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클라호마에서 울다.

82일 오클라호마시티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어젯밤 아내를 제외한 셋이 모두 감기약을 먹고 누워서 한참을 이야기하다 잠든 탓에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9시까지 아침을 준다고 해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사무실에 붙어있는 간이 테이블 3개가 놓인 식당에 갔더니 머핀과 식빵 그리고 우유와 커피가 놓여 있었다. 그나마도 담고 보니 방으로 가지고 올라가지 말라는 경고문구가 붙어있다. 한참을 고민하다고 다 두고 왔다. 예약 사이트에서 본 숙소의 아침은 콘티넨탈 블랙퍼스트(Continental Breakfast)였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숙소근처에는 아침을 해결할만한 음식점이 없었고, 심지어 패스트푸드점도 없었다.

출발 전 머리를 묶는 유진

숙소를 나서려는데, 좀처럼 머리를 묶지 않는 아이 둘이 모두 머리를 묶었다. 한참 멋을 부릴 나이에다가 이곳 아이들이 대부분 생머리를 묶지 않고 다니니, 아이들은 내 잔소리에도 머리를 늘 풀고 다녔다. 더구나 이곳은 머리하는 비용이 비싸서 한국에서 온 머리 그대로다보니 점점 아이들 머리는 주체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오클라호마의 더위를 체험한 아이들이 스스로 머리를 묶은 것이다. 그렇다, 아빠의 잔소리보다는 자기들이 겪으면서 아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고, 진짜 알게 되면 아이들은 스스로 움직인다. 왜 부모인 내 뜻을 따르지 않느냐를 고민[각주:1]할 것이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느끼고 깨닫게 하지 못하는 자신의 소통 능력을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머리 묶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내와 눈을 맞추고 웃었다. 머리 묶는 유진이 옆에는 어제 아내가 손으로 빤 빨래가 말라가고 있었다. 여행은 여지없는 생활이다.

일단 식당은 국립추모박물관(National Memorial & Museum)으로 가서 그 주변에서 찾기로 했다. 밖으로 나와 보니 아침인데도 어제보다 더 더웠다. 더운 것이 아니라 뜨거웠다. 차창을 모두 열고 열기를 뺀 후에 에어컨을 한참 켠 후에야 차에 겨우 탈 수 있을 정도였다. 국립추모박물관에 가서 주변을 돌아보니 역시 기대했던 음식점은 없었고, 조금 더 밖으로 나오니 몇몇 패스트 푸드점만 보였다.

맥도날드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기로 했다. 음식을 시키는 사이 화장실을 갔는데 잠겨 있었다. 문 앞에 스티커를 읽어보니 프런트에서 키를 받아서 열어야 한단다. 미국은 대체로 화장실 인심이 고약하다. 심지어 물건을 살 사람만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다는 문구를 내건 편의점도 있었다. 프런트로 가려는데 앞 사람이 나오며 문을 잡아준다. 화장실에서 나오면 자동으로 문이 잠기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소변을 보려면 일일이 프런트에 가서 열쇠를 달라고 해야 하는 곳에 미국사람들은 참 속도 없이 잘도 다닌다. 하긴 우리도 그런 곳에서 아침을 먹었으니 속없기는 둘 다 똑같다.

맥도날드에서 시킨 음식

맥도날드의 인색한 화장실

맥도날드보다 더 야박했던 4월에 요세미티국립공원 가는 길에 만났던 주유소 내 편의점 화장실

화장실에서 나와 보니 효진이는 스머프를 끼워주는 해피밀(happy meal)[각주:2]을 주문한 모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해피밀은 말도 안 되는 음식이라고 시켜주지 않았을 텐데, 어제 울면서 엄마가 아닌 아빠와 잔 효진이가 안쓰러웠는지 아내가 그냥 시켜준 모양이다. 효진이는 5학년인데도 아내에게 아기처럼 군다. 늘 엄마와 같이 자고 싶어 하는 효진이는 여행을 떠나면서부터 아내와 한 침대를 써왔다. 늘 아내에게 찰싹 붙어서 스킨십을 하는 효진이 때문에 아내가 다소 힘들어했다. 어제는 유진이가 감기기운이 있다니까 아내가 유진이랑 한 침대를 쓰고 내가 효진이를 데리고 잤는데, 그게 못내 서운했는지 결국 한바탕 눈물을 쏟았다. 그러는 모습이 또 좀 안 돼 보여서 꼭 안아주고, 작은 소리로 효진이를 위로해주고 서로 킥킥대다가 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진이는 엄마가 첫째다. 생각해보면 우린 누구나 엄마가 최고가 아닌가?

아이들과 한 침대를 쓰면서 자기 전에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번 여행에서 발견한 즐거움 중에 하나다. 아이들이 어릴 때에는 배 위에 올려놓고 이야기를 해주다보면, 어느새 내 배 위에서 잠들곤 했었다. 그러면 아이의 숨 쉬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혹시라도 아이가 깰까봐 나도 조심스럽게 숨을 쉬곤 했던 기억이 났다. 아이들은 크고, 나도 너무 바빠서, 아이를 재워주는 일이 별로 없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그 즐거움을 찾은 것이다. 누워서 이야기하다보면 낮에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아침을 먹고 다시 차를 타는데 숨이 탁탁 막혔다. 대구에서 자란 아내는 덥다는 소리를 잘하지 않는데, 뜨겁단다. 더위 때문인지 여정이 힘든 탓인지 모두들 다소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국립추모박물관에서 주차할 곳을 찾는데 근처 성당 주차장이 텅텅 비어서 살펴보니 허락 없이 주차하면 견인이라는 표지가 무서웠다. 그 바로 옆에 유료주차장이 있어서 그곳에 주차를 했다. 주차를 하고보니 후불도 아닌데 주차비 낼 곳이 없다. 주변을 살펴보니 주차비 징수 박스가 있었는데, 자기번호에 주차비 3달러를 밀어 넣으면 되는 시스템이다. 주차비를 밀어 넣어도 영수증이나 주차증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주차장에는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 보고 있으니 알아서 주차비를 내고 가라는 것이다. 판옵티콘(Panopticon)[각주:3]이 따로 없다. 이것은 판옵티콘처럼 감시하는 사람이 감시당하는 사람을 언제나 주시하고 있다고 믿게 하는 시스템이다. 주차비 징수 박스는 원시적인데 그것을 운영하는 시스템은 무서운 감시 시스템이라며 웃었지만, 마냥 유쾌한 일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다른 곳에 차를 대고 싶었으나 날이 너무 더웠다. 더위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오전이었다.

유료 주차장 주차비 징수박스. 지폐를 자기 번호에 넣고, 납작한 쇠로 빠지지 않도록 밀어 넣게 되어 있다.

