가는 도중에 전화가 왔다. 인터넷은 침대 밑에 선이 있으니 그것을 이용하라고 했고, 가스는 H마트에 없어서 대형할인마트에 다녀와야 하기 때문에 내일 가져다준단다. 그나마 우리가 구입하러 가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다보니 화가 치밀었다. 예약할 때만 해도 가스레인지가 있다고 한 숙소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도 주인이 아니었다. 그에게 화를 내보아야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상처가 될 뿐이었다.

그레이라인 버스 티켓, 길기도 길다

타임스퀘어 부근에는 그레인 라인(Gray Line) 직원들이 붉은 조끼를 입고 티켓을 팔고 있었다. 설명을 들어보니 어른 54달러, 아이 44달러면 이틀 동안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하단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돌아야하는데, 우리가 보고 싶은 곳은 다 그레이 라인의 루프에 속해 있으니 이동과 투어를 같이 할 수 있어 금상첨화였다. 게다가 가이드가 함께 타서 설명을 해주고, 나이트 루프도 이용 가능하다고 하니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196달러를 주고 티켓을 끊었다. 판매원은 조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휴대용 카드결제기로 결제를 했는데, 결제와 동시에 40Cm 정도 되는 붉은 티켓이 출력되어 나왔다. 4명의 티켓을 출력하는 데에 시간이 한참 걸렸다. 시간도 시간이었지만 어처구니없이 긴 티켓을 보며 가족들 모두 한참 웃었다. 왜 긴가 보았더니 광고가 여러 개 붙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제 본 <오페라의 유령> 20달러 할인 쿠폰이 마지막에 붙어 있었다. 아쉬웠지만 어쩌랴. 몰라서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도 없지 않은가? 그래도 이틀 동안 우리를 여러 곳에 데려다 줄 티켓이니 잘 접어서 가방에 넣었다.

그레이 라인 버스는 모두 4개의 루프 투어를 운행하는데, 다운타운 루프(downtown loop), 업타운 루프(uptown loop), 브룩클린 루프(brooklyn loop), 나이트 루프(night loop)가 그것이었다. 4개의 루프를 따라 돌면 뉴욕의 핵심인 맨해튼은 모두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다운타운 루프로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 2층 버스였는데 1층 좌석에는 아무도 타지 않고 모두들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지붕이 없는 2층으로 올라가서 앉았다. 입담 좋은 가이드가 버스 앞에 앉아서 지나가고 있는 곳을 설명해주는 방식의 투어였다. 가이드는 운행 중에 일어서면 안 된다는 경고했다. 2층 버스는 매번 아슬아슬하게 가로등 밑이나 나무 밑을 지나갔기 때문에 만약 일어선다면 완벽한 슬랩스틱 코미디의 주인공이 되거나 뉴욕타임즈 1면에 사진이 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곳곳에 정류장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이 있는 곳에서 자유롭게 내리고, 다 돌아보면 다른 버스를 타고 계속 돌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시로 내리고 탔다.

그레이라인 2층 버스

2층 버스 위에서 바라본 뉴욕 시가

2층 버스는 직사광선에 그대로 노출이 되어 금방 머리가 뜨거워졌다. 횡단여행을 떠나면서 대부분 차로 움직일 것이니 모자가 필요 없을 듯해서 짐을 줄이자고 가족들 모두 모자를 가져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생각인가? 선크림을 바르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지만 머리가 뜨거워지는 데는 속수무책이었다. 팸플릿 등으로 머리를 간신히 가리고, 가이드가 가리키는 쪽을 보느라 모두들 정신이 없었다. 1층에서 운전하는 기사와 가이드의 호흡이 참 절묘했는데, 그 혼잡한 교통 상황에서도 가이드의 설명 속도와 버스의 진행 속도가 절묘하게 일치했다.

다운타운 루프[각주:1]는 말 그대로 맨해튼을 상하로 나누었을 때, 아래쪽의 주요지점을 토는 루프이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다가 직접 내려서 보고 싶으면 내려서 보고 다음 차를 탈 수 있기 때문에 매우 편리한 투어였다.

여행 내내 내가 운전을 하다 보니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경우가 많았고, 무엇보다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없어서 아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버스를 타고 설명을 들으면서 다니니까 한결 여유로웠다. 귀로 설명을 들으면서 보라는 것을 보고, 보고 싶은 것은 좀 더 볼 수 있고, 사진도 자유롭게 찍을 수 있으니 내 여행은 오늘부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달리는 2층 버스 위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쉽지 않았고, 더구나 좋은 뷰 포인트를 잡기가 쉽지가 않았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여유로운 마음으로 웃으면서 천천히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만의 일인가?

뉴욕공립도서관

뉴욕 가로등 위의 비둘기들

세계 5대 도서관 중 하나라는 뉴욕공립도서관은 어제 H마트에 갈 때도 보았던 곳인데 그 규모도 규모였지만 도서관 앞에 편안하게 앉아서 책을 보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미국에 와서 부러웠던 것 중 하나가 공립 도서관이다. 아무리 작은 마을에도 일정 규모 이상의 장서를 갖춘 공립 도서관이 갖추어져 있다는 그들의 도서관 네트워크와 시스템은 한 없이 부러운 것 중에 하나였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도서관을 아주 편안하고 즐겁게 이용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도서관을 독서실로 이용하지 않고 말 그대로 책을 빌리고, 책과 관계된 문화행사를 즐기는 허브로 이용하는 모습은 더없이 부러운 것이었다. 더구나 이 숨 막히게 분주한 도시에서 대리석으로 멋지게 지어진 도서관 계단에 자유롭게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며 이야기하는 모습은 향기로운 풍경이었다.

버스는 아주 무심한 듯이 <스파이더맨>(Spider Man, 2002)에서 스파이더맨과 고블린이 싸웠던 메디슨 스퀘어 가든이나 <스파이더맨>(Spider Man, 2002에 자주 등장하던 컵 케이크 전문점 매그놀리아 베이커리’, <스파이더맨>(Spider Man, 2002<스파이더맨>에 등장했던 플랫아이언 빌딩(Flatiron Building) 등을 스쳐갔다. 영화를 통해 소개됨으로써 실재보다 더 풍요로워진 공간들이 눈앞에 쉬지 않고 이어졌고, 그럴수록 그것을 소개하는 가이드는 분주해졌다.

세 도로가 교차하는 지역에 세워진 삼각형 모양의 플랫아이언 빌딩

1902년 세워진 다리미 모양의 플랫아이언 빌딩(flat iron Building)은 세계 최초의 20층 이상 건물이었다고 한다. 100년의 세월을 건너왔을 이 빌딩을 보면서 나는 뜬금없이 일본 지성을 대표한다는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고양이 빌딩이 생각났다. 아마도 주어진 공간의 제약을 한계로 인식하지 않고, 자신만의 개성으로 승화시켰다는 공통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플랫아이언 빌딩보다는 고양이 빌딩에 좀 더 매력을 느끼는 쪽인데, 그 이유는 단순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발상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자료를 보관할 곳이 필요해서 건물을 지으면서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았는데, 그 금액은 80대까지 꾸준히 원고를 써야 갚을 수 있는 금액이란다. 그러니 은행 대출금을 갚기 위해서라도 80대까지 살아야 하고, 살아서 원고를 써야 하는 것이다. 원고를 쓰기 위해서 빌딩이 필요한 것인지, 빌딩을 세웠기 때문에 원고를 써야하는 것인지 순환논리에 빠져버린 것 같지만, 읽고 생각하고 쓰는 일이 삶의 전부가 되어버린 지독한 공부벌레들의 자부에서 기인한 것임은 분명하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자신감도 자신감이지만 그러한 계획에 선뜻 대출을 해 준 은행의 안목은 또 얼마나 놀라운가? 뉴욕은 어디를 보아도 100년 이상 된 건물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들을 모두 현재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큰 이유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숱한 전쟁을 치르면서도 정작 미국 본토가 전쟁터가 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100년쯤 넘어서도 오늘의 이름값을 가지고 제몫을 해내고 있는 건물들은 과거이자 오늘이며 내일이었다. 100년을 건너온 건물들을 보면서 새로 짓는 건물 역시 100년 이상을 건널 수 있도록 짓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곳곳에 옛 양식으로 지은 새 건물들인데, 그 건물이 들어선 공간의 맥락을 외면한 채 지나치게 호사스러웠다. 눈에 거슬리는 것은 화려한 장식과 호사가 아니라 조화를 외면한 생경한 돌출이었다. 이 화려한 마천루의 도시에서 100년 이상을 갈 수 있는 유니크한 건물을 예술작품으로 만들겠다는 의도와 의욕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들어설 공간이나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모습은 차라리 폭력에 가까워 보였다.

센트럴파크(Central Park)는 풍경보다 냄새로 먼저 왔다. 관광객들을 위한 마차가 많았는데, 그만큼 말도 많았고, 말의 배설물도 많았던 탓이다. 앨런 블링클리(Alan Brinkley)에 의하면[각주:2], 1850년대 센트럴 파크를 조성하기 시작한 것은 상류층이 압력을 넣은 결과라는데, 그 압력의 동기가 재미있다. 이 시기는 미국의 상류층들은 명품과 사치로 그들만의 문화를 구별짓기(Distinction) 시작하던 시기였다. 유럽의 명품과 사치품들로 꾸미고 매일 마차를 타고 나들이할 장소가 필요했던 그들이 시에 압력을 넣어 조성된 것이 센트럴파크란다. 부와 명예를 갖게 되면 가장 먼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구별짓기 시작하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격식이나 의례를 만든다더니, 결국 센트럴파크의 시작은 천박한 부르주아지의 과시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 해 2,500만 명의 관람객이 찾고 있으며, 뉴욕시민들로 자유롭게 산책과 피크닉 그리고 조깅 등을 즐기고 있었다. 다만 밤의 치안이 불안한 것이 문제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만들어질 때보다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건강해진 것은 분명했다.

차이나타운

차이나타운(Chinatown)은 다소 낡고 남루한 느낌으로 활기찼다. 차이나타운은 근처에서 비슷한 세력을 이루고 있던 리틀 이탈리아(Little Italy)를 대부분 밀어내고 그 영역을 계속 확장하고 있단다. 차이나타운의 남루한 활기는 저렴하게 때로는 멋스럽게 적혀있는 중국 간자(簡字)들에게서 먼저 왔다. 가이드는 차이나타운에는 화장실 없는 건물도 있어서 공동 화장실을 쓰는 곳도 있다고 강조했다. 차이나타운보다는 규모가 훨씬 작지만 나름의 코리아타운을 이루고 있는 곳을 지날 때도 한국 사람들이 부지런하고 억척스럽다는 말을 비아냥대듯이 이야기하는 것이 귀에 거슬렸는데, 차이나타운에서 또 그런다. 대놓고 비아냥거리지는 못해도 이렇게 우회적으로 비꼬는 것을 보면 서양인들 눈에 거침없이 치고 들어오는 동양인들의 모습이 거슬렸나보다. 자기들의 땅에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동양인들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의 이중적인 감정을 이러한 비아냥거림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리라. 아내와 유진이도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쟤네가 두려워서 그러는 거야라고 살짝 이야기 해주었다.

