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오늘로 기억될 오늘
8월 12일 뉴욕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일찍 일어나기 위해서 핸드폰 알람을 맞추어 두었는데, 알람보다 먼저 깼다. 숙소 옆 주차장의 기계음 때문인지 낯선 숙소가 마음에 놓이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 까닭이야 분명하지 않았지만 아내와 내가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피곤한 일정을 강행군하다보니 알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내와 아침을 준비했다. 따듯한 밥과 김치찌개 그리고 스팸만으로도 넉넉하고 배부른 아침이었다. 보잘 것 없는 그릇에 없는 반찬이었지만 아이들이 모처럼 맛있게 밥을 먹는 것을 보니까 흐뭇했다. 어려서 오남매 밥을 챙기는 것에 결사적이셨던 할머니 생각이 났다. 부모님이 밖에서 생활을 하실 때여서 할머니가 우리들 끼니는 챙겨주셨는데, 늘 새벽 4시에 일어나셔서 오남매의 도시락을 싸시고 아침을 꼭 먹이셨다. 잠이 밥보다는 좋을 나이였으니 우리는 잠을 조금 더 자고 싶어 했는데, 할머니는 예외가 없으셨다. ‘밥 괄시하는 놈치고 잘 된 놈 없다’는 말씀으로 아침을 꼭 먹게 하셨다. 자리를 보전하시고 누워계실 때에도 손자들 밥걱정을 하시다가 돌아가신 할머니의 역할을 지금은 어머니가 하고 계신다. 그래서인지 나도 아이들 밥에 예민한 편인데, 오늘 이렇게 아이들이 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지는 것을 보면, 나이가 들고 있나보다.
휴대용 버너에 가스가 얼마 남지 않았다. 어제 한인 마트에서도 가스는 보지 못했는데, 어디서 구해야 할지 직원에게 물어보아야겠는데, 어젯밤에 보낸 문자도 답신이 없었다. 아침을 먹고 치우는데 아이들이 소리를 지른다. 욕실 쪽에서 바퀴벌레를 본 모양이다. 워낙 오래된 건물이라 예상했던 일인데 막상 눈으로 보니 화가 났다. 바퀴벌레가 있으면 약을 치든가 미리 약을 준비해 놓아야 할 것 아닌가?
숙소를 나오면서 직원에게 전화를 거니 받지 않는다. 어제 일도 그렇지 않은가? 손님의 짐을 우리 방에 두는데 왜 자기들이 추가요금을 받는가? 어제부터 사용하기로 되어 있는 우리가 양해했으면 되는 일 아닌가?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버스투어를 하기 위해 타임스퀘어로 가는 도중에 전화가 왔다. 인터넷은 침대 밑에 선이 있으니 그것을 이용하라고 했고, 가스는 H마트에 없어서 대형할인마트에 다녀와야 하기 때문에 내일 가져다준단다. 그나마 우리가 구입하러 가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다보니 화가 치밀었다. 예약할 때만 해도 가스레인지가 있다고 한 숙소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도 주인이 아니었다. 그에게 화를 내보아야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상처가 될 뿐이었다.
그레이라인 버스 티켓, 길기도 길다
타임스퀘어 부근에는 그레인 라인(Gray Line) 직원들이 붉은 조끼를 입고 티켓을 팔고 있었다. 설명을 들어보니 어른 54달러, 아이 44달러면 이틀 동안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하단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돌아야하는데, 우리가 보고 싶은 곳은 다 그레이 라인의 루프에 속해 있으니 이동과 투어를 같이 할 수 있어 금상첨화였다. 게다가 가이드가 함께 타서 설명을 해주고, 나이트 루프도 이용 가능하다고 하니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196달러를 주고 티켓을 끊었다. 판매원은 조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휴대용 카드결제기로 결제를 했는데, 결제와 동시에 40Cm 정도 되는 붉은 티켓이 출력되어 나왔다. 4명의 티켓을 출력하는 데에 시간이 한참 걸렸다. 시간도 시간이었지만 어처구니없이 긴 티켓을 보며 가족들 모두 한참 웃었다. 왜 긴가 보았더니 광고가 여러 개 붙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제 본 <오페라의 유령> 20달러 할인 쿠폰이 마지막에 붙어 있었다. 아쉬웠지만 어쩌랴. 몰라서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도 없지 않은가? 그래도 이틀 동안 우리를 여러 곳에 데려다 줄 티켓이니 잘 접어서 가방에 넣었다.
