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아름다운 것들

88일 클리블랜드나이아가라 폭포(캐나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어이 클리블랜드는 괄호 속에 묶으려는 듯, 아침을 먹자마자 우리는 급하게 서둘러 클리블랜드를 떠났다. 클리블랜드에서 나이아가라 폭포까지 229마일(366)이니 네 시간이면 족할 거리였다. 횡단여행을 하다 보니 이제 네 시간 정도의 거리는 아주 행복하게 즐길만한 거리였고, 심지어 그 다음 일정을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 있는 거리였다. 심리적인 거리는 언제든 물리적인 거리를 넘어선다.

사람 사는 동네니 클리블랜드라고 왜 볼 것이 없었을까마는 볼 것 많은 시카고와 나이아가라 폭포 사이의 일정이다 보니 마음은 이미 너무 늦게 도착하거나 너무 이르게 떠나고 있었다. 일찍 출발을 서두른 덕분에 우리는 점심도 먹기 전에 미국-캐나다 국경을 넘고 있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오후를 온전히 보내고 야경까지 돌아본 후에 내일 아침 일찍 보스턴으로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조금 지체되면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넘어오는 국경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고 들었기 때문에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 위해서는 오늘 나이아가라 폭포에서의 일정을 마쳐야했다. 더구나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보스턴까지의 거리가 오늘 달린 거리의 족히 두 배는 되었기 때문에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클리블랜드를 떠나오는 길에 우연히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구장인 프로그레시브 필드 (Progressive Field)를 볼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미국에 오면서부터 추신수 선수와는 묘한 인연이 계속되고 있었다. 인천공항에서 유진이가 추가 보완검색을 받느라 탑승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추신수 선수 가족이 우리 가족 옆을 지나가서 같은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었다. 그 많은 탑승자들 중에서 무작위로 서너 명을 뽑아서 하는 추가 보완검색에 하필 유진이가 지명되어 지체된 것부터, 덕분에 추신수 선수를 볼 수 있었던 것도 묘한 우연이었다. 재미있었던 것은 그날 유진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 양말을 신고 있었는데, 추가 보완검색을 하는 과정에서 신을 벗게 하는 바람에 아이가 적잖이 당황하고 있을 때, 추신수 선수가 지나갔다. 추가 보완검색을 마치고 나온 유진이에게 추신수 선수가 지나갔다고 하니, 아이는 태연히 공항에서 이미 보았는데, 그가 박태환 선수인 줄 알았단다. 그 특유의 호쾌한 타격과 빨랫줄 송구를 좋아하는데, 그와 같은 비행기를 탄 것은 미국행의 좋은 징조가 아니었을까?

LA에인절스 구장에 온 추신수 선수 응원 문구.

4월 중순쯤인가 코스트코에서 LA 에인절스 스타디움 입장 티켓을 세일해서 팔고 있었다. 집에 와서 경기 스케줄을 확인하니 마침 5월초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경기가 있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LA 에인절스의 이번 시즌 마지막 경기였다. 더구나 LA 에인절스에는 행크 콩고(한국명 최현)까지 뛰고 있으니 더욱 신나는 일이었다. 티켓을 구입하고 에너하임의 LA 에인절스 구장까지 한달음에 달려가서 당일 입장권으로 교환을 했다. 홈팀인 LA에인절스쪽에서 응원할 것인지, 방문팀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쪽에서 응원할 것인지 입장권으로 교환하면서 고민을 했었는데, 유진이가 단호하게 LA 에인절스에서 응원해야 한단다. 그것이 이 지역에 사는 도리란다.

두 선수를 경기장에서 볼 날만 고대하고 있었는데, 샌프란시스코 여행을 다녀오고 나니 추신수 선수가 음주운전으로 재판을 받아야 해서 그날 경기에 출장할 수 없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실망하고 응원 플래카드도 만들지 않고 있었는데, 경기가 있던 당일 인터넷에서 보니 재판이 연기되어 추신수 선수가 출전한다는 것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유진이와 급하게 응원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추신수 선수만 응원하기 아쉬워 뒤편에는 영어로 행크 콩고의 응원 문구를 넣었다. 작은 플래카드였으니 반대편에 있던 추신수 선수는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메이저리그 구장에서는 특정 선수의 이름이 적힘 플래카드를 들고 응원하는 것은 불법이란다. 응원문구를 한글로 적어서 그랬는지 우리는 별문제 없이 응원할 수 있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프로리그에서 수많은 차별을 극복하면서 우뚝 선 추신수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의 벅찬 감동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음주운전 파문을 잘 알고 있는 LA 에인절스 관중들이 노골적으로 야유하는 가운데서도 당당하게 타격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쓰럽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한 복합적인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그날 경기를 보는 내내 여러 가지 생각이 오고 갔다. 매일 승부의 세계를 건너고 있는 추신수 선수의 스트레스나 내면의 갈증은 보고 싶은 모습만 보기를 원하는 우리가 알 도리가 없는 부분이겠지만, 늘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절박함과 가파름만은 느낄 수 있었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은 늘 그 실천이 가파를 수밖에 없다. 한 발 제겨디딜 곳 없는 승부의 세계, 모든 것이 낯설고 노골적인 차별이 존재하는 공간, 최고가 되지 않으면 다음이 없는 상황, 그 가운데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하는 사람이 겪게 될 그 절박함은 막연한 예상만으로도 숨 막히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황을,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있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대부분 사람들은 뉴욕 여행과 연계하여 나이아가라 폭포를 찾는다는데, 아는 사람들은 오히려 모두 미국 쪽 보다는 캐나다 쪽에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나중에 일러주었다. 그렇다고 정보에 둔감한 내가 그것을 알고 캐나다 쪽에 숙소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숙소를 예약하는 과정에서 가격대비 좋은 숙소를 찾다보니 환불이 안 되는 조건이지만 맞춤한 것이 있어서 예약했다. 예약을 하고 주소를 정리하다가 보니 숙소는 캐나다에 있었다. 환불이 안 되니 다른 도리가 없었다. 더구나 캐나다를 다녀오려면 UCI 인터내셔널 센터에서 방문허가를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까지 있었다. 아둔하면 침착하기라도 했어야 했는데, 명민하지도 못하고 덜렁대기까지 하다가 얼떨결에 캐나다 쪽으로 오게 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실수가 오히려 현명한 선택이 되었으니 변방 늙은이의 말(塞翁之馬)을 어디서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사는 일이다.