국립추모박물관은 1995419일 오전 92분에 발생했던 오클라호마 폭탄테러(Oklahoma City bombing)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세운 곳이다. 오클라호마 폭탄테러는 1993년 텍사스에서 집단 자살한 사교집단 다윗파에 대한 연방정부의 불만족스러운 처리에 불만을 품은 티모시 맥베이(Timothy McVeigh)가 알프레드 P. 뮤러 연방정부청사(Alfred P. Murrah Federal Building) 앞에서 폭발물 트럭을 폭발시킴으로써 168명의 사상자와 600명 이상의 부상자를 낸 사건이었다.

And Jesus Wept 과 조형물에 대한 설명

주차장에서 국립추모박물관으로 가는 신호등 앞에 조형물 ‘And Jesus Wept’이 서 있었다. 이것은 요한복음 1135절의 예수께서 눈물 흘리시더라를 인용한 것으로,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의 168명 희생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영원한 안식을 찾게 하려는 추모 조형물이었다. 168명의 희생자를 상징하는 화강암 벽의 틈을 마주선 예수께서 눈물 흘리시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조형물의 안내에는 자신의 친구인 나사로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셨다고만 적혀있지만, 성서에 의하면 죽은 나사로를 걸어 나오게 하셨다고 적혀 있다. 희생자들의 부활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예수의 연민과 사랑으로 영혼의 안식을 기원하는 조형물이었다. 이 조형물을 설명한 판을 읽다보면, 희생자들에 대한 안식의 기원과 함께 희생자의 가족들을 향한 위로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단락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다”(요한복음 11:25)라고 적음으로써 희생자들이 영혼의 안식을 찾을 것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And Jesus Wept’ 앞에서 나는 이미 비애와 절망으로 참혹해졌다. 물론 이 조형물은 오히려 그러한 참혹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종교적 위안을 주기 위한 것이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탄테러의 참혹함과 조형물의 깊은 슬픔이 먼저 전해졌다. 그 참혹함은 언어 이전의 것이었고 가슴을 베고 지나는 상처 같아서 실체가 잡히지는 않았지만, 관람 내내 아리고 아팠다.

9:03 게이트와 그 앞의 Reflecting Pool과 9:01 게이트

길을 건너서 국립추모박물관의 ‘9:03 게이트로 들어갔다. 게이트를 들어서자 리플렉팅 풀(Reflecting Pool) 건너로 보이는 ‘9:01 게이트가 보였다. 이것은 폭탄테러가 일어난 1995419일 오전 92분을 기억하기 위하여 91분과 93분 사이를 비워둔 것이다. 그 사이에 리플렉팅 풀을 두고 그것을 통해서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와 테러에 대한 경각심 등을 일깨우고 있었다. 두 문과 풀을 망연스레 보다가 문득, 이들은 어쩌면 92분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킴으로써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번다한 조형물을 세우는 대신 두 개의 벽 같은 문을 만들어 시간을 정지시키고, 그 사이 누락된 시간에 일어난 일을 관람자 스스로 물에 비추어보게 함으로써 더욱 깊은 슬픔과 기억을 만들고 있었다.

168개의 빈 의자’(Empty Chairs). 19개의 작은 의자는 어린 희생자들을 상징하는데, 그 텅 빈 자리가 가슴을 먹먹하게 하였다.

9:03 게이트를 걸어 들어가다 보니 각기 다른 크기의 168개의 빈 의자’(Empty Chairs)가 기다리고 있었다. 빈 의자는 이곳에서 생명을 잃은 사람들을 상징하고, 그 중에 작은 의자들은 19명의 어린이 희생자들을 표상한다. 이 의자는 9열로 정렬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희생되었던 건물의 9개 층을 의미한단다. 이 의자는 반투명 유리 위에 청동과 돌을 얹었기 때문에 낮에는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밤에는 불이 들어와 희망의 신호를 밝힐 수 있게 하였다. 그날 이후의 시간은 청동이 입은 세월의 흔적과 그것이 흘러내려 유리 받침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희생자들의 애틋한 사연과 그들을 준비 없이 보냈던 가족들의 슬픔도 그렇게 세월과 함께 더욱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빈 의자들은 9:03게이트와 9:01게이트 사이에 놓여 있었는데, 그 희생의 시간 동안 그들의 생명이 하나하나 속절없이 스러져 간 것을 의미하는 듯 했다.

9:03게이트에서 빈 의자들을 따라 9:01게이트 쪽으로 걸어가니 ‘Survival Wall’이 서 있다. 폭탄이 터졌던 건물의 마지막 남은 벽이다. 이 벽은 테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부상자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이 벽에는 그곳에서 생존한 600명 이상의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Survival Wall’를 보고, 9:01 게이트를 지나니 ‘The Survival Tree’가 서 있었다. 수령이 90년 이상 된 이 느릅나무는 테러 현장을 목격한 나무로서, 지금은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인간의 놀라운 치유능력을 상징한다고 했다. 그렇게 그곳에서 온갖 애도와 상처들을 지켜보았을 느릅나무를 바라보다가 국립추모박물관으로 향했다.

구조5팀에서 적어놓은 글귀

국립추모박물관 현관의 문구

국립추모박물관 벽에 누군가 스프레이로 쓴 글귀가 적혀 있었다. 사고 당시 구조에 참여했던 구조5팀이 적어 놓은 것이다. 거기에는 “We search for the truth. We seek Justice. The Courts require it. The Victims Cry for it. And God demands it!”라고 적혀 있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폭탄테러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짧고 단호한 글귀에서 배어 나왔다. 익명의 대중을 향한 무차별의 테러는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공격은 절대로 용납될 수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구조5팀이 적어놓은 글귀를 보면서 진실과 정의라는 지독히 추상적인 말의 구체화된 현실을 떠올리며 씁쓸해졌다. 진실과 정의가 소중한 것은 누구의 관점이 아니라 모두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누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국립추모박물관 입구에 공간의 의미를 적은 글귀가 벽에 새겨져 있었다. 앞의 문장들보다 마지막 문장에 눈이 갔다. 여기서 위로, , 평화, 희망, 평온을 얻어가기를 희망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슬픔은 집요하고 마음의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겠지만, 그것이 비롯된 곳에서 치유와 극복의 방안을 찾으려는 노력은 참으로 숙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일어난 일을 객관적으로 수용하면서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개선하고, 극복해 나갈 것이냐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희생자의 유가족이나 테러 현장의 생존자들이 갖고 있을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씻어 주기위한 전 사회적 배려와 노력은 우리도 눈여겨 보아야할 부분이었다.

폭파사건의 시간대별 구성

카메라에 잡힌 범행 전 트럭

미국 정부 휘장

구조 단체의 모자

국립추모박물관 관람은 3층부터 시작했다. 3층은 테러리즘의 배경, 이곳의 역사, 오클라호마 폭탄테러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 폭탄테러 순간의 혼란 체험, 테러 이후의 무질서 체험, 구조 체험, 세계의 반응, 구조와 복구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사이에 사건 발생 한 시간의 수사 상황과 첫 날의 수사 상황을 삽입함으로써 전시의 긴장을 유지시키고 있었다.

