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브로큰 애로우(Broken Arrow)
7월 29일 세도나→앨버커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살면서 여지없는 것들이 있다. 밥이 그렇다. 밥은 늘 끼니때마다 예외 없이 절실하다. 어제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이 오늘의 허기를 달래주지는 않는다. 야속하리만치 허기는 규칙적이다. 그래서 늘 밥은 어김없는 현실이다. 밥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삶에 진지하다. 그 밥이 어떻게 마련되는지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자기 삶에 태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밥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의 어쭙잖은 오만을 나는 혐오한다. 그래서인지 김훈의 《칼의 노래》(2001)를 읽다가 이순신이 전투를 치르러 나가는 병사들에게 고구마를 나누어 주며 독려하는 장면에서 나는 속절없이 울기도 했다. 그는 마지막 양식인 고구마를 나누어 주고, 전투에서 이겨 살아 돌아오면 적의 군량미로 밥을 먹을 것이고 죽게 되면 더 이상 끼니가 소용없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아직까지 나는 이보다 더 투명하고 진지한 밥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아침은 허기와 함께 온다. 미국에서 여행을 하다보면 아침은 참 난감한 숙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숙소에서 아침을 제공하지 않으면 아침 식사를 할 곳을 찾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만족할만한 식당을 찾는 것도 일이지만 찾아도 대부분 패스트푸드 가게의 조악한 정크 푸드(junk food)였다. 게다가 그 조악한 음식을 찾으러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또 얼마나 맥 풀리는 일인가? 횡단을 계획하면서 가급적 아침을 제공하는 숙소를 골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군데는 아침이 제공되지 않는 숙소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세도나의 숙소가 그랬다. 더구나 그 높은 숙소 주변에 식당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세도나에서의 아침은 집에서 미리 가져온 빵과 쨈 그리고 우유로 소박하게 마쳤다.
에어포트 메사에서 바라본 세도나 시내의 전경
숙소를 나서면서 보니 전날 제대로 보지 못해 아쉬웠던 에어포트 메사가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에어포트 메사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고, 그보다 먼저 세도나의 전경이 발밑까지 다가와 있었다. 마주보이는 레드 락(red rock)은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아니어도 붉은 빛으로 충만했고, 그 아래로 세도나 시가는 제몫의 나무들을 품에 안고 평화로웠다. 사진을 찍고 떠나려는데 어제의 기부를 권하던 아주머니를 다시 만났다. 결국 주머니에 있던 동전들을 기부함에 넣고, 레드 락으로 출발했다.
해마다 미국의 10대 관광지 중의 하나로 꼽힌다는 세도나에서 브로큰 애로우(Broken Arrow)를 만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원래 브로큰 애로우는 기병대와 인디언 사이에 협상을 진행하던 중, 인디언이 화살을 부러뜨려서 협상의 결렬을 나타낸 것에서 유래했다는 말로 ‘최악의 상황’ 1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가장 좋다는 곳에서 ‘최악의 상황’을 만나는 것은 좀처럼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가급적 피하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브로큰 애로우는 1853년 참혹한 비극으로 끝난 브로큰 애로우 전투다. 이 전투 이전에도 인디언 2들은 금과 땅과 바이슨 가죽 등을 원했던 백인들에 의해 19세기 초까지 학살되거나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되어야만 했다. 세도나는 원래는 나바호족, 아파치족, 야바파이족 등 인디언들의 성지(聖地)였는데, 서부개척이라는 명분 아래 자신들의 땅에서 내몰리던 그들은 브로큰 애로우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죽임을 당한다. 브로큰 애로우 전투에서 살아남은 일부 야바파이족과 아파치족이 그랜드 캐니언 일대로 쫓겨나면서, 세도나는 결국 백인들의 땅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자기중심의 명분과 탐욕으로 인디언을 몰살시키거나 내쫓은 3 브로큰 애로우 전투가 첫 번째 브로큰 애로우다.