미국은 이민자들에 의해 세워진 나라다. 이민으로 세워진 나라에 원래 주인 운운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다. 굳이 원래 주인을 따지자면 이민자들에 의해 비참한 죽임을 당하거나 보호구역으로 내몰린 아메리칸 원주민들이 아니겠는가? 일찍 도착하고 조금 늦게 도착한 차이가 있을 뿐이지 원래 주인이란 말은 이미자의 나라에서는 기만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을 가로지르는 철도나 도로 그리고 주요 교량과 캘리포니아의 농장들을 일굴 수 있었던 것은 말도 안 되는 임금으로 이민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한 결과가 아니던가? 물론 그 사이 10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고도 아직 온전히 미국과 동화되지 못하고, 기어이 차이나타운이라는 자신들만의 거리를 만들어내는 중국인들의 기질에도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스스로 뭉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 무시당하기 때문이었을 것인데, 그렇게 보면 미국의 다양성이라는 것도 그러한 개별 이익집단의 힘이 균형을 이루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그것은 이미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난 이 사회의 특성에 대한 문제였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 하는 자유의 여신상을 볼 수 있는 리버티 섬으로 가기 위해 배터리 파크(Battery Park)에서 내렸다. 자유의 여신상을 보기 위해서는 페리를 타고 리버티 섬으로 가야하는데, 티켓을 사는데도 한참을 기다리고, 배를 타려면 또 대책 없이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동안 근처에서 한국전쟁 참전용사 추모비를 발견했다. 미국에 와서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우연치 않게도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추모하는 기념물들을 곳곳에서 만났다. 지난번 코디에 갔을 때에도 숙소 바로 앞에 한국전 참전용사 추모비와 그 앞에 선명하게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고 묘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것은 고마움이나 부끄러움 혹은 정서적 유대와 같이 간단히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다.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그 복잡다단한 감정은 우리와 미국의 관계, 한국 전쟁의 발발 원인, FTA나 통상마찰, 주한 미군 주둔 문제, 전시작전권 환수 문제 등의 미국과의 현재적인 문제들, 세계사적 맥락에서 미국의 정체 등이 얽혀있는 복합적인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다.

한국전참전용사 추모비

거리의 악사

승선을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했다. 뒤에 있던 한국 학생들 사진도 찍어주고, 멀리 보이는 자유의 여신상 사진도 찍었지만 기다리는 시간은 여전히 지루했다. 그 때 근처에서 경쾌한 타악기 연주가 들려왔는데 한국 노래였다. 그곳을 쳐다보니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흑인 한 명이 작은 북처럼 생긴 스테인리스 원반을 목에 걸고 연주하고 있었다. 연주가 끝나면 사람들이 그 옆에 놓여있는 상자에 돈을 넣어주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악기로 자기 앞에 있는 관광객의 국적을 추측해서 해당 국가의 노래를 연주하고 팁을 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 우리를 보더니 이내 한국 노래를 연주해주었다. 낯선 눈으로 보아도 우리가 확실하게 한국인으로 보였나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팁을 상자에 넣어주었다. 잠시 후에 똑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지만 두 번의 감동은 없었다.

배에 오르자 사람들은 좀 더 전망 좋은 곳에 자리를 잡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배 위에서는 맨해튼 시내를 넓게 지켜볼 수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더위를 데려가고 압도적인 맨해튼의 풍경을 데려왔다. 맨해튼에서 멀어질수록 맨해튼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조금 더 멀어지자 브룩클린 다리가 처음과 끝을 온전히 드러냈다. 리버티 섬에 도착하니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이 우리가 내린 배를 타기 위해서 잔뜩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배에서 바라본 맨해튼

배에서 내려서 한참을 걸어서 자유의 여신상까지 갔을 때에는 이미 진이 빠져 있었다. 티켓 구입과 승선 과정에서 너무 오래 기다린 탓인지 더위 때문인지 이미 진이 빠져버린 우리는 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리버티 섬에 자유의 여신상 말고는 딱히 보거나 즐길 것이 없었다는 것도 실망스러웠다.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즐기기 위해서는 자유의 여신상 왕관에 올라가야하는데, 이것은 예약을 하고서도 1시간쯤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단다. 예약을 하지 않아서 우리는 왕관에 올라갈 수 없었다. 이렇게 왕관에 올라가는 것도 201111월로 끝이라는데 아쉬웠다.

뉴욕의 상징처럼 이야기 되는 자유의 여신상인데 그 주변에 함께 즐길 콘텐츠가 없다는 것은 아쉬웠다. 게다가 무던히도 잘 기다리는 미국인이 아닌 우리에게 기다림은 아까운 시간이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기 위해서 아내와 아이들이 먹을 것을 사오는 사이 나는 선착장에 먼저 가서 줄을 서기로 했다. 그런데 매점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사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바람에 몇 사람이나 앞으로 보내고 나서야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기다려서야 겨우 배를 탈 수 있었다. 원래 페리의 코스는 배터리파크를 출발해 리버티 섬과 엘리스 섬을 돌고 배터리 파크로 돌아오는 것인데, 우리는 엘리스섬은 가지 않기로 하고, 엘리스섬에서 돌아오는 배를 타고 맨해튼으로 돌아왔다.

근처에 9/11 테러의 현장인 월드트레이드 센터 자리와 세계 금유의 중심이라는 월스트리트(Wall Street)가 있었지만 보지 않았다. 소위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라고 불리는 월드트레이드 센터 자리는 공사 중이라는 가이드의 안내도 있었지만, 그 끔찍한 비극의 현장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떠한 명분으로도 테러는 정당화될 수 없다. 게다가 민간인을 상대로 한 무차별적인 테러가 어떠한 명분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말인가? 오클라호마시티 국립추모박물관에서 보았던 그 어처구니없는 폭력의 잔혹한 기억과 지워지지 않는 상처와 슬픔의 흔적들은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다. 또한 9/11테러로 인하여 벌어진 납득하기 어려운 아프카니스탄 침공과 이라크 침공으로 인하여 숱한 민간인과 군인들이 죽어가지 않았던가? 그리고 아직 월드트레이드 센터의 붕괴 원인[각주:3]에 대해서는 수많은 의혹들이 남아 있지 않던가? 인터넷과 SNS 등을 활용하여 세계는 동시간대를 살고 있고, 정보의 독점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은데, 중요한 사안에 관해서만은 충분한 정보와 납득할만한 근거가 제공되지 않으니 오히려 소문만 무성하다. 소문은 음모론을 낳는데, 음모론은 듣는 사람을 더욱 불신에 빠지게 한다. 책임 있고 신뢰할만한 기관에서 사실 관계를 규명하고 사건의 전말을 낱낱이 드러내주어야 할 텐데, 무슨 이유인지 이 사건은 점점 더 오리무중이다.

월스트리트17세기 네덜란드 인들이 인디언과 영국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방벽(Wall)에서 유래한 것이다. 1624년 맨해튼에 도착한 피터 미누이트는 이주민 대표가 되어 인디언 대표들에게 24달러에 해당하는 물품을 주고 맨해튼을 양도하는 매매계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뉴욕의 시작은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계약 아닌 계약에서 시작된 것이다. 처음 맨해튼에 이주한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곳을 뉴암스테르담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이것을 영국이 빼앗고 뉴욕이라고 부른 것이 현재에 이른 것이다. 침략, 강탈, 매수 그리고 합법화를 위한 매매계약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개척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640년에 뉴욕에서는 이미 18개국 언어가 통용되었다고 하니 가히 국제적인 출발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지금 월스트리트를 중심으로 한 경제 전쟁의 기원과 그 성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날이 너무 더워서 그런지 모두 지쳐있었다.

다시 버스에 오르기 전에 생수 두 병을 구입했다. 뉴욕 시내 전체가 얼린 생수 한 병에 1달러 받기로 합의를 했는지 모든 가판대에서 가격이 동일했다. 그 생수라는 것이 대형할인마트에서 24병 혹은 36병에 병 값 포함해서 7달러 정도면 구입하는 것이고 보면, 결코 싼 것이 아니었다. 생수를 구입하려고 얼마냐고 물어보니 두 병을 쥐고 1달러란다. 그래서 두 병을 받고 1달러를 주니까 생수를 팔던 이 친구 얼굴이 확 변하면서 화를 낸다. 손에 두 병을 쥐고 1달러라고 하니 내가 착각을 한 것이다. 날이 더운 탓이다.

현대미술관으로 가는 벽

버스는 만원이었다. 아내와 효진이만 같은 자리에 앉고 유진이와 나는 따로 앉았다. 아내와 아이들은 앞쪽 자리에 앉았고, 나는 맨 뒷좌석에 한 자리가 있어서 앉았다. 새로운 가이드는 중년의 남자였는데 권태로운 음성으로 아주 느릿느릿 설명을 하고 있었다. 유진이가 피곤했는지 꼬박꼬박 졸았고, 나도 졸음이 쏟아지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내가 잠시 졸았던 모양인지, 졸았다고 아내에게 한 소리 들었다. 아내는 판옵티콘이다.그러는 사이 버스는 현대미술관으로 가는 벽

에 도착을 했다. 현대미술관은 금요일 오후 4시부터 무료관람이었다. 원래는 어른 20달러, 아이 12달러인 입장료가 무료인 시간이라서 그런지 이미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은 많았지만 금방 입장할 수 있었다. 눈이 밝은 아이들은 오디오 가이드(Moma Audio Guide)를 받겠다고 줄을 서서 기어코 오디오 기기를 받았다. 오디오 가이드는 추가 비용 없이 작품에 대한 심도 있는 설명을 들을 수 있게 만들어진 인터랙션 기기였다. 한국어 서비스도 지원되는 이 기기는 해당 작품 옆에 적힌 숫자를 누르면 그 작품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나와서 관람에 무척 도움이 되었다.