폐허 속의 성경

열어야 할 방도 열 사람도 사라진 열쇠

그날 이후 멈추어버린 시계

당시 건물에서 나온 손목시계, , 신발, 안경, 열쇠 등의 물품들을 전시하고, 그 날 이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벽시계의 단호한 정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전시 공간 곳곳에서 허무하게 무너졌지만 결국 복구의 중심이 되고 있는 미국의 상징물들이 전략적으로 노출되고 있고 있었다. 사건을 시간대별로 재구성하여 마치 사건의 진행 과정에 관람자가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 점도 매우 돋보이는 구성이었다. 또 하나, 테러범을 구속하기까지의 과정을 재구성함으로써 극적인 흥미를 유지할 수 있게 하였고, 구조 현장에 참여했었던 기자, 구조대원, 자원봉사자들을 모자, 구조장비, 취재수첩 등의 소품으로 현장의 긴박감을 표현하고 있었다.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해 미국 전역에서 온 위로와 격려

마지막 희생자의 발견

생존자 및 목격자의 이야기

구조 활동 도중 숨진 간호사

희생자 가족들 이야기

건물철거 이후 활용에 대한 설문 조사

듣는 것은 보는 것을 넘어서지 못한다지만, 보는 것은 느끼는 것을 넘어설 수 없다. 3층의 전시는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느끼게 하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동선의 유도를 통하여 전략적인 스토리텔링을 구사함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희생자들에 대한 감상적인 추모나 테러리즘에 대한 계몽의 일방성에서 탈피하여, 구조과정의 감동적인 스토리(사건이 보도되고 피가 모자란다는 보도에 달려오는 헌혈자들, 미국 전역으로부터의 희망 메시지 등등)와 희생자 각자의 스토리 그리고 범행 과정 및 검거 과정까지 흥미롭게 구성해 놓음으로써 관람자 스스로 느낄 수 있게 만든 것이다.

특히 관람이 진행되면서 뒤쪽으로 갈수록 이러한 참혹한 재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사람들의 용기와 구조대원들의 헌신적인 희생 등을 부각시켜감으로써 고통스러운 기억의 상기를 넘어서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DC코믹스나 마블코믹스의 슈퍼히어로가 아닌 우리 이웃을 영웅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지점이었다. 거기에 어린이들의 따듯한 편지, 미국 전역에서 보내오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 생중계로 진행되는 구조과정, 그 중간 중간 테러리즘에 대한 경고와 사회적 공분(公憤) 만들기, 정의 구현의 필요성과 그 주체가 미국이 되어야만 한다는 강력한 의지 천명 등이 이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다인종, 다문화, 다언어 사회인 미국의 다양성은 미국이라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결집되고, 그것은 다시 미국인으로서의 자부심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모습은 신속하고 명확하게 피아(彼我)를 구분하고, 정의를 선취함으로써 정당성과 자부심을 확보하고, 그 안에서 효과적인 단합을 이루어 냄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신속하고 견고한 일치는 스스로 절대선(絶對善)의 맹목에 빠지게 될 위험성이 높고, 비판적 성찰의 가능성을 제거할 가능성이 높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먹먹해진 가슴을 안고 2층에 내려오니, 이 박물관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이라는 ‘Gallery of Honor’로 이어졌다. 방 안 가득 168명의 희생자 사진과 그들의 유품 하나씩을 놓아 꾸민 방이었다.

아기 희생자와 젖꼭지(), 희생자와 아이의 편지(), 눈물을 흘리는 관람객을 위한 티슈박스(하)

방 가운데에는 앉을 수 있는 의자와 작은 티슈박스가 있었다. 한 명 한 명의 얼굴과 이름 그리고 유품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특히 건물 안에 어린이 집(Day Care Center)이 있었기 때문에 유아들의 희생이 컸고, 그래서 희생자 중에는 유난히 아기들이 많았다. 아기들의 젖꼭지, 인형 등을 보면서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뒤돌아보니 아내도 울고 있었다. 아내가 우는 모습에 아이들이 티슈박스에서 휴지를 뽑아다 주었다. 그 때 효진이가 손을 잡아끌어 그곳에 가보니 희생당한 엄마에게 아이가 쓴 짧은 편지가 있었다.

이 작은 편지에 또 울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느닷없이 떠나는 일은 모진 일이지만, 떠나는 사람이 선택한 길이 아니지 않는가. 준비 없이 남게 된 어린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두고 떠나야했을 엄마의 심정을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 없었다. “Life is sad without you.”라는 말에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슬픔도 공명이 되나 보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들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제야 왜 이 방 안에 티슈박스가 놓여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2층은 폭탄 테러 이후의 대처와 미래지향적인 관점을 제시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방의 테마는 희망이었다. 어린이들이 보낸 편지, 엽서,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통로에는 어린이들이 보내준 27,000개의 페니로 만들었다는 ‘The penny path’와 그것이 만들어진 과정을 설명해주기 위해 홀로 기다리는 노인 자원봉사자의 모습에서 미국의 근력이 보였다. 희망의 방에서 눈에 뜨이는 것은 천장에 가득 매달린 수많은 황금학이었다.

어린이들이 보내온 엽서와 그림

The penny path

희망의 방에 매달린 황금학

벽에 붙은 안내문에는 일본 아이 사다코의 사연과 종이학의 전설 그리고 일본에서는 종이학이 치유의 상징이라고 밝히면서, 폭탄테러가 발생한 후 며칠 후부터 미국 전역에서 아이들이 10,000개 이상의 종이학을 용기 내라는 편지와 함께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보내준 종이학을 모티브로 희망의 방 천장에는 수많은 황금학을 매달아 놓았단다. 슬픔과 절망을 건너는 법을 아이들은 마음을 모으는 데서 찾은 것이다. 아이들은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 지독한 슬픔을 건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증오와 복수가 아니라 위로와 용기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을.

Symbol of Comfort

미국 정부는 1995423일 추도식장에서 희생자의 가족들에게 ‘Symbol of Comfort’라는 곰인형을 하나씩 주었다고 한다. 미국 정부의 의도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추도식 사진 속에서 유가족들이 하나씩 안고 있는 곰인형은 위안과 위로를 주는 듯 보였다. 희생자들이 곰인형처럼 함께 할 것이라는 의미인지, 종이학을 접어서 보냈던 아이들처럼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위로와 용기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분명한 의도와 의미는 알 수 없지만 그 지독한 슬픔 속에서 작은 곰인형이 주었을 위안은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유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곰인형을 나눠줄 생각을 한 사람의 감성이 아름다웠다.

