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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별을 넘어서는 차이의 황홀한 相關

이상호, 웅덩이를 파다, (모아드림, 2001)

 

박기수(문학평론가, 한양대 강사)

 

사람들은 제 각각의 속도’(速度)를 가졌다. 그것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속력’(速力)과는 다르다.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그 속도의 주체가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는 뜻이다. 세계의 시간에 일방적으로 휩쓸려 달려야하는 근대적 시간관은 직선적이며 따라서 속도보다는 속력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직선적인 운동 안에서는 세계의 현기증 나는 속력이 주체의 속도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주변의 일체의 사물들을 지우며 끝 모를 소실점을 향해 질주하는 이와 같은 롤러코스터로부터 내려설 수 있는 방법은 서정적(抒情的) 세계인식이 아닐까?


서정적 세계인식은 주체와 타자간의 역동적인 대화를 전제로 한다. 대화는 발화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주체와 타자가 활발하게 자리를 바꾸며, 그러한 자리바꿈의 결과가 동화(同化). 그것은 주체가 타자를 일방적으로 동화시킨다는 기존의 인식을 넘어서려는 것이다. 일방적인 동화의 경우, 결국 주체로 수렴되는 탓에 동화 과정이 지니는 역동적인 힘을 거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동적 대화과정을 동화라고 할 때, 그것은 주체가 타자로 스미는 과정이며 동시에 타자를 빨아올리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동화는 양자를 동일성의 도그마로 묶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양자의 차이성을 드러냄으로써 복수성(複數性)과 타자성(他者性)을 긍정하기 위한 시도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이상호의 다섯 번째 시집 웅덩이를 파다는 매우 소중하다. 눈썰미 있는 독자라면 金環蝕, 그림자도 버리고, 시간의 자궁 속, 그리운 아버지로 이어지는 그의 시력(詩歷)에서 삶의 상처와 고통을 긍정과 조화의 눈으로 담아내는 따듯한 구도를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작업의 연장선에서 볼 때도 이번 시집은 소중하다.

하지만 보다 소중한 것은 이번 시집이 1) 양가성(Ambivalenz)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고, 2) ‘구별을 넘어서는 차이의 상관망을 구성하고 있으며, 3) 이것을 일상의 곳곳에서 찾아냄으로써 성찰적 인식을 일구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굳이 페터 지마의 양가성에 대한 해석을 빌지 않더라도, 양가성은 결합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개의 가치들이 동시적으로 결합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질과 양, 강한 것과 약한 것, 고귀한 것과 비천한 것, 선과 악이 결합될 때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이와 같은 대립쌍들은 사실 대립적인 측면보다는 상관(相關)’을 통해 의미를 생산하기 때문에, 양자는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일 수도 있는 양가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용어는 이분법적인 구별을 무화(無化)시키고 상호 주체적 상관망을 구축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다.

 

오르는 길 내내 

아래로만 내닫는 물소리가 들린다 


 내려가는 것이 오르는 길이라는 듯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내려가는 물 


물길 끊어진 곳에 솟아오른 

한 채의 소슬한 

적막

<古刹> 전문(원문자 인용자)

 

연에서 주체의 오르는 길아래로 내닫는 물의 대립과 연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오르는 서정적 자아내려가는 물이 상동적(相同的)으로 보이지만,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발화의 중심이 서정적 자아()에서 내려가는 물()로 옮겨갔음을 알 수 있다. 연과 연에서 발화 주체가 전이됨으로써 상호 주체적 상관망이 형성되고 그 속에서 화자의 복수성타자성을 드러낸다. 이와 같은 다성성(多聲性)의 공간에서 연의 소슬한 적막을 맞을 수 있는 것이다. ‘소슬한 적막연과 연의 상이한 발화 주체들의 구별이 에서 사라져 버림으로써 획득된 것이다. 이 말은 소슬한 적막속에서는 주체와 타자의 구분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 주체적 관계의 네트를 형성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인식은 에서 의 관계나, 하루살이에서 하루살이웅덩이의 관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루살이들

눈에도 잘 띄지 않는 날개로

잘게 허공을 끊으며

올라간다 

검은 웅덩이가 멀거니 

그들의 기나긴 일생의 

하루를 

들여다보고 있다.