무료관람이 가능한 시간이라서 그런지 현대미술관은 여행 중에 들렀던 미술관 중에서 관람객이 가장 많았다. 6층 건물의 어느 한 층 사람이 붐비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래도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 샤갈의 <나와 마을>, 고호의 <별이 빛나는 밤에>과 같이 잘 알려진 작품들과 모딜리아니, 몬드리안, 고갱, 마티스, 모네, 쇠라, 모네, 세잔, 프리다 칼로, 칸딘스키 등의 숱한 작품들을 한 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인 공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의 작품은 5층에 전시되어 있었고, 엔디 워홀과 로이 리히텐슈타인, 잭슨 폴락 등의 작품은 4층에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두 층의 혼잡은 상상 이상이었다. 하지만 혼잡을 개의치 않고 꿋꿋하게 다 보았다. 언제 또 이런 작품들을 이러한 거리에서 뛰는 가슴으로 체험하겠는가? 오디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니 작품을 좀 더 풍요롭게 읽을 수 있었는데, 덕분에 아주 천천히 즐길 수 있었다. 특히 강의 중에 자주 활용하는 고호의 <별의 빛나는 밤>에와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은 더욱 새로웠다. 모처럼 뛰는 가슴에 행복해진 것은 나만은 아닌지 아내도 무척 즐거운 모습이었다.

입장하면서 받은 팸플릿에는 한 시간(하이라이트 관람), 두 시간(탐구 관람), 가족 프로그램으로 나누어 관람을 안내하고 있었다. 관람객의 유형과 관람 시간에 따른 안내가 인상적이었다. 아이들도 오디오 가이드를 귀에 대고 열심히 들으며 작품을 보고 있는 모습이 무척 진지해 보였다. 5층의 회화 작품들을 진지하게 보던 아이들은 4층의 팝아트와 현대 미술을 보면서는 무척 재미있어 했다. 새로운 표현 방식과 대중적인 표현들이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현대미술관을 나와서 버스를 타러가는 도중에 러브(LOVE) 조형물을 만났다. 젊은 연인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들의 사진 찍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또 다른 연인들이 있었고, 우리 차례는 그 다음이었다. 그냥 글자조각 같은데 의미 때문인지, 장소성(placeness) 조형물이 있다는 뉴욕동경필라델피아의 때문인지 무척 유명한 작품이었다. 그러다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니 사람들의 열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상하게 두 커플 모두 글자와 어울려 가장 사랑스러운 표정과 몸짓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조형물을 완성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 앞에서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탁월한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버스를 타고 다시 처음에 출발했던 타임스퀘어로 돌아왔다. 유진이가 메이저리그 야구 모자를 하나 사고 싶어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낮에 머리가 뜨거워 고생을 한 터라 근처 메이저리그 용품 파는 집으로 들어갔다. 덩치가 크고 등과 팔에 온갖 문신을 한 직원들 셋이 30Cm쯤 되는 모형 야구방방이를 들고 탁구공으로 야구를 하고 있었다. 우리를 보자 자기들도 머쓱했는지 웃는다. 모자는 한국보다 조금 저렴한 편이었는데, 아이들과 나는 모자를 하나씩 샀고, 아내는 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내는 모자를 잘 쓰지 않았다. 그런 사람에게 신혼 초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모자를 선물했으니나는 도통 아내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해먹었다. 가스가 얼마 남지 않아서 걱정을 했는데 간신히 준비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낮에 더워서 고생을 해서 그런지 밥도 많이 먹지를 않고 피곤해 했다. 오늘 찍은 사진을 컴퓨터에 옮기고 모두들 함께 보았다. 이제 매일 저녁 그날 찍은 사진을 가족과 함께 보는 것도 여행의 중요한 즐거움이 되었다. 한참을 웃으면서 사진을 보다보니 정말 우리가 그곳에 갔었던 것일까 라고 느낄 정도로 새로웠다. 낮에 다녀온 곳이 저녁에 새롭다. 오늘 다녀온 곳도 이런데, 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우린 무엇을 얼마나 기억에 남기고 가슴에 담을 것인가? 그것이 구체적이고 생생한 기억이 아니면 또 무슨 상관이랴. 그곳을 체험하면서 비록 언어화되지 못하거나 스스로 기억한다고 의식하지 못하는 것일지라도 체험의 원형질은 가슴에 남아 다양한 형태로 발아하고 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래도록 2011년의 무모했던 여행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오늘 찍은 사진 속의 우리가 나이를 먹지 않듯 기억 속의 우리는 나이를 먹지 않고 매년 오늘의 얼굴로 기억될 것이다.

오늘은 모처럼 운전하지 않고 사진기에 의지해 돌아볼 수 있는 하루였다. 버스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과 말투나 걸어 다니며 만났던 거리의 풍경도 운전을 하면서는 만날 수 없었던 것들이다. 다운타운 루프에서 보았던 100년 이상을 건너왔고, 앞으로 건너갈 최고의 위용을 뽐내는 건물들을 볼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다만, 건축에 대해서 문외한인 내 눈에는 화려하고 많은 공력이 투입된 건축물들이 그 자체만으로는 매력적인 것이었지만 주변 공간이나 사람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이것은 나만의 의견이니 그들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니다.

오늘 하루 동안 만난 것들은 아주 가슴 뛰거나 우울한 고민을 부르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문화적 인프라와 시스템은 가슴 뛸 정도로 매력적인 것들이었지만, 도시 곳곳에서 드러나는 남루한 어둠은 짙고 우울한 그림자임에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뉴욕은 도통 정체를 알 수 없는 도시였다. 지나치게 보고 느낄 것이 많아서 그런지 모른다. 우린 이 도시의 겉모습만 달리는 말에서 훑어본 것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이곳에 머무는 시간동안 말 위에서라도 좀 더 부지런히 보아야겠다. 오늘 밤에도 기계식 주차는 멈추지를 않는다.

 

 

  1. 다운타운 루프는 타임스퀘어→브로드웨이 극장가→메디슨스퀘어 가든→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플랫아이언 빌딩→유니언 스퀘어 쇼핑가→그리니치 빌리지→소호→차이나타운→시청, 월들 트레이드 센터 자리→배터리 파크, 자유의 여신상→사우스 스트리트 항구→ 로워 이스트 사이드→이스트 빌리지→UN→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록펠러 센터, 라디오 시티 뮤직홀→센트럴 파크→파크 센트럴 호텔→윈터 가든 극장→타임스퀘어로 돌아오는 코스다. [본문으로]
  2. 앨런 블링클리 / 황혜성 역,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휴머니스트, 2005. [본문으로]
  3. 911 테러를 음모론적 시간에서 다룬 딜런 에이버리 감독의 <911 - Loose Change>를 보면 아직 우리가 납득할만한 설명을 듣고 있지 못하는 12가지의 의문이 등장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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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답을 얻지 못한 의문

813일 뉴욕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아침을 준비하면서 아내와 이야기를 하다가 바보처럼 뒤늦게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이 집이 우리가 예약한 집과 내부가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벌써 두 달 전 일이니 분명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해서 예약했던 사이트로 들어가서 주소와 사진을 확인해보았다. 예약한 집과 주소가 달랐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숙소에서 보내준 차를 타고 왔으니 당연히 예약한 집으로 오는 줄 알았는데, 그 점을 노렸던 것이다. 예약을 하면서 숙박료의 반을 선금으로 보냈고, 도착해서 나머지 반의 잔금을 치렀고, 벌써 이틀 밤을 잤으니 항의해야 무슨 소용일까 마는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주인에게 전화를 거니 받지 않아서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가 예약했던 집과 다르다고 항의를 했더니, 주소는 다르지만 스펙은 같단다. 화가 났다. 하지만 곁에서 아내와 아이가 보고 있으니 화를 냈다가는 그들이 불안해 할 것이 분명했다. 만약 사정이 있어서 예약과 다른 숙소를 배정했으면 미리 양해를 구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따졌더니 미안하단다. 선택의 여지가 없고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서의 항의란 얼마나 공허한가? 전화기 너머의 직원도 내가 뭐라고 화를 크게 내고 빨리 전화만 끊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내 잘못이었다.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민박이라서 무조건 믿었고, 인터넷의 이용후기를 지나치게 신뢰한 탓이었다. 빡빡한 일정으로 낯선 뉴욕을 찾는 한국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또 얼마나 실망하고, 불신과 자괴감을 갖게 될 것인가? 남의 나라에서 우리나라 사람에게 속은 것만큼 속상하는 일이 또 있을까? 화도 제대로 낼 수 없고, 화를 내야 달라지는 것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사기를 당한 것처럼 불쾌했지만, 그것 때문에 오늘 일정을 망칠 수는 없었다.

타임스퀘어로 걸어가서 그곳에서 업타운 루프(Uptown Loop)[각주:1]를 도는 버스를 탔다. 어제 돌았던 다운타운 루프의 반대쪽을 도는 코스였다. 다운타운 루프처럼 업타운 루프도 보아야 할 것들은 끝이 없었다. 격투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의 가일 같은 헤어스타일의 흑인 가이드는 잠시도 쉬지 않고 설명을 했는데, 마치 라임(rhyme)이 잘 맞는 랩을 듣는 느낌이었다.

센트럴 파크 주변으로 고급 아파트들이 줄지어 등장했다.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호화로운 장식의 외벽과 규모만으로도 압도되는 것들이었다. 레너드 번스타인, 존 레논이 살았다는 다코타 아파트(Dacota Apt)도 겉보기에는 그것들에 비해 오히려 소박한 편이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존 레논이 저격당했던 다코타 아파트 정문에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1980년 중학생 때였던 것 같은데, 마루에 놓여 있던 라디오 뉴스에서 존 레논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던 기억이 난다. 팝음악의 문외한이었던 나는 그가 누군지조차 몰랐었는데 그 사건을 통해 그가 대단한 뮤지션이었다는 것을 알았었다. 지금은 불교방송 기자를 하는 대학후배는 대학시절 비틀즈 팬클럽 회장을 맡았었는데, 거의 일 년 내내 비틀즈 티셔츠를 입고 다니며 비틀즈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를 야만인 취급하고는 했었다.