1980년대 이후 이곳에서 볼텍스(Vortex)가 나온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관광지로 급부상했고, 그 덕분에 세도나에는 매년 500만 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찾아온단다. 4 이곳을 찾는 이들의 모습에서 두 번째 브로큰 애로우를 만날 수 있다. 그것은, 왜 세도나가 아메리카 인디언의 성지가 될 수 있었는지는 살피지 않고, 과학적 효능이 입증되지도 않은 볼텍스 운운하며 몰려드는 사람들의 맹목과 오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세도나가 아메리카 인디언의 성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며 영적인 삶을 추구했고, 그것에 세도나의 자연이 반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에는 자연을 거스르는 삶을 살면서 볼텍스만을 믿고 세도나로 몰려와서 그 치유 효과를 기대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언어는 믿음의 시작이다. 세도나는 그런 면에서 자신만의 언어로 믿음을 만들어 신화화하고 있었다. ‘세도나를 처음 보고서 감탄하지 않는다면 그는 다른 일을 하고 있거나 자고 있는 중일 것’이라거나 ‘신은 그랜드 캐니언을 창조했지만 그는 세도나에 산다’는 말만 들어도 세도나의 자연을 신화화하려는 그들의 노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숙소에서 Arizona 89A를 타고 레드 락 주립공원까지 가는 길은 무척 이채로운 길이었다. 도시 전체가 세도나의 붉은 빛을 유지하면서 멋스러운 어도비(Adobe) 양식의 건축물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사만다가 조금 헤매는 동안 발견한 한적한 길가의 주택들은 하나같이 소박했지만 자기만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그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려는 세도나 전체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지금도 세도나에서는 세계적인 호텔 체인들도 2층 이상 건축할 수 없고, 심지어 맥도날드조차 고유의 노란색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엄격한 규제는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신호등에서부터 도로 표지판까지 자연의 붉은 빛을 거스르지 않는 그들의 노력이 돋보였다.
붉은 빛의 바위들 사이를 이어 달리고 있는 세도나의 도로는 온통 붉은 빛이다. 신호등과 표지판, 심지어 맥도날드조차 세도나의 빛을 입고 있다. 대부분의 건축물들은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져 있고, 2층을 넘어서지 않는다.
세도나의 주립 공원들은 각각 입장료를 받는다. 국립공원의 경우에는 연간회원권(80달러)을 끊으면 언제 어디서나 이용이 가능한데, 주립공원의 경우에는 이것이 통하지 않는다. 레드 락은 10달러, 슬라이드 락(Slide Rock)은 20달러의 입장료를 받는데, 입장권에 적힌 글을 읽어보니 주립공원 건설에 쓰인단다. 그렇다면 할 말은 없지만 입맛은 쓰다. 세도나의 곳곳이 그렇지만 레드 락도 트레킹 코스가 아주 좋단다. 먼저 안내센터에 갔더니 세도나 홍보 영화를 상영했다. 세도나의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영화였는데, 이게 지나치게 길었다. 앞부분은 세도나의 곳곳에 대한 설명과 즐기는 모습이 제대로 구성되었는데, 후반부에는 세도나의 풍광과 동식물들의 영상이 지루할 정도로 계속되어, 우린 결국 끝까지 보지 못하고 나오고 말았다. 세도나를 보고 7시간쯤 달려서 앨버커키로 넘어가야 하는 날이었고, 세도나에는 보고 싶은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결국 트레킹을 포기할 때쯤 변함없이 또 허기가 찾아왔다.
아침이 소박하면 점심은 알차게 해주어야 한다. 나는 여행을 떠나면 현지식으로 먹어야 한다고 늘 주장해왔다. 음식만큼 그곳의 문화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 없고, 낯선 음식을 즐기는 재미도 여행의 큰 즐거움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이곳 음식을 체험해야한다고 몇 번 시도를 했었는데 결과적으로 실패를 하고, 아내의 표현에 따르면 ‘한국에서보다 더 많이 한식으로 먹고’ 있다. 몇 해 전에 신장 결석을 앓고 난 이후로는 짠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내 탓도 있지만, 이곳 음식이 지나치게 짜고 기름졌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종입맛인 나는 비교적 견딜만했는데 오히려 아이들이 견디질 못했다. 가리는 음식이 많고 새로운 음식을 두려워하는 효진이도 효진였지만, 가리는 것 없고 새로운 음식 도전을 즐기고, 외국에서 1년 생활한 경험도 있는 유진이가 더욱 강경한 것은 의외였다. 그러다보니 정작 이곳 음식을 체험할 기회가 많지가 않았다.
