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진화의 좌표 혹은 이정

이인화, 스토리텔링 진화론해냄, 2014.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스토리텔링은 이제 더 이상 낯설거나 새로운 말이 아니다. 돌아보면 스토리텔링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한 지난 10여 년간, 그것에 대한 관심과 창작 그리고 연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도가 있었지만 스토리텔링의 개념이나 정체에 대한 수긍할만한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스토리텔링은 그것이 통용되는 문화권, 적용 분야 및 해당 장르, 구현 미디어 환경, 최종 콘텐츠의 형태 등에 따라서 상이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개념에 대한 합의나 실체에 대한 규정은 언제나 연기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은 나날이 강조되고, 그 활용 영역은 자가 증식하듯 더욱 확장되고 있으며 구체화된 전략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율배반적인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해보면 스토리텔링과 다양한 분야의 생산적 결합과 창조적 확장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고, 부정적으로 보자면 스토리텔링에 대한 소박한 이해로 인한 아전인수식 응용이 소문만 무성하게 만들고 스토리텔링 본래의 효과와 가치를 훼손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스토리텔링에 대한 상반된 평가는 그만큼의 혼란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스토리텔링에 대한 풍성한 담론을 만들어내는 중심 동력이기도 했다. 디지털 문화 환경의 도래와 문화콘텐츠의 급부상에 따라 스토리텔링은 산업적, 전략적, 실용적, 매체 친화적, 과정중심적인 특성을 드러냈으며, 이러한 특성에 부합할 수 있는 차별적인 접근과 전략을 요구하여왔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요구가 반드시 생산적인 성취나 논의의 진일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동안 스토리텔링에 대한 논의는 지극히 당위적인 요구에 머물거나, 기존의 문학 텍스트 중심의 서사론을 넘어서지 못함으로써 스토리텔링에 대한 독립적 인식이 확보되지 못했고, 군집명사인 문화콘텐츠를 집합명사로 오인함으로써 대부분 문화콘텐츠와 함께 사용하는 스토리텔링에 대한 변별적 인식을 확보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스토리텔링의 정체와 활용 그리고 효용에 대한 끊임없는 논란을 유발시켜왔다.

논란과 혼란은 모색과 선별을 낳는다. 스토리텔링 분야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동안 논의가 비록 통합적이고 거시적인 차원에서 전면적으로 전개된 것도 뚜렷한 합의를 이룬 것도 아니었지만, 지속적인 탐구를 통해서 확보된 몇몇 연구자들의 진일보한 성취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성취는 단지 이론 중심의 논문 몇 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스토리텔링이 대부분 문화콘텐츠를 통해 구현된다는 점에서 그 성취는 구체적인 전략으로 검증되었거나 가시화된 콘텐츠로 구현됨으로써 그 유효성을 스스로 증명한 것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최근 출간된 이인화의 스토리텔링 진화론은 뚜렷한 성취가 아닐 수 없다. 2000년대 초반에 이미 디지털 스토리텔링으로 스토리텔링의 시대를 선도했던 저자는 연구와 창작 그리고 개발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 활동을 통하여 스토리텔링을 탐구하고 실천해왔다. 스토리텔링 진화론은 그동안 저자가 탐구하고 창작하고 구현해온 스토리텔링의 현재적 좌표이며 부단한 전개 과정의 현재적 이정(里程)이다.

스토리텔링 진화론은 표면적으로는 책의 선전 문구처럼 서사 창작의 핵심원리에서 도구까지를 탐구함으로써 디지털 스토리텔링 창작도구인 스토리 헬퍼(Story Helper)’를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심층에는 스토리텔링의 정체와 디지털스토리텔링의 지금까지의 성취를 수렴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경계를 확장하려는 저자의 포부가 드러나 있다. 저자는 이러한 포부를 현대과학이 알아낸 서사 창작의 비밀을 살펴봄으로써 작가들에게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하려는 시도라고 원론적으로 표현하거나, “창작을 현대 과학의 논리로 재해석함으로써 이제까지 주관적 확신 또는 경험칙에 머물렀던 서사 창작의 원리를 보다 객관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라고 포괄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원론적이고 포괄적인 그의 표현에는 서사창작의 원리를 규명함으로써 신비화된 창작의 메커니즘을 객관화하겠다는 의도와 디지털 문화 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새로운 영토를 탐구하고 구현하려는 의지를 은밀하지만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다.