다코타 아파트에는 아직도 오노 요코가 살고 있다고 하니, 사랑하던 사람이 죽어 간 곳을 매일 지나쳐 다녀도 견딜 수 있을 만큼 그녀는 대단한 결기를 지닌 여인인가보다.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이라고 불리며 미국 음악 시장을 장악했던 비틀즈는 뮤지션을 넘어서 1960년대 새로운 청년문화의 상징으로 평가받는다. 비틀즈 해체 이후에 그가 발표했던 <John Lennon / Plastic Ono Band>는 지금까지도 명반으로 회자된다. 그러고 보면 오노 요코로부터 존 레논이 영감을 얻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예술가에게 배우자는 화수분 같은 영감이 되거나 잔혹한 현실의 규율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존 레논은 행운아였던 것이다. 존 레논의 명성이나 부에 비해 전위예술가였던 오노 요코가 보잘 것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음악적인 재능에 화수분 같은 영감의 원천과 사랑을 나누었으니 좋은 음악이 나오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뉴욕의 고급 아파트

존 레논이 저격당한 다코타 아파트 정문

그 음반의 곡들은 아니지만 ‘I Want To Hold Your Hand’, ‘Let it be me’, ‘Hey Jude’, ‘Norwegian wood’, ‘Imagine’과 같은 곡들은 지금 들어도 좋은 곡들이다. ‘Norwegian wood’는 노래보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로 먼저 읽으면서 가사를 보고 노래를 나중에 들었던 곳이다. 그것이 노르웨이의 숲이냐 노르웨이산 가구냐 의견이 분분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으로 듣고, 그것을 토대로 소설을 구상한 것이고 보면, 내게는 노르웨이의 숲이 옳을 듯싶다. 그래서인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우리말로 번역본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멋진 번역이라고 생각하는 문학사상사판에서는 아예 제목을 상실의 시대로 바꾸고 있다. 원곡을 만든 비틀즈나 그것을 소설로 바꾼 무라카미 하루키의 감성도 대단할뿐더러 그 사이의 간극을 본 번역자가 그것을 다시 다른 제목으로 번역해낸 것도 멋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코타 아파트를 지나면서 가이드의 설명이 재미있었는데, 다음이 우리가 내릴 미국 자연사 박물관(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이었다. 세계 최대 과학박물관이라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은 우리를 반기지 않는지 입구가 공사 중이었다. 이곳은 입장권을 구입하거나 자유롭게 기부(Donation)하고 입장할 수 있었는데, 우리는 어른 19달러, 아이 10.5달러를 내고 입장권을 구입했다. 3,500만점의 전시물이 있다는데 얼마를 기부해야 부끄럽지 않을까 고민하느니 그냥 입장권을 사는 것이 속이 편할 듯싶었기 때문이다.

미국에 와서 당혹스러웠던 것이 기부 문화였다. 아이들 학교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기부를 권장했는데, 이걸 어느 정도 규모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명목은 기부인데 반강제인 경우도 많았고, 기부가 안 되면 학생들 행사가 진행되지 않는 경우도 발생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 재정이 어려워 교육예산을 삭감했고, 그 덕분에 기부 권유가 더 늘었다고 한다. 처음 와서 효진이네 학교에서 학용품을 기부하라고 목록을 보내왔기에 아내와 고민 끝에 구입할 수 있는 것들을 구입해서 가지고 갔더니 진짜 가져왔어!’하는 눈빛으로 행정 직원이 받았다. 유진이네 학교에서는 학생 행사 관련해서 기부를 받아서 버스를 운행할 계획이었는데, 기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서 혼선을 빚다가 결국 운행을 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기부의 정체를 파악하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반강제적인 모금인지, 아니면 말 그대로 자발적인 기부인지, 어느 정도 규모로 해야 하는 것인지, 어떠한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매번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지 모를 때, 오늘처럼 다른 방식이 있으면 그것을 택하는 것이 속 편했다.

미국 자연사 박물관에 입장하자마자 거대한 공룡 뼈를 만날 수 있었다. 이곳에 꼭 들러야 한다고 우긴 것은 유진이었는데, 한국에서 가족끼리 함께 보았던 <박물관이 살아있다>(Night At The Museum, 2006)의 배경이 이곳인지 아닌지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였다. 로비에 있는 공룡 뼈를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박물관을 다 보고나서도 정확한 답을 얻지 못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워싱턴에 있는 자연사박물관과 이곳에서 나누어 찍었단다.

1층에서 밀스타인 기념 해양 생물관과 보석 전시장이 이채로웠다. 이름으로만 듣던 것들이 제 모습 그대로, 제 크기 그대로 눈앞에 등장했을 때 느끼는 비현실적인 느낌이 해양 생물관에서 들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결국 대부분 언어적 인식이거나 영상화된 이미지 이상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들의 비릿한 냄새는 아니더라도 그것들의 크기와 구체적인 생김새만으로도 낯설어지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리라. 사실 이런 전시물 앞에서 더 놀라면서 흥미를 갖는 것은 아이들보다 어른들이다. 어른들은 자신의 머릿속에 이미 그것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물을 보게 되면 그것이 산산이 깨지면서 더 놀라고 놀란 만큼 즐거워진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내와 나는 그랬다.

보석 전시실에는 예상대로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저 보석의 이름과 모양을 일치시켜보는 수준이었지만, 아내와 아이들의 관심은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었다. 아내는 보석 같은 것에는 욕심이 없는 줄 알았었는데, 무척 재미있어 하는 것을 보니 새로웠다. 결혼하고 공부하면서 보석 같은 것에 관심을 둘 정도로 여유가 있었던 적이 없으니 관심을 드러내지 않은 것뿐이란다. ‘인도의 별처럼 보석을 가공해서 새롭게 붙여놓은 이름들이 보석만큼이나 빛나고 있었다. 그 이름의 유래나 내력만 가지고도 충분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들어서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주려고 찾으니 벌써 아내와 다른 보석 앞에 가 있었다.

2층과 3층에 있는 애캘리 기념 아프리카 포유류관에는 아주 정밀하게 제작된 동물 박제들이 있었다. 조명과 배경 덕도 있었겠지만 박제 자체가 아주 사실적이었다. 탐험가, 동물학자, 사냥꾼이었던 칼 애캘리(Carl Akeley)는 박제술을 발명한 사람으로 이것들은 그를 기념하기 위한 작품들이다. 그는 단순히 박제를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배경 등을 설치하여 하나의 디오라마(diorama)를 구성하는데 뛰어났다고 한다. 이 박물관에 아프리카 포유류를 전시하자고 제안한 사람이 칼 애캘리였고, 그가 직접 아프리카에 가서 동물들을 잡아 박제를 만들었다고 하니 이 홀에 그의 이름이 붙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 과정에서 자신이 쏜 총에 맞아 죽은 고릴라의 표정을 보고 사냥을 그만두고 동물 보호론자가 되었다고 하니 아주 극적이다.

멕시코 중남미관에서 뽀로로를 닮은 조형물

멕시코와 중남미관에서 발견한 조형물들은 섬세한 표현과 다양한 표정이 무척 흥미로웠다. 조형물 하나가 뽀로로를 닮았다고 보여주니 아이들이 웃었다. 그 시대, 그 지역의 사람들도 이런 디자인과 표정을 좋아했었다니, 뽀로로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다. 곳곳에 소박하지만 정교하고 진솔한 표정의 목각들이 많았는데, 민속예술의 성격 때문인가 보다. 이번 여행에서 다양한 것을 너무 짧은 시간 안에 보아서 그런지 아이들은 별다른 감흥 없이 둘러보다가 이곳에서 재미있는 표정을 찾느라고 분주했다. 어쨌든 그들만의 소통이니 두고 지켜볼 뿐이었다.

<라스트 모히칸>을 연상시켰던 토마호크

3층에는 북아메리카 인디언관이 있었는데 이미 여러 곳에서 인디언 관련 전시를 보아온 터라 큰 감흥은 없었다. 다만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들의 무기 중에서 토마호크(tomahawk)였다. 토마호크는 단지 돌이나 금속 도끼만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던지거나 때릴 수 있는 무기를 통칭해서 부르는 말이란다. 돌이나 뼈뿐만 아니라 금속을 날카롭게 벼려 나무에 붙여서 사용했던 것들이다. 가장 멋진 토마호크 씬은 <라스트 모히칸>(The Last Of The Mohicans, 1992)의 끝부분에서 자식을 잃은 아비가 적을 향해 무참하게 그러나 아주 정교하게 휘두르던 장면이다. 그것은 마치 장예모의 영화 <영웅>(Hero, 2002) 에서 의식적으로 구현했던 칼과 활의 아름다운 움직임과 같이 민첩하고 단호했었다. 앞뒤로 모두 살상이 가능하고, 원심력을 이용하는 토마호크의 특성을 잘 살려서 분노를 표현했지만,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타격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로비에 공룡 뼈

사람들이 가장 많았던 곳은 4층 전시실이었는데 그곳에 공룡과 멸종된 포유류 뼈가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몸집이었음이 분명한 사라져 버린 것들의 견고한 뼈가 정교하게 맞추어져 있었다. 아직 그 뼈에는 살을 갖고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거칠게 포효했을 때의 기력이 남아 있는 듯 역동적인 정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그려놓은 그림들만 오히려 그 단호한 정지 앞에서 지극히 초라한 비교가 되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의 손을 피하기 위해 유리관에 갇혀 있거나 작은 철선으로 골격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녀석들조차 살아서 가장 강했던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가장 자기다운 모습으로 죽어서 살아있는 이것들의 현재는 슬픈 매혹이었다. 주어진 시간에서 조금도 비껴 설 수 없는 살아서 유한한 것들의 운명과 그 안에서 스스로의 격을 유지하려는 몸짓이 잔혹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말이 들려 돌아보니 한국인 모자가 아쉬워하고 있었다. 이제 더 볼 공룡이 없다고.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아들 때문인지 엄마도 그 낯설고 긴 공룡의 이름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엄마가 저 정도라면 아들은 학위 없는 박사일 게다. 아들도 대단하고 엄마도 대단했다. 도통 공룡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나나 우리 아이들과는 다른 차원의 사람들 같았다. 아들이 좋아한다고 같이 관심을 갖고, 분명 외워지지 않았을 그 이름을 외웠을 엄마의 마음이 아름다웠다.

박물관은 토요일이라서 매우 혼잡했다. 더구나 워낙 박물관이 넓다보니 관람 동선 안내가 필요했는데, 이게 친절하게 되어 있지를 않았고, 직원들도 다소 고압적이고 불친절해서 아쉬웠다. 관람객이 이러한 불편을 느끼게 된다면 아무리 훌륭한 전시물이 있어도 최고라는 말은 듣기 어려우리라.

길거리에서 구입한 Lamb of rice.