점심을 먹기 위해서 업타운에 있는 멕시코 음식점 오악사카(Oaxaca)에 갔다. 요세미티 국립공원 근처 타코벨(Taco Bell)에서 먹었던 타코와 브리또 맛을 기억하는 아이들이 반기지는 않았지만, 이곳은 패스트푸드가 아니고 다른 메뉴도 있을 것이라고 설득해서 들어갔다. 오악사카에 들어서니 달큼하면서도 매콤한 냄새가 시장기를 견딜 수 없게 하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초와 살사소스를 내주면서 음료주문을 먼저 받았다. 나초와 살사소스는 큰 볼에 두 개나 나왔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들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음식은 사진 먼저 찍고 먹자고 약속했었는데 배가 고팠던 우리는 까맣게 잊고 먹다가 기억해내서 가까스로 사진을 찍었다. 타코와 브리또 그리고 키즈메뉴를 시켰는데, 넉넉한 양도 양이었지만 맛이 탁월했다.
오악사카 레스토랑의 나초. 브리또, 타코
모두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계산서를 받고 보니 처음에 준 나초가 공짜가 아니었다. 주문하지도 않은 나초를 주고 계산서에 포함시키는 것이 불쾌했지만 이곳은 관광지고, 나초의 맛이 감동적이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계산서를 자세히 보니 팁이 이미 포함된 금액이 적혀 있었다. 관광지의 경우 계산서에 팁을 미리 포함해서 요구하는 경우가 있고, 손님 입장에서도 얼마를 주어야 하나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이것이 더 편한 방법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카드를 건네주니 계산을 마쳤는데, 다시 가져온 전표에는 추가 팁(additional tip)란이 또 있다. 추가 팁란을 비워두고 총액을 적고 사인을 해주었다. 참 지독한 관광지다.
미국에 와서 잘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 팁문화다. 보통 금액의 15% 정도를 주면 적당한데, 50달러가 넘으면 20%를 줘야한단다. 그동안은 세금을 포함한 총액의 15%를 주었는데, 알고 보니 세금을 제외한 금액의 15%를 주는 것이란다. 팁문화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이유는 음식값에 서비스 봉사료가 포함되어 있는 한국식 사고에 젖어 있는 탓도 있지만, 딱히 친절한 서비스를 해준 것도 없는 것 같은데 팁을 주어야하나 하는 회의가 들기 때문이다. 물론 얼마를 줘야하나 매번 계산하는 것도 그렇게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몇 해 전에 같이 책을 낸 후 미국에 와서 학술대회에서 우연하게 만났던 펜실베니아주립대학의 강인규 선생의 책 5에 따르면, 미국에서 팁은 임금의 일부로서 포함되며 심지어 소득세까지 물고 있단다. 팁문화는 소위 고용주가 부담해야할 임금을 소비자가 부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팁 노동자의 저임금은 개선되지 않는 고용주 중심의 불합리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생활화된 미국인들도 팁문화에 대해서 불만이 많다는데 하물며 낯선 한국인의 눈에 비친 팁문화야 오죽했겠는가?
점심을 먹고 어제 오는 길에 지나쳐 온 슬라이드 락을 보러 갔다.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차들이 줄을 서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다 옆에 표지를 보니 입장료가 20달러였다. 어차피 슬라이드 락의 핵심은 흐르는 물에서 슬라이딩하는 것인데 우리는 물에 들어갈 계획이 없었고, 시간상으로 트레킹을 할 수도 없었다. 차 안에서 급하게 회의를 한 결과, 차를 돌리기로 했다. 앨버커키까지 7시간 이상 소요될 것이고, 초행길에 사만다만 믿고 밤길 운전을 하기는 어렸기 때문에 틀라케파케(Tlaquepaque)와 홀리 크로스 채플(Chapel of The Holy Cross)만 보고 떠나기로 결정했다.
