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를 기억하는 가장 황홀한 방법

87일 시카고클리블랜드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어제 남겨온 피자로 아침을 해결하고 호텔을 나설 때까지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 비가 내려주니 반가운 일이었지만 몸살기운이 아직 남아 있는 상태다보니 그리 반가운 것만은 아니었다. 다행히 비는 밀레니엄 파크로 이동하는 중에 그쳤다.

오늘은 클리블랜드까지 371마일(594)을 이동을 해야 하니 서둘러야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에서는 딱히 볼 것을 정하지 못한 상태라서 밀레니엄 파크(Millenium Park)와 시카고 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을 보고 시카고에서 느지막이 떠나기로 했다.

여행계획을 짤 때도 클리블랜드가 문제였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추신수 선수 외에는 클리블랜드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는 형편이다 보니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은 아니었다. 게다가 시카고에서 나이아가라까지 10시간 정도 거리니까 무리하면 못 달릴 거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일정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만약 지체되면 클리블랜드를 생략하고 나이아가라로 가서 시간을 벌어볼 요량으로 설정해 둔 것이 클리블랜드였다. 다행히 여행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으니 가능한 한 시카고에서 늦게 출발하고, 클리블랜드에서는 잠만 자고 일찍 나이아가라로 이동하자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의 기억이 정말 좋았던 우리는 시카고 미술관을 꼭 들러보기로 했다. 또 시간이 된다면 밀레니엄파크도 보려고 했는데, 마침 두 곳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어서 별 어려움 없이 두 곳을 모두 관람할 수 있었다.

사실 시카고에 도착하면서부터 사만다가 거의 패닉상태였다. 여기저기 공사하는 곳도 많았고, 유난히 많은 고가도로 밑에서는 수신이 원활하지 못해서 결정적인 순간에 길을 잃고는 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어서 시카고 시내로 진입하면서부터 사만다는 다급해지거나 침묵했다. 물론 두 경우 모두 사만다의 도움이 절실한 순간들이었다.

길을 잃고 다시 만난 길(), 그 와중에 만난 시카고 극장()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는 일은 새로운 길을 만나는 일과도 같다. 시카고에서 사만다는 자주 길을 잃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사만다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저 길을 잃으면 새 길을 만날 수 있겠구나 위로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보니 문득 시카고 극장 앞이었다. 1921년에 개관한 시카고 극장은 미국 최초의 대형 극장이라고 한다. 파리의 개선문을 축소한 모양인데 특히 건물 앞에 걸린 초대형 붉은 간판이 선명했다. 그 앞에서 롭 마샬 감독의 영화 <시카고>(Chicago, 2002)[각주:1]가 떠오른 것도 그 붉은 간판의 선명함 때문이리라. 영화 <시카고>에서 보여준 뜨거운 욕망을 지금 이곳시카고에서 보기에는 머물 시간이 너무 짧았다. 주중에 그토록 분주하고 혼잡스러웠던 시카고의 일요일 오전은 서울의 그것처럼 한가하고 차분해서 오히려 처연한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처연한 기분은 밀레니엄 파크에 도착하면서 이내 사라졌다. 밀레니엄 파크 건너편 시카고 미술관 옆에서 음악공연이 있어서 공연 몇 시간 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흥성스러운 분위기로 차고 넘치고 있었다.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 지도

밀레니엄 파크(Millenium Park)는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기념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완공은 2004년에 했다고 한다. 음악공연 관계로 경찰들이 교통을 통제하고 있었고, 밀려드는 차들로 정신이 없었는데, 다행히 밀레니엄 파크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할 수 있었다. 밀레니엄 파크는 야외 음악당인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Jay Pritzker Pavilion), 크라운 분수(Crown Fountain), 루리가든(Lurie garden), 크라우드 게이트(Cloud Gate, 일명 Bean)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차를 하고 올라오니 왼쪽으로 루리가든(Lurie garden)이었다. 피에 아우돌프(Piet Oudolf)가 설계했다는 루리가든은 부단히 변해가는 자연의 모습을 일 년 내내 보여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고 해서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나중에 보니 입구는 남쪽 끝에 있었는데 우리는 주차장에서 바로 북쪽으로 걸어가서 찾았으니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선 곳을 중심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그것이 전부라고 우기는 일상의 실수를 다시 한 번 반복한 것이다. 어쩌면 이미 마음을 시카고 미술관에 빼앗기고 있어서 입구를 찾지 못했었는지도 모른다.

루리가든 앞쪽으로 걸어가 보니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설계했다는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Jay Pritzker Pavilion)이 등장했다. 웅장한 스테인리스 스틸 구조물을 머리에 얹고 있었는데 그 앞으로 객석과 대규모 잔디밭(Great Lawn)을 두고 있었다. 특이했던 것은 잔디밭 위까지 스테인리스 봉 구조물이 그물처럼 감싸고 있었다.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Jay Pritzker Pavilion) 전경과 지붕

잔디밭을 덮고 있는 스테인리스 봉 구조물에는 조명이 매달려 있었고, 그 사이로 근처의 고층빌딩들이 들어와 있었다. 공연장을 포함해서 전체적으로 누에고치 모양을 이루고 있는 스테인리스 봉 구조물은 지붕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봉과 봉이 만들어내는 프레임 사이로 주변의 고층건물들이 들어오고, 그것은 보는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프레임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러한 연출은 밀레니엄 파크가 시카고 다운타운의 스카이라인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마련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공연장 지붕을 덮고 있는 조형물만큼이나 이 봉 구조물의 다채로운 프레임이 신선하고 매력적이었다. 평소에는 잔디밭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운동을 하는 모양이었는데, 비가 온 뒤라서 그런지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텅 빈 공연장만큼 스산한 풍경은 없다. 일요일 오전, 비가 내린 후의 야외 공연장은 그저 푸른 잔디밭일 뿐이었다.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은 공연장으로 설계된 것이지만,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에 의해 매일매일 새 작품으로 탄생하고 있다. 공연장에서 연출되는 공연의 내용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보는 사람의 위치와 시간에 따라서 달라지는 공연장의 조형물뿐만 아니라 스테인리스 봉 구조물도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통합적인 프레임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곳을 즐기는 사람들까지 공연장과 잔디밭을 오간다면 더할 수 없이 훌륭한 설치미술작품이 아니겠는가?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을 보고 잔디밭을 가로지르면 애니쉬 카푸(Anish Kapoor)가 만든 크라우드 게이트(Cloud Gate)가 나타났다. 크라우드 게이트를 보는 순간 일단 그 크기(높이 10m, 너비 13m, 길이 20m)에 압도된다. 밀레니엄 파크의 방문 인증샷에 반드시 등장하는 이유를 보고나서야 알 수 있었다. 이 작품은 110톤이 넘는다는 무게와 크기도 크기였지만 무엇보다 스테인리스를 이음매 없이 이렇게 만들어냈다는 것에 한 번 놀라고, 바람과 안개 그리고 추위로 유명한 시카고의 일기를 생각할 때, 반사가 가능할 수 있도록 유지되는 표면에 두 번 놀라고,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 달라지는 모습에 세 번 놀라게 된다.

