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답을 얻지 못한 의문
8월 13일 뉴욕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아침을 준비하면서 아내와 이야기를 하다가 바보처럼 뒤늦게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이 집이 우리가 예약한 집과 내부가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벌써 두 달 전 일이니 분명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해서 예약했던 사이트로 들어가서 주소와 사진을 확인해보았다. 예약한 집과 주소가 달랐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숙소에서 보내준 차를 타고 왔으니 당연히 예약한 집으로 오는 줄 알았는데, 그 점을 노렸던 것이다. 예약을 하면서 숙박료의 반을 선금으로 보냈고, 도착해서 나머지 반의 잔금을 치렀고, 벌써 이틀 밤을 잤으니 항의해야 무슨 소용일까 마는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주인에게 전화를 거니 받지 않아서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가 예약했던 집과 다르다고 항의를 했더니, 주소는 다르지만 스펙은 같단다. 화가 났다. 하지만 곁에서 아내와 아이가 보고 있으니 화를 냈다가는 그들이 불안해 할 것이 분명했다. 만약 사정이 있어서 예약과 다른 숙소를 배정했으면 미리 양해를 구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따졌더니 미안하단다. 선택의 여지가 없고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서의 항의란 얼마나 공허한가? 전화기 너머의 직원도 내가 뭐라고 화를 크게 내고 빨리 전화만 끊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내 잘못이었다.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민박이라서 무조건 믿었고, 인터넷의 이용후기를 지나치게 신뢰한 탓이었다. 빡빡한 일정으로 낯선 뉴욕을 찾는 한국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또 얼마나 실망하고, 불신과 자괴감을 갖게 될 것인가? 남의 나라에서 우리나라 사람에게 속은 것만큼 속상하는 일이 또 있을까? 화도 제대로 낼 수 없고, 화를 내야 달라지는 것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사기를 당한 것처럼 불쾌했지만, 그것 때문에 오늘 일정을 망칠 수는 없었다.
타임스퀘어로 걸어가서 그곳에서 업타운 루프(Uptown Loop) 1를 도는 버스를 탔다. 어제 돌았던 다운타운 루프의 반대쪽을 도는 코스였다. 다운타운 루프처럼 업타운 루프도 보아야 할 것들은 끝이 없었다. 격투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의 가일 같은 헤어스타일의 흑인 가이드는 잠시도 쉬지 않고 설명을 했는데, 마치 라임(rhyme)이 잘 맞는 랩을 듣는 느낌이었다.
센트럴 파크 주변으로 고급 아파트들이 줄지어 등장했다.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호화로운 장식의 외벽과 규모만으로도 압도되는 것들이었다. 레너드 번스타인, 존 레논이 살았다는 다코타 아파트(Dacota Apt)도 겉보기에는 그것들에 비해 오히려 소박한 편이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존 레논이 저격당했던 다코타 아파트 정문에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1980년 중학생 때였던 것 같은데, 마루에 놓여 있던 라디오 뉴스에서 존 레논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던 기억이 난다. 팝음악의 문외한이었던 나는 그가 누군지조차 몰랐었는데 그 사건을 통해 그가 대단한 뮤지션이었다는 것을 알았었다. 지금은 불교방송 기자를 하는 대학후배는 대학시절 비틀즈 팬클럽 회장을 맡았었는데, 거의 일 년 내내 비틀즈 티셔츠를 입고 다니며 비틀즈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를 야만인 취급하고는 했었다.
