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 없는 이야기, 이야기 없는 갈등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갈등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살면서 되도록 피하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갈등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즐기는 콘텐츠는 대부분 갈등을 매개로 스토리텔링을 전개한다. 아주 거칠게 말하면 갈등이 발생해서 해소하는 과정이 하나의 이야기다. 영화, 드라마, 웹툰, 게임, 소설 등 모든 극적 서사의 핵심은 갈등이다. 그 갈등이 얼마나 밀도 있게 긴장을 유지할 수 있느냐, 갈등을 통한 변화가 가치 있는 체험을 만들고 있느냐가 극적 서사의 관건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콘텐츠에서 갈등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물론 표면적으로야 극복해야할 대상이 있고 해소시켜야할 문제가 있다. 하지만 좀 더 꼼꼼하게 살펴보면 본격적인 갈등은 솜씨 좋게 빠져있다. 최근 콘텐츠에서 갈등은 최소한 서사 전개에 필요한 만큼만 제시되거나 제시된 갈등도 지극히 연성화 되어 있다. 뚜렷한 가치를 지향하는 각각의 적대적 세력이 존재해야하고 그들 간의 치열한 경쟁과 다툼 안에서 공감할만한 가치를 찾고 지지하는 과정을 갈등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삶의 또 다른 부면을 드러내거나 새로운 인식에 이르게 할 수 있도록 심화되어야 한다.


최근 <분노의 질주-더 익스트림>을 보았다. 압도적인 스펙터클과 근육질 수퍼히어로를 전면화한 이 영화에서 깊이 있는 캐릭터나 그들 간의 본질적인 갈등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의 질주> 시리즈의 전편에서 드러났던 적대세력과의 가치의 분명한 대립조차 이번에는 사라져 버렸다. 전편에 해당하는 <분노의 질주-더 맥시멈><분노의 질주-더 세븐>에 적대 세력이었던 오웬 쇼나 데카드 쇼가 같은 편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프랜차이즈 필름의 전략이라고 수긍한다 해도, 적대세력으로 등장하는 사이퍼 일당의 행위 동기가 불분명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우니 갈등의 동인이 마련되지 않는다. 몰랐던 아이의 등장으로 인하여 도미닉이 동료들을 배신하고 맹목적으로 사이퍼의 명령을 따른다는 설정은 가짜 갈등일 뿐이며 난센스다. 어디 이 영화만의 일이겠는가? 할리우드의 영화들은 프랜차이즈화 되면서부터, 우리 영화는 소재주의에 함몰되면서부터 갈등을 통한 깊이 있는 사고나 가치의 탐구 내지 선택은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인사청문회가 한창이다. 이름이 무겁고 맡아야할 역할과 책임은 더 중요한 만큼 도덕적 의무와 업무수행능력에 대한 검증은 철저할수록 좋은 일이다. 그 검증이 극적 갈등처럼 뚜렷하게 성격화된 두 세력의 토론과 쟁투의 생산적인 대립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나의 소망만은 아닐 것이다. 극적 갈등은 갈등에 참여한 두 세력을 변화시키고, 그 변화의 과정을 통해 가치를 창출하는 까닭에 실천적인 긍정을 낳는다. 완성도 높은 극적 갈등은 항상 향유자의 선택에 따라 각각 긍정할 수 있는 적대적인 두 세력을 제시하고, 그들 간의 심도 있는 토론과 치열한 쟁투를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누가 승리했느냐가 아니라 갈등의 과정을 통해 향유자가 느끼고 깨닫게 될 삶의 지혜다. 결국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싸움이 아니라 본격적인 갈등이고, 갈등을 통한 변화다.

우리는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갈등이 부재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것은 갈등이 없는 현실에 살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변화를 추동할 갈등, 서로 다른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고 그 중 최선의 것을 선택하는 갈등에 현실이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현실은 온통 갈등의 요소들로 충만한데 정작 갈등의 과정을 통해 그것을 해소하는 길은 찾지 못하니 분노와 적개심만 들끓을 뿐이다. 분명한 것은 적개심과 분노만으로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변화를 이끄는 것은 건강한 갈등이다.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의 맹폭에 오랜만에 갈등다운 갈등을 보였다는 영화<대립군>이 고전이란다. 이번 주말에는 온 가족과 함께 <대립군>을 보며 갈등이 빚어내는 긴장과 삶의 변화 그리고 깊이를 읽고 싶다. 갈등이 그리운 늦봄이다.

 

2017.06.23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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