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과 굴절로서의 여성 이미지
- 아오마메와 은교 사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1.
문학은 세계를 언어화하여 재현하려는 욕망의 발현이다. 재현은 세계의 상상적 재구조화를 통하여 현실의 재맥락화를 기도하는 가치 지향적이고 정치적인 성격을 지닌다. 문학은 세계 안으로 들어가서 세계를 회의․견제하고, 세계는 다시 문학을 견인해내는 상호침투적 양상을 고려할 때, 재현을 통한 세계의 이해는 현실의 가치와 권력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더구나 문학은 물론 여타 장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재현이 언어를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점에 주목해볼 때, 그 발현은 내재적이고 심층적인 양상을 드러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세계를 언어로 재현하는 과정에서 언어에 내재해 있는 가치체계를 바탕으로 세계를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기존의 가치체계와 사유방식을 자연스럽게 언어를 통해 수용하고, 1이를 기반으로 세계를 인식하며 그 결과를 구현해낸 것이 텍스트라고 할 때, 텍스트를 읽는 행위 자체가 이미 기존 가치체계의 확대 재생산의 한 축으로서 기능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 가치체계와 세계 인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재현의 순환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확보하고 있는 비판적 거리나 회의적 각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글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이 글은 우리사회가 다양한 이름으로 다양한 층위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드러내고 있는 ‘음란한 판타지’에 주목하고, 그러한 공모를 적극적으로 합리화하고 있는 여성 이미지의 왜곡과 굴절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2.
한류라는 호명 2(Interpellation)을 통하여 소녀들을 어린 여성으로 환치하고, 섹스 어필할 수 있는 이미지를 전면화하는 과정을 정당화하고 더 나아가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만드는 ‘지금 이곳’의 질서는 주체적인 여성, 주도적인 여성, 완벽한 여성 따위로 포장된 타자성의 극단에 다름 아니다. 한류는 1999년 <북경청년보>에서 중국 내 급부상한 한국 대중문화의 주도적인 흐름을 지칭했던 말인데, 이것이 문화콘텐츠 산업의 사회문화 경제적 가치와 한국 문화의 세계화라는 다소 실체가 불분명한 국가주의적 발상이 교묘하게 어우러지면서 한국 문화콘텐츠 시장 정체를 호명한 결과이다.
이러한 호명의 결과는 우리 문화 콘텐츠임에도 불구하고 중심 타깃이 밖으로 향해 있거나 자본 및 시장에 의한 텍스트 지배와 같은 기형적인 결과를 낳고 있기도 하다. 특히 심각한 것은 문화콘텐츠의 왜곡과 편중화 현상이다. 초기 한류는 <사랑이 뭐길래>, <별은 내가슴에>, <겨울연가>, <대장금> 등이 가부장권을 내면화한 가족주의, 순애(純愛)의 향수, 주도적 여성 이미지의 전면화 등으로 시장에 접근하고 주도했었다. 3이러한 흐름은 소위 아이돌 그룹, 걸그룹이라는 이름으로 롤리타의 분위기는 확보하면서도 윤리적 부담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도록 15-17세 전후의 어린 여성을 20대 초반의 멤버들 사이에 포진시키는 전략과 섹스 어필의 단일 코드로 퍼포먼스를 구성해내는 전략으로 전환되었다.