크라우드 게이트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자신을 비추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제목을 보면 구름을 형상화한 것인데, 영감은 액체수은에서 얻었다고 하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이것을 콩(Bean)이라고 부르니 재미있다. 어쩌면 이러한 어긋남 혹은 다양성이 이 작품의 힘이 아닐까 생각했다. 작품 밖에서는 도시의 스카이라인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 굴절되어 반사됨으로써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나고 있었다.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이 프레임을 통해 세계를 낯설게 만들었다면, 크라우드 게이트는 되비춤을 통해서 세계를 깨우고 있었다. 게다가 이 두 작품이 밀레니엄 파크라는 동일한 공간 안에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통합적인 체험을 가능하게 했다.

크라우드 게이트(Cloud Gate, 일명 Bean)의 모습과 다양한 상호작용의 사례

크라우드 게이트는 중앙에 3.7m의 움푹 팬 공간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다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언제 다른 사람과 함께 거울 앞에 서 보겠는가? 게다가 그것이 낯선 모습의 나와 너라면 그것은 더욱 매력적이지 않겠는가?

가족들 사진도 찍고 모두들 즐거워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강하게 밀었다. 어디 가나 만날 수 있는 중국인 관광객들이다. 게다가 젊은이들이었다. 무례하고 세련되지 못한 중국의 오늘을 보는 것 같아서 씁쓸했다. 횡단 여행 중 곳곳에서 만나는 그들의 모습은 무례를 넘어 난폭하기까지 했다.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의 지갑으로 바뀌고 있는 중국의 모습이야 뭐랄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쇼핑센터와 아울렛 등을 휩쓸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중국에서 만났던 그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LA 인근 쇼핑센터와 아울렛 등에서는 중국인 전담 종업원을 두고 그들의 취향에 맞는 상품을 구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보니 소위 소공녀소공자라고 불리는 중국 젊은이들의 무례함[각주:2]은 그 끝을 모른다. 뭐라고 한 마디 하려고 뒤를 돌아보니 10여명의 젊은이들이 자기들끼리 원을 만들어 웃고 떠들며 주변은 무시한 채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다. 더 불쾌해질 것 같아서 무시하기로 했다. 더블어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폭력이 폭력을 부르듯 무례는 무례로 대가를 치른다는 것을 그들도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

크라우드 게이트 옆으로 조금 이동하니 크라운 분수(Crown Fountain)가 있었다. 하우메 플렌사(Jaume Plensa)가 설계를 했다는 이 작품은 제작을 위해 천만 달러를 기부했다는 레스터 크라운(Laster Crown)의 이름을 따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15.24m 높이의 두 개 기둥에는 LED 스크린이 설치되어 13분마다 얼굴이 비디오 이미지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두 시카고 시민들이라고 하니 공공미술(public art)의 전범을 보는 것 같았다.

주변과 소통하면서 순간순간 완성과 해체를 거듭하는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과 크라우드 게이트 그리고 크라운 분수까지, 밀레니엄 파크을 구성하고 있는 작품들은 그곳을 찾아 즐기는 사람들에 의해 구현될 수 있는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성과를 보면 새 천년을 기념으로 공원을 조성하며 시카고가 고민했던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더블어함께 하는 상호소통의 장(), 그것이 새천년의 시카고에서 이루어지길 기원한 내용이었으리라. 밀레니엄 파크를 구성하는 개개의 독립적인 작품들뿐만 아니라 작품들 간의 소통은 물론, 주변 환경 그리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과도 상호소통을 통해서 밀레니엄 파크의 지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밀레니엄 파크를 구성하고 있는 작품들을 보면서, 시카고 미술관에는 아직 입장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미술관 안에 벌써 들어와 버린 느낌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작품들의 이름이 대부분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점이었다. 이름까지 좀 더 멋스러운 것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이름을 내주고 이런 작품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어쩌면 그 이름까지 이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도 함께.

시카고 미술관 전경과 입구 그리고 실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보스턴 미술관과 함께 미국 3대 미술관이라는 시카고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은 밀레니엄 파크와 니콜라스 다리(The Nicholas Bridgeway)로 연결되어 있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이어 규모 면에서도 미국 내 2위에 해당한다는 시카고 미술관은 26만점의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연간 180만 명 이상이 다녀간다고 한다. 1866시카고 디자인 아카데미에서 출발하여 시카고 대화재 이후 시카고 아트 아카데미를 거쳐 1882시카고 아트 인스티튜드로 이름을 바꾸고 미술관과 미술교육기관을 구성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893콜럼버스 세계 박람회가 열리자 박람회 이후에 미술관으로 사용하는 조건으로 건축했던 것을 바탕으로 추가 증축한 것이다.

