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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주체로부터 벗어나기

서동욱, 차이와 타자(문학과지성사, 2000)

 

박기수(문학평론가,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을 볼 때 관객들은 그 이야기 끝을 의심하지 않는다. 비교적 느긋한 기분이 되어 행복한 결말을 보장받은 흥미로운 롤러코스터에 몸을 맡기면 되기 때문이다. 명쾌하게 구분되는 두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물은 관객들이 원하는 세계로 성공적으로 편입되며 이야기를 갈무리한다. 인어공주는 인간의 세계로, 야수는 미녀와 함께 할 수 있는 정상적인 인간의 세계로, 타잔은 인간적인 정의의 세계로 등등. 이 분명한 지향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타자에 대한 배제와 동일성에 대한 맹목이다. 맹목의 자세에는 반성이 없다. 인어공주에게 바다는 지상의 삶을 지속적으로 견제해줄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분명하게 버려야될 공간일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바다에서의 삶이 지극히 행복하게 그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버려야만 하는지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왕자가 사는 지상의 세계에 편입되기 위해, 인어로서의 자기정체성을 과감히 포기할 뿐이다.


우리가 이와 같은 견고한 동일성의 신화 속에서 심리적인 안정과 평안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근대적 사유의 양수이기 때문이다. ‘차이다름이 아니며, ‘타자또 다른 주체가 아니라 배제할 것인지 혹은 동화시킬 것인지 결정해야할 대상일 뿐이다. 이와 같은 결정의 한 가운데 근대적 주체가 있다. 차이와 타자; 현대철학과 비표상적 사유의 모험은 그러한 근대적 주체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다양한 사유들의 공통된 정신을 살피고 있다. 그것을 저자는 비표상적 사유의 모험이라고 부른다. 저자는 근대적 주체성은 표상(表象) 활동을 그 본성으로 한다고 했다. 표상은 세계를 주체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서로 차이를 지니는 다양한 것들을 틀어쥐고 동일성의 지평으로 편입시키는 활동이며, 동시에 타자를 늘 지금으로 현재 하는 의식의 현전에 종속시키는 활동이다. 따라서 타자들은 오로지 표상활동의 매개를 거쳐 주체의 지평 위에 종속될 때에만 존립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들뢰즈와 레비나스를 중심으로 비표상적 사유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프로이트, 라캉 등의 이론뿐만 아니라 프루스트, 카프카, 미셸 투르니에, 쿤데라의 작품 등을 통해 비표상적 사유의 다양한 과점을 추적하고 있다.

이 책의 미덕은 우선 전문적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비교적 상세하고 친절하게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용어의 의미와 범위를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발을 무겁게 하는 각주의 나열에 빚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들뢰즈, 레비나스, 칸트, 샤르트르, 프르스트 독법의 내공과 탄탄한 소화력에 기초한 것이다. 생경한 용어로 윽박지르듯 압도하지 않는 저자의 어법은 전문적인 글을 쓰는 다른 이들도 눈 여겨 보아야할 부분이다.

이 책의 중심에 있는 들뢰즈는 최근 소장 연구자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들뢰즈의 사상이 지니는 주변 장르에 대한 유연함이 매력적인 유인요소가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문제는 국내 수용에 있어서 일반 대중들의 접근을 가로막는 것이 그 용어의 문제였다. 그의 중심어인 아이주체그리고 기관 없는 신체등의 용어들은 서양철학 전반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여기서의 명쾌한 정리는 여타의 들뢰즈 관련 독서에 있어서 견실한 주춧돌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만만하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다소의 지적 교양뿐만 아니라 두고두고 참고하며 읽겠다는 느긋한 자세의 독법이 필요한 책이다. 다른 들뢰즈 관련 책들을 볼 때 옆에 두고 참고하며 읽겠다는 마음으로 읽을 대 보다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글쓰기에 최종판이 없듯이, 책읽기에도 끝이 없음을 되새기며 읽을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책을 만나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닐까?

<대구대신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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