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ny, Sunny, Sunny!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마츠모토 타이요(松本 大洋)의 작품에 작가주의 운운하는 것은 다소 번거롭다. 소위 작가주의라고 말하는 것들은 주류 상업만화의 관습이나 장르적 특성에 얽매이지 않고, 작가 고유의 세계를 특유의 방식으로 창출한다. 그림에서부터 서사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세계를 구현하고 있는 마츠모토 타이요의 작품을 향유해본 사람이라면 그 특유의 세계 안에서 작가주의라는 수사(修辭)는 오히려 뱀다리가 되기 때문이다.
- 마츠모토 타이요, 《써니》, 애니북스, 2013 중에서
그의 작품은 대부분 딱히 역동적인 구도가 아님에도 정적이라는 느낌보다는 나름의 속도감이 느껴진다. 칸 안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표정이 모두 각기 살아있고, 배경도 쉬지 않고 제 표정을 만들어냄으로써 칸 전체가 정지된 역동성을 갖는 까닭이다. 마츠모토 타이요의 화면연출과 캐릭터 구현 과정 그리고 다소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한(이것은 그의 작품의 매우 중요한 입점이 되겠지만) 시점과 내레이션의 유기적인 조화는 주목할 지점이다. 클로즈업한 정지영상을 캡처해놓은 듯한 화면연출을 통해서 캐릭터 개개의 성격을 모두 살려내고,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캐릭터임도 개별적인 감정선을 매력적으로 그려냄으로써 당위론적 결론이나 성장의 신화에 매몰되지 않는다. 특히 텍스트 전체를 보이지 않게 압도하는 시점은 내레이션과 함께 특유의 페이소스를 만들어내고 있다. 마츠모토 타이요의 작화는 작품별로 갱신된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작화의 완성도는 매번 자유로움으로 갱신되고 갱신의 차이만큼이나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여주고 있다. 《죽도 사무라이》에서 보여주는 작화는 일가를 이룬 작가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자유의 압도가 아니겠는가?
마츠모토 타이요는 이율배반의 미학을 구현한다. 이러한 이율배반의 미학이 가장 돋보이는 것은《써니》다. 《써니》는 이제는 멈춰버린 자동차 써니 안에서 보육원 밖을, 돌봄이 필요한 유년의 밖을,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느낌의 밖을 꿈꾸는 아이들의 간절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이야기를 시간적 거리와 감정적 거리를 유지한 자세로 그려내고 있다. 아이들은 그들 생에 가장 화창하고 빛나야할 그 시절(sunny)을 겨우 멈춰버린 자동차 써니 안에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견뎌낸다. 가족이 아닌 가족들, 아이가 아닌 아이들. 사실 이러한 구도의 이야기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지만 《써니》는 식상하지 않다. 성장담의 컨벤션을 사용하고 있지만 성장에 집착하지 않기에 특정 시기 특정 사건에 매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드러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내레이션의 페르소나가 견디는 ‘지금 이곳’의 시간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보육원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홀로 던져져서 오롯하게 살아내야 하는 시간에 주목해보면, 지금 이곳은 당신의 화양연화(sunny)인가, 당신의 삶은 그저 움직이지 못하는 써니에 머물고 있지 않나, 오롯하게 혼자서 삶을 잘 견디고 있나 등등 다양한 의문을 남기고 있다. 그래서 《써니》의 캐릭터들은 각각의 내력담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이 개개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모두의 이야기로 수렴되어 특유의 페이소스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페이소스는 향유자가 그들의 이야기 위에 자연스럽게 자신을 투사하게 만든다. 문제는 향유자의 투사는 이야기 속의 유년시절로 가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 개개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지나간 추억 속의 유년을 우리가 공유했기 때문에 눈이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모습에서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지금 우리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자꾸 마음이 가는 것이다.
삶이 아름다운 것은 지금 이곳에서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출판사에서는 가장 대중적이고 안정적인 서사인 ‘성장담’으로 규정하고 싶어 하지만, 그곳에 머물지 않아야 제대로 된 《써니》를 향유할 수 있다. 마츠모토 타이요의 《써니》는 그냥 그림만으로도 즐거울 수 있고, 각각의 캐릭터만으로도 대화할 수 있으며(이들 중 누구 하나가 빠져도 서사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그것이 어느 시대, 몇 살쯤의 이야기라고 규정하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지독한 자유가 데려다주는 Sunny, Sunny, Sunny한 지금 이곳, 우리 삶의 화양연화가 아니겠는가?
<만화규장각> 2016.07.05
'코믹스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상성의 소환과 즐거움의 호명-《도깨비감투》 (0) | 2018.07.12 |
---|---|
당신의 풍경과 시간, 그 거리에 관하여 - 마누엘레 피오르, 《초속 5000 킬로미터》 (0) | 2018.07.11 |
누구나 옳았고 그래서 상처 받았던 그해 여름 - 《그해 여름》 (0) | 2018.07.11 |
나이거나 내가 아니거나 혹은 둘 다 이거나 - 클로에 크뤼쇼데, 《여장남자와 살인자》, 미메시스 (0) | 2018.07.11 |
거침없는 도발과 차분한 숙고 사이 - 체스터 브라운, 《유료 서비스》, 미메시스 (0) | 2018.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