우리는 니콜라스 다리를 통하여 2009년에 증축했다는 현대관으로 들어갔다. 어린이들은 무료고 어른은 18달러의 입장료를 냈다. 세인트루이스 미술관은 시민들의 교양을 위해 무료였고, 시카고미술관은 어린이들은 무료인데, 둘 다 신선했다.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문화공간의 무료관람을 우리도 진지하게 고민해야할 때가 아닐까? 1층은 18-19세기 미국 미술, 2층은 미국 모더니즘을 테마로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고호, 세잔, 르노아르, 피카소, 고갱, 모네, 샤갈 등의 그림은 누가 보아도 그들의 그림이 아니던가? 그들의 그림이 전시된 갤러리 밖에서 만난 강렬한 느낌의 그림들은 그림 옆에 붙은 작가의 이름과 작품명 그리고 작품 설명을 보고서야 미국작가들의 작품임을 알았다. 특히 시카고 미술관에서 꼭 봐야한다고 소개된 그림들은 그 소개가 아니더라도 미국적인 색채와 분위기로 인해 그림 앞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Nighthawks>

스로우 호머의 <The Herring Net>

아치볼드 모틀리 주니어의 <Nightlife>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각주:3]<Nighthawks>는 깊은 밤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 작품에서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격식을 차린 복장으로 바에 앉아 있는 사람들, 커다란 유리창으로 밖을 내다볼 수 있는 구도지만 사실은 자신들이 보여지는 아이러니의 공간, 늦은 시간까지 함께 하고 있지만 정작 시선은 모두 어긋나고 있는 관계의 메타포, 텅 빈 듯한 공간의 구도 등이 어우러져 도시의 공허함이 느껴졌다. 아치볼드 모틀리 주니어(Arcibald J. Motley Jr.)<Nightlife><Nighthawks>와는 상반된 분위기였지만 그 역시도 소란스러운 공허가 읽히는 작품이었다. 윈스로우 호머(Winslow Homer)<The Herring Net>는 프레임 안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꽉 찬 두 어부와 청어 그물이 거센 파도와 함께 고된 노동의 압박으로 다가왔다.

미술관에 들어서면서부터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돌면서 같이 보고 그 느낌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들 뒤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따라갔다. 어리기만 하다고 생각한 아이들이 아내와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하는 장면은 감동적이었다. 손을 잡고 때론 어깨를 걸고, 옆에 세우기도 하고 앞에 안기도 하면서 좋은 그림을 가족들이 함께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분명 눈물 날 정도로 고맙고 감동적인 모습이었다.

그런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혼자 감상에 젖어서 내가 미술관을 처음 갔을 때가 언제였을까 생각해보았다. 분명한 기억은 없지만 미술관다운 미술관을 가본 것은 대학교 입학한 이후였을 것이다. 미술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미술책이 전부였던 내에게 미술관은 차라리 강박에 가까웠다. 꼭 가서보아야 한다고 늘 느끼고 있었지만 정작 가서는 낯설고 불편했던 공간이 미술관이었다. 대학원 시절 화집을 사서 모으던 동기가 있었는데, 그 모습에 묘한 질투를 느끼기도 했었다.

아내와 아이가 함께 그림을 보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아이들이 가족과 함께한 이 체험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엄마 품에 안겨서 고갱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는 따듯한 체험은 살면서 그리 흔한 일이 아니지 않는가?

나는 아이들이 이렇게 어린 나이에 세계적인 작품들을 코앞에서 직접 보고 있으니 얼마나 설레고 신날까 라고 생각했는데, 몇 개의 갤러리를 돌고나자 아이들의 표정이 아니었다. 의자가 있으면 자꾸 앉으려 하고 몹시 지쳐있었다. 아내와 나는 서운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서 이 작품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일러주고 좀 더 많이 돌아보아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림에 흥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이 작가들을 도통 몰랐다. 어린 효진이는 그렇다고 쳐도 유진이는 알 것이라고 생각하는 작가들조차 모르고 있었다. 요즘 미술시간에는 그런 식으로 배우지 않는단다. 생각해보면 이 작품이 누구의 무슨 작품인지 외울 이유는 또 어디에 있겠는가? 전시회에 가면 작품 옆에 다 적혀있지 않은가? 작품을 보고 좋으면 어느 작가의 작품인지 돌아보면 될 일이었다. 그저 작품을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으면 족할 것이라는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힘들면 엄마랑 아빠가 보는 동안 쉬어도 좋다고 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제법 많은 방을 같이 따라다녔다. 세상에 버릴 체험이 어디 있겠는가? 작품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손잡고 작품을 설명해주던 엄마의 손길, 안고 이야기해주던 엄마의 체취만이라고 기억할 수 있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따듯한 기억이 될 것인가? 세계적인 명화도 명화였지만 그 앞에서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으로도 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외로 시카고 미술관에는 동양 예술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개인들의 소장품을 기증받아 전시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그림이나 도자기가 많았고 우리 것은 거의 없어서 아이들은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는 아이들에게 이 작품들이 모두 합당한 경로로 이곳에 이르렀을까 하는 의문이 던졌다. 전시된 개인 소장품들은 대부분 고서화나 오래된 도자기들이었는데, 그것이 약탈이나 밀반출에 의한 것이라면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소장하게 되었더라도 유실 가능했던 것들이 잘 보존되었다면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가? 약탈이나 밀반출의 결과임이 분명한데도 단지 돈을 지불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개인의 소유로 볼 수 있는가?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그러한 방식으로 박물관을 채우고 그것을 세계 최고 박물관 운운하는 것은 정당한가? 등등.

문화유산이라는 것이 창작된 그 나라에만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다른 나라로 나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납득 가능한 이유와 대가가 지불되어야만 할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일방적인 약탈이나 불법적인 밀반출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의당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적어도 그러한 소유를 부끄럽게 여기지는 못할망정 자랑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사정은 중국이나 일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문화유산을 알리기 위해서 합법적으로 대여한 것이 아니라면, 남의 나라 미술관에서 자기 나라 유물들이 많고 적음을 따지고, 그 결과에 따라 문화적 자존심 운운하는 것은 또 다른 인정투쟁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우리문화를 알리기 위한 노력이거나 합법적인 경로로 마련한 소장품을 전시하는 것이라면 제대로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조차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구태의연한 몇 개의 전시물로 과연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작고 소박한 한국관을 보면서 갑자기 맥락 없는 생각만 많아졌다.

아내와 나는 더 돌아보고 싶은데 유진이가 감기의 여파로 영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효진이가 피곤하다고 투덜대기 시작했다. 원래는 가급적 해가 지기 전에 클리블랜드에 도착하겠다는 생각으로 적어도 2시쯤에는 관람을 마칠 계획이었다. 시카고에서 끝나는 것이 Route66만은 아니었는지 아이들의 체력도 급격히 떨어져 있었다. 좀 더 보겠다는 욕심에 점심을 먹지 않고 돌았는데, 상황이 이러니 다 보지도 못하고 관람을 마쳐야만 했다. 시카고 미술관은 제대로 보려면 2-3일쯤 여유가 필요할 것이라고 아내와 이야기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어쩌면 미술관을 하나의 단위로 보고 책 한 권 읽듯이 다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강박에 가까운 것이리라. 문화에 모두, 전부, 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개개로서 의미가 있고, 그것을 체험하는 향유 자체가 문화가 아니던가?