다코타 아파트에는 아직도 오노 요코가 살고 있다고 하니, 사랑하던 사람이 죽어 간 곳을 매일 지나쳐 다녀도 견딜 수 있을 만큼 그녀는 대단한 결기를 지닌 여인인가보다.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이라고 불리며 미국 음악 시장을 장악했던 비틀즈는 뮤지션을 넘어서 1960년대 새로운 청년문화의 상징으로 평가받는다. 비틀즈 해체 이후에 그가 발표했던 <John Lennon / Plastic Ono Band>는 지금까지도 명반으로 회자된다. 그러고 보면 오노 요코로부터 존 레논이 영감을 얻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예술가에게 배우자는 화수분 같은 영감이 되거나 잔혹한 현실의 규율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존 레논은 행운아였던 것이다. 존 레논의 명성이나 부에 비해 전위예술가였던 오노 요코가 보잘 것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음악적인 재능에 화수분 같은 영감의 원천과 사랑을 나누었으니 좋은 음악이 나오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뉴욕의 고급 아파트
존 레논이 저격당한 다코타 아파트 정문
그 음반의 곡들은 아니지만 ‘I Want To Hold Your Hand’, ‘Let it be me’, ‘Hey Jude’, ‘Norwegian wood’, ‘Imagine’과 같은 곡들은 지금 들어도 좋은 곡들이다. ‘Norwegian wood’는 노래보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로 먼저 읽으면서 가사를 보고 노래를 나중에 들었던 곳이다. 그것이 ‘노르웨이의 숲’이냐 ‘노르웨이산 가구’냐 의견이 분분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으로 듣고, 그것을 토대로 소설을 구상한 것이고 보면, 내게는 ‘노르웨이의 숲’이 옳을 듯싶다. 그래서인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우리말로 번역본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멋진 번역이라고 생각하는 문학사상사판에서는 아예 제목을 《상실의 시대》로 바꾸고 있다. 원곡을 만든 비틀즈나 그것을 소설로 바꾼 무라카미 하루키의 감성도 대단할뿐더러 그 사이의 간극을 본 번역자가 그것을 다시 다른 제목으로 번역해낸 것도 멋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코타 아파트를 지나면서 가이드의 설명이 재미있었는데, 다음이 우리가 내릴 미국 자연사 박물관(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이었다. 세계 최대 과학박물관이라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은 우리를 반기지 않는지 입구가 공사 중이었다. 이곳은 입장권을 구입하거나 자유롭게 기부(Donation)하고 입장할 수 있었는데, 우리는 어른 19달러, 아이 10.5달러를 내고 입장권을 구입했다. 3,500만점의 전시물이 있다는데 얼마를 기부해야 부끄럽지 않을까 고민하느니 그냥 입장권을 사는 것이 속이 편할 듯싶었기 때문이다.
미국에 와서 당혹스러웠던 것이 기부 문화였다. 아이들 학교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기부를 권장했는데, 이걸 어느 정도 규모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명목은 기부인데 반강제인 경우도 많았고, 기부가 안 되면 학생들 행사가 진행되지 않는 경우도 발생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 재정이 어려워 교육예산을 삭감했고, 그 덕분에 기부 권유가 더 늘었다고 한다. 처음 와서 효진이네 학교에서 학용품을 기부하라고 목록을 보내왔기에 아내와 고민 끝에 구입할 수 있는 것들을 구입해서 가지고 갔더니 ‘진짜 가져왔어!’하는 눈빛으로 행정 직원이 받았다. 유진이네 학교에서는 학생 행사 관련해서 기부를 받아서 버스를 운행할 계획이었는데, 기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서 혼선을 빚다가 결국 운행을 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기부의 정체를 파악하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반강제적인 모금인지, 아니면 말 그대로 자발적인 기부인지, 어느 정도 규모로 해야 하는 것인지, 어떠한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매번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지 모를 때, 오늘처럼 다른 방식이 있으면 그것을 택하는 것이 속 편했다.
미국 자연사 박물관에 입장하자마자 거대한 공룡 뼈를 만날 수 있었다. 이곳에 꼭 들러야 한다고 우긴 것은 유진이었는데, 한국에서 가족끼리 함께 보았던 <박물관이 살아있다>(Night At The Museum, 2006)의 배경이 이곳인지 아닌지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였다. 로비에 있는 공룡 뼈를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박물관을 다 보고나서도 정확한 답을 얻지 못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워싱턴에 있는 자연사박물관과 이곳에서 나누어 찍었단다.
1층에서 밀스타인 기념 해양 생물관과 보석 전시장이 이채로웠다. 이름으로만 듣던 것들이 제 모습 그대로, 제 크기 그대로 눈앞에 등장했을 때 느끼는 비현실적인 느낌이 해양 생물관에서 들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결국 대부분 언어적 인식이거나 영상화된 이미지 이상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들의 비릿한 냄새는 아니더라도 그것들의 크기와 구체적인 생김새만으로도 낯설어지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리라. 사실 이런 전시물 앞에서 더 놀라면서 흥미를 갖는 것은 아이들보다 어른들이다. 어른들은 자신의 머릿속에 이미 그것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물을 보게 되면 그것이 산산이 깨지면서 더 놀라고 놀란 만큼 즐거워진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내와 나는 그랬다.
