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것이 언제나 옳은 이유

731일 산타페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오늘은 이동하지 않고 산타페에 하루 더 머물렀다. 산타페에 대한 정보는 이미 떠나기 전부터 차고 넘쳤다. 어젯밤에 오늘 움직일 동선을 구글 지도로 확인을 해두었기 때문에 그대로 움직이면 될 일이었다. 다만, 사만다가 심통을 부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긴 심통을 부린다면 예상했던 길 밖의 길을 만날 테니 그것도 크게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산타페 Comfort Inn 간판. 실내풀장과 맛있고 따듯한 아침 그리고 와이파이 무료 제공. 다만 질은 보장하지 못한다.

숙소(Comport Inn)에서는 아침을 제공해줬다. 인터넷 예약 사이트에는 블랙퍼스트 뷔페(Breakfast Buffet)라고 적혀 있었고, 입구의 간판에 커다랗게 ‘Delicious Hot Breakfast’라는 표현이 있었지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대부분 숙소에서 제공하는 아침은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콘티넨탈 블랙퍼스트(Continental Breakfast)로 제공한다던 몬트레이의 숙소에서는 코스트코에서 파는 머핀을 4등분한 것이었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비닐봉지에 담긴 빵을 커피가 전부였다. 콘티넨탈 블랙퍼스트가 원래 점심때까지 허기를 달래기 위한 간단한 빵과 음료라지만, 코스트코 머핀 4등분이나 비닐봉지 빵은 조금 심했다. 덕분에 이제는 숙소를 예약하기 전에 반드시 블랙퍼스트 뷔페나 아메리칸 블랙퍼스트(American Breakfast)[각주:1]라고 표시 된 것을 선택하게 되었다.

옐로우스톤에서는 아침 식사를 하면서 웃지 못 할 일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아메리칸 블랙퍼스트를 제공해주었다. 숙소에서는 별도의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식사의 양과 질 면에서 모두 만족스러웠다. 계산대에서 식사티켓을 냈더니, 식사는 무료인데 1인당 46센트의 세금과 팁 2달러는 내야 한다고 했다. 12달러 정도의 식사는 무료로 제공받고 세금과 팁은 부담해야 한다는 상황에 웃음이 나왔다. 사실 진짜 웃지 못 할 상황은 주문과정에서 있었다. “How would you like your eggs?”라고 묻는 웨이트리스의 질문에 아무 생각 없이 “Well done!”이라고 답한 것이다. 대충 무슨 뜻인지 알 수도 있었으련만 그 웨이트리스는 정확한 답이 나올 때까지 같은 질문만 계속했다. 마치 정답을 맞힐 때까지 절대 주문을 끝낼 수 없다는 듯이. 결국 거꾸로 물어서 주문을 마칠 수 있었다. 언제 미국 식당에서 계란 요리를 먹어봤어야지 'Sunny side up!', 'Over easy!', ‘Over hard!’란 말을 알 것 아닌가? 어쨌든 덕분에 하나 배우기는 했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산타페 숙소의 블랙퍼스트 뷔페는 자못 진지했다. 토스트, 베이글, 와플, 삶은 계란, 해시 브라운 포테이토(hash brown potatoes), 에그 스크럼블, 두 종류의 주스, 두 종류의 커피, 네 가지 시리얼, 바나나, 사과, 오렌지, 요구르트에 대기하는 직원까지 있었다. 맛은 잘 모르겠지만 아침식사다운 식사라서 먹으면서 힘이 났다. 그런데 6시부터 9시까지로 식사시간이 넉넉하게 주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8시 무렵 사람들이 몰려서 식당에 자리가 부족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람들 음식접시를 들고 나와서 로비의 소파에 앉아서도 먹고, 주차장에 나가서 먹으면서도 웃고 떠들며 아침을 즐긴다는 점이다. 마치 우리에게 어디서 먹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먹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아침을 먹는데 입이 짧은 효진이가 제대로 먹지 못했다. 아내와 내가 이것저것 가져다주면서 그것이 얼마나 몸에 좋고 맛있는 것인지를 설명하며 먹이려 해도 제 입에 맞지 않으면 먹으려 들지 않았다. 음식은 체험인데, 체험을 해야 좀 더 다양한 것을 먹어볼 수 있는데, 효진이의 입맛은 아주 소극적이다. 제가 좋아하는 것만 먹는 것도 걱정이지만, 그것 때문에 다른 음식체험을 제대로 하지 못해 음식의 즐거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할까봐 걱정이었다. 효진이는 어려서 심하게 편식을 하던 나를 닮은 모양이었다. 편식 때문에 할머니와 어머니 속을 많이도 썩여드렸는데, 그것을 고스란히 효진에게서 돌려받고 있는 것이다. 

국제 민속예술 박물관 전경(), 인디언 예술문화 박물관 전경(), 국제 민속예술 박물관 입구()

배불리 먹고 텀블러에 커피를 가득 담아서 사만다의 지시에 따라 박물관으로 갔다. 산타페 외곽으로 벗어나 산길을 따라 한참을 간 것 같은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다운타운과 가까운 거리였다. 어도비 양식으로 멋스럽게 만들어진 국제 민속예술 박물관(Museum of International Folk Art)과 인디언 예술문화 박물관(Museum of Indian Arts & Culture)은 같은 공간에 다른 건물로 붙어 있었다. 박물관 건물은 어도비 양식의 탁월한 건축물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직접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Portable Altars를 가지고 다니는 볼리비아인()Portable Altars의 모습()

국제 민속예술 박물관 입장권은 인디언 예술문화 박물관을 포함해서 어른만 15달러(하나만 본다면 9달러)이고 16세 미만은 무료였다. 박물관이 가치 있는 문화유산들을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거나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세워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사설 박물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공공자금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데 어린 학생들에게 입장료를 또 받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좀 더 많은 학생들이 자주 박물관을 찾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일이 우선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산타페를 비롯한 미국의 몇몇 도시에서 시행하고 있는 어린 학생들의 박물관 무료입장은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국제 민속예술 박물관은 세계 최대의 민속공예 박물관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 100개 이상 국가의 디오라마(diorama)[각주:2]와 민속예술품을 135,000점 이상을 소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침 국제 민속예술 박물관에서는 안데스 민속예술(Folk Art of the Andes)’생존의 예술(The Arts Of Survival)’ 특별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안데스 민속예술전시는 가톨릭과 결합된 민속예술이 대부분이었다. 안데스 문명은 남미의 3대 문명이라고 하는 잉카문명, 아스텍문명, 마야문명 중의 하나인 잉카문명을 말하는 것으로 현재의 페루, 볼리비아 등의 기반이 되었다. 안데스 문명은 16세기 스페인의 침공으로 아주 철저히 붕괴되고 말살된다. 그러한 문명의 붕괴와 말살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Eduardo Hughes Galeano)불의 기억에서 말하고 있듯이 기억의 강탈을 낳는다.

 

스페인 군대와 원주민(), 토착신앙과 결합한 예수상(), 해방신학과 결합된 가톨릭().

식민지 건설이라는 세속적인 목적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는 종교적 사명이 결합된 스페인의 폭력적인 문명 말살정책은 철저하게 원주민들의 기억을 유린했다. 그 이후 300년의 통치 기간 동안 가톨릭은 잉카문명의 토착신앙과 결합되어, 민속문화의 일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자신들의 문명을 파괴하고 자신들의 삶을 유린했던 지배자로부터 벗어나려고 끊임없이 투쟁함으로써 정치적 독립은 얻을 수 있었지만, ‘기억의 강탈로 인하여 끝내 언어와 종교는 돌려놓지 못했다. 더구나 독립 이후에도 빈부 격차와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는 오히려 더 심각해짐으로써 그들의 종교에 대한 의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안데스 민속예술의 상당 부분은 이러한 신크레티즘(syncretism)[각주:3]과 관련된 성물들이었고, 그것의 변형된 문화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정복자의 종교가 수탈과 강압의 역사를 강요하고 자신들의 고유문화를 지워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받아들여 현실의 고통을 이길 수 있도록 내면화한 것이다.