태평천하를 쓰려고 했던 것 같은데 태평천정이 된 조악한 기념품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미술관을 나서면서 입구의 기념품점에 들렀다. 기억이 될 기념품이 있으면 하나 사려고 했는데 살만한 것이 없었다. 태평천하(太平天下)가 써져 있어야 할 곳에 태평천정(太平天丁)이라고 적힌 기념품을 보면서 저것도 혹시 중국제품이라면 웃지도 못할 상황이 아닐까 라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기도 했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조악한 모조품들이 많아서 실망스러웠는데, 특히 엉터리로 한자를 써놓은 기념품들을 보면서 씁쓸했다. 시카고를 떠나면서 시카고 미술관을 다 둘러보고 가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분명 과욕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더할 수 없는 행운이 되었다. 모든 기억은 그때그곳이 만나는 곳에 있다. 그렇다면 다음에 기회가 되어 다시 이곳을 방문하더라도 이 오늘의 감동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래서 더 욕심나고 더 아쉬웠는지도 모른다.

시카고를 마지막으로 여행의 1단계인 Route66 코스는 마쳤다. 이제 클리블랜드부터는 여행의 2단계에 돌입한다. 본격적인 동부여행이다. 풍광이나 기후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클리블랜드까지 I-90I-80타고 갔다. 이 도로들은 이전까지의 도로들과는 다르게 유료도로기 때문에 서비스플라자(Service Plaza)가 설치되어 도로를 벗어나지 않더라도 쉴 수 있게 만들어졌다. 서비스플라자는 주유소, 패스트푸드점, 커피전문점, 피자집 정도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동안 보아온 주유소나 패스트푸드점과는 브랜드가 바뀌어 있었다. 달리면서 몇 군데 서비스 플라자에 들러보니 대부분 bp주유소, 버거킹, 피자헛, 스타벅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이곳의 서비스플라자도 제품 대비 가격이 다소 비싼 편이었다.

시카고 스카이웨이 톨게이트(), 클리블랜드로 가는 길에 만난 철교()

아직 유료도로가 시작되기 전인 시카고를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아이들 점심을 먹이기 위해 내려섰는데 결국 찾지 못하고, 감기약만 구입해서 올라왔다. 시카고에서 시작된 사만다의 혼란은 여기서도 계속되고 있어서, 일러준 그대로 달려가다 보면 공사 중이거나 막힌 길이었고, 목적지라고 해서 보면 낯선 건물이었다. 그렇다고 사만다를 무시하고 표지판만 보고 음식점을 찾기에는 찾아야할 지역이 너무 넓었다. 그럴 때는 빨리 포기하고 다른 곳을 찾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는 것을 이번 여행에서 뼈저리게 배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료도로를 만나 서비스플라자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마지막 남은 컵라면과 계획보다 많이 남은 햇반

8시가 지나서 클리블랜드에 도착했다. 비교적 저렴한 숙소를 잡았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숙소는 기대보다 괜찮았다. 더구나 아침까지 제공해주니 금상첨화였다. 문제는 저녁이었는데, 딱히 먹을 만한 곳이 없어서 마지막 남은 컵라면 2개와 햇반을 데워 식사를 했다. 이제 슬슬 김치가 그립기 시작했다. 그나마 느끼한 현지식을 견딜 수 있게 해주던 컵라면이 떨어졌으니 큰일이다. 한인마트를 찾아야 구입할 수 있을 텐데, 일정에 쫓기다보니 한인마트 찾기가 쉽지 않다. 이곳까지 오면서 예상보다 컵라면은 많이 먹었고, 햇반과 3분 카레 등은 기대만큼 먹지 않아 많이 남았다. 아이들은 슬슬 햇반의 어정쩡한 온도와 흐물거리는 3분 카레의 식감에 물리나보다. 나도 그러니 어린 것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래도 군말 없이 잘 참아주니 고맙고 대견하다.

내일은 일찍 나이아가라로 출발해야 한다. 일찍 출발할수록 좀 더 많이 보거나 천천히 깊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숙소를 예약하면서 실수로 캐나다 쪽 숙소를 잡은 덕분에 내일은 국경을 넘어야 한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미국 쪽보다 캐나다 쪽이 더 멋있다고 위로하며 출발 전에 학교 인터내셔널 오피스에서 입출국에 필요한 서류를 받아왔다. 미리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미국과 캐나다의 입출국사무소 관리들의 태도가 무척 다르다던데, 기대가 된다. 실수는 대부분 좋은 경험이 된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1. 1924년 시카고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진 연극작품을 1975년 뮤지컬로 만들어져 큰 성공을 거자 2002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은 르네 젤위거, 캐서린 제타 존스, 리차드 기어가 출현한 뮤지컬 영화다. 재즈, 갱, 관능, 쇼 비즈니스 등과 같은 시카고의 이미지와 황색언론, 살인 등의 대중적인 요소들을 통합해서 구현한 뮤지컬영화다. 영화에 등장하는 'All That Jazz'와 'Roxie' 같은 넘버가 유명하다. [본문으로]
  2. 중국의 산아제한 정책으로 가정 당 한 명의 자녀밖에 두지 못하게 되면서, 모든 자녀를 공주와 왕자로 키우는 중국의 세태를 꼬집는 말이다. 친 할머니와 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부모, 이렇게 여섯 명의 어른이 아이 하나를 키우다보니 자기밖에 모르는 왕자와 공주로 성장하게 되고, 이들의 모습을 비꼬아 소공자, 소공녀라고 부른다. [본문으로]
  3. 에드워드 호퍼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들은 알랭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알랭드 보통은 그의 그림에서 고독을 읽고 있지만, 나는 오히려 그 고독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공허에 마음이 울렸다. 횡단 여행을 마치고 나서, 국내 최고의 웹툰 <이끼>와 <미생>의 윤태호 작가와 페이스 북에서 에드워드 호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강렬한 체험을 구현하는 작가의 매혹은 강력한 것이어서 우리 모두 눈을 빼앗기고 가슴에 새기게 되나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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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일 클리블랜드나이아가라 폭포(캐나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어이 클리블랜드는 괄호 속에 묶으려는 듯, 아침을 먹자마자 우리는 급하게 서둘러 클리블랜드를 떠났다. 클리블랜드에서 나이아가라 폭포까지 229마일(366)이니 네 시간이면 족할 거리였다. 횡단여행을 하다 보니 이제 네 시간 정도의 거리는 아주 행복하게 즐길만한 거리였고, 심지어 그 다음 일정을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 있는 거리였다. 심리적인 거리는 언제든 물리적인 거리를 넘어선다.