스토리텔링 진화론의 미덕은 서사와의 연관을 토대로 스토리텔링의 정체를 규명하고, 디지털스토리텔링으로의 다양한 전개과정을 차분하게 정리함으로써 이를 토대로 디지털 스토리텔링 창작 도구인 스토리 헬퍼의 구현 원리[각주:1], 기술, 가치 등을 설득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유기적인 연쇄를 통하여 이 세 부분의 상호 관련성을 드러내고 논리적으로 수렴한 것은 무척 돋보이는 지점이다. , 스토리텔링의 범람 속에서 누구도 섣불리 시도하지 못했던 스토리텔링의 기원, 통시적 전개과정, 디지털스토리텔링과의 관계 등을 저자는 일관된 논리 구조 위에서 간명하게 정리하고, 그 과정의 수렴을 통하여 디지털 스토리텔링 창작도구인 스토리 헬퍼 출현의 당위성과 그것이 채택하고 방법론의 논리적 정합성을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밀리언셀러의 작가이자 디지털스토리텔링 분야의 선구적인 연구자이며 개발자이기도한 저자가 이론과 실천의 균형 잡힌 시각 안에서 이것을 정리하고 있다는 점은 이 책이 지닌 또 하나의 매력이다.

스토리텔링 진화론은 총 3부로 구성되었다. 1스토리텔링의 원리는 서사의 속성, 수용, 표상, 모티프 등과 같은 이야기의 핵심 원리를 친절하게 소개하며 현대과학의 관점에서 정리하였다. 2디지털 스토리텔링에서는 문제 기반 스토리텔링, 스토리 문법 학파 등 디지털스토리텔링의 주요 이론들과 이를 토대로 만들어진 디지털 창작도구의 통시적 발전 과정을 평가한다. 테일스핀민스트럴요셉드라마티카 프로로 전개되는 디지털 창작 도구의 성과와 한계를 분석하였다. 더불어 스토리의 본래적 가치에 주목하고, 사건의 인과관계로만 담아낼 수 없는 인간과 삶 그리고 세계의 심연을 규명하려는 노력과 통찰을 어떻게 창작 도구 안으로 수렴할 것인가의 고민이 담겨있다. 3디지털 스토리텔링 창작 도구2부의 탐구를 바탕으로 개발된 스토리 헬퍼의 성과와 기술의 우수성, 드라마티카 프로에 대한 비판 등을 통하여 탈고전 서사학의 지평 속에서 스토리 헬퍼의 의의를 논의한다.

저자는 좋은 스토리의 기준으로 1) /공간적으로 멀거나 비일상성으로부터 유발되는 흥미로운 이야기, 즉 스토리의 원방성, 2) 듣는 이에게 기억되고자하는 스토리의 기억유도성, 3) 오랜 시간 전달 내용의 생명력과 유용성을 유지하는 장기지속성, 4) 체험한 사람의 흔적을 전달하는 스토리의 화자성을 지적하고, 기술의 진보와 더불어 이 네 가지 속성이 모두 구현되는 형식으로 진화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는 서사 창작을 창작자에게서 수용자를 향해 메시지가 전달되는 소통의 축과 데이터베이스로부터 인터페이스로 미학적 구조가 구현되는 재현의 축이 교직(交織)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전자는 명료한 의미전달을 추구하며, 후자는 예술적인 독창성을 추구한다고 보았다. 저자는 완전한 서사란 하나의 이야기가 완전한 소통과 완전한 재현을 달성하는 상태라고 말하며, ‘서사창작의 4영역[각주:2]을 설정하고, 1사분면이 높은 수준의 미학적 재현과 사상적 소통을 이룩한 상태라고 주장했다.