걸그룹 멤버들의 이러한 선정적인 코드는 “꿀벅지”, “하의 실종” 등과 같은 신조어로 보편화되고 자연스러운 수용을 요구한다. 꿀벅지는 “ⓐ핥으면 꿀맛 날 것 같은 허벅지, 꿀처럼 달콤한 허벅지, 꿀을 바른 듯한 매끄러운 허벅지 등 다양한 해석들이 제기되고 있으나, ⓑ현재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뜻은 가늘고 마른 허벅지가 아닌 탄탄하고 건강미가 있는 허벅지”(밑줄과 원문자는 인용자) 4를 의미한다고 한다. 위키디피아의 정의도 섬세하게 읽어보면 ⓐ와 ⓑ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패티시즘(fetishism)으로로 읽을 수 있는 ⓐ의 의미를 내포적으로 함유하고 있으면서도 사회적으로는 ⓑ의 의미를 전면화할 수 있는 의미의 이중 구조가 그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이중구조는 2007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원더걸스의 <Tell me> 안무인 가슴털기 춤에서도 잘 드러난다. 2007년 당시 중학생 멤버부터 십대 후반의 멤버들과 20대 초반으로 구성되었던 원더걸스는 선정성을 전면화한 그룹이가기보다는 풋풋한 소녀그룹으로 포지셔닝 되었다. 이러한 포지셔닝은 그들이 추는 가슴털기 춤이라는 다소 선정적일 수 있는 안무를 이중의 구조로 즐기게 하였다. 가슴털기 춤의 성적 코드는 내면화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소녀그룹의 귀여운 안무로 치환시킴으로써 윤리적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원더걸스의 성공 이후 소녀시대의 <Gee>를 비롯한 일련의 노래와 안무, 카라가 <미스터>에서 보여준 맥락 없이 노골적인 엉덩이춤 등 수다한 걸그룹들의 선정적이며 섹스 어필하는 안무는 꿀벅지, 하의실종 등의 신조어로 중화됨으로써 보편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5
원더걸스의 가슴털기 춤(상)과 카라의 엉덩이춤(하)
문제는 그것이 선정적인 코드를 전면화하고 있다는 사실보다는 그러한 단일 코드의 전면화 과정에서 여성 이미지는 철저히 타자의 이미지로 드러나게 되고, 그것은 여성 주체의 왜곡을 결과한다는 점이다. 더구나 그러한 왜곡이 걸그룹, 한류, 문화콘텐츠 등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경제적 부가가치의 놀라운 성과 등에 의해서 포장되는 ‘지금 이곳’의 주도적 흐름은 우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 대중문화의 영역 안에서 이러한 타자화는 피할 수 없는 숙명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속성이 주도적인 흐름을 이루고, 그것이 예외 없는 단일코드로 전면화될 때 그것의 영향이 현실로 침투해 들어올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자발성에 기반한 향유가 대중문화의 대표적인 속성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대중문화의 영역 안으로 공급되는 여성 이미지의 획일화와 타자화 현상은 왜곡된 모습으로 현실에 전면적인 공세를 가할 것이 분명하다.
3.
《은교》 6에는 은교가 없다. ‘위대한 시인’ 이적요의 가슴을 흔들어놓은 은교는 ‘불멸의 처녀성’을 상징한다지만, 정작 《은교》에는 은교가 없다. 이 작품에서는 은교 대신 이적요의 은교를 향한 뜨거운 갈망과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의 긍정 그리고 현재적 시간의 자기 부정이 들끓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이적요의 이율배반적 갈망의 시선 사이사이를 은교를 매개로 한 서지우의 오이디푸스적 도발이 가로 지른다. 거기에 3자적 시선으로 은교를 바라보는 Q변호사의 시선이 더해질 뿐이다. 따라서 《은교》에서 은교는 남성 욕망의 등가물이거나 남성적 시선의 구성물일 뿐, 은교 그 자신은 아니다.
영숙이나 영자가 아닌, 여자로 생각하지 않게 하는 중성적인 느낌이어서 ‘은교’라고 이름 지었다. 은교는 롤리타와 다르다. ⓒ은교는 열일곱이 아니라 스물다섯이어도 되고, 서른이어도 된다. 심지어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중요치 않다. 열망하는 절대적인 존재다. 7
ⓓ 남주인공은 70세고 여주인공은 17세 소녀죠. 평생 자기 절제를 해온 노시인에게 나타난 은교는 단순히 젊은 아이가 아니에요. 불멸의 처녀성을 뜻하지요. 처녀가 늙어 애 낳고 시집가고 그러는 것은 노인의 머릿속에 없는 거예요. 8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은교는 보부아르가 《제2의 성》에서 이야기 했던 ‘타자성’의 영역에서 파악할 수 있다. 타자성의 논리에 따르면 자아에 대한 의식은 타자와의 대립관계 속에서 파악할 수 있으며, 타자는 자아가 긍정적인 정체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타자는 스스로 뚜렷한 정체를 드러냄으로써 분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아와의 대립적 분별에 의해 구성된다. 이적요의 노트와 서지우의 일기를 중심 매개로 구현되는 은교는 그것을 기록하는 이적요와 서지우의 타자이며, 그 궁극에는 이적요와 서지우의 자아에 대한 구성 인식이 깔려 있다.