따라서 안데스인들의 가톨릭의 내면화 과정에 대한 비판은 유보되어야 한다. 그러한 비판 이전에 그들이 견디고 건너야 했던 불평등과 부조리에 대한 공동체적 이해와 성찰을 나눌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있는 그대로 가치중립적인 관점에서 그들의 종교를 보아야만 하는 이유는 왜곡의 여지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들의 현실에서는 최적화된 방식의 종교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좀 더 냉철하게 판단하고 고민해야 할 것은 그들이 그러한 종교에 의지해서 견뎌야 했던, 아니 견디고 있는 침략과 수탈, 부조리와 불평등의 현실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한 관점이 수반되지 않는 비판과 성찰은 잉카문명과 종교에 대한 소재주의나 이국취미(exoticism)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왜곡이거나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이다.

 

The Arts Of Survival 기부 홍보 전단(), Support 홍보 팔찌(), Vision of January 12th, 2011()

생존의 예술(The Arts Of Survival)’은 재난지대에서 민속예술로 표현된 작품들을 전시한 것이었다. 인도네시아(화산폭발), 파키스탄(홍수), 아이티(지진), 멕시코만(허리케인)의 재난의 참상을 소개하고, 그것을 민속예술로 표현한 작품들을 전시함으로써 재난지역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있었다. 재난과 시련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표현된 전시물들은 소박하지만 절박하고, 절박하지만 과장하지 않는 진정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소 그로테스크한 형태의 작품들은 재난을 과장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민속예술의 성격과 관련된 것으로 보였다. 아이티의 지진과 관련된 작품으로 ‘Vision of January 12th, 2011’의 경우가 그러했는데, 이것은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마스크 문화와 상관된 것이었다. ‘안데스 민속예술전시에서 만났던 샤먼들의 마스크나 신들의 마스크와 기본적인 정조를 같이하고 있었다. , , 대지, 바람의 재난으로 나누어 재난이 어느 특정 지역만의 불행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것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 것도 인상적인 시도였다.

안데스 보부상()Noisemaker(). 팔 수 있는 것을 지닐 수 있을 만큼만 가지고 다니며 팔았을 보부상의 모습과 자신들의 생활환경의 특성을 반영한 악기를 개발한 그들의 모습에서 안데스의 얼굴을 본다.

목숨은 기어코 아름다운 것이어서 그것이 처한 상황이 아무리 남루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살아있음을 표현한다. 아니 어쩌면 그러한 표현을 통하여 그 상황을 견디고 살아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살아야 할 곳은 온전히 부서져 버리고, 주검은 일상으로 널려있는 재난의 현장에서 그 슬픔과 절망을 표현함으로써 넘어서려 했던 사람들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인간이길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상황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을 지키려는 그들의 의지는 결연하고 숙연한 것이었다. 온몸 가득 상품을 매달고 안데스의 곳곳을 누볐을 보부상에게서 피로와 힘겨움 대신 유쾌하고 환한 웃음을 보고자했던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은 노력이었으리라.

국제 민속예술 박물관의 압권은 세계 각국의 민속문화를 구현한 디오라마(diorama) 전시였다. 각국의 생활문화를 정교하게 축소하여 재현한 디오라마에는 만든 이의 소박한 유머가 곳곳에 녹아 있었다. 지배계층의 화려한 고급예술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만나는 생활문화를 진솔하게 재현함으로써 보면서 슬며시 미소 짓게 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곳에 전시된 디오라마는 배경을 정교하게 축소해놓고 그 안에 각기 다른 다수의 인물들을 꼼꼼하게 제 각각의 표정으로 구현하고 있었다. 나무, 점토 등 주변의 재료를 활용하여 제작한 디오라마는 생활공간을 중심으로 삶의 풍부한 표정들을 진솔하게 담아낸 것들이다. 애니메이션 캐릭터 피규어(figure)를 수집하는 내게 이곳의 디오라마는 신선했고, 그만큼 매혹적이었다. 한 작품 안에 수십 명의 인물들이 각기 다른 복색과 표정으로 배경과 어우러진 모습은 플라스틱 피규어로는 구현할 수 없는 유일함과 진솔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투우장(), 시장(), 제단()을 표현한 디오라마. 생활공간의 구현과 인물들의 다양한 삶의 표정이 백미인 작품들

디오라마가 구현해 놓은 세계 각국의 문화는 전시장을 이어가며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전시장 벽면은 물론 중앙 홀에도 앞뒤에서 관람이 가능할 수 있도록 동선이 짜여 있었다. 대부분의 디오라마는 스페인 문화와 원주민 문화가 어우러진 뉴멕시코 문화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그 외에 유럽, 중국, 일본, 인도, 인도네시아 문화가 배경이 된 디오라마도 있었지만 한국 문화를 배경으로 한 것은 찾을 수 없었다. 다양한 국가와 숱한 인종, 그만큼의 다문화가 뒤섞인 미국에서 한국 것을 찾는 것이 편협한 국수주의적 관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안타까운 것은 안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적인 반응을 자제하고 좀 더 객관적으로 본다면, 세계 속에서 우리문화의 위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문화의 수준이나 질적 가치와는 무관한 것일지도 모른다.

국내 언론에서는 K-POP을 중심으로 한 한류로 미국 전체가 떠들썩한 것처럼 호들갑이지만, 아직은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많고,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한국 음악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즐길만한 음악이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안타깝다 라거나 정부가 나서서 국가브랜드를 홍보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물론 정부가 거시적 관점에서 국가브랜드를 체계적으로 홍보하는 것은 사회문화경제적으로 매우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좀 더 주체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한다거나 그들의 평가에 우리를 꿰어 맞추려는 안타까운 인정투쟁의 몸부림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각주:4]

만물을 창조하는 여성의 현빈(玄牝, ), 풍요를 기원하며 제작된 교미하는 소(이상은 인디언 예술문화 박물관 소장, ), 인디언 수난사를 그린 그림(Cody Historical Museum 소장, ) 

인디언 예술문화 박물관은 국제 민속예술 박물관과 정원을 공유하고 있었다. 인디언 예술문화 박물관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문화와 예술을 소개하는 박물관이다. 그런데 인디언의 예술과 문화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원시적 거주지나 도자기 정도만을 소개하고 있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출산과 양육 등과 상관된 여성적 이미지[각주:5]의 것들이었다. 그들의 예술과 문화가 성립될 수 있었던 생활문화나 그것이 누구에 의해, 왜 파괴되었고, 현재의 모습은 무엇인지 등의 맥락이 온전히 누락되어 있었다. 현실과 역사의 맥락이 누락된 유물은 그저 소박한 토기와 조악한 세트에 불과해 보였다. 옐로우스톤 여행에서 들렸던 코디 역사박물관’(Cody Historical Museum)에서 인디언의 생활상뿐만 아니라 그들의 수난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던 것과는 무척 대조적이었다. ‘Here, Now and Always’라는 전시테마가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였다.

박물관을 나와서 캐니언 로드(Canyon Road)를 찾아갔다. 캐니언 로드에 들어서면서 나는 내심 주차가 걱정스러웠다. 길의 폭으로 보나 주차금지 표지로 보나 노상 주차가 어려워 보였고, 갤러리는 독립된 주차장을 갖기에는 협소해보였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 일요일이라서 이면도로에는 차를 댈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얼바인에서 견인 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무조건 유료주차장을 찾아서 주차를 했다.[각주:6]

캐니언로드 전경

유료임에도 주차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심한 우리는 주차장에 붙은 안내문 따라서 In Art Gallery에 찾아가 5달러를 내고 확인티켓을 받아 대쉬보드에 올려놓고 나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런데 주차비를 내면서 이것저것 묻다보니 어느새 주인은 자신의 갤러리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녀의 안내로 In Art Gallery부터 본격적인 갤러리 관람을 시작할 수 있었다.

갤러리 앞마다 놓여 있는 의자들. 앉지 않더라도 보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는 풍경이다.