사람 사는 동네니 클리블랜드라고 왜 볼 것이 없었을까마는 볼 것 많은 시카고와 나이아가라 폭포 사이의 일정이다 보니 마음은 이미 너무 늦게 도착하거나 너무 이르게 떠나고 있었다. 일찍 출발을 서두른 덕분에 우리는 점심도 먹기 전에 미국-캐나다 국경을 넘고 있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오후를 온전히 보내고 야경까지 돌아본 후에 내일 아침 일찍 보스턴으로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조금 지체되면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넘어오는 국경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고 들었기 때문에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 위해서는 오늘 나이아가라 폭포에서의 일정을 마쳐야했다. 더구나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보스턴까지의 거리가 오늘 달린 거리의 족히 두 배는 되었기 때문에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클리블랜드를 떠나오는 길에 우연히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구장인 프로그레시브 필드 (Progressive Field)를 볼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미국에 오면서부터 추신수 선수와는 묘한 인연이 계속되고 있었다. 인천공항에서 유진이가 추가 보완검색을 받느라 탑승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추신수 선수 가족이 우리 가족 옆을 지나가서 같은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었다. 그 많은 탑승자들 중에서 무작위로 서너 명을 뽑아서 하는 추가 보완검색에 하필 유진이가 지명되어 지체된 것부터, 덕분에 추신수 선수를 볼 수 있었던 것도 묘한 우연이었다. 재미있었던 것은 그날 유진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 양말을 신고 있었는데, 추가 보완검색을 하는 과정에서 신을 벗게 하는 바람에 아이가 적잖이 당황하고 있을 때, 추신수 선수가 지나갔다. 추가 보완검색을 마치고 나온 유진이에게 추신수 선수가 지나갔다고 하니, 아이는 태연히 공항에서 이미 보았는데, 그가 박태환 선수인 줄 알았단다. 그 특유의 호쾌한 타격과 빨랫줄 송구를 좋아하는데, 그와 같은 비행기를 탄 것은 미국행의 좋은 징조가 아니었을까?

LA에인절스 구장에 온 추신수 선수 응원 문구.

4월 중순쯤인가 코스트코에서 LA 에인절스 스타디움 입장 티켓을 세일해서 팔고 있었다. 집에 와서 경기 스케줄을 확인하니 마침 5월초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경기가 있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LA 에인절스의 이번 시즌 마지막 경기였다. 더구나 LA 에인절스에는 행크 콩고(한국명 최현)까지 뛰고 있으니 더욱 신나는 일이었다. 티켓을 구입하고 에너하임의 LA 에인절스 구장까지 한달음에 달려가서 당일 입장권으로 교환을 했다. 홈팀인 LA에인절스쪽에서 응원할 것인지, 방문팀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쪽에서 응원할 것인지 입장권으로 교환하면서 고민을 했었는데, 유진이가 단호하게 LA 에인절스에서 응원해야 한단다. 그것이 이 지역에 사는 도리란다.

두 선수를 경기장에서 볼 날만 고대하고 있었는데, 샌프란시스코 여행을 다녀오고 나니 추신수 선수가 음주운전으로 재판을 받아야 해서 그날 경기에 출장할 수 없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실망하고 응원 플래카드도 만들지 않고 있었는데, 경기가 있던 당일 인터넷에서 보니 재판이 연기되어 추신수 선수가 출전한다는 것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유진이와 급하게 응원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추신수 선수만 응원하기 아쉬워 뒤편에는 영어로 행크 콩고의 응원 문구를 넣었다. 작은 플래카드였으니 반대편에 있던 추신수 선수는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메이저리그 구장에서는 특정 선수의 이름이 적힘 플래카드를 들고 응원하는 것은 불법이란다. 응원문구를 한글로 적어서 그랬는지 우리는 별문제 없이 응원할 수 있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프로리그에서 수많은 차별을 극복하면서 우뚝 선 추신수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의 벅찬 감동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음주운전 파문을 잘 알고 있는 LA 에인절스 관중들이 노골적으로 야유하는 가운데서도 당당하게 타격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쓰럽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한 복합적인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그날 경기를 보는 내내 여러 가지 생각이 오고 갔다. 매일 승부의 세계를 건너고 있는 추신수 선수의 스트레스나 내면의 갈증은 보고 싶은 모습만 보기를 원하는 우리가 알 도리가 없는 부분이겠지만, 늘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절박함과 가파름만은 느낄 수 있었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은 늘 그 실천이 가파를 수밖에 없다. 한 발 제겨디딜 곳 없는 승부의 세계, 모든 것이 낯설고 노골적인 차별이 존재하는 공간, 최고가 되지 않으면 다음이 없는 상황, 그 가운데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하는 사람이 겪게 될 그 절박함은 막연한 예상만으로도 숨 막히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황을,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있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대부분 사람들은 뉴욕 여행과 연계하여 나이아가라 폭포를 찾는다는데, 아는 사람들은 오히려 모두 미국 쪽 보다는 캐나다 쪽에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나중에 일러주었다. 그렇다고 정보에 둔감한 내가 그것을 알고 캐나다 쪽에 숙소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숙소를 예약하는 과정에서 가격대비 좋은 숙소를 찾다보니 환불이 안 되는 조건이지만 맞춤한 것이 있어서 예약했다. 예약을 하고 주소를 정리하다가 보니 숙소는 캐나다에 있었다. 환불이 안 되니 다른 도리가 없었다. 더구나 캐나다를 다녀오려면 UCI 인터내셔널 센터에서 방문허가를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까지 있었다. 아둔하면 침착하기라도 했어야 했는데, 명민하지도 못하고 덜렁대기까지 하다가 얼떨결에 캐나다 쪽으로 오게 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실수가 오히려 현명한 선택이 되었으니 변방 늙은이의 말(塞翁之馬)을 어디서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사는 일이다.

