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 배우는 삶의 속도
- 요세미티 국립공원→샌프란시스코→버클리→몬트레이→캐멀(4월19일~23일)
첫 번째 여행으로 자신이 생긴 것은 나만이 아니었나보다. 가족들은 4월 아이들 봄방학 무렵이 되자 샌프란시스코와 그 주변으로의 두 번째 여행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샌프란시스코를 언제 가본 것도 아니 것만,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들만으로도 충분히 혼잡스럽고 번거로웠기 때문이다. 막연한 두려움은 출발부터 예사롭지 않은 조짐을 보여주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샌프란시스코에 잔뜩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여행 계획을 짜고 적당한 위치에 숙소를 예약해야하는 입장에서 보면 역시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가격 대비 숙소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예약조차 쉽지 않았다. 예약 사이트를 돌아보다보니 숙소에서 심지어 주차비를 받는 곳까지 있었으니 좋은 인상을 가지고 떠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더구나 샌프란시스코까지 갔으니 그 주변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생각에 요세미티 국립공원, 몬트레이, 캐멀, 버클리 등을 포함시키다보니 4박 5일의 일정은 빡빡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 봄방학 기간을 이용해서 샌프란시스코를 다녀오자는 계획이었기 때문에 여행 기간을 무한정 늘려 잡을 수가 없었다. 사실 아이들의 봄방학이 4월 18일부터 23일까지였으니 그 전 주 토요일인 4월 16일에 떠나면 여유 있는 일정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UCI에서 봄 학기 강의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화요일 강의를 마치자마자 학교에서 바로 떠나는 것이 최선이었다. 구글 지도 위에서 몇 번을 시뮬레이션한 결과 우리의 여정은 요세미티 국립공원→샌프란시스코→버클리→몬트레이→캐멀 순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얼바인에서 요세미티 국립공원까지는 6시간 30분쯤을 예상했는데, 쉬엄쉬엄 달려서 예상보다 시간은 조금 더 걸렸지만 다행스럽게도 해가 아직 남아 있을 때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얼바인에서는 북쪽으로 LA까지밖에 가보지 못한 우리는 LA를 벗어나자 마치 알 수 없는 자유를 느끼고 있었다. 잘 모르는 지역의 장거리 운전도 부담이었지만 길 위에서 벌어질지도 모르는 돌발 상황들을 적잖이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을 LA에 던져두고 온 듯한 묘한 해방감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맥락 없는 해방감은 다소 흥분되었다는 의미다. 과도한 흥분은 뜻하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 오크허스트(Oakhurst)의 숙소에 거의 도착할 무렵, 창밖으로 달려드는 풍광에 이미 마음을 빼앗기도 있었다. 흥분한 상태에 마음까지 빼앗겼으니 노란신호가 보였겠는가? 급하게 노란신호를 인지하는 순간 급정거를 했는데, 뒤에서 한껏 속도를 올리며 바툼하게 달려오던 빨간색 스포츠카가 아슬아슬하게 급정거를 했다. 뒤차는 추돌을 면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방향을 옆으로 틀어서 갓길로 내려서면서 급정지했다. 정말 사고가 나도 뭐라고 할 수 없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옆 차를 살펴보니 운전석의 중년 여성은 사고를 피해서 다행이라는 의미인지 자신의 빼어난 순간 대처 능력을 알라달라는 것인지 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차 안을 살펴보니 다행스럽게 가족들은 노란 신호에 소심한 아빠가 급정거한 것으로만 아는 모양이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뒤차 운전자가 순간적으로 정확하게 판단하고 기지를 발휘하지 않았다면, 우리 여행은 거기에 끝났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인근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으며 진정하고 침착하게 운전을 하리라 다짐을 했지만, 숙소에 가까이 갈수록 달려드는 풍광에 빼앗긴 마음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요세미티 국립공원까지는 차로 40여분 더 가야했지만, 숙소 주변은 이미 우리가 사는 얼바인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얼바인 인근은 건조한 스텝지대여서 울창한 수목의 산과 들은 기대할 수 없었는데, 요세미티는 어린 시절 <딱따구리>에서 보았던 국립공원의 모습 그대로였다. 산은 산대로 들은 들대로 연두와 초록을 내뿜고 있었고, 이름 모를 나무들은 제몫의 크기로 올곧게 서 있었다. 정주하여 땅에 뿌리내린 것들만이 가질 수 있는 생명의 기운은 유장하고 아득했다.