캐니언 로드가 산 미구엘 교회(Chapel of San Miguel)가 있는 드 베이거스(De Vagas)에서 동북쪽으로 이어진 거리라고 설명하는 것은 지도로만 가본 사람들의 방식이다. 캐니언 로드는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진 갤러리들이 길가에 늘어선 풍경 그 자체가 이미 갤러리인 거리다. 아니다, 이것도 지나치게 문자적인 표현이다. 캐니언 로드는 걷기를 권하는, 걸을 수밖에 없는, 걸으며 즐거워지는 길이었다.

캐니언 로드를 만들고 있는 어도비 양식의 갤러리들

 캐니언 로드는 아름다운 속도를 지녔다. 차로는 느낄 수 없는 걷기의 속도를 캐니언 로드가 만들어 내고 있었다. 1차선 이상이 될 것 같지 않은 도로 곁으로 길과 함께 넉넉해졌을 나무들은 그늘을 드리운 채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협소한 도로에는 많은 차들이 오갔지만 모두 걷는 사람의 속도와 방향에 따라 멈추거나 달렸다.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빼앗겨 사진 촬영을 위해 차도로 내려서면 달려오던 모든 차들이 조용히 멈추어 주었고, 미안하다는 손 인사에 괜찮다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걸어가는 사람들의 조용한 미소가 평화로웠다.

캐니언 로드는 길이 만든 길이 아니라 갤러리가 만든 길이었다. 어도비 양식의 기본을 유지하면서 작품의 성격에 맞는 개성적인 연출이 돋보이는 갤러리들이 길 자체가 되어, 캐니언 로드를 만들었다. 거의 모든 갤러리들은 커다란 나무나 아름다운 정원과 어우러져 있었고, 입구에는 예외 없이 밖으로 의자가 놓여 있었다.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쉬라고 내준 것인지, 오고가는 사람들을 보기 위해 내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고단한 일상에서 어딘가 앉을 곳이 있고, 누군가 앉게 할 수 있는 배려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여유롭고 푸근한 풍경이었다.

캐니언 로드에서 만나는 우편함들. 열어보면 문득 나를 기다리는 러브레터라도 들었음직한 풍경이다.

갤러리의 입구나 건물을 따라가다 보면 건물마다 얼굴처럼 소박한 우편함 하나씩을 내밀고 있었다. 대부분 공과금이나 카드요금 청구서가 날아올 우편함이겠지만, 마치 누군가의 따듯한 러브레터가 들어있을 것 같아 가슴이 뛰었다. 이와이 순지(岩井俊二) 감독의 영화 <러브레터>(Love Letter, 1995)가 애틋했던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나서 그가 사랑했던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거나, 중학교 시절 첫사랑을 성인이 되어 그가 죽고 나서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러브레터>의 애틋함은 박인환의 시처럼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때문이 아닐까? 그토록 애틋했던 사랑은 갔지만 옛날은 오롯이 쓸쓸한 기억으로 남게 되는 안타까움, 그것을 기억하는 나는 그 옛날의 내가 아니라는 처연함. 곤 사토시(今敏) 감독의 애니메이션 <천년여우>(Millennium Actress, 2001)의 쓸쓸함과도 같은 맥락이었다.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며 하루에도 몇 번씩 열어보던 중고등학교 시절 우리 집 우편함이 떠오른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어느 갤러리 입구, Jesus Said Buy Fork Art 라는 문구가 재미있다.

갤러리마다 주인들은 작가와 작품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고 때론 차가운 음료를 내주기도 했다. 또한 대부분의 갤러리가 플래시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진 촬영을 허용했고, 촬영을 원하지 않는 곳에서는 작품을 촬영한 포스트카드를 무료로 나누어 주기도 했다. 멀리 떨어져서 그저 바라만 보는 작품이 아니라 가까이 가서 보고, 사진도 찍고, 때론 묻기도 하는 살아 있는 갤러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니언 로드의 모든 갤러리들은 작품을 팔기 위한 곳이라는 성격은 변함이 없었다. 이곳의 예술가들은 대부분 고급 주택에서 우아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예술가들이라면 모두 뉴욕이나 산타페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을 꿈꾼다고 한다. 이 거리를 걸어보니 그들의 소망에 공감할 수 있었다.

산 미구엘 교회.

캐니언 로드에서 산 미구엘 교회(Chapel of San Miguel)까지는 아주 가까웠다. 교회는 오래된 탓인지 공사가 한창이어서 다소 혼잡스러웠다. 산 미구엘 교회는 1692년에 세워진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라는데, 종교적 충돌로 인하여 원주민에 의해 훼손되었다가 1710년에 재건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처음 들어온 스페인사람들은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강권하지 않았었는데, 산 사람의 심장을 제물로 바치는 원주민들의 종교 행위에 강한 반감을 드러내면서 충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종교적 충돌 이전에 스페인인들과 원주민들은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었는데, 종교적 충돌로 인하여 극한 갈등을 빚었고, 그 과정에서 산 미구엘 교회가 파괴되었던 것이다. 이후 스페인이 폭력적으로 원주민을 제압함으로써 산 미구엘 교회는 재건될 수 있었다. 어도비 양식으로 소박하게 지어진 산 미구엘 교회는 시골 예배당처럼 정겨워 보였지만 그 내력을 살펴보면 원주민의 아픈 역사가 남아 있는 장소였다. 모두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라는 데에 방점을 찍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세월동안 그곳에서 어떤 일이 왜 있어났는지 아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인식이 전제되어야지만 가장 오래되었다는 수사(修辭)의 진정한 의미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오래된 집전경(), 산타페 역사재단에서 보존가치를 증명한 명패(), 가장 오래된 집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장난스러운 꼬마()

산 미구엘 교회에서 오른쪽으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집’(The Oldest House)이 있다. 1740-1767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집은 밖에서 보기에는 단지 조금 낡은 평범한 집처럼 보였다. 자세히 보니 산타페 역사재단 명의로 이 건물이 보존 가치가 있는 가장 오래된 집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 예전에는 출입구로 썼을법한 문이 매워진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입구로 들어가니 이 집의 내부를 둘러보기 위해서는 1인당 1달러를 기부해야만 한단다. 이 돈은 올드 성 미카엘 고등학교(Old St. Michaels High School)에 기부된다고 한다. 도네이션을 하고 내부로 들어가 보니 아주 작은 공간에 그 시절의 살림살이가 소박하게 놓여 있었다. 몽골에 갔을 때, 게르(Ger) 안의 살림살이를 보면서 느꼈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사람 사는 데에는 그리 많은 물건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강변하는 듯 보였다. 정면으로는 밖을 볼 수 있는 작은 창문이 있었는데, 우리가 밖을 내다보자 밖에 있던 귀여운 꼬마가 안을 들여다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우리가 여행을 통해 산타페를 잠시 들여다보는 일도 꼬마가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어퍼 크러스트 피자집의 피자 사이즈(), 꼭 라지 사이즈를 먹어야 한다고 우겨서 시킨 피자(), 그것이 많은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한 가족들의 피자 접시()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가장 오래된 집과 거의 붙어있는 어퍼 크러스트 피자(Upper Crust Pizza)집으로 갔다. 산타페의 일반적인 음식점처럼 밖에도 테이블을 내서 음식을 즐길 수 있게 했는데, 피자 굽는 냄새에 끌려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상류층’(Upper Crust)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소박한 실내의 저렴한 세미 셀프서비스 피자집이었다. 미국에 처음 와서 피자가 먹고 싶다는 아이들에게 코스트코에서 만들어주는 피자와 피자헛 피자를 사준 적이 있었는데, 두 번 모두 지독히 짜서 피자는 그 이후로 먹지 않았다. 그런데 이 집 피자는 짜지 않고 넉넉한 양과 다양한 토핑으로 아주 풍부한 맛을 보여주었다. 점심이 늦은 탓에 배도 고프고 목도 말랐다. 눈치 빠른 아내가 사무엘 아담스를 한 잔 시켜주었다. 깊은 맛의 맥주 한 잔과 풍부한 피자의 맛이 어우러져 더할 수 없이 행복해지는 오후였다.