박물관을 나와서 버스를 타러 가는데 맛있는 냄새가 났다. 배가 고프다기보다는 그 냄새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작은 트럭에서 캐밥(kebop)을 팔고 있었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한참을 기다리다 8달러를 주고 양 고기밥(Lamb of rice)을 샀다. 어제 현대미술관 앞에서 이것을 먹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맛있어 보였다. 그래서 맛만 볼 요량으로 하나만 시켜서 나누어 먹었다. 밥과 양고기 그리고 야채의 조화에 무척 절묘했다. 주문하는 과정에서 주인에게 한 소리 들었다. 내 순서인 줄 알고 주문을 했더니 네가 올라와서 10명의 사람을 한 번 상대해볼래?”라고 이야기한다. 내 순서인 줄 알았다고 이야기하려는데, 주인은 주문받느라 정신이 없다. 아이 앞에서 조금 창피했다. 그래도 그거 하나 먹어보겠다고 꿋꿋하게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데, 주인도 미안했는지 음식은 제일 빨리 준다. 나는 속도 없이 그게 맛있었다. 유진이는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주며 재미있어 한다. 그래 너희가 재미있으면 됐다.

버스를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등장한 세인트 존 더 디바인 대성당(Cathedral of St. John the Divine)은 압도적이었다. 1892년에 짓기 시작해서 아직까지 공사가 진행 중인 세계 최대 규모가 될 거라는 이 성당은 2050년에 완공이 된단다. 가이드의 이야기로는 고딕양식의 이 건물은 풋볼 경기장 2개 크기에 17층 높이로 8,000명이 동시에 미사를 볼 수 있는 규모라니 크긴 큰 모양이다. 특히 장미창(Rose Window)1만개 이상의 유리로 만들었다고 하니 그 공력이 대단하다. 100년 전부터 짓기 시작했으니 완공도 되기 전에 이미 건물에는 건너온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건축이 중단되기도 했고, 2001년에는 화재가 일어나기도 했단다. 건물 전체가 하나의 조각품처럼 느껴졌다. 섬세하게 세공된 조각들이 건물 곳곳에서 빛났지만 무엇보다 압도적인 것은 100년을 넘기는 대역사를 꿋꿋하게 진행하고 있는 사람들의 의지였다. 자기 자신이 시작과 끝을 모두 보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위대한 예술 작품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것으로 자족하는 겸허함과 뒤에 오는 사람들에 대한 무한 신뢰가 있어야지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세인트 존 더 디바인 대성당의 다양한 모습. 100년 전에 지어진 것부터 현재 짓고 있는 것까지 시간이 공존한다.

100년이 넘게 짓고 있고, 화재까지 나다보니 대성당은 각 부분이 자기 몫의 시간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간만 봐서는 하나의 건물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차이가 드러났지만, 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 정도 시간의 차이는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앞으로 그 차이를 지울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을 견디고 지탱하겠다는 의미처럼 느껴졌다.

미국 3대 미술관 중 하나로 330만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나 독특한 건물 디자인으로 유명한 구겐하임 미술관, 뮤지션이라면 누구나 서보고 싶어 한다는 카네기 홀 그리고 뉴욕의 상징적인 공간인 센트럴 파크도 그냥 버스로 돌아보아야했다. 한정된 시간 안에 보고 싶은 것을 제대로 보자는 생각에 아이들의 의견을 많이 반영해서 볼 것을 결정하다보니 나와 아내가 보고 싶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나 센트럴파크 산책 등이 빠지게 된 것이다. 아쉬움이 컸지만 제대로 보려면 지금 일정의 두 배 이상이 시간이 필요하고, 더 온전히 체험하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생활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일 것이기에 이미 예정된 한계였다. 어느새 버스는 다시 타임스퀘어 쪽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2010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의뢰를 받아서 <해리포터 시리즈>의 스토리텔링 전략을 규명하는 보고서[각주:2]를 제출한 적이 있다. 소설과 영화를 분석해서 <해리포터 시리즈> 스토리텔링의 전략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덕분에 나도 다시 꼼꼼하게 분석할 기회를 갖게 되었었다. 우리 아이들도 모두 <해리포터 시리즈>의 광팬이었다. 효진이는 책을 반복해서 읽으며 열광했고, 유진이는 책도 책이지만 영화를 더 탐닉했다. 그러다보니 해리포터 전시회가 무척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뉴욕에 도착한 첫날 <오페라의 유령>을 보러 가는 길에 해리포터 전시회(Harry Poter Exhibition)’가 열리는 곳을 보아둔 모양이었다. 아내에게 꼭 보고 싶다고 했는지 아내는 나이트 루프 전에 그것을 보자고 한다. 전시 공간이나 성격으로 보아서 별 것 없을 것 같다고 나는 몇 번을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40분 이상 줄을 서서 기다려서 들어간 전시회장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관람료(어른 27달러, 아이 20.5달러)에 비해 전시 내용이나 전개가 턱없이 부실했고, 무엇보다 즐길 것이 없었다. 영화에 등장했던 의상과 소품을 전시해 둔 수준이었고, CG로 처리해서 실재하지 않는 소품들까지 만들어놓은 것은 좋았지만, 그 수준이 조악했다. 그나마 전시실도 몇 개 되지 않아서 기다린 시간보다 관람시간이 턱 없이 모자랐고, 그 시간이나마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많아서 앞으로 움직이지를 못해서였다. 아이들도 적지 않게 실망한 모양이었다. 브랜드 가디언(brand guardian)으로서 엄격한 조앤 K. 롤링(Joan K. Rowling)이나 워너브라더스가 어떻게 이렇게 부실한 전시회를 허가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전시회는 9월까지 뉴욕에서 전시를 한단다. 빈약한 콘텐츠로 인해서 아이들은 실망하겠지만 업자들은 아마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들었다. 전시회장 안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볼 것도 없는 것이 사진도 못 찍게 한다고 투덜댔지만, 경험재(experience good)인 이와 같은 전시회는 못 찍게 하는 것이 옳다. 직접 봄으로써 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고, 그 구분에 대가를 지불하는 전시회이기 때문이다.

전시회장의 끝은 예상대로 관련 상품 매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단순하게 해리포터라는 브랜드만 활용하는 팬시상품에서부터,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기숙사별 넥타이, 망토, 목도리와 모자 같은 실용적인 물품은 물론, 다이애건 앨리에서 팔렸던 귀지 맛 캔디, 마법지팡이, 님부스2000같은 빗자루 등과 같은 물품들까지 해리포터로 팔 수 있는 것들은 다 모여 있었다. 전시회보다 오히려 이곳이 더 볼 게 많았다. 스토리노믹스라 불러도 좋을 만큼의 열풍을 일으켰던 <해리포터 시리즈>는 끝났지만 그것의 브랜드는 살아서 당분간 더 충성도 높은 팬덤을 형성할 것이 분명하다. 매장을 나오면서 아이들은 엽서를, 나는 ‘Hogwarts Express 9¾’이라고 새겨진 자석을 구입했다. 내년 봄부터 내 연구실 앞에는 아마 이 자석이 붙어있게 될 것이다.

나이트 루프를 타기 전에 저녁을 먹어야 했다. 캘리포니아에 인앤아웃(In-N-Out) 햄버거[각주:3]가 있다면 뉴욕에는 셰이크 섀크 버거(Shake Shack Burger)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마침 근처였다. 이틀 동안 타임스퀘어를 오가면서 꼭 먹어보리라 벼르다가 드디어 먹었다. 20분쯤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주문을 하고 진동벨을 받았다. 20분밖에 기다리지 않았으니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우리도 이제 기다리는 것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가는지 그렇게 지루하지 않았다. 그 넓은 매장에 빈자리가 하나도 없을뿐더러 매우 소란스러워서 정신이 없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자리를 잡으라고 하고, 나는 주문한 버거가 나오길 기다렸다. 셰이크 섀크 버거는 4.5달러로 버거의 양과 질에 비해서는 비교적 저렴한 편이었다. 다시 20분쯤 기다려서 주문한 버거를 받았다. 햄버거의 크기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아삭거리면서도 씹으면 촉촉했던 패티, 그리고 촉촉한 빵과 아삭한 프렌치프라이와 치즈의 맛이 탁월했다. 조금만 덜 소란스럽고 혼잡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 가격에 이렇게 맛이 있으니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고 사람이 몰리는 만큼 소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고보면, 감수해야할 부분이었다.

셰이크 섀크 버거

음식점 등급 표시

뉴욕에서는 음식점 앞에 ABC등급이 매겨져서 잘 보이는 곳에 걸려 있다. 음식점의 등급표시라는데, 물론 A가 가장 좋고, B, C로 이어진다. 대부분의 식당이 A를 걸고 있었다. 만약 C가 걸려 있으면 식당 문 앞에서 얼른 도망가야 할 수준이란다. 음식의 맛과 서비스의 형태라는 게 일괄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웠을 것인데 이렇게 등급을 매겨 놓은 것을 보면, 아마도 그 이전에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나보다. 어쨌든 처음 오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친절한 구분이지만, 평가받는 식당 입장에서는 참 모진 구분이 아닐 수 없다. 음식 맛, 청결도, 요리사 등급, 가격, 서비스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결과라는데, 한국의 유명 음식점들은 어떤 등급을 받게 될까 궁금했다. 허름한데 음식 맛은 최고인 집들은 이 평가 기준으로 하면 A를 받을 수 있을까? 욕쟁이 할머니 국밥집 같은 데는 욕도 서비스로 평가해야 할 텐데, 다른 곳과의 형평성 문제가 발생할 것 같고…….

이것은 미국식 객관화다. 객관화하기 어려운 것을 객관화하기 위해 엄정하고 납득 가능한 기준을 마련하고 그것에 따라 평가하고 공시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많은 부조리한 것들이 이와 같은 예측 가능한 평가 시스템을 마련하지 못한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대학입시나 입사시험과 같은 것들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각 대학이나 기업별로 자신들이 원하는 인재상에 객관적이고 납득 가능한 평가 시스템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순인 줄 알면서 한계가 분명한 수능으로 평가하거나 외부 평가 기관의 평가나 스펙에 의존하는 것은 아닐까? 대학별로 자신들이 지향하는 인재상에 맞추어 학생을 선발하고 교육해야만 차별화된 교육이 가능할 텐데, 이것을 국가가 틀어쥐고 있으니 기형적인 입시 속에서 너나없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지 않은가? 기업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인재를 뽑아서 쓰는데, 자신들만의 평가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고 획일적인 영어성적과 스펙만을 강요하는 것도 사회적 묵인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객관화된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그렇게 자율적인 평가 시스템에 맡기었을 때, 모두가 수긍 가능한 공정한 평가를 수행하지 못한 탓도 크다. 그러다보니 기계적이고 일방적인 평가에 기대야 하고, 그로 인하여 교육과 평가가 어긋나고, 배움과 능력이 괴리되는 생산적이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주문한 것을 기다리면서 보니 이곳에서도 예외 없이 폐기처분되는 음식들을 볼 수 있었다. 주문한 버거가 나오고 손님을 호출했는데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고 음식이 식자 여지없이 버렸다. 이러한 사례는 차고 넘친다. 주스 전문점이나 커피 전문점에서 주문이 잘못되어 딴 음료가 나오면 예외 없이 폐기 처분한다. 어디 그뿐이랴. 대형할인매장에서 식료품을 샀다가 반품을 하게 되면 개봉 여부와 상관없이 폐기한단다. 식품에 대한 엄정한 관리라는 점에서는 환영할만하지만 개봉하지 않은 것까지 폐기하는 것은 불필요한 낭비가 아닐까? 미국에 처음 와서 코스트코에서 구입한 소시지가 너무 짜서 먹을 수 없는 형편이라 반품을 했다. 담당자가 반품한 모든 음식들은 폐기하니 앞으로는 신중하게 선택하라고 일러주었다. 처음에는 몹시 불쾌했는데, 몇 개월 이곳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보니 그가 의식 있고 양심적인 직원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미국의 모습을 보면, 풍요가 늘 축복은 아닌가보다.