미국도 우리처럼 유명 관광지일수록 숙소 가격은 물론 예약조차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요세미티도 예외가 아니어서 숙소 가격도 비쌌고 예약 자체가 어려웠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요세미티 국립공원 인근의 오크허스트에 숙소를 잡았다. 밤에 도착해서 잠만 자고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가로질러 샌프란시스코로 넘어갈 것이므로 40여분의 이동 거리는 큰 부담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행을 하면서 무엇보다 신선했던 것은 그들의 여행 문화였다. 여행지 곳곳에서 만난 그들의 여행 문화는 미리미리 준비하여 가장 경제적인 방법을 찾고, 자연 속에서 휴식 중심의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그들의 모습은 무척 인상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급하게 일정을 잡고, 최소한의 계획을 가지고 무리하게 떠나던 나의 여름휴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캠핑카 뒤에 자동차나 보트를 달고 다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소형 트레일러를 하나 더 달고 다니는 그들의 모습은 여행지에서 그리 낯선 것이 아니었다. 자동차를 뒤에 달고 가는 이유는 여행지에서 돌아다니기는 덩치 큰 캠핑카보다는 자동차가 더 용이하고 경제적이기 때문이며, 뒤에 소형트레일러를 달고 가는 것은 아주 소소한 것들까지 모두 싸가지고 다니는 그들의 여행 습관이었다. 미국의 관광지에는 우리나라에서처럼 식당이 많지 않기 때문에 아이스박스나 지퍼백에 음식을 가득 싣고 다니는 것이 일상적인 그들의 모습이었다.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미국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이와 같은 여행의 풍경은 그들이 우리보다 여행을 자주 즐기기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였다. 주말에 여행을 떠나지 못하면 자기 집 앞마당에 텐트를 치고 캠핑 분위기를 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생각하는 여행과 휴식이 우리와 참 많이 다르다는 것을 자주 느낄 수 있었다.
오크허스트 숙소에 도착하고 저녁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왔지만 아주 작은 마을이어서 그런지 마땅한 식당을 찾지 못했다. 인터넷 검색 중에 발견한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있다고 해서 찾아간 식당의 간판이 재미있었다. ‘Kyoto Kafe, Japanese restaurant’이라고 영문으로 적혀있고 그 아래로 ‘우동 京都 SUSHI BBQ’라고 적혀 있었다. 간판만 봐서는 식당의 정체를 알기 어렵고 맛은 크게 기대 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낯선 곳에서 국물음식이 해줄 수 있는 위로까지 저버린 것은 아니었다. 실내는 아주 소박했고 멕시칸으로 보이는 손님들 몇몇이 창가에 앉아 있었다. 우동, 짬뽕, 치킨 데리야키 등을 시켰는데 아내와 내가 기대했던 맛은 아니었지만 전생에 늑대였음이 분명한 첫째는 치킨 데리야키를 맛있게 먹었다. 걸어서 숙소로 돌아오면서 작은 마을 묘지며 교회를 볼 수 있었다. 숙박업소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은 전체적으로 낮고 조용했다. 관광지임에도 소박하고 순한 마을이었다. 오크허스트의 밤이 데려온 어둠은 이미 더할 수 없이 짙고 무거운 포즈로 내려와 있었다.
다음날 일찍 거대한 자이언트 세콰이어 숲으로 이루어진 마리포사 글로브(Mariposa Grove)를 보기 위해 서둘러 달렸다. 마리포사 글로브 주차장이 작아서 사람들이 몰리면 주차할 곳이 없어서 고생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른 시간 탓인지 다행히 마리포사 글로브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지난겨울 내려서 녹지 않는 눈만 켜켜이 쌓여 있었다. 수령이 2000년 이상 된다는 세콰이어는 직경 3m 이상 되는 것들도 많을 정도로 컸고, 세콰이어 숲의 규모는 압도적이었다. 그 자리에 서서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의 시간을 건너왔을 세콰이어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높이까지 올곧게 뻗어 올랐고, 뻗어 오른 만큼 든든한 밑동으로 땅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미 2000년을 건너온 세콰이어를 우리가 보러 온 것인지, 세콰이어가 우리를 보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우리보다 더 오랜 시간을 살아왔고 도 그 이상 살아갈 세콰이어를 우리가 보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가소로운 일일지도 모른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에게 살아 있는 시간의 길이는 모든 것에 선행할 만큼 위력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마리포사 글로브를 나와서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본격적으로 둘러보았다. 마침 국립공원 이용객들에게 감사한다는 의미로 무료입장하는 기간이라서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기쁜 마음으로 들어선 요세미티 국립공원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는 습했고 살아있는 날것의 냄새가 났다. 비가 내리는 요세미티에서는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이 일시에 제 빛깔을 뿜어내는 민감한 합창이 열리고 있었다. 제가 지닌 것들을 소리 내고, 흘려보내고, 풀어내놓는 모든 것들로 인하여 차고 넘치는 생명의 향연은 비가 내릴수록 더욱 포근하고 아늑했다. 비가 내리고 그 사이사이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 안개 사이로 요세미티를 만나는 사람들의 속도도 느리고 여유로웠다. 그들은 더 보기보다는 충분히 체험하는 여유를 택하고 있었다. 트레킹하는 사람들은 비가 내려서 더 재미있다는 듯 유쾌하고 소란스럽게 걷고 있었다. 그 모습에 끌려 샌프란시스코로 가야 하는 일정을 미루고서라도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을 따라 가고 걷고 싶었다.
