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떠나는 여행

728일 얼바인세도나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아침 7시에 렌터카를 인수하기로 했다. 렌터카 회사가 집에서 10마일(16)쯤 떨어져 있으니 우리차로 가서, 렌터카는 내가 몰고, 우리 차는 아내가 몰고 와야 했다. 미국에서 처음 차를 렌트하려다 보니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나보다 영어가 원활한 첫째를 태우고 가야했고, 그러다보니 둘째만 집에 둘 수가 없어서 결국 온 가족이 가야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졌다. 여행 전날이라고 이것저것 준비하며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들은 일찍 자라는 말에도 흥분이 되는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는 눈치였다. 밤이 길어지면 아침이 분주하다. 결국 분주한 만큼 출발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405도로를 타고 10여분쯤 달리다가 빠져나와서 우회전을 하려는데, 뒤에 있던 BMW가 슬그머니 와서 우리 차를 받았다. 추돌 사고였다. 미국에서 이런 일을 처음 당하는 일이라 황망해하며 내렸다. 뒤에 BMW로 가보니 운전자는 창문도 내리지도 않고 안에서 혼자서 떠들 뿐이었다. 일단 갓길로 대라고 손짓을 하니 그제야 뒤따라왔다. 교통사고가 나면 어떤 경우에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을 이곳에 오자마자 들었는데, BMW 운전자는 느릿느릿 내리더니 역시 미안하다는 말이 없다. 화가 났지만 내차에 큰 이상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가라고 했더니 그제야 미안하단다.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나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하지만 횡단여행을 떠나는 첫 날이 아니던가? 아침, 첫날, 새봄 등등 처음 시작하는 것에 유난히 큰 의미를 부여하는 버릇이 있는 나를 알기에, 여행을 시작하며 화를 내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스스로 타이르고 있었다. 더구나 길거리에서 그를 잡고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아이들 보기에 볼썽사나울뿐더러 이미 놀라 있는 아이들은 더욱 불안해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람의 태도를 문제 삼아 사과를 받아내기에는 불행히도 나의 영어실력이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저 횡단여행의 액땜을 했다고 믿기로 했다.

렌터카 회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예정보다 30분쯤 늦었다. 예약을 확인하고 서류를 작성하고 났더니 하루 15달러를 추가부담하면 보험이 가능하단다. 렌터카 보험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225달러의 예상하지 못한 경비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보험을 들지 않고 횡단을 시도하는 것은 또 얼마나 무모한 일이겠는가?

모든 서류 처리를 끝내고 차를 인수하고 보니 전에 설명했던 차가 아니었다.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고 아내와 풀 사이즈 카’(full-size car)의 크기가 얼마만한지, 그보다 한 사이즈 작은 스탠더드 카’(standard car)급과의 연비 차이는 얼마가 되는지, 그리고 MP3는 사용 가능한지 등을 알아보기 위하여 렌터카 회사를 미리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담당자 말이 어느 차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도요타 캠리나 닛산의 알티마2.5[각주:1] 정도가 될 것인데, 캠리는 예약 상 없을 듯하고 알티마2.5가 될 것이라고 했다. MP3는 사용 가능할 것이고, ‘스탠더드 카급과의 연비 차이는 크게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알티마2.5겠지 했는데 느닷없이 브라운색 마즈다6. 알티마2.5가 마즈다6보다 좋은 차인지 아닌지는 몰아본 적이 없는 내가 알 턱이 없었지만, 예상했던 것이 아니라서 다소 실망스러웠다.

마즈다6의 기어인데 D로 출발을 했어야 했는데, M에 놓고 출발을 해서 엄청난 소음과 저속을 경험하였다. 운전한지 20년이 넘었는데 낯선 것은 낯선 것이다.

차량 외부와 6,000마일(9,650) 정도 주행한 것으로 보아 새 차인 것은 분명한데, 차량 내부를 보니 마치 5-6년은 운행한 차처럼 보였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른 차가 없냐고 하니까 없단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모든 숙소 예약이 끝나있는 상황이고, 오늘 달려야 할 거리와 시간은 그렇지 않아도 넉넉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내와 둘째를 우리차로 보내고, 나는 첫째와 그 차를 몰고 나왔다. 그런데 조금 달리다보니 차량소음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몇 번을 달리고 서고를 반복해보았는데, 이 차로는 횡단은 둘째 치고 집까지 가는 것도 어려웠다. 차를 돌려 다시 렌터카 회사로 가서 차량 소음이 너무 심하니 다른 차로 바꾸어 달라고 했다. 직원이 나와서 시동을 걸더니 무슨 소음이 나냐고 묻는다. 혹시 D가 아니라 M에다 놓고 운행한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저속기어에 두고 운전을 했으니 그 소음이 오죽했으랴, 추돌 사고와 마음에 들지 않는 차, 떠나려는 바쁜 마음이 겹쳐서 바보 같은 짓을 한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 차는 싫었다. 그래서 다시 강력하게 차를 바꾸어달라고 하자 직원은 난감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편도(one-way)로 뉴욕까지 가는 우리에게 좋은 차를 주기 싫어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더욱 강력하게 요구했다. 만약 다른 차가 없다면 하나 아래의 스탠더드 카급의 차라도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이해할 수 없다며 코발트색 마즈다6을 보여주었다. 5,000마일(8,046) 정도를 달린 새 차인데 내부도 비교적 깨끗한 편이었고, 운전을 해보니 앞에 차보다 편했다. 이 차로 하겠다고 했더니 처음부터 서류를 모두 다시 꾸며야 한단다. 그제야 직원이 왜 그렇게 싫은 기색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같은 차종인데 그냥 타지, 왜 서류를 다시 꾸미게 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뉴욕까지 15일을 같이 해야 할 차인데 마음에 들지 않는 차로 찝찝한 기분에 달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차에는 MP3 연결잭이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조수석 햇빛 가리개에 끼워놓고 들었더니 소리가 제법 들을만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동안 여행에서 운전의 피로를 풀어주던(때론 피로를 가중시키던) 유진이의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예약하면서 몇 번을 확인했는데, 그 때에는 MP3 연결 잭이 있다고 해놓고서 막상 차를 받고 보니 없었던 것이다. 횡단하면서 듣겠다고 유진이가 며칠 전부터 음악파일을 다운 받고, 정리해 놓은 터였다. 운전하는 나도 나였지만 차 안에서 장시간을 견뎌야 하는 가족들이 더 큰 문제였다. 무엇보다 유진이의 실망이 걱정 되었다. 유진이에게 미안해서 이거 어떻게 하지?”라고 했더니, 아이는 추돌 사고에 차 교환 등으로 이미 놀라고 지쳐있었다.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이팟 자체 스피커로 들으면 된단다. 아이가 아빠보다 현명했다. 고민 끝에 아이팟을 조수석 햇빛 가리개에 끼워 놓고 음악을 듣기로 했다. 손에 쥐고 있을 때보다 위에서 소리가 나니 훨씬 음량이 좋았다. 다소 옹색하긴 했지만 어쩔 것인가, 없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하면 통()한다.

집으로 돌아와 짐을 실었다. 떠나 있는 기간에 비례해서 짐은 늘고, 여정이 진행될수록 짐으로 인한 수고도 는다. 큰 캐리어 하나, 작은 캐리어 하나, 12개들이 햇반 두 상자, 카레를 비롯한 즉석 요리 24, 6개들이 컵라면 세 박스, 노트북, 카메라 가방, 아이들 작은 가방, 1리터 생수 24개 한 상자, 약과 간식이 들어 있는 아내의 가방, 여행 중 아이스박스 역할을 해 줄 방수 가방 등이 전부였다. 21일 간의 여행이지만 캐리어와 카메라 가방, 노트북 등을 제외하고는 가는 도중 모두 먹어 없어질 것들이었다. 비행기로 돌아올 때 짐을 최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옷은 가급적 적게 가지고 가기로 했다. 나는 마치 난파선에서 짐을 꺼내어 물품을 확인하는 15소년 표류기[각주:2]의 소년들과 같은 기분이 되어 다소 흥분하고 있었다.

