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필라델피아
8월 14일 뉴욕→필라델피아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빗소리에 잠을 깨면서 ‘나쁜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냐’던 이승환의 노래가 생각났다. 밤새도록 세찬 비가 내리고, 새벽녘에 설핏 잠이 깨었을 때도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렌터카 회사까지 걸어가겠다는 계획은 말 그대로 수포로 돌아갔다. 아침이 되자 비는 더욱 거세졌다.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일단 짐을 최소한으로 줄여야했다. 여행 올 때 가져온 3분 카레 20개가량과 햇반 7개, 뉴욕에서 장을 본 쌀, 김치, 계란 등을 숙소 냉장고에 남겨 놓고 메모를 써 두었다. 남은 일정 동안 이것을 모두 먹을 수 없고, 남은 것을 비행기에 실어 다시 얼바인으로 가져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비가 이렇게 온다면 그것을 바리바리 싸서 가져가기는 더욱 어려웠다. 일단 짐을 줄일 수 있을 만큼 줄이기로 하고, 이것들을 냉장고에 두고 가기로 했다. 우리보다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유용한 물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곡진하게 메모를 써서 냉장고 앞에 붙여두고 왔다.
숙소는 마지막 정마저 떼려는 듯, 아침에 온수마저 나오지 않았다. 일단 찬물로 씻을 수 있을 만큼 씻으라고 아이들에게 이르고, 숙소를 정리했다. 우리가 머문 자리 때문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욕을 먹고 싶지 않았고, 그것이 남의 집을 사용한 최소한의 예의기도 했다. 짐을 일단 다 싼 후에 손에 드는 짐들은 비닐로 잘 덮었다. 그러는 사이, 비는 더욱 거세졌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가서 택시를 잡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곳 택시들이 대부분 예약으로 다니기 때문에 나가서 바로 잡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짐을 끌어내고 있는데 마침 지나가는 택시가 있어서 쉽게 잡을 수 있었다. 택시에 짐을 싣고 렌터카 회사까지 가는데 곳곳에서 교통통제를 하고 있었다. 1.2마일(약 2㎞) 되는 거리를 빙빙 돌아서 간신히 도착하고 보니 요금이 12달러가 나왔다. 20달러 지폐를 주니 기사가 잔돈이 없단다. 있는 것만 달라니 6달러를 준다. 그래 그거면 됐다. 비가 이렇게 장하게 내리는데 이 택시가 아니었으면 곤란하지 않았던가?
렌터카 회사 AVIS는 대형 건물 주차장 같은 분위기였다. 예약을 확인하고 차를 배정 받는데, 운전면허를 달란다. 2월에 면허를 획득하고 아직까지도 배달이 되지 않아서 임시 운전면허증(temporary license)을 제시했더니 이건 안 된단다. 얼바인에서는 그것을 제시하고 차를 빌렸다고 하니, 그래도 안 된단다. 사진이 붙어 있는 면허가 있어야 한단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한국 면허를 보여주니 그건 된다고 한다. 한글을 읽을 줄 모르는 그들이 과연 한국 면허증을 무슨 수로 신용하는지,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이 상황에서는 됐으니 된 것이다. 서류를 꾸미고 카드결제를 하려고 데빗 카드(debit card)를 냈더니 데빗 카드는 안 된단다. 잔고가 넉넉한데 왜 안 되냐니까 안 된단다. 신용카드가 없냐고 해서 한국 신용카드를 줬더니 결제가 됐다. 미소를 보이면서 안 된다는 데 화를 낼 수도 없고, 답답했지만 금방 다른 대체 수단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말 웃기는 상황이었지만 웃을 수 없었다. 미국에서 창구 담당자가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라는 소리를 여러 차례 들은 탓에 저항하기 보다는 투항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러면서 다른 대체 방법을 이야기 해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차는 신형 소나타였다. 차를 배정받아서 짐을 싣고 달리는데 꼭 내차 같다. 처음 타보는 차인데 내 차처럼 편한 것은 소나타의 경쟁력인가 아니면 소나타의 한계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렇게 익숙하고 편안하다는 것은 경쟁력이겠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에게 최적화된 것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다소 불편할 수도 있을 테니 한계가 아닐까? 농담처럼 그런 이야기를 하며 뉴욕을 빠져 나왔다. 렌터카를 뉴욕에서 반납하면서 재웠던 사만다를 며칠 만에 깨웠더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초반부터 에러였다. 가뜩이나 난감한 뉴욕에서 사만다가 에러면 헤맬 수밖에 없었다. 사만다는 몇 번의 경로 수정을 하더니 결국 뉴욕을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뉴욕을 빠져나오니 날아갈듯 시원한데 폭우는 여전히 지독했다.