보석 전시실에는 예상대로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저 보석의 이름과 모양을 일치시켜보는 수준이었지만, 아내와 아이들의 관심은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었다. 아내는 보석 같은 것에는 욕심이 없는 줄 알았었는데, 무척 재미있어 하는 것을 보니 새로웠다. 결혼하고 공부하면서 보석 같은 것에 관심을 둘 정도로 여유가 있었던 적이 없으니 관심을 드러내지 않은 것뿐이란다. ‘인도의 별’처럼 보석을 가공해서 새롭게 붙여놓은 이름들이 보석만큼이나 빛나고 있었다. 그 이름의 유래나 내력만 가지고도 충분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들어서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주려고 찾으니 벌써 아내와 다른 보석 앞에 가 있었다.
2층과 3층에 있는 애캘리 기념 아프리카 포유류관에는 아주 정밀하게 제작된 동물 박제들이 있었다. 조명과 배경 덕도 있었겠지만 박제 자체가 아주 사실적이었다. 탐험가, 동물학자, 사냥꾼이었던 칼 애캘리(Carl Akeley)는 박제술을 발명한 사람으로 이것들은 그를 기념하기 위한 작품들이다. 그는 단순히 박제를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배경 등을 설치하여 하나의 디오라마(diorama)를 구성하는데 뛰어났다고 한다. 이 박물관에 아프리카 포유류를 전시하자고 제안한 사람이 칼 애캘리였고, 그가 직접 아프리카에 가서 동물들을 잡아 박제를 만들었다고 하니 이 홀에 그의 이름이 붙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 과정에서 자신이 쏜 총에 맞아 죽은 고릴라의 표정을 보고 사냥을 그만두고 동물 보호론자가 되었다고 하니 아주 극적이다.
멕시코 중남미관에서 뽀로로를 닮은 조형물
멕시코와 중남미관에서 발견한 조형물들은 섬세한 표현과 다양한 표정이 무척 흥미로웠다. 조형물 하나가 뽀로로를 닮았다고 보여주니 아이들이 웃었다. 그 시대, 그 지역의 사람들도 이런 디자인과 표정을 좋아했었다니, 뽀로로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다. 곳곳에 소박하지만 정교하고 진솔한 표정의 목각들이 많았는데, 민속예술의 성격 때문인가 보다. 이번 여행에서 다양한 것을 너무 짧은 시간 안에 보아서 그런지 아이들은 별다른 감흥 없이 둘러보다가 이곳에서 재미있는 표정을 찾느라고 분주했다. 어쨌든 그들만의 소통이니 두고 지켜볼 뿐이었다.
<라스트 모히칸>을 연상시켰던 토마호크
3층에는 북아메리카 인디언관이 있었는데 이미 여러 곳에서 인디언 관련 전시를 보아온 터라 큰 감흥은 없었다. 다만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들의 무기 중에서 토마호크(tomahawk)였다. 토마호크는 단지 돌이나 금속 도끼만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던지거나 때릴 수 있는 무기를 통칭해서 부르는 말이란다. 돌이나 뼈뿐만 아니라 금속을 날카롭게 벼려 나무에 붙여서 사용했던 것들이다. 가장 멋진 토마호크 씬은 <라스트 모히칸>(The Last Of The Mohicans, 1992)의 끝부분에서 자식을 잃은 아비가 적을 향해 무참하게 그러나 아주 정교하게 휘두르던 장면이다. 그것은 마치 장예모의 영화 <영웅>(Hero, 2002) 에서 의식적으로 구현했던 칼과 활의 아름다운 움직임과 같이 민첩하고 단호했었다. 앞뒤로 모두 살상이 가능하고, 원심력을 이용하는 토마호크의 특성을 잘 살려서 분노를 표현했지만,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타격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로비에 공룡 뼈
사람들이 가장 많았던 곳은 4층 전시실이었는데 그곳에 공룡과 멸종된 포유류 뼈가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몸집이었음이 분명한 사라져 버린 것들의 견고한 뼈가 정교하게 맞추어져 있었다. 아직 그 뼈에는 살을 갖고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거칠게 포효했을 때의 기력이 남아 있는 듯 역동적인 정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그려놓은 그림들만 오히려 그 단호한 정지 앞에서 지극히 초라한 비교가 되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의 손을 피하기 위해 유리관에 갇혀 있거나 작은 철선으로 골격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녀석들조차 살아서 가장 강했던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가장 자기다운 모습으로 죽어서 살아있는 이것들의 현재는 슬픈 매혹이었다. 