먼 길 떠난다고 옆집에 사시는 이 교수님 사모님은 짐을 싣는 내내 곁에서 도와주시며 배웅을 해주셨다.[각주:3] 얼바인을 벗어난 차는 평균 시속 70마일(112)로 달리면서 점차 내게 익숙해졌다. 차가 익숙해지자 마음이 놓이면서 차 안의 장치들이 궁금해졌다. 특히 내 차에도 있지만 활용하지 못하고 있던 크루즈(Cruise) 기능이 눈에 들어왔다. On 버튼을 누르고 가속 스위치를 올리니 크루즈 기능이 작동되었다. 옐로우스톤 여행에서 돌아오다가 라스베이거스 근처에서 과속으로 벌금을 문 이후로 정속운전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프리웨이에서 속도를 내다보면 어느새 과속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크루즈 기능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허용되는 최대속도에 크루즈 기능을 설정해두면, 과속 염려도 없을뿐더러 엑셀을 밟지 않아도 되니 일석이조였다. 덕분에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영락없는 나비족으로 만들어주는 팔토시다. 그렇다면 팔토시가 아바타인가? 빼는 것을 잊고 차에서 내리면 여지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하는 패션 아이템이다.

동부에서는 화씨 117(섭씨 47)까지 올라가는 기록적인 찜통더위로 33명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전해졌지만, 우리가 있는 서부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의 여름을 생각하면 쾌적한 편이었다. 기온은 높이 올라가도 건조한 날씨 때문에 그늘에 있으면 오히려 서늘했다. 낮에 무방비로 햇빛에 노출되는 것만 피하면 더위는 큰 문제가 아니어서 여름 내내 냉방기를 한 번도 틀지 않고 지냈으니 말이다. 문제는 우리의 여행이 서부에서 동부로 간다는 것이고, 더구나 낮 시간 동안 사막지대를 건너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막지대의 열기는 살인적인 것이었는데, 네바다 사막지대를 달리다보면 차가 과열 될 수 있으니 에어컨을 끄라는 경고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정도였다. 기온뿐만 아니라 차창으로 내리쬐는 자외선도 큰 문제였다. 피부가 까맣게 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화상을 입기 십상이었다. 더구나 8시간쯤 달려야 한다면 자외선 차단제로는 한계가 분명했다. 그래서 미리 한인마트에서 특수소재로 만들었다는 쿨토시(팔토시)를 준비했다. 토시를 끼면 손가락 두 마디만 남기고 손부터 시작해서 팔뚝까지 온전히 덮을 수 있었다. 게다가 특수소재라 가볍고 얇을뿐더러 시원하기까지 했다. 재미있는 것은 팔토시의 색깔이 파란색이어서 그것을 끼고 나면 영락없는 <아바타>(Avatar, 2009)의 나비족이었다. 팔토시는 보기보다 시원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민망했다I-15를 타고 가다가 주로 I-40을 달렸다. 우리가 달리는 길옆으로 Route66이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Route66은 도로의 형태나 기능을 잃은 곳이 많았고, 새로 만든 표지판만 어색하게 선명했다.

존 스타인벡이 ‘The Mother Road’로 명명한 Route66은 시카고에서부터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까지 2,200마일(3,500)에 이르는 동부와 서부를 잇는 동맥으로서 미국의 역사와 함께 한 도로였다. Route661925국가 고속도로 시스템 구축 계획이 발표된 이후, 각 주정부에 의해 건설되었고, 1940년 이전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리노이 주-미주리 주-캔자스 주-오클라호마 주-텍사스 주-뉴멕시코 주-애리조나 주-캘리포니아 주를 이어준 Route66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서처럼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 떠나던 절박한 길이었고, 2차 세계 대전에는 전장으로 가는 병사들을 실어 나르던 의무와 명분의 길이었으며, 전후에는 자동차와 함께 개인의 자유를 구가하던 낭만의 길이기도 했다. 그렇게 미국의 역사와 함께 영욕의 세월을 건너던 Route66은 속도와 효율이라는 이름 앞에 낡은 도로가 되어 갔고, 마침내 1985년 공식적으로 폐쇄되었다. Route66은 도로건설 기술이 현재와 같이 발전하기 이전에 건설된 도로였고, 주정부가 건설하다보니 도로의 이용률을 높이기 위해 주요 도시의 중심도로로도 쓸 수 있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횡단도로로서의 효율성 면에서는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Route66은 속도와 효율의 시대를 건널 수 없었고, 최단 거리, 최단 시간의 고속도로들에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워버린 Route66을 살려낸 것이 존 라세터(John Lasseter)의 애니메이션 <>(Cars, 2006)였다. <>Route66의 어느 한 마을인 듯한 라디에이터 스프링스를 배경으로 단지 레이스에서 이기는 것 말고도 삶에는 더 중요한 것이 많다는 메시지를 전해준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성취, 효율, 속도만을 강조하는 현재의 삶에 대비하여 과정, 즐거움, 여유로 상징되던 Route66의 추억을 상기시켜주었다.

픽사 애니메이션 스토리텔링을 분석하기 위하여 존 라세터에 관한 자료를 모으다가 <Cars>의 제작 동기에 대한 언급이 눈에 뜨였다. 2001년 존 라세터의 아내는 가족 여행을 제안하며 가족에게 좀 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모르는 사이에 아이들이 훌쩍 자라 우리를 떠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가족의 소중한 부분을 영영 잃고 말 것이라고 했단다. 그 말은 마치 내 아내가 나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아내와 존 라세터의 아내가 서로 통화하는 사이도 아닐 터이고 보면, 일 때문에 가족들에게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하는 것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나보다. 아내의 그 말을 들은 존 라세터는 인생이라는 여정은 인간에게 주어진 상과 같다. 성취한다는 건 참 멋진 일이지만 축하해줄 가족과 친구가 없다면 모든 게 무의미하지 않겠는가?”라며, 가족들과 두 달 동안의 트레일러 여행을 떠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Cars>를 제작했단다.

아마 그때였으리라, 연구년을 미국으로 간다면 반드시 가족들과 Route66을 함께 여행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횡단여행이 시작되었다. 21일 동안 오롯이 가족들과 함께 달려가야 할 즐거운 여정이다. 지금 이곳이 아니라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서로의 모습과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서로의 얼굴에서 자신을 볼 수 있으리라는 느슨한 기대를 품어본다.

Route66은 이제 다른 도로 아래에서 달리거나 끊어져 있다. I-40표지판 옆에 Route66이 함께하는 것은 그런 이유다. 표지를 따라 내려서면 쇠락한 마을이거나 끊어진 길의 어디쯤이다. 시대적 효용을 잃는 것들의 쓸쓸한 모습과 같다.