필라델피아 시내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에는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바로 이동하려 했다. 4시간 30분 정도면 도착하는 거리니까, 조금 부지런히 움직이면 뉴욕이나 워싱턴에서의 하루를 더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각 도시에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고, 미국 역사를 정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필라델피아가 포함되게 되었다. 필라델피아는 ‘우애 있는 도시’라는 의미란다. 독립전쟁 당시 최대 거점이었고, 19세기에는 미국 내 최대의 도시였다는 필라델피아는 미국 역사를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찾아야 할 도시였다.
사실 필라델피아로 달리면서 내심 우리 모두는 유명하다는 필라델피아 샌드위치를 맛볼 수 있으리라는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유진이 학교 앞에 필라델피아 식으로 샌드위치와 프렌치프라이를 파는 ‘필리스’(phillies)라는 가게가 있는데, 여기에서 맛본 바로는 필라델피아 샌드위치는 기대하기에 충분한 음식이었다. 특히 나는 ‘필리스 베스트’라는 메뉴가 마음에 들었다. 프렌치프라이와 얇게 저민 소고기를 함께 철판 위에서 구운 후에 그 위에 필라델피아 치즈를 뿌려주는 이 음식은 1인분이면 2명이 충분히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양도 많고, 짜지 않으면서도 치즈 고유의 풍미를 즐길 수 있어서 좋아했다. 우리는 모두 캘리포니아에서도 맛이 이 정도인데 필라델피아 현지에서는 얼마나 맛있을 것인가 라는 소박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뉴욕을 출발해서 필라델피아까지 142마일(227㎞)을 달렸다. 거센 비는 천천히 달리라고 집요하게 설득하고 있었다. 누군가 곡진하고 집요하게 이야기할 때는 듣는 것이 현명하다. 더구나 안전과 상관되는 일은 고집 피울 일이 아니었다. 달리는 내내 사만다의 음성이 다급했는데 지금껏 달렸던 길들과는 달리 시내 주행이 많았기 때문이다. 힘들게 고속도로에 올라선 후에도 자주 길을 바꾸어야 했다. 달린 주요 고속도로들은 I-78, I-95 S, I-276 W였다. 도로명 뒤에 S와 W가 붙는 것을 보니 우리는 남쪽과 서쪽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만다에 의지해서 달리다보면 내가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 방향감과 거리감을 잃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낯설고 비까지 내리는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니 바깥세계와는 단절된 차 안의 작은 세계 안에만 머무는 느낌이었다. 아이들은 내리는 비 때문인지 모두 잠이 들어 있었다. 아내는 내가 졸까봐 뒷좌석에서 룸미러에 비치는 내 눈을 보고 있었다. 힘겹게 빗물을 밀어내는 와이퍼가 지나간 부분을 제외하고는 밖이 잘 보이질 않았다. 아이들은 잠들어 있고 음악도 틀지 않고 있으니 마치 고요한 방 안에 혼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은 아주 비현실적이고 고립된 것이어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희미하게 만들었다.
