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아름다운 것들

88일 클리블랜드나이아가라 폭포(캐나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어이 클리블랜드는 괄호 속에 묶으려는 듯, 아침을 먹자마자 우리는 급하게 서둘러 클리블랜드를 떠났다. 클리블랜드에서 나이아가라 폭포까지 229마일(366)이니 네 시간이면 족할 거리였다. 횡단여행을 하다 보니 이제 네 시간 정도의 거리는 아주 행복하게 즐길만한 거리였고, 심지어 그 다음 일정을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 있는 거리였다. 심리적인 거리는 언제든 물리적인 거리를 넘어선다.

사람 사는 동네니 클리블랜드라고 왜 볼 것이 없었을까마는 볼 것 많은 시카고와 나이아가라 폭포 사이의 일정이다 보니 마음은 이미 너무 늦게 도착하거나 너무 이르게 떠나고 있었다. 일찍 출발을 서두른 덕분에 우리는 점심도 먹기 전에 미국-캐나다 국경을 넘고 있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오후를 온전히 보내고 야경까지 돌아본 후에 내일 아침 일찍 보스턴으로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조금 지체되면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넘어오는 국경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고 들었기 때문에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 위해서는 오늘 나이아가라 폭포에서의 일정을 마쳐야했다. 더구나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보스턴까지의 거리가 오늘 달린 거리의 족히 두 배는 되었기 때문에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클리블랜드를 떠나오는 길에 우연히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구장인 프로그레시브 필드 (Progressive Field)를 볼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미국에 오면서부터 추신수 선수와는 묘한 인연이 계속되고 있었다. 인천공항에서 유진이가 추가 보완검색을 받느라 탑승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추신수 선수 가족이 우리 가족 옆을 지나가서 같은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었다. 그 많은 탑승자들 중에서 무작위로 서너 명을 뽑아서 하는 추가 보완검색에 하필 유진이가 지명되어 지체된 것부터, 덕분에 추신수 선수를 볼 수 있었던 것도 묘한 우연이었다. 재미있었던 것은 그날 유진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 양말을 신고 있었는데, 추가 보완검색을 하는 과정에서 신을 벗게 하는 바람에 아이가 적잖이 당황하고 있을 때, 추신수 선수가 지나갔다. 추가 보완검색을 마치고 나온 유진이에게 추신수 선수가 지나갔다고 하니, 아이는 태연히 공항에서 이미 보았는데, 그가 박태환 선수인 줄 알았단다. 그 특유의 호쾌한 타격과 빨랫줄 송구를 좋아하는데, 그와 같은 비행기를 탄 것은 미국행의 좋은 징조가 아니었을까?

LA에인절스 구장에 온 추신수 선수 응원 문구.

4월 중순쯤인가 코스트코에서 LA 에인절스 스타디움 입장 티켓을 세일해서 팔고 있었다. 집에 와서 경기 스케줄을 확인하니 마침 5월초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경기가 있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LA 에인절스의 이번 시즌 마지막 경기였다. 더구나 LA 에인절스에는 행크 콩고(한국명 최현)까지 뛰고 있으니 더욱 신나는 일이었다. 티켓을 구입하고 에너하임의 LA 에인절스 구장까지 한달음에 달려가서 당일 입장권으로 교환을 했다. 홈팀인 LA에인절스쪽에서 응원할 것인지, 방문팀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쪽에서 응원할 것인지 입장권으로 교환하면서 고민을 했었는데, 유진이가 단호하게 LA 에인절스에서 응원해야 한단다. 그것이 이 지역에 사는 도리란다.