미국에서 캐나다로 입국할 때 입국심사는 까다롭지 않았다. 여권, 미국 비자, DS2019, I-94서류만 의례적으로 확인하며, 어디서 왔는지, 얼마나 머무는지, 어디에 있을 것인지 정도를 묻는 수준이었다. 다만 차 한 대당 3달러의 수수료를 내야 했다. 어떤 명목으로 내는지 알지도 못하고서 수수료를 내려니 금액을 떠나서 조금 억울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나마 입국심사를 하는 붉은 제복의 청년이 친절한 것이 위로가 되었다.

문득 미국에 입국할 때 LA공항에서 가족들과 두 시간을 기다렸던 생각이 났다. 무엇이 그렇게 무서운지 불필요한 것까지 챙기면서도 무성의하고 더디기만 했던 미국 입국심사는 마이클 무어가 <화씨 9/11>(Fahrenheit 9/11, 2004)에서 보여주었던 과장된 공포의 단면이었다. 입국심사대를 통과하는 순간 반미를 넘어 혐미(嫌美)에 빠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불편하고 불쾌했지만 어쩔 수도 없었던 체험이었다. 두려움은 미혹을 부르고, 미혹은 다시 더 큰 두려움을 부르는 공포의 환()이 끊임없이 이어져,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르는 두려움만 남은 상태였다. 그것에 비하면 캐나다 국경은 입국환영행사장에 가까웠다.

나이아가라 폭포 주변의 맥락 없고 소박한 거리

시카고에서 그토록 정신 차리지 못하던 사만다가 오히려 캐나다에서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국경을 통과해서 사만다가 일러주는 대로 따라가 보니 소박한 거리가 나이아가라 폭포로 이어져 있었다. 주차할 곳을 찾으면서 보니 주변 거리가 참 맥락 없었다. 나이아가라 폭포와 카지노, 리플리의 믿거나 말거나(Ripley's Believe It Or Not!), 기네스 세계 기록, 왁스 뮤지엄 등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소박하거나 조악하다는 느낌을 넘어서기 어려운 놀이 시설과 식당들이 줄지어 나이아가라 폭포 쪽으로 향해 있었다.

주차를 하려고보니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까울수록 주차비가 비쌌는데, 하루 종일 7달러12달러15달러였고, 6시 이후에는 5달러였다. 시카고에 비하면 그리 비싼 금액이 아니었고, 조금 먼 주차장이라고 해도 나이아가라 폭포까지는 걸어서 채 10분이 걸리지 않는 거리였으니 먼 곳에 주차하고 거리를 구경하며 폭포까지 걸어 내려갔다.

나이아가라 폭포 관광은 다양한 패키지가 있었지만, 우리는 안개 아가씨호(Maid of the Mist)를 타고 폭포만 체험(어른 14.60달러, 어린이 8.94달러에 세금 13% 추가)하고, 남는 시간에 폭포 주변과 폭포 외곽을 살펴보기로 했다. 먼저 안개 아가씨호 예약을 하고, 밥을 먹어야 했다.

밥은 예외 없이 규칙적이고, 몸과 마음의 상태와 무관하게 진솔했다. 시간이 지나면 배가 고파진다는 예외 없는 규칙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 하지 않던 반복되고 있었다. 더구나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밥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리 부모님도 우리를 그렇게 키우셨다. 아무리 살림이 어려워도 밥은 늘 푸지고 넉넉했다. 더구나 끼니를 거르는 일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내게 가족은 늘 밥과 상관되어 있다. 언제나 저녁 밥 짓는 냄새는 눈물겹다. 그 눈물은 슬픔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따듯함이거나 위로에 가까운 것이다. 하루의 힘겨운 일과를 마치고 기진해서 돌아와 온 가족이 둘러앉아서 더 먹으라는 사랑스런 성화와 함께 나누는 따듯한 밥과 국의 위로는 밥이지만 늘 밥 그 이상이다.

여행을 하면서 아침은 대부분 숙소에서 제공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먹고, 점심은 이동 중에 패스트푸드로, 저녁은 햇반, 카레, 짜장, 컵라면 등을 이용하거나 몇 차례 현지식으로 해결하고는 했다. 밥을 벌어오는 가장으로서 미안한 일이었다. 모든 것이 힘들어도 밥이 만족스러우면, 그것이 힘이고 위안이 될 텐데, 밥이 부실하니 가장으로서 미안할 뿐이었다. 여행이 진행될수록 가족 모두 아침의 간편식에는 적응이 되어갔지만, 패스트푸드와 햇반에 카레는 서서히 물려가고 있었다. 옐로우스톤 여행 때까지만 해도 어쭙잖은 현지식보다 햇반에 카레가 제일 맛있다고들 했었는데, 여행이 길어지면서 입맛은 벌써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나서니 딱히 마땅한 곳이 없다. 이번 여행에서는 스테이크를 먹은 적이 없어서 스테이크 전문점에 갔다. 집에 있었다면 벌써 몇 번은 수영장 옆에서 바비큐를 해주었을 것이다. 한국에 비해 식료품 값이 무척 저렴한 얼바인에서는 특히 소고기는 가격 대비 감동이었다. 주말에 느지막이 일어나서 아이들 데리고 풀장에 나가 바비큐를 해서 먹고, 마지막으로 삼겹살을 잘게 썰어 넣은 김치 볶음밥을 해주면 하루가 행복했다. 그렇게 먹고 풀장 옆에 누워서 썬텐을 하면서 가볍게 맥주 한 잔을 하는 것은 더할 수 없는 여유였다.

조금 걸어가다 보니 Kelsey's라는 식당이 있었는데 그중 깔끔하고 가장 식당스러워 보였다. 그곳에서 스테이크, 키즈 메뉴 2, 스테이크 샌드위치, 캐나디안 맥주를 시켰다. 나온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으면서 우리는 스테이크는 어디를 가나 신뢰할만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팁을 포함해서 78달러의 호사였다. 호사는 대부분 대가를 치르는 것이어서 덕분에 저녁은 다시 햇반에 3분 카레를 먹어야 했다.


안개 아가씨호 티켓판매소(),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안개 아가씨호(), 레인보우 브리지()

안개 아가씨호를 타기 위해 서서 기다리는 줄이 평소보다는 짧다고 했다. 줄을 서서 선착장까지 내려가는 길이 폭포 쪽으로 트여 있어서 기다리며 바라보는 폭포와 그것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르는 말들이 사람 수만큼이나 많이 오가고 있었다. 안개 아가씨호라는 배 이름이 참 매력적이었다. 배의 크기나 용도와 상관없이 크고 강한 이름을 지은 배들을 보면 이름만 둥둥 떠 있는 것 같은데, 안개 아가씨호는 작고 소박하면서 그 배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주는 이름이었다. 뱃머리에 쓰여 있는 Maid of the Mist를 보니, M자가 주는 단단한 느낌까지 더해주고 있었다.

