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우리들이 두렵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재범이 출국했다. 잘 나가던 아이돌 그룹의 리더였던 그가 사과문을 발표하고 쫓기듯이 출국했다. 이유가 무섭다. 미국 내 네트워킹 사이트인 ‘마이스페이스’에 2005년, 2007년에 올린 글에서 한국을 비하하는 내용이 있었다는 것이다. 한 네티즌이 캡처해서 자기 스타일로 번역하여 올린 글이 삽시간에 나라 전체를 압도했다. 번역 방식이나 어감 차이 혹은 현지의 관용적인 표현 등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다르게 읽힐 수 있는 글이었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이토록 일사분란하게 평가하고 단죄하는 우리 사회의 맹목적인 기민함은 두렵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그의 출국 이후, 소속사와 나머지 멤버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또 얼마나 단정적이고 기민했던가?
야구를 참 즐겁게 했던 정수근이 돌연 은퇴를 했다. 소속팀의 열혈팬이 거짓 신고를 했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구단은 방출을 통보했고, KBO는 그에게 자신의 무죄를 법적인 차원에서 스스로 증명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그는 결국 젊은 나이에 그라운드를 떠나야했다. 크고 작은 사고를 일으켰었다는 전력과 소속팀에 대한 열혈팬의 과도한 충정 그리고 책임지지 않으려는 팀과 KBO의 안일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실에 대한 이성적 판단이나 그것의 검증에 필요한 토론 과정보다는 선정적 결과물에 맹목이 되어버리는 우리의 현재를 볼 수 있게 한 사건이었다.
건강한 사회는 ‘다양한 소리’(多聲)와 ‘다른 소리’(異聲)로 충만하고, 그 안에서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바탕으로 조화와 합의의 과정이 시스템화된 사회다. ‘하나의 소리’가 ‘다양한 소리’를 압도하고, ‘똑같은 소리’가 ‘다른 소리’를 윽박지르는 우리 사회의 이러한 모습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해야만 하는 ‘우리 안의 파시즘’이다. ‘단결’과 ‘결속’을 뜻하는 파쇼(fascio)를 어원으로 하고 있는 파시즘(fascism)은 현재적 불안의 결과다. 지금의 안온한 일상이 깨질 수도 있다는 불안, 그 불안은 서로를 결속시키고 단결시킬 수 있는 요소들을 과도하게 강화함으로써 일사분란함을 얻지만 이성적 판단을 잃는다.
파시즘이 두려운 것은 그것이 항상 희생의 제물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인종, 국가, 지역, 종교, 사회적 공익, 도덕적 명분 등을 앞세워 희생의 제의를 치르고 그 과정을 통하여 사회적 결속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모파상의 <비곗덩어리>를 상기해보자. 절박한 고비에서 자신들을 위해 프로이센 장교에게 몸을 팔 것을 요구하고, 이후에는 그 매춘부를 경멸하는 역마차 안의 사람들. 자신들의 비겁한 타협을 잊기 위해 일사분란하게 그 매춘부를 비난하고 경멸하던 그 사람들의 지독한 파시즘. 그 매춘부에 비해 자신들이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묵시적으로 합의해버리는 이기의 폭력.
난 우리들이 두렵다. 어린 여가수의 허벅지를 ‘꿀벅지’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불러대면서도 누군가의 말실수를 용서하지 않는, 과거의 실수로 현재를 집요하게 단죄하는, 자신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윽박지르는 우리들의 함성이 두렵다. 그러한 과정에서 어떠한 토론도 용납되지 않는 우리들의 맹목과 누군가의 입을 모두의 입으로 닫아버리는 우리들의 반성하지 않는 정의(正義)가 두렵다. 오늘 난 우리들이 두렵다.
2009년 <한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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