미국 국립공원들을 즐기는 방법은 각자의 취향만큼이나 다양하다. 요세미티 국립공원도 트레킹을 하거나 자동차로 돌거나 자전거로 자유롭게 돌거나 각자 자신이 즐기고 싶은 대로 즐기면 된다. 어떤 방식으로 즐기든 간에 입구에서 나눠주는 안내 지도는 매우 유용한 것이어서,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봐야할 것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안내판과 뷰포인트 설정이 잘 되어 있었고, 뷰포인트에는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어서 차로도 불편 없이 즐길 수 있었다. 이곳은 어떻게 즐겨라가 아니라 주어진 시간, 형편, 목적에 따라서 각자 알아서 즐기라는 의미였다. 요세미티 국립공원 곳곳에서 캠핑중인 사람들이나 캠핑카를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잠시 보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 안에서 그것과 동화되어 여유를 즐기는 모습은 부럽지 않을 수 없었다. 국립공원의 아름다운 풍경에 압도되어 보는 것만 아니라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쉬고 지내다 오는 것도 그들이 그곳을 찾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은 충청북도 크기라고 하는데, 샌프란시스코로 출발해야하는 우리가 그것을 다 볼 수는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른 일정 모두 접고 요세미티 국립공원 곳곳에서 캠핑을 하면서 천천히 돌아보고 싶었다. 미국인들의 경우 이곳을 한 번에 다 돌아보지 않고 아주 천천히 조금씩 즐기면서 몇 년에 걸쳐 돌아본다고 한다. 결국 우리가 돈 것은 요세미티 국립공원 전체가 아니라 ‘요세미티 벨리지역’이었다. 요세미티 벨리지역만이라도 제대로 즐기려면 며칠은 족히 걸릴 규모였다. 모두들 아쉬웠는지 기회가 된다면 가을에 꼭 다시 오자고 약속을 했다.
요세미티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길은 미국에서 만나본 여러 아름다운 길 중에서도 최고였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위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소와 말의 모습에서부터 아무리 달려도 끝나지 않는 오렌지 농장과 아몬드 농장에 이르기까지 보이는 것들은 모두 크고 넉넉했다. 그렇게 마음을 뺏기고 달리는데 오렌지 농장 부근 길가에서 오렌지를 팔고 있었다. 지방 국도 변에서 그 지역 특산품들을 파는 한국의 풍경과 비슷해서였을까, 차는 자연스럽게 그곳에서 멈췄다. 두 자루를 6달러에 판다는 표지를 붙여놓고 있었지만 양이 너무 많았다. 한 자루에 20개 이상은 족히 들어보였으니 한 자루만으로도 여행 내내 먹고도 남을 양이었다. 첫째를 앞세워 3달러에 한 자루만 구입을 했다. 차 안에서 바로 까먹어 보았는데, 오렌지는 기대했던 것보다 더 달고 시원했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넘어오는 길에 만난 수많은 풍력발전기의 모습.
캘리포니아의 대부분 농장들이 그렇지만 이곳의 농장 규모도 어마어마했다. 그러다보니 기계의 힘을 빌리거나 싼 임금의 멕시코 노동자들의 손을 빌리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물론 농장 초기에는 이민자들이나 1930년대 미국 대공황과 황진(黃塵) 피해를 견디지 못하고 서부로 이주해야만 했던 농민들의 희생이 있었다. 혹자는 당시 그나마 이곳의 일자리가 그들을 살렸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정당한 거래였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달리는 동안 차 안에서 아이들에게 존 스타인벡(John Ernst Steinbeck)의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 1939)와 지독한 풍요를 유지시키는 보이지 않는 희생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희생의 대상들만 달라졌을 뿐 희생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분명한 사실도 함께 들려주었다.