미국에서 캐나다로 입국할 때 입국심사는 까다롭지 않았다. 여권, 미국 비자, DS2019, I-94서류만 의례적으로 확인하며, 어디서 왔는지, 얼마나 머무는지, 어디에 있을 것인지 정도를 묻는 수준이었다. 다만 차 한 대당 3달러의 수수료를 내야 했다. 어떤 명목으로 내는지 알지도 못하고서 수수료를 내려니 금액을 떠나서 조금 억울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나마 입국심사를 하는 붉은 제복의 청년이 친절한 것이 위로가 되었다.

문득 미국에 입국할 때 LA공항에서 가족들과 두 시간을 기다렸던 생각이 났다. 무엇이 그렇게 무서운지 불필요한 것까지 챙기면서도 무성의하고 더디기만 했던 미국 입국심사는 마이클 무어가 <화씨 9/11>(Fahrenheit 9/11, 2004)에서 보여주었던 과장된 공포의 단면이었다. 입국심사대를 통과하는 순간 반미를 넘어 혐미(嫌美)에 빠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불편하고 불쾌했지만 어쩔 수도 없었던 체험이었다. 두려움은 미혹을 부르고, 미혹은 다시 더 큰 두려움을 부르는 공포의 환()이 끊임없이 이어져,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르는 두려움만 남은 상태였다. 그것에 비하면 캐나다 국경은 입국환영행사장에 가까웠다.

나이아가라 폭포 주변의 맥락 없고 소박한 거리

시카고에서 그토록 정신 차리지 못하던 사만다가 오히려 캐나다에서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국경을 통과해서 사만다가 일러주는 대로 따라가 보니 소박한 거리가 나이아가라 폭포로 이어져 있었다. 주차할 곳을 찾으면서 보니 주변 거리가 참 맥락 없었다. 나이아가라 폭포와 카지노, 리플리의 믿거나 말거나(Ripley's Believe It Or Not!), 기네스 세계 기록, 왁스 뮤지엄 등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소박하거나 조악하다는 느낌을 넘어서기 어려운 놀이 시설과 식당들이 줄지어 나이아가라 폭포 쪽으로 향해 있었다.

주차를 하려고보니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까울수록 주차비가 비쌌는데, 하루 종일 7달러12달러15달러였고, 6시 이후에는 5달러였다. 시카고에 비하면 그리 비싼 금액이 아니었고, 조금 먼 주차장이라고 해도 나이아가라 폭포까지는 걸어서 채 10분이 걸리지 않는 거리였으니 먼 곳에 주차하고 거리를 구경하며 폭포까지 걸어 내려갔다.

나이아가라 폭포 관광은 다양한 패키지가 있었지만, 우리는 안개 아가씨호(Maid of the Mist)를 타고 폭포만 체험(어른 14.60달러, 어린이 8.94달러에 세금 13% 추가)하고, 남는 시간에 폭포 주변과 폭포 외곽을 살펴보기로 했다. 먼저 안개 아가씨호 예약을 하고, 밥을 먹어야 했다.

밥은 예외 없이 규칙적이고, 몸과 마음의 상태와 무관하게 진솔했다. 시간이 지나면 배가 고파진다는 예외 없는 규칙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 하지 않던 반복되고 있었다. 더구나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밥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리 부모님도 우리를 그렇게 키우셨다. 아무리 살림이 어려워도 밥은 늘 푸지고 넉넉했다. 더구나 끼니를 거르는 일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내게 가족은 늘 밥과 상관되어 있다. 언제나 저녁 밥 짓는 냄새는 눈물겹다. 그 눈물은 슬픔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따듯함이거나 위로에 가까운 것이다. 하루의 힘겨운 일과를 마치고 기진해서 돌아와 온 가족이 둘러앉아서 더 먹으라는 사랑스런 성화와 함께 나누는 따듯한 밥과 국의 위로는 밥이지만 늘 밥 그 이상이다.

여행을 하면서 아침은 대부분 숙소에서 제공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먹고, 점심은 이동 중에 패스트푸드로, 저녁은 햇반, 카레, 짜장, 컵라면 등을 이용하거나 몇 차례 현지식으로 해결하고는 했다. 밥을 벌어오는 가장으로서 미안한 일이었다. 모든 것이 힘들어도 밥이 만족스러우면, 그것이 힘이고 위안이 될 텐데, 밥이 부실하니 가장으로서 미안할 뿐이었다. 여행이 진행될수록 가족 모두 아침의 간편식에는 적응이 되어갔지만, 패스트푸드와 햇반에 카레는 서서히 물려가고 있었다. 옐로우스톤 여행 때까지만 해도 어쭙잖은 현지식보다 햇반에 카레가 제일 맛있다고들 했었는데, 여행이 길어지면서 입맛은 벌써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나서니 딱히 마땅한 곳이 없다. 이번 여행에서는 스테이크를 먹은 적이 없어서 스테이크 전문점에 갔다. 집에 있었다면 벌써 몇 번은 수영장 옆에서 바비큐를 해주었을 것이다. 한국에 비해 식료품 값이 무척 저렴한 얼바인에서는 특히 소고기는 가격 대비 감동이었다. 주말에 느지막이 일어나서 아이들 데리고 풀장에 나가 바비큐를 해서 먹고, 마지막으로 삼겹살을 잘게 썰어 넣은 김치 볶음밥을 해주면 하루가 행복했다. 그렇게 먹고 풀장 옆에 누워서 썬텐을 하면서 가볍게 맥주 한 잔을 하는 것은 더할 수 없는 여유였다.