저자는 서사 창작은 1사분면에 위치할 수 있는 완전하고 아름다운 스토리를 목적으로 하지 매체와 장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소설, 영화, 게임, 애니메이션, 드라마와 같은 담화들은 고객들의 인정과 수익을 욕망한다. 그러나 담화의 원천이 되는 스토리는 시장으로부터 독립된 순수한 영역에 속해 있다. 스토리는 말하기telling, 보여주기shoeing, 작용하기interacting라는 서사 재현의 3대 양식을 실험하면서 궁극의 1사분면에 끊임없이 도전한다.(원문자 인용자, 이하 동일)”[각주:3]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재현과 소통의 축을 교직시킨 매트릭스는 서사 창작의 논리를 구현하는 탁견이다. 특히 1사분면을 높은 수준의 미학적 재현과 사상적 소통의 상태로 설정하고 부단히 도전해야 한다는 주장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다만, 문화콘텐츠를 중심으로 스토리텔링 전략과 리터러시에 중점을 두는 필자의 연구관점에서 본다면, 에서 저자가 주장한 것처럼 서사 창작이 매체와 장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과연 매체와 장르문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스토리가 존재할 수 있는지는 언뜻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또한 물론 이것도 철저하게 문화콘텐츠를 기반으로 스토리텔링의 효용과 전략에 중점을 두는 필자의 관점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에서 문화콘텐츠의 대표적인 담화가 고객의 인정과 수익을 욕망한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지만, 스토리와 담화가 하나의 유기적인 구조로 구현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스토리와 담화가 실제 이렇게 구분될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각주:4]. 린다 허천이 이야기한 서사 재현의 3대 양식은 지극히 전략적인 선택지라는 점에서 매체와 장르문법 등과 연동되어야만 한다. 물론 이러한 의문들은 저자와 필자의 스토리텔링에 대한 관심 분야와 연구가 지향하는 궁극의 차이가 빚어내는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뿐 이 책의 논의가 모순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차이는 앞서 이야기했던 바와 같이 토론과 모색의 과정으로 스토리텔링 분야의 연구 폭을 확장하고 깊이를 심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스토리텔링 진화론은 기존 서사학의 성과를 섬세하게 정리하고, 유용한 요소들을 창조적으로 결합시켜 스토리 헬퍼의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고 있다. 영화의 3816시퀀스 11씬으로 나눈 영화의 계층구조, 다섯 개의 서사명제와 시퀀스, 스토리밸류(Story Value)의 높은 위반성을 기준으로 한 205가지 모티프 분류는 스토리 헬퍼의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이론적 바탕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향후 스토리텔링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중요한 준거로서 기능하게 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러한 준거는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 교육과정에서 스토리텔링 분석론이나 창작론에 언제든 활용 가능한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스토리텔링 진화론1-3부가 각각 독립적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지닐 수 있게 구성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3부로 수렴되는 구조다. 라이트 브라더스(Write Brothers)가 개발한 드라마티카 프로(Dramatica Pro)의 기반 원리를 설명했던 멜라니 앤 필립(Melanie Anne Phillips)과 크리스 헌틀리(Chris Huntley)Dramatica-A New Theory of Story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스토리 헬퍼와 스토리텔링 진화론의 관계를 쉽게 추정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이 책이 Dramatica-A New Theory of Story그 이상의 의의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것은 드라마티카 프로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스토리텔링 진화론이 기존의 서사 이론과 디지털스토리텔링과 관련된 서사학 계보를 일관된 논리로 설명하고 있으며, 더구나 그것을 기존의 서사학 관련 연구 토대가 약한 지금 이곳에서 이뤄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설명에 따르면 실재데이터데이터베이스알고리즘콘텐츠인터페이스로 이어지는 재현 축을, 개발자가 어떤 구조의 메시지를 사용자에게 전달하는 소통의 축과 교차시키면서 5가지 기술영역들이 나타난다. 이는 저작, 축출, 시각화, 배급, 사용자의 생성스토리의 영역으로, 스토리 헬퍼는 이 가운데 저작과 추출의 두 기술 영역을 아우르는 소프트웨어. 추출기술은 기획기술은 데이터베이스로부터 적쩔한 글쓰기 소재를 추출해서 작가의 창작활동을 도와주는 기술로 캐릭터, 에피소드, 소재 등의 데이터베이스와 스토리장르별 탬플릿을 제공하여 플롯의 구성을 효율적으로 달성하도록 지원한다고 한다. 저작기술은 기획한 구상을 스토리로 집필하는 단계를 지원하는 기술로서 스토리형태 및 온톨로지를 정해주고 스토리개요의 관리를 지원하며 집필에 참고할 수 있는 스토리 모티프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한다고 한다. 이러한 스토리 헬퍼는 테일스핀민스트럴요셉드라마티카 프로로 전개되는 디지털 창작 도구의 성과와 한계를 분석한 결과 위에서 출발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스토리텔링 진화론에서 드러난 디지털 스토리텔링 창작 도구의 공과나 이것들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탈고전 서사학의 성과가 탁월한 연구자이자 개발자인 저자에 의해 성실하게 정리되고 진일보한 연구성과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이 책에서 2장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그동안 디지털스토리텔링과 관련하여 파편적으로 읽으면서 제대로 체계화되지 못한 구석들이 있었는데, 2장을 읽으면서 그것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시학에서부터 최신 디지털스토리텔링 이론에 이르는 다양한 서사 이론들의 계보와 디지털 문화 환경을 선도하는 다양한 기술들을 교직하며 설명하는 지점에서는 오랜 수련을 거친 고수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솜씨였다. 특히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개척하면서도 보다 많은 이들에게 길을 안내하기 위하여 다소 난해한 개념과 이론들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서 설명해주는 부분은 고수의 내공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었다. <더 리더>에서 여주인공 한나가 글을 깨우치는 텍스트였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과 같은 고전 문학 작품에서부터 <아라비아의 로렌스>, <추격자>, <배트맨> 등의 영화와 <섹스 앤 더 시티>, <홈랜드> 등의 드라마, <리니지> 등의 게임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하며 다양한 리터러시(literacy)를 선보이고 있다.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저자가 2장만 따로 독립시켜 다양한 서사 이론들의 계보를 조금 더 보강하고, 텍스트를 확충하여 리터러시해서 단행본으로 출간해주길 바란다. ‘지금 이곳에 소문만 무성한 스토리텔링의 현실을 고려할 때, 이러한 작업이 제대로된 스토리텔링 연구의 정초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중요한 것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며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하기서사가 아니라 서사 창작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서사는 공생의 도구라고 전제한 후, 서사 창작의 보편성과 개방성을 강조함으로써 서사 창작이 개인적 차원의 탁월성이나 생득적 재능을 지닌 선택받은 소수만의 활동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유쾌한 삶의 활동으로서 보편성과 개방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호모루덴스로서의 인간을 장조하고 창작은 가장 고차원적인 놀이의 형식이라고 전제한 후 적극적인 향유와 개조가 자유로운 디지털 문화환경의 특성을 부각시켰다. 이런 맥락에서 스토리텔링은 일종의 놀이이며 그것을 좀더 적극적인 형태로 가능하게 하는 도구로서 디지털 스토리텔링 창작 도구를 제시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누구나 작가가 되어 스토리를 창작할 수 있으며 그가 창작하는 스토리는 완전하고 최종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필자는 이 지점에서 저자의 주장과는 다소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야기가 갈등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세상의 드러나지 않은 질서를 탐구하고, 타자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기반으로 욕망을 구현하는 허구적 행위라면, 그것은 지금 이곳이 아닌 것을 꿈꾸는 고도의 지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고도의 지적인 행위가 단지 이야기 구성 능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것은 지금 이곳이 아닌 것을 꿈꾸는 과정에서 지향해야할 가치나 그것을 구성해내는 구조, 구조를 구성하는 체계의 선별과 선별된 내용의 연쇄를 추동하는 욕망 등의 구조가 고도의 지적인 능력을 요구한다는 의미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모든 인간은 작가라는 저자의 주장은 디지털 문화 환경의 특성을 십분 이해한다해도 스토리 헬퍼와 연관된 다소 당위적인 요구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작가가 될 수 있지만 누구나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관점에서 출발해야하는 것은 아닐까? 더구나 스토리 헬퍼와 상관된 스토리텔링 역시 문화콘텐츠의 중심 구성 요소로서 의미를 갖는다고 할 때, 그 논의는 문화콘텐츠 구현이라는 전제 하에서 그 효용과 가치가 창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스토리텔링에 대한 논의는 고차원적인 놀이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콘텐츠 생산자로서 전문가에게 맞춰져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남는다. 이 문제는 스토리텔링의 효용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저자와 차가운 맥주를 나눠 마시며 뜨겁게 토론해봐야 할 부분일 뿐이다.