Route66은 달리던 그 시간에 멈추어 있었다. 멈춘 시간을 멈춘 그대로 두었다면 그 시간은 차라리 나름대로 흐를 수 있지 않았을까? 멈춘 시간을 현재의 시간 위에서 색칠하려다 보니 그것은 추억 없는 기억이 되거나 아주 천박하게 화려해진 슬픔이 되고 말았다. 길은 사라지고 도로표지만 살아서 관광객들을 부르고 있었지만 싸구려 기념품으로는 추억을 만들 수는 없었다. 지금 이곳의 Route66이 추억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그 길과 같은 시대를 달리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길을 달리던 시대의 미덕들이 가뭇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경쟁, 효율, 성취라는 목표지향적인 삶의 속도는 협력, 여유, 과정의 미덕을 야유할 뿐이었다. 그 야유 속에서 소중한 것들은 서로의 곁을 떠나거나 흔적 없이 사라져 가고 말았다. 존 라세터가 <>에서 그리워하며 복원하고 싶어 했던 것은 낡은 도로의 추억이 아니라 그곳을 달리던 시대의 미덕들이 아니었을까? 낡은 Route66은 그렇게 길 아래로 나란히 달리며 부서지고 있었다.

Route66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곳곳에서 내려서 달려보았지만, 길은 현재도 과거도 아닌 어정쩡한 시제로 바람에 날릴 뿐이었다. Route66 옆으로 달리는 I-40은 지평선이 이끌고 있었다. 길은 높낮이와 곱고 굽음의 차이가 있을 뿐 집요하게 지평선을 향해 있었고, 지평선은 끝 모를 하늘을 향해 앞으로만 달리고 있었다.

서부쪽의 고속도로는 대부분 지평선을 보고 달려간다. 지평선을 이끄는 것은 늘 하늘이다.

캘리포니아에서 멀어질수록 사막과 스텝의 중간지대가 끝없이 이어지고, 이따금 마을들이 달려왔지만 빠르게 뒤로 달아날 뿐이었다. 몇 시간을 줄곧 앞으로만 달리는 길이니 사만다는 긴 침묵에 빠져 들었다. 여행을 떠난다는 마음에 밤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던 아이들은 차가 캘리포니아를 벗어나자 각자의 취향대로 잠이 들었다. 자기는 음악을 틀어야 한다며 아내 대신 굳이 조수석에 앉은 유진이는 의자를 잔뜩 눕힌 채 다리를 대쉬보드에 올리고 목베개를 하고 잠이 들었고, 효진이는 언제나 그렇듯 아내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 물론 강한 햇빛은 햇빛 가리개로 모두 가리고, 아내의 도라에몽 가방에서 나온 간식을 배불리 먹은 뒤의 일이었다.

지나치는 풍경이 아까워 밖을 보라고 깨우려다가 그대로 두었다. 살아가면서 아무런 걱정 없이 배불리 먹고 엄마 무릎 베고 따듯하게 잠들 날이 또 앞으로 몇 날이나 될 것인가? 그래 많은 것을 보는 것만 여행의 풍미겠는가? 자기 취향대로 느끼고 가져가 두고두고 따듯해할 수 있는 기억을 일구는 일이 여행의 기쁨 아니겠는가? 여행준비로 피곤했던 아내도 졸릴 것이 분명한데 운전하는 내가 졸까봐 룸미러로 나를 훔쳐보며 계속 이야기를 걸고 있었다. 서너 시간쯤 달린 후, 유진이가 깨서 음악을 틀자 안심이 되었는지 아내도 스르르 잠이 들었다.

서부 쪽 고속도로[각주:4]에는 한국식 휴게소가 없다. 서부 쪽 고속도로는 무료로 운영되기 때문에 길에 올라서고 내려서는 일이 비교적 자유롭다. 그래서인지 굳이 고속도로에 휴게소를 만들지 않고, 고속도로 진출입로 주변에 음식점, 주유소, 숙박시설을 표시해둘 뿐이다. 물론 고속도로 위에 아주 드물게 쉼터(Rest Area)를 두지 않는 것은 아니나 간격이 너무 멀고, 화장실과 피크닉이 가능한 식탁 정도가 놓여 있을 뿐이니 한국식 휴게소와는 거리가 멀다. 반면, 동부 쪽 고속도로들은 유료도로(Pike, Turnpike)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한국식 휴게소와 비교적 유사한 휴게소들이 고속도로 위에 있다.

캐나다 마트의 전경이다. 주유소와 마트가 결합된 미국의 전형적인 주유소이다. 건물을 압도하는 타이포그래피가 오히려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더해주던 곳이다.

가족들이 모두 잠에서 깬 것은 다섯 시간 넘게 달리고 주유하기 위해 애리조나 주 킹맨(Kingman)에서 고속도로를 내려섰을 때였다. ‘캐나다 마트라는 생뚱맞은 이름의 작고 낡은 마트는 주유소도 함께 하고 있었다. 이곳은 휘발유 가격이 1갤런에 3.38달러로 얼바인에서 가장 싸다는 코스트코 주유소의 3.67달러에 비해 29센트나 저렴했다. 그깟 29센트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횡단의 거리를 생각하면 이 금액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12갤런을 주유했으니 3.48달러를 아낀 것이다. 빠듯한 여행 경비도 절약해야 했지만, 동부의 대도시로 가면 이곳에서 아낀 기름 값만큼 혹은 그 이상 지출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미국에서는 주유소와 편의점을 함께 운영하며, 화장실은 편의점 안에 있기 때문에 주유를 하고서는 편의점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고속도로 위에는 한국식 휴게소가 없으니 주유할 때 반드시 화장실을 가야만 한다. ‘캐나다 마트라는 곳은 일반 관광객보다는 트럭기사들이 주 이용객들인 것처럼 보였다. 화장실에는 독립적인 샤워부스가 여러 개 설치되어 있었지만 화장실 시설은 오히려 아주 소박했다. 마트 안팎으로 Route66을 강조하고 있었지만, 관련성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소박한 수준의 Route66 기념품뿐이었다.

킹맨에서 세도나(Sedona)까지는 세 시간쯤의 거리였다. 잠에서 깬 아내와 아이는 이번 여행의 기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유진이는 자기가 미리 조사해둔 몇몇 곳을 꼭 들러줄 것을 요구했고, 효진이는 수업시간에 배운 보스턴과 워싱턴의 몇몇 유적지를 구체적으로 대면서 꼭 보아야 한다고 했다. 아내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뉴욕을 가장 많이 기대하는 눈치였다. 나는 구체적인 어떤 곳이라기보다는 달리는 동안 만나게 될 풍경들과 차 안에서 나누게 될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말 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여행 출발 전에 약속했던 여행의 기록을 각자 어떤 식으로든 남기자고 제안했다. 아내는 신혼여행부터 꼼꼼하게 기록해왔으니 말하지 않아도 그럴 것이고, 아이들도 모두 좋다고 했다. 아내는 첫 여행부터 냉장고 자석을 모으고 있었고, 유진이는 엽서와 각종 팸플릿들을 모아왔는데 이번에는 효진이도 그러겠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동방신기의 노래를 몇 번쯤 듣는 사이 표지판은 세도나 인근의 플래그스태프(Flagstaff)를 가리키고 있었다.

항상 눈이 먼저 현혹되고 만다. 사만다의 안내가 없었음에도 플래그스태프 표지판을 보자마자 차는 벌써 길을 내려서고 있었다. 사만다는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우리가 미웠는지 잠시 먹통이 되었다가 플래그스태프를 한 바퀴 돌 때쯤 비가 조금씩 내리자 정신을 차렸다. 사만다가 일러주는 길을 몇 번 놓친 끝에 Arizona 89A를 만나서 오크 크릭 캐니언(Oak Creek Canyon)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Midgley Bridge의 전경이다. 아래로 트레킹 코스가 위험스런 유혹을 하지만 위로는 평온한 다리일 뿐이다.