틀라케파케의 거리와 상점. 1970년대에 지어졌지만 기존의 나무를 그대로 살리면서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멋스러운 풍경을 얻을 수 있었다. 틀라케파케라는 말 그대로 모든 부문에서 최고의 것이 되었다.
틀라케파케는 멕시코 분위기가 압도적인 미국 남서부의 대표적인 예술마을이자 상가였다. 이곳은 스페인 식민지 건축양식으로 지은 건물과 광장을 중심으로 작은 벽돌이 깔린 보도를 따라서 다수의 갤러리와 상가가 연계된 곳이었다. 틀라케파케는 ‘모든 부문에서 최고의 것’이라는 의미라는데, 멕시코 과달라하라 인근 예술마을의 이름이란다. 아치형 골목을 따라가면 어도비 양식의 건물들이 이어져 부드럽고, 건물마다 큰 나무를 가슴에 안고 넝쿨로 세월을 얹고 있는 풍경은 아늑했다. 주변을 거스르지 않고 지나가는 세월을 안으로 수납하는 이곳의 건물들은 고즈넉하고 향기로웠다.
틀라케파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어도비 양식의 건물과 그 중심에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이 보여주는 조화였다. 커다란 나무를 중심으로 어도비 양식의 개성적인 건물이 이어지고, 그 사이사이에 다양한 형태의 예술작품들이 어우러졌다. 거기에 근처 식당에서 풍겨오는 멕시코 음식 특유의 넉넉하고 맵싸한 냄새가 더해져 더할 수 없이 따듯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1970년대 초에 만들어졌다는 틀라케파케가 이렇게 오랜 수령의 나무들 사이에 건설될 수 있었던 것은 원래 이곳의 땅주인의 판매 조건 때문이었단다. 원래 땅주인이 이곳의 나무들을 훼손하지 않는 조건으로 땅을 팔았고, 새 주인이 그 뜻에 따라 나무들을 그대로 둔 채로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판 사람이나 산 사람의 아름다운 뜻이 나무의 세월을 살리고, 건물에 시간을 얹었다. 탁 트인 광장과 건물과 건물 사이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나무, 푸근한 높이에서 깊게 울려오는 종소리, 그 나무와 종소리가 만나는 곳마다 멈춰있는 조각들, 조각들을 따라 조용히 늘어선 작은 입구의 갤러리와 수공예품 가게들의 어우러짐이 틀라케파케의 아우라였다.
Chapel of The Holy Cross의 외부 전경과 내부의 전면 유리로 바라본 세도나
틀라케파케를 둘러보는 동안 간간이 비가 내렸고, 카메라를 셔츠 안에 넣고 건물과 건물 사이를 건너다녔다. 갤러리나 수공예품 가게에 들어가면 비가 그쳤고, 밖으로 나와 이동을 하다보면 다시 비가 내려서 근처 가게에 들어가곤 했는데, 들어가는 가게마다 특색 있는 상품들로 한참을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골목이나 광장에서 비를 피해 뛰어다니는 모습은 우아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문득 자유롭고 즐거웠다. 내리는 비로 인해 달콤한 먼지 냄새가 건물 사이에서 번져왔고, 비가 지나간 숲그늘에선 나른한 상념마저 피어올랐다.
클라케파케를 나와 좀 더 짙은 붉은 기운을 따라가다 보니 홀리 크로스 채플이 나타났다. 레드 락 카운티(Red Rock County)답게 붉은 바위 위에 약 27m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건축한 홀리 크로스 채플은 그 자체로 이미 숙연한 묵상이었다.