박물관 앞에는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희생자의 유품이거나 좋아했을 물건으로 보이는 곰인형, , 신발 등을 매달아둔 벽이 있었다. 어떤 것은 낡고 어떤 것은 새것으로 매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희생자들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모양이다. 거친 철망에는 따듯한 기억들이 매달려 있었다.

국립추모박물관을 보면서 생각이 많았다. 테러에 대한 분노나 희생자에 대한 슬픔과는 별도로 문화콘텐츠 연구자로서 이 박물관의 힘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엇을 전시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고 체험하게 하느냐에 대해서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전개한 스토리텔링이 아주 돋보였다. 폭탄테러를 추모하는 박물관에서 전시를 해봐야 그거겠지 라고 별 기대 없이 온 것인데, 기대 이상이었다. 오클라호마 폭탄테러라는 콘셉트를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함으로써 여러 이야기를 찾아내고, 그것을 기승전결의 거시 구조로 전개하면서도 각 단계별도 2-3개의 테마가 동시에 진행되게 함으로써 극적 긴장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 등이 돋보였다. 특히 관람객의 의문에 대한 답을 미리미리 제시하면서도 관람객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적재적소에 마련해 둔 것도 눈여겨 볼 부분이었다.

희생자의 유품이나 좋아하는 것을 매단 추모의 벽

Where Were You on April 19, 1995?

특히 ‘Where Were You on April 19, 1995?’는 폭탄 테러가 일어났을 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컴퓨터에 기록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테러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과 희생자 역시 당신과 같은 일상 안에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오클라호마 폭탄테러의 시간과 관람객 개개인의 시간의 연결시킴으로써 이 사건과 은연중에 결부시키고 있다는 점이 탁월했다. 결국 그곳을 떠나면서 우리는 방명록에 ‘We will never forget!’이라는 결의를 남기고 왔다.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 역시 문제는 참여였다.

국립추모박물관을 나와 주차장으로 가는 길은 거의 한증막이었다. 차를 찾아 문을 열려는데 손이 델 것만 같았다. 실내의 더운 기운을 빼려고 차창을 내리려는데, 스위치가 손이 델 정도로 뜨거웠다. 할 수 없이 문을 열고 에어컨을 한참 튼 후에 차에 탔다. 카메라는 들고 다녔지만, 렌즈를 담아둔 카메라 가방은 차안에 두고 다녀서 온도에 예민한 렌즈가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큰 고장은 없었다.

세그웨이를 타다.

오클라호마 과학관(Science Museum Oklahoma)은 서울에 있는 국립과학관 같은 규모와 느낌이었다. 전체적으로 과학을 가르친다기보다는 와서 과학적 현상을 체험하고 즐길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1층에 대부분의 체험 프로그램이었고, 2층에는 우주를 체험할 수 있는 전시 중심으로 짜여 있었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관람객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기다리지 않고 각종 체험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었다. 더구나 가급적 더 많은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어서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함께 즐길 수 있었다.

사실 오클라호마 과학관을 찾은 나만의 은밀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세그웨이(Segway)였다. 정보를 검색하다가 이곳에서 세그웨이를 탈 수 있다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다. 저주받은 걸작으로 평가받는 세그웨이는 처음 소개될 때부터 타고 싶어 했는데, 이곳에서 탈 수 있다니 반가운 마음에 달려온 것이다. 두발로 가는 새로운 탈 것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이것이 왜 저주받은 걸작이 되었는지 궁금했었다. 줄을 서서 기다리다보니 모두 어린 아이들이었다. 다소 머쓱해서 직원에게 어른도 탈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웃는다. 유진이와 효진이가 먼저 타고 나는 나중에 탔다. 안전 때문인지 아이들은 옆에서 직원이 따라다니며 운전을 도와줬다. 작은 실내였기 때문에 속도를 최대치까지 높인다거나 고속에서 방향전환을 한다거나 하지는 못했지만 무척 간단하고 기동성 좋은 탈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서서 운전을 해야 하고, 방향 전환이나 속도조절 등이 운전자의 감각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편안하지는 않았다. 왜 세그웨이를 미국에 와서도 자주 보지 못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각주:4]

사실 오클라호마 과학관은 우리 아이들보다는 조금 어린 아이들 취향이었다. 그래도 우려와는 달리 아이들은 신나서 여러 체험을 즐겼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Route66과 관련된 박물관은 물론 도시마다 다양한 아이템의 박물관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 이유가 미국인들이 기록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높고, 오래된 것들에 대한 보존 의식이 남다르기 때문인지, 역사가 짧은 자신들의 콤플렉스를 보상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문화가 서양인들의 보편적 의식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박물관이 많다보니 전시 방법이나 관람형태에 대한 상당한 노하우가 축적되어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유물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박물관의 콘셉트가 설정되면 다양한 방식으로 박물관을 구성해내고 있었다. 또한 운영에 있어서도 다양한 후원시스템과 자원봉사자들을 적극 활용하고, 관련 상품 개발 등에 적극적이었다. 사실 박물관이나 기념관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는 프랑스의 경우도 그 자체만으로 수익을 내는 곳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활성화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곳이 지역문화의 허브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낮에는 박물관이나 기념관으로 활용하고 밤에는 지역의 다양한 문화공연을 진행할 수 있도록 꾸미는 것이다. 문화 역시 경제적인 가치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지만, 경제적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다양한 보상을 가지고 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문제는 어떻게 둘 사이의 적적한 조화를 이룰 것이냐 인데, 이곳의 박물관들을 좀 더 연구해보면 하나의 답쯤은 찾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오클라호마 과학관이 문 닫을 시간이 되었는데, 아직 2층을 보지 못했다. 다행히 2층은 우주탐사 중심의 소박한 전시여서 금방 돌고 시간에 맞추어 나올 수 있었다. 밖은 여전히 한증막이었다. 숙소에서 가지고 나온 물도 떨어지고 모두들 지쳐 있었다. 브릭타운 쪽에 가서 맛있는 현지식을 사주겠다고 브릭타운으로 갔지만, 마치 재개발 직전의 아파트 단지처럼 그곳은 썰렁하기만 했다. 브릭타운을 몇 바퀴 돌았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음식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모두들 배가 고팠다. 그래서 어제 숙소에서 본 팸플릿의 중국음식점을 찾아가기로 했다. 어제 본 바로는 가격도 적당했고, 집 떠난 지 엿새째라 모두들 제대로 된 음식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영어로는 Lotus Mandarine, 한자로는 루외루(樓外樓)[각주:5]라는 중국음식점이었다. 어제 그 팸플릿을 방으로 가져오면서 이름이 특이해서 찾아보았더니, 루외루(樓外樓)는 청나라 때 지은 항주 서호주변의 대형 음식점이란다. 1,500개 좌석이라니 역사도 역사지만 규모가 대단한 음식점이다. 특히 서호초어(西湖醋魚)와 규화동계(叫花童鷄) 그리고 동파육(東坡肉)으로 유명하고, 지금은 식품회사와 생수공장까지 운영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오클라호마시티의 루외루(樓外樓)에 들어가 보니 실내는 제법 규모가 있는데, 초등학생 아들이 카운터를 보고, 안주인은 서빙을 하고, 바깥주인은 주방을 맡고 있었다. 아내에게 주인이 아마 항주사람인가보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물을 가지고 오던 안주인이 어디서 왔냐고 먼저 물었다. 한국인인데 얼바인에서 왔다고 했더니 무척 반가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동양인을 보기가 어려웠다. 미국 웬만한 곳에서도 동양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는데, 오클라호마시티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아내도 반가웠는지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주문을 했다.

