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천콘텐츠의 보고, 그래픽노블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2006년 74억 달러에 픽사를 합병한 디즈니는 2009년 마블 코믹스를 40억 달러에 인수한다. 전자가 새로움에 대한 투자라면 후자는 익숙함에 대한 기대다. 문화콘텐츠 시장에서 새로움과 익숙함의 이율배반적인 요구, 특히 익숙함에 대한 요구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익숙한 원작을 활용해 새로움을 구현한 영화의 연속적인 성공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구축함으로써 마블은 원천콘텐츠의 화수분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마음껏 올릴 수 있었다. 이미 영화 판권을 판 대표적인 작품들을 제외하고도 마블 코믹스가 디즈니에 넘겨줄 수 있는 캐릭터는 5000여개에 달했다. 스토리에서 강점을 보이는 DC코믹스에 비해 캐릭터에서 압도적인 마블코믹스의 5000여개 캐릭터는 곧 그 이상의 영화화 가능성을 의미한다.
워너브라더스에 편입된 DC코믹스나 디즈니에 인수된 마블 코믹스는 미국 만화 시장을 이끌어온 두 축이다. 워너브라더스와 디즈니는 거금을 들여 왜 이들을 사들여야했을까? 대표적인 3H 산업(High-cost, High-risk, High-return)인 영화에서 전환(adaptation)이나 프랜차이즈 필름(franchise film)화는 대표적인 리스크 헷지 전략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환과 프랜차이즈 필름의 출발은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고 향후 지속적인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는 원천콘텐츠의 확보인데, DC코믹스와 마블코믹스는 이미 수천종의 그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회사가 가지고 있는 원천콘텐츠가 바로 그래픽노블(Graphic Novel)이다.
그래픽노블은 1930년대 이후 이슈(issue)단위로 연속되는 슈퍼히어로 중심의 연재물 포맷의 코믹북을 주제의 심화와 내러티브의 완결로 차별화하면서 1960년대 이후 등장한 것이다. 따라서 그래픽노블은 코믹북과의 대타적(對他的)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래픽노블은 독립된 작품으로서 차별적 가치를 확보하기 위해서 1) 완성도 높은 내러티브 구조와 완결성을 전제로 2) 유니크한 작화를 바탕으로 작가주의적 아우라 확보하고 3) 보다 성숙하고 다양한 독자를 대상으로 4) 사회적 문제는 물론 개인의 내면에 대한 천착을 통하여 보편적 공감과 테마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구현한다.
이와 같은 그래픽노블의 특성은 독립된 장르로서 충분한 의미를 만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거점콘텐츠로 전환할 수 있는 강력한 매력이 된다. 무엇보다 ‘작품 단위의 밀도와 완성도를 확보한 내러티브’와 ‘차별화된 영상 연출이 가능한 유니크한 작화’는 거점콘텐츠로 전환하기 용이할 뿐만 아니라 독립적인 콘텐츠로서 향유하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요소다. 이 말은 초기 코믹스처럼 가루비누 같은 세제나 껌을 팔기위한 프로모션 툴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 있는 문화행위로서 그래픽노블의 위상을 말해주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문화는 잉여의 행위다. 잉여의 행위기 때문에 창작/향유의 과정에서 반드시 스스로 의미를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만화 같은’과 ‘만화니까’라는 이중적인 레토릭에서 알 수 있듯이 만화는 B급문화로서 저급한 문화행위로 취급해 왔다. 이러한 편견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것이 그래픽노블이다. ‘만화 같은’이 주는 상상력과 표현 그리고 발언의 자유로움을 극대화하면서 현실과 부딪칠 수 있는 요소들은 ‘만화니까’로 견제함으로써 여타의 다른 예술과는 차별적인 우위와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만화에 예술성과 진지한 깊이를 더한 것이 그래픽노블이기 때문이다.
암울한 현재와 절망한 역사를 흑백의 절묘한 미학으로 그리고 역동적인 정지의 역설을 보여준 프랭크 밀러의 <300>이나 <씬시티>나 미래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저항과 사유의 아이콘 무정부주의자 V를 그려낸 앨런 무어의 <왓치맨>, <브이 포 벤데타>는 서구의 대학에서 교재로 활용할 정도로 그 작품성을 인정받는 작품들이다. 신화적 분석과 정신분석학적 분석의 풍요로운 텍스트인 뫼비우스의 <잉칼>, 신과 인간에 대한 사유와 정치풍자가 유니크하게 어우러진 앵키 빌랄의 <니코폴>, 중년의 위기와 진정한 자아 찾기를 그린 데이비드 마추켈리의 <아스테리오스 폴립>, 만화가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아트 슈피겔만의 <쥐 : 한 생존자의 이야기>, 역사의 격랑 속에서 부침하는 인간을 리얼리즘 문학보다 더 리얼하게 그려낸 안토니오 알타리바의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동성애와 성장담을 교직시킨 쥘리 마로의 <파란색은 따뜻하다>, 불행한 소년에게 찾아온 첫사랑의 성장통을 크레이그 톰슨의 <담요> 등은 DC코믹스와 마블코믹스의 슈퍼히어로물을 제외한 대표적인 그래픽노블이다. 우리 작가들로는 동심의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의 질곡을 그려낸 최규석의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울기엔 좀 애매한>, 박흥용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영년>, 웹툰이라는 매체에 가려져 있지만 그래픽노블의 특성을 여실히 구현하고 있는 윤태호의 <이끼>, <미생>, 강도하의 <위대한 캣츠비>, <로맨스 킬러>, <발광하는 현대사> 등을 꼽을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나라에서 주목받는 그래픽노블은 대부분 사회의 문제나 개인의 성장에 중심을 두고 철학적 사유와 문학적 성취를 지향하는 리터러리(Literary) 그래픽노블이라는 점이다. 킬링타임용 싸구려 B급문화의 탐닉이 아니라 ‘만화라는 즐거운 장르를 통해 가치 있는 문화체험을 하고자 하는 욕구’와 영화, 드라마와 같은 거점콘텐츠로 주목받은 원천콘텐츠를 즐김으로써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Transmedia Storytelling)을 향유’하려는 적극적인 욕구가 그래픽노블을 통해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곳, 만화는 그래픽노블이나 웹툰을 통하여 ‘만화 너머’를 말하거나 ‘만화를 넘어서려는’ 다양한 시도로 충만하다. 문화콘텐츠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냐보다는 그것을 왜하고 있으며, 무엇을 할 수 있느냐이다. 그래픽노블이 지닌 소구요소와 그것에 반응하는 우리의 문화적 욕구 그리고 그것을 구현하고 있는 문화적 경로 등에 더 눈길이 가야 하는 이유다.
▪ 제일기획 사보 《촉》2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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