1956년에 마거리트 브러스위그 스터드(Marguerite Bruswig Staude)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홀리 크로스 채플은 가톨릭 성당의 외양을 갖추고 있지만 종교와 무관하게 창조주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기도와 묵상의 공간으로 개방하고 있단다. 거대한 자연의 압도 위에 성당을 짓겠다는 발상을 갖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그 발상을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거스르지 않고 이루어냈다는 것이 더욱 놀라운 곳이었다.
사다리꼴 외관의 성당 전면은 빛이 충만할 수 있도록 유리로 하고, 그 중심에 거대한 십자가를 전면화한 단순하지만 분명한 이곳의 디자인은 표면적으로는 도저히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룰 수 없을 듯 보였다. 하지만 성당까지 걸어서 올라가다보니 이 조화의 힘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거대한 붉은 바위들이 가까이 혹은 멀리서 성당을 둘러싸고 있고, 성당에 오르는 램프는 구름다리 형식으로 붉은 바위의 곡선을 따라가고 있었으며, 성당까지 오르면 사방이 탁 트여서 하늘과 바로 맞닿은 자신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보면 성당은 아주 단아하고 견고한 희원(希願)처럼 보였다. 성당의 입구 쪽으로 들어서면 중앙의 십자가와 그 주변의 규칙적인 직사각형 무늬로 구분된 전면 유리를 통과한 빛이 성당 내부를 더욱 경건하게 만들었다. 성당 내부에는 누군가의 영혼을 위해 밝혔을 수많은 작은 촛불이 쉼 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성당으로 올라가는 램프, 성당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과 자연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세도나의 꼴불견으로 욕을 먹고 있는 성당 아래 대저택의 전경 그리고 정상의 모습.
성당 밖으로 나왔을 때 흐린 하늘은 더욱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성당 아래에는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서 있는 대저택이 있었는데, 몹시 눈에 거슬렸다. 세도나의 꼴불견으로 불린다는 이 저택은 성당과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대저택은 집 크기와 화려함 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어 보였는데, 그것을 앞세우고 있는 집주인이 오히려 안쓰러웠다.
시간은 이미 4시를 지나고 있었다. 앨버커키까지의 시간을 생각하면 당장 떠나도 벅찬 시간이었지만, 아내는 미티어 크레이터(Meteor Crater)에 들려보고 싶어 했다. 저녁 먹는 시간을 줄이면 30분 정도만 더 늦어질 것이라고 예상이 되었고, 세계 최대의 운석이 떨어진 곳이라는 말이 무척 매력적으로 들렸기 때문에 미티어 크레이터로 향했다. I-40으로 1시간 30분쯤 달려가니 표지판이 보였다. 표지를 보고 내려섰는데 허허벌판에 길만 앞으로 달리고 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들판 위로 새로 포장한 듯한 도로가 7마일(11㎞)쯤 묻지도 않고 앞으로만 내닫고 있었고 그 위로 비가 조금씩 뿌리고 있었다. 표지판 간격이 점점 좁아지더니 텅 빈 사막의 한 가운데 미티어 크레이터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미티어 크레이터의 7마일에 달하는 진입로
7시에 문을 닫는데 5시 30분을 조금 넘어선 시간에 도착하고 보니 마음이 급했다. 어른 15달러, 어린이 8달러의 입장료를 내고 입장하는데, 표를 받는 사람이 안내 영화를 상영하니 꼭 보란다. 상영 시간을 몰라서 기념품점 할아버지께 여쭈어 보니 6시부터란다. 조금 시간이 남아서 기념품을 보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달려와서 이제 영화 상영을 할 텐데, 늦으면 문이 자동으로 닫히니 빨리 가서 보란다. 할아버지의 느닷없는 친절 덕분에 영화를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미티어 크레이터 전경
영화를 보고 밖으로 나가니 운석공(Crater)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와 운석공의 중심까지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있었다. 미티어 크레이터는 5만 년 전에 50-100m 크기의 소행성이 초속 12㎞로 충돌하여 생긴 운석공으로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베린저 운석공’이라고도 불린다고 했다. 과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소행성과의 충돌 시 파괴력이 TNT 2천 5백만 톤(히로시마 원폭의 150배)이라고 하는데, 그 파괴력은 운석공의 규모(직경 1,200m, 깊이 170m)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 가족들 사진을 찍어주는데 옆에 있던 미국인이 사진을 찍어줄까 라고 묻는다. 