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외로운, 그리고 적요한 신열

 

박기수(문학평론가,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한강의 소설은 읽히지 않고 스민다. 아주 낮은 음성으로 스미는 그녀의 언어는 가벼운 신열이다. 거센 통증은 아니어도 신열은 무엇보다 내가 나를 놓을 때까지 반복되는 집요함이 있다. 서서히 몸으로 스미지만 마침내 온몸을 달구어놓고 마는 그것의 저력을 그녀는 일찌감치 터득하고 있는 것 같다. 더구나 화려하고 기이한 이야기의 소설들이 온갖 찬사의 중심에 있는 요즘, 그녀의 속울음 같은 이야기들은 담백한 속맛을 우려내기에 더욱 소중하다.

한강의 주인공들은 고단한 삶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들의 고단함은 죽음과 관련된 거부할 수 없었던 정신적인 상처(trauma)에서 비롯된다. 이청준 초기 작품에서 보였던 정신적인 외상들이 현실의 가공할 폭력에 대한 방어기제였음을 상기할 때, 한강의 그것은 보다 존재론적이라는 측면에서 변별된다. 그녀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거부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자신과 같은 타인의 죽음을 체험했거나, 자신만 살아 있다는 죄의식으로 시달리거나, 거기에서 비롯되는 고아의식으로 단절되어 있거나, 이곳의 삶을 언제든 털어버릴 수 있다고 믿고있거나, 타인과의 소통을 단절시킨 채 자신의 내부를 향한 집요한 응시만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강의 첫 작품이었던 여수의 사랑을 만나보면 이와 같은 특징들을 손쉽게 그러나 고통스럽게 마주할 수 있다.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반복되는 까닭이고, 고통스러운 이유는 외로움과 고단함이 대항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기 보다는 삶의 근원적인 형질이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여동생의 죽음과 나의 의사 죽음 체험(여수의 사랑), 남동생의 죽음(질주), 배다른 형의 광기와 몰락하고 해체되는 가족(저녁빛), 병신 여동생의 실종과 황씨 딸아이의 죽음(진달래 능선) 등 얼핏 여느 고향동네에서 들었음직한 비극적인 이야기들이다. 지극히 통속적일 수 있는 이야기가 한강의 이야기 속에서는 깊은 울림으로 살아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여수의 사랑>에서 화자는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에 의해 동생이 죽임을 당하고 자신만이 그 죽임으로부터 벗어난다. 혼자 살아남은 죄책감과 아버지에 대한 혐오와 분노로 나는 심한 결벽증에 빠진다. 혼자라는 심리적 고립감을 세상의 모든 것이 더럽다는 인식으로 바꾸어 자신의 혼자있음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더럽고 나만 혼자 깨끗하기에 나의 홀로 있음은 당연한 것이고, 따라서 씻는 행위는 나의 깨끗함을 지키려는 노력이며 동시에 다른 이와 내가 다르다는 징표가 된다. 하지만 결벽이 심해질수록 상처는 덧날 뿐이다. 결벽은 세계와의 단절이며 회피이기에 문제의 본질에 다가설 수 없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상처를 지닌 자흔을 통해 한강은 그 상처가 우리 모두의 근원적인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숨이 턱턱 막혀오는 고단함과 막막한 외로움, 그것을 회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운명.

문제는 그러한 고단함과 외로움을 속병처럼 지닌 채 분주히 헛것을 쫓으며 사는 우리에게 있다. 하여 한강의 주인공들은 그러한 헛것을 떨치기 위해 가족으로부터 튕겨나가 있다. 평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한강 소설의 고아의식이 그것이다. 가족은 나의 나됨을 형성시켜주는 곳이며 동시에 나의 나됨을 방해하는 곳이기도 하다. 앞의 것이 세계와 관계되는 나의 나됨이라면 후자의 그것은 존재론적인 차원의 자기인식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한강이 천착하고 있는 삶의 근원성은 다분히 존재론적 비극과 맞닿아 있다.