조금 걸어가다 보니 Kelsey's라는 식당이 있었는데 그중 깔끔하고 가장 식당스러워 보였다. 그곳에서 스테이크, 키즈 메뉴 2, 스테이크 샌드위치, 캐나디안 맥주를 시켰다. 나온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으면서 우리는 스테이크는 어디를 가나 신뢰할만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팁을 포함해서 78달러의 호사였다. 호사는 대부분 대가를 치르는 것이어서 덕분에 저녁은 다시 햇반에 3분 카레를 먹어야 했다.


안개 아가씨호 티켓판매소(),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안개 아가씨호(), 레인보우 브리지()

안개 아가씨호를 타기 위해 서서 기다리는 줄이 평소보다는 짧다고 했다. 줄을 서서 선착장까지 내려가는 길이 폭포 쪽으로 트여 있어서 기다리며 바라보는 폭포와 그것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르는 말들이 사람 수만큼이나 많이 오가고 있었다. 안개 아가씨호라는 배 이름이 참 매력적이었다. 배의 크기나 용도와 상관없이 크고 강한 이름을 지은 배들을 보면 이름만 둥둥 떠 있는 것 같은데, 안개 아가씨호는 작고 소박하면서 그 배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주는 이름이었다. 뱃머리에 쓰여 있는 Maid of the Mist를 보니, M자가 주는 단단한 느낌까지 더해주고 있었다.

비옷을 입은 아내와 아이들. 효진이는 얼굴 젖는 것을 싫어해서 얼굴도 가렸다.

배를 탄 사람들을 보니 모두 코발트색 비옷을 입고 있었다. 비옷이라고는 하지만 얼핏 보면, 1970년대 많이 쓰던 파란색 비닐우산이 연상되는 비옷이었다. 비옷의 색깔도 색깔이었지만 비닐의 두께가 아무리 넉넉하게 봐줘도 비닐우산이었다. 우비를 입고 폭포를 돌아보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내와 나는 우비를 그냥 주는 것일까, 구입하는 것일까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아내는 그냥 주는 것이다, 나는 이곳에 공짜가 어디 있겠느냐, 아이들의 동의를 구해가며 갈린 의견을 다잡아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우리도 배에 오를 차례가 되었을 때, 한 청년이 커다란 비닐 통에 비옷을 잔뜩 쌓아놓고 서서 웃으면서 비옷을 나눠 주고 있었다. 비옷을 받으며 아내와 아이들은 거 봐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아내는 늘 옳다.

비옷을 펼치어 입고 보니 모두가 똑같아 보였다. 우비는 덩치 큰 이곳 사람들의 크기에 맞추었는지 효진이에게는 너무 커서 앞쪽을 한번 묶어주었다. 안개 아가씨호는 2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배에 오르자마자 좀 더 좋은 자리에서 보겠다고 사람들은 모두 2층 난간으로 몰렸다. 배는 지체 없이 떠났다. 멀리 레인보우 브리지(Rainbow Bridge)가 보였다. 내일은 아마도 저 다리를 건너야 하리라. 몇 마디 안전 수칙에 대한 안내 방송이 끝나갈 무렵, 배는 미국 쪽 폭포 앞에 있었다.

나이아가라 폭포

미국 쪽 폭포는 낙차가 56m, 너비가 320m라는데, 보여주는 모습도 그랬지만 그 엄청난 소리만으로도 넉넉한 압도였다. 폭포 전체를 조망하면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몸이 젖을 수 있을 정도의 위치에서 배는 멈추는듯하더니 이내 뱃머리를 돌려서 캐나다 쪽 폭포로 향했다. 캐나다 쪽 폭포를 보고 오는 다른 배가 옆을 스쳐가자 모두들 유쾌한 함성을 질렀다. 캐나다 쪽 폭포는 낙차 54m, 너비가 675m인데 말발굽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호스슈(Horse Shoes)라고도 불린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본류라고 볼 수 있는 캐나다 쪽 폭포는 미국 쪽 폭포에 비해 수량이 여섯 배나 많다고 한다. 캐나다 쪽 폭포에 다가서자 사람들의 탄성이 잦아졌는데, 크게 탄성이 터져서 돌아보니 폭포 주변에 낮은 높이의 무지개가 선명했다. 비웃을 입고 있었지만 이미 충분히 젖은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워보였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나이아가라 폭포는 캐나다 쪽에서 보는 것이 더 좋다고 하는데, 보고 즐기는 것이 지극히 주관적인 일이고 보면, 두 쪽 모두를 온전히 살피는 것이 좋을 듯했다. 다만, 나이아가라 폭포에 와서 캐나다 쪽 폭포를 놓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캐나다 쪽 폭포를 보기 위해서는 캐나다로 건너가게 될 것이고, 그러면 폭포만큼이나 낯선 캐나다 사람들의 매력까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호스슈에서 돌아오는 길에 물 위 작은 바위가 보였다. 그 위에는 물새들이 기진한 날개를 쉬는 듯 서 있었는데, 그 실루엣은 물새들을 더 작게 만들고 있었다. 폭포 소리에 이미 울음소리는 스러져버린 작은 물새들의 바위 옆으로 크고 작은 물결들이 오고가고 있었다.