얼마 달리지도 않았는데 점심때였다. 배고픔은 얼마나 규칙적이고 무조건적인가? 다행히 휴게소에는 먹을 만한 새로운 음식들이 많았다. 우리가 선택한 것은 이탈리아 음식이었는데 여전히 양은 엄청나게 많았지만 짜지 않아서 좋았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출발을 하려고 화장실에 들렀는데 묘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백발의 노인이 바지를 발목까지 내리고 소변을 보고 있었다. 발목까지 내려진 청바지와 멜빵은 절묘하게 축축한 바닥에 닿지 않았다. 하얀 피부의 엉덩이와 상체에 비해서 턱없이 빈약한 다리가 묘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쓰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누구도 그 노인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나는 놀라서 훔쳐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서로의 프라이버시 때문에 소변기 사용 순서도 가르치는 나라이고 보니 내 행동은 무례하거나 불쾌한 것일 수 있어서 얼른 고개를 돌렸지만, 매우 강렬한 이미지였다. 무엇보다 젊은 시절 무척 탄탄했을 상체와 여위고 빈약한 하체의 부조화는 처연했다. 젊은 날의 노동을 견실하게 수행했을 그의 상체와 이제는 새로운 삶을 찾아 분주히 돌아다니기에는 너무도 빈약해진 다리, 그 부조화로부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에 쓸쓸했다. 그것은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 <UP>에서 칼과 앨리가 평생 모험을 꿈꾸지만 이루지 못하고, 앨리가 죽고 나서 칼이 앨범을 통해 추억하는 장면처럼 쓸쓸하고 슬퍼보였다.
인디펜던스 내셔널 히스토리컬 파크
작은 우비를 입고 인디펜던스 내셔널 히스토리컬 파크으로 가는 아내와 아이들
비는 필라델피아에 도착하고 나서도 좀처럼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숙소는 외곽에 잡아두었기 때문에 먼저 인디펜던스 내셔널 히스토리컬 파크(Independence National Historical Park)로 먼저 갔다. 주소대로 입력을 했는데 사만다가 데려간 곳은 그곳이 아니었다. 주변을 몇 바퀴 돌다가 차를 세우고 물어보니 한 블록 너머에 있었다. 밖에서 보니 주차가 마땅할 것 같지 않아서 동전으로 주차가 가능한 곳에 일단 차를 세우고 걸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비가 너무 거셌다. 우산을 준비하지 않아서 우산을 살까 고민하다가 솔이네가 귀국하면서 주고 간 우비를 가져온 것이 생각나서 그것을 우선 쓰기로 했다. 내 것은 정상이었는데 아내와 아이들의 것은 모두 많이 작았다. 결국 둘러쓰고 뛰기로 했다. 어린 시절처럼 물첨벙을 하면서 한참을 달려오는데 아내와 아이들이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세히 보니 아내 우비 뒤에 그려진 미키마우스의 눈이 없었다. 모두 함께 깔깔대며 물첨벙을 하면서 안내도를 받으러 인디펜던스 비지터 센터로 갔다. 폭우 때문에 거리에는 빗물이 도랑처럼 흐르고 있었는데, 물이 맑았다.
인디펜던스 내셔널 히스토리컬 파크는 인디펜던스 홀(Independence Hal)과, 자유의 종이 보관된 리버티 벨 센터(Liberty Bell Center), 미국 최초의 국회의사당(Congress Hall), 올드시티 홀(Old City Hall)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비지터 센터가 있는 파크는 무척 고즈넉했다. 파크 자체가 매력적이라기보다는 파크 주변의 오래된 건물들과 오고가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비지터 센터에서 전체 지도와 인디펜던스 홀 내부를 둘러보는 투어 티켓을 받았다. 투어를 참가하기 위해 인디펜던스 홀을 찾아가니 아까 주차하고 걸어왔던 그곳이다. 다시 우비를 뒤집어쓰고 아주 궁색한 모습으로 온 길을 되돌아갔다.