그레이 라인 버스는 모두 4개의 루프 투어를 운행하는데, 다운타운 루프(downtown loop), 업타운 루프(uptown loop), 브룩클린 루프(brooklyn loop), 나이트 루프(night loop)가 그것이었다. 4개의 루프를 따라 돌면 뉴욕의 핵심인 맨해튼은 모두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다운타운 루프로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 2층 버스였는데 1층 좌석에는 아무도 타지 않고 모두들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지붕이 없는 2층으로 올라가서 앉았다. 입담 좋은 가이드가 버스 앞에 앉아서 지나가고 있는 곳을 설명해주는 방식의 투어였다. 가이드는 운행 중에 일어서면 안 된다는 경고했다. 2층 버스는 매번 아슬아슬하게 가로등 밑이나 나무 밑을 지나갔기 때문에 만약 일어선다면 완벽한 슬랩스틱 코미디의 주인공이 되거나 뉴욕타임즈 1면에 사진이 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곳곳에 정류장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이 있는 곳에서 자유롭게 내리고, 다 돌아보면 다른 버스를 타고 계속 돌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시로 내리고 탔다.
그레이라인 2층 버스
2층 버스 위에서 바라본 뉴욕 시가
2층 버스는 직사광선에 그대로 노출이 되어 금방 머리가 뜨거워졌다. 횡단여행을 떠나면서 대부분 차로 움직일 것이니 모자가 필요 없을 듯해서 짐을 줄이자고 가족들 모두 모자를 가져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생각인가? 선크림을 바르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지만 머리가 뜨거워지는 데는 속수무책이었다. 팸플릿 등으로 머리를 간신히 가리고, 가이드가 가리키는 쪽을 보느라 모두들 정신이 없었다. 1층에서 운전하는 기사와 가이드의 호흡이 참 절묘했는데, 그 혼잡한 교통 상황에서도 가이드의 설명 속도와 버스의 진행 속도가 절묘하게 일치했다.
다운타운 루프 1는 말 그대로 맨해튼을 상하로 나누었을 때, 아래쪽의 주요지점을 토는 루프이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다가 직접 내려서 보고 싶으면 내려서 보고 다음 차를 탈 수 있기 때문에 매우 편리한 투어였다.
여행 내내 내가 운전을 하다 보니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경우가 많았고, 무엇보다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없어서 아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버스를 타고 설명을 들으면서 다니니까 한결 여유로웠다. 귀로 설명을 들으면서 보라는 것을 보고, 보고 싶은 것은 좀 더 볼 수 있고, 사진도 자유롭게 찍을 수 있으니 내 여행은 오늘부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달리는 2층 버스 위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쉽지 않았고, 더구나 좋은 뷰 포인트를 잡기가 쉽지가 않았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여유로운 마음으로 웃으면서 천천히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만의 일인가?