폭포에서는 떨어지는 높이가 늘 솟구쳐 오르는 높이보다 크다. 떨어지는 높이가 크면 클수록 그것을 차고 오르는 높이도 큰 것이 또한 변함없는 이치다. 가늠할 수 없는 양과 거역하기 힘든 속도로 밀고 와서 문득 떨어져버리는 나이아가라 폭포에서는 물비린내가 났다.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에게서만 맡을 수 있는 산 것들의 냄새, 살아야 한다거나 살고 싶다거나 하는 의지 이전의 그저 살아있는 것들의 냄새! 그 살아있는 것들의 냄새가 천지 사방에 가득 찰 때쯤, 배는 출발한 곳에 다시 돌아와 있었다.

폭포를 돌아볼 때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더운 날이었다. 비옷을 벗고 나니 시원했다, 잠시 동안만. 나이아가라 폭포 기념품점에 들러서 아내는 냉장고 자석을, 아이들은 엽서를 구입했다. 나이아가라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꿈틀대는 장면에 압도된 가족들은 야경을 보고 숙소로 가자고 했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저녁 9시에 조명이 들어오니 꼼짝없이 9시까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이아가라 폭포 인근 상점에서 발견한 아이디어 상품들

근처에는 선물가게가 줄지어 있었다. 미국과는 다른 독특한 제품들이 보였지만 가격이 생각보다 높았다. 아이스 와인이나 메이플 시럽은 워낙 유명한 것들이고, 매장을 둘러보다 아이스하키 피큐어를 하나 구입했다. 아이스하키 복장과 각 분야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복장을 결합하여 만든 캐릭터가 재미있었다. 내가 구입한 것은 소방관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가게는 아이디어 상품을 판매하는 가게였다. 생활 속의 작은 아이디어들을 상품화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무엇보다 그런 상품이 개발되고 판매되는 문화가 부러웠다. 세상을 뒤집을만한 즐거움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소소하게 즐길 수 있는 것들, 잊고 있다가 돌아보면 웃을 수 있는 장난스러운 소품들, 보면서 무릎을 탁 칠 수 있는 이 시대 콜럼버스의 달걀같은 것들, 생활 속의 작은 불편을 해소시켜주는 소품들이 끊임없이 진열되어 있었다. 사실 그 매장의 대표상품은 왁스로 자신의 손 모양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 조악한 색깔의 투박한 모형보다 아이디어 상품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길거리에서 만난 모래를 이용해 투명한 호리병 안에 그림을 그리는 노인은 쉬지 않고 떠들면서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시골 장터에서 만났던 혁필 화가를 보는 듯 쉬지 않고 떠들면서 손님과 이야기하고, 작품을 만들면서 판매하기도 했다. 투명한 호리병 안의 그림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지만, 만드는 과정만은 넋을 빼앗길 만큼 신기했다. 깔때기로 필요한 색깔의 모래를 원하는 위치에 넣고 얇은 봉을 가지고 모양을 만드는 것만도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일일 텐데 끊임없이 손님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그 작업을 하는 것을 보면 대단한 집중력의 소유자이거나 아주 오랫동안 그 일을 해서 숙련된 것이 분명했다. 만드는 과정에서 그렇게 신기했던 것이 막상 완성되고 나면 소박하기만 했다. 과정을 즐기라더니, 이 작업이 그랬다.

모래 그림을 그리는 노인

근처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허쉬 초콜릿 전문매장이 있었다. 아이들은 허쉬 초콜릿에서 벌레가 나왔다는 기사에 경악하면서 마구 성토하면서도 허쉬 초콜릿 전문매장은 꼭 봐야한단다. 초콜릿의 달콤한 유혹이 벌레를 넘어선 모양이다. 미국에 와서 본 전문 매장(코카콜라, M&M's, 기라델리 초콜릿, 버드와이저 등)이 보여주는 매력과 소구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전문매장은 관련 상품 개발, 브랜드 이미지 및 고객 충성도 제고, 미래 고객 확보 등의 가시적인 성과뿐만 아니라 상품 자체를 하나의 문화로 만드는 첨병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매장에서는 물건을 사지 않을 수 없는 구조였지만, 사지 않고 매장만 둘러보더라도 허쉬 초콜릿에 대한 충성도는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티켓센터의 모습

이곳 오락실은 독특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여기서는 고득점을 성취하면 기계가 표를 발행하는데, 그 표를 티켓 기계에 넣으면 선물과 교환할 수 있는 엄청난 양의 티켓이 발매되는 방식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 티켓의 양이 득점수와 비례하기 때문에, 고득점을 획득했을 경우에 한 아름 티켓을 안고 가야했다. 당연히 티켓이 출력되어 나오는 시간도 상당해서,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왜 저렇게 해야 하나 하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아마 고득점을 얻고 나서 그 성취감을 티켓이 출력되어 나올 때까지 즐기라는 모양이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수레 가득 지폐를 싣고 가서 감자 한 자루와 바꾸었다는 1차 세계 대전 직후의 독일이 생각나는 장면이었다. 우리와 달라서 즐거운 장면이었다.

돌아다니면서 보니 매장마다 같은 상품이라도 가격이 모두 다르고, 미국 달러를 내면 수수료 10%를 요구하는 곳도 있었다. 직불카드로 계산을 해도 캐나다 달러 환율로 계산하여 추가요금이 붙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환율 시세를 따져보니 캐나다 달러가 미국 달러보다 비쌌고, 아무리 이웃 국가지만 환전 수수료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거스름돈은 캐나다 달러로 주면서, 그 때에는 거의 1:1로 계산을 해주는 것을 보니 재미있었다.