실내에는 미국인 두 가족과 우리뿐이었다. 음식을 기다리는 사이 카운터를 보던 아이의 튜터가 왔고, 그곳의 구석 테이블에서 둘이 공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혼자서 서빙을 다하느라 인중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안주인을 보니 주방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음식을 만들고 있을 바깥주인도 금방 그려졌다. 안주인의 영어가 서툰 것으로 보아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인건비를 아끼려고 부부가 뛰면서도 아들의 공부를 위해 튜터를 붙이는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비록 항주 서호의 유명한 식당이름을 붙인 이유를 묻지는 못했지만, 짐작할 수는 있었다. 미국에서 그렇게 큰 식당을 운영하고 싶다는 포부, 그리고 그것이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직 어린 자식 세대를 위한 것임을 튜터와 공부하는 모습을 자주 쳐다보는 안주인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루외루의 음식들.

루외루는 음식도 훌륭했고 가격은 더 훌륭했다. 처음 시킨 것이 조금 부족해서 한 번 더 시키니 안주인이 웃는다. 모두 요리 일곱 개를 시켰는데도 가격은 38.49달러였다. 안주인이 웃으면서 얼바인은 모두 비싸지 않느냐고 물었다. 맞는 이야기다. 얼바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얼바인에서는 인도인,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들이 많아서 서로 묘한 긴장관계를 보이는데, 이곳처럼 동양인을 보기 어려운 곳에서는 반갑고 서로의 처지를 안쓰럽게 여기게 되나보다. 그런 이야기를 하니 아내도 공감했다. 문화가 비슷해서 서양인보다는 친밀감을 느끼는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낯선 나라에서 고생하는 상대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이들 이야기로는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모두 인도인, 중국인, 한국인이란다. 하교 후 근처 공공도서관에 가보면 인도인 어머니가 아이들 데리고 와서 숙제하고 공부하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유진이 이야기로는 수업시간에 어려운 문제가 나오면 모두 아시아 학생들을 쳐다본단다. 이곳 아이들이 보기에도 아시아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그만큼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성과의 뒤에는 그것을 위해 기꺼이 스스로의 삶을 희생하는 부모가 있음을 그들은 모른다. 자식을 위해 자신의 삶을 괄호 속에 묶는 부모의 모습은 어디서나 눈물겹다. 이 낯선 도시에서 처음 만난 중국인 안주인의 모습에서 낯설지 않은 우리 모두의 부모 모습을 보아서였을까, 문득 푸근했다. 계산을 하고 나오는데, 아내에게 꼭 다시 오라고 몇 번씩 이야기한다. 그래서인지 가족들도 정말 맛있게 먹은 모양이다.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을 싸오면서 내일 또 오면 안 되냐고 내게 묻는다. 그럴 수 있으면 그러자고 했다. 가격도 저렴하고 음식도 맛있지만, 무엇보다 아주머니의 정이 따듯했다. 모처럼 음식다운 음식을 먹은 탓에 모두들 힘이 나는지 즐거워했다.

숙소로 돌아와 방문을 열고는 깜짝 놀랐다. 방 청소를 해놓지 않은 것이다. 카운터(이곳은 로비가 없다)에 가서 이야기 하니 자기들은 원래 이틀에 한번 청소를 한단다. 아니 그러면 어떻게 하냐고 항의를 하니까 필요한 수건과 샴푸, , 청소봉투만 준다. 더 따지고 싶었지만 논리로 이겨낼 만큼 내 영어는 편안하질 않았고, 유진이는 누군가에게 따지는 것을 겁내하니 그대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저렴한 숙소를 잡았더니 결국 이런 일을 겪는다.

숙소 방에 들어와서야 모두들 과식한 줄 안다. 아이들도 침대 위에서 윗몸일으키기를 하고 잠들었다. 오늘은 행복한 과식이었다. 내일은 세인트루이스까지 8시간 이상의 운전을 해야 한다. 부디 오늘 같은 더위는 이곳에 두고 가고 싶다.

 

  1. 이러한 안타까움은 “자식 잘못되길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냐?”라든가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다.”같은 논리가 전제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어느 자식이 부모 속상하라고 일부러 그러겠어요.”라는 전제만큼이나 부모자식 소통에서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자기 정당화일 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러한 전제는 “내 뜻대로 너를 만들고 싶어”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본문으로]
  2. 해피밀은 디즈니의 토털 마케팅 전략의 일환이었다. 디즈니는 패스트푸드와 자신들의 개봉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연계하여 프로모션할 계획을 가지고 맥도널드에 제안을 했지만 거절을 당했다. 그러자 버거킹과 제휴를 하여 그해 디즈니와 버거킹은 둘 다 대박을 낸다. 버거킹의 약진에 위기감을 느낀 맥도널드가 이번에는 디즈니에 제안을 한다. 버거킹보다 훨씬 조직적인 유통망을 지닌 맥도널드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디즈니는 이후 맥도널드와 제휴한다. 그렇게 밀월관계를 유지하던 둘은 스티브잡스가 디즈니의 최대 주주가 되면서 깨져버린다. 아이들에게 꿈을 주는 기업이 정크푸드와 제휴하여 아이들에게 먹이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로 해피밀 프로모션을 중단시킨 것이다. 역시 스티브 잡스다. [본문으로]
  3. 판옵티콘은 18세기 제레미 밴담이 제안한 원형감옥을 의미한다. 그것은 원형공간의 중앙에 높고 어두운 감시탑을 세우고, 그 둘레에 낮고 밝은 죄수의 방을 만들어, 감시자의 시선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게 함으로써 죄수들은 늘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죄수들은 규율과 감시를 내면화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감시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이 말은 미셀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사용함으로써 보편화된 개념이다. [본문으로]
  4. 그러나 동부도시들에서는 자주 볼 수 있었다. 특히 시카고와 워싱턴에서는 세그웨이를 이용한 투어까지 진행되고 있었다. [본문으로]
  5. 루외루(樓外樓)라는 식당 이름은 남송시대에 시인 임승(林昇)의 “山外靑山樓外樓,西湖歌舞几時休, 暖風熏得游人醉,直把杭州作汴州”라는 시에서 가져 온 것이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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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일 시카고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감기약 기운 때문인지 몸이 침대 밑으로 한없이 가라앉았다. 어젯밤 약을 먹고 잠이 들면서 춥기도 했지만 땀을 흠뻑 빼고 나면 개운해지리라는 생각에 긴팔 후드티를 입고 잠이 들었다. 옆에서 자고 있던 유진이가 아파서 새벽에 잠이 깼다. 약을 챙겨주었지만 유진이도 좀처럼 몸살을 떨치지 못했다. 빡빡한 여행 일정에 먹는 것은 부실한데, 날씨는 더워서 에어컨을 계속 틀고 달린 것이 화근이었다. 약을 먹고 땀을 흘린 덕에 조금 나아진 듯했지만 나도 순간순간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곤 했다. 본격적으로 시카고 시내를 돌아보기로 했는데 내가 아프면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 아무리 아파도 일정은 진행해야만 했다. 더구나 아침에는 형식이 부부와 아침을 같이하기로 약속을 했으니 더욱 기운을 내야만 했다.