비옷을 입은 아내와 아이들. 효진이는 얼굴 젖는 것을 싫어해서 얼굴도 가렸다.

배를 탄 사람들을 보니 모두 코발트색 비옷을 입고 있었다. 비옷이라고는 하지만 얼핏 보면, 1970년대 많이 쓰던 파란색 비닐우산이 연상되는 비옷이었다. 비옷의 색깔도 색깔이었지만 비닐의 두께가 아무리 넉넉하게 봐줘도 비닐우산이었다. 우비를 입고 폭포를 돌아보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내와 나는 우비를 그냥 주는 것일까, 구입하는 것일까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아내는 그냥 주는 것이다, 나는 이곳에 공짜가 어디 있겠느냐, 아이들의 동의를 구해가며 갈린 의견을 다잡아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우리도 배에 오를 차례가 되었을 때, 한 청년이 커다란 비닐 통에 비옷을 잔뜩 쌓아놓고 서서 웃으면서 비옷을 나눠 주고 있었다. 비옷을 받으며 아내와 아이들은 거 봐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아내는 늘 옳다.

비옷을 펼치어 입고 보니 모두가 똑같아 보였다. 우비는 덩치 큰 이곳 사람들의 크기에 맞추었는지 효진이에게는 너무 커서 앞쪽을 한번 묶어주었다. 안개 아가씨호는 2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배에 오르자마자 좀 더 좋은 자리에서 보겠다고 사람들은 모두 2층 난간으로 몰렸다. 배는 지체 없이 떠났다. 멀리 레인보우 브리지(Rainbow Bridge)가 보였다. 내일은 아마도 저 다리를 건너야 하리라. 몇 마디 안전 수칙에 대한 안내 방송이 끝나갈 무렵, 배는 미국 쪽 폭포 앞에 있었다.

나이아가라 폭포

미국 쪽 폭포는 낙차가 56m, 너비가 320m라는데, 보여주는 모습도 그랬지만 그 엄청난 소리만으로도 넉넉한 압도였다. 폭포 전체를 조망하면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몸이 젖을 수 있을 정도의 위치에서 배는 멈추는듯하더니 이내 뱃머리를 돌려서 캐나다 쪽 폭포로 향했다. 캐나다 쪽 폭포를 보고 오는 다른 배가 옆을 스쳐가자 모두들 유쾌한 함성을 질렀다. 캐나다 쪽 폭포는 낙차 54m, 너비가 675m인데 말발굽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호스슈(Horse Shoes)라고도 불린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본류라고 볼 수 있는 캐나다 쪽 폭포는 미국 쪽 폭포에 비해 수량이 여섯 배나 많다고 한다. 캐나다 쪽 폭포에 다가서자 사람들의 탄성이 잦아졌는데, 크게 탄성이 터져서 돌아보니 폭포 주변에 낮은 높이의 무지개가 선명했다. 비웃을 입고 있었지만 이미 충분히 젖은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워보였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나이아가라 폭포는 캐나다 쪽에서 보는 것이 더 좋다고 하는데, 보고 즐기는 것이 지극히 주관적인 일이고 보면, 두 쪽 모두를 온전히 살피는 것이 좋을 듯했다. 다만, 나이아가라 폭포에 와서 캐나다 쪽 폭포를 놓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캐나다 쪽 폭포를 보기 위해서는 캐나다로 건너가게 될 것이고, 그러면 폭포만큼이나 낯선 캐나다 사람들의 매력까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호스슈에서 돌아오는 길에 물 위 작은 바위가 보였다. 그 위에는 물새들이 기진한 날개를 쉬는 듯 서 있었는데, 그 실루엣은 물새들을 더 작게 만들고 있었다. 폭포 소리에 이미 울음소리는 스러져버린 작은 물새들의 바위 옆으로 크고 작은 물결들이 오고가고 있었다.

폭포에서는 떨어지는 높이가 늘 솟구쳐 오르는 높이보다 크다. 떨어지는 높이가 크면 클수록 그것을 차고 오르는 높이도 큰 것이 또한 변함없는 이치다. 가늠할 수 없는 양과 거역하기 힘든 속도로 밀고 와서 문득 떨어져버리는 나이아가라 폭포에서는 물비린내가 났다.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에게서만 맡을 수 있는 산 것들의 냄새, 살아야 한다거나 살고 싶다거나 하는 의지 이전의 그저 살아있는 것들의 냄새! 그 살아있는 것들의 냄새가 천지 사방에 가득 찰 때쯤, 배는 출발한 곳에 다시 돌아와 있었다.

폭포를 돌아볼 때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더운 날이었다. 비옷을 벗고 나니 시원했다, 잠시 동안만. 나이아가라 폭포 기념품점에 들러서 아내는 냉장고 자석을, 아이들은 엽서를 구입했다. 나이아가라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꿈틀대는 장면에 압도된 가족들은 야경을 보고 숙소로 가자고 했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저녁 9시에 조명이 들어오니 꼼짝없이 9시까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이아가라 폭포 인근 상점에서 발견한 아이디어 상품들