우리는 아주 천천히 아홉 시를 기다렸다. 아홉 시 무렵이 되자 사람들이 하나 둘씩 폭포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서서히 폭포에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기대만큼 압도적이지는 못했다. 사람들 이야기로는 근처의 타워에 올라가서 찍으면 정말 좋다는데, 짐 때문에 삼각대로 챙겨오지 않은 상황에서 그곳에서 야간촬영이 가능하다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냥 이곳에서 보고 찍을 수 있을 정도만 찍기로 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나이아가라 폭포는 빛도 빛이었지만 그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낮 동안 숨죽여 있었던 듯, 자기가 낼 수 있는 속울음의 끝이라도 보여주겠다는 듯, 어둠을 타고 들려오는 폭포 소리가 점점 커져오는 것 같았다. 그 소리를 들으며,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인지, 아름다워서 살아남은 것들인지는 몰라도 가슴 저 밑바닥에서 뜨겁게 차고 오르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살아있는 것들과 관계된 것이리다.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의 밤이었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야경()과 주변의 야경()

클리블랜드에서 나이아가라로 한숨에 달려와서, 캐나다 국경을 넘고 부지런히 돌아본 하루였다. 캐나다는 캐나다였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폭포를 제외하고는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내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인지 아니면 싸구려 유원지 같은 느낌이 너무 강했던 것인지 몰라도, 조금 실망스러운 풍경이었다. 폭포만 볼 수 있었다면 더 오래 기억에 남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렇다고 폭포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만다가 일러주는 대로 차를 몰아 숙소로 갔다. 마실 물이 떨어져서 근처 마트에서 물 한 박스를 또 샀다. 캐나다의 밤도 어둡기는 매 한 가지였다. 사만다에 의지해 달려와 보니 숙소였다. 이미 열한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체크인을 하는데 체크인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직원 한 명이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며, 체크인 과정을 신속하게 진행하고, 친절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다. 미국 직원들의 느리고 부정확한 일처리에 늘 답답했는데, 캐나다 직원의 일처리 속도는 가히 감동적인 수준이었다. 다만, 일처리 속도가 빠르다보니 말도 빨라서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유진이가 옆에서 알아듣고 무사히 체크인을 마칠 수 있었다. 숙소의 직원뿐만 아니라 낮에 만난 캐나다의 매장 직원들은 미국 직원들에 비하여 젊고 예쁘고 단정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미국 서부의 대형할인매장이나 식당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년 이상이어서, 도대체 미국 젊은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느냐고 아내와 농담을 했었는데, 캐나다에서는 젊은이들이 대부분 그 일을 하고 있었다. 노동 인구의 연령으로 사회의 젊음을 측정하는 지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와서 보니 캐나다의 노동 인구가 미국 서부의 그들보다 젊은 것은 분명했다.

숙소는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이었고 깨끗했다. 아침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 말고는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복도에는 열 한 시가 넘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영복을 입고 1층 수영장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곳 사람들은 정말 열과 성을 다해서 즐기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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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서 나를 보다

89일 나이아가라보스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면 더위는 식지만 운전이 어려워진다. 더구나 오늘처럼 이렇게 폭우 수준으로 쏟아질 때면 더욱 그렇다. 낯선 고속도로 위에서 폭우를 뚫고 운전하는 일은 가급적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피한다고 딱히 다른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조심조심 달릴 수밖에 없었다.

구글 지도에 따르면 보스턴까지 쉬지 않고 달려도 최소 8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게다가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재입국할 때,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니 서둘러야 했다.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은 레인보우 브리지를 통과했다. 멀리서 보기는 더없이 낭만적인 모양으로 캐나다와 미국을 이어주고 있었는데, 막상 달려보니 국경은 국경이었다. 수수료로 3달러를 요구했지만 친절했던 캐나다 쪽과는 다르게 미국 쪽은 고압적이고 불친절했다. 서류를 챙겨서 주었더니 대충 훑어보면서, 창문을 내리라고 하고, 불법적인 물품을 가지고 왔느냐고 묻는다. 여행객이라고 말하니 다시 서류를 훑어보고는 통과를 시켜준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몹시 불쾌했다. 테러가 그렇게 걱정이 되면 내려서 꼼꼼하게 확인을 하든가, 불법적인 물품이 그렇게 염려스러우면 직접 확인하면 될 일이지, 고압적인 자세로 묻고 넘어갈 것을 그렇게 불쾌한 어투와 표정을 지을 것을 또 뭐란 말인가? 그리고 어떤 정신 나간 녀석이 불법적인 물품을 가져오면서 가져온다고 말하겠는가?

몇 년 전부터 미국인들은 살인적인 의료서비스 비용과 약값을 이기지 못해서 캐나다나 멕시코로 가서 의료서비스를 받거나 약품을 사서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날로 늘고 있다고 한다. 국민소득이 40,000달러가 넘는다는 나라에서 약값을 감당하지 못해서 다른 나라로 나라에 약을 사러 다니는 의약난민’(drug refugee)이 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제약사와 보험회사의 이익 그리고 그것을 방치하고 있는 정부의 태만이 맞물려 기형적인 약값의 구조를 만들고 있는 탓이었다. 그러한 의약난민들 때문인지 국경에서 미국 입국심사관들은 불친절하고 고압적인 자세는 나이아가라 폭포만큼 인상적인 것이었다.