두 선수를 경기장에서 볼 날만 고대하고 있었는데, 샌프란시스코 여행을 다녀오고 나니 추신수 선수가 음주운전으로 재판을 받아야 해서 그날 경기에 출장할 수 없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실망하고 응원 플래카드도 만들지 않고 있었는데, 경기가 있던 당일 인터넷에서 보니 재판이 연기되어 추신수 선수가 출전한다는 것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유진이와 급하게 응원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추신수 선수만 응원하기 아쉬워 뒤편에는 영어로 행크 콩고의 응원 문구를 넣었다. 작은 플래카드였으니 반대편에 있던 추신수 선수는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메이저리그 구장에서는 특정 선수의 이름이 적힘 플래카드를 들고 응원하는 것은 불법이란다. 응원문구를 한글로 적어서 그랬는지 우리는 별문제 없이 응원할 수 있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프로리그에서 수많은 차별을 극복하면서 우뚝 선 추신수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의 벅찬 감동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음주운전 파문을 잘 알고 있는 LA 에인절스 관중들이 노골적으로 야유하는 가운데서도 당당하게 타격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쓰럽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한 복합적인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그날 경기를 보는 내내 여러 가지 생각이 오고 갔다. 매일 승부의 세계를 건너고 있는 추신수 선수의 스트레스나 내면의 갈증은 보고 싶은 모습만 보기를 원하는 우리가 알 도리가 없는 부분이겠지만, 늘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절박함과 가파름만은 느낄 수 있었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은 늘 그 실천이 가파를 수밖에 없다. 한 발 제겨디딜 곳 없는 승부의 세계, 모든 것이 낯설고 노골적인 차별이 존재하는 공간, 최고가 되지 않으면 다음이 없는 상황, 그 가운데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하는 사람이 겪게 될 그 절박함은 막연한 예상만으로도 숨 막히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황을,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있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대부분 사람들은 뉴욕 여행과 연계하여 나이아가라 폭포를 찾는다는데, 아는 사람들은 오히려 모두 미국 쪽 보다는 캐나다 쪽에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나중에 일러주었다. 그렇다고 정보에 둔감한 내가 그것을 알고 캐나다 쪽에 숙소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숙소를 예약하는 과정에서 가격대비 좋은 숙소를 찾다보니 환불이 안 되는 조건이지만 맞춤한 것이 있어서 예약했다. 예약을 하고 주소를 정리하다가 보니 숙소는 캐나다에 있었다. 환불이 안 되니 다른 도리가 없었다. 더구나 캐나다를 다녀오려면 UCI 인터내셔널 센터에서 방문허가를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까지 있었다. 아둔하면 침착하기라도 했어야 했는데, 명민하지도 못하고 덜렁대기까지 하다가 얼떨결에 캐나다 쪽으로 오게 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실수가 오히려 현명한 선택이 되었으니 변방 늙은이의 말(塞翁之馬)을 어디서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사는 일이다.

미국에서 캐나다로 입국할 때 입국심사는 까다롭지 않았다. 여권, 미국 비자, DS2019, I-94서류만 의례적으로 확인하며, 어디서 왔는지, 얼마나 머무는지, 어디에 있을 것인지 정도를 묻는 수준이었다. 다만 차 한 대당 3달러의 수수료를 내야 했다. 어떤 명목으로 내는지 알지도 못하고서 수수료를 내려니 금액을 떠나서 조금 억울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나마 입국심사를 하는 붉은 제복의 청년이 친절한 것이 위로가 되었다.

문득 미국에 입국할 때 LA공항에서 가족들과 두 시간을 기다렸던 생각이 났다. 무엇이 그렇게 무서운지 불필요한 것까지 챙기면서도 무성의하고 더디기만 했던 미국 입국심사는 마이클 무어가 <화씨 9/11>(Fahrenheit 9/11, 2004)에서 보여주었던 과장된 공포의 단면이었다. 입국심사대를 통과하는 순간 반미를 넘어 혐미(嫌美)에 빠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불편하고 불쾌했지만 어쩔 수도 없었던 체험이었다. 두려움은 미혹을 부르고, 미혹은 다시 더 큰 두려움을 부르는 공포의 환()이 끊임없이 이어져,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르는 두려움만 남은 상태였다. 그것에 비하면 캐나다 국경은 입국환영행사장에 가까웠다.

나이아가라 폭포 주변의 맥락 없고 소박한 거리

시카고에서 그토록 정신 차리지 못하던 사만다가 오히려 캐나다에서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국경을 통과해서 사만다가 일러주는 대로 따라가 보니 소박한 거리가 나이아가라 폭포로 이어져 있었다. 주차할 곳을 찾으면서 보니 주변 거리가 참 맥락 없었다. 나이아가라 폭포와 카지노, 리플리의 믿거나 말거나(Ripley's Believe It Or Not!), 기네스 세계 기록, 왁스 뮤지엄 등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소박하거나 조악하다는 느낌을 넘어서기 어려운 놀이 시설과 식당들이 줄지어 나이아가라 폭포 쪽으로 향해 있었다.