주어진 시간에서 조금도 비껴 설 수 없는 살아서 유한한 것들의 운명과 그 안에서 스스로의 격을 유지하려는 몸짓이 잔혹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말이 들려 돌아보니 한국인 모자가 아쉬워하고 있었다. 이제 더 볼 공룡이 없다고.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아들 때문인지 엄마도 그 낯설고 긴 공룡의 이름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엄마가 저 정도라면 아들은 학위 없는 박사일 게다. 아들도 대단하고 엄마도 대단했다. 도통 공룡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나나 우리 아이들과는 다른 차원의 사람들 같았다. 아들이 좋아한다고 같이 관심을 갖고, 분명 외워지지 않았을 그 이름을 외웠을 엄마의 마음이 아름다웠다.
박물관은 토요일이라서 매우 혼잡했다. 더구나 워낙 박물관이 넓다보니 관람 동선 안내가 필요했는데, 이게 친절하게 되어 있지를 않았고, 직원들도 다소 고압적이고 불친절해서 아쉬웠다. 관람객이 이러한 불편을 느끼게 된다면 아무리 훌륭한 전시물이 있어도 최고라는 말은 듣기 어려우리라.
길거리에서 구입한 Lamb of rice.
박물관을 나와서 버스를 타러 가는데 맛있는 냄새가 났다. 배가 고프다기보다는 그 냄새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작은 트럭에서 캐밥(kebop)을 팔고 있었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한참을 기다리다 8달러를 주고 양 고기밥(Lamb of rice)을 샀다. 어제 현대미술관 앞에서 이것을 먹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맛있어 보였다. 그래서 맛만 볼 요량으로 하나만 시켜서 나누어 먹었다. 밥과 양고기 그리고 야채의 조화에 무척 절묘했다. 주문하는 과정에서 주인에게 한 소리 들었다. 내 순서인 줄 알고 주문을 했더니 “네가 올라와서 10명의 사람을 한 번 상대해볼래?”라고 이야기한다. 내 순서인 줄 알았다고 이야기하려는데, 주인은 주문받느라 정신이 없다. 아이 앞에서 조금 창피했다. 그래도 그거 하나 먹어보겠다고 꿋꿋하게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데, 주인도 미안했는지 음식은 제일 빨리 준다. 나는 속도 없이 그게 맛있었다. 유진이는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주며 재미있어 한다. 그래 너희가 재미있으면 됐다.
버스를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등장한 세인트 존 더 디바인 대성당(Cathedral of St. John the Divine)은 압도적이었다. 1892년에 짓기 시작해서 아직까지 공사가 진행 중인 세계 최대 규모가 될 거라는 이 성당은 2050년에 완공이 된단다. 가이드의 이야기로는 고딕양식의 이 건물은 풋볼 경기장 2개 크기에 17층 높이로 8,000명이 동시에 미사를 볼 수 있는 규모라니 크긴 큰 모양이다. 특히 장미창(Rose Window)은 1만개 이상의 유리로 만들었다고 하니 그 공력이 대단하다. 100년 전부터 짓기 시작했으니 완공도 되기 전에 이미 건물에는 건너온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건축이 중단되기도 했고, 2001년에는 화재가 일어나기도 했단다. 건물 전체가 하나의 조각품처럼 느껴졌다. 섬세하게 세공된 조각들이 건물 곳곳에서 빛났지만 무엇보다 압도적인 것은 100년을 넘기는 대역사를 꿋꿋하게 진행하고 있는 사람들의 의지였다. 자기 자신이 시작과 끝을 모두 보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위대한 예술 작품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것으로 자족하는 겸허함과 뒤에 오는 사람들에 대한 무한 신뢰가 있어야지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세인트 존 더 디바인 대성당의 다양한 모습. 100년 전에 지어진 것부터 현재 짓고 있는 것까지 시간이 공존한다.