우비를 입고 탄 나이트 루프

저녁을 먹고 나이트 루프(Night loop)를 타러 정류소까지 갔더니 이것은 한번 타면 도착할 때까지 정차하지 않는단다. 1시간 이상이 걸릴 것이니 화장실을 들렀다가 타야 할 것 같아서 화장실을 찾는데, 없다. 대부분 업소의 안에 있어서 업소에 들어가야 이용할 수 있었다. 미국처럼 화장실 인심이 고약한 곳이 또 있을까마는 그중에서도 뉴욕처럼 야박한 곳도 없었다. 결국 길 건너에 있는 맥도날드로 갔더니 벌써 십여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서 내 앞에 앞에 차례가 되었는데 한 남자가 아이를 데려와 먼저 이용하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앞에 사람은 나에게 양해를 구한다. 그렇게 하라고 했더니 아이는 들어가서 10초도 되지 않고 나온다. 화장실을 보고 부지런히 정류장으로 갔더니 아내와 아이들이 한참을 기다린 모양이다. 이 지독한 도시에는 화장실도 없고, 있어도 잘 빌려주지 않는다. 아무리 화려하고 압도적인 건물을 세우면 뭐한단 말인가, 인간의 가장 기본 욕구를 편안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배려가 없는 도시라면, 그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 도시가 아니겠는가?

나이트루프는 말 그대로 야경 투어였다. 맨해튼 다리를 건너서 브룩클린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코스였다. 기회가 닿으면 브룩클린에 있는 그리말디 피자를 먹어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줄이 너무 길었고, 투어 중에 내릴 수도 없었다. 버스에 오를 때부터 비가 조금씩 내렸다. 2층 버스에 지붕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했는데 버스 회사에서 모두에게 하얀색 우비를 나누어 준다. 우비를 입고 2층 버스에 앉아서 맨해튼과 브룩클린의 야경을 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다리를 건너며 보는 브룩클린과 맨해튼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맨해튼은 불빛으로 도시의 윤곽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지만, 불빛 바깥쪽의 어둠은 낮보다 더 짙게 내려 앉아 있었다.

대학시절에 본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Last Exit To Brooklyn, 1989)가 생각나서 꼭 보고 싶던 곳이었는데 너무 어두웠다. 창녀 트랄라가 한국전에 참전하는 군인과 며칠을 함께 보내고 떠나보내며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깨닫는 장면은 장 자크 아노의 영화 <연인>(L'Amant, 1992) 의 마지막 장면처럼 회환과 자기부정의 정서가 표현된 빼어난 장면 중에 하나다. 브룩클린은 그동안 내게 트랄라의 절망과 그 앞에서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고 지켜볼 뿐인 소년 스쿠프 그리고 자신이 성정체성을 깨닫고 방황하는 핸리의 모습이 마구 엉킨 이미지였었는데, 이제 조금 구체적인 도시의 윤곽을 갖게 되었다. 다리를 건너 맨해튼으로 돌아오며 유쾌해졌다. 내린 비로 밤공기는 맑고 시원해져 있었다. 이제 조금 익숙한 눈으로 복습하듯 거리와 건물들을 확인했고, 그 사이로 오고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타임스퀘어에서 밤늦게 만난 중국민주화 시위대

타임스퀘어의 청년

미국스러운 대형 리무진

버스는 천천히 다시 돌아왔다. 그레이라인 버스 투어를 즐기다보니 시작과 끝이 매일 같은 곳이다. 타임스퀘어에는 밤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다. 광고판들은 밤이 깊을수록 더 화려하고 강렬해지는 느낌이었다. 타임스퀘어에서는 오십 여명의 중국인 학생들이 중국 민주화와 민주투사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중국이 아닌 미국에서 중국의 민주화를 외치는 것이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고국에서 할 수 없으니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곳에서 외치는 것이리라.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음직한(아직 계속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동양인들 몇몇이 쳐다볼 뿐, 사람들은 대부분 무관심했다. 근처에서는 한 청년이 “Jesus forgives sin”이라는 푯말을 들고 서 있었다. 그 둘 사이에는 아주 길고 호화로운 리무진 두 개가 정차해서 묘한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타임스퀘어의 다양성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모두들 내일이 뉴욕에서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지, 빗소리 때문인지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뉴욕을 부지런히 돌았다. 처음에 올 때 그 정체모를 도시를 조금 아주 조금 보았다. 다른 도시에 비해서 머무는 기간에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가지 않는 도시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나는 아직 뉴욕이 싫다. 숙소는 별도의 문제였다. 그건 속인 사람과 속은 우리의 문제였으니까. 무엇보다 뉴욕이 보여주는 지독한 부조화가 거북했다.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도시 공간에서 세계 제일의 강박에 사로잡힌 화려함은 천박하거나 안쓰러운 과시였다.

나는 왜 뉴욕을 세계 최고의 도시라고 말하는지 아직 의문을 풀지 못했다. 나는 아직 모르겠다.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곳이 최고의 도시라면, 뉴욕은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최고의 문화라는 것에서 사람은 최우선 순위가 아니었다. 사람이 소거된 문화는 더 이상 문화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뉴욕을 왜 세계 최고의 도시라고 말하는가? 이것은 두고두고 고민해볼 문제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것을 세계 최고라고 부르는 데에는 분명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 일찍, 우리는 다시 차를 렌트해서 필라델피아로 떠날 것이다. 내일 떠나야 하는데 창밖으로 빗줄기가 거세다. 아마 운전이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지만 동부로 넘어와서는 유난히 비가 많다. 어쨌든 그것도 여행의 일부일 테니 수납해야 하리라. 예측 불가능하고, 예측 불가능한 만큼 긴장되고, 긴장된 만큼 짜릿한 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라고 위로하면서.

  1. 업타운 루프는 AOL타임워너 센터→링컨센터→다코타 아파트→미국 자연사 박물관→어퍼 웨스트 사이드→유스호스텔→세인트 존 더 디바인 대성당→리버사이드 교회→아폴로 극장→스미소니언 국립 디자인 박물관→구겐하임 미술관→메트로폴리탄 미술관→휘트니 미술관→센트럴파크 등을 도는 코스였다. [본문으로]
  2. 박기수, KOCCA포커스 2010-3 <해리포터, 스토리텔링 성공 전략 분석>, 한국콘텐츠진흥원. [본문으로]
  3. 인앤아웃(In-N-Out)의 햄버거는 패스트푸드이기는 하지만 냉동재료를 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매일 아침 신선한 재료를 냉장트럭으로 배송해야하기 때문에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판매되다가 인접한 네바다 주, 애리조나 주, 텍사스 주까지만 지점을 냈단다. 재료의 신선함을 냉장으로 지킬 수 있는 거리까지만 지점을 낸다는 그들의 마인드 때문인지 미국 내 고객만족도 1위 햄버거란다. 매장 내에서 통감자를 기계에 넣고 한 번에 잘라내어서 프렌치프라이를 만드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재미있는 장면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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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의 필라델피아

814일 뉴욕필라델피아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빗소리에 잠을 깨면서 나쁜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냐던 이승환의 노래가 생각났다. 밤새도록 세찬 비가 내리고, 새벽녘에 설핏 잠이 깨었을 때도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렌터카 회사까지 걸어가겠다는 계획은 말 그대로 수포로 돌아갔다. 아침이 되자 비는 더욱 거세졌다.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일단 짐을 최소한으로 줄여야했다. 여행 올 때 가져온 3분 카레 20개가량과 햇반 7, 뉴욕에서 장을 본 쌀, 김치, 계란 등을 숙소 냉장고에 남겨 놓고 메모를 써 두었다. 남은 일정 동안 이것을 모두 먹을 수 없고, 남은 것을 비행기에 실어 다시 얼바인으로 가져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비가 이렇게 온다면 그것을 바리바리 싸서 가져가기는 더욱 어려웠다. 일단 짐을 줄일 수 있을 만큼 줄이기로 하고, 이것들을 냉장고에 두고 가기로 했다. 우리보다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유용한 물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곡진하게 메모를 써서 냉장고 앞에 붙여두고 왔다.

숙소는 마지막 정마저 떼려는 듯, 아침에 온수마저 나오지 않았다. 일단 찬물로 씻을 수 있을 만큼 씻으라고 아이들에게 이르고, 숙소를 정리했다. 우리가 머문 자리 때문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욕을 먹고 싶지 않았고, 그것이 남의 집을 사용한 최소한의 예의기도 했다. 짐을 일단 다 싼 후에 손에 드는 짐들은 비닐로 잘 덮었다. 그러는 사이, 비는 더욱 거세졌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가서 택시를 잡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곳 택시들이 대부분 예약으로 다니기 때문에 나가서 바로 잡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짐을 끌어내고 있는데 마침 지나가는 택시가 있어서 쉽게 잡을 수 있었다. 택시에 짐을 싣고 렌터카 회사까지 가는데 곳곳에서 교통통제를 하고 있었다. 1.2마일(2) 되는 거리를 빙빙 돌아서 간신히 도착하고 보니 요금이 12달러가 나왔다. 20달러 지폐를 주니 기사가 잔돈이 없단다. 있는 것만 달라니 6달러를 준다. 그래 그거면 됐다. 비가 이렇게 장하게 내리는데 이 택시가 아니었으면 곤란하지 않았던가?