피자를 먹고 아주 행복한 기분이 되어 다시 다운타운 쪽으로 갔다. 어제 보지 못한 기적의 계단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곳에 들르기 전에 나는 먼저 카메라 상점에 들러서 광각렌즈에 끼워져 있는 편광필터를 빼야만 했다. 아이들이 카메라 상점에서 엽서를 고르고 있는 동안 잘생긴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부탁을 하니 그는 웃으면서 아주 간단하게 편광필터를 빼주었다. 편광필터는 끼는 부분이 얇아서 잘 빠지지 않으니 주의해서 빼야 한다고 빼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그는 일러주었다. 그 직원의 친절한 서비스에 고마워서 그곳에서 예정에 없던 필터 케이스를 하나 구입했다. 결국 기적의 계단은 시간이 지나서 보지 못했다.

횡단 여행을 준비하면서 풍경을 찍겠다고 광각렌즈를 구입했다. 지금 쓰고 있는 캐논 40D 바디는 캐논 350D를 쓰던 내게 은사님께서 쓰시던 것을 주신 것이다. 탐론 28-300m 표준줌렌즈로는 풍경을 담는데, 다소 아쉬움이 있어서 아내를 졸라 횡단을 시작하기 전에 광각렌즈인 탐론 11-18m를 구입했다. 마침 아마존에서 편광필터까지 저렴한 패키지로 제공하여 그것을 구입하고, 반가운 마음에 덜컥 끼우고 출발한 것이다. 그런데 사진이 자꾸 어둡게 나왔다. 운전을 하면서 빠르게 이동을 하였기 때문에 사진이 어둡게 나오는 것은 숙소에서 노트북으로 보고나서 알게 되었다. 결국 편광필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고 빼려고 했으나 이게 생각보다 잘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어제 봐둔 카메라 상점으로 와서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사실 편광필터도 필터였지만 조리개 값이나 셔터 스피드를 제대로 조정하지 않았던 데 더 큰 원인이 있었다. 새로운 렌즈와 필터에 마음을 빼앗겨 가장 기본적으로 돌아보아야할 것을 돌아보지 못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생각을 카메라 샵을 나오면서 했다는 것이다. 늘 외양간은 소를 잃고 나서 고치나 보다.

시간을 보니 520분이었다. 산타페 인근에 있다는 피코스 국립역사공원(Pecos National Historical Park)를 둘러볼 수 있을 것이라는 욕심에 급하게 그곳으로 달렸다. 사만다가 한번 심통을 부려서 헤매고, 다시 허겁지겁 찾아갔는데 6시다. 혹시나 했는데 퇴근하는 직원들이 오늘은 문을 닫았으니 내일 오란다. 여행자에게 내일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역시 과한 욕심이었나 보다. 그렇지만 덕분에 산타페의 석양을 온전히 바라보며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바람은 산타페처럼 시원했다.

  1. 일반적으로 아메리칸 블랙퍼스트의 경우에는 계절과일, 주스류, 시리얼, 계란요리, 음료, 케이크류, 빵 종류, 햄, 베이컨, 소시지 등이 나온다. 콘티넨탈 블랙퍼스트라고 적힌 곳은 대부분 독립적인 식당을 갖추지 못한 곳에서 빵과 커피 정도를 제공할 뿐이다. [본문으로]
  2. 일정한 배경 위에 축소모형을 설치하여 하나의 장면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근대에 귀족들이 역사적인 전투를 재현하기 위하여 축소모형을 만들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국제 민속 예술 박물관의 디오라마는 규모나 종류는 물론 질적인 면에서도 민속 예술작품으로 탁월하다. [본문으로]
  3. 종교적 융합을 가리키는 말로서, 침략과 정복 혹은 문화가 교류를 통하여 상이한 종교가 상호 융합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토착종교가 있는 곳에 새로운 종교가 들어와서 상호 융합하는 과정에서 상이한 두 종교는 위계화되거나 결합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안데스 지역의 경우, 잉카문명의 토착신앙을 가톨릭은 부정하면서 종교적 박해를 가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원주민들에게 정착되는 과정에서 토착신앙적 요소가 가톨릭과 결합되는 독특한 양상을 드러내기 때문에 신크레티즘으로 보아야 한다. [본문으로]
  4. 가령 대학평가만 하더라도 해외 언론사나 해외 대학에서 하는 평가는 참고 사항일 뿐이지, 우리가 그 순위를 올리기 위해서 그들의 평가 기준에 맞추어 대학을 재편한다는 것은 얼마나 웃지 못 할 이야기인가? 오히려 세계의 주목을 받고 싶다면 그들과는 차별화된 평가기준으로 우리가 그들을 평가하는 쪽이 승산이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5. 아이를 낳고 있는 여성의 성기를 과장하여 표현한 것은 󰡔도덕경󰡕에서 표현한 현빈(玄牝)과 같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도덕경󰡕에서 만물의 근원으로 꼽는 현빈의 구체화된 모습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러한 현빈을 형상화하여 학교의 발전을 기원했던 한양대학교 50주년 조형물에서도 구현된 바 있어서 무척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본문으로]
  6. UCI에서는 한 달에 55달러를 내면 학교에 주차를 할 수 있다. 아침에 아이들 학교에 데려다 주고 차를 집에 놔두고, 연구실로 나오면 오후에 아이들 픽업은 아내의 몫이었다. 그래야 5시까지 온전히 연구실에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아내가 아프고 나도 몸이 좋지 않아서 차를 학교에 가져간 날이었다. 다른 학생들이 하듯이 UCI 앞 상가 주차장에 차를 대고 강의를 마치고 나오니 차가 없었다. 차를 찾고 있는데 멕시칸으로 보이는 보안요원이 다가와 내 차가 도난을 당했단다. 자세히 들어보니 이 친구 영어가 많이 서툴렀다. 재차 물으니 2시간 이상 주차가 되어 있어서 견인해갔다고 했다. 결국 지인의 차를 얻어 타고 견인사무소까지 가서 160달러의 벌금을 물고 차를 찾아야 했다. 차를 찾으며 벌금이 너무 비싸다고 하니까 다른 도시에서는 300달러가 넘는단다. 다른 도시 벌금이 300달러가 넘든 3000달러가 넘든 나랑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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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클라호마에서 울다.

82일 오클라호마시티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어젯밤 아내를 제외한 셋이 모두 감기약을 먹고 누워서 한참을 이야기하다 잠든 탓에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9시까지 아침을 준다고 해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사무실에 붙어있는 간이 테이블 3개가 놓인 식당에 갔더니 머핀과 식빵 그리고 우유와 커피가 놓여 있었다. 그나마도 담고 보니 방으로 가지고 올라가지 말라는 경고문구가 붙어있다. 한참을 고민하다고 다 두고 왔다. 예약 사이트에서 본 숙소의 아침은 콘티넨탈 블랙퍼스트(Continental Breakfast)였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숙소근처에는 아침을 해결할만한 음식점이 없었고, 심지어 패스트푸드점도 없었다.

출발 전 머리를 묶는 유진

숙소를 나서려는데, 좀처럼 머리를 묶지 않는 아이 둘이 모두 머리를 묶었다. 한참 멋을 부릴 나이에다가 이곳 아이들이 대부분 생머리를 묶지 않고 다니니, 아이들은 내 잔소리에도 머리를 늘 풀고 다녔다. 더구나 이곳은 머리하는 비용이 비싸서 한국에서 온 머리 그대로다보니 점점 아이들 머리는 주체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오클라호마의 더위를 체험한 아이들이 스스로 머리를 묶은 것이다. 그렇다, 아빠의 잔소리보다는 자기들이 겪으면서 아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고, 진짜 알게 되면 아이들은 스스로 움직인다. 왜 부모인 내 뜻을 따르지 않느냐를 고민[각주:1]할 것이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느끼고 깨닫게 하지 못하는 자신의 소통 능력을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머리 묶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내와 눈을 맞추고 웃었다. 머리 묶는 유진이 옆에는 어제 아내가 손으로 빤 빨래가 말라가고 있었다. 여행은 여지없는 생활이다.