슬라이드 록 주립공원(Slide Rock State Park)에 들어서자 이미 붉은색의 강한 기운이 산과 절벽들로 이어진 풍경을 압도하고 있었다. 하늘은 흐린 날씨 탓인지 먹구름이 몰려들어 석양과 좀처럼 어울리지 못하고 사나운 표정이었다. 달려드는 풍경에 이끌려 몇 번인가 위험을 무릅쓰고 차를 세웠다. 갓길이라기에는 너무 협소한 곳에 차를 세우고 몇 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기대했던 것만큼의 풍경이 잡히질 않았다. 광각렌즈로 바꾸어 보았지만 렌즈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사진이 될 만한 뷰 포인트는 모두 유료화 되어 있었고, 그곳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온전히 풍경을 담을 수 없었다. 트레킹을 하며 풍경 안으로 좀 더 들어가야 얻고 싶은 사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시간이 없었다. 날은 흐리고 해는 이미 지고 있었다.

오크 크릭 캐니언에서 세도나로 들어서는 길에 미즐리 브리지(Midgley Bridge)를 만났다. 평소에는 주차하기가 쉽지 않다던데 늦은 시간이어서인지 두세 대만 주차해 있었고 그마저도 금방 떠났다. 미즐리 브리지 옆으로 몇 개의 트레일(trail)이 지나고 있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어서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미즐리 브리지는 윌슨 캐니언(Wilson Canyon)과 오크 크릭 캐니언을 이어주고 있다고 설명이 되어 있었지만, 막상 두 캐니언을 바라보니 이름과 구분은 그저 인간의 몫일뿐이었다.

미즐리 브리지를 넘어서 얼마가지 않으니 업타운 세도나(Uptown Sedona)였다. 먼저 안내 센터에 들러야 했지만 시간은 벌써 저녁 8시가 가까웠고, 이미 490마일(784km) 이상을 달린 상태였다.

숙소 직원이 붉은 펜으로 설명해준 세도나 지도

숙소로 잡은 스카이 렌치 랏지(Sky Ranch Lodge)는 업타운 세도나를 지나서 산 위쪽으로 한참 올라간 곳에 있었다. 세도나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고 노을이 가장 아름답다는 에어포트 메사(Airport Mesa)가 바로 숙소 앞에 있었다. 에어포트 메사는 세도나의 대표적인 볼텍스 (Vortex) 지점 중의 하나라는데 내게는 그보다 노을이 더 매력적인 곳이었다. 노을을 기대하고 부지런히 달려갔지만 간간이 비가 내리고 이미 너무 어두워졌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밤이 내리는 세도나의 풍경만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세도나의 자연환경 보호를 위해 기부를 권하는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우리에게 일본어와 우리말로 인사를 건넸다. 환한 얼굴로 기부를 권하고 있었지만 내리는 비 때문에 황급하게 차로 돌아와야 했다. 체크인을 하면서 세도나 안내지도를 부탁하니 약간 여성스러운 남자 직원이 친절하게 붉은 펜으로 표시하며 설명까지 해주었다. 멕시코 풍의 숙소는 정성들여 가꾼 정원과 신경 쓴 소품들로 낡은 느낌이 오히려 멋스러웠다. 방에 들어와 짐을 풀고 저녁 준비를 했다. 딱히 근처에 저녁을 먹을 곳이 마땅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져온 햇반과 즉석 카레 그리고 컵라면을 준비했다. 햇반은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즉석 카레는 물 끓이는 기구로 데우고, 물을 따로 끓여 컵라면에 부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전자레인지와 물 끓이는 기구의 코드를 꽂는 순간 전기가 나갔다. 전자레인지를 돌리면서 물을 끓이려하니 과부하가 걸려서 퓨즈가 나간 것이다. 사무실에 가서 이야기를 하니 즉시 사람을 보내주어 바로 고쳤는데, 전자레인지를 돌리니 전기가 또 나갔다. 이번에는 전화로 사정을 설명하니 사람을 또 보내주어 불은 들어왔지만 전자레인지를 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방안에 불도 불필요한 것들은 모두 끄고 전자레인지만 돌리니 돌아갔다. 햇반과 카레를 데우고, 컵라면 물을 끓여서 간신히 저녁을 먹었다. 첫날이어서 그런지 달려온 거리에 비해서는 모두 활력이 넘쳤다.

웃고 떠드는 아이들을 씻게 하고, 찍은 사진을 노트북으로 내려서 정리를 했다. 페이스북에 간단한 경과를 올리고, 내일 일정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볼 것을 선택해야했고, 보아야할 곳의 동선을 잘 짜야했다. 아이들은 첫날의 흥분 때문인지 낮에 차에서 잤던 탓인지 여행 일기를 적고나서도 한참을 떠들다 자정이 지나서야 잠이 들었다.

오늘은 I-40Route66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달리고 또 달려왔다. 출발할 때는 낯설었던 차가 숙소에 도착하니 어느새 익숙해졌다. 미국에서 일 년 동안의 연구년은 조금 긴 여행이다. 돌아갈 곳이 분명한, 돌아가기 위해 떠나는 것은 여행 그 이상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횡단 여행은 미국에서의 일 년 여행 중에 떠난 또 다른 여행이었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아침에 인수한 차처럼 이제 조금 익숙해졌을 뿐인데, 무엇을 찾아 무모하게 횡단을 감행하는 것인지 아직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일 년 간 미국으로의 여행이 그동안 소홀했던 가족들과 함께하면서 잃어버린 것, 놓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듯, 횡단여행을 통해 낯선 공간에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해볼 뿐이다. 내일은 세도나를 보고 앨버커키(Albuquerque)로 달릴 것이다. 늘 밤은 낮보다 시간이 더디 흐른다.

 

  1. 개인적으로는 익숙한 소나타가 있었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Hertz에는 소나타가 없었다. 렌터카를 예약하는 사이트에서는 풀 사이즈 카 급의 차로 Chevrolet Impala급이라고만 되어 있어서 어떤 차가 배정될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본문으로]
  2.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기》는 초등학교 시절 내가 가장 신나게 읽었던 소설이다. 아이들끼리 무인도에서 2년 간 생활하는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을 어린 시절 무척 좋아했다.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 내가 열여섯 번째 소년이 되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본문으로]
  3. 21일 간 집을 비워야 하기 때문에 우편물 등을 옆집의 이 교수님 댁에 부탁을 하고 떠나야했다. 이 교수님은 나처럼 UCI에 교환교수로 나와 계셨고, 우리처럼 딸 둘이 있어서 여러모로 처지가 비슷했다. 이 교수님 댁과는 평소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우편물도 우편물이었지만 집을 떠나면서 돌아올 곳에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푸근함이 더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4. 한 면적의 100쯤에 달하는 미국의 동맥 역할을 하는 것은 소위 프리웨이(free way)라고 부르는 자동차 도로들이다. 처음에는 서부 고속도로가 무료이기 때문에 프리웨이인 줄 알았는데, 미국인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도로라는 의미에서 프리웨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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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브로큰 애로우(Broken Arrow)

729일 세도나앨버커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살면서 여지없는 것들이 있다. 밥이 그렇다. 밥은 늘 끼니때마다 예외 없이 절실하다. 어제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이 오늘의 허기를 달래주지는 않는다. 야속하리만치 허기는 규칙적이다. 그래서 늘 밥은 어김없는 현실이다. 밥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삶에 진지하다. 그 밥이 어떻게 마련되는지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자기 삶에 태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밥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의 어쭙잖은 오만을 나는 혐오한다. 그래서인지 김훈의 칼의 노래(2001)를 읽다가 이순신이 전투를 치르러 나가는 병사들에게 고구마를 나누어 주며 독려하는 장면에서 나는 속절없이 울기도 했다. 그는 마지막 양식인 고구마를 나누어 주고, 전투에서 이겨 살아 돌아오면 적의 군량미로 밥을 먹을 것이고 죽게 되면 더 이상 끼니가 소용없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아직까지 나는 이보다 더 투명하고 진지한 밥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아침은 허기와 함께 온다. 미국에서 여행을 하다보면 아침은 참 난감한 숙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숙소에서 아침을 제공하지 않으면 아침 식사를 할 곳을 찾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만족할만한 식당을 찾는 것도 일이지만 찾아도 대부분 패스트푸드 가게의 조악한 정크 푸드(junk food)였다. 게다가 그 조악한 음식을 찾으러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또 얼마나 맥 풀리는 일인가? 횡단을 계획하면서 가급적 아침을 제공하는 숙소를 골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군데는 아침이 제공되지 않는 숙소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세도나의 숙소가 그랬다. 더구나 그 높은 숙소 주변에 식당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세도나에서의 아침은 집에서 미리 가져온 빵과 쨈 그리고 우유로 소박하게 마쳤다.