ⓒ가 남성 욕망의 판타지 안에 존재하는 절대적 타자로서의 은교 이미지라면 ⓓ는 텍스트의 맥락 위에서 이적요의 갈망을 설득하기 위한 은교의 이미지다. 문제는 ⓒ든 ⓓ든 간에 은교 스스로 발현하는 은교의 이미지가 아니라 은교를 통해 보고 싶어 하는 갈망의 대상으로서의 은교 이미지라는 점이다. 특히 ⓒ와 ⓓ의 구현 과정에서 서지우의 서사가 개입됨으로써 은교는 질투와 욕망의 대상으로 드러남으로써 은교의 실체는 점점 더 모호해진다. 작가가 작품 곳곳에서 은교의 입으로 발화시키고 있는 유행어들은 이적요와의 시간을 드러내기 위한 기제로 사용된 것이지만, 그것이 은교의 캐릭터를 구성하지는 못한다.
일반적인 남성적 시선 속에서 여성의 이미지는 “유혹하는 여성, 더 연약한 그릇, 완벽한 여성, 악녀” 9 등으로 범주화할 수 있다고 한다. 유혹하는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고 도덕적인 책망이나 징벌을 받아야 하는 인물이며, 더 연약한 그릇은 자손 생산의 지배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말하며, 완벽한 여성은 육체적 순결과 복종이라는 남성적 강요를 온전히 충족시키는 여성을 의미하고, 악녀는 매력적이지도 순종적이지도 않지만 남자를 원하는 여성으로 처벌의 대상이 되는 여성의 이미지를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은교는 어느 한 이미지로 고착되지 않고 네 요소를 조금씩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이미지로 제시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에서 은교는 스스로 드러내기보다 이적요나 서지우 심지어 Q변호사의 시선을 통해서 재현되고 있는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 이적요를 몰매로부터 지켜 준 D나 얼을 낳은 친구의 동생이나 오십대의 그를 만나던 M 그리고 안마시술소의 여자 등 모두 여성의 구체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남성 판타지 안에 전형들로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시선과 인식은 《은교》가 은교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은교를 매개로 한 늙고 병들어가는 남성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늙어감에 대한 성찰을 은교를 한 축으로 육체와 욕망의 문제에 대하여 전개하고 있다면, 오이디푸스적 애증을 드러내는 서지우와의 갈등을 통해서 사회적 자아의 페르소나를 성찰하고 있다. 서지우와의 갈등의 마디마디 마다 은교를 매개함으로써 《은교》의 중심이 늙고 노쇠해가는 육체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수용하고 싶지 않은 부단한 욕망의 발기에 대한 문제를 다양한 층위로 드러내고 있다. 은교가 이적요의 ‘불멸의 처녀성’이 되는 이유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신화화된 ‘여성(Woman)'은 남성들의 꿈과 이상, 공포들이 발생하는 상상의 장소이다. 여러 문화들에서 ’여성성‘은 자연이나 아름다움, 순수, 선을 나타낼 뿐 아니라 악이나 마력, 타락, 죽음을 묘사한다. 보브아르에 따르면 남성들이 끊임없이 여성들을 그들의 타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남성들에 의해 재현되는 ’여성‘은 “이중적이고 기만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다. …그녀는 선한 것으로부터 악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미덕들뿐만 아니라 그 미덕들에 반대되는 것들도 구현하고 있다.…남성은 자신이 욕망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 또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을 동시에 여성에게 투사한다. 10
《은교》의 중심은 이적요 자신이다. 은교는 그 욕망의 고갱이로서 노쇠함에 대한 분노와 공포, 젊음에 대한 갈망, 무능력한 젊음에 대한 질투와 분노, 문학적 권위에 대한 비아냥과 부정 등을 드러내는 중심 매개일 뿐 살아있는 은교 자신은 아니다. 이적요가 꿈꾸는 젊음과 사랑의 갈망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로망이라는 절망적 인식과 한계를 가장 밑바닥에 두고 서지우와의 오이디푸스적 긴장을 보여주는 이 작품의 완성도를 결정지은 것은 그 모든 것이 은교를 매개로 전개되어 간다는 점이다. 그것이 구현하고 있는 은교의 이미지가 관절 인형처럼 진공의 의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결정적인 아쉬움을 갖지만 그것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작품의 매듭과 결만은 결코 만만한 내공이 아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다만, 이 둘이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러한 양자 사이의 불균형은 작가의 실존적 고뇌가 이적요에게 지나치게 투사된 결과라고 하더라도 중심 매개인 은교를 진공의 상태로 두고서는 어떠한 답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작품의 끝부분에 이적요의 노트와 서지우의 일기를 태워버리는 장면에서 비로소 은교가 실존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실존의 한계를 거부하는 갈망의 답을 어디서 찾을 수 있으며, 남성 판타지 안의 관절인형과 같은 은교가 무슨 답을 줄 수 있다는 말인가?