100년이 넘게 짓고 있고, 화재까지 나다보니 대성당은 각 부분이 자기 몫의 시간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간만 봐서는 하나의 건물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차이가 드러났지만, 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 정도 시간의 차이는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앞으로 그 차이를 지울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을 견디고 지탱하겠다는 의미처럼 느껴졌다.
미국 3대 미술관 중 하나로 330만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나 독특한 건물 디자인으로 유명한 구겐하임 미술관, 뮤지션이라면 누구나 서보고 싶어 한다는 카네기 홀 그리고 뉴욕의 상징적인 공간인 센트럴 파크도 그냥 버스로 돌아보아야했다. 한정된 시간 안에 보고 싶은 것을 제대로 보자는 생각에 아이들의 의견을 많이 반영해서 볼 것을 결정하다보니 나와 아내가 보고 싶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나 센트럴파크 산책 등이 빠지게 된 것이다. 아쉬움이 컸지만 제대로 보려면 지금 일정의 두 배 이상이 시간이 필요하고, 더 온전히 체험하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생활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일 것이기에 이미 예정된 한계였다. 어느새 버스는 다시 타임스퀘어 쪽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2010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의뢰를 받아서 <해리포터 시리즈>의 스토리텔링 전략을 규명하는 보고서 2를 제출한 적이 있다. 소설과 영화를 분석해서 <해리포터 시리즈> 스토리텔링의 전략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덕분에 나도 다시 꼼꼼하게 분석할 기회를 갖게 되었었다. 우리 아이들도 모두 <해리포터 시리즈>의 광팬이었다. 효진이는 책을 반복해서 읽으며 열광했고, 유진이는 책도 책이지만 영화를 더 탐닉했다. 그러다보니 ‘해리포터 전시회’가 무척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뉴욕에 도착한 첫날 <오페라의 유령>을 보러 가는 길에 ‘해리포터 전시회(Harry Poter Exhibition)’가 열리는 곳을 보아둔 모양이었다. 아내에게 꼭 보고 싶다고 했는지 아내는 나이트 루프 전에 그것을 보자고 한다. 전시 공간이나 성격으로 보아서 별 것 없을 것 같다고 나는 몇 번을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40분 이상 줄을 서서 기다려서 들어간 전시회장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관람료(어른 27달러, 아이 20.5달러)에 비해 전시 내용이나 전개가 턱없이 부실했고, 무엇보다 즐길 것이 없었다. 영화에 등장했던 의상과 소품을 전시해 둔 수준이었고, CG로 처리해서 실재하지 않는 소품들까지 만들어놓은 것은 좋았지만, 그 수준이 조악했다. 그나마 전시실도 몇 개 되지 않아서 기다린 시간보다 관람시간이 턱 없이 모자랐고, 그 시간이나마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많아서 앞으로 움직이지를 못해서였다. 아이들도 적지 않게 실망한 모양이었다. 브랜드 가디언(brand guardian)으로서 엄격한 조앤 K. 롤링(Joan K. Rowling)이나 워너브라더스가 어떻게 이렇게 부실한 전시회를 허가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전시회는 9월까지 뉴욕에서 전시를 한단다. 빈약한 콘텐츠로 인해서 아이들은 실망하겠지만 업자들은 아마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들었다. 전시회장 안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볼 것도 없는 것이 사진도 못 찍게 한다고 투덜댔지만, 경험재(experience good)인 이와 같은 전시회는 못 찍게 하는 것이 옳다. 직접 봄으로써 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고, 그 구분에 대가를 지불하는 전시회이기 때문이다.