나이아가라에서 보스톤으로 가는 I-90

국경을 통과하자마자 폭우가 쏟아져 내리는 I-90위를 달렸다. 쏟아져 내리는 비 때문인지 운전을 하는 내내 답답했고, 같은 차선의 도로임에도 좁게만 느껴졌다. 그동안 달려온 서부 쪽 고속도로와는 다르게 동부 쪽 고속도로들은 길가에 나무들이 울창해서 그 밖을 쳐다볼 수가 없으니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무성한 나무들은 길 밖의 풍경을 잠그고 있었고, 내리는 비는 그 길 위에서 우리 차를 가둘 기세였다.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서부 쪽의 고속도로들에 비해 도로 상태가 양호했다는 것이다. LA나 샌프란시스코 인근 도로를 비롯해서 서부 쪽 고속도로를 달려보면 노면 상태가 엉망인 것을 알 수 있다. 서부 쪽 고속도로는 무료 도로인데 보수할 각 주의 재정상태가 좋지 않아서 그 모양이라고 했다.[각주:1] 동부는 서부에 비해서 재정 상태가 좋은 것인지 아니면 유료도로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도로 상태가 무척 양호했다. 보스턴까지 몇 개의 톨 플라자를 통과했는데, 나중에 합산해 보니 18달러 정도의 톨게이트 비를 물었다. 유료도로기 때문에 내려서고 올라서는 일이 번거로운지라 서부에서는 볼 수 없는 휴게소가 고속도로 위에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휴게소에는 백인과 동양계가 유독 많았다. 백인들은 대체로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이었고, 동양계는 어린 학생들과 부모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방학을 맞아서 동부 명문대학교를 보러가는 가족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보스턴을 방문하는 우리의 목적 중에 하나도 하버드와 MIT를 보는 것이었다. 그들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들 눈에 그렇게 보이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여행은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풍경으로 걸어 들어가 그 안에서 서성이는 나를 꺼내어 되돌아오는 과정이 아니던가? 휴게소에서 만나는 동양계 가족들의 모습에서 우리 가족의 모습을 보고 나니 생각이 많아졌다. 방학이라는 시간동안 아이들에게 미국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게 된 것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직도 내 안에 보고 배워야 할 대상으로서 미국이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다른 것은 몰라도 대학만은 보스턴의 그 유명 대학의 서열을 인정하며, 우리 아이들이 그곳에 진학해주길 바라는 속물근성이 스멀거린 것은 아닐까?

하지만 점심을 먹으며 아이들이 하는 소리를 들어보니 그런 우려는 그저 소심한 아빠의 기우였다. 아이들에게 미국은 그저 다른 나라일 뿐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우리 세대가 가졌던 미국은 없었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어려서부터 집중적으로 영어교육을 받은 탓에 영어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아이들에게 미국은 그저 우리와 다른 나라로 객관화 되어 있었다. 서로 다른 나라일 뿐이고, 그 다른 점 중에서 우리보다 나은 것과 우리보다 못한 것을 아이들은 제 기준으로 나누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차로 돌아와서 보스턴으로 달리면서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래도 한국보다 공부에 대한 압박이 적은 미국에서 공부하는 게 편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유진이는 꼭 그런 것도 아니란다. 한국에서는 공부해야 할 것이 정해져 있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분명했는데, 여기서는 그것을 찾아서 해야 하니 힘들단다. 그리고 영어를 잘한다고 해도 높은 학년으로 올라갈수록 그것에 대한 이해가 이곳 아이들에 비해서는 떨어질 수밖에 없단다. 미국에서도 미국 아이들보다 높은 클래스에서 최고의 영어 성적을 받고 있다며 늘 자부심을 갖는 유진이였지만, 그 한계를 느끼고 있었나보다. 다만, 한국에 비해 즐겁게 공부하는 것은 좋단다. 강압적이고 불필요한 규제와 간섭으로 신경을 써야 하는 한국의 학교보다는 자유롭고 즐겁다고 했다. 유진이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분명 편한 것과 즐거운 것은 다른 문제였다. 편하지는 않으나 즐겁기는 한 공부와 생활,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학교에서 그토록 구현하고 싶어 했던 모습이 아니었을까?

즐거운 학교생활이라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쉽게 수긍할 수 있었다. 아이를 픽업하러 학교에 가면 아이들의 투명한 웃음이 곳곳에서 꽃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봄 같은 시기, 삶의 계산으로부터 아직 자유로운 때에 마음 맞는 친구들과 늘 함께하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꿈으로 신열을 앓는 그 시절이 아니라면 언제 그렇게 빛나는 웃음을 터트릴 수 있겠는가? 환한 웃음보다는 늘 피곤한 얼굴로 학교에 가고 지친 몸으로 학원문을 나서는 아이들의 모습에 더 익숙한 우리 실정을 생각할 때, 아이가 이야기 하는 즐거운 학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합리적인 교칙을 제시하고 그것을 어기면 타협 없이 엄격한 제재를 가하지만 그것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자유와 자율이 보장한다거나, 학업 성취도를 파악하기 위한 시험이 한 학기 내내 진행됨으로써 평소에 꾸준히 공부할 뿐 중간고사, 기말고사에 대한 부담이 적다거나, 특별활동의 비중이 높고 대학 진학에 그것이 반영된다거나, 심지어 한국의 수학능력평가시험에 해당하는 SAT(Scholastic Aptitude Test)도 본인이 시기를 정해서 보고 싶을 때 보면 된다니 한국에서 학교생활을 한 아이 입장에서는 충분히 즐겁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곳 고등학교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대학 등록금 때문에 아주 빼어난 학생이 아니면 상대적으로 등록금이 싼 칼리지(college)에 입학해서 2년을 마치고, 종합대학교로 편입하는 방법을 택하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단다.[각주:2] 유진이 학교의 일부 백인 아이들은 꿈이 동네 빵집에 취직하는 것이라며, 아이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자기가 자란 곳이고, 집에서 가까우니 최고의 직장이 아니겠냐고 이야기했단다. 빵집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적어도 고등학생들이 그런 꿈을 꾸는 것은 본적이 없는 아이로서는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동네 빵집에 취업해도 큰 어려움 없이 잘 살 수 있다는 말은 아닐까? 혹은 그 이후에 자신이 원하며 다른 직업을 얻어서 어렵지 않게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직업의 유연성이 높다는 의미는 아닐까?