일단 식당은 국립추모박물관(National Memorial & Museum)으로 가서 그 주변에서 찾기로 했다. 밖으로 나와 보니 아침인데도 어제보다 더 더웠다. 더운 것이 아니라 뜨거웠다. 차창을 모두 열고 열기를 뺀 후에 에어컨을 한참 켠 후에야 차에 겨우 탈 수 있을 정도였다. 국립추모박물관에 가서 주변을 돌아보니 역시 기대했던 음식점은 없었고, 조금 더 밖으로 나오니 몇몇 패스트 푸드점만 보였다.

맥도날드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기로 했다. 음식을 시키는 사이 화장실을 갔는데 잠겨 있었다. 문 앞에 스티커를 읽어보니 프런트에서 키를 받아서 열어야 한단다. 미국은 대체로 화장실 인심이 고약하다. 심지어 물건을 살 사람만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다는 문구를 내건 편의점도 있었다. 프런트로 가려는데 앞 사람이 나오며 문을 잡아준다. 화장실에서 나오면 자동으로 문이 잠기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소변을 보려면 일일이 프런트에 가서 열쇠를 달라고 해야 하는 곳에 미국사람들은 참 속도 없이 잘도 다닌다. 하긴 우리도 그런 곳에서 아침을 먹었으니 속없기는 둘 다 똑같다.

맥도날드에서 시킨 음식

맥도날드의 인색한 화장실

맥도날드보다 더 야박했던 4월에 요세미티국립공원 가는 길에 만났던 주유소 내 편의점 화장실

화장실에서 나와 보니 효진이는 스머프를 끼워주는 해피밀(happy meal)[각주:2]을 주문한 모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해피밀은 말도 안 되는 음식이라고 시켜주지 않았을 텐데, 어제 울면서 엄마가 아닌 아빠와 잔 효진이가 안쓰러웠는지 아내가 그냥 시켜준 모양이다. 효진이는 5학년인데도 아내에게 아기처럼 군다. 늘 엄마와 같이 자고 싶어 하는 효진이는 여행을 떠나면서부터 아내와 한 침대를 써왔다. 늘 아내에게 찰싹 붙어서 스킨십을 하는 효진이 때문에 아내가 다소 힘들어했다. 어제는 유진이가 감기기운이 있다니까 아내가 유진이랑 한 침대를 쓰고 내가 효진이를 데리고 잤는데, 그게 못내 서운했는지 결국 한바탕 눈물을 쏟았다. 그러는 모습이 또 좀 안 돼 보여서 꼭 안아주고, 작은 소리로 효진이를 위로해주고 서로 킥킥대다가 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진이는 엄마가 첫째다. 생각해보면 우린 누구나 엄마가 최고가 아닌가?

아이들과 한 침대를 쓰면서 자기 전에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번 여행에서 발견한 즐거움 중에 하나다. 아이들이 어릴 때에는 배 위에 올려놓고 이야기를 해주다보면, 어느새 내 배 위에서 잠들곤 했었다. 그러면 아이의 숨 쉬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혹시라도 아이가 깰까봐 나도 조심스럽게 숨을 쉬곤 했던 기억이 났다. 아이들은 크고, 나도 너무 바빠서, 아이를 재워주는 일이 별로 없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그 즐거움을 찾은 것이다. 누워서 이야기하다보면 낮에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아침을 먹고 다시 차를 타는데 숨이 탁탁 막혔다. 대구에서 자란 아내는 덥다는 소리를 잘하지 않는데, 뜨겁단다. 더위 때문인지 여정이 힘든 탓인지 모두들 다소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국립추모박물관에서 주차할 곳을 찾는데 근처 성당 주차장이 텅텅 비어서 살펴보니 허락 없이 주차하면 견인이라는 표지가 무서웠다. 그 바로 옆에 유료주차장이 있어서 그곳에 주차를 했다. 주차를 하고보니 후불도 아닌데 주차비 낼 곳이 없다. 주변을 살펴보니 주차비 징수 박스가 있었는데, 자기번호에 주차비 3달러를 밀어 넣으면 되는 시스템이다. 주차비를 밀어 넣어도 영수증이나 주차증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주차장에는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 보고 있으니 알아서 주차비를 내고 가라는 것이다. 판옵티콘(Panopticon)[각주:3]이 따로 없다. 이것은 판옵티콘처럼 감시하는 사람이 감시당하는 사람을 언제나 주시하고 있다고 믿게 하는 시스템이다. 주차비 징수 박스는 원시적인데 그것을 운영하는 시스템은 무서운 감시 시스템이라며 웃었지만, 마냥 유쾌한 일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다른 곳에 차를 대고 싶었으나 날이 너무 더웠다. 더위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오전이었다.

유료 주차장 주차비 징수박스. 지폐를 자기 번호에 넣고, 납작한 쇠로 빠지지 않도록 밀어 넣게 되어 있다.

국립추모박물관은 1995419일 오전 92분에 발생했던 오클라호마 폭탄테러(Oklahoma City bombing)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세운 곳이다. 오클라호마 폭탄테러는 1993년 텍사스에서 집단 자살한 사교집단 다윗파에 대한 연방정부의 불만족스러운 처리에 불만을 품은 티모시 맥베이(Timothy McVeigh)가 알프레드 P. 뮤러 연방정부청사(Alfred P. Murrah Federal Building) 앞에서 폭발물 트럭을 폭발시킴으로써 168명의 사상자와 600명 이상의 부상자를 낸 사건이었다.

And Jesus Wept 과 조형물에 대한 설명

주차장에서 국립추모박물관으로 가는 신호등 앞에 조형물 ‘And Jesus Wept’이 서 있었다. 이것은 요한복음 1135절의 예수께서 눈물 흘리시더라를 인용한 것으로,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의 168명 희생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영원한 안식을 찾게 하려는 추모 조형물이었다. 168명의 희생자를 상징하는 화강암 벽의 틈을 마주선 예수께서 눈물 흘리시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조형물의 안내에는 자신의 친구인 나사로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셨다고만 적혀있지만, 성서에 의하면 죽은 나사로를 걸어 나오게 하셨다고 적혀 있다. 희생자들의 부활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예수의 연민과 사랑으로 영혼의 안식을 기원하는 조형물이었다. 이 조형물을 설명한 판을 읽다보면, 희생자들에 대한 안식의 기원과 함께 희생자의 가족들을 향한 위로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단락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다”(요한복음 11:25)라고 적음으로써 희생자들이 영혼의 안식을 찾을 것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And Jesus Wept’ 앞에서 나는 이미 비애와 절망으로 참혹해졌다. 물론 이 조형물은 오히려 그러한 참혹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종교적 위안을 주기 위한 것이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탄테러의 참혹함과 조형물의 깊은 슬픔이 먼저 전해졌다. 그 참혹함은 언어 이전의 것이었고 가슴을 베고 지나는 상처 같아서 실체가 잡히지는 않았지만, 관람 내내 아리고 아팠다.

9:03 게이트와 그 앞의 Reflecting Pool과 9:01 게이트

길을 건너서 국립추모박물관의 ‘9:03 게이트로 들어갔다. 게이트를 들어서자 리플렉팅 풀(Reflecting Pool) 건너로 보이는 ‘9:01 게이트가 보였다. 이것은 폭탄테러가 일어난 1995419일 오전 92분을 기억하기 위하여 91분과 93분 사이를 비워둔 것이다. 그 사이에 리플렉팅 풀을 두고 그것을 통해서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와 테러에 대한 경각심 등을 일깨우고 있었다. 두 문과 풀을 망연스레 보다가 문득, 이들은 어쩌면 92분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킴으로써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번다한 조형물을 세우는 대신 두 개의 벽 같은 문을 만들어 시간을 정지시키고, 그 사이 누락된 시간에 일어난 일을 관람자 스스로 물에 비추어보게 함으로써 더욱 깊은 슬픔과 기억을 만들고 있었다.

168개의 빈 의자’(Empty Chairs). 19개의 작은 의자는 어린 희생자들을 상징하는데, 그 텅 빈 자리가 가슴을 먹먹하게 하였다.