뉴욕공립도서관
뉴욕 가로등 위의 비둘기들
세계 5대 도서관 중 하나라는 뉴욕공립도서관은 어제 H마트에 갈 때도 보았던 곳인데 그 규모도 규모였지만 도서관 앞에 편안하게 앉아서 책을 보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미국에 와서 부러웠던 것 중 하나가 공립 도서관이다. 아무리 작은 마을에도 일정 규모 이상의 장서를 갖춘 공립 도서관이 갖추어져 있다는 그들의 도서관 네트워크와 시스템은 한 없이 부러운 것 중에 하나였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도서관을 아주 편안하고 즐겁게 이용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도서관을 독서실로 이용하지 않고 말 그대로 책을 빌리고, 책과 관계된 문화행사를 즐기는 허브로 이용하는 모습은 더없이 부러운 것이었다. 더구나 이 숨 막히게 분주한 도시에서 대리석으로 멋지게 지어진 도서관 계단에 자유롭게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며 이야기하는 모습은 향기로운 풍경이었다.
버스는 아주 무심한 듯이 <스파이더맨>(Spider Man, 2002)에서 스파이더맨과 고블린이 싸웠던 ‘메디슨 스퀘어 가든’이나 <스파이더맨>(Spider Man, 2002에 자주 등장하던 컵 케이크 전문점 ‘매그놀리아 베이커리’, <스파이더맨>(Spider Man, 2002와 <스파이더맨>에 등장했던 플랫아이언 빌딩(Flatiron Building) 등을 스쳐갔다. 영화를 통해 소개됨으로써 실재보다 더 풍요로워진 공간들이 눈앞에 쉬지 않고 이어졌고, 그럴수록 그것을 소개하는 가이드는 분주해졌다.
세 도로가 교차하는 지역에 세워진 삼각형 모양의 플랫아이언 빌딩
1902년 세워진 다리미 모양의 플랫아이언 빌딩(flat iron Building)은 세계 최초의 20층 이상 건물이었다고 한다. 100년의 세월을 건너왔을 이 빌딩을 보면서 나는 뜬금없이 일본 지성을 대표한다는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의 ‘고양이 빌딩’이 생각났다. 아마도 주어진 공간의 제약을 한계로 인식하지 않고, 자신만의 개성으로 승화시켰다는 공통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플랫아이언 빌딩보다는 고양이 빌딩에 좀 더 매력을 느끼는 쪽인데, 그 이유는 단순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발상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자료를 보관할 곳이 필요해서 건물을 지으면서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았는데, 그 금액은 80대까지 꾸준히 원고를 써야 갚을 수 있는 금액이란다. 그러니 은행 대출금을 갚기 위해서라도 80대까지 살아야 하고, 살아서 원고를 써야 하는 것이다. 원고를 쓰기 위해서 빌딩이 필요한 것인지, 빌딩을 세웠기 때문에 원고를 써야하는 것인지 순환논리에 빠져버린 것 같지만, 읽고 생각하고 쓰는 일이 삶의 전부가 되어버린 지독한 공부벌레들의 자부에서 기인한 것임은 분명하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자신감도 자신감이지만 그러한 계획에 선뜻 대출을 해 준 은행의 안목은 또 얼마나 놀라운가? 뉴욕은 어디를 보아도 100년 이상 된 건물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들을 모두 현재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큰 이유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숱한 전쟁을 치르면서도 정작 미국 본토가 전쟁터가 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100년쯤 넘어서도 오늘의 이름값을 가지고 제몫을 해내고 있는 건물들은 과거이자 오늘이며 내일이었다. 100년을 건너온 건물들을 보면서 새로 짓는 건물 역시 100년 이상을 건널 수 있도록 짓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곳곳에 옛 양식으로 지은 새 건물들인데, 그 건물이 들어선 공간의 맥락을 외면한 채 지나치게 호사스러웠다. 눈에 거슬리는 것은 화려한 장식과 호사가 아니라 조화를 외면한 생경한 돌출이었다. 이 화려한 마천루의 도시에서 100년 이상을 갈 수 있는 유니크한 건물을 예술작품으로 만들겠다는 의도와 의욕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들어설 공간이나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모습은 차라리 폭력에 가까워 보였다.