에어포트 메사에서 바라본 세도나 시내의 전경

숙소를 나서면서 보니 전날 제대로 보지 못해 아쉬웠던 에어포트 메사가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에어포트 메사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고, 그보다 먼저 세도나의 전경이 발밑까지 다가와 있었다. 마주보이는 레드 락(red rock)은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아니어도 붉은 빛으로 충만했고, 그 아래로 세도나 시가는 제몫의 나무들을 품에 안고 평화로웠다. 사진을 찍고 떠나려는데 어제의 기부를 권하던 아주머니를 다시 만났다. 결국 주머니에 있던 동전들을 기부함에 넣고, 레드 락으로 출발했다.

해마다 미국의 10대 관광지 중의 하나로 꼽힌다는 세도나에서 브로큰 애로우(Broken Arrow)를 만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원래 브로큰 애로우는 기병대와 인디언 사이에 협상을 진행하던 중, 인디언이 화살을 부러뜨려서 협상의 결렬을 나타낸 것에서 유래했다는 말로 최악의 상황[각주:1]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가장 좋다는 곳에서 최악의 상황을 만나는 것은 좀처럼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가급적 피하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브로큰 애로우는 1853년 참혹한 비극으로 끝난 브로큰 애로우 전투다. 이 전투 이전에도 인디언[각주:2]들은 금과 땅과 바이슨 가죽 등을 원했던 백인들에 의해 19세기 초까지 학살되거나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되어야만 했다. 세도나는 원래는 나바호족, 아파치족, 야바파이족 등 인디언들의 성지(聖地)였는데, 서부개척이라는 명분 아래 자신들의 땅에서 내몰리던 그들은 브로큰 애로우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죽임을 당한다. 브로큰 애로우 전투에서 살아남은 일부 야바파이족과 아파치족이 그랜드 캐니언 일대로 쫓겨나면서, 세도나는 결국 백인들의 땅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자기중심의 명분과 탐욕으로 인디언을 몰살시키거나 내쫓은[각주:3] 브로큰 애로우 전투가 첫 번째 브로큰 애로우다.

1980년대 이후 이곳에서 볼텍스(Vortex)가 나온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관광지로 급부상했고, 그 덕분에 세도나에는 매년 500만 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찾아온단다.[각주:4] 이곳을 찾는 이들의 모습에서 두 번째 브로큰 애로우를 만날 수 있다. 그것은, 왜 세도나가 아메리카 인디언의 성지가 될 수 있었는지는 살피지 않고, 과학적 효능이 입증되지도 않은 볼텍스 운운하며 몰려드는 사람들의 맹목과 오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세도나가 아메리카 인디언의 성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며 영적인 삶을 추구했고, 그것에 세도나의 자연이 반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에는 자연을 거스르는 삶을 살면서 볼텍스만을 믿고 세도나로 몰려와서 그 치유 효과를 기대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언어는 믿음의 시작이다. 세도나는 그런 면에서 자신만의 언어로 믿음을 만들어 신화화하고 있었다. ‘세도나를 처음 보고서 감탄하지 않는다면 그는 다른 일을 하고 있거나 자고 있는 중일 것이라거나 신은 그랜드 캐니언을 창조했지만 그는 세도나에 산다는 말만 들어도 세도나의 자연을 신화화하려는 그들의 노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숙소에서 Arizona 89A를 타고 레드 락 주립공원까지 가는 길은 무척 이채로운 길이었다. 도시 전체가 세도나의 붉은 빛을 유지하면서 멋스러운 어도비(Adobe) 양식의 건축물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사만다가 조금 헤매는 동안 발견한 한적한 길가의 주택들은 하나같이 소박했지만 자기만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그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려는 세도나 전체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지금도 세도나에서는 세계적인 호텔 체인들도 2층 이상 건축할 수 없고, 심지어 맥도날드조차 고유의 노란색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엄격한 규제는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신호등에서부터 도로 표지판까지 자연의 붉은 빛을 거스르지 않는 그들의 노력이 돋보였다.

붉은 빛의 바위들 사이를 이어 달리고 있는 세도나의 도로는 온통 붉은 빛이다. 신호등과 표지판, 심지어 맥도날드조차 세도나의 빛을 입고 있다. 대부분의 건축물들은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져 있고, 2층을 넘어서지 않는다.

세도나의 주립 공원들은 각각 입장료를 받는다. 국립공원의 경우에는 연간회원권(80달러)을 끊으면 언제 어디서나 이용이 가능한데, 주립공원의 경우에는 이것이 통하지 않는다. 레드 락은 10달러, 슬라이드 락(Slide Rock)20달러의 입장료를 받는데, 입장권에 적힌 글을 읽어보니 주립공원 건설에 쓰인단다. 그렇다면 할 말은 없지만 입맛은 쓰다. 세도나의 곳곳이 그렇지만 레드 락도 트레킹 코스가 아주 좋단다. 먼저 안내센터에 갔더니 세도나 홍보 영화를 상영했다. 세도나의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영화였는데, 이게 지나치게 길었다. 앞부분은 세도나의 곳곳에 대한 설명과 즐기는 모습이 제대로 구성되었는데, 후반부에는 세도나의 풍광과 동식물들의 영상이 지루할 정도로 계속되어, 우린 결국 끝까지 보지 못하고 나오고 말았다. 세도나를 보고 7시간쯤 달려서 앨버커키로 넘어가야 하는 날이었고, 세도나에는 보고 싶은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결국 트레킹을 포기할 때쯤 변함없이 또 허기가 찾아왔다.

아침이 소박하면 점심은 알차게 해주어야 한다. 나는 여행을 떠나면 현지식으로 먹어야 한다고 늘 주장해왔다. 음식만큼 그곳의 문화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 없고, 낯선 음식을 즐기는 재미도 여행의 큰 즐거움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이곳 음식을 체험해야한다고 몇 번 시도를 했었는데 결과적으로 실패를 하고, 아내의 표현에 따르면 한국에서보다 더 많이 한식으로 먹고있다. 몇 해 전에 신장 결석을 앓고 난 이후로는 짠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내 탓도 있지만, 이곳 음식이 지나치게 짜고 기름졌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종입맛인 나는 비교적 견딜만했는데 오히려 아이들이 견디질 못했다. 가리는 음식이 많고 새로운 음식을 두려워하는 효진이도 효진였지만, 가리는 것 없고 새로운 음식 도전을 즐기고, 외국에서 1년 생활한 경험도 있는 유진이가 더욱 강경한 것은 의외였다. 그러다보니 정작 이곳 음식을 체험할 기회가 많지가 않았다.