《은교》를 만나는 내내 영화 <은교>의 구성과 이미지가 떠나지 않았다. 소설이 지니고 있던 이적요와 서지우의 오이디푸스적 긴장을 소거시키고 은교를 매개로 한 일차원적 갈등만을 전면화하고, 은교에 대한 이적요의 갈망을 설득하기 위해 다소 지루할 정도의 서사 전개를 보여준 영화 <은교>는 선택적이고 분명하다는 점에서 전략적인 텍스트임에 분명하다. 다소 작위적이었지만 70살 노인의 남루한 육체를 극단화하기 위해 무기력한 성기를 노출한다거나 17살 여자아이의 생기발랄한 육체와 젊음을 보여주기 위해 수줍은 듯 드러나는 체모 역시 지극히 전략적인 배치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교》의 다층적이고 내면화된 갈망의 정체나 갈등이 전혀 드러나지 못함으로써 은교의 몸만 앞으로 전면화 되고, 소설에서 가져온 에피소드임에도 불구하고 설득의 맥락을 놓쳐버림으로써 소설이 지닌 다층적인 의미 맥락을 모두 훼손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작품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기보다는 원천콘텐츠의 매력적인 요소들 중에서 은교의 투명한 젊음을 전면화하려는 선택이 전략적 유효성을 확보하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4.
《은교》를 읽으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와 천명관의 《고래》가 떠오른 것도 참 맥락 없는 일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와는 대필이라는 소재적 유사성과 신비함의 베일에 가려진 후카에리와 강건한 육체와 정신으로 주체적인 삶을 지향하지만 자폐적 공간을 고집하는 아오마메의 이미지에 압도되었고, 천명관의 《고래》는 금복과 춘희라는 강렬한 캐릭터의 이미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은교》의 은교가 텅 빈 타자의 기표라면 《1Q84》와 《고래》의 그녀들은 삶의 주인으로서 자신들의 문제에 대면함으로써 자아의 정체를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기표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자아의 정체는 사건과 대면하면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고 구축된다는 의미에 보다 더 가깝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만나야 할 남성들을 주도적으로 선택하고 그들과의 성관계 역시 주체적으로 전개하며, 옳고 그름의 판단에 있어서 자신이 중심이 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과 부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종교 공동체로부터 탈출하고, 리틀피플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소설을 구술하고, 덴고에게 대필을 허락하는 후카에리의 모습이나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하여 킬러가 되고, 자기 취향의 남자를 취하여 성관계를 나누고, 심지어 처녀수태의 상황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출산을 결정하는 아오마메의 이미지는 주체적이다. 남성적 시선 안에 갇혀 기술되는 타자로서의 이미지가 아니라 스스로의 이미지를 만들고 구축해나가는 여성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고래》의 금복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해 나가면서 견고한 남성들의 질서 안에서 스스로의 주인으로 살아남는다. 