센트럴파크(Central Park)는 풍경보다 냄새로 먼저 왔다. 관광객들을 위한 마차가 많았는데, 그만큼 말도 많았고, 말의 배설물도 많았던 탓이다. 앨런 블링클리(Alan Brinkley)에 의하면 2, 1850년대 센트럴 파크를 조성하기 시작한 것은 상류층이 압력을 넣은 결과라는데, 그 압력의 동기가 재미있다. 이 시기는 미국의 상류층들은 명품과 사치로 그들만의 문화를 구별짓기(Distinction) 시작하던 시기였다. 유럽의 명품과 사치품들로 꾸미고 매일 마차를 타고 나들이할 장소가 필요했던 그들이 시에 압력을 넣어 조성된 것이 센트럴파크란다. 부와 명예를 갖게 되면 가장 먼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구별짓기 시작하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격식이나 의례를 만든다더니, 결국 센트럴파크의 시작은 천박한 부르주아지의 과시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 해 2,500만 명의 관람객이 찾고 있으며, 뉴욕시민들로 자유롭게 산책과 피크닉 그리고 조깅 등을 즐기고 있었다. 다만 밤의 치안이 불안한 것이 문제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만들어질 때보다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건강해진 것은 분명했다.
차이나타운
차이나타운(Chinatown)은 다소 낡고 남루한 느낌으로 활기찼다. 차이나타운은 근처에서 비슷한 세력을 이루고 있던 리틀 이탈리아(Little Italy)를 대부분 밀어내고 그 영역을 계속 확장하고 있단다. 차이나타운의 남루한 활기는 저렴하게 때로는 멋스럽게 적혀있는 중국 간자(簡字)들에게서 먼저 왔다. 가이드는 차이나타운에는 화장실 없는 건물도 있어서 공동 화장실을 쓰는 곳도 있다고 강조했다. 차이나타운보다는 규모가 훨씬 작지만 나름의 코리아타운을 이루고 있는 곳을 지날 때도 한국 사람들이 부지런하고 억척스럽다는 말을 비아냥대듯이 이야기하는 것이 귀에 거슬렸는데, 차이나타운에서 또 그런다. 대놓고 비아냥거리지는 못해도 이렇게 우회적으로 비꼬는 것을 보면 서양인들 눈에 거침없이 치고 들어오는 동양인들의 모습이 거슬렸나보다. 자기들의 땅에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동양인들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의 이중적인 감정을 이러한 비아냥거림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리라. 아내와 유진이도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쟤네가 두려워서 그러는 거야’라고 살짝 이야기 해주었다.
미국은 이민자들에 의해 세워진 나라다. 이민으로 세워진 나라에 원래 주인 운운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다. 굳이 원래 주인을 따지자면 이민자들에 의해 비참한 죽임을 당하거나 보호구역으로 내몰린 아메리칸 원주민들이 아니겠는가? 일찍 도착하고 조금 늦게 도착한 차이가 있을 뿐이지 원래 주인이란 말은 이미자의 나라에서는 기만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을 가로지르는 철도나 도로 그리고 주요 교량과 캘리포니아의 농장들을 일굴 수 있었던 것은 말도 안 되는 임금으로 이민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한 결과가 아니던가? 물론 그 사이 10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고도 아직 온전히 미국과 동화되지 못하고, 기어이 차이나타운이라는 자신들만의 거리를 만들어내는 중국인들의 기질에도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스스로 뭉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 무시당하기 때문이었을 것인데, 그렇게 보면 미국의 다양성이라는 것도 그러한 개별 이익집단의 힘이 균형을 이루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그것은 이미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난 이 사회의 특성에 대한 문제였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 하는 자유의 여신상을 볼 수 있는 리버티 섬으로 가기 위해 배터리 파크(Battery Park)에서 내렸다. 자유의 여신상을 보기 위해서는 페리를 타고 리버티 섬으로 가야하는데, 티켓을 사는데도 한참을 기다리고, 배를 타려면 또 대책 없이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동안 근처에서 한국전쟁 참전용사 추모비를 발견했다. 미국에 와서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우연치 않게도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추모하는 기념물들을 곳곳에서 만났다. 지난번 코디에 갔을 때에도 숙소 바로 앞에 한국전 참전용사 추모비와 그 앞에 선명하게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고 묘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것은 고마움이나 부끄러움 혹은 정서적 유대와 같이 간단히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다.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그 복잡다단한 감정은 우리와 미국의 관계, 한국 전쟁의 발발 원인, FTA나 통상마찰, 주한 미군 주둔 문제, 전시작전권 환수 문제 등의 미국과의 현재적인 문제들, 세계사적 맥락에서 미국의 정체 등이 얽혀있는 복합적인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다.
