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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 아닌 사람으로 기억될 그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선수, 이승엽이 은퇴를 한다. 평범한 직장생활을 했어도 길고 긴 23년이라는 시간을 숨 막히는 승부의 정글 속에서 버텨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그 시간 내내 그는 늘 최고였고 현재진행형의 살아있는 기록이 아니었던가? 더구나 마흔둘의 나이에도 최고의 기량으로 최선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은퇴시기를 미리 정하고 스스로 물러나는 그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은퇴 투어가 진행되는 동안 그와 관련된 프로야구 기록과 극적인 순간의 영상 그리고 팬들과의 숱한 미담이 쏟아졌다. 그 모든 기록과 승부와 미담 가운데 인간 이승엽이 보였다. 홈런을 치고도 상대 투수에 대한 예의로 고개를 숙이고 홈으로 들어온다거나, 벤치 클리어링 이후에도 상대 외국인 선수를 다독이는 모습에서 배려하는 최고를 보았고, 언제나 자신이 아닌 코칭스텝이나 동료들에게 공을 돌리는 모습에서 겸손의 최고를 보았고, 홈런왕이 되고나서도 끝없이 스윙폼을 바꾸는 모습에서 최선 없는 최고가 없음을 보았다. 잊을 수 없는 것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 준결승에서 일본을 물리치고 그가 보였던 뜨거운 눈물이다. 올림픽 기간 동안의 부진으로 그가 느꼈을 부담감, 자책감, 책임감을 8회 역전 홈런으로 떨쳐내고 흘리던 그 뜨거운 눈물의 진정성에 우리는 같이 울며 공감하며 희망을 꿈꾸지 않았던가.

사실 돌아보면 최고는 늘 우리 곁에 있었다. 최고는 누군가의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자의 것일 뿐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이승엽은 우리에게 왜 이토록 특별한 것일까? 은퇴 투어 내내 다른 구단과 선수단에서 그에게 준비해준 은퇴선물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가 우리에게 어떻게 기억될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는 단지 기량이 뛰어난 야구선수, 최고의 기록을 가진 야구선수가 아니라 겸손과 배려라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아는, 최고가 아닌 최선으로 기억되기 위해 노력한 야구선수였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물러설 때가 아름답기 어렵다.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자신이 어긋나 있고, 언제나 욕망은 불만족의 현재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때를 정하고 단호하게 은퇴를 택하는 것은 자기 삶에 대한 자존심이 아니겠는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또 다른 삶에 대한 꿈꾸기를 통해 온전한 자기 삶을 가꾸어내려는 노력이 그것이다.

살아가야할 시간은 늘고 있는데 은퇴 시기는 점점 빨라지는 지금 이곳에서 이제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이승엽처럼 최고는 아니겠지만 자기 나름의 아름다운 은퇴는 준비할 수 있지 않을까? 마무리로서의 은퇴가 아니라 제2의 인생을 위한 출발로서의 은퇴 말이다. 물론 그것은 은퇴 이후의 경제적인 삶을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에 대한 섬세한 준비와 남은 생을 어떻게 가꾸어갈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껏 그래왔듯이 통장의 잔고나 부동산 혹은 연금이 그 준비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금 이곳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후회를 두지 않는 것에서부터 은퇴할 적절한 시기를 가늠하는 것과 은퇴 이후 더 멋진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 준비에는 많은 생각과 상의와 가늠이 필요할 것이다. 준비 없이 충실했던 시간이 어디 있던가? 이러한 준비에 앞서 우선 노트 위에 그동안의 삶의 기록들을 정리해보면 어떨까? 그동안 무엇을 위해(Why), 무엇을 하며(What), 어떻게 살아왔는지(How) 꼼꼼하게 적어보고 진솔하게 스스로 물어보자. 그래서 행복했는지?

전설은 숫자상의 기록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그 기록을 세운 사람이다. 기억하고 이야기할만한 가치를 삶을 통해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사람, 그를 우리는 살아있는 전설이라 부른다. 살아있는 전설 그가 있어서 우리는 행복하다.

 

2017.10.13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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