금복에게서 어머니로서의 기표를 소거시키고, 그 트라우마로 자기 안의 세계에 갇혔지만 스스로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춘희 역시 지금껏 보아온 여성 이미지와는 동떨어져 있다. 성욕, 사냥, 성취, 주체적 결정, 이성적 사고 등등 남성적 기표를 드러내고 있는 금복과 춘희는 전통적인 여성 이미지에 전략적으로 저항하고 있다. 그녀들은 순결한 처녀나 창녀, 불감증 아니면 색광, 순결하거나 음탕하다는 여성에 대한 극단의 성적 규제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면서 주도적으로 성욕을 해소하고 성 관계를 만들어가는 모습이 차라리 당당하고 건강해 보이는 것도 이채롭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천명관이 보여주는 낯설지만 당당하고 주체적인 여성의 이미지는 남성에 의한 여성적 재현이 남성 권력의 확대재생산이나 성취될 수 없는 갈망의 판타지의 매개로 설정되는 여성 이미지와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지점이다. 다만, 이러한 전복적이고 저항적인 이미지가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이미지로 다가오는 것은 공공한 남성 권력과 언어의 재현으로 학습된 편견의 결과이거나 그들이 처한 맥락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은 아닐까? 아오마메가 스스로 규정했듯이 1984년이 아닌 1Q84의 공간, 금복이나 춘희가 살고 있는 다소 우화적인 공간 설정도 역시 비현실적 시공간 설정을 통하여 타자가 아닌 자아의 정체에 다가가려는 전략적 선택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저항과 전복 그리고 갱신의 시도는 시에서 성(性)을 매개로 래디컬하게 전개된 바 있다.
(가) 온몸에 남은 푸른 이빨자국들을 / 사랑할께요 시퍼렇게 / 사랑할께요 가지말아요 / 버리지 말아요 나의 / 기둥서방 당신 / 붙잡을 바짓가랭이도 없는 당신 / 입에서 항문으로 / 당신의 음경에 / 꼬치 꿰인 채 / 뜨거운 전기오븐 속을 / 빙글빙글빙글 / 영겁회귀 / 돌고 돌께요 간도 / 쓸개도 없이
김언희, <늙은 창녀의 노래․2> 부분
(나) 입을 맞춰 줘…음…됐어…이젠…내…보×를…핥아…아…기분이 좋아…이리와…너의 성기를 빨고 싶어…냄새가 좋아…이젠 너의 것을 내 항문으로…집어넣어…그렇게…아…이번엔…가죽혁띠를 가져와…나의 등을 때려…더…세게…세게…세게…넌…네…ⓔ어머니의…젖을 빨고 자랐을 테지…ⓕ오늘은…내 젖무덤에…오줌을 갈겨…아…따뜻해…아…됐어…ⓖ네가 더럽혔으니…깨끗하게…네 입술로 닦아 줘…그래…그래…젖처럼…달지…꼭…어린시절로…돌아가는 것…같지?
장정일, <늙은 창녀> 부분
시 (가)에서 시적화자인 늙은 창녀는 이미 대상화되어 있는데, 그것은 꼬치로 꿰이거나 전기오븐에 들어간다는 진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녀는 전기오븐의 회전판이 도는 속도와 방향에 따라 돌아가는 대상화된 존재라는 것이다. 그녀의 ‘기둥서방’인 당신은 ‘붙잡을 가랭이’도 없지만 실체를 알 수 없지만 그녀를 자신의 ‘음경’으로 ‘입에서 항문’까지 꼬치 꿰어 돌릴 수 있는 권력의 소유자이다. 실체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녀를 매달고 대상화시킬 수 있는 것은 남성 권력의 자기 증식적 욕망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가)는 자신의 의지가 괄호 속에 묶인 것도 모른 채 헛된 욕망의 회로 노릇을 해온 자신에 대한 모멸적인 인식이다. 이러한 모멸적 자기 인식을 통하여 타자화된 자신의 이미지를 조응하고, 언어적 도구의 폭력적 구사를 통하여 그 체계의 허구성에 틈을 내려는 시도다.