미국 최초 의사당 전경
의사당에 딸린 양탄자는 7개 주를 상징
20분쯤 밖에서 기다리니 투어가 시작되었다. 인디펜던스 홀로 들어가 앉아서 해설사의 설명을 20분쯤 들었다. 워낙 빠르게 설명을 하니 들리는 소리보다 놓치는 소리가 많았다. 들리지 않는 부분은 유진이가 대신 들려주었다. 그나마 미국 역사를 미리 조금 파악해두고 간 것이 다행이었다. 독립전쟁을 치르면서 회의를 하고, 건국 이후에 상원이 열렸던 최초의 국회의사당에는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당시 사용되었던 것이라는 책상과 의자, 책상마다 놓여 있는 깃털 펜, 촛대, 책자, 서류들을 창으로 들어온 빛이 제한적으로 비추고 있었다. 히스토리 채널의 다큐멘터리 연출처럼 전체적인 어두운 분위기에 제한적인 조명은 몰입시키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중간 중간 효진이는 제가 아는 것을 알려준다. 지난 학기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라며 매우 구체적인 정보를 주었다. 보스턴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이에게는 책 속의 역사가 현장의 역사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지식으로서 역사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할 텐데, 아직 효진이의 역사는 지식에 머물러 있다. 아직 우리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 역사를 배운 것이 앞으로 우리 역사를 배우는데 어떤 영향을 줄지 궁금했다. 귀국하면 곧바로 한국 역사를 배울 텐데 효진이는 어떻게 두 나라의 역사를 비교하고 이해하게 될지도 기대가 된다. 효진이가 자신이 아는 것을 자꾸 이야기 하니까, 유진이는 그건 미국 역사라고 면박을 준다. 조금 컸다고 우리나라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둘이 그러는 모습이 귀여워서 내버려두었다.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현재를 보면서 역사를 알게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투어를 마치고 나오니 비가 그쳐 있었다. 몇몇 건물들은 보수중인지 가림막을 설치했는데, 가림막이 아주 멋스러웠다. 보수하는 건물의 원래 모습을 가림막에 흐리게 인쇄해 둔 것이다. 두드러지게 해서 현재 건물의 보이는 부분을 압도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건물 앞으로 워싱턴 동상과 존경 받는 대통령들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이 보도에 박혀 있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수많은 이해가 상충하고, 수많은 가치관이 충돌하는 한 나라의 수장으로서 전 국민의 지지와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더구나 미국과 같이 합중국의 형태를 이룬 나라에서 대통령이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는 대통령이라면 그는 정말 존경받을만한 인물일 것이다. 미국에 와서 보니 미국인들이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대표적인 인물들이 조지 워싱턴과 아브라함 링컨이다. 조지 워싱턴의 탄생일을 기념하며 시작된 프레지던트 데이(President's Day)까지 있고, 가는 곳마다 링컨과 관련된 기념관이 없는 곳이 없는 것을 보면, 그들에 대한 미국인들의 존경과 그리움을 짐작할 수 있겠다. 조지 워싱턴 동상 앞에서 포즈를 취하던 아이들이 어느새 링컨 대통령을 기념하는 동판 위에 가서 서 있었다. 사진을 찍어주면서 우리나라에도 존경할만한 대통령이 많이 나와서 아이들이 그들을 기리고 이야기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보수중인 건물의 가림막멋스러운 배려..
필라델피아는 유서 깊은 도시여서 그런지, 돌아보니 곳곳에 동상이 있다. 그 앞에서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아도 제대로 공을 들여 만든 작품임을 알 수 있었다. 돌아가신 이청준 선생님은 《당신들의 천국》에서 동상에 대한 경계를 강조한 바 있다. 동상은 사람들 앞에 우뚝 강건하게 서서 다른 의문이나 반론을 일시에 침묵시키는 힘을 가졌다. 사람들은 동상을 세움으로써 동상 속 인물의 의지와 뜻을 계승하려하고, 그 외의 다른 의견과 문제는 일체 허용하려 들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반성하지 않는 동상의 의지와 뜻은 오히려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우린 역사와 현실 속에서 숱하게 보아왔다. 동상의 뒤쪽을 찍으면서 그 어색한 강건함을 생각했다.
인디펜던스 내셔널 히스토리컬 파크를 둘러보며 다양한 곳까지 섬세하게 신경을 쓴 그들의 노력을 읽을 수 있었다. 공사 가림막 뿐만 아니라 화장실 푯말 하나에서도 자신들의 유서 깊은 전통을 드러냄으로써, 장소성을 최대한 살리는 디자인을 보여주고 있었다.