미국에 와서 처음에는 낯선 친절의 의도를 파악하느라 어색한 표정으로 거절하기 일쑤였는데, 이제는 그렇게 물으면 웃으면서 사진을 부탁한다. 물론 사진을 찍어주면 반드시 상대에게도 사진을 찍어줄까 라고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례란다. 사진기를 들고 이곳저곳에서 사진을 찍는 내 모습을 보았는지, 전망대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갈지 말지를 이야기하는데 눈치로 알아차리고 사진 찍기 좋으니 꼭 올라가 보라는 관광객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잘 표시하지 않고, 상대가 요구하지 않으면 굳이 나서지 않는 이곳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고마운 일이었다. 이곳 사람들의 ‘관례화된 친절’ 6과 선이 분명한 타인과의 경계는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면서도 서로 돕는 합리적인 문화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지만, 정(情)으로 말하는 우리에게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 낯선 애리조나 사막 한 가운데서 낯선 친절을 만나게 되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운석이 떨어지고 있는데도 자기의 망원경에 갇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과학자를 풍자한 그림이다. 이 그림을 보고 아내도 웃고 나도 웃었다. 아마 같은 의미였으리라.
전시관에는 그곳에서 채취한 운석들과 운석공이 생기게 되는 과정을 재구성해놓았고, 운석공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을 재미있는 방식으로 전시하고 있었다. 기본적인 동선의 유도 외에는 별다른 규제를 하지 않고 오히려 자유롭게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전시장은 다소 소란스럽고 무질서해 보였지만 즐거운 분위기였다. 곳곳에 만져보라는 글귀와 함께 체험을 유도하고, 그것을 거침없이 즐기는 과정이 전시물 이상의 즐거움이었다. 시간은 이미 폐관 시간인 7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고, 바로 출발해도 앨버커키에는 자정 안에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흐린 날로 인해 밖은 이미 어둠이 서서히 내리고 있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전시관 내부에 있는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를 사서 차 안에서 먹으며 가기했다. 사실 ‘서브웨이 참사’ 이후로 우리 집에서 서브웨이는 금기어였다. 서브웨이 참사는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들 학교문제로 분주히 다닐 때 벌어졌다. 유진이 학교에서 서류 처리를 하고, 온 가족이 집 앞 쇼핑센터에 있는 서브웨이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당시만 해도 미국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우울해했던 아내를 위한 배려였다. 아내가 한국에서도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좋아했었기 때문이다. 주문을 하려는데 마침 특별 메뉴가 양도 넉넉하고 다양해 보여서 호기롭게 그것을 주문했다. 특별메뉴를 주문했더니 종업원이 당황한 듯 종이를 들고 뛰어나와서 빵의 종류부터 소스까지 상세히 묻고 들어갔다. 가격은 30달러였는데, 한국에서 가격을 생각하고 그 정도면 큰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온전히 나만의 생각이었다. 음식을 기다리면서 계산서를 본 아내가 내게 화를 냈고, 그 와중에 음식이 나왔다. 쟁반만한 사이즈에 3층 높이로 샌드위치가 나왔다. 이 특별 메뉴는 파티용 메뉴였던 것이다. 음식을 보고 놀란 아내는 벌떡 일어서더니 도저히 저 큰 사이즈를 창피해서 이 매장에서는 먹을 수 없으니 집으로 가자고 했다. 내가 분별없이 지출한다고 화가 잔뜩 난 아내는 샌드위치에 손도 대지 않았고, 나에게 다 먹으라고 했다. 아내가 화가 나 있으니 나는 물론 아이들까지도 눈치를 보면서 자기 양보다 많이 먹었는데도, 야속하게도 커다란 샌드위치는 15조각이나 남았다. 그 샌드위치는 모두 자기양보다 많이 저녁으로 먹고 나서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리 집에서 서브웨이는 금기어 아닌 금기어가 되었다.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이다 보니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참사를 기억하는 나는 빠지면서 아내에게 주문을 하라고 했다. 사실 빵의 종류도 많고, 내용물도 다양하고, 소스도 여러 가지다보니 내 깜냥으로는 주문하기 어려웠다. 아내는 빵 전문가답게, 마치 늘 먹는 음식 주문하듯 주문을 하고, 입장권 뒤에 있던 할인권으로 할인까지 받아냈다. 역시 주문은 아내의 몫이다. 이럴 때보면 아내는 마치 대학에서 주문을 전공한 사람 같다.