9:03 게이트를 걸어 들어가다 보니 각기 다른 크기의 168개의 빈 의자’(Empty Chairs)가 기다리고 있었다. 빈 의자는 이곳에서 생명을 잃은 사람들을 상징하고, 그 중에 작은 의자들은 19명의 어린이 희생자들을 표상한다. 이 의자는 9열로 정렬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희생되었던 건물의 9개 층을 의미한단다. 이 의자는 반투명 유리 위에 청동과 돌을 얹었기 때문에 낮에는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밤에는 불이 들어와 희망의 신호를 밝힐 수 있게 하였다. 그날 이후의 시간은 청동이 입은 세월의 흔적과 그것이 흘러내려 유리 받침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희생자들의 애틋한 사연과 그들을 준비 없이 보냈던 가족들의 슬픔도 그렇게 세월과 함께 더욱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빈 의자들은 9:03게이트와 9:01게이트 사이에 놓여 있었는데, 그 희생의 시간 동안 그들의 생명이 하나하나 속절없이 스러져 간 것을 의미하는 듯 했다.

9:03게이트에서 빈 의자들을 따라 9:01게이트 쪽으로 걸어가니 ‘Survival Wall’이 서 있다. 폭탄이 터졌던 건물의 마지막 남은 벽이다. 이 벽은 테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부상자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이 벽에는 그곳에서 생존한 600명 이상의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Survival Wall’를 보고, 9:01 게이트를 지나니 ‘The Survival Tree’가 서 있었다. 수령이 90년 이상 된 이 느릅나무는 테러 현장을 목격한 나무로서, 지금은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인간의 놀라운 치유능력을 상징한다고 했다. 그렇게 그곳에서 온갖 애도와 상처들을 지켜보았을 느릅나무를 바라보다가 국립추모박물관으로 향했다.

구조5팀에서 적어놓은 글귀

국립추모박물관 현관의 문구

국립추모박물관 벽에 누군가 스프레이로 쓴 글귀가 적혀 있었다. 사고 당시 구조에 참여했던 구조5팀이 적어 놓은 것이다. 거기에는 “We search for the truth. We seek Justice. The Courts require it. The Victims Cry for it. And God demands it!”라고 적혀 있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폭탄테러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짧고 단호한 글귀에서 배어 나왔다. 익명의 대중을 향한 무차별의 테러는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공격은 절대로 용납될 수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구조5팀이 적어놓은 글귀를 보면서 진실과 정의라는 지독히 추상적인 말의 구체화된 현실을 떠올리며 씁쓸해졌다. 진실과 정의가 소중한 것은 누구의 관점이 아니라 모두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누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국립추모박물관 입구에 공간의 의미를 적은 글귀가 벽에 새겨져 있었다. 앞의 문장들보다 마지막 문장에 눈이 갔다. 여기서 위로, , 평화, 희망, 평온을 얻어가기를 희망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슬픔은 집요하고 마음의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겠지만, 그것이 비롯된 곳에서 치유와 극복의 방안을 찾으려는 노력은 참으로 숙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일어난 일을 객관적으로 수용하면서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개선하고, 극복해 나갈 것이냐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희생자의 유가족이나 테러 현장의 생존자들이 갖고 있을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씻어 주기위한 전 사회적 배려와 노력은 우리도 눈여겨 보아야할 부분이었다.

폭파사건의 시간대별 구성

카메라에 잡힌 범행 전 트럭

미국 정부 휘장

구조 단체의 모자

국립추모박물관 관람은 3층부터 시작했다. 3층은 테러리즘의 배경, 이곳의 역사, 오클라호마 폭탄테러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 폭탄테러 순간의 혼란 체험, 테러 이후의 무질서 체험, 구조 체험, 세계의 반응, 구조와 복구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사이에 사건 발생 한 시간의 수사 상황과 첫 날의 수사 상황을 삽입함으로써 전시의 긴장을 유지시키고 있었다.

폐허 속의 성경

열어야 할 방도 열 사람도 사라진 열쇠

그날 이후 멈추어버린 시계

당시 건물에서 나온 손목시계, , 신발, 안경, 열쇠 등의 물품들을 전시하고, 그 날 이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벽시계의 단호한 정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전시 공간 곳곳에서 허무하게 무너졌지만 결국 복구의 중심이 되고 있는 미국의 상징물들이 전략적으로 노출되고 있고 있었다. 사건을 시간대별로 재구성하여 마치 사건의 진행 과정에 관람자가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 점도 매우 돋보이는 구성이었다. 또 하나, 테러범을 구속하기까지의 과정을 재구성함으로써 극적인 흥미를 유지할 수 있게 하였고, 구조 현장에 참여했었던 기자, 구조대원, 자원봉사자들을 모자, 구조장비, 취재수첩 등의 소품으로 현장의 긴박감을 표현하고 있었다.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해 미국 전역에서 온 위로와 격려

마지막 희생자의 발견

생존자 및 목격자의 이야기

구조 활동 도중 숨진 간호사

희생자 가족들 이야기

건물철거 이후 활용에 대한 설문 조사

듣는 것은 보는 것을 넘어서지 못한다지만, 보는 것은 느끼는 것을 넘어설 수 없다. 3층의 전시는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느끼게 하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동선의 유도를 통하여 전략적인 스토리텔링을 구사함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희생자들에 대한 감상적인 추모나 테러리즘에 대한 계몽의 일방성에서 탈피하여, 구조과정의 감동적인 스토리(사건이 보도되고 피가 모자란다는 보도에 달려오는 헌혈자들, 미국 전역으로부터의 희망 메시지 등등)와 희생자 각자의 스토리 그리고 범행 과정 및 검거 과정까지 흥미롭게 구성해 놓음으로써 관람자 스스로 느낄 수 있게 만든 것이다.

특히 관람이 진행되면서 뒤쪽으로 갈수록 이러한 참혹한 재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사람들의 용기와 구조대원들의 헌신적인 희생 등을 부각시켜감으로써 고통스러운 기억의 상기를 넘어서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DC코믹스나 마블코믹스의 슈퍼히어로가 아닌 우리 이웃을 영웅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지점이었다. 거기에 어린이들의 따듯한 편지, 미국 전역에서 보내오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 생중계로 진행되는 구조과정, 그 중간 중간 테러리즘에 대한 경고와 사회적 공분(公憤) 만들기, 정의 구현의 필요성과 그 주체가 미국이 되어야만 한다는 강력한 의지 천명 등이 이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다인종, 다문화, 다언어 사회인 미국의 다양성은 미국이라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결집되고, 그것은 다시 미국인으로서의 자부심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모습은 신속하고 명확하게 피아(彼我)를 구분하고, 정의를 선취함으로써 정당성과 자부심을 확보하고, 그 안에서 효과적인 단합을 이루어 냄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신속하고 견고한 일치는 스스로 절대선(絶對善)의 맹목에 빠지게 될 위험성이 높고, 비판적 성찰의 가능성을 제거할 가능성이 높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먹먹해진 가슴을 안고 2층에 내려오니, 이 박물관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이라는 ‘Gallery of Honor’로 이어졌다. 방 안 가득 168명의 희생자 사진과 그들의 유품 하나씩을 놓아 꾸민 방이었다.

아기 희생자와 젖꼭지(), 희생자와 아이의 편지(), 눈물을 흘리는 관람객을 위한 티슈박스(하)

방 가운데에는 앉을 수 있는 의자와 작은 티슈박스가 있었다. 한 명 한 명의 얼굴과 이름 그리고 유품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특히 건물 안에 어린이 집(Day Care Center)이 있었기 때문에 유아들의 희생이 컸고, 그래서 희생자 중에는 유난히 아기들이 많았다. 아기들의 젖꼭지, 인형 등을 보면서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뒤돌아보니 아내도 울고 있었다. 아내가 우는 모습에 아이들이 티슈박스에서 휴지를 뽑아다 주었다. 그 때 효진이가 손을 잡아끌어 그곳에 가보니 희생당한 엄마에게 아이가 쓴 짧은 편지가 있었다.