샌프란시스코는 관광지답게 비용대비 숙박시설은 엉망이었고, 바가지 상혼이 곳곳에서 보였다. 도착하자마자 저녁을 먹으로 찾아간 피셔맨스 워프(Fisherman's Wharf)에서 들뜬 기분에 호객꾼에게 이끌려 이탈리안이 운영하는 랍스타 식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제시한 가격 정도면 이번 여행에서 한 번쯤 호사를 부려도 좋겠다는 생각에 주문해서 먹고 보니 계산이 잘못되었다. 그래서 다시 주인을 불러서 금액을 정정하고 나왔다는데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계좌에 청구된 금액을 보니 잘못된 금액 그대로 나온 것이다. 차이나타운에서도 거리에서 할인 쿠폰을 나눠줘서 그곳으로 갔었는데, 나중에 계산할 때보니 쿠폰을 적용하지 않은 금액으로 청구서가 나왔다. 그래서 다시 주인을 불러서 금액을 정정하고 계산을 하고 나오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가 관광지여서 그런 것인지 랍스타 식당을 운영하는 이탈리아계나 중국음식점을 운영하는 중국계 사람들의 성향이 그런 것인지는 알 수는 없으나, 그것이 유쾌하지 않은 일인 것만은 분명했다.
피어39에서 만난 바다사자들, 샌프란시스코의 명물이라는 보댕의 크램차우더와 샌드위치, 케이블카와 버스를 자유롭게 탈 수 있는 1일권 패스,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발견한 멋진 책장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이블카, 피셔맨스 워프, 피어39, 베이 크루즈, 금문교, 노브힐, 러시안 힐, 롬바드르 스트리트의 풍경과 보댕(Boudin)의 사워 도우(Sourdough)나 클램 차우더(clam chowder) 등은 그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기라델리 스퀘어에서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한 시간 이상을 기다리며 거리 악사의 연주나 그들의 퍼포먼스에 박수를 보내던 사람들의 여유와 결코 편리하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케이블카를 위해서 고갯길에서 한참을 멈추어 기다리는 차들도 오래 기억될 것이다. 고풍스러운 건물 위로 붉게 타오르던 노을과 노을을 되비추어주던 샌프란시스코의 바다는 현실이 아니라 차라리 몽환이었다.
피어39에서 크루즈를 타고 알카트라즈섬과 금문교를 다녀왔다. 악명 높았던 감옥을 관광지로 활용하고 있는 알카트라즈는 잔혹했던 과거의 흔적과 안락한 현재의 평온이 묘하게 교차함으로써 매혹적인 공간이 되었다. 이러한 매혹은 <더 록>(The Rock, 1996)을 통해 한 번 더 확대 재생산됨으로써 팬시의 공간이 될 수 있었다. 과거의 알카트라즈가 아니라 현재적 유용으로 브랜드화된 섬은 그렇게 금문교 앞에 떠 있었다. 크루즈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간 보댕은 유명한 만큼이나 혼잡스러웠지만 샤워 도우의 맛만은 기대를 넘어서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다소 위험해 보이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는 위험한 것이 분명한 케이블카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돌아다녀야 할 곳은 누구나 보는 곳이 아니라 그런 누구나가 살고 있는 곳이라 믿으며 다니다보니 차이나타운이었다.
금문교와 함께 형성되었다는 차이나타운, 중국인들을 괴롭히던 갱스터를 죽이고 그 목을 입구에 걸어둔 이후, 중국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차이나타운은 샌프란시스코답게 낡고 지저분했지만 그 활기만은 대단했다.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 감독의 <차이나타운>(Chinatown, 1974)은 샌프란시스코가 아니라 LA를 배경으로 한 것이지만, 끝내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은폐된 현실의 메타포로서의 차이나타운은 바로 샌프란시스코의 몫이며 현재 중국의 얼굴이 아닐까?.
샌프란시스코를 떠나면서 인근의 UC버클리(UC Berkely)에 들려서 그들의 상징이라는 황금곰(Golden Bear)을 보았다. 미국 내에서 가장 진보적인 대학 중의 하나로 꼽히는 UC 버클리에 들른 것은 아이들에게 세계적인 대학을 보여주겠다는 지극히 소박한 마음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아이들이 UC버클리의 무엇을 볼 수 있을까마는 그저 분위기만이라도 느껴보라고 데려간 것이다. 기대와는 달리 아이들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고, 아내와 나만 아쉬울 뿐이었다. 학교 앞에 한글로 떡볶이라는 단어가 보여서 반가운 마음에 들어가 보니 한국인이 운영하는 작은 음식점이었다. 한국 학생들이 많아서 떡볶이 메뉴를 내놓았다는 주인아주머니는 친절했고, 떡볶이의 맛은 감동적이었다.