아침부터 조금씩 비가 내리더니 그쳤다. 약속시간에 맞추어 형식이 부부가 숙소 로비로 왔다. 근처 한식당에서 아침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형식은 우리 아이들을 어렸을 때 보고 처음 보는 것이다. 그가 뉴욕지사 근무를 하느라 미국에 있는 동안 세월은 부지런히 갔고, 돌아왔을 때에는 아이들이 커서 제 각각의 일정을 소화하느라 가족끼리 만나는 모임을 별로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형식은 훌쩍 자란 유진이와 효진이 모습을 보고 놀라워했다. 더불어 우리 가족이 무모한 횡단여행을 감행하고 있는 모습에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고등학교 동창인 우리는 대학교 졸업 이후 각자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느라 늘 분주했다. 그러다보니 한국에서는 바쁘게 뛰느라 늘 피곤한 모습으로 만나곤 했었다. 그런데 시카고 지사로 나온 불과 몇 달 사이에 형식은 건강과 여유를 찾은 모습이었다. 형식의 눈에 나도 아마 그렇게 비춰졌으리라. 남의 나라에 와서 비로소 몸과 마음의 건강을 되찾은 것을 보면 한국에서 우리 생활이 가파르긴 가파른가보다. 치열하고 분주하기만한 우리네 일상의 정체를 남의 나라에 와서야 볼 수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형식이나 나나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이었다.

형식과의 인연은 중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로 다른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과외를 하면서 서로 알게 되었다. 형식은 그때나 지금이나 착하고 순해서 늘 주변에 친구들이 많았다. 중학교 2학년 3, 어렵게 부모님을 설득해서 평생 처음 과외를 막 시작했는데 바로 과외금지조치가 내려졌기 때문에 더 보지 못하다가,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친해졌던 친구다. 늘 함께 다니던 고등학교 친구들은 학교를 마치면 형식이네 집에 우르르 몰려가서 자주 놀았다. 과외도 학원도 없던 시절, 친구들과 만나면 딱히 무엇을 하고 노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형식의 집을 그대로 그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자주 다닌 만큼 그곳에서의 추억은 언제나 화수분이었다.

아침밥을 먹으며 형식은 내게 출발 전에 미리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핀잔을 했다. 친구에게 부담을 주는 것도 싫고, 무엇보다 우리로 인해 번거로워지는 것은 아내나 나나 딱 질색이었다. 형식의 아내는 집에 와서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먹은 것으로 하자고 사양했다. 내일 일정이 바쁘기도 했지만 갑자기 찾아와서 번거롭게 하는 것이 미안했기 때문이다. 그저 형식의 얼굴 보았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시카고는 보아야할 것이 많았다. 그중에서 뉴욕이나 워싱턴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은 빼고 시카고에서만 볼 수 있는 것 중에서 우선순위를 정했다. 아이들이 과학 산업 박물관(Museum of Science and Industry)을 보고 싶어 해서 먼저 그곳으로 갔다.

시카고 산업과학박물관 전경()과 뒤쪽 공원에서 주말을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과 임시로 설치한 놀이기구()

과학 산업 박물관은 1893년 시카고 만국 박람회 메인 회의장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라서 그런지 규모도 크고 고풍스러운 건축양식이 돋보였다. 건물도 건물이었지만 그 주변으로 조성된 공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주차를 하기 위해서 건물 뒤쪽으로 가보니 숲과 잔디밭이 큰 규모로 조성되어 있었는데, 주말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이 그곳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한가하게 즐기고 있었다. 음악을 틀어 놓고 가볍게 춤을 추는 사람들, 아이들을 위해 공기를 불어넣어 놀이기구를 설치하고 있는 사람들, 바비큐를 만드는 사람들, 앉거나 누워서 햇빛을 즐기는 사람들, 가벼운 운동을 하는 사람들……한가하고 평화로운 주말 풍경이었다. 제 각기 자신의 취향대로 즐기는 모습이 자유로워 보였다.

이렇게 주말을 즐기는 이곳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참 적극적으로 쉰다는 점이다. 한나절 쉬겠다고 차일부터 테이블, 의자, 간이침대, 앰프, 음악 믹싱기, 이동식 놀이기구, 엄청난 양의 음료와 음식을 트럭에 싣고 와서 일일이 그것을 설치하고 즐기는 모습이 놀라웠다. 그 많은 짐을 트럭에 싣고 내리는 일만해도 보통일이 아니었을 테고, 그것을 일일이 설치하는 일은 또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가? 거기에 바비큐 그릴을 설치하고 엄청난 양의 고기를 구우면서 마시고 노는 그들의 모습은 유쾌하고 건강해보였다. 아내와 늘 하는 말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쉬고 노는 것에 참 결사적이다.

산업과학박물관 내부(), 비상구에 새겨진 닐 암스트롱의 경구(), 로봇 팔을 체험하는 아이들()

미국 중서부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박물관이라더니 정말 산업과학박물관은 입구부터 사람들이 많았다. 어른 15달러, 어린이 10달러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서니 우주선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고 나올 때 찾아가란다. 물론 선택사항이다. 어디를 가나 이렇게 사진을 찍어주고 20-30달러를 요구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크루즈를 타기 전에 사진을 찍었는데, 크루즈를 마치고 나오니 금문교와 합성해서 멋진 사진을 만들어 두었었다. 크고 작은 사진과 작은 액자까지 포함해서 30달러에 판매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사진이 낯선 곳에 걸려 있다가 폐기되는 것이 꺼림칙해서 구입한 이후로는 이런 식의 사진은 찍지 않았다. 더구나 이곳에서 완성된 사진은 그리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박물관을 돌다보니 항목별로 몇 군데 사진촬영 장소가 더 있었다. 입장료 외에 수익을 내기 위한 노력이었다.