점심을 먹기 위해서 업타운에 있는 멕시코 음식점 오악사카(Oaxaca)에 갔다. 요세미티 국립공원 근처 타코벨(Taco Bell)에서 먹었던 타코와 브리또 맛을 기억하는 아이들이 반기지는 않았지만, 이곳은 패스트푸드가 아니고 다른 메뉴도 있을 것이라고 설득해서 들어갔다. 오악사카에 들어서니 달큼하면서도 매콤한 냄새가 시장기를 견딜 수 없게 하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초와 살사소스를 내주면서 음료주문을 먼저 받았다. 나초와 살사소스는 큰 볼에 두 개나 나왔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들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음식은 사진 먼저 찍고 먹자고 약속했었는데 배가 고팠던 우리는 까맣게 잊고 먹다가 기억해내서 가까스로 사진을 찍었다. 타코와 브리또 그리고 키즈메뉴를 시켰는데, 넉넉한 양도 양이었지만 맛이 탁월했다.

오악사카 레스토랑의 나초. 브리또, 타코

모두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계산서를 받고 보니 처음에 준 나초가 공짜가 아니었다. 주문하지도 않은 나초를 주고 계산서에 포함시키는 것이 불쾌했지만 이곳은 관광지고, 나초의 맛이 감동적이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계산서를 자세히 보니 팁이 이미 포함된 금액이 적혀 있었다. 관광지의 경우 계산서에 팁을 미리 포함해서 요구하는 경우가 있고, 손님 입장에서도 얼마를 주어야 하나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이것이 더 편한 방법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카드를 건네주니 계산을 마쳤는데, 다시 가져온 전표에는 추가 팁(additional tip)란이 또 있다. 추가 팁란을 비워두고 총액을 적고 사인을 해주었다. 참 지독한 관광지다.

미국에 와서 잘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 팁문화다. 보통 금액의 15% 정도를 주면 적당한데, 50달러가 넘으면 20%를 줘야한단다. 그동안은 세금을 포함한 총액의 15%를 주었는데, 알고 보니 세금을 제외한 금액의 15%를 주는 것이란다. 팁문화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이유는 음식값에 서비스 봉사료가 포함되어 있는 한국식 사고에 젖어 있는 탓도 있지만, 딱히 친절한 서비스를 해준 것도 없는 것 같은데 팁을 주어야하나 하는 회의가 들기 때문이다. 물론 얼마를 줘야하나 매번 계산하는 것도 그렇게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몇 해 전에 같이 책을 낸 후 미국에 와서 학술대회에서 우연하게 만났던 펜실베니아주립대학의 강인규 선생의 책[각주:5]에 따르면, 미국에서 팁은 임금의 일부로서 포함되며 심지어 소득세까지 물고 있단다. 팁문화는 소위 고용주가 부담해야할 임금을 소비자가 부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팁 노동자의 저임금은 개선되지 않는 고용주 중심의 불합리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생활화된 미국인들도 팁문화에 대해서 불만이 많다는데 하물며 낯선 한국인의 눈에 비친 팁문화야 오죽했겠는가?

점심을 먹고 어제 오는 길에 지나쳐 온 슬라이드 락을 보러 갔다.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차들이 줄을 서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다 옆에 표지를 보니 입장료가 20달러였다. 어차피 슬라이드 락의 핵심은 흐르는 물에서 슬라이딩하는 것인데 우리는 물에 들어갈 계획이 없었고, 시간상으로 트레킹을 할 수도 없었다. 차 안에서 급하게 회의를 한 결과, 차를 돌리기로 했다. 앨버커키까지 7시간 이상 소요될 것이고, 초행길에 사만다만 믿고 밤길 운전을 하기는 어렸기 때문에 틀라케파케(Tlaquepaque)와 홀리 크로스 채플(Chapel of The Holy Cross)만 보고 떠나기로 결정했다.

틀라케파케의 거리와 상점. 1970년대에 지어졌지만 기존의 나무를 그대로 살리면서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멋스러운 풍경을 얻을 수 있었다. 틀라케파케라는 말 그대로 모든 부문에서 최고의 것이 되었다.

틀라케파케는 멕시코 분위기가 압도적인 미국 남서부의 대표적인 예술마을이자 상가였다. 이곳은 스페인 식민지 건축양식으로 지은 건물과 광장을 중심으로 작은 벽돌이 깔린 보도를 따라서 다수의 갤러리와 상가가 연계된 곳이었다. 틀라케파케는 모든 부문에서 최고의 것이라는 의미라는데, 멕시코 과달라하라 인근 예술마을의 이름이란다. 아치형 골목을 따라가면 어도비 양식의 건물들이 이어져 부드럽고, 건물마다 큰 나무를 가슴에 안고 넝쿨로 세월을 얹고 있는 풍경은 아늑했다. 주변을 거스르지 않고 지나가는 세월을 안으로 수납하는 이곳의 건물들은 고즈넉하고 향기로웠다.

틀라케파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어도비 양식의 건물과 그 중심에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이 보여주는 조화였다. 커다란 나무를 중심으로 어도비 양식의 개성적인 건물이 이어지고, 그 사이사이에 다양한 형태의 예술작품들이 어우러졌다. 거기에 근처 식당에서 풍겨오는 멕시코 음식 특유의 넉넉하고 맵싸한 냄새가 더해져 더할 수 없이 따듯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1970년대 초에 만들어졌다는 틀라케파케가 이렇게 오랜 수령의 나무들 사이에 건설될 수 있었던 것은 원래 이곳의 땅주인의 판매 조건 때문이었단다. 원래 땅주인이 이곳의 나무들을 훼손하지 않는 조건으로 땅을 팔았고, 새 주인이 그 뜻에 따라 나무들을 그대로 둔 채로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판 사람이나 산 사람의 아름다운 뜻이 나무의 세월을 살리고, 건물에 시간을 얹었다. 탁 트인 광장과 건물과 건물 사이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나무, 푸근한 높이에서 깊게 울려오는 종소리, 그 나무와 종소리가 만나는 곳마다 멈춰있는 조각들, 조각들을 따라 조용히 늘어선 작은 입구의 갤러리와 수공예품 가게들의 어우러짐이 틀라케파케의 아우라였다.

Chapel of The Holy Cross의 외부 전경과 내부의 전면 유리로 바라본 세도나

틀라케파케를 둘러보는 동안 간간이 비가 내렸고, 카메라를 셔츠 안에 넣고 건물과 건물 사이를 건너다녔다. 갤러리나 수공예품 가게에 들어가면 비가 그쳤고, 밖으로 나와 이동을 하다보면 다시 비가 내려서 근처 가게에 들어가곤 했는데, 들어가는 가게마다 특색 있는 상품들로 한참을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골목이나 광장에서 비를 피해 뛰어다니는 모습은 우아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문득 자유롭고 즐거웠다. 내리는 비로 인해 달콤한 먼지 냄새가 건물 사이에서 번져왔고, 비가 지나간 숲그늘에선 나른한 상념마저 피어올랐다.

클라케파케를 나와 좀 더 짙은 붉은 기운을 따라가다 보니 홀리 크로스 채플이 나타났다. 레드 락 카운티(Red Rock County)답게 붉은 바위 위에 약 27m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건축한 홀리 크로스 채플은 그 자체로 이미 숙연한 묵상이었다.

1956년에 마거리트 브러스위그 스터드(Marguerite Bruswig Staude)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홀리 크로스 채플은 가톨릭 성당의 외양을 갖추고 있지만 종교와 무관하게 창조주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기도와 묵상의 공간으로 개방하고 있단다. 거대한 자연의 압도 위에 성당을 짓겠다는 발상을 갖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그 발상을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거스르지 않고 이루어냈다는 것이 더욱 놀라운 곳이었다.