렌터카 회사 AVIS는 대형 건물 주차장 같은 분위기였다. 예약을 확인하고 차를 배정 받는데, 운전면허를 달란다. 2월에 면허를 획득하고 아직까지도 배달이 되지 않아서 임시 운전면허증(temporary license)을 제시했더니 이건 안 된단다. 얼바인에서는 그것을 제시하고 차를 빌렸다고 하니, 그래도 안 된단다. 사진이 붙어 있는 면허가 있어야 한단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한국 면허를 보여주니 그건 된다고 한다. 한글을 읽을 줄 모르는 그들이 과연 한국 면허증을 무슨 수로 신용하는지,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이 상황에서는 됐으니 된 것이다. 서류를 꾸미고 카드결제를 하려고 데빗 카드(debit card)를 냈더니 데빗 카드는 안 된단다. 잔고가 넉넉한데 왜 안 되냐니까 안 된단다. 신용카드가 없냐고 해서 한국 신용카드를 줬더니 결제가 됐다. 미소를 보이면서 안 된다는 데 화를 낼 수도 없고, 답답했지만 금방 다른 대체 수단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말 웃기는 상황이었지만 웃을 수 없었다. 미국에서 창구 담당자가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라는 소리를 여러 차례 들은 탓에 저항하기 보다는 투항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러면서 다른 대체 방법을 이야기 해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차는 신형 소나타였다. 차를 배정받아서 짐을 싣고 달리는데 꼭 내차 같다. 처음 타보는 차인데 내 차처럼 편한 것은 소나타의 경쟁력인가 아니면 소나타의 한계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렇게 익숙하고 편안하다는 것은 경쟁력이겠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에게 최적화된 것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다소 불편할 수도 있을 테니 한계가 아닐까? 농담처럼 그런 이야기를 하며 뉴욕을 빠져 나왔다. 렌터카를 뉴욕에서 반납하면서 재웠던 사만다를 며칠 만에 깨웠더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초반부터 에러였다. 가뜩이나 난감한 뉴욕에서 사만다가 에러면 헤맬 수밖에 없었다. 사만다는 몇 번의 경로 수정을 하더니 결국 뉴욕을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뉴욕을 빠져나오니 날아갈듯 시원한데 폭우는 여전히 지독했다.

필라델피아 시내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에는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바로 이동하려 했다. 4시간 30분 정도면 도착하는 거리니까, 조금 부지런히 움직이면 뉴욕이나 워싱턴에서의 하루를 더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각 도시에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고, 미국 역사를 정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필라델피아가 포함되게 되었다. 필라델피아는 우애 있는 도시라는 의미란다. 독립전쟁 당시 최대 거점이었고, 19세기에는 미국 내 최대의 도시였다는 필라델피아는 미국 역사를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찾아야 할 도시였다.

사실 필라델피아로 달리면서 내심 우리 모두는 유명하다는 필라델피아 샌드위치를 맛볼 수 있으리라는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유진이 학교 앞에 필라델피아 식으로 샌드위치와 프렌치프라이를 파는 필리스’(phillies)라는 가게가 있는데, 여기에서 맛본 바로는 필라델피아 샌드위치는 기대하기에 충분한 음식이었다. 특히 나는 필리스 베스트라는 메뉴가 마음에 들었다. 프렌치프라이와 얇게 저민 소고기를 함께 철판 위에서 구운 후에 그 위에 필라델피아 치즈를 뿌려주는 이 음식은 1인분이면 2명이 충분히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양도 많고, 짜지 않으면서도 치즈 고유의 풍미를 즐길 수 있어서 좋아했다. 우리는 모두 캘리포니아에서도 맛이 이 정도인데 필라델피아 현지에서는 얼마나 맛있을 것인가 라는 소박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뉴욕을 출발해서 필라델피아까지 142마일(227)을 달렸다. 거센 비는 천천히 달리라고 집요하게 설득하고 있었다. 누군가 곡진하고 집요하게 이야기할 때는 듣는 것이 현명하다. 더구나 안전과 상관되는 일은 고집 피울 일이 아니었다. 달리는 내내 사만다의 음성이 다급했는데 지금껏 달렸던 길들과는 달리 시내 주행이 많았기 때문이다. 힘들게 고속도로에 올라선 후에도 자주 길을 바꾸어야 했다. 달린 주요 고속도로들은 I-78, I-95 S, I-276 W였다. 도로명 뒤에 SW가 붙는 것을 보니 우리는 남쪽과 서쪽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만다에 의지해서 달리다보면 내가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 방향감과 거리감을 잃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낯설고 비까지 내리는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니 바깥세계와는 단절된 차 안의 작은 세계 안에만 머무는 느낌이었다. 아이들은 내리는 비 때문인지 모두 잠이 들어 있었다. 아내는 내가 졸까봐 뒷좌석에서 룸미러에 비치는 내 눈을 보고 있었다. 힘겹게 빗물을 밀어내는 와이퍼가 지나간 부분을 제외하고는 밖이 잘 보이질 않았다. 아이들은 잠들어 있고 음악도 틀지 않고 있으니 마치 고요한 방 안에 혼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은 아주 비현실적이고 고립된 것이어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희미하게 만들었다.

얼마 달리지도 않았는데 점심때였다. 배고픔은 얼마나 규칙적이고 무조건적인가? 다행히 휴게소에는 먹을 만한 새로운 음식들이 많았다. 우리가 선택한 것은 이탈리아 음식이었는데 여전히 양은 엄청나게 많았지만 짜지 않아서 좋았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출발을 하려고 화장실에 들렀는데 묘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백발의 노인이 바지를 발목까지 내리고 소변을 보고 있었다. 발목까지 내려진 청바지와 멜빵은 절묘하게 축축한 바닥에 닿지 않았다. 하얀 피부의 엉덩이와 상체에 비해서 턱없이 빈약한 다리가 묘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쓰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누구도 그 노인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나는 놀라서 훔쳐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서로의 프라이버시 때문에 소변기 사용 순서도 가르치는 나라이고 보니 내 행동은 무례하거나 불쾌한 것일 수 있어서 얼른 고개를 돌렸지만, 매우 강렬한 이미지였다. 무엇보다 젊은 시절 무척 탄탄했을 상체와 여위고 빈약한 하체의 부조화는 처연했다. 젊은 날의 노동을 견실하게 수행했을 그의 상체와 이제는 새로운 삶을 찾아 분주히 돌아다니기에는 너무도 빈약해진 다리, 그 부조화로부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에 쓸쓸했다. 그것은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 <UP>에서 칼과 앨리가 평생 모험을 꿈꾸지만 이루지 못하고, 앨리가 죽고 나서 칼이 앨범을 통해 추억하는 장면처럼 쓸쓸하고 슬퍼보였다.

인디펜던스 내셔널 히스토리컬 파크

작은 우비를 입고 인디펜던스 내셔널 히스토리컬 파크으로 가는 아내와 아이들

비는 필라델피아에 도착하고 나서도 좀처럼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숙소는 외곽에 잡아두었기 때문에 먼저 인디펜던스 내셔널 히스토리컬 파크(Independence National Historical Park)로 먼저 갔다. 주소대로 입력을 했는데 사만다가 데려간 곳은 그곳이 아니었다. 주변을 몇 바퀴 돌다가 차를 세우고 물어보니 한 블록 너머에 있었다. 밖에서 보니 주차가 마땅할 것 같지 않아서 동전으로 주차가 가능한 곳에 일단 차를 세우고 걸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비가 너무 거셌다. 우산을 준비하지 않아서 우산을 살까 고민하다가 솔이네가 귀국하면서 주고 간 우비를 가져온 것이 생각나서 그것을 우선 쓰기로 했다. 내 것은 정상이었는데 아내와 아이들의 것은 모두 많이 작았다. 결국 둘러쓰고 뛰기로 했다. 어린 시절처럼 물첨벙을 하면서 한참을 달려오는데 아내와 아이들이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세히 보니 아내 우비 뒤에 그려진 미키마우스의 눈이 없었다. 모두 함께 깔깔대며 물첨벙을 하면서 안내도를 받으러 인디펜던스 비지터 센터로 갔다. 폭우 때문에 거리에는 빗물이 도랑처럼 흐르고 있었는데, 물이 맑았다.

인디펜던스 내셔널 히스토리컬 파크는 인디펜던스 홀(Independence Hal), 자유의 종이 보관된 리버티 벨 센터(Liberty Bell Center), 미국 최초의 국회의사당(Congress Hall), 올드시티 홀(Old City Hall)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비지터 센터가 있는 파크는 무척 고즈넉했다. 파크 자체가 매력적이라기보다는 파크 주변의 오래된 건물들과 오고가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비지터 센터에서 전체 지도와 인디펜던스 홀 내부를 둘러보는 투어 티켓을 받았다. 투어를 참가하기 위해 인디펜던스 홀을 찾아가니 아까 주차하고 걸어왔던 그곳이다. 다시 우비를 뒤집어쓰고 아주 궁색한 모습으로 온 길을 되돌아갔다.

미국 최초 의사당 전경

의사당에 딸린 양탄자는 7개 주를 상징

20분쯤 밖에서 기다리니 투어가 시작되었다. 인디펜던스 홀로 들어가 앉아서 해설사의 설명을 20분쯤 들었다. 워낙 빠르게 설명을 하니 들리는 소리보다 놓치는 소리가 많았다. 들리지 않는 부분은 유진이가 대신 들려주었다. 그나마 미국 역사를 미리 조금 파악해두고 간 것이 다행이었다. 독립전쟁을 치르면서 회의를 하고, 건국 이후에 상원이 열렸던 최초의 국회의사당에는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당시 사용되었던 것이라는 책상과 의자, 책상마다 놓여 있는 깃털 펜, 촛대, 책자, 서류들을 창으로 들어온 빛이 제한적으로 비추고 있었다. 히스토리 채널의 다큐멘터리 연출처럼 전체적인 어두운 분위기에 제한적인 조명은 몰입시키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중간 중간 효진이는 제가 아는 것을 알려준다. 지난 학기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라며 매우 구체적인 정보를 주었다. 보스턴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이에게는 책 속의 역사가 현장의 역사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지식으로서 역사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할 텐데, 아직 효진이의 역사는 지식에 머물러 있다. 아직 우리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 역사를 배운 것이 앞으로 우리 역사를 배우는데 어떤 영향을 줄지 궁금했다. 귀국하면 곧바로 한국 역사를 배울 텐데 효진이는 어떻게 두 나라의 역사를 비교하고 이해하게 될지도 기대가 된다. 효진이가 자신이 아는 것을 자꾸 이야기 하니까, 유진이는 그건 미국 역사라고 면박을 준다. 조금 컸다고 우리나라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둘이 그러는 모습이 귀여워서 내버려두었다.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현재를 보면서 역사를 알게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투어를 마치고 나오니 비가 그쳐 있었다. 몇몇 건물들은 보수중인지 가림막을 설치했는데, 가림막이 아주 멋스러웠다. 보수하는 건물의 원래 모습을 가림막에 흐리게 인쇄해 둔 것이다. 두드러지게 해서 현재 건물의 보이는 부분을 압도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건물 앞으로 워싱턴 동상과 존경 받는 대통령들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이 보도에 박혀 있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수많은 이해가 상충하고, 수많은 가치관이 충돌하는 한 나라의 수장으로서 전 국민의 지지와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더구나 미국과 같이 합중국의 형태를 이룬 나라에서 대통령이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는 대통령이라면 그는 정말 존경받을만한 인물일 것이다. 미국에 와서 보니 미국인들이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대표적인 인물들이 조지 워싱턴과 아브라함 링컨이다. 조지 워싱턴의 탄생일을 기념하며 시작된 프레지던트 데이(President's Day)까지 있고, 가는 곳마다 링컨과 관련된 기념관이 없는 곳이 없는 것을 보면, 그들에 대한 미국인들의 존경과 그리움을 짐작할 수 있겠다. 조지 워싱턴 동상 앞에서 포즈를 취하던 아이들이 어느새 링컨 대통령을 기념하는 동판 위에 가서 서 있었다. 사진을 찍어주면서 우리나라에도 존경할만한 대통령이 많이 나와서 아이들이 그들을 기리고 이야기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보수중인 건물의 가림막멋스러운 배려.

