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 맛집 앞 우울한 풍경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삼미식당 앞 대기줄
타이베이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7박 8일간 중국 서안 출장을 다녀오자마자 출발하는 일정이라 모든 여행 일정을 대학교 새내기인 첫째가 짰다. 대학입시로 몇 년간 가족 여행은커녕 식사조차 함께하기 어려웠고, 첫째가 끝나자 둘째가 곧 시작해야하는 상황이라서 무리를 해서라도 떠나야 했다. 지난 10월 저렴한 비행기표가 있다는 첫째의 충동질에 얼떨결에 예약을 하고는 학교일로 경황이 없어서 계획은 엄두도 내지 못할 상황이었다. 다행히 첫째는 인터넷을 뒤져가며 마치 몇 번을 다녀온 사람처럼 4박 5일의 시나리오를 꼼꼼하게 준비하였다.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첫째는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저녁을 먹으러 가야한다고 다그쳤다. 택시를 타고 도착해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연어초밥이 맛있다고 소문이 난 덕분에 개장보다 30분 일찍 도착했지만 이미 40분쯤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번호표를 받고 심지어 주문할 음식까지 적어내고 나서보니 온통 첫째 또래의 한국인들이다. 그렇게 어렵게 저녁을 먹고 나니 다음은 타이베이 3대 빙수를 먹어야 하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는 유명 제과점의 빵을 사야 한단다. 돌아오는 날까지 이러한 먹방 투어는 계속되었다.
여행 내내 불편한 풍경이었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타이베이의 물가가 한국에 비하여 저렴한 편이고, 일본 식민지로 인하여 중국음식과 일본음식 문화가 절묘하게 결합된 음식을 풍성하게 즐길 수 있고, 먹방 여행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했다는 점에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곳으로 타이베이가 인식되었다는 점은 쉽게 수긍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똑같은 맛집과 똑같은 먹거리를 찾는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유는 성실하고 역동적인 블로그에 있었다. 인터넷에서 대만여행을 검색하면 46만개 이상의 블로그 기사를 만날 수 있다. 그것들은 아주 친절하고 상세한 최신 여행정보, 그곳에서 반드시 체험해야할 것들, 그것에 대한 단호한 평가, 효과적으로 즐길 수 있는 꿀팁들까지 풍성하게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집단지성의 자발적이고 긍정적인 구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디지털 내이티브인 젊은 세대들에게 블로그는 타자와 연결하는 공간이며, 그들의 공감을 통해서 자신의 체험을 평가받을 수 있는 공간이고, 이를 토대로 정서적 유대를 공유하는 살아있는 스토리텔링의 장이 아니던가?
하지만 분명한 것은 스토리텔링의 핵심은 청중과의 연결, 청중의 적극적인 참여, 정서적 유대를 기반으로 한 자유로운 공유다. 스토리텔링이 제대로 전개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함께 나눌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오래 기억에 남을 만큼 차별성이 있어야 하며, 그것으로 인하여 청중의 긍정적 변화가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타이베이 맛집 앞에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한국 젊은이들이나 그들의 블로그에 빠져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해진다. 기계적인 연결과 맹목적인 참여 그리고 무조건적인 정서적 유대는 파시즘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곳에는 그것이 연결하고 참여하고 공유할만한 가치 있는 것이냐는 근본적인 질문이 빠져있다. 더구나 가치 있는 것이냐는 근본적인 질문은 지속적인 비판과 토론의 과정을 통해서 구성해가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타이베이 맛집 앞에서 인정투쟁 벌이듯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한국 젊은이들의 모습은 다소 우스꽝스럽거나 우울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지금 이곳이 아닌 곳에서 자유롭게 너와는 다른 심지어 떠나기 전의 나나와도 다른 나를 만나기 위함이 아니던가? 이미 누군가 샅샅이 훑고 가면서 자신의 눈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하여 공유한 곳을 다시 따라가며 그가 좋다고 했던 것들을 그대로 다시 해보면서 우리는 자유를 만날 수 있을까, 또 다른 나를 만나 볼 수 있을까? 그들과는 다른 나만의 체험을 구현할 수 있을까?
2017.03.10.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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