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성의 소환과 즐거움의 호명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도깨비감투》에는 1970년대 풍경(landscape)이 있다. 그곳에는 서울 어느 골목에 사는 혁이네 가족만의 특별한 풍경이 아니라 197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몰장소적 풍경으로서의 다층적 의미가 담겨 있다. 김홍중에 따르면 풍경은 “향수자가 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고 구성하는 일종의 제도적 세계상”이며, 동시에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변동을 통하여 지각되고 감지되는 역사의 구성물”이다. 그는 풍경을 주체의 경험을 초월하는 선험적인 인식틀이고, 체험의 조건으로 기능하는 제도로서 현실의 물질적 토대를 포함하며, 언어적․논리적 질서를 넘어서는 영상적 질서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도깨비감투》에서 만날 수 있는 1970년대 풍경은 특정 시공간을 잘라 관찰의 대상으로 삼는 에스노그라피(ethnography)적인 풍경이 아니라 ‘지금 이곳’(現在)이 소환하는 풍경이다. 그것은 실체적 공간으로서의 1970년대가 아니라 각자의 기억으로부터 재구하는 지극히 사적이지만 대표성을 갖게 되는 시공간이며 동시에 지금 이곳에서는 사라진 소중한 무엇인가가 찾아가는 대타적인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도깨비감투》의 풍경 속에서는 문 밖을 나서면 친구들이 있고, 서로의 이야기가 있고, 좁았지만 자유로웠던 골목이 있고, 어머니가 부르면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둘러앉을 밥상이 있고, 꾸중하는 어른이 있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명하게 판단하고 옳은 일에 모두 수긍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이 작품만의 특징이라기보다는 1970년대 명랑만화의 일상성을 구성하는 일종의 컨벤션이다. 박인하와 김낙호는 1970년대를 명랑만화의 시대로 규정하고, 그것은 웃기는 만화라기보다는 일상을 그린 만화로 규정하며, 그 핵심은 친근함과 일상이라고 주장한다. 1970년대 명랑만화 안에서 친근함과 일상을 구성하는 컨벤션에는 당대가 지향했던 양친부모가 모두 있는 중산층 가정, 가족들이 함께 생활하는 집(단독주택), 이웃과 함께하는 골목길이라는 물적 토대는 물론,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는 도덕 기준과 합의 가능한 가치관이 내재화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설정이 당시의 보편적인 풍경이냐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일 수 있겠지만, 그러한 풍경을 당위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명랑만화임에도 불구하고 교화적, 도덕적, 당위적 성격이 상대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명랑보다는 ‘바른만화’의 성격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 말은 《도깨비감투》가 명랑만화보다는 바른만화에 가까웠다는 말이 아니라 바른만화의 성격을 내재화한 1970년대 명랑만화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다. 이것은 작품 발표 당시 지향했던 보편적 일상의 반영이거나 검열과 심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술적 타협으로 볼 수 있다.
1970년대는 전통적인 농촌공동체가 붕괴되고 도시화가 가속화되면서 핵가족화, 이웃 간의 관계 단절, 가치관의 아노미화 현상이 본격화되는 시기이다. 동시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거나 바라본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던 개발독재정권의 검열과 탄압이 심의라는 이름으로 혹독하게 자행되는 시기라는 점을 상기할 때, 《도깨비감투》를 비롯한 당대의 명랑만화 안에서 그려지고 있는 일상은 있는 그대로의 일상이 아니라 당위적으로 요구받는 일상이거나 과장된 낙관 속에 은폐된 일상에 가깝다.