유진이의 발 와이퍼 놀이

비는 보스턴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거세졌다. 앞좌석에 탄 유진이는 다리가 아팠는지 대쉬보드 위에 다리를 얹고, 발로 음악에 맞추어 와이퍼처럼 흔들며 논다. 뒷좌석에 효진이는 아내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비가 거세어질수록 시야는 좁아지고 와이퍼는 분주했다. 그렇지만 차 안은 마치 독립된 우주처럼 아늑하기만 했다.

동부로 넘어오면서 분위기가 서부와는 사뭇 달랐다. 도로나 주변 환경은 물론이거니와 사람들의 표정도 달랐다. 서부사람들이 유쾌하게 잘 웃는 것에 비하면 동부사람들은 비장한 얼굴로 좀처럼 잘 웃지 않았다. 톨 플라자 직원, 휴게소 직원, 휴게소에서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잘 웃지도 않아서 그렇지 않아도 낯선 동네가 더 낯설게 느껴졌다. 같은 나라라고는 하지만 동부와 서부의 거리, 주요 구성 인종, 문화적 토양 등을 생각해보면,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카고에서 만났던 친구 형식이의 말로는 이곳 사람들과 비즈니스를 해보면, 원칙과 신뢰를 중시하며, 자신들의 그러한 태도에 대하여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지금이야 워낙 다양한 인종이 섞여서 그 뿌리조차 알기어렵지만, 미국의 시작이 종교적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을 찾았던 청교도적 삶에 뿌리를 두고 있다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수긍이 갔다. 동부를 둘러보는 동안에 좀 더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었다.

10시간 30분쯤 걸려서 드디어 보스턴 숙소에 도착했다. 오면서 식사를 하고, 폭우 때문에 잠시 휴게소에서 쉰 한 시간을 빼면 8시간 20분쯤 소요된 것이니 어떤 날보다도 오래 운전해야했기 때문에 어려웠던 하루였다. 동부로 넘어오면서 고속도로 주변에 큰 나무가 늘어서 있어서 처음에는 상큼한 느낌이 좋았는데, 오랫동안 달리려니 주변을 볼 수 없어서 오히려 더 답답했다. 비도 비였지만 길가의 나무들 때문에 도로 폭이 더 좁고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길 위를 달리는 사람에게는 길 밖이 보여야 한다고 차 안의 가족들에게 말하고 나니 딱히 이유가 없다. 그래서 이청준의 <줄광대>를 이야기 해주었다. 줄 위에 올라서서 줄밖의 세상이 보이지 않으면 예술은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세상을 잃게 되고, 줄 위에 올라서 줄 밖에 눈을 빼앗기면 세상과 타협할 수는 있지만 예술을 이룰 수는 없는 줄광대의 숙명을 아버지 줄광대와 아들 줄광대를 통해서 그려낸 작품이 <줄광대>. 작가는 아들 줄광대의 삶에 보다 애정 어린 시선을 두고 있다. 비록 줄밖의 세상에 눈을 빼앗겨 줄 아래로 떨어졌지만 모두들 승천했다고 믿게 된 줄광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대학시절에 가슴 아파했었다. 그것은 아내를 죽이고 계속 줄을 탔던 아버지 줄광대나 줄보다 사람을 우선에 두고 죽음을 선택하는 아들 줄광대의 모습이 크게 다르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계와의 지속적인 불화를 통해서 세계를 회의하고 긴장시키는 예술가의 천형(天刑)이 안쓰러웠다. 차 안에서 아이들에게 <줄광대>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아이들이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려웠나보다.

지금껏 무료도로만 달리다가 유료도로를 달리려니 웃지 못 할 일들이 벌어졌다. 톨 플라자가 보여서 돈을 준비하면 티켓만 뽑는 데고, 티켓을 뽑으려 하면 돈 내는 곳이었다. 한국에서도 하이패스를 사용한지 몇 년이 되었으니 티켓 뽑고 돈을 내고 하는 것이 낯설기도 했지만, 톨 플라자와 톨 플라자 사이가 너무 멀어서 자꾸 순서를 헷갈린 것이다. 어쨌든 곁에서 지켜보는 아내와 아이들은 그 때마다 우스워 견딜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숙소는 보스턴 외곽에 있었다. 숙소는 생각보다 규모가 큰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대형 관광버스가 여러 대 주차해있었다. 체크인하러 사무실로 들어가면서 버스 앞에 붙은 표지를 보니 중국 학생 관광단이었다. 체크인을 하면서 자세히 보니 학생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보호자까지 함께 온 모양이었다. 동부 쪽 아이비리그를 둘러보는 투어 코스가 있다더니 그들인 모양이었다.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만났던 중국집 주인이 생각났다. 인중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가면서도 종업원을 쓰지 않고 부부끼리 운영하면서 아이에게 튜터를 붙여 공부시키던 모습이나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먼 길을 찾아온 이들의 모습이나 10시간 30분을 달려 보스턴에 도착한 우리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프런트 데스크의 직원은 밀려드는 손님 때문인지 당황한 표정한 표정이 역력했다. 직원이 정신없어 할수록 체크인 시간은 점점 더 길어지고 있었다. 혼자서 전화 받으면서 밀려드는 손님을 빠르게 처리했던 캐나다 숙소의 직원이 떠올랐다. 방 키를 받아서 방에 올라가보니 조금 낡았지만 정갈한 느낌의 방이었다. 숙소의 침대 시트와 이불은 언제나 흰색이 옳다. 여행 중에 보니 지역에 따라서 이불 색깔이 다양했다. 딴에는 보기 좋으라고 했겠지만 어떤 색깔이나 무늬도 흰색의 정갈함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적어도 우리 가족들에게는 침대의 시트와 이불은 언제나 흰색이 옳다.

