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 최선, 낙관의 유쾌한 고군분투
- 마츠다 나오코의《중쇄를 찍자》
박기수(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다릴 것이 생겼다는 것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한참을 기다리던 요시다 아키미의《바닷마을 다이어리》 7권을 그렇게 후딱 읽어버린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기다린 시간만큼 아주 천천히 차를 우리듯 읽었어야할 작품을 급한 마음에 후루룩 읽어버렸으니 말이다. 그 허전함을 견딜 수 있게 해준 것이 마츠다 나오코의《중쇄를 찍자》였다. 물론 그 못된 습벽으로 이 작품마저도 정주행하고 말았지만,《바닷마을 다이어리》 8권을 기다리듯《중쇄를 찍자》 4권을 기다리게 되었으니 설렘이 하나 더 늘어난 것이라고 믿기로 한다.
긍정적인 주인공의 성장의 고군분투는 언제나 흥미진진하지만 그리 새롭지는 않다. 중성적인 여성 혹은 작고 다부져서 아기 곰처럼 생겼다고 묘사된 유도선수 출신 출판사 신입직원 쿠로사와 코코로, 진심과 최선이라면 언제든 기대할 수 있는 선의와 낙관 그리고 여지없는 긍정의 결말은 대중서사의 익숙한 컨벤션이다.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그랬듯이 알고 보면 모두가 선한 사람이라는 이 작품의 설정은 전통적인 의미의 갈등구조 밖에 있다. 점점 전통적인 의미의 갈등, 즉 서로 다른 존재와 세계, 정서나 목표 간의 충돌을 통하여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요구하는 갈등에 대한 피로감 때문일까? 아니면 그러한 지향을 통해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세계를 갈망하는 것일까? 갈등을 통한 인간과 세계에 대한 탐구가 유용하듯이 갈등을 이완시킴으로써 구현할 수 있는 즐거움도 ‘지금 이곳’ 서사의 주목할 지점이다.
《중쇄를 찍자》에 마음을 뺏긴 것은 출판 현장의 살아있는 모습을 중심소재로 활용하는 있다는 점, 쿠로사와 코코로에게서 장그래가 읽혔다는 점(물론 장그래 보다는 밝고 조금 가벼운), 중심 서사의 캐릭터와 에피소드별 중심 캐릭터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물론 우리는 이러한 예로《슬램덩크》라는 탁월한 예를 알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진심과 선의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를 갖게 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만화출판이라는 소재의 현장성을 제대로 살리면서도 소재주의에 빠지지 않는 작가의 균형 감각이 돋보인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출판현장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작가는 놓치지 않는다.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의 만화출판 정보가 가볍게 제공되지만 거기에 매몰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만화를 팔고자하는 사람들의 노력과 그 안에서 아직은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아기 곰의 분투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본다. 이 역시 현실의 모습과는 무관한 우리가 ‘보고 싶은’ 우리의 모습을 투사한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진심, 최선, 낙관의 긍정적 기대를 신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가슴을 뛰게 한다. 그것은 아직은 나와 무관하지만 그러한 문맥 위에 스스로를 놓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기인한다. 전체적으로 씩씩한 모습으로 유쾌함을 유지하는 ‘쿄토칸’사람들의 열정을 통해서 ‘현실을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그럴 수 있다’고 근거 없는 기대와 자신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엄혹한 현실 안에서 무기력하게 무릎 꺾인 우리의 처음을 기억하게 한다는 것, 사는 일이 그렇다고 자조하는 우리에게 ‘올곧은 체축’으로 다시 한 번 서보라고 따듯하게 이야기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충분히 즐겁다. ‘팔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판 것이다’라는 ‘쿄토칸’ 식구들의 자부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重版出來’는 초판을 소진하고 중쇄를 찍어 돈을 벌겠다는 천박한 갈망이 아니라 사람들의 꿈을 짓고 있는 만화가에게 지속적인 창작의 기회를 마련해주려는 편집자의 따듯한 소망이다.
취향에 따라서 이 작품의 그림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서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나쁘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림의 완성도는 독특한 연출이나 완벽한 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의 분위기와 속도 그리고 이야기와 어우러진 정도가 아니겠는가?
<만화규장각> 2016.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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