《도깨비감투》는 ‘만약 내게 〇〇〇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이라는 아이들의 보편적인 판타지를 한국적인 소재인 감투로 바꾸어 하이콘셉트(high concept)로 전면화한 작품이다. 도깨비감투는 투명인간의 변형으로 《해리포터》의 투명망토와도 다르지 않고 어린 시절 누구나 꿈꿔봤을 소박했지만 보편적이었던 판타지의 구현물이다. 이 작품에서는 도깨비감투라는 신이(神異)한 능력을 지닌 도구를 획득함으로써 벌어지는 일상담과 모험담을 함께 전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마법의 도구를 얻게 되기까지의 모험담과 마법의 도구를 얻음으로써 새롭게 생긴 능력을 발휘하는 과정에서의 모험 및 성장담 그리고 그 능력을 슬기롭게 처리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귀환담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도깨비감투》는 이러한 상례에서 벗어나 도깨비감투를 얻고 난 이후에 일상 속의 소소한 소동 혹은 다소 낙관적이거나 맥락 없는 모험을 그려냈다. 제사, 방학, 도둑, 위문공연, 눈싸움, 목욕탕, 성적표, 불우이웃돕기, 설날 등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납치범 검거, 밀수범 검거, 탈옥수 자수, 북한, 땅굴 등이 후자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월간이라는 특성과 초등학생이 중심 독자였다는 점에서 전자와 같이 1년 단위로 가정과 학교의 루틴을 중심 소재로 활용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지점이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다소 이물(異物)스럽거나 맥락 없는 소재임에 분명하다. 특히 우연하게 북한에 도착하고 그곳의 실상을 바라보고 땅굴을 발견하는 등의 에피소드(별책부록14권 / 복간본 페이지가 픽스되면 복간본 기준으로 권수 표기 하겠습니다.)는 애니메이션 <똘이장군>(1978) 식의 반공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명랑만화에서까지 왜 굳이 북한을, 그것도 아주 스테레오타입으로 그려야했는지는 시대적 배경을 생각한다면 쉽게 수긍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정부의 압력에 의한 작가의 창작권 침해나 작품의 완성도 저하를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깨비감투》의 중심 서사는 중심캐릭터인 혁이를 제외하고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이 단점을 지니고 있고, 그것으로 인해 벌어지는 소동들을 도깨비감투로 해결하는 방식으로 전개한다. 다만, 일반적인 서사물은 대부분의 뚜렷한 적대자 캐릭터를 상정하고 그들과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지향 가치를 부각시키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데, 《도깨비감투》에서는 뚜렷한 적대자나 본격적인 갈등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특징이 있다. 명랑만화의 성격상 본격적인 갈등을 통하여 자아와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의 소소한 에피소드 중심의 재미에 그 중심을 두고 매월 단위의 단편적인 서사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립요소와의 해소과정을 통한 성찰이 아니라 이미 설정된 결론(미덕)으로 이끌어가는 방식의 일방적 서사에 가깝다. 그러다보니 모험담의 동력이 되어야할 성장이나 성찰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특성은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서사적 결함이 아니라 1970년대 명랑만화의 특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월간 잡지라는 압도적인 매체를 통해, 월간이라는 분명한 주기를 가지고, 초등학생이라는 뚜렷한 타깃에 맞추어, 연재물이지만 단편적인 성격이 강했던, 일상 속의 재미를 지향했던 명랑만화의 장르적 특성에서 본다면, 《도깨비감투》의 이와 같은 서사적 특성은 매우 보편적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단지 명랑만화가 매우 개성적인 캐릭터(꺼벙이, 탱구, 두심이, 요철이, 고집세 등)를 중심으로 일상 속에서의 웃음을 전면화하였지만, 이 작품은 개성적인 캐릭터(혁이)보다는 신이한 능력을 지닌 도구(도깨비감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별할 수 있다.
사실 엄혹했던 시대적 배경과 열악했던 산업적 환경 그리고 제한적이었던 소비 및 향유의 토대를 고려할 때, 1970년대 한국 만화산업에서 명랑만화는 최적화된 장르라고도 할 수 있다. 명랑만화는 당국의 심의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분명한 독자층과의 원활한 소통에 중심을 맞추기 위하여 단순하지만 분명한 컨벤션의 설정, 단편서사 중심의 스피디한 전개, 심각한 고민보다는 가벼운 즐거움에 초점을 맞추고 이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간략한 선중심의 약화체(略畫體)와 재미있는 희화체(戲畫體)를 활용하였다. 그러다보니 일상을 중심소재로 하고는 있지만 일상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은 애초에 기대하기 어려운 지점이 될 수밖에 없고, 상이한 가치 간의 긴장과 대립을 기반으로 하는 본격적인 갈등은 등장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명랑만화의 수다한 미덕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긴장, 갈등, 변화가 내재되지 않기 때문에 기존 질서를 벗어나지 않고 회귀할 뿐인 체제 순응적이며 기존 질서를 강화할 뿐인 장르라는 혐의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현실을 제대로 관찰함으로써 문제를 찾아내고 그 문제와 본격적인 갈등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더구나 《도깨비감투》에서 사회악(社會惡)이나 체제악(體制惡)을 도깨비감투로 제거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되는 방식은 지극히 표면적이고 일방적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명랑만화로서의 장르적 특성과 주 독자층이 초등학생들이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197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과연 이러한 비판이 유효할 것인가는 좀 더 숙고해볼 문제다.
