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스트롱, 두려움과 분노 사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신문은 연초에 새해의 트렌드를 예측하며 ‘미스 스트롱’이라는 낯선 조어를 빼놓지 않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신문마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트렌드를 소개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 내용이다. 물론 권투, 프로레슬링, 이종격투기, 익스트림 스포츠 등과 같이 그동안 여성들의 기피하던 영역에서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면서 ‘미스 스트롱’이라는 말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따위의 순진한 견해에서부터 남녀의 경계허물기로 인식하는 경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주장들이 차고 넘쳤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이냐에 있다.
박수근의 그림에 남자들이 등장하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부재를 의미하며, 궁핍하고 척박했던 전후에 어머니가 이끌던 ‘나목(裸木)의 시대’를 상징한다는 해석을 상기하면서, 이와 같은 논리를 미스 스트롱의 트렌드에 적용하고자 할 수도 있다. 혹은 미스 스트롱의 트렌드화는 남성이 스트롱하지 못하다는 반증이다라는 식의 위험한 단순논리도 등장할 수 있다. 엄혹한 시대일수록 구원투수처럼 등장하는 여성들을 일일이 열거하며, 그러한 맥락에서 읽으려는 거칠고 소박한 견해도 있을 수 있다. 또는 미스 스트롱의 등장을 미스터 뷰티의 등장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을 하며 양성 간의 경계허물기의 일환으로 일반화시키려는 근거없는 주장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미스 스트롱’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트렌드화하려는 그 의도를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미스 스트롱의 예로 자주 등장하는 <다모>와 <대장금>을 기억해보자. <다모>의 채옥은 이전의 여성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강인한 정신력과 무술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대자금>의 장금이도 불굴의 의지와 빼어난 재능으로 남성들을 제압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는 점에서 ‘미스 스트롱’의 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채옥과 장금이의 걸출한 능력은 이성에 대한 사랑이나 가부장적 권력구조로 다시 수렴되고 있다는 점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도 결국 장군과 결혼하는 것을 행복한 결말로 설정하고 있지 않은가?
미스 스트롱(Ms. Strong)은 미스터 뷰티(Mr. Beauty)의 짝패다. ‘미스’와 ‘스트롱’의 결합은 ‘미스터’와 ‘뷰티’의 결합만큼이나 낯선 것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둘은 늘 붙어서 쓰인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단어를 합성한 ‘미스 스트롱’이 2005년 대표적인 트렌드가 될 것이라는 예측은 흥미롭지만 매우 불순해 보인다. ‘미스 스트롱’이 낯선 것은 그것이 새롭기 때문이며 동시에 고정된 성역할에 대한 완강하고 고집스런 기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스 스트롱’은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독립여성’을 의미하는데 그 말 속에는 ‘그럴 수 없는’ 혹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뜻이다. 전자는 분노를 낳고 후자는 두려움을 낳았다. 그러한 양가적인 감정은 19세기 대중의 등장을 ‘아무 생각 없는 무례한 무리들(mass)’이라고 칭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기존의 경제적 ․문화적 권력을 나누고 싶지 않았던 기득권층의 분노와 두려움이 대중이라는 비하적인 의미로 수렵되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스 스트롱’이라는 말은 표면적으로야 긍정적 의미를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형적인 여성들이라는 의미의 가름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닭살스런 공주에서 주체적인 ‘미스 스트롱’으로 거듭난 <슈렉>의 피오나 공주를 보며 우리가 즐거울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행동을 엽기스럽다고 느꼈기 때문 아니었나? 엽기는 이미 정상이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긍정적인 것처럼 읽혀지는 것은 이 트렌드와 함께 그 증거로 의식조사 결과를 발표한 광고회사의 공이 컸다. 그만큼 ‘미스 스트롱’은 상업적 목적을 전제로 한 신조어라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세대적 정체성이 모호했던 ‘X세대’나 실체가 불분명했던 ‘미시족’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트렌드는 지금 이곳의 흐름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전망함으로써 미래의 시장수요와 사회적 흐름을 예측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 유념하자. 그렇다면 ‘미스 스트롱’을 좀더 긍정적이고 생산적 실체로 바꾸어갈 수는 없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성이 지닌 장점 위에 이성이 지닌 강점을 융합시키는 양성(兩性) 추구”가 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공적 영역/사적영역, 밖/안, 강함/약함, 주체적/의존적, 이성적/감성적, 우등/열등 따위의 성역할에 대한 편견이나 구분을 던져 버려야 하는 것이다. 조용필의 노래처럼 지구 위의 반은 여성이고 그 나머지는 남성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반이 구속되고 의존적이며 약하고 열등해서는 결코 나머지 반도 행복할 수 없다는 자명한 진리를 잊지 말아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새해, ‘미스 스트롱’이 더 이상 낯선 단어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한화 한화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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