저녁을 먹으면서 달리다보니 날이 조금 개는 듯 아직 약간의 해가 남아 있었다. 해가 남아 있는 동안 더 많이 달려야 어둠 속에서 달릴 거리를 줄일 수 있다는 생각에 부지런히 달렸다. 평소보다 바람이 조금 세다는 느낌이었는데 멀리서 회오리바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행히 규모가 크지 않았지만 두어 개의 회오리바람이 종잡을 수 없이 대지를 훑고 있었다. 이 황량한 대지를 건너오는 회오리바람은 우리가 비록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 1900)의 도로시는 아니었지만 낯선 오즈의 세계로 데려갈 듯한 기세였다.
회오리바람이 전혀 낯설지 않을 듯한 황량한 들판 저 멀리 낮게 깔린 구름 사이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가 달리는 길옆으로는 마른 회오리바람이 거칠게 부는데 들판 저 앞에서는 비가 세차게 내리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어둠은 순식간에 사위를 감쌌고 천둥을 동반한 번개가 영화처럼 내리고 있었다. 마치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3D 킹콩 어트랙션을 체험하고 있는 듯 지극히 비현실적인 장면이 실사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렇게 어둠이 내리고 헤드라이트 불빛만 어둠을 가를 뿐, 세계는 이미 무거운 어둠에 포획되어 있었다.
아리조나의 회오리바람(상)은 캔자스의 그것만은 못해도 도로여행자를 위협하기에는 충분했다. 대평원에서 만나는 번개(하, 이 사진은 그랜드 캐니언 여행에서 처제가 찍은 것임). 경이와 두려움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앨버커키는 이름처럼 낯설고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도시 같았다. 비는 점점 세차게 내리고 그럴수록 어둠은 더욱 짙어만 갔다. 가로등을 기대할 수 없는 미국 고속도로에서 기댈 수 있는 것은 앞서 달리고 있는 대형트럭뿐이었다. 시원한 불빛으로 앞을 밝혀주는 대형트럭을 따라가는 것은 겉으로는 안전해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대형트럭이 보이지만 대형트럭은 우리가 잘 보이지 않고, 전방의 상황도 잘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어두웠고, 1차선의 승용차들에 비해 대형트럭은 상대적으로 저속으로 운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야간 운전이 두려운 나로서는 평소보다 조금 더 안전거리를 유지하면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고속도로를 340마일(544㎞)정도를 계속 달리다보니 사만다도 조용했고, 이따금 지나치는 도시들의 불빛만 다가왔다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차 안에서 다소 지루해진 우리는 아이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다. 순간순간이 경이였고, 날마다가 기적이었던 아이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언제나 즐거웠다. 아이들도 귀를 쫑긋하고 기억에는 없지만 자기가 일구었다는 그 시절의 이야기 듣기를 좋아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화장실 때문에 쉼터에 정차를 했다. 밖에서는 몰랐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대형 트럭을 위한 쉼터였다. 커다란 주차장에는 대형트럭들만 주차해 있고, 멀리 화장실 불빛만 보였지만 환한 가로등 덕분에 오히려 안전하게 느껴졌다.