《도깨비감투》의 가장 지배적인 설정은 현실에서는 무력하거나 잉여로 취급받았던 어린이가 특이한 능력을 소유함으로써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를 타개해나간다는 판타지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십대의 어린 주인공을 자주 활용하는 것도 어른중심의 지배체제에 대한 불만, 무력한 현실을 타개하고 싶은 어린이들의 욕구 등을 창조적으로 수렴한 결과다. 이러한 맥락에서 《도깨비감투》의 이러한 설정은 독자와의 공감을 높이고 소통을 활성화할 수 있는 중요한 서사 장치라고 평가할 수 있다. 더구나 좋은 일에만 효과가 있는 능력이라는 단서와 언제든지 분실할 수 있다는 설정 그리고 모두가 알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설정은 일종의 데드라인(Dead Line) 설정과 같은 서사 장치로서 극적 긴장을 조성할 수 있는 주요 단서가 된다.
도깨비감투라는 중심 소재 외에는 매화 단편적인 서사로 전개되기 때문에 거시적 관점에서 작품의 완성도를 논하기는 다소 어렵다. 서사적 완성도를 논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에피소드별로 분석하여 그 안에서 서사적 완성도를 평가해야할 것이지만, 이 작품의 경우에는 서사적 완성도보다는 시트콤처럼 일상 속의 재미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성과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명랑만화의 계보학적 접근을 통하여 이 작품만의 변별성을 추론해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단지 《도깨비감투》만의 평가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만화에서 분명한 지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다소 모호해진 명랑만화의 위상과 정체에 대한 문제 제기를 위한 토대 작업이 될 것이다. 아쉬운 것은 지면과 필자의 능력 부족으로 인하여 이 글에서는 문제 제기에 그칠 뿐이라는 점이다.
197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어깨동무》가 주는 신뢰와 재미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더불어 그것에 연재되는 작품의 대중적인 지지와 영향력 역시 대단한 것이었다. 《도깨비감투》를 제대로 읽기위해서는 《어깨동무》의 맥락 위에서 읽어야 하는 이유다. 현재적 시점에서《어깨동무》를 발행했던 육영재단의 성격과 실체, 발행 목적을 생각한다면, 그 시절 우리가 절대적 지지를 보냈던 작품들을 작품 그 자체만으로 평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상대적으로 이러한 맥락에서 자유로운 시점에 단행본 형식으로 읽어보는 것도 《도깨비감투》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할 수 있다. 사실 필자 역시 《도깨비감투》를 무척 즐겁게 읽으며 자란 세대(심지어 그 시절 도깨비감투를 소재로 동화-지금으로는 팬픽까지 써봤음을 실토한다)로서 오십이 넘은 나이에 다시 이 작품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오히려 단순하고 담백했다. 비쩍 마르고 키만 훌쩍 커버린 초등학생 하나의 소환, 잘 사는 사람보다는 잘 살고 싶어 애쓰던 서울 변두리 풍경의 소환, 친구들에게 빌려 읽던 《도깨비감투》 갱지 냄새의 소환……이 작품을 매개로 타임 슬립(Time Slip)하는 순간 모든 현재가 미끄러지고 오롯이 그 시절의 나를 만나게 되는 즐거움을 체험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 시절 의 기억 어딘가에 《도깨비감투》와 함께 나를 묻어 두고 있었나보다.
신문수 만화는 《도깨비감투》가 그러하듯 추억 속의 만화가 아니다. 《도깨비감투》가 지금 이곳에서 다시 소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깨비감투》에는 신문수 특유의 따듯하고 여유 있는 감성이 오롯이 살아있는 까닭이다. 하여 우리는 갈수록 강퍅해지는 세계 안에서 《도깨비감투》를 읽던 시절처럼 위로받고 의지하고 꿈꾸고 싶다. 처음 만났던 《도깨비감투》에서처럼.
2016년 《도깨비감투》복간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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