비지터 센터 쪽으로 다시 이동해서 자유의 종(The Liberty Bell)을 보았다. 깨진 부분이 선명한 자유의 종은 묘하게 동상과 대비를 이루었다. 미국독립선언이 공포될 때 쳤다는 이 종은 노예해방론자들에 의해 자유의 종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은 균열이 생겨서 사용하지 않고 전시만 해두었다는데, 가서보니 깨진 금이 선명했다. 자유와 평등을 상징했던 이 종의 균열은 현재 미국의 모습과 상관하여 좋은 유추를 제공했다. 현재적 의미에서 미국의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의 실체와 그 결과,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보이는 미국의 자유와 평등은 많은 생각을 요구하는 문제였다. 물론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 자유와 평등의 문제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음도 분명했다.
자유의 종 엑스레이
멋스러운 여자 화장실 표시
도네이션함
1954년 자유의 종 앞에서 선 어린이 합창단
자유의 종을 보러 간 곳에서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보았다. 1954년 인디펜던스 홀에서 공연을 하고 자유의 종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한국 어린이 합창단의 모습이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에 유엔군 위문공연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이 합창단은 휴전이 되자 미국에 경제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서 공연을 했다고 한다. 무려 4개월 동안 42개 도시를 돌면서 공연을 했는데, 미국 내에서도 화제를 불러 모으면서 4,000만 달러의 경제 원조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동족끼리 전쟁을 하면서 다른 나라 군대를 위로하기 위해 어린이를 동원했다는 사실과 전쟁 후에는 남의 나라에 경제 원조를 부탁하러 어린이들을 앞세워야 했던 슬픈 역사의 한 장면이다.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고 있는 어린 아이들 옆으로 서 있는 군복을 입은 어른들의 모습에서 그 참혹했던 시기를 건너려했던 눈물겨운 노력을 읽을 수 있었다. 이 사진이 비록 자랑으로 내세울 것은 아닐지 몰라도 부끄러워하며 숨길 것도 아니었다. 참담한 현실 앞에 절망하지 않고 극복하려했던 시도가 부끄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반복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오는 길에 기념품점에 들렀는데 눈길 가는 것이 많았다. 독립전쟁, 자유의 종은 물론 미군과 상관된 다양한 상품들도 등장해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기념품점을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자신들이 가진 원천 소스를 아주 매력적으로 상품화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을 소비해줄 방문객 수에 따라서 기념품의 종류, 질, 가격이 결정된 것일 테지만, 그 다양성과 품질이 놀라웠다. 기념품점에서 독립전쟁 당시 복식으로 구현한 체스세트를 보았는데, 부피에 대한 부담만 없었다면 구입하고 싶은 것이었다. 뉴욕에서 관람한 해리포터전시회 기념품점에서 본 체스세트는 《해리포터-마법사의 돌》에 등장했던 체스세트를 그대로 만든 것인데, 무려 500달러나 했었지만 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데 오늘 본 이 체스세트는 가격도 훨씬 싸고 부피도 적어서 몹시 고민을 하다가 내려놓았다. 얼바인까지도 문제였지만 그것을 다시 귀국할 때 안전하게 가져갈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양한 기념품들
독립전쟁을 배경으로 한 체스세트
기념품점을 돌아보며 팬시화된 역사를 생각했다. 분명 이곳에서 팔리는 기념품들은 역사에 대한 재인식이라기보다는 역사를 소비하는 모습에 가까웠다. 역사적인 맥락을 소거한 소품으로서 역사를 활용하고 있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를 통해 관심을 지속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관람을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모두들 기대하고 있는 필라델피아 샌드위치로 유명하다는 집을 사만다에 입력하고 출발을 했다. 필라델피아의 멋스러운 시가지를 두루두루 돌아서 찾아갔는데, 그곳에 없다. 주소는 맞는데 샌드위치집이 없다. 허탈해서 주변을 찾다가 포기하고 일단 숙소로 돌아가서 짐을 풀고, 프런트에 물어서 찾아보기로 했다. 숙소로 가는 길은 예상보다 멀었다. 가는 길에 길을 잃어버려 돌다가 어느 주택가로 들어섰다. 똑같이 생긴 작고 낡은 주택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집 앞 계단에는 흑인들이 나와 앉아 있었다. 