앨버커키에 거의 도착했을 때, ‘Route66 카지노’의 불빛에 눈이 부셨다. 상당한 규모의 카지노로 보였는데,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Route66 카지노임을 알리고 있었다. 미국인들의 향수와 도박이 결합하여 역사가 팬시화 되는 현장이었다. 할리우드의 수정주의 서부극처럼 역사는 맥락 없이 다시 팬시화 되고 있었다. Route66은 이제 더 이상 ‘The Mother Road’가 아니라 단지 싸구려 브랜드일 뿐이고, 역사가 아니라 팬시상품일 뿐이었다. 추억과 향수를 파는 것이 나쁠 것은 없는 일이지만 그 안에 역사가 함께하지 못하는 일은 참으로 허망하고 공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횡단여행의 출발동기였던 Route66이 이제 경로만 남고 역사와 실체는 사라진 꼴이었다. 이것이 오늘 만난 세 번째 브로큰 애로우였다.
애초에 우리의 횡단여행이 미국의 맨얼굴과 속살을 보기 위한 것이었으니 오늘 만난 세 개의 브로큰 애로우는 차라리 행운이었다. 횡단여행의 전반부를 이끌어줄 것으로 기대했던 Route66이 실망스럽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Route66을 따라 달려갈 것이다. 우리가 비록 존 라세터나 존 스타인벡은 아니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여행에서 그랬듯이 Route66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여행을 디자인할 것이다. 존 라세터가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 그 자체에서 의미를 찾았듯이, 존 스타인벡이 절절한 현실과 고독한 자신을 발견했듯이…….
앨버커키 공항 부근 쉐라톤 호텔에 도착한 것은 자정을 한참 넘기고서였다. 세도나를 출발해서 413마일(660㎞)을 달린 것이다. 체크인하는 카운터 직원이 너무 늦었다며 농담을 했지만 대꾸할 힘조차 없었다. 이번 횡단여행 중 가장 좋은 숙소인 쉐라톤 호텔에서 정작 우리는 머물 시간이 그리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럴수록 앨버커키의 어둠은 더욱 견고해질 뿐이었다.
- 그래서 미 국방부는 브로큰 애로우를 핵무기 관련 중대한 사고, 즉 핵무기의 허가 없는 발사, 핵무기의 분실이나 폭발, 방사능 오염과 같은 핵무기 사고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하기도 한다. 오우삼 감독의 <브로큰 애로우>(1996)는 이와 같은 중대한 핵무기 사고를 다루고 있다. [본문으로]
- 인디언보다는 아메리카 원주민이라는 단어가 보다 객관적인 용어일 것이다. 인도에 도착한 줄 알았던 콜롬버스가 이곳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는 인디언은 타자로 대상화된 명칭이다. 주체인 백인들의 시각에서 오인한 대상을 오인한 채로 부르는 것은 철저히 타자화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메리카 대륙에 원래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아메리카 원주민이라는 중립적인 용어가 더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인디언이라는 말을 현재 관용적으로 써오고 있기 때문에 의미의 혼선을 줄이기 위해서 인디언으로 쓴다. [본문으로]
- 수정주의 서부극(revisionist western) 등에서 인디언에 대한 죄의식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미국 정부는 아직도 보호구역 내에서 알코올중독자가 되거나 카지노 산업의 하수인으로 살아가는 현실의 문제는 철저히 외면되고 있다. 세계의 인권을 운운하는 미국이 숨기고 싶어 하는 또 하나의 모순된 얼굴이 아닐 수 없다. [본문으로]
- 그래서인지 기아 자동차의 카니발이 미국에서는 세도나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대중적인 지지를 받는 세도나의 긍정적인 이미지 때문이리라. [본문으로]
- 강인규,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 인물과 사상사, 2008. [본문으로]
- 여기서 말하는 ‘관례화된 친절’은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도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짓는다거나. 인사를 하는 모습이라거나,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뒷사람을 위해서 기다려주는 모습,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제안을 하는 모습들을 말한다. 이것은 우러나오는 친절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관례화된 예절의 일부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함께 사회를 이루고 살기 위한 최소한의 예절일 뿐이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누군가를 위한 특별한 친절은 아닌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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