전시회장의 끝은 예상대로 관련 상품 매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단순하게 해리포터라는 브랜드만 활용하는 팬시상품에서부터,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기숙사별 넥타이, 망토, 목도리와 모자 같은 실용적인 물품은 물론, 다이애건 앨리에서 팔렸던 귀지 맛 캔디, 마법지팡이, 님부스2000같은 빗자루 등과 같은 물품들까지 해리포터로 팔 수 있는 것들은 다 모여 있었다. 전시회보다 오히려 이곳이 더 볼 게 많았다. 스토리노믹스라 불러도 좋을 만큼의 열풍을 일으켰던 <해리포터 시리즈>는 끝났지만 그것의 브랜드는 살아서 당분간 더 충성도 높은 팬덤을 형성할 것이 분명하다. 매장을 나오면서 아이들은 엽서를, 나는 ‘Hogwarts Express 9¾’이라고 새겨진 자석을 구입했다. 내년 봄부터 내 연구실 앞에는 아마 이 자석이 붙어있게 될 것이다.
나이트 루프를 타기 전에 저녁을 먹어야 했다. 캘리포니아에 인앤아웃(In-N-Out) 햄버거가 있다면 뉴욕에는 셰이크 섀크 버거 3(Shake Shack Burger)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마침 근처였다. 이틀 동안 타임스퀘어를 오가면서 꼭 먹어보리라 벼르다가 드디어 먹었다. 20분쯤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주문을 하고 진동벨을 받았다. 20분밖에 기다리지 않았으니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우리도 이제 기다리는 것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가는지 그렇게 지루하지 않았다. 그 넓은 매장에 빈자리가 하나도 없을뿐더러 매우 소란스러워서 정신이 없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자리를 잡으라고 하고, 나는 주문한 버거가 나오길 기다렸다. 셰이크 섀크 버거는 4.5달러로 버거의 양과 질에 비해서는 비교적 저렴한 편이었다. 다시 20분쯤 기다려서 주문한 버거를 받았다. 햄버거의 크기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아삭거리면서도 씹으면 촉촉했던 패티, 그리고 촉촉한 빵과 아삭한 프렌치프라이와 치즈의 맛이 탁월했다. 조금만 덜 소란스럽고 혼잡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 가격에 이렇게 맛이 있으니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고 사람이 몰리는 만큼 소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고보면, 감수해야할 부분이었다.
셰이크 섀크 버거
음식점 등급 표시
뉴욕에서는 음식점 앞에 ABC등급이 매겨져서 잘 보이는 곳에 걸려 있다. 음식점의 등급표시라는데, 물론 A가 가장 좋고, B, C로 이어진다. 대부분의 식당이 A를 걸고 있었다. 만약 C가 걸려 있으면 식당 문 앞에서 얼른 도망가야 할 수준이란다. 음식의 맛과 서비스의 형태라는 게 일괄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웠을 것인데 이렇게 등급을 매겨 놓은 것을 보면, 아마도 그 이전에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나보다. 어쨌든 처음 오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친절한 구분이지만, 평가받는 식당 입장에서는 참 모진 구분이 아닐 수 없다. 음식 맛, 청결도, 요리사 등급, 가격, 서비스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결과라는데, 한국의 유명 음식점들은 어떤 등급을 받게 될까 궁금했다. 허름한데 음식 맛은 최고인 집들은 이 평가 기준으로 하면 A를 받을 수 있을까? 욕쟁이 할머니 국밥집 같은 데는 욕도 서비스로 평가해야 할 텐데, 다른 곳과의 형평성 문제가 발생할 것 같고…….