이 작은 편지에 또 울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느닷없이 떠나는 일은 모진 일이지만, 떠나는 사람이 선택한 길이 아니지 않는가. 준비 없이 남게 된 어린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두고 떠나야했을 엄마의 심정을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 없었다. “Life is sad without you.”라는 말에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슬픔도 공명이 되나 보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들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제야 왜 이 방 안에 티슈박스가 놓여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2층은 폭탄 테러 이후의 대처와 미래지향적인 관점을 제시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방의 테마는 희망이었다. 어린이들이 보낸 편지, 엽서,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통로에는 어린이들이 보내준 27,000개의 페니로 만들었다는 ‘The penny path’와 그것이 만들어진 과정을 설명해주기 위해 홀로 기다리는 노인 자원봉사자의 모습에서 미국의 근력이 보였다. 희망의 방에서 눈에 뜨이는 것은 천장에 가득 매달린 수많은 황금학이었다.

어린이들이 보내온 엽서와 그림

The penny path

희망의 방에 매달린 황금학

벽에 붙은 안내문에는 일본 아이 사다코의 사연과 종이학의 전설 그리고 일본에서는 종이학이 치유의 상징이라고 밝히면서, 폭탄테러가 발생한 후 며칠 후부터 미국 전역에서 아이들이 10,000개 이상의 종이학을 용기 내라는 편지와 함께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보내준 종이학을 모티브로 희망의 방 천장에는 수많은 황금학을 매달아 놓았단다. 슬픔과 절망을 건너는 법을 아이들은 마음을 모으는 데서 찾은 것이다. 아이들은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 지독한 슬픔을 건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증오와 복수가 아니라 위로와 용기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을.

Symbol of Comfort

미국 정부는 1995423일 추도식장에서 희생자의 가족들에게 ‘Symbol of Comfort’라는 곰인형을 하나씩 주었다고 한다. 미국 정부의 의도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추도식 사진 속에서 유가족들이 하나씩 안고 있는 곰인형은 위안과 위로를 주는 듯 보였다. 희생자들이 곰인형처럼 함께 할 것이라는 의미인지, 종이학을 접어서 보냈던 아이들처럼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위로와 용기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분명한 의도와 의미는 알 수 없지만 그 지독한 슬픔 속에서 작은 곰인형이 주었을 위안은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유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곰인형을 나눠줄 생각을 한 사람의 감성이 아름다웠다.

박물관 앞에는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희생자의 유품이거나 좋아했을 물건으로 보이는 곰인형, , 신발 등을 매달아둔 벽이 있었다. 어떤 것은 낡고 어떤 것은 새것으로 매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희생자들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모양이다. 거친 철망에는 따듯한 기억들이 매달려 있었다.

국립추모박물관을 보면서 생각이 많았다. 테러에 대한 분노나 희생자에 대한 슬픔과는 별도로 문화콘텐츠 연구자로서 이 박물관의 힘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엇을 전시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고 체험하게 하느냐에 대해서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전개한 스토리텔링이 아주 돋보였다. 폭탄테러를 추모하는 박물관에서 전시를 해봐야 그거겠지 라고 별 기대 없이 온 것인데, 기대 이상이었다. 오클라호마 폭탄테러라는 콘셉트를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함으로써 여러 이야기를 찾아내고, 그것을 기승전결의 거시 구조로 전개하면서도 각 단계별도 2-3개의 테마가 동시에 진행되게 함으로써 극적 긴장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 등이 돋보였다. 특히 관람객의 의문에 대한 답을 미리미리 제시하면서도 관람객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적재적소에 마련해 둔 것도 눈여겨 볼 부분이었다.

희생자의 유품이나 좋아하는 것을 매단 추모의 벽

Where Were You on April 19, 1995?

특히 ‘Where Were You on April 19, 1995?’는 폭탄 테러가 일어났을 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컴퓨터에 기록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테러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과 희생자 역시 당신과 같은 일상 안에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오클라호마 폭탄테러의 시간과 관람객 개개인의 시간의 연결시킴으로써 이 사건과 은연중에 결부시키고 있다는 점이 탁월했다. 결국 그곳을 떠나면서 우리는 방명록에 ‘We will never forget!’이라는 결의를 남기고 왔다.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 역시 문제는 참여였다.

국립추모박물관을 나와 주차장으로 가는 길은 거의 한증막이었다. 차를 찾아 문을 열려는데 손이 델 것만 같았다. 실내의 더운 기운을 빼려고 차창을 내리려는데, 스위치가 손이 델 정도로 뜨거웠다. 할 수 없이 문을 열고 에어컨을 한참 튼 후에 차에 탔다. 카메라는 들고 다녔지만, 렌즈를 담아둔 카메라 가방은 차안에 두고 다녀서 온도에 예민한 렌즈가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큰 고장은 없었다.

세그웨이를 타다.

오클라호마 과학관(Science Museum Oklahoma)은 서울에 있는 국립과학관 같은 규모와 느낌이었다. 전체적으로 과학을 가르친다기보다는 와서 과학적 현상을 체험하고 즐길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1층에 대부분의 체험 프로그램이었고, 2층에는 우주를 체험할 수 있는 전시 중심으로 짜여 있었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관람객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기다리지 않고 각종 체험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었다. 더구나 가급적 더 많은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어서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함께 즐길 수 있었다.

사실 오클라호마 과학관을 찾은 나만의 은밀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세그웨이(Segway)였다. 정보를 검색하다가 이곳에서 세그웨이를 탈 수 있다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다. 저주받은 걸작으로 평가받는 세그웨이는 처음 소개될 때부터 타고 싶어 했는데, 이곳에서 탈 수 있다니 반가운 마음에 달려온 것이다. 두발로 가는 새로운 탈 것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이것이 왜 저주받은 걸작이 되었는지 궁금했었다. 줄을 서서 기다리다보니 모두 어린 아이들이었다. 다소 머쓱해서 직원에게 어른도 탈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웃는다. 유진이와 효진이가 먼저 타고 나는 나중에 탔다. 안전 때문인지 아이들은 옆에서 직원이 따라다니며 운전을 도와줬다. 작은 실내였기 때문에 속도를 최대치까지 높인다거나 고속에서 방향전환을 한다거나 하지는 못했지만 무척 간단하고 기동성 좋은 탈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서서 운전을 해야 하고, 방향 전환이나 속도조절 등이 운전자의 감각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편안하지는 않았다. 왜 세그웨이를 미국에 와서도 자주 보지 못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각주:4]