한국전참전용사 추모비
거리의 악사
승선을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했다. 뒤에 있던 한국 학생들 사진도 찍어주고, 멀리 보이는 자유의 여신상 사진도 찍었지만 기다리는 시간은 여전히 지루했다. 그 때 근처에서 경쾌한 타악기 연주가 들려왔는데 한국 노래였다. 그곳을 쳐다보니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흑인 한 명이 작은 북처럼 생긴 스테인리스 원반을 목에 걸고 연주하고 있었다. 연주가 끝나면 사람들이 그 옆에 놓여있는 상자에 돈을 넣어주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악기로 자기 앞에 있는 관광객의 국적을 추측해서 해당 국가의 노래를 연주하고 팁을 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 우리를 보더니 이내 한국 노래를 연주해주었다. 낯선 눈으로 보아도 우리가 확실하게 한국인으로 보였나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팁을 상자에 넣어주었다. 잠시 후에 똑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지만 두 번의 감동은 없었다.
배에 오르자 사람들은 좀 더 전망 좋은 곳에 자리를 잡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배 위에서는 맨해튼 시내를 넓게 지켜볼 수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더위를 데려가고 압도적인 맨해튼의 풍경을 데려왔다. 맨해튼에서 멀어질수록 맨해튼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조금 더 멀어지자 브룩클린 다리가 처음과 끝을 온전히 드러냈다. 리버티 섬에 도착하니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이 우리가 내린 배를 타기 위해서 잔뜩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배에서 바라본 맨해튼
배에서 내려서 한참을 걸어서 자유의 여신상까지 갔을 때에는 이미 진이 빠져 있었다. 티켓 구입과 승선 과정에서 너무 오래 기다린 탓인지 더위 때문인지 이미 진이 빠져버린 우리는 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리버티 섬에 자유의 여신상 말고는 딱히 보거나 즐길 것이 없었다는 것도 실망스러웠다.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즐기기 위해서는 자유의 여신상 왕관에 올라가야하는데, 이것은 예약을 하고서도 1시간쯤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단다. 예약을 하지 않아서 우리는 왕관에 올라갈 수 없었다. 이렇게 왕관에 올라가는 것도 2011년 11월로 끝이라는데 아쉬웠다.
뉴욕의 상징처럼 이야기 되는 자유의 여신상인데 그 주변에 함께 즐길 콘텐츠가 없다는 것은 아쉬웠다. 게다가 무던히도 잘 기다리는 미국인이 아닌 우리에게 기다림은 아까운 시간이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기 위해서 아내와 아이들이 먹을 것을 사오는 사이 나는 선착장에 먼저 가서 줄을 서기로 했다. 그런데 매점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사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바람에 몇 사람이나 앞으로 보내고 나서야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기다려서야 겨우 배를 탈 수 있었다. 원래 페리의 코스는 배터리파크를 출발해 리버티 섬과 엘리스 섬을 돌고 배터리 파크로 돌아오는 것인데, 우리는 엘리스섬은 가지 않기로 하고, 엘리스섬에서 돌아오는 배를 타고 맨해튼으로 돌아왔다.