한참을 헤매느라 그 주택가를 돌았는데 백인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필라델피아는 남북전쟁 이전에도 노예가 아닌 흑인들이 자유를 찾아 이곳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흑인들이 많다고 한다. 흑인 대통령이 나왔다고는 하지만 온전한 자유와 평등을 구가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는 그들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보호구역에 머무는 인디언을 생각했다. 자신들의 땅에서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내몰린 인디언들은 미국의 영원한 타자처럼 점점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분명한 것은 소외된 사람들이 있는 사회는 결콘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 없는 사회라는 것이다. 더블어함께 어우러져 사는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불평등과 부자유가 있다는 말이 아니던가? 그런 소외가 분명한 사회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 불안은 소외당한 사람의 몫이라기보다는 소외시킨 사람들의 몫이 될 가능성이 높다. 분명한 것은 소외를 해소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흑인들 이야기를 하면서 숙소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간단히 씻고 프런트에 문의했는데, 다시 필라델피아 시내로 들어가야 한단다. 숙소로 오는 길에 바비큐라는 간판을 본 것이 기억나서, 미국 와서 제대로 된 바비큐를 먹어보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먹어보자고 했다. 이미 모두들 배가 고픈 상태여서 그 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 집은 페이머스 데이브스(Famous Dave's) 1라는 바비큐 집이었는데, 립(rib)이 유명하다고 했다. 아내는 어디서 들었는지 이 집은 서부에는 없고 동부에만 있단다. 식당 분위기도 밝고 활기찼고 가격도 저렴한 편이데 양도 넉넉하여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Famous Dave's BBQ 음식들
이것저것 맛을 보자고 몇 가지 음식을 시키고 기다리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 큰 쟁반에 여러 음식이 함께 나오는 콤보를 먹고 있었다. 쟁반의 크기도 크기였지만, 음식의 양이 대단했다. 저것을 시킬 것을 잘못했다고 아내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음식이 나왔다. 짜서 고생한 버팔로 윙을 제외하고는 음식 맛이 좋은 곳이었다. 특히 립이 왜 유명한지 알 수 있었다. 이 집에서 직접 구운 옥수수 머핀도 맛이 있었다. 립은 1인분이 12조각이었는데 둘이 먹으면 적당할 양이었다. 프렌치프라이와 머핀도 싸서 숙소로 가져올 정도로 많았다. 음식의 절대량도 많고, 많이 먹고, 즐겨 먹으니 미국인들은 뚱뚱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오늘 아침 뉴욕에서 더운 물이 나오지 않아 제대로 씻지 못했다. 그런데 이 녀석들 후드로 적당히 가리고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여행이 아이들을 털털하게 만들고 있다.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살다보면 상황에 따라서 늘 따뜻한 물에 정갈한 욕실이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 스스로 적응하거나 견디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할 때, 견디는 선택지를 하나 더 갖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아이들이 이번 여행을 통해서 많이 보고, 배우고, 느끼기를 원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물론 그럴 수 있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이렇게 가족이 함께 낯선 곳을 여행했다는 기억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여행의 체험이 아이들에게 무엇이 될지는 그 다음 문제고, 의도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이렇게 소중한 시간을 함께할 수 있고, 서로 의지하며 낯선 곳을 건너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내일은 아침 일찍 이번 여행의 마지막 도시인 워싱턴으로 갈 것이다. 알 수 없는 기대로 설레는 밤이다.
- 나중에 얼바인에 돌아와서 우연한 기회에 롱비치에 있는 이 집을 발견했다. 동부에만 있다는 것은 잘못된 정보였지만, 그 덕분에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었고, 서부에서 발견했을 때에는 그 기쁨이 더 컸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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