주차를 하려고보니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까울수록 주차비가 비쌌는데, 하루 종일 7달러12달러15달러였고, 6시 이후에는 5달러였다. 시카고에 비하면 그리 비싼 금액이 아니었고, 조금 먼 주차장이라고 해도 나이아가라 폭포까지는 걸어서 채 10분이 걸리지 않는 거리였으니 먼 곳에 주차하고 거리를 구경하며 폭포까지 걸어 내려갔다.

나이아가라 폭포 관광은 다양한 패키지가 있었지만, 우리는 안개 아가씨호(Maid of the Mist)를 타고 폭포만 체험(어른 14.60달러, 어린이 8.94달러에 세금 13% 추가)하고, 남는 시간에 폭포 주변과 폭포 외곽을 살펴보기로 했다. 먼저 안개 아가씨호 예약을 하고, 밥을 먹어야 했다.

밥은 예외 없이 규칙적이고, 몸과 마음의 상태와 무관하게 진솔했다. 시간이 지나면 배가 고파진다는 예외 없는 규칙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 하지 않던 반복되고 있었다. 더구나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밥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리 부모님도 우리를 그렇게 키우셨다. 아무리 살림이 어려워도 밥은 늘 푸지고 넉넉했다. 더구나 끼니를 거르는 일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내게 가족은 늘 밥과 상관되어 있다. 언제나 저녁 밥 짓는 냄새는 눈물겹다. 그 눈물은 슬픔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따듯함이거나 위로에 가까운 것이다. 하루의 힘겨운 일과를 마치고 기진해서 돌아와 온 가족이 둘러앉아서 더 먹으라는 사랑스런 성화와 함께 나누는 따듯한 밥과 국의 위로는 밥이지만 늘 밥 그 이상이다.

여행을 하면서 아침은 대부분 숙소에서 제공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먹고, 점심은 이동 중에 패스트푸드로, 저녁은 햇반, 카레, 짜장, 컵라면 등을 이용하거나 몇 차례 현지식으로 해결하고는 했다. 밥을 벌어오는 가장으로서 미안한 일이었다. 모든 것이 힘들어도 밥이 만족스러우면, 그것이 힘이고 위안이 될 텐데, 밥이 부실하니 가장으로서 미안할 뿐이었다. 여행이 진행될수록 가족 모두 아침의 간편식에는 적응이 되어갔지만, 패스트푸드와 햇반에 카레는 서서히 물려가고 있었다. 옐로우스톤 여행 때까지만 해도 어쭙잖은 현지식보다 햇반에 카레가 제일 맛있다고들 했었는데, 여행이 길어지면서 입맛은 벌써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나서니 딱히 마땅한 곳이 없다. 이번 여행에서는 스테이크를 먹은 적이 없어서 스테이크 전문점에 갔다. 집에 있었다면 벌써 몇 번은 수영장 옆에서 바비큐를 해주었을 것이다. 한국에 비해 식료품 값이 무척 저렴한 얼바인에서는 특히 소고기는 가격 대비 감동이었다. 주말에 느지막이 일어나서 아이들 데리고 풀장에 나가 바비큐를 해서 먹고, 마지막으로 삼겹살을 잘게 썰어 넣은 김치 볶음밥을 해주면 하루가 행복했다. 그렇게 먹고 풀장 옆에 누워서 썬텐을 하면서 가볍게 맥주 한 잔을 하는 것은 더할 수 없는 여유였다.

조금 걸어가다 보니 Kelsey's라는 식당이 있었는데 그중 깔끔하고 가장 식당스러워 보였다. 그곳에서 스테이크, 키즈 메뉴 2, 스테이크 샌드위치, 캐나디안 맥주를 시켰다. 나온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으면서 우리는 스테이크는 어디를 가나 신뢰할만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팁을 포함해서 78달러의 호사였다. 호사는 대부분 대가를 치르는 것이어서 덕분에 저녁은 다시 햇반에 3분 카레를 먹어야 했다.