근처에 9/11 테러의 현장인 월드트레이드 센터 자리와 세계 금유의 중심이라는 월스트리트(Wall Street)가 있었지만 보지 않았다. 소위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라고 불리는 월드트레이드 센터 자리는 공사 중이라는 가이드의 안내도 있었지만, 그 끔찍한 비극의 현장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떠한 명분으로도 테러는 정당화될 수 없다. 게다가 민간인을 상대로 한 무차별적인 테러가 어떠한 명분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말인가? 오클라호마시티 국립추모박물관에서 보았던 그 어처구니없는 폭력의 잔혹한 기억과 지워지지 않는 상처와 슬픔의 흔적들은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다. 또한 9/11테러로 인하여 벌어진 납득하기 어려운 아프카니스탄 침공과 이라크 침공으로 인하여 숱한 민간인과 군인들이 죽어가지 않았던가? 그리고 아직 월드트레이드 센터의 붕괴 원인 3에 대해서는 수많은 의혹들이 남아 있지 않던가? 인터넷과 SNS 등을 활용하여 세계는 동시간대를 살고 있고, 정보의 독점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은데, 중요한 사안에 관해서만은 충분한 정보와 납득할만한 근거가 제공되지 않으니 오히려 소문만 무성하다. 소문은 음모론을 낳는데, 음모론은 듣는 사람을 더욱 불신에 빠지게 한다. 책임 있고 신뢰할만한 기관에서 사실 관계를 규명하고 사건의 전말을 낱낱이 드러내주어야 할 텐데, 무슨 이유인지 이 사건은 점점 더 오리무중이다.
월스트리트는 17세기 네덜란드 인들이 인디언과 영국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방벽(Wall)에서 유래한 것이다. 1624년 맨해튼에 도착한 피터 미누이트는 이주민 대표가 되어 인디언 대표들에게 24달러에 해당하는 물품을 주고 맨해튼을 양도하는 매매계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뉴욕의 시작은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계약 아닌 계약에서 시작된 것이다. 처음 맨해튼에 이주한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곳을 뉴암스테르담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이것을 영국이 빼앗고 뉴욕이라고 부른 것이 현재에 이른 것이다. 침략, 강탈, 매수 그리고 합법화를 위한 매매계약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개척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640년에 뉴욕에서는 이미 18개국 언어가 통용되었다고 하니 가히 국제적인 출발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지금 월스트리트를 중심으로 한 경제 전쟁의 기원과 그 성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날이 너무 더워서 그런지 모두 지쳐있었다.
다시 버스에 오르기 전에 생수 두 병을 구입했다. 뉴욕 시내 전체가 얼린 생수 한 병에 1달러 받기로 합의를 했는지 모든 가판대에서 가격이 동일했다. 그 생수라는 것이 대형할인마트에서 24병 혹은 36병에 병 값 포함해서 7달러 정도면 구입하는 것이고 보면, 결코 싼 것이 아니었다. 생수를 구입하려고 얼마냐고 물어보니 두 병을 쥐고 1달러란다. 그래서 두 병을 받고 1달러를 주니까 생수를 팔던 이 친구 얼굴이 확 변하면서 화를 낸다. 손에 두 병을 쥐고 1달러라고 하니 내가 착각을 한 것이다. 날이 더운 탓이다.