연구자로서 누군가의 연구결과나 저서를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온전히 자신만의 힘으로 문제를 도출하고 고민하여 해결책을 모색하는 과정을 연구라고 한다면, 그것은 본시 지독히도 외롭고 지난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외로운 길에 앞서서 환히 불 밝혀주는 신뢰할만한 연구자를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반갑고 신나는 일이겠는가? 스토리텔링 진화론을 읽는 일은 무척 기쁜 것이었지만 그만큼 더디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 언급된 참고문헌 중 놓치고 있는 것들을 찾고, 짧은 것들은 함께 읽어가며 때론 내 연구물들과 비교해 가면서 진행된 까닭이다. 마치 성긴 그물을 촘촘하게 메워가듯이 즐겁게 읽어갔다. 이 글을 읽는 모두가 내공 깊은 이 책을 통해서 행복한 책읽기의 즐거움을 체험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인문콘텐츠》 2014. 33호

  1. 스토리 헬퍼(Story Helper)는 2010년부터 엔씨소프트문화재단과 이화여자대학교 디지털스토리텔링 연구소가 3년간 공동 개발한 국내 최초의 디지털 스토리텔링 창작 지원도구다. 연 인원 100여명의 전공자들이 2만 4,000여 편의 영화와 애니메이션 중 1,406편을 선정하고 여기서 약 11만 6,000여 개의 시퀀스를 추출하여 데이터베이스를 만든 소프트웨어가 스토리 헬퍼다. [본문으로]
  2. 이인화, 《스토리텔링 진화론》, 해냄, 2014, 35쪽. [본문으로]
  3. 이인화, 위의 책, 37쪽. [본문으로]
  4. 저자는 같은 책 286쪽에서 “스토리는 언제 어디서나 담론화된 구조물로 존재했다. 스토리와 담화의 구분은 개념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 검증되지는 않는다. 절대로 담화가 아닌 순수한 스토리라는 것은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관념에 불과”하다는 바바라 헤른스테인 스미스의 주장을 지지하거나 “스토리는 담화가 수사학적으로 제어하는 서사 정보를 독자가 추론하는 과정에서 생긴 결과물”이라고 주장하며 채트먼의 모델을 역전시킨 리처드 월시의 견해에 주목하며, 서사 창작이 반드시 스토리에서 담화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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