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는 도발과 차분한 숙고 사이
-체스터 브라운, 《유료 서비스》, 미메시스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체스터 브라운의 《유료 서비스》는 거침없는 도발과 차분한 숙고 사이에 있다. 매춘이라는 다소 자극적이고 불편한 소재를 사적인 경험담을 담담하게 기록하는 형식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도발적이다. 사실 이 작품이 도발적인 것은 소재나 진술의 형식보다는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있다. 선택과 동의만 바탕이 된다면 형태의 섹스든 용납될 수 있기에 매춘은 데이트의 일종일 뿐이고, 타인의 재산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 내 몸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하던 그것은 내 권리며, 성매매 남성은 여성을 소유하지 않으므로 사는 것이 아니며, 권력, 착취, 선택, 결혼 등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있기에 매춘은 정상화되어야 한다는 작가의 주장은 거침없는 도발이기 때문이다. 성에 대하여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이라도 좀처럼 쉽게 동의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작가 자신도 그러한 도발의 설득력에 의문을 품은 것인지 아니면 견고한 보편의 벽을 의식했는지 몰라도 235쪽의 만화 뒤에 다시 2쪽의 발문과 62쪽의 부록을 붙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도발은 문제제기로서 혹은 생산적인 토론을 유도하는 첫 단추로서 의의를 지닌다.
체스터 브라운, 《유료 서비스》, 미메시스 표지
작가는 작품 내내 이 소재의 자극성을 중화시키고 메시지에 집중시키기 위하여 약화체 그림으로 매우 차분하고 기계적으로 성행위를 묘사한다. 도발적인 메시지와 문제 제기가 자극적인 이미지에 그 중심을 빼앗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일지를 기록하듯 사실 중심의 서술과 토론 중심의 전개를 일관되게 유지한다.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기 위하여 작위적으로 매춘여성들의 캐릭터를 설정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났던 여성들을 그대로 캐릭터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의 구성은 매우 느슨하지만 자연스럽다. 덕분에 독자는 작가가 은밀하게 기획해놓은 담론의 장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묘사된 매춘의 장 앞에 놓임으로써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갖게 되는 것이다. 매춘 하는 여성들의 내력담을 신파조로 서술하여 과도한 감상성을 유발하거나, 매춘 현장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즐기면서도 사회 부조리나 구조적 모순 따위를 운운하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은밀한 비겁이 아니라 이 작품은 그대로의 매춘과 맨얼굴로 대면할 것을 권유한다. 그 안에서 섹스, 결혼, 매춘 등의 문제를 스스로 생각하고 토론하고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이 작품의 빼놓을 수 없는 미덕이다. 메시지의 공감도, 도덕적 정당성, 서사적 완결성, 치밀하고 압도적인 플롯, 철저하게 계산된 캐릭터, 시공간의 매혹적인 메타포 등등 만화의 완성도와 상관될 수 있는 일체의 요소를 내려놓고 체스터 브라운은 격렬하게 토론할 수 있는 도발적인 문제의 장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섣부른 문제 제기가 엄청난 파장을 불러오는 ‘지금 이곳’에서 굳이 비난의 가능성이 충분한 체스터 브라운의 《유료 서비스》를 텍스트로 삼은 것은 토론의 과정, 그 과정의 소란스러움, 소란스러움의 역동성, 역동성의 생명력을 믿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바탕으로 논리성과 개방성 그리고 생산성을 지향하는 역동적인 토론이 차단된 ‘지금 이곳’에서 익명성을 무기로 일방적인 편 가르기, 비난, 혐오, 분노의 비겁한 전개를 향한 도발로서도 이 작품은 충분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 까닭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작품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제기한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정당한 것이냐는 별개의 문제라는 점이다. 더구나 개인의 자유에 대한 보장, 인권에 대한 사회적 보장과 인식, 여성의 지위 등에 대한 매춘의 다양한 층위를 고려해야지만 그 사회 안에서 매춘의 정체와 위상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과 매춘을 둘러싼 사회구조적 모순과 폭력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은 이 작품의 한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라는 자유의 장이 지니고 있는 도발적인 문제제기와 그것의 가능성을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변화를 꿈꾸게 할 수 있는 성공적인 텍스트라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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