사다리꼴 외관의 성당 전면은 빛이 충만할 수 있도록 유리로 하고, 그 중심에 거대한 십자가를 전면화한 단순하지만 분명한 이곳의 디자인은 표면적으로는 도저히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룰 수 없을 듯 보였다. 하지만 성당까지 걸어서 올라가다보니 이 조화의 힘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거대한 붉은 바위들이 가까이 혹은 멀리서 성당을 둘러싸고 있고, 성당에 오르는 램프는 구름다리 형식으로 붉은 바위의 곡선을 따라가고 있었으며, 성당까지 오르면 사방이 탁 트여서 하늘과 바로 맞닿은 자신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보면 성당은 아주 단아하고 견고한 희원(希願)처럼 보였다. 성당의 입구 쪽으로 들어서면 중앙의 십자가와 그 주변의 규칙적인 직사각형 무늬로 구분된 전면 유리를 통과한 빛이 성당 내부를 더욱 경건하게 만들었다. 성당 내부에는 누군가의 영혼을 위해 밝혔을 수많은 작은 촛불이 쉼 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성당으로 올라가는 램프, 성당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과 자연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세도나의 꼴불견으로 욕을 먹고 있는 성당 아래 대저택의 전경 그리고 정상의 모습.

성당 밖으로 나왔을 때 흐린 하늘은 더욱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성당 아래에는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서 있는 대저택이 있었는데, 몹시 눈에 거슬렸다. 세도나의 꼴불견으로 불린다는 이 저택은 성당과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대저택은 집 크기와 화려함 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어 보였는데, 그것을 앞세우고 있는 집주인이 오히려 안쓰러웠다.

시간은 이미 4시를 지나고 있었다. 앨버커키까지의 시간을 생각하면 당장 떠나도 벅찬 시간이었지만, 아내는 미티어 크레이터(Meteor Crater)에 들려보고 싶어 했다. 저녁 먹는 시간을 줄이면 30분 정도만 더 늦어질 것이라고 예상이 되었고, 세계 최대의 운석이 떨어진 곳이라는 말이 무척 매력적으로 들렸기 때문에 미티어 크레이터로 향했다. I-40으로 1시간 30분쯤 달려가니 표지판이 보였다. 표지를 보고 내려섰는데 허허벌판에 길만 앞으로 달리고 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들판 위로 새로 포장한 듯한 도로가 7마일(11)쯤 묻지도 않고 앞으로만 내닫고 있었고 그 위로 비가 조금씩 뿌리고 있었다. 표지판 간격이 점점 좁아지더니 텅 빈 사막의 한 가운데 미티어 크레이터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미티어 크레이터의 7마일에 달하는 진입로

7시에 문을 닫는데 530분을 조금 넘어선 시간에 도착하고 보니 마음이 급했다. 어른 15달러, 어린이 8달러의 입장료를 내고 입장하는데, 표를 받는 사람이 안내 영화를 상영하니 꼭 보란다. 상영 시간을 몰라서 기념품점 할아버지께 여쭈어 보니 6시부터란다. 조금 시간이 남아서 기념품을 보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달려와서 이제 영화 상영을 할 텐데, 늦으면 문이 자동으로 닫히니 빨리 가서 보란다. 할아버지의 느닷없는 친절 덕분에 영화를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미티어 크레이터 전경

영화를 보고 밖으로 나가니 운석공(Crater)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와 운석공의 중심까지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있었다. 미티어 크레이터는 5만 년 전에 50-100m 크기의 소행성이 초속 12로 충돌하여 생긴 운석공으로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베린저 운석공이라고도 불린다고 했다. 과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소행성과의 충돌 시 파괴력이 TNT 25백만 톤(히로시마 원폭의 150)이라고 하는데, 그 파괴력은 운석공의 규모(직경 1,200m, 깊이 170m)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 가족들 사진을 찍어주는데 옆에 있던 미국인이 사진을 찍어줄까 라고 묻는다. 미국에 와서 처음에는 낯선 친절의 의도를 파악하느라 어색한 표정으로 거절하기 일쑤였는데, 이제는 그렇게 물으면 웃으면서 사진을 부탁한다. 물론 사진을 찍어주면 반드시 상대에게도 사진을 찍어줄까 라고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례란다. 사진기를 들고 이곳저곳에서 사진을 찍는 내 모습을 보았는지, 전망대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갈지 말지를 이야기하는데 눈치로 알아차리고 사진 찍기 좋으니 꼭 올라가 보라는 관광객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잘 표시하지 않고, 상대가 요구하지 않으면 굳이 나서지 않는 이곳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고마운 일이었다. 이곳 사람들의 관례화된 친절[각주:6]과 선이 분명한 타인과의 경계는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면서도 서로 돕는 합리적인 문화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지만, ()으로 말하는 우리에게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 낯선 애리조나 사막 한 가운데서 낯선 친절을 만나게 되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운석이 떨어지고 있는데도 자기의 망원경에 갇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과학자를 풍자한 그림이다. 이 그림을 보고 아내도 웃고 나도 웃었다. 아마 같은 의미였으리라.

전시관에는 그곳에서 채취한 운석들과 운석공이 생기게 되는 과정을 재구성해놓았고, 운석공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을 재미있는 방식으로 전시하고 있었다. 기본적인 동선의 유도 외에는 별다른 규제를 하지 않고 오히려 자유롭게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전시장은 다소 소란스럽고 무질서해 보였지만 즐거운 분위기였다. 곳곳에 만져보라는 글귀와 함께 체험을 유도하고, 그것을 거침없이 즐기는 과정이 전시물 이상의 즐거움이었다. 시간은 이미 폐관 시간인 7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고, 바로 출발해도 앨버커키에는 자정 안에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흐린 날로 인해 밖은 이미 어둠이 서서히 내리고 있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전시관 내부에 있는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를 사서 차 안에서 먹으며 가기했다. 사실 서브웨이 참사이후로 우리 집에서 서브웨이는 금기어였다. 서브웨이 참사는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들 학교문제로 분주히 다닐 때 벌어졌다. 유진이 학교에서 서류 처리를 하고, 온 가족이 집 앞 쇼핑센터에 있는 서브웨이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당시만 해도 미국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우울해했던 아내를 위한 배려였다. 아내가 한국에서도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좋아했었기 때문이다. 주문을 하려는데 마침 특별 메뉴가 양도 넉넉하고 다양해 보여서 호기롭게 그것을 주문했다. 특별메뉴를 주문했더니 종업원이 당황한 듯 종이를 들고 뛰어나와서 빵의 종류부터 소스까지 상세히 묻고 들어갔다. 가격은 30달러였는데, 한국에서 가격을 생각하고 그 정도면 큰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온전히 나만의 생각이었다. 음식을 기다리면서 계산서를 본 아내가 내게 화를 냈고, 그 와중에 음식이 나왔다. 쟁반만한 사이즈에 3층 높이로 샌드위치가 나왔다. 이 특별 메뉴는 파티용 메뉴였던 것이다. 음식을 보고 놀란 아내는 벌떡 일어서더니 도저히 저 큰 사이즈를 창피해서 이 매장에서는 먹을 수 없으니 집으로 가자고 했다. 내가 분별없이 지출한다고 화가 잔뜩 난 아내는 샌드위치에 손도 대지 않았고, 나에게 다 먹으라고 했다. 아내가 화가 나 있으니 나는 물론 아이들까지도 눈치를 보면서 자기 양보다 많이 먹었는데도, 야속하게도 커다란 샌드위치는 15조각이나 남았다. 그 샌드위치는 모두 자기양보다 많이 저녁으로 먹고 나서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리 집에서 서브웨이는 금기어 아닌 금기어가 되었다.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이다 보니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참사를 기억하는 나는 빠지면서 아내에게 주문을 하라고 했다. 사실 빵의 종류도 많고, 내용물도 다양하고, 소스도 여러 가지다보니 내 깜냥으로는 주문하기 어려웠다. 아내는 빵 전문가답게, 마치 늘 먹는 음식 주문하듯 주문을 하고, 입장권 뒤에 있던 할인권으로 할인까지 받아냈다. 역시 주문은 아내의 몫이다. 이럴 때보면 아내는 마치 대학에서 주문을 전공한 사람 같다.