여수의 사랑이 상처의 속울음이었다면, 검은 사슴은 그것에 대한 치유의 모색이다. 치유는 상처를 앓고 있는 이들에 대한 비극적인 응시에서 시작된다대낮 8차선 도로 한복판에서 옷과 함께 기억을 놓고 알몸이 되어버린 의선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현재의 옷을 벗어버리는 이와 같은 행위는 다분히 제의적이다. 경찰서를 탈출해서 인영의 방을 찾아오고 그녀를 보살펴주는 행위는 의선의 모습에서 인영이나 명윤 모두 그동안 숨기듯 지녀온 자신들의 상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지점에서 이청준의 <황홀한 실종>을 읽어보면, 20여년의 시간차를 두고 두 작가가 상처를 어떻게 보듬고 있는지 비교할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보살펴주던 의선이 돌연 행방을 감추고 그녀를 찾아 황곡에 이르고, 그 검고 고요한 어둠뿐이 그 낯선도시에서 정신을 놓아버린 의선을 찾는 행위는 결국 애써 잊어왔던 자신들의 어둠을 대면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운명의 상처들로 가위눌린 채 지독스런 자기 유폐로 삶을 견뎌온 자들의 자기 조응. 의선의 행방을 찾고 있지만 결국 길 끝에서 만나게 되는 자기 어둠의 고통스런 직면.

이청준이라는 걸출한 작가가 자주 사요하던 중층구조가 분절이 비교적 분명한 공간적 단절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면, 한강의 이와 같은 기법은 다분히 공시적인 중층구조라 할 수 있다. 더구나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그 결을 감춘 한강만의 직조술은 핍진성에 대한 혐의를 떨치기 어렵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매우 두드러지는 재능임에 틀림없다.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상징인 검은 사슴깊은 땅 속막장 동굴의 암반 사이에서 기어다니며 살고 있다는 이 가상의 동물은 한 번도 자신들의 종족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저마다 자신을 외톨이로 여기며 산다지하를 벗어나 하늘을 보는 것이 평생 소원이지만 끝내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죽고마는 비극적인 운명의 짐승. 어둠 속에서 죽고마는 검은 사슴의 운명처럼 제 각각의 상처는 결국 앓고 있는 저마다의 몫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 그럼에도불구하고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할 것은 의선, 인영, 명윤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있고 서로의 모습에서 자신의 상처를 발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명윤의 열병처럼, 인영의 기차사고로 인한 부상처럼 스스로 앓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 삶의 상처들이 존재의 근원의 그것이라면 그것의 치유 역시 자신말고는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깨달음의 중심에 검은 사슴의 치유가 놓인다.


최근 발간된 내 여자의 열매도 이러한 맥락 위에 있다. 상처 속에서 앓고 있는 영혼이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이전의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속울음을 울거나 옷을 벗고 대로를 횡단하는 광기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이다. 거칠게 단순화시킨다면, 검은 사슴에서 발견했던 치유의 시작이 그 상처와 맞서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구체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상처의 치유에 성공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오히려 이제 한강의 치유가 본격화되고 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그것은 그동안의 상처가 존재론적인 차원의 것이었다면, 이제는 각자의 존재론적인 상처가 차이로 드러나고 그것이 어긋남으로써 다시 상처가 된다는 영역까지 그의 상처와 치유가 확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평생을 외롭게 산 사내는 번잡스럽고 화려한 지역의 아파트에서 정착해서 살고 싶어하고, ‘평생을 정착하지 않고 살고 싶어하는 아내의 단절을 환상적인 기법으로 그려낸 <내 여자의 열매>. 몸의 멍으로 시작하여 끝내 푸른 식물로 변해버린 아내. 멍으로 수렴되는 아내의 외로움, 외롭기에 안정된 가정을 원하는 남편이 정작 자신의 집을 구리고 나서는 아내가 푸른 식물로 변해가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섬득한 단절, 다시는 자신의 힘으로 떠날 수 없는 식물이 되고나서야 아내를 돌아보는 남편의 어리석은 외로움.

이와 같은 어긋남은 <어느 날 그는>, <아기 부처> 등에서도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어긋날 대상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자폐적인 자기 유폐에서 벗어난 인물상이라는 점과 그 어긋남을 통해 함께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 그것이 다시 자기 내부를 비움으로써 찾을 수 있다는 인식에 이르고 있다는 점에 이 작품의 성과 중에 하나다.

한강은 집요하게 흐르고 있다. 그녀의 작품을 읽다보면 그녀의 생물학적 연령이나 데뷔년도가 작품을 판단하는데 소용이 닿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집요함은 존재론적인 상처들을 계속 천착하고 있다는 의미 외에도 새로운 각도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또다른 방식으로 그리려고 한다는 점에서 부박하고 혼돈만 가중시키는 몇몇 소설과 대비되어 매우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강은 자신의 삶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동반되지 않는 즐거움은 결코 낙()에 이르지 못할 쾌()일 뿐이라고 소리없이 강변하고 있다.

󰡔BOOKPARK󰡕 20006월호

블로그 이미지

홑섬

스토리텔링, 트랜스미디어스토리텔링, 향유, 팬덤, 문화콘텐츠, 애니메이션, 영화, 웹툰, 여행, 살아가는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