이것은 미국식 객관화다. 객관화하기 어려운 것을 객관화하기 위해 엄정하고 납득 가능한 기준을 마련하고 그것에 따라 평가하고 공시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많은 부조리한 것들이 이와 같은 예측 가능한 평가 시스템을 마련하지 못한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대학입시나 입사시험과 같은 것들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각 대학이나 기업별로 자신들이 원하는 인재상에 객관적이고 납득 가능한 평가 시스템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순인 줄 알면서 한계가 분명한 수능으로 평가하거나 외부 평가 기관의 평가나 스펙에 의존하는 것은 아닐까? 대학별로 자신들이 지향하는 인재상에 맞추어 학생을 선발하고 교육해야만 차별화된 교육이 가능할 텐데, 이것을 국가가 틀어쥐고 있으니 기형적인 입시 속에서 너나없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지 않은가? 기업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인재를 뽑아서 쓰는데, 자신들만의 평가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고 획일적인 영어성적과 스펙만을 강요하는 것도 사회적 묵인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객관화된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그렇게 자율적인 평가 시스템에 맡기었을 때, 모두가 수긍 가능한 공정한 평가를 수행하지 못한 탓도 크다. 그러다보니 기계적이고 일방적인 평가에 기대야 하고, 그로 인하여 교육과 평가가 어긋나고, 배움과 능력이 괴리되는 생산적이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주문한 것을 기다리면서 보니 이곳에서도 예외 없이 폐기처분되는 음식들을 볼 수 있었다. 주문한 버거가 나오고 손님을 호출했는데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고 음식이 식자 여지없이 버렸다. 이러한 사례는 차고 넘친다. 주스 전문점이나 커피 전문점에서 주문이 잘못되어 딴 음료가 나오면 예외 없이 폐기 처분한다. 어디 그뿐이랴. 대형할인매장에서 식료품을 샀다가 반품을 하게 되면 개봉 여부와 상관없이 폐기한단다. 식품에 대한 엄정한 관리라는 점에서는 환영할만하지만 개봉하지 않은 것까지 폐기하는 것은 불필요한 낭비가 아닐까? 미국에 처음 와서 코스트코에서 구입한 소시지가 너무 짜서 먹을 수 없는 형편이라 반품을 했다. 담당자가 반품한 모든 음식들은 폐기하니 앞으로는 신중하게 선택하라고 일러주었다. 처음에는 몹시 불쾌했는데, 몇 개월 이곳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보니 그가 의식 있고 양심적인 직원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미국의 모습을 보면, 풍요가 늘 축복은 아닌가보다.
우비를 입고 탄 나이트 루프
저녁을 먹고 나이트 루프(Night loop)를 타러 정류소까지 갔더니 이것은 한번 타면 도착할 때까지 정차하지 않는단다. 1시간 이상이 걸릴 것이니 화장실을 들렀다가 타야 할 것 같아서 화장실을 찾는데, 없다. 대부분 업소의 안에 있어서 업소에 들어가야 이용할 수 있었다. 미국처럼 화장실 인심이 고약한 곳이 또 있을까마는 그중에서도 뉴욕처럼 야박한 곳도 없었다. 결국 길 건너에 있는 맥도날드로 갔더니 벌써 십여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서 내 앞에 앞에 차례가 되었는데 한 남자가 아이를 데려와 먼저 이용하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앞에 사람은 나에게 양해를 구한다. 그렇게 하라고 했더니 아이는 들어가서 10초도 되지 않고 나온다. 화장실을 보고 부지런히 정류장으로 갔더니 아내와 아이들이 한참을 기다린 모양이다. 이 지독한 도시에는 화장실도 없고, 있어도 잘 빌려주지 않는다. 아무리 화려하고 압도적인 건물을 세우면 뭐한단 말인가, 인간의 가장 기본 욕구를 편안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배려가 없는 도시라면, 그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 도시가 아니겠는가?
나이트루프는 말 그대로 야경 투어였다. 맨해튼 다리를 건너서 브룩클린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코스였다. 기회가 닿으면 브룩클린에 있는 그리말디 피자를 먹어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줄이 너무 길었고, 투어 중에 내릴 수도 없었다. 버스에 오를 때부터 비가 조금씩 내렸다. 2층 버스에 지붕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했는데 버스 회사에서 모두에게 하얀색 우비를 나누어 준다. 우비를 입고 2층 버스에 앉아서 맨해튼과 브룩클린의 야경을 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다리를 건너며 보는 브룩클린과 맨해튼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맨해튼은 불빛으로 도시의 윤곽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지만, 불빛 바깥쪽의 어둠은 낮보다 더 짙게 내려 앉아 있었다.