현대미술관으로 가는 벽
버스는 만원이었다. 아내와 효진이만 같은 자리에 앉고 유진이와 나는 따로 앉았다. 아내와 아이들은 앞쪽 자리에 앉았고, 나는 맨 뒷좌석에 한 자리가 있어서 앉았다. 새로운 가이드는 중년의 남자였는데 권태로운 음성으로 아주 느릿느릿 설명을 하고 있었다. 유진이가 피곤했는지 꼬박꼬박 졸았고, 나도 졸음이 쏟아지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내가 잠시 졸았던 모양인지, 졸았다고 아내에게 한 소리 들었다. 아내는 판옵티콘이다.그러는 사이 버스는 현대미술관으로 가는 벽
에 도착을 했다. 현대미술관은 금요일 오후 4시부터 무료관람이었다. 원래는 어른 20달러, 아이 12달러인 입장료가 무료인 시간이라서 그런지 이미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은 많았지만 금방 입장할 수 있었다. 눈이 밝은 아이들은 오디오 가이드(Moma Audio Guide)를 받겠다고 줄을 서서 기어코 오디오 기기를 받았다. 오디오 가이드는 추가 비용 없이 작품에 대한 심도 있는 설명을 들을 수 있게 만들어진 인터랙션 기기였다. 한국어 서비스도 지원되는 이 기기는 해당 작품 옆에 적힌 숫자를 누르면 그 작품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나와서 관람에 무척 도움이 되었다.
무료관람이 가능한 시간이라서 그런지 현대미술관은 여행 중에 들렀던 미술관 중에서 관람객이 가장 많았다. 6층 건물의 어느 한 층 사람이 붐비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래도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 샤갈의 <나와 마을>, 고호의 <별이 빛나는 밤에>과 같이 잘 알려진 작품들과 모딜리아니, 몬드리안, 고갱, 마티스, 모네, 쇠라, 모네, 세잔, 프리다 칼로, 칸딘스키 등의 숱한 작품들을 한 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인 공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의 작품은 5층에 전시되어 있었고, 엔디 워홀과 로이 리히텐슈타인, 잭슨 폴락 등의 작품은 4층에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두 층의 혼잡은 상상 이상이었다. 하지만 혼잡을 개의치 않고 꿋꿋하게 다 보았다. 언제 또 이런 작품들을 이러한 거리에서 뛰는 가슴으로 체험하겠는가? 오디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니 작품을 좀 더 풍요롭게 읽을 수 있었는데, 덕분에 아주 천천히 즐길 수 있었다. 특히 강의 중에 자주 활용하는 고호의 <별의 빛나는 밤>에와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은 더욱 새로웠다. 모처럼 뛰는 가슴에 행복해진 것은 나만은 아닌지 아내도 무척 즐거운 모습이었다.
입장하면서 받은 팸플릿에는 한 시간(하이라이트 관람), 두 시간(탐구 관람), 가족 프로그램으로 나누어 관람을 안내하고 있었다. 관람객의 유형과 관람 시간에 따른 안내가 인상적이었다. 아이들도 오디오 가이드를 귀에 대고 열심히 들으며 작품을 보고 있는 모습이 무척 진지해 보였다. 5층의 회화 작품들을 진지하게 보던 아이들은 4층의 팝아트와 현대 미술을 보면서는 무척 재미있어 했다. 새로운 표현 방식과 대중적인 표현들이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현대미술관을 나와서 버스를 타러가는 도중에 러브(LOVE) 조형물을 만났다. 젊은 연인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들의 사진 찍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또 다른 연인들이 있었고, 우리 차례는 그 다음이었다. 그냥 글자조각 같은데 의미 때문인지, 이장소성(placeness) 조형물이 있다는 뉴욕, 동경, 필라델피아의 때문인지 무척 유명한 작품이었다. 그러다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니 사람들의 열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상하게 두 커플 모두 글자와 어울려 가장 사랑스러운 표정과 몸짓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조형물을 완성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 앞에서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탁월한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버스를 타고 다시 처음에 출발했던 타임스퀘어로 돌아왔다. 