근처에는 선물가게가 줄지어 있었다. 미국과는 다른 독특한 제품들이 보였지만 가격이 생각보다 높았다. 아이스 와인이나 메이플 시럽은 워낙 유명한 것들이고, 매장을 둘러보다 아이스하키 피큐어를 하나 구입했다. 아이스하키 복장과 각 분야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복장을 결합하여 만든 캐릭터가 재미있었다. 내가 구입한 것은 소방관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가게는 아이디어 상품을 판매하는 가게였다. 생활 속의 작은 아이디어들을 상품화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무엇보다 그런 상품이 개발되고 판매되는 문화가 부러웠다. 세상을 뒤집을만한 즐거움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소소하게 즐길 수 있는 것들, 잊고 있다가 돌아보면 웃을 수 있는 장난스러운 소품들, 보면서 무릎을 탁 칠 수 있는 이 시대 콜럼버스의 달걀같은 것들, 생활 속의 작은 불편을 해소시켜주는 소품들이 끊임없이 진열되어 있었다. 사실 그 매장의 대표상품은 왁스로 자신의 손 모양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 조악한 색깔의 투박한 모형보다 아이디어 상품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길거리에서 만난 모래를 이용해 투명한 호리병 안에 그림을 그리는 노인은 쉬지 않고 떠들면서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시골 장터에서 만났던 혁필 화가를 보는 듯 쉬지 않고 떠들면서 손님과 이야기하고, 작품을 만들면서 판매하기도 했다. 투명한 호리병 안의 그림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지만, 만드는 과정만은 넋을 빼앗길 만큼 신기했다. 깔때기로 필요한 색깔의 모래를 원하는 위치에 넣고 얇은 봉을 가지고 모양을 만드는 것만도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일일 텐데 끊임없이 손님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그 작업을 하는 것을 보면 대단한 집중력의 소유자이거나 아주 오랫동안 그 일을 해서 숙련된 것이 분명했다. 만드는 과정에서 그렇게 신기했던 것이 막상 완성되고 나면 소박하기만 했다. 과정을 즐기라더니, 이 작업이 그랬다.

모래 그림을 그리는 노인

근처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허쉬 초콜릿 전문매장이 있었다. 아이들은 허쉬 초콜릿에서 벌레가 나왔다는 기사에 경악하면서 마구 성토하면서도 허쉬 초콜릿 전문매장은 꼭 봐야한단다. 초콜릿의 달콤한 유혹이 벌레를 넘어선 모양이다. 미국에 와서 본 전문 매장(코카콜라, M&M's, 기라델리 초콜릿, 버드와이저 등)이 보여주는 매력과 소구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전문매장은 관련 상품 개발, 브랜드 이미지 및 고객 충성도 제고, 미래 고객 확보 등의 가시적인 성과뿐만 아니라 상품 자체를 하나의 문화로 만드는 첨병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매장에서는 물건을 사지 않을 수 없는 구조였지만, 사지 않고 매장만 둘러보더라도 허쉬 초콜릿에 대한 충성도는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티켓센터의 모습

이곳 오락실은 독특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여기서는 고득점을 성취하면 기계가 표를 발행하는데, 그 표를 티켓 기계에 넣으면 선물과 교환할 수 있는 엄청난 양의 티켓이 발매되는 방식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 티켓의 양이 득점수와 비례하기 때문에, 고득점을 획득했을 경우에 한 아름 티켓을 안고 가야했다. 당연히 티켓이 출력되어 나오는 시간도 상당해서,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왜 저렇게 해야 하나 하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아마 고득점을 얻고 나서 그 성취감을 티켓이 출력되어 나올 때까지 즐기라는 모양이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수레 가득 지폐를 싣고 가서 감자 한 자루와 바꾸었다는 1차 세계 대전 직후의 독일이 생각나는 장면이었다. 우리와 달라서 즐거운 장면이었다.

돌아다니면서 보니 매장마다 같은 상품이라도 가격이 모두 다르고, 미국 달러를 내면 수수료 10%를 요구하는 곳도 있었다. 직불카드로 계산을 해도 캐나다 달러 환율로 계산하여 추가요금이 붙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환율 시세를 따져보니 캐나다 달러가 미국 달러보다 비쌌고, 아무리 이웃 국가지만 환전 수수료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거스름돈은 캐나다 달러로 주면서, 그 때에는 거의 1:1로 계산을 해주는 것을 보니 재미있었다.

우리는 아주 천천히 아홉 시를 기다렸다. 아홉 시 무렵이 되자 사람들이 하나 둘씩 폭포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서서히 폭포에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기대만큼 압도적이지는 못했다. 사람들 이야기로는 근처의 타워에 올라가서 찍으면 정말 좋다는데, 짐 때문에 삼각대로 챙겨오지 않은 상황에서 그곳에서 야간촬영이 가능하다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냥 이곳에서 보고 찍을 수 있을 정도만 찍기로 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나이아가라 폭포는 빛도 빛이었지만 그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낮 동안 숨죽여 있었던 듯, 자기가 낼 수 있는 속울음의 끝이라도 보여주겠다는 듯, 어둠을 타고 들려오는 폭포 소리가 점점 커져오는 것 같았다. 그 소리를 들으며,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인지, 아름다워서 살아남은 것들인지는 몰라도 가슴 저 밑바닥에서 뜨겁게 차고 오르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살아있는 것들과 관계된 것이리다.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의 밤이었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야경()과 주변의 야경()

클리블랜드에서 나이아가라로 한숨에 달려와서, 캐나다 국경을 넘고 부지런히 돌아본 하루였다. 캐나다는 캐나다였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폭포를 제외하고는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내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인지 아니면 싸구려 유원지 같은 느낌이 너무 강했던 것인지 몰라도, 조금 실망스러운 풍경이었다. 폭포만 볼 수 있었다면 더 오래 기억에 남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렇다고 폭포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만다가 일러주는 대로 차를 몰아 숙소로 갔다. 마실 물이 떨어져서 근처 마트에서 물 한 박스를 또 샀다. 캐나다의 밤도 어둡기는 매 한 가지였다. 사만다에 의지해 달려와 보니 숙소였다. 이미 열한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체크인을 하는데 체크인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직원 한 명이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며, 체크인 과정을 신속하게 진행하고, 친절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다. 미국 직원들의 느리고 부정확한 일처리에 늘 답답했는데, 캐나다 직원의 일처리 속도는 가히 감동적인 수준이었다. 다만, 일처리 속도가 빠르다보니 말도 빨라서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유진이가 옆에서 알아듣고 무사히 체크인을 마칠 수 있었다. 숙소의 직원뿐만 아니라 낮에 만난 캐나다의 매장 직원들은 미국 직원들에 비하여 젊고 예쁘고 단정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미국 서부의 대형할인매장이나 식당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년 이상이어서, 도대체 미국 젊은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느냐고 아내와 농담을 했었는데, 캐나다에서는 젊은이들이 대부분 그 일을 하고 있었다. 노동 인구의 연령으로 사회의 젊음을 측정하는 지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와서 보니 캐나다의 노동 인구가 미국 서부의 그들보다 젊은 것은 분명했다.

숙소는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이었고 깨끗했다. 아침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 말고는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복도에는 열 한 시가 넘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영복을 입고 1층 수영장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곳 사람들은 정말 열과 성을 다해서 즐기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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