필라델피아는 유서 깊은 도시여서 그런지, 돌아보니 곳곳에 동상이 있다. 그 앞에서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아도 제대로 공을 들여 만든 작품임을 알 수 있었다. 돌아가신 이청준 선생님은 당신들의 천국에서 동상에 대한 경계를 강조한 바 있다. 동상은 사람들 앞에 우뚝 강건하게 서서 다른 의문이나 반론을 일시에 침묵시키는 힘을 가졌다. 사람들은 동상을 세움으로써 동상 속 인물의 의지와 뜻을 계승하려하고, 그 외의 다른 의견과 문제는 일체 허용하려 들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반성하지 않는 동상의 의지와 뜻은 오히려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우린 역사와 현실 속에서 숱하게 보아왔다. 동상의 뒤쪽을 찍으면서 그 어색한 강건함을 생각했다.

인디펜던스 내셔널 히스토리컬 파크를 둘러보며 다양한 곳까지 섬세하게 신경을 쓴 그들의 노력을 읽을 수 있었다. 공사 가림막 뿐만 아니라 화장실 푯말 하나에서도 자신들의 유서 깊은 전통을 드러냄으로써, 장소성을 최대한 살리는 디자인을 보여주고 있었다.

비지터 센터 쪽으로 다시 이동해서 자유의 종(The Liberty Bell)을 보았다. 깨진 부분이 선명한 자유의 종은 묘하게 동상과 대비를 이루었다. 미국독립선언이 공포될 때 쳤다는 이 종은 노예해방론자들에 의해 자유의 종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은 균열이 생겨서 사용하지 않고 전시만 해두었다는데, 가서보니 깨진 금이 선명했다. 자유와 평등을 상징했던 이 종의 균열은 현재 미국의 모습과 상관하여 좋은 유추를 제공했다. 현재적 의미에서 미국의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의 실체와 그 결과,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보이는 미국의 자유와 평등은 많은 생각을 요구하는 문제였다. 물론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 자유와 평등의 문제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음도 분명했다.

자유의 종 엑스레이

멋스러운 여자 화장실 표시

도네이션함

1954년 자유의 종 앞에서 선 어린이 합창단

자유의 종을 보러 간 곳에서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보았다. 1954년 인디펜던스 홀에서 공연을 하고 자유의 종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한국 어린이 합창단의 모습이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에 유엔군 위문공연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이 합창단은 휴전이 되자 미국에 경제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서 공연을 했다고 한다. 무려 4개월 동안 42개 도시를 돌면서 공연을 했는데, 미국 내에서도 화제를 불러 모으면서 4,000만 달러의 경제 원조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동족끼리 전쟁을 하면서 다른 나라 군대를 위로하기 위해 어린이를 동원했다는 사실과 전쟁 후에는 남의 나라에 경제 원조를 부탁하러 어린이들을 앞세워야 했던 슬픈 역사의 한 장면이다.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고 있는 어린 아이들 옆으로 서 있는 군복을 입은 어른들의 모습에서 그 참혹했던 시기를 건너려했던 눈물겨운 노력을 읽을 수 있었다. 이 사진이 비록 자랑으로 내세울 것은 아닐지 몰라도 부끄러워하며 숨길 것도 아니었다. 참담한 현실 앞에 절망하지 않고 극복하려했던 시도가 부끄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반복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오는 길에 기념품점에 들렀는데 눈길 가는 것이 많았다. 독립전쟁, 자유의 종은 물론 미군과 상관된 다양한 상품들도 등장해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기념품점을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자신들이 가진 원천 소스를 아주 매력적으로 상품화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을 소비해줄 방문객 수에 따라서 기념품의 종류, , 가격이 결정된 것일 테지만, 그 다양성과 품질이 놀라웠다. 기념품점에서 독립전쟁 당시 복식으로 구현한 체스세트를 보았는데, 부피에 대한 부담만 없었다면 구입하고 싶은 것이었다. 뉴욕에서 관람한 해리포터전시회 기념품점에서 본 체스세트는 해리포터-마법사의 돌에 등장했던 체스세트를 그대로 만든 것인데, 무려 500달러나 했었지만 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데 오늘 본 이 체스세트는 가격도 훨씬 싸고 부피도 적어서 몹시 고민을 하다가 내려놓았다. 얼바인까지도 문제였지만 그것을 다시 귀국할 때 안전하게 가져갈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양한 기념품들

독립전쟁을 배경으로 한 체스세트

기념품점을 돌아보며 팬시화된 역사를 생각했다. 분명 이곳에서 팔리는 기념품들은 역사에 대한 재인식이라기보다는 역사를 소비하는 모습에 가까웠다. 역사적인 맥락을 소거한 소품으로서 역사를 활용하고 있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를 통해 관심을 지속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관람을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모두들 기대하고 있는 필라델피아 샌드위치로 유명하다는 집을 사만다에 입력하고 출발을 했다. 필라델피아의 멋스러운 시가지를 두루두루 돌아서 찾아갔는데, 그곳에 없다. 주소는 맞는데 샌드위치집이 없다. 허탈해서 주변을 찾다가 포기하고 일단 숙소로 돌아가서 짐을 풀고, 프런트에 물어서 찾아보기로 했다. 숙소로 가는 길은 예상보다 멀었다. 가는 길에 길을 잃어버려 돌다가 어느 주택가로 들어섰다. 똑같이 생긴 작고 낡은 주택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집 앞 계단에는 흑인들이 나와 앉아 있었다. 한참을 헤매느라 그 주택가를 돌았는데 백인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필라델피아는 남북전쟁 이전에도 노예가 아닌 흑인들이 자유를 찾아 이곳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흑인들이 많다고 한다. 흑인 대통령이 나왔다고는 하지만 온전한 자유와 평등을 구가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는 그들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보호구역에 머무는 인디언을 생각했다. 자신들의 땅에서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내몰린 인디언들은 미국의 영원한 타자처럼 점점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분명한 것은 소외된 사람들이 있는 사회는 결콘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 없는 사회라는 것이다. 더블어함께 어우러져 사는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불평등과 부자유가 있다는 말이 아니던가? 그런 소외가 분명한 사회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 불안은 소외당한 사람의 몫이라기보다는 소외시킨 사람들의 몫이 될 가능성이 높다. 분명한 것은 소외를 해소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흑인들 이야기를 하면서 숙소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간단히 씻고 프런트에 문의했는데, 다시 필라델피아 시내로 들어가야 한단다. 숙소로 오는 길에 바비큐라는 간판을 본 것이 기억나서, 미국 와서 제대로 된 바비큐를 먹어보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먹어보자고 했다. 이미 모두들 배가 고픈 상태여서 그 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 집은 페이머스 데이브스(Famous Dave's)[각주:1]라는 바비큐 집이었는데, (rib)이 유명하다고 했다. 아내는 어디서 들었는지 이 집은 서부에는 없고 동부에만 있단다. 식당 분위기도 밝고 활기찼고 가격도 저렴한 편이데 양도 넉넉하여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Famous Dave's BBQ 음식들

이것저것 맛을 보자고 몇 가지 음식을 시키고 기다리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 큰 쟁반에 여러 음식이 함께 나오는 콤보를 먹고 있었다. 쟁반의 크기도 크기였지만, 음식의 양이 대단했다. 저것을 시킬 것을 잘못했다고 아내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음식이 나왔다. 짜서 고생한 버팔로 윙을 제외하고는 음식 맛이 좋은 곳이었다. 특히 립이 왜 유명한지 알 수 있었다. 이 집에서 직접 구운 옥수수 머핀도 맛이 있었다. 립은 1인분이 12조각이었는데 둘이 먹으면 적당할 양이었다. 프렌치프라이와 머핀도 싸서 숙소로 가져올 정도로 많았다. 음식의 절대량도 많고, 많이 먹고, 즐겨 먹으니 미국인들은 뚱뚱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오늘 아침 뉴욕에서 더운 물이 나오지 않아 제대로 씻지 못했다. 그런데 이 녀석들 후드로 적당히 가리고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여행이 아이들을 털털하게 만들고 있다.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살다보면 상황에 따라서 늘 따뜻한 물에 정갈한 욕실이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 스스로 적응하거나 견디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할 때, 견디는 선택지를 하나 더 갖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아이들이 이번 여행을 통해서 많이 보고, 배우고, 느끼기를 원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물론 그럴 수 있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이렇게 가족이 함께 낯선 곳을 여행했다는 기억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여행의 체험이 아이들에게 무엇이 될지는 그 다음 문제고, 의도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이렇게 소중한 시간을 함께할 수 있고, 서로 의지하며 낯선 곳을 건너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내일은 아침 일찍 이번 여행의 마지막 도시인 워싱턴으로 갈 것이다. 알 수 없는 기대로 설레는 밤이다.

  1. 나중에 얼바인에 돌아와서 우연한 기회에 롱비치에 있는 이 집을 발견했다. 동부에만 있다는 것은 잘못된 정보였지만, 그 덕분에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었고, 서부에서 발견했을 때에는 그 기쁨이 더 컸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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