숙소에 들어오고 나서도 비는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보스턴은 효진이가 꼭 보고 싶어 했던 도시다. 지난 학기에 미국 역사를 배우면서 보스턴에 대해서 이것저것 조사를 하더니 여행 계획을 짜는 내게 보스턴은 꼭 보고 싶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하버드와 MIT를 보여줄 겸 들르려고 했었는데 잘 된 일이었다. 아이가 보고 싶어 하는 곳을 보여주면 늘 보여주는 것보다 더 많이 본다.

숙소로 오는 차안에서 아이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보스턴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우리 역사를 배우기 전에 미국 역사를 먼저 배워버린 아이들의 상황이 안타까웠다. 우리 역사를 정규 교과로 배우지 못한 효진이에게 한국 역사는 책에서 읽은 이야기일 뿐 아직 역사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에 와서 정규교과로 미국 역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의 현장에서 다시 확인하게 되니 혹시라도 혼란스러워하지 않을까 염려 되었다. 역사도 언어처럼 자기 것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전제로 다른 나라의 것들을 배워야지 제대로 된 정보의 선택과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질 수 있을 텐데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때였으니 지금 효진이 나이였을 것이다. 방학 때 작은집에 놀러가서 15권짜리 이야기 한국사에 넋을 놓았던 적이 있었다. 또래의 사촌들과 경쟁하듯 읽어버린 그 책은 15권 그 이상의 충격이었다. 이야기 한국사로 만난 한국사는 역사책 보다 설득력 있었고, 강렬했다. 세로쓰기로 되어 있어서 읽기도 어려웠던 그 책을 읽으면서 문득 어른이 된 느낌이었다. 집에 있던 계몽사판 한국위인전기전집이 가소롭게 보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그러면서 세계문학전집을 읽기 시작한 것을 보면 참 느닷없고 맥락 없는 나의 독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그런 독서 습관을 효진이가 많이 닮았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학교를 다녀오면, 할머니는 가급적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에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책을 보거나 공상하는 일이 전부였다. 그러다보니 책을 닥치는 대로 읽게 되었지만, 그런 나와는 조금 다르게 효진이는 이야기 자체를 좋아했다. 한국에 있을 때도 교보문고, 학교 도서관, 동네 도서관, 이동도서관을 모두 훑고 다녔다. 아내, 유진 그리고 제 몫의 독서 카드를 모두 활용해서 빌릴 수 있을 만큼 책을 빌려와 책상 위에 쌓아놓고 탐식에 가까운 독서를 하곤 했다. 효진이가 읽는 책들은 제 나이에 맞는 것부터 그 이상의 것에 이르기까지 가리는 것이 없었다. 읽는 방법도 빠르게 읽기도 하고 한 권을 몇 번씩 반복해서 읽기도 하는 아주 자유로웠다. 그러던 녀석이 미국에 와서 처음에는 한국책을 구하지 못해서 아내와 내 책을 탐하더니 언제부터인가 학교 도서관과 지역 공립 도서관에서 영어 책들을 빌려다 읽고 있었다. 미국에 와서는 주로 판타지 소설들을 빌려다 읽는 눈치였고, 덕분에 매주 도서관에 책을 빌리고 반납하러 부지런히 태우고 다녀야 했다. 그런 아이에게 이야기처럼 들려진 미국 역사는 얼마나 흥미진진했겠는가? 그런 녀석이 보스턴을 벼르는 것은 당연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아내는 빨래를 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실내에 에어컨이 돌고 있으니 내일 아침이면 뽀송뽀송은 몰라도 바짝 마를 것은 분명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비 때문인지 몸과 마음이 다소 가라 앉아있지만, 내일은 힘내서 보스턴 시내를 돌아볼 것이다. 효진이의 미국 역사와 유진이의 미국 역사를 확인할 수 있으리라. 그러고 보니 미국 역사에 밝지 않은 아내와 내게만 보스턴은 낯선 도시 같다.

내일 일정을 정리하고, 동선을 확인하면서 독한 술 한 잔이 그리웠다. 우리 방이 2층에 있어서 그런지 빗소리가 더 선명했다. 물을 가지러 차에 내려갔더니 비가 뿌려놓은 물비린내가 여린 풀냄새처럼 차 주변에 가득했다. 이렇게 빗소리가 선명한 밤은 도통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속수무책이다. 독한 술 한 잔이 더욱 간절했다

  1. 궁색한 재정은 서부 쪽만의 문제는 아니다. 일부 주에서는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자갈과 같은 자재로 도로를 다시 깔고 있다고 한다. 이런 일들은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앨라배마, 오하이오 등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미시건주 83개 카운티 중에 38개 카운티가 자갈을 깔았다고 한다. (김광기, 《우리가 아는 미국은 없다》 동아시아, 2011, pp.16-17참고) [본문으로]
  2. 한국 유학생들에게 미국 대학 학비에 대한 부담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미국인들보다 2배 가까운 학비를 부담해야하는 한국 유학생들 중 극히 일부의 학생들은 미국 학생들과 결혼하여 그 부담을 덜기도 한다. 극히 일부의 사례라고 믿고 싶지만 학비의 부담이 얼마나 큰지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들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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