<하루살이>부분

 

에서는 허공을 잘게 끊는 하루살이와 그렇게 그의 전 생애인 하루를 수없이 사는서정적 자아, 그리고 에서 하루살이를 바라보는 검은 웅덩이와 그것을 바라보는 서정적 자아의 상관이 흥미롭다. 이와 같은 상관 속에서 주체와 타자의 자리바꿈이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그러한 자리바꿈을 통해 인위적인 분별이나 구분이 아니라 제 각각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배제와 차별이라는 동일성의 자장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며, <다람쥐>에서처럼 자기 반어적, 자기 반성적 인식에 이르기 위한 시도다.

그렇다면 왜 지금 여기서 차이가 문제인가? 그것은 과잉 소모되는 욕망의 <뚱뚱한 몸>이거나 욕망의 질주로 인해 제 속도를 상실한 <칠월의 코스모스>이거나, 빌딩만 발기하는 <테헤란로>이거나, 가망 없는 희망들로 즐비한 <희망백화점>이 바로 지금 이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차이의 상관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1. 내가 일어나 새벽 신문을 보기 시작하는 시각에

비로소 

아들은 인터넷을 

닫고 잠자리에 들기 시작한다


2. 흰색물감으로 머리에 한껏 멋을 부린 아들의 

부드러운 손이 

반백의 내 머리에 흑갈색 물을 들여주고 있다.

<세대차이> 전문

 

1에서 자칫 불화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깨어나고 / 잠들고’, ‘신문 / 인터넷등의 아버지와 아들의 어긋남이 단지 차이이거나 다름에 불과하다고 2에서 장면 하나로 처리하고 있다. 반백의 아버지를 흑갈색으로 염색하여 아버지의 세월을 지워주는, 검은머리를 흰색으로 물들인 아들의 부드러운 손.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살아온 시간과 아들이 살아온 시간만큼의 차이를, 부자가 함께 공유하는 시간만큼의 이해로 서로 다름을 인정해주는 화해의 모습인 것이다. 세대차이는 감옥의 안과 밖처럼, 단절이거나 소외일 수 없고 오히려 서로의 욕망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인정해줌으로써 차이나는 시간만큼 서로를 긍정하려는 노력이며, 이것이 차이가 지니는 역동적인 긍정과 조화의 힘인 것이다.

 

가둬도  

가둬도  

가둘 수 없는

바람처럼 


울어도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 

강물처럼 


싱싱한 

금빛 사랑 

한 접시 


그대와 나의 

경계를 

지우는 


닳지 않는 

고무 지우개 

하나

<가락지> 전문

 

차이가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긍정과 조화의 힘은 결국 그대와 나의 / 경계를 지우는데 모아질 것이며, 그것은 가둘 수 없는 자유로움과 강물 같은 부단한 역동의 싱싱한 금빛 사랑이 되는 것이다. , 여기서 그대와 나의 경계를 / 지우는일이 그대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만약 그렇게 하나가 될 수 있다면 가락지는 무슨 소용이겠는가? 오히려 경계를 지우는 행위는 주체와 타자의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 주체적인 상관으로 읽어야할 것이다. 바로 그 황홀한 상관 속에서 서정의 역동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고 동화(同化)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시집은 이상호의 속도를 읽게 해 준다. 섣부른 속력으로 현혹하려들지 않고, 어설픈 가속으로 소음을 만들지 않는 그의 행보. 그의 걸음마다 지워지는 경계와 차이가 빚어내는 황홀한 상관. 다시 한번 기대는 늘 새롭다.(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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