돌아보니 모든 전시물이 체험중심이다.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관람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만지고, 타보고, 조정하는 것이다. 전시물들은 대부분 초등학생들이 메인 타깃으로 보였다. 그러니 효진이가 좋아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유진이까지 좋아하니 다행이었다. 전시된 콘텐츠도 콘텐츠지만 그것을 즐기게 하는 방식에 빠져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해보면 나도 방학 숙제하느라 서울국립과학관을 찾았던 나이가 유진이보다 한 살 어릴 때였으니 1980년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책으로만 보고 외우고 평가하던 것들을 직접 체험한다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 일이었던지그때의 감동이 생각났다. 방학숙제 하느라 친구와 세운상가에 가서 라디오 조립 키트를 구입한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었는데, 서울국립과학관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배고픈 것도 모르고 문 닫을 때까지 있다가 집에 늦게 돌아와 꾸중을 들었던 기억까지 나면서 그때 같이 갔던 친구 우정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낯선 시카고에서 느닷없이 1980년 서울을 만났다.

미국식 유머인 샌드위치(), 동작센서에 의해 인터랙션하는 체험(), 공기분사 체험()

산업과학박물관은 기대했던 것보다 흥미진진했다. 박물관 초입에 놓여있던 몇 개의 전시물은 언어유희를 기반으로 추측해보는 것이었는데, 모래(sand) 위에 마녀(witch)가 날고 있는 모습을 보고 샌드위치(sandwich)를 연상하는 식이었다. 몇 개는 답을 찾고 아이들과 웃었는데, 몇 개는 도통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양한 종류의 과학실험도 실험이었지만 일상 속에서 궁금했던 것들을 중심으로 체험코스가 구성되어 있었다. 가령 대형 트랙터와 영상을 결합하여 옥수수를 어떻게 수확하는지를 보여주는 체험 프로그램의 경우에는 옥수수대를 자르고 낱알을 수확하는 일련의 과정이 기계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실물의 단면을 잘라서 보여주고, 트랙터를 실제로 조정해볼 수 있게 하였다. 1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의 군함과 상선을 5,000척 이상 격침시켰다는 독일 잠수함 U보트(U-boat)의 실물을 전시하고 내부도 둘러볼 수 있게 하였다. U보트는 역사적 맥락을 누락한 채 전설의 잠수함으로 전시도리 뿐이었다. U보트 전시관 끝에는 예상대로 U보트 관련 상품들을 팔고 있었다.

체험할 것이 많다보니 관람 속도는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실내는 냉방이 너무도 잘되고 있어서 몸살을 앓고 있는 나는 몹시 추웠다. 몸이 으슬으슬 거리고 이곳저곳이 쑤셔왔다. 무리했다가는 나머지 일정과 내일 이동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았다. 그렇다고 관람을 멈출 수는 없고, 아내에게 잠깐만 차에 가서 쉬고 오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차로 돌아갔다. 직사광선으로 차 안은 무척 더웠다. 창을 조금 내리고 직사광선은 조금 가리고 한 시간쯤 그곳에서 몸을 데웠다. 마치 샌프란시스코나 몬트레이에서 만났던 바다사자가 햇볕에 몸을 데웠던 것처럼. 그래서인지 평소 같았으면 찜통처럼 느껴졌을 차 안이 오히려 고마웠다. 한 시간쯤 차 안에서 기운을 차리고 다시 산업과학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산업과학박물관은 그곳에 가야만 볼 수 있는 유니크한 아이템을 전시했다거나 굉장한 과학현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인기가 높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일상 속에서 궁금해 하는 것을 직접 체험하게 함으로써 스스로 이해할 수 있게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산업과학박물관의 모든 프로그램은 직접 만지고, 타보고, 체험하게 하는 것들이었다. 관람자 수가 연간 400만 명에 달한다니 그 체험의 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울러 과학과 산업을 절묘하게 통합하고 있다는 점과 박물관과 외부의 공원이 유기적으로 잘 연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가족 전체가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보아야할 부분이었다. 박물관도 보고 가벼운 피크닉도 즐길 수 있다면 주말 프로그램으로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빼어난 것은 시설이나 전시물이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고 연출하는 힘임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산업과학박물관을 보다가 또 점심때를 놓쳤다. 이미 4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밀레니엄 파크나 시카고 미술관을 보기에는 시간이 애매하고, 몸도 좋지 않으니 시카고의 명물이라는 우노 피자를 먹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일종의 여행 중 조퇴였다. 그러지 않고서는 내일 일정을 장담하기 어려운 몸 상태였기 때문이다.

미시건 호를 따라서 달리는 도로()와 미시건호 주변에서 세그웨이를 즐기는 사람들()

차로 달리면서 보니 미시건호 주변에서 다양한 레포츠를 즐기고 있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다양한 레포츠를 즐기는 모습이 여유로워보였다. 오클라호마 과학관에서 체험했던 세그웨이를 타고 호수도로를 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평화로웠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잔디밭에 누워서 햇빛을 즐기는 사람들, 가벼운 공놀이를 하는 사람들, 멀리 요트를 타고 나간 사람들까지 한가로운 주말의 풍경이었다.

시카고에서 보아야할 것이 어디 한가롭게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일까 마는 내게는 그 모습이 제일 눈에 들어왔다. 어디로 달려가는지도 모르고 분주하기만한 한국에서의 내 생활 때문이었을까? 평소에도 보면 미국인들은 평일 저녁에도 운동장에 불을 켜고 운동을 즐긴다. 어디 그뿐인가, 야구, 축구, 농구, 아이스하키 등을 시즌별로 나누어 일 년 내내 직접 즐기는 모습은 부러움을 넘어서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우리는 업무를 마치고도 업무의 연장인 약속이 계속되고, ‘월화수목금금금이 반복되는 생활인데, 여기서는 그런 경우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 단지 마음가짐의 차이만은 아니리라. 사회적 합의와 분위기가 그런 시스템을 구축하였을 것이다.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일하고 노력하는 것일 텐데 본말이 전도된 것 같아 자꾸 그들의 모습과 견주어 보게 되었다.

시카고 시내(), 보도 위에 새겨진 이정표(), 주차 표지판()

시카고에 가면 피자를 꼭 먹어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우노 피자나 지오다노 피자가 그것인데, 이왕이면 우노 피자를 먹어보라고 했다. 시간이 된다면 둘 다 먹어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구글 지도로 확인해보니 우노 피자를 먹을 수 있는 피제리아 우노’(Pizzeria Uno) 레스토랑과 지오다노 피자를 먹을 수 있는 지오다노’(Giordano's)는 그리 멀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피제리아 우노에서 피자를 먹고, 이어서 지오다노로 가서 피자를 먹겠다는 행복한 계획을 세웠다. 우선 피제리아 우노로 갔다.