(나)는 포르노적 상상력을 전략적으로 수용하여 자기모멸을 그 극단까지 보낸 경우이다. 이와 같은 포르노적 상상력은, 정상적인 성행위를 거부하고 일탈적인 행위를 요구함으로써 욕망이 은폐하고 있는 낱낱의 실체를 까발리기 위한 것이다. 순수한 욕망의 표현인 ⓔ를 ⓕ에서 자신의 젖무덤에 오줌을 갈기게 함으로써 모욕하고, ⓖ와 다시 대비시키는 위악적(僞惡的)인 포즈를 통해서, ⓔ의 순순한 욕망을 전복시키는 것이다. 즉, ⓔ의 순수하고 본능적인 행위를 ⓕ와 ⓒ와 ⓖ의 불결하고 타락한 행위를 의도적으로 요구함으로써 ⓔ의 행위를 훼손시키려는 전략이다. ⓕ의 배설은 ⓖ를 모욕하기 위한 것이다. 11
(가)와 (나)는 포르노그라피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성중심의 계몽적 사고와 남성중심의 세계 인식에 연결된 권력과 억압 그리고 재현 체계에 대하여 극단적인 저항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도들이 저항의 단초로서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은교가 남성적 갈망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듯 아오마메나 금복은 1Q84거나 우화적 세계를 전제로 스스로를 갱신하고 있으며, 김언희나 장정일의 창녀들 역시 포르노그라피의 가장 거친 형태의 상상력 안에서만 저항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우리 논의는 다시 천천히 역순으로 돌아와야 한다. 저항적 관점에서의 리터러시를 통하여 견고한 서사 전략 안에 왜곡된 여성적 이미지를 읽어내고, 그 왜곡의 시도가 언어적 재현을 통하여 타자의 영역에서 강요된 정체를 갖게 하려는 지금 이곳의 지배적 질서로부터 발생하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을 바탕으로 유혹하는 여성이 아니라 욕망하는 여성, 연약한 그릇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개별성으로 충일한 여성, 완벽한 여성이 아니라 나와 같은 갈망을 지닌 여성, 악녀가 아니라 그녀로서의 여성상이 좀 더 다양한 차원에서 다양한 맥락과 함께 탐구되어야 한다. 《은교》에서 은교를 보고 싶은 이유다.
- 인간은 언어를 벗어나 사고할 수 없기 때문에 언어는 사고를 결정한다. 따라서 ‘지금 이곳’에서 사용되는 언어들은 ‘지금 이곳’의 지배적 사고를 넘어설 수 없고, 오히려 그것들을 바르트가 말하는 신화로서 확대재생산한다. 그 결과가 언어 안에서 생산되고 확장되는 일상의 파시즘이다. [본문으로]
- 한류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박기수, 한류의 지속 방안을 위한 인문학적 성찰, 《인문콘텐츠》6호, (2005. 인문콘텐츠학회)를 참고하라. [본문으로]
- 한류를 주도했던 드라마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박기수, <겨울연가> 문제는 서사다, 《겨울연가, 콘텐츠와 콘텍스트 사이》 (2005, 다미디어)를 참고하라. [본문으로]
- http://ko.wikipedia.org/wiki/%EA%BF%80%EB%B2%85%EC%A7%80 [본문으로]
- 물론 그것의 반작용으로 오디션프로그램을 중심으로 하는 노래로만 승부하는 뮤지션들이 등장하게 되고, <나는 가수다>와 같은 실력파 뮤지션들에 대한 갈망을 파악할 수도 있었다 [본문으로]
- 박범신, 《은교》 문학동네, 2012. 이 글에서는 소설은 《은교》, 영화는 <은교>로 표기할 것이다. [본문으로]
- 고재열, <은교>가 왜? 욕망은 나이가 없다,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24 [본문으로]
- 이지은, 젊은 여자들이 지나갈 때 삶이 아득… “꽃이 그냥 저만치에 있는 거지”, 동아일보, 2012.5.23, http://news.donga.com/3/all/20120523/46446697/1 [본문으로]
- 팸 모리스 /강희원 역, 《문학과 페미니즘》 문예출판사, 1997, pp.66-67. [본문으로]
- 팸 모리스, 앞의 책, p.34 [본문으로]
- 박기수, 배설없는 시대의 숙변, 《오늘의 문예비평》 1999년 겨울호 p14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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