안개 아가씨호 티켓판매소(),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안개 아가씨호(), 레인보우 브리지()

안개 아가씨호를 타기 위해 서서 기다리는 줄이 평소보다는 짧다고 했다. 줄을 서서 선착장까지 내려가는 길이 폭포 쪽으로 트여 있어서 기다리며 바라보는 폭포와 그것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르는 말들이 사람 수만큼이나 많이 오가고 있었다. 안개 아가씨호라는 배 이름이 참 매력적이었다. 배의 크기나 용도와 상관없이 크고 강한 이름을 지은 배들을 보면 이름만 둥둥 떠 있는 것 같은데, 안개 아가씨호는 작고 소박하면서 그 배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주는 이름이었다. 뱃머리에 쓰여 있는 Maid of the Mist를 보니, M자가 주는 단단한 느낌까지 더해주고 있었다.

비옷을 입은 아내와 아이들. 효진이는 얼굴 젖는 것을 싫어해서 얼굴도 가렸다.

배를 탄 사람들을 보니 모두 코발트색 비옷을 입고 있었다. 비옷이라고는 하지만 얼핏 보면, 1970년대 많이 쓰던 파란색 비닐우산이 연상되는 비옷이었다. 비옷의 색깔도 색깔이었지만 비닐의 두께가 아무리 넉넉하게 봐줘도 비닐우산이었다. 우비를 입고 폭포를 돌아보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내와 나는 우비를 그냥 주는 것일까, 구입하는 것일까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아내는 그냥 주는 것이다, 나는 이곳에 공짜가 어디 있겠느냐, 아이들의 동의를 구해가며 갈린 의견을 다잡아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우리도 배에 오를 차례가 되었을 때, 한 청년이 커다란 비닐 통에 비옷을 잔뜩 쌓아놓고 서서 웃으면서 비옷을 나눠 주고 있었다. 비옷을 받으며 아내와 아이들은 거 봐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아내는 늘 옳다.

비옷을 펼치어 입고 보니 모두가 똑같아 보였다. 우비는 덩치 큰 이곳 사람들의 크기에 맞추었는지 효진이에게는 너무 커서 앞쪽을 한번 묶어주었다. 안개 아가씨호는 2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배에 오르자마자 좀 더 좋은 자리에서 보겠다고 사람들은 모두 2층 난간으로 몰렸다. 배는 지체 없이 떠났다. 멀리 레인보우 브리지(Rainbow Bridge)가 보였다. 내일은 아마도 저 다리를 건너야 하리라. 몇 마디 안전 수칙에 대한 안내 방송이 끝나갈 무렵, 배는 미국 쪽 폭포 앞에 있었다.

나이아가라 폭포

미국 쪽 폭포는 낙차가 56m, 너비가 320m라는데, 보여주는 모습도 그랬지만 그 엄청난 소리만으로도 넉넉한 압도였다. 폭포 전체를 조망하면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몸이 젖을 수 있을 정도의 위치에서 배는 멈추는듯하더니 이내 뱃머리를 돌려서 캐나다 쪽 폭포로 향했다. 캐나다 쪽 폭포를 보고 오는 다른 배가 옆을 스쳐가자 모두들 유쾌한 함성을 질렀다. 캐나다 쪽 폭포는 낙차 54m, 너비가 675m인데 말발굽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호스슈(Horse Shoes)라고도 불린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본류라고 볼 수 있는 캐나다 쪽 폭포는 미국 쪽 폭포에 비해 수량이 여섯 배나 많다고 한다. 캐나다 쪽 폭포에 다가서자 사람들의 탄성이 잦아졌는데, 크게 탄성이 터져서 돌아보니 폭포 주변에 낮은 높이의 무지개가 선명했다. 비웃을 입고 있었지만 이미 충분히 젖은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워보였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나이아가라 폭포는 캐나다 쪽에서 보는 것이 더 좋다고 하는데, 보고 즐기는 것이 지극히 주관적인 일이고 보면, 두 쪽 모두를 온전히 살피는 것이 좋을 듯했다. 다만, 나이아가라 폭포에 와서 캐나다 쪽 폭포를 놓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캐나다 쪽 폭포를 보기 위해서는 캐나다로 건너가게 될 것이고, 그러면 폭포만큼이나 낯선 캐나다 사람들의 매력까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호스슈에서 돌아오는 길에 물 위 작은 바위가 보였다. 그 위에는 물새들이 기진한 날개를 쉬는 듯 서 있었는데, 그 실루엣은 물새들을 더 작게 만들고 있었다. 폭포 소리에 이미 울음소리는 스러져버린 작은 물새들의 바위 옆으로 크고 작은 물결들이 오고가고 있었다.