피제리아 우노는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비교적 저렴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이곳은 주차장이 없어서 근처에 블루밍데일즈 백화점에 주차를 했다. ‘피제리아 우노앞에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이미 많았다. 생각보다 레스토랑의 규모는 크지 않았고, 테라스에서도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예약을 해주는 아가씨가 1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예약을 하고 블루밍데일즈 백화점에서 아이쇼핑을 하다가 시간이 되어서 갔더니 기다리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조금 기다리는 사이 먼저 주문을 하란다. 그러면 자리와 동시에 피자가 나온단다. 주문을 하고 있으려니 바로 자리가 났다. 1943년에 처음 영업을 시작한 장소라서 그런지 낡은 건물과 소박한 인테리어가 오히려 정겨웠다. 실내는 조금 어두운 편이었고, 테이블 사이가 그리 넓은 편은 아니었지만 다행히 우리는 비교적 넓은 자리에 앉게 되었다.

피제리아 우노(), Numero Uno 피자()

옆 테이블에서 젊은 아가씨 혼자서 피자를 먹고 있었는데 그 두께와 양을 보고 놀랐다. 메뉴에는 딥 디쉬(Deep Dish) 피자라고 적혀있었는데 옆 테이블을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피자 팬의 깊이가 무척 깊었기 때문이다. 양이 넉넉해 보였지만 먹성 좋은 우리 가족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고 믿고 Numero Uno Pizza 라지 사이즈로 시켰다. 피자가 나온 것을 보니 양이 생각보다 더 많았다. 게다가 효진이는 미트볼 스파게티, 유진이는 샐러드를 시켰으니 양이 더 많아졌다. 아이들이 오늘은 제대로 먹는 날이라고 판단한 모양인지, 아니면 어제 아내의 말을 기억한 것인지 모두 시키고 싶은 것들을 시켰다. 음식은 예상대로 모두 양이 넉넉했다. 특히 피자 반죽이 아니라 파이 반죽으로 만든다는 두툼한 도우(dough)의 양이 많다보니 결국 피자는 1/2밖에 먹지 못하고 가져와야 했다. 미트볼 스파게티는 미트볼은 맛이 있었으나 스파게티는 싱거워 기대만 못했지만 샐러드는 야채와 소스가 신선했다. 물론 피자의 맛은 아주 감동적이었다. 조금 많다싶을 정도로 넉넉한 토핑의 신선한 풍미와 치즈의 식감 그리고 두툼한 도우의 바삭함이 어우러져 일품이었다.

사람들은 피자를 먹으며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 삭스 간의 야구경기 중계를 보고 있었다. 이곳이 시카고니 당연히 이만수 감독이 한국인 최초의 유급코치로 활동하던 시카고 화이트 삭스 경기를 볼 줄 알았는데, 뉴욕과 보스턴의 경기를 보는 그들의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미국인들에게는 영원한 라이벌인 뉴욕 양키즈와 보스톤 레드삭스가 가장 인기 있는 팀이라고 들었는데, 시카고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었다. 각자 피자를 먹거나 맥주를 마시면서 응원하는 팀의 안타나 호수비에 조금씩 흥분하는 그들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나는 시카고 맥주를 한 잔 시켜서 피자와 같이 먹었다. 시카고 맥주는 가벼운 느낌이었지만 향이 깊은 묘한 맛이었다. 물맛이 중요한 맥주는 반드시 현지 맥주를 먹어야 그 맛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시킨 것은 한 잔이었지만 500cc 정도 되는 양이 나왔다. 피자도 그렇고 맥주도 그렇고 양이 참 넉넉했다. 이탈리안 식당 특유의 넉넉함이었을까? 운전을 해야 했기 때문에 아내와 나누어서 천천히 마셨다. Numero Uno Pizza 라지 사이즈 가격이 27.29달러니 한국 피자 가격을 생각하면 그리 비싼 것은 아니었다. 피자를 먹고 나자 우리 중 누구도 지오다노 피자를 먹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가 두 곳의 피자를 다 먹겠다고 세웠던 계획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지 다 먹지 못하고 싸온 우노 피자가 알려주고 있었다.

주차비를 정산하고 보니 25달러였다. 조금만 더 지체했으면 피자 값보다 주차비가 더 클 뻔했다. 토요일인데도 시카고 시내를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곳곳에 공사 중이어서 사만다의 데이터가 어긋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카고 외곽에서는 교통체증으로 사만다가 우회로를 택했는데, 거기서 헤매는 바람에 평소보다 일정을 빨리 마쳤음에도 늦게 숙소로 돌아왔다. 갈 때 길과 올 때 길이 달랐으니 좀 더 많은 것을 본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길을 잃고 헤매면서 발견하는 길들은 대체로 나름의 운치와 체험을 주는 것들이었는데, 시카고도 예외는 아니었다. 살면서 버릴 경험이 없듯 어떤 길도 버릴 길은 없었다.

사람들이 세상 모든 길을 다녀보았다고 해도 세상에는 늘 아직 다녀보지 않은 더 많은 길들이 있게 마련이다. 길은 언제나 새로 생기고 없어짐으로써 새로운 길이 되는 까닭이다. 중요한 것은 길이 아니라 그 길을 걷고 있는 내 자신이다. 어느 길이든 볼 것이 있고 없고를 결정하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그 위를 걷는 자의 체험이다. 항상 체험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다. 하여 단지 두 지점을 연결할 뿐인 속도의 길은 길이 아니라 도로일 뿐이다. 도로는 속도를 이야기할 뿐 그 안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들은 대체로 새롭거나 내게 변화를 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던가?

다행스럽게도 횡단을 통해 만나는 그 모든 길들은 아직 우리에게 길로 기억되고 있다. 체험으로 구성되는 우리의 길들이 어떠한 새로움과 변화를 가져올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올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러한 나의 낙관적 기대가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지금 가고 있는 이 길과 관계되리라는 것은 안다. 아직은 그것으로 족하다.

몸이 아프니 상념만 깊어진다. 사위는 온통 어둠인데 의식은 또렷해질 뿐이다. 조바심은 집에 두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길 위에 오르고 나니 그 몹쓸 습벽이 살아나나보다. 하지만 굳이 따라온 녀석을 내칠 일도 아니리라. 그게 우리의 길이고 여행의 스타일이라면 우리 스타일대로 따르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당위적인 답안을 가지고 출발한 여행이 아니지 않는가? 길이 데려다 주는 곳에서 우리가 함께 어우러지는 자연스러운 속도가 횡단여행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하니 이제 조바심도 따라온다면 데리고 다녀야겠다.

내일은 밀레니엄 파크와 시카고 미술관을 들렸다가 클리블랜드까지 달려야 한다. 오늘 몸 상태로 봐서는 내일 일정이 결코 만만하지 않으리라. 며칠째 먹고 있는 감기약은 독할 뿐 좀처럼 감기를 떨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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