저녁을 먹으면서 달리다보니 날이 조금 개는 듯 아직 약간의 해가 남아 있었다. 해가 남아 있는 동안 더 많이 달려야 어둠 속에서 달릴 거리를 줄일 수 있다는 생각에 부지런히 달렸다. 평소보다 바람이 조금 세다는 느낌이었는데 멀리서 회오리바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행히 규모가 크지 않았지만 두어 개의 회오리바람이 종잡을 수 없이 대지를 훑고 있었다. 이 황량한 대지를 건너오는 회오리바람은 우리가 비록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 1900)의 도로시는 아니었지만 낯선 오즈의 세계로 데려갈 듯한 기세였다.

회오리바람이 전혀 낯설지 않을 듯한 황량한 들판 저 멀리 낮게 깔린 구름 사이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가 달리는 길옆으로는 마른 회오리바람이 거칠게 부는데 들판 저 앞에서는 비가 세차게 내리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어둠은 순식간에 사위를 감쌌고 천둥을 동반한 번개가 영화처럼 내리고 있었다. 마치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3D 킹콩 어트랙션을 체험하고 있는 듯 지극히 비현실적인 장면이 실사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렇게 어둠이 내리고 헤드라이트 불빛만 어둠을 가를 뿐, 세계는 이미 무거운 어둠에 포획되어 있었다.

아리조나의 회오리바람()은 캔자스의 그것만은 못해도 도로여행자를 위협하기에는 충분했다. 대평원에서 만나는 번개(, 이 사진은 그랜드 캐니언 여행에서 처제가 찍은 것임). 경이와 두려움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앨버커키는 이름처럼 낯설고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도시 같았다. 비는 점점 세차게 내리고 그럴수록 어둠은 더욱 짙어만 갔다. 가로등을 기대할 수 없는 미국 고속도로에서 기댈 수 있는 것은 앞서 달리고 있는 대형트럭뿐이었다. 시원한 불빛으로 앞을 밝혀주는 대형트럭을 따라가는 것은 겉으로는 안전해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대형트럭이 보이지만 대형트럭은 우리가 잘 보이지 않고, 전방의 상황도 잘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어두웠고, 1차선의 승용차들에 비해 대형트럭은 상대적으로 저속으로 운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야간 운전이 두려운 나로서는 평소보다 조금 더 안전거리를 유지하면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고속도로를 340마일(544)정도를 계속 달리다보니 사만다도 조용했고, 이따금 지나치는 도시들의 불빛만 다가왔다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차 안에서 다소 지루해진 우리는 아이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다. 순간순간이 경이였고, 날마다가 기적이었던 아이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언제나 즐거웠다. 아이들도 귀를 쫑긋하고 기억에는 없지만 자기가 일구었다는 그 시절의 이야기 듣기를 좋아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화장실 때문에 쉼터에 정차를 했다. 밖에서는 몰랐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대형 트럭을 위한 쉼터였다. 커다란 주차장에는 대형트럭들만 주차해 있고, 멀리 화장실 불빛만 보였지만 환한 가로등 덕분에 오히려 안전하게 느껴졌다.

앨버커키에 거의 도착했을 때, ‘Route66 카지노의 불빛에 눈이 부셨다. 상당한 규모의 카지노로 보였는데,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Route66 카지노임을 알리고 있었다. 미국인들의 향수와 도박이 결합하여 역사가 팬시화 되는 현장이었다. 할리우드의 수정주의 서부극처럼 역사는 맥락 없이 다시 팬시화 되고 있었다. Route66은 이제 더 이상 ‘The Mother Road’가 아니라 단지 싸구려 브랜드일 뿐이고, 역사가 아니라 팬시상품일 뿐이었다. 추억과 향수를 파는 것이 나쁠 것은 없는 일이지만 그 안에 역사가 함께하지 못하는 일은 참으로 허망하고 공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횡단여행의 출발동기였던 Route66이 이제 경로만 남고 역사와 실체는 사라진 꼴이었다. 이것이 오늘 만난 세 번째 브로큰 애로우였다.

애초에 우리의 횡단여행이 미국의 맨얼굴과 속살을 보기 위한 것이었으니 오늘 만난 세 개의 브로큰 애로우는 차라리 행운이었다. 횡단여행의 전반부를 이끌어줄 것으로 기대했던 Route66이 실망스럽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Route66을 따라 달려갈 것이다. 우리가 비록 존 라세터나 존 스타인벡은 아니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여행에서 그랬듯이 Route66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여행을 디자인할 것이다. 존 라세터가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 그 자체에서 의미를 찾았듯이, 존 스타인벡이 절절한 현실과 고독한 자신을 발견했듯이…….

앨버커키 공항 부근 쉐라톤 호텔에 도착한 것은 자정을 한참 넘기고서였다. 세도나를 출발해서 413마일(660)을 달린 것이다. 체크인하는 카운터 직원이 너무 늦었다며 농담을 했지만 대꾸할 힘조차 없었다. 이번 횡단여행 중 가장 좋은 숙소인 쉐라톤 호텔에서 정작 우리는 머물 시간이 그리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럴수록 앨버커키의 어둠은 더욱 견고해질 뿐이었다.

 

  1. 그래서 미 국방부는 브로큰 애로우를 핵무기 관련 중대한 사고, 즉 핵무기의 허가 없는 발사, 핵무기의 분실이나 폭발, 방사능 오염과 같은 핵무기 사고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하기도 한다. 오우삼 감독의 <브로큰 애로우>(1996)는 이와 같은 중대한 핵무기 사고를 다루고 있다. [본문으로]
  2. 인디언보다는 아메리카 원주민이라는 단어가 보다 객관적인 용어일 것이다. 인도에 도착한 줄 알았던 콜롬버스가 이곳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는 인디언은 타자로 대상화된 명칭이다. 주체인 백인들의 시각에서 오인한 대상을 오인한 채로 부르는 것은 철저히 타자화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메리카 대륙에 원래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아메리카 원주민이라는 중립적인 용어가 더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인디언이라는 말을 현재 관용적으로 써오고 있기 때문에 의미의 혼선을 줄이기 위해서 인디언으로 쓴다. [본문으로]
  3. 수정주의 서부극(revisionist western) 등에서 인디언에 대한 죄의식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미국 정부는 아직도 보호구역 내에서 알코올중독자가 되거나 카지노 산업의 하수인으로 살아가는 현실의 문제는 철저히 외면되고 있다. 세계의 인권을 운운하는 미국이 숨기고 싶어 하는 또 하나의 모순된 얼굴이 아닐 수 없다. [본문으로]
  4. 그래서인지 기아 자동차의 카니발이 미국에서는 세도나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대중적인 지지를 받는 세도나의 긍정적인 이미지 때문이리라. [본문으로]
  5. 강인규,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 인물과 사상사, 2008. [본문으로]
  6. 여기서 말하는 ‘관례화된 친절’은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도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짓는다거나. 인사를 하는 모습이라거나,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뒷사람을 위해서 기다려주는 모습,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제안을 하는 모습들을 말한다. 이것은 우러나오는 친절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관례화된 예절의 일부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함께 사회를 이루고 살기 위한 최소한의 예절일 뿐이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누군가를 위한 특별한 친절은 아닌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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