폭포에서는 떨어지는 높이가 늘 솟구쳐 오르는 높이보다 크다. 떨어지는 높이가 크면 클수록 그것을 차고 오르는 높이도 큰 것이 또한 변함없는 이치다. 가늠할 수 없는 양과 거역하기 힘든 속도로 밀고 와서 문득 떨어져버리는 나이아가라 폭포에서는 물비린내가 났다.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에게서만 맡을 수 있는 산 것들의 냄새, 살아야 한다거나 살고 싶다거나 하는 의지 이전의 그저 살아있는 것들의 냄새! 그 살아있는 것들의 냄새가 천지 사방에 가득 찰 때쯤, 배는 출발한 곳에 다시 돌아와 있었다.

폭포를 돌아볼 때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더운 날이었다. 비옷을 벗고 나니 시원했다, 잠시 동안만. 나이아가라 폭포 기념품점에 들러서 아내는 냉장고 자석을, 아이들은 엽서를 구입했다. 나이아가라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꿈틀대는 장면에 압도된 가족들은 야경을 보고 숙소로 가자고 했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저녁 9시에 조명이 들어오니 꼼짝없이 9시까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이아가라 폭포 인근 상점에서 발견한 아이디어 상품들

근처에는 선물가게가 줄지어 있었다. 미국과는 다른 독특한 제품들이 보였지만 가격이 생각보다 높았다. 아이스 와인이나 메이플 시럽은 워낙 유명한 것들이고, 매장을 둘러보다 아이스하키 피큐어를 하나 구입했다. 아이스하키 복장과 각 분야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복장을 결합하여 만든 캐릭터가 재미있었다. 내가 구입한 것은 소방관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가게는 아이디어 상품을 판매하는 가게였다. 생활 속의 작은 아이디어들을 상품화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무엇보다 그런 상품이 개발되고 판매되는 문화가 부러웠다. 세상을 뒤집을만한 즐거움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소소하게 즐길 수 있는 것들, 잊고 있다가 돌아보면 웃을 수 있는 장난스러운 소품들, 보면서 무릎을 탁 칠 수 있는 이 시대 콜럼버스의 달걀같은 것들, 생활 속의 작은 불편을 해소시켜주는 소품들이 끊임없이 진열되어 있었다. 사실 그 매장의 대표상품은 왁스로 자신의 손 모양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 조악한 색깔의 투박한 모형보다 아이디어 상품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길거리에서 만난 모래를 이용해 투명한 호리병 안에 그림을 그리는 노인은 쉬지 않고 떠들면서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시골 장터에서 만났던 혁필 화가를 보는 듯 쉬지 않고 떠들면서 손님과 이야기하고, 작품을 만들면서 판매하기도 했다. 투명한 호리병 안의 그림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지만, 만드는 과정만은 넋을 빼앗길 만큼 신기했다. 깔때기로 필요한 색깔의 모래를 원하는 위치에 넣고 얇은 봉을 가지고 모양을 만드는 것만도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일일 텐데 끊임없이 손님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그 작업을 하는 것을 보면 대단한 집중력의 소유자이거나 아주 오랫동안 그 일을 해서 숙련된 것이 분명했다. 만드는 과정에서 그렇게 신기했던 것이 막상 완성되고 나면 소박하기만 했다. 과정을 즐기라더니, 이 작업이 그랬다.

모래 그림을 그리는 노인

근처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허쉬 초콜릿 전문매장이 있었다. 아이들은 허쉬 초콜릿에서 벌레가 나왔다는 기사에 경악하면서 마구 성토하면서도 허쉬 초콜릿 전문매장은 꼭 봐야한단다. 초콜릿의 달콤한 유혹이 벌레를 넘어선 모양이다. 미국에 와서 본 전문 매장(코카콜라, M&M's, 기라델리 초콜릿, 버드와이저 등)이 보여주는 매력과 소구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전문매장은 관련 상품 개발, 브랜드 이미지 및 고객 충성도 제고, 미래 고객 확보 등의 가시적인 성과뿐만 아니라 상품 자체를 하나의 문화로 만드는 첨병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매장에서는 물건을 사지 않을 수 없는 구조였지만, 사지 않고 매장만 둘러보더라도 허쉬 초콜릿에 대한 충성도는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티켓센터의 모습