사실 오클라호마 과학관은 우리 아이들보다는 조금 어린 아이들 취향이었다. 그래도 우려와는 달리 아이들은 신나서 여러 체험을 즐겼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Route66과 관련된 박물관은 물론 도시마다 다양한 아이템의 박물관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 이유가 미국인들이 기록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높고, 오래된 것들에 대한 보존 의식이 남다르기 때문인지, 역사가 짧은 자신들의 콤플렉스를 보상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문화가 서양인들의 보편적 의식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박물관이 많다보니 전시 방법이나 관람형태에 대한 상당한 노하우가 축적되어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유물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박물관의 콘셉트가 설정되면 다양한 방식으로 박물관을 구성해내고 있었다. 또한 운영에 있어서도 다양한 후원시스템과 자원봉사자들을 적극 활용하고, 관련 상품 개발 등에 적극적이었다. 사실 박물관이나 기념관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는 프랑스의 경우도 그 자체만으로 수익을 내는 곳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활성화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곳이 지역문화의 허브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낮에는 박물관이나 기념관으로 활용하고 밤에는 지역의 다양한 문화공연을 진행할 수 있도록 꾸미는 것이다. 문화 역시 경제적인 가치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지만, 경제적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다양한 보상을 가지고 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문제는 어떻게 둘 사이의 적적한 조화를 이룰 것이냐 인데, 이곳의 박물관들을 좀 더 연구해보면 하나의 답쯤은 찾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오클라호마 과학관이 문 닫을 시간이 되었는데, 아직 2층을 보지 못했다. 다행히 2층은 우주탐사 중심의 소박한 전시여서 금방 돌고 시간에 맞추어 나올 수 있었다. 밖은 여전히 한증막이었다. 숙소에서 가지고 나온 물도 떨어지고 모두들 지쳐 있었다. 브릭타운 쪽에 가서 맛있는 현지식을 사주겠다고 브릭타운으로 갔지만, 마치 재개발 직전의 아파트 단지처럼 그곳은 썰렁하기만 했다. 브릭타운을 몇 바퀴 돌았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음식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모두들 배가 고팠다. 그래서 어제 숙소에서 본 팸플릿의 중국음식점을 찾아가기로 했다. 어제 본 바로는 가격도 적당했고, 집 떠난 지 엿새째라 모두들 제대로 된 음식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영어로는 Lotus Mandarine, 한자로는 루외루(樓外樓)[각주:5]라는 중국음식점이었다. 어제 그 팸플릿을 방으로 가져오면서 이름이 특이해서 찾아보았더니, 루외루(樓外樓)는 청나라 때 지은 항주 서호주변의 대형 음식점이란다. 1,500개 좌석이라니 역사도 역사지만 규모가 대단한 음식점이다. 특히 서호초어(西湖醋魚)와 규화동계(叫花童鷄) 그리고 동파육(東坡肉)으로 유명하고, 지금은 식품회사와 생수공장까지 운영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오클라호마시티의 루외루(樓外樓)에 들어가 보니 실내는 제법 규모가 있는데, 초등학생 아들이 카운터를 보고, 안주인은 서빙을 하고, 바깥주인은 주방을 맡고 있었다. 아내에게 주인이 아마 항주사람인가보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물을 가지고 오던 안주인이 어디서 왔냐고 먼저 물었다. 한국인인데 얼바인에서 왔다고 했더니 무척 반가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동양인을 보기가 어려웠다. 미국 웬만한 곳에서도 동양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는데, 오클라호마시티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아내도 반가웠는지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주문을 했다.

실내에는 미국인 두 가족과 우리뿐이었다. 음식을 기다리는 사이 카운터를 보던 아이의 튜터가 왔고, 그곳의 구석 테이블에서 둘이 공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혼자서 서빙을 다하느라 인중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안주인을 보니 주방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음식을 만들고 있을 바깥주인도 금방 그려졌다. 안주인의 영어가 서툰 것으로 보아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인건비를 아끼려고 부부가 뛰면서도 아들의 공부를 위해 튜터를 붙이는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비록 항주 서호의 유명한 식당이름을 붙인 이유를 묻지는 못했지만, 짐작할 수는 있었다. 미국에서 그렇게 큰 식당을 운영하고 싶다는 포부, 그리고 그것이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직 어린 자식 세대를 위한 것임을 튜터와 공부하는 모습을 자주 쳐다보는 안주인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루외루의 음식들.

루외루는 음식도 훌륭했고 가격은 더 훌륭했다. 처음 시킨 것이 조금 부족해서 한 번 더 시키니 안주인이 웃는다. 모두 요리 일곱 개를 시켰는데도 가격은 38.49달러였다. 안주인이 웃으면서 얼바인은 모두 비싸지 않느냐고 물었다. 맞는 이야기다. 얼바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얼바인에서는 인도인,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들이 많아서 서로 묘한 긴장관계를 보이는데, 이곳처럼 동양인을 보기 어려운 곳에서는 반갑고 서로의 처지를 안쓰럽게 여기게 되나보다. 그런 이야기를 하니 아내도 공감했다. 문화가 비슷해서 서양인보다는 친밀감을 느끼는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낯선 나라에서 고생하는 상대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이들 이야기로는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모두 인도인, 중국인, 한국인이란다. 하교 후 근처 공공도서관에 가보면 인도인 어머니가 아이들 데리고 와서 숙제하고 공부하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유진이 이야기로는 수업시간에 어려운 문제가 나오면 모두 아시아 학생들을 쳐다본단다. 이곳 아이들이 보기에도 아시아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그만큼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성과의 뒤에는 그것을 위해 기꺼이 스스로의 삶을 희생하는 부모가 있음을 그들은 모른다. 자식을 위해 자신의 삶을 괄호 속에 묶는 부모의 모습은 어디서나 눈물겹다. 이 낯선 도시에서 처음 만난 중국인 안주인의 모습에서 낯설지 않은 우리 모두의 부모 모습을 보아서였을까, 문득 푸근했다. 계산을 하고 나오는데, 아내에게 꼭 다시 오라고 몇 번씩 이야기한다. 그래서인지 가족들도 정말 맛있게 먹은 모양이다.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을 싸오면서 내일 또 오면 안 되냐고 내게 묻는다. 그럴 수 있으면 그러자고 했다. 가격도 저렴하고 음식도 맛있지만, 무엇보다 아주머니의 정이 따듯했다. 모처럼 음식다운 음식을 먹은 탓에 모두들 힘이 나는지 즐거워했다.

숙소로 돌아와 방문을 열고는 깜짝 놀랐다. 방 청소를 해놓지 않은 것이다. 카운터(이곳은 로비가 없다)에 가서 이야기 하니 자기들은 원래 이틀에 한번 청소를 한단다. 아니 그러면 어떻게 하냐고 항의를 하니까 필요한 수건과 샴푸, , 청소봉투만 준다. 더 따지고 싶었지만 논리로 이겨낼 만큼 내 영어는 편안하질 않았고, 유진이는 누군가에게 따지는 것을 겁내하니 그대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저렴한 숙소를 잡았더니 결국 이런 일을 겪는다.

숙소 방에 들어와서야 모두들 과식한 줄 안다. 아이들도 침대 위에서 윗몸일으키기를 하고 잠들었다. 오늘은 행복한 과식이었다. 내일은 세인트루이스까지 8시간 이상의 운전을 해야 한다. 부디 오늘 같은 더위는 이곳에 두고 가고 싶다.

 

  1. 이러한 안타까움은 “자식 잘못되길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냐?”라든가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다.”같은 논리가 전제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어느 자식이 부모 속상하라고 일부러 그러겠어요.”라는 전제만큼이나 부모자식 소통에서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자기 정당화일 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러한 전제는 “내 뜻대로 너를 만들고 싶어”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본문으로]
  2. 해피밀은 디즈니의 토털 마케팅 전략의 일환이었다. 디즈니는 패스트푸드와 자신들의 개봉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연계하여 프로모션할 계획을 가지고 맥도널드에 제안을 했지만 거절을 당했다. 그러자 버거킹과 제휴를 하여 그해 디즈니와 버거킹은 둘 다 대박을 낸다. 버거킹의 약진에 위기감을 느낀 맥도널드가 이번에는 디즈니에 제안을 한다. 버거킹보다 훨씬 조직적인 유통망을 지닌 맥도널드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디즈니는 이후 맥도널드와 제휴한다. 그렇게 밀월관계를 유지하던 둘은 스티브잡스가 디즈니의 최대 주주가 되면서 깨져버린다. 아이들에게 꿈을 주는 기업이 정크푸드와 제휴하여 아이들에게 먹이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로 해피밀 프로모션을 중단시킨 것이다. 역시 스티브 잡스다. [본문으로]
  3. 판옵티콘은 18세기 제레미 밴담이 제안한 원형감옥을 의미한다. 그것은 원형공간의 중앙에 높고 어두운 감시탑을 세우고, 그 둘레에 낮고 밝은 죄수의 방을 만들어, 감시자의 시선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게 함으로써 죄수들은 늘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죄수들은 규율과 감시를 내면화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감시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이 말은 미셀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사용함으로써 보편화된 개념이다. [본문으로]
  4. 그러나 동부도시들에서는 자주 볼 수 있었다. 특히 시카고와 워싱턴에서는 세그웨이를 이용한 투어까지 진행되고 있었다. [본문으로]
  5. 루외루(樓外樓)라는 식당 이름은 남송시대에 시인 임승(林昇)의 “山外靑山樓外樓,西湖歌舞几時休, 暖風熏得游人醉,直把杭州作汴州”라는 시에서 가져 온 것이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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