대학시절에 본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Last Exit To Brooklyn, 1989)가 생각나서 꼭 보고 싶던 곳이었는데 너무 어두웠다. 창녀 트랄라가 한국전에 참전하는 군인과 며칠을 함께 보내고 떠나보내며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깨닫는 장면은 장 자크 아노의 영화 <연인>(L'Amant, 1992) 의 마지막 장면처럼 회환과 자기부정의 정서가 표현된 빼어난 장면 중에 하나다. 브룩클린은 그동안 내게 트랄라의 절망과 그 앞에서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고 지켜볼 뿐인 소년 스쿠프 그리고 자신이 성정체성을 깨닫고 방황하는 핸리의 모습이 마구 엉킨 이미지였었는데, 이제 조금 구체적인 도시의 윤곽을 갖게 되었다. 다리를 건너 맨해튼으로 돌아오며 유쾌해졌다. 내린 비로 밤공기는 맑고 시원해져 있었다. 이제 조금 익숙한 눈으로 복습하듯 거리와 건물들을 확인했고, 그 사이로 오고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타임스퀘어에서 밤늦게 만난 중국민주화 시위대
타임스퀘어의 청년
미국스러운 대형 리무진
버스는 천천히 다시 돌아왔다. 그레이라인 버스 투어를 즐기다보니 시작과 끝이 매일 같은 곳이다. 타임스퀘어에는 밤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다. 광고판들은 밤이 깊을수록 더 화려하고 강렬해지는 느낌이었다. 타임스퀘어에서는 오십 여명의 중국인 학생들이 중국 민주화와 민주투사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중국이 아닌 미국에서 중국의 민주화를 외치는 것이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고국에서 할 수 없으니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곳에서 외치는 것이리라.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음직한(아직 계속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동양인들 몇몇이 쳐다볼 뿐, 사람들은 대부분 무관심했다. 근처에서는 한 청년이 “Jesus forgives sin”이라는 푯말을 들고 서 있었다. 그 둘 사이에는 아주 길고 호화로운 리무진 두 개가 정차해서 묘한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타임스퀘어의 다양성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모두들 내일이 뉴욕에서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지, 빗소리 때문인지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뉴욕을 부지런히 돌았다. 처음에 올 때 그 정체모를 도시를 조금 아주 조금 보았다. 다른 도시에 비해서 머무는 기간에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가지 않는 도시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나는 아직 뉴욕이 싫다. 숙소는 별도의 문제였다. 그건 속인 사람과 속은 우리의 문제였으니까. 무엇보다 뉴욕이 보여주는 지독한 부조화가 거북했다.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도시 공간에서 세계 제일의 강박에 사로잡힌 화려함은 천박하거나 안쓰러운 과시였다.
나는 왜 뉴욕을 세계 최고의 도시라고 말하는지 아직 의문을 풀지 못했다. 나는 아직 모르겠다.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곳이 최고의 도시라면, 뉴욕은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최고의 문화라는 것에서 사람은 최우선 순위가 아니었다. 사람이 소거된 문화는 더 이상 문화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뉴욕을 왜 세계 최고의 도시라고 말하는가? 이것은 두고두고 고민해볼 문제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것을 세계 최고라고 부르는 데에는 분명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 일찍, 우리는 다시 차를 렌트해서 필라델피아로 떠날 것이다. 내일 떠나야 하는데 창밖으로 빗줄기가 거세다. 아마 운전이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지만 동부로 넘어와서는 유난히 비가 많다. 어쨌든 그것도 여행의 일부일 테니 수납해야 하리라. 예측 불가능하고, 예측 불가능한 만큼 긴장되고, 긴장된 만큼 짜릿한 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라고 위로하면서.
- 업타운 루프는 AOL타임워너 센터→링컨센터→다코타 아파트→미국 자연사 박물관→어퍼 웨스트 사이드→유스호스텔→세인트 존 더 디바인 대성당→리버사이드 교회→아폴로 극장→스미소니언 국립 디자인 박물관→구겐하임 미술관→메트로폴리탄 미술관→휘트니 미술관→센트럴파크 등을 도는 코스였다. [본문으로]
- 박기수, KOCCA포커스 2010-3 <해리포터, 스토리텔링 성공 전략 분석>, 한국콘텐츠진흥원. [본문으로]
- 인앤아웃(In-N-Out)의 햄버거는 패스트푸드이기는 하지만 냉동재료를 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매일 아침 신선한 재료를 냉장트럭으로 배송해야하기 때문에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판매되다가 인접한 네바다 주, 애리조나 주, 텍사스 주까지만 지점을 냈단다. 재료의 신선함을 냉장으로 지킬 수 있는 거리까지만 지점을 낸다는 그들의 마인드 때문인지 미국 내 고객만족도 1위 햄버거란다. 매장 내에서 통감자를 기계에 넣고 한 번에 잘라내어서 프렌치프라이를 만드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재미있는 장면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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