유진이가 메이저리그 야구 모자를 하나 사고 싶어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낮에 머리가 뜨거워 고생을 한 터라 근처 메이저리그 용품 파는 집으로 들어갔다. 덩치가 크고 등과 팔에 온갖 문신을 한 직원들 셋이 30Cm쯤 되는 모형 야구방방이를 들고 탁구공으로 야구를 하고 있었다. 우리를 보자 자기들도 머쓱했는지 웃는다. 모자는 한국보다 조금 저렴한 편이었는데, 아이들과 나는 모자를 하나씩 샀고, 아내는 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내는 모자를 잘 쓰지 않았다. 그런 사람에게 신혼 초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모자를 선물했으니…나는 도통 아내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해먹었다. 가스가 얼마 남지 않아서 걱정을 했는데 간신히 준비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낮에 더워서 고생을 해서 그런지 밥도 많이 먹지를 않고 피곤해 했다. 오늘 찍은 사진을 컴퓨터에 옮기고 모두들 함께 보았다. 이제 매일 저녁 그날 찍은 사진을 가족과 함께 보는 것도 여행의 중요한 즐거움이 되었다. 한참을 웃으면서 사진을 보다보니 정말 우리가 그곳에 갔었던 것일까 라고 느낄 정도로 새로웠다. 낮에 다녀온 곳이 저녁에 새롭다. 오늘 다녀온 곳도 이런데, 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우린 무엇을 얼마나 기억에 남기고 가슴에 담을 것인가? 그것이 구체적이고 생생한 기억이 아니면 또 무슨 상관이랴. 그곳을 체험하면서 비록 언어화되지 못하거나 스스로 기억한다고 의식하지 못하는 것일지라도 체험의 원형질은 가슴에 남아 다양한 형태로 발아하고 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래도록 2011년의 무모했던 여행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오늘 찍은 사진 속의 우리가 나이를 먹지 않듯 기억 속의 우리는 나이를 먹지 않고 매년 오늘의 얼굴로 기억될 것이다.
오늘은 모처럼 운전하지 않고 사진기에 의지해 돌아볼 수 있는 하루였다. 버스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과 말투나 걸어 다니며 만났던 거리의 풍경도 운전을 하면서는 만날 수 없었던 것들이다. 다운타운 루프에서 보았던 100년 이상을 건너왔고, 앞으로 건너갈 최고의 위용을 뽐내는 건물들을 볼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다만, 건축에 대해서 문외한인 내 눈에는 화려하고 많은 공력이 투입된 건축물들이 그 자체만으로는 매력적인 것이었지만 주변 공간이나 사람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이것은 나만의 의견이니 그들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니다.
오늘 하루 동안 만난 것들은 아주 가슴 뛰거나 우울한 고민을 부르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문화적 인프라와 시스템은 가슴 뛸 정도로 매력적인 것들이었지만, 도시 곳곳에서 드러나는 남루한 어둠은 짙고 우울한 그림자임에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뉴욕은 도통 정체를 알 수 없는 도시였다. 지나치게 보고 느낄 것이 많아서 그런지 모른다. 우린 이 도시의 겉모습만 달리는 말에서 훑어본 것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이곳에 머무는 시간동안 말 위에서라도 좀 더 부지런히 보아야겠다. 오늘 밤에도 기계식 주차는 멈추지를 않는다.
- 다운타운 루프는 타임스퀘어→브로드웨이 극장가→메디슨스퀘어 가든→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플랫아이언 빌딩→유니언 스퀘어 쇼핑가→그리니치 빌리지→소호→차이나타운→시청, 월들 트레이드 센터 자리→배터리 파크, 자유의 여신상→사우스 스트리트 항구→ 로워 이스트 사이드→이스트 빌리지→UN→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록펠러 센터, 라디오 시티 뮤직홀→센트럴 파크→파크 센트럴 호텔→윈터 가든 극장→타임스퀘어로 돌아오는 코스다. [본문으로]
- 앨런 블링클리 / 황혜성 역,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휴머니스트, 2005. [본문으로]
- 911 테러를 음모론적 시간에서 다룬 딜런 에이버리 감독의 <911 - Loose Change>를 보면 아직 우리가 납득할만한 설명을 듣고 있지 못하는 12가지의 의문이 등장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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