이곳 오락실은 독특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여기서는 고득점을 성취하면 기계가 표를 발행하는데, 그 표를 티켓 기계에 넣으면 선물과 교환할 수 있는 엄청난 양의 티켓이 발매되는 방식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 티켓의 양이 득점수와 비례하기 때문에, 고득점을 획득했을 경우에 한 아름 티켓을 안고 가야했다. 당연히 티켓이 출력되어 나오는 시간도 상당해서,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왜 저렇게 해야 하나 하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아마 고득점을 얻고 나서 그 성취감을 티켓이 출력되어 나올 때까지 즐기라는 모양이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수레 가득 지폐를 싣고 가서 감자 한 자루와 바꾸었다는 1차 세계 대전 직후의 독일이 생각나는 장면이었다. 우리와 달라서 즐거운 장면이었다.

돌아다니면서 보니 매장마다 같은 상품이라도 가격이 모두 다르고, 미국 달러를 내면 수수료 10%를 요구하는 곳도 있었다. 직불카드로 계산을 해도 캐나다 달러 환율로 계산하여 추가요금이 붙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환율 시세를 따져보니 캐나다 달러가 미국 달러보다 비쌌고, 아무리 이웃 국가지만 환전 수수료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거스름돈은 캐나다 달러로 주면서, 그 때에는 거의 1:1로 계산을 해주는 것을 보니 재미있었다.

우리는 아주 천천히 아홉 시를 기다렸다. 아홉 시 무렵이 되자 사람들이 하나 둘씩 폭포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서서히 폭포에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기대만큼 압도적이지는 못했다. 사람들 이야기로는 근처의 타워에 올라가서 찍으면 정말 좋다는데, 짐 때문에 삼각대로 챙겨오지 않은 상황에서 그곳에서 야간촬영이 가능하다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냥 이곳에서 보고 찍을 수 있을 정도만 찍기로 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나이아가라 폭포는 빛도 빛이었지만 그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낮 동안 숨죽여 있었던 듯, 자기가 낼 수 있는 속울음의 끝이라도 보여주겠다는 듯, 어둠을 타고 들려오는 폭포 소리가 점점 커져오는 것 같았다. 그 소리를 들으며,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인지, 아름다워서 살아남은 것들인지는 몰라도 가슴 저 밑바닥에서 뜨겁게 차고 오르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살아있는 것들과 관계된 것이리다.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의 밤이었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야경()과 주변의 야경()

클리블랜드에서 나이아가라로 한숨에 달려와서, 캐나다 국경을 넘고 부지런히 돌아본 하루였다. 캐나다는 캐나다였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폭포를 제외하고는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내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인지 아니면 싸구려 유원지 같은 느낌이 너무 강했던 것인지 몰라도, 조금 실망스러운 풍경이었다. 폭포만 볼 수 있었다면 더 오래 기억에 남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렇다고 폭포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만다가 일러주는 대로 차를 몰아 숙소로 갔다. 마실 물이 떨어져서 근처 마트에서 물 한 박스를 또 샀다. 캐나다의 밤도 어둡기는 매 한 가지였다. 사만다에 의지해 달려와 보니 숙소였다. 이미 열한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체크인을 하는데 체크인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직원 한 명이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며, 체크인 과정을 신속하게 진행하고, 친절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다. 미국 직원들의 느리고 부정확한 일처리에 늘 답답했는데, 캐나다 직원의 일처리 속도는 가히 감동적인 수준이었다. 다만, 일처리 속도가 빠르다보니 말도 빨라서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유진이가 옆에서 알아듣고 무사히 체크인을 마칠 수 있었다. 숙소의 직원뿐만 아니라 낮에 만난 캐나다의 매장 직원들은 미국 직원들에 비하여 젊고 예쁘고 단정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미국 서부의 대형할인매장이나 식당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년 이상이어서, 도대체 미국 젊은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느냐고 아내와 농담을 했었는데, 캐나다에서는 젊은이들이 대부분 그 일을 하고 있었다. 노동 인구의 연령으로 사회의 젊음을 측정하는 지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와서 보니 캐나다의 노동 인구가 미국 서부의 그들보다 젊은 것은 분명했다.

숙소는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이었고 깨끗했다. 아침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 말고는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복도에는 열 한 시가 넘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영복을 입고 1층 수영장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곳 사람들은 정말 열과 성을 다해서 즐기는 사람들이다

블로그 이미지

홑섬

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