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녀석들'에 해당되는 글 1건

폭식의 허기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2월이 시작되고 독감이 지독한 목통증까지 데리고 왔다. 며칠 잘 먹고 쉬면 털고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는 한 주가 지나고 나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문제는 열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고 전혀 식욕이 없으니 기운을 차릴 도리가 없었다. 열이 떨어지지 않고 엉덩이쪽이 부어서 병원에 가보니 엉덩이에 염증이 생겨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얼결에 수술을 받고 다시 연구실에 나갈 때까지 또 한참의 시간을 보내야했다.

영화 <리틀포레스트> 중에서

앓다가 수술 받고 통원치료 하느라 집에 있다 보니 그날이 그날 같았다. 더구나 엉덩이 수술로 앉지를 못하고 주로 침대에 누워 있자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처음에는 침대에 깔아둔 전기장판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오한이 주기적으로 찾아와서 보일러 온도만으로는 부족해 전기장판에 불을 넣으면 금방 따듯해졌다. 금방 따듯해지는 만큼 또 금방 뜨거워져서 꺼야하니 번거로웠다. 그러다보니 뜨듯한 열기로 온몸을 지지거나, 은근한 온기를 지속해주었던 어린 시절 아랫목이 그리웠다. 그 시절 아랫목에는 늦게 귀가하는 식구의 밥이 주발에 담겨 항상 담요로 덮여 있었다. 밥도 못 먹고 다니냐는 싫지 않은 핀잔과 함께 별다른 반찬 없이도 한 주발 뚝딱할 수 있었던 것은 식구들의 따듯한 기다림과 돌아갈 곳이 있다는 든든함 때문은 아니었을까?

겨울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쌀 두 가마니와 연탄 천 장 그리고 김장 한 접을 하고는 안도하곤 하셨다. 없는 살림에 여덟 식구(게다가 우리 오남매의 먹성은 또 얼마나 좋았던가)의 겨울을 늘 걱정하셨는데, 쌀과 김치 그리고 연탄을 장만했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셨단다. 아내와 아이들이 생기면서 식구들이 배곯지 않고 따듯하게 지낼 수 있게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어려운 일인지 조금씩 깨닫는다. 그 시절 어머니의 겨울맞이가 자주 생각나는 것도, 아랫목 한 주발의 밥이 자꾸 그리운 것도 사는 일의 고단함과 허기 때문은 아닐까.

몸이 불편한 상태로 누워서 TV채널을 돌리다보니 온통 먹방이다. 최고만을 먹는다는 미식회에서부터 전국의 유명 맛집의 순위를 정하고 신화화하는 프로그램은 물론 죽은 상권을 살리겠다며 유명 외식업체 사장의 맛 컨설팅 프로그램까지, 심지어 과식과 폭식까지 화제가 되어 얼마나 먹느냐를 즐기는 프로그램까지 먹방은 차고 넘쳤다. 누가 봐도 지나치게 많이 먹는, 먹는 행위 그 자체가 화제가 되는 1인 방송의 진행자들은 시청자들의 자발적 성원으로 억대 연봉 이상의 수입을 거둔다니 놀랍고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살면서 즐길 것이 얼마나 많은데 오로지 먹는 것에만 이토록 집착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적 결핍을 방증하는 것은 아닐까? 다이어트 때문에 자신은 못 먹지만 누군가가 대신해서 먹는 모습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낀다면 그것은 가학을 넘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매일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는 방송을 하면서 마른 체형을 유지하기 위해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운동으로 보낸다는 유명 BJ의 방송에서 지독한 허기를 느끼는 것은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이었을까?

이가라시 다이스케(五十嵐大介)의 만화 리틀 포레스트가 최근 한국에서도 영화화되며 화제다. 이 작품은 음식 그 자체보다는 자연에서 재료를 얻는 과정,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 비중을 두고, 그 안에서 삶을 이야기한다. 음식만화임에도 완성된 음식의 매혹이나 맛에 대한 찬미보다는 재료와 조리 과정에 최대한 많은 시간과 언어를 배려함으로써 충분히 생각하고 즐길 시간을 준다. 이 작품을 읽으며 먹방으로 드러난 폭식과 폭식으로 은폐된 우리의 허기를 생각한다. 우리가 따듯한 포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맛있는 음식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랫목 한 주발의 밥으로 기다려줄 따듯함, 그것이 있다는 든든함을 잃고 있어서는 아닐까? 이제 봄이라는데 아직 날은 차다. 오늘밤은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콩비지에 넉넉하게 밥 한 주발 말아 이제 끝물일 총각김치를 얹어 한 사발 깨끗하게 비워내고 싶다

월간 에세이》 2018년 5월호

블로그 이미지

홑섬

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