떡볶이의 맛에 한껏 들떠서 버클리를 출발하려는데 뒤차의 흑인들이 창밖으로 손짓을 했다. 무슨 일인가하고 창을 열었더니 타이어가 펑크 났다고 알려주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막 고속도로에 올라서려는 순간이었으니 그것도 모르고 달렸다가 큰 사고가 날 뻔 했다. 마침 카센터 앞이어서 그곳에 차를 대고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자기네는 타이어를 취급하지 않으니 타이어 전문점으로 가라고 했다. 그때까지 나는 미국에서도 한국처럼 카센터에서 타이어 교체를 해주는 줄 알고 있었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여행객이고 타이어가 완전히 주저앉은 것을 본 주인은 안타까웠는지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나섰는데, 휠 너트 렌치가 헛돌았다. 휠 너트 렌치 앞에 우리 차전용으로 끼우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데, 한국에서 몇 번 타이어를 교체해본 나로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한참을 찾다가 차를 인수하면서 무심결에 받아 넣어둔 것이 생각나서 꺼내어 보니 딱 맞았다. 아마 바퀴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전용 끼우개를 만든 모양이었다. 그렇게 스페어타이어로 교체하고 근처의 타이어 전문점에서 타이어를 교체했다. 타이어 교체를 위해서 트렁크의 짐을 모두 꺼내놓고 나니 문득 가족들에게 미안했다. 며칠 간 자동차 여행을 떠나면서 타이어 점검도 하지 않았고, 타이어 교체에 필요한 도구조차 점검하지 않은 나의 안일함이 몹시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기 일도 아닌데 굳이 창을 내려서 큰소리로 알려준 흑인들을 보면서 처음에는 온갖 나쁜 상상을 했었던 것도 몹시 부끄러웠다. 낯선 세계에 대한 안일한 접근과 편협한 선입견에 사로 잡혀있던 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덕분에 버클리에서 갈아 끼운 것은 타이어만은 아니었다.
버클리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구글이 있었다. 그래서 말로만 듣던 구글을 견학하기 위해 그곳을 찾아갔지만, 아는 구글 직원이 있어야 견학이 허락된다고 했다. 산호세에 있는 몇몇 아는 분들의 도움을 받을까 하다가 그러기에는 일이 너무 번거로워질 것 같아서 구글 견학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안을 제대로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구글의 분위기는 정원과 거침없이 오고가는 자전거 그리고 세그웨이(Segway)를 탄 직원들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느껴질 만한 것이었다.
몇 해 전에 그곳에서 연구년을 보내고 돌아오신 선배 교수님과 미국에 와서 만난 많은 분들의 강력한 추천만으로도 몬트레이는 우리의 기대를 더할 수 없이 키워놓았다. 그래서인지 몬트레이까지 가는 길이 아름다웠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평범해보였다. 이야기는 기대를 만들고 기대는 늘 현실을 넘어서나 보다.
여유 있는 은퇴자들의 천국답게 올드 피셔맨스 워프 한 쪽에 정박되어 있는 요트들, 치열한 생활의 공간인 다른 한 쪽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는 바다사자, 이제는 쇼핑센터로 변한 엣날 통조림 공장, 엔터테인먼트가 가미된 식당 ‘부바 검프’의 재미난 주문판.
미국인들이 은퇴하고 가장 살고 싶어 한다는 몬트레이에 도착했다. 압도적인 볼거리보다는 여유로운 휴양 그 자체가 콘셉트인 도시였다. 존 스타인벡의 소설 《통조림 공장 골목》(Cannery Row, 1945)의 배경이 된 캐너리 로우의 통조림 공장은 쇼핑센터로 바뀌어 있었고, 존 스타인벡은 왁스 뮤지엄 간판 앞에서 조악한 초상으로 서 있었다. 그는 올드 피셔맨스 워프 한 쪽에서도 청동 위로 세월을 흘리며 작품도 모르고 그가 누군지도 모르는 관광객들의 의미 없는 포토 스팟(Photo Spot) 동상으로 쓸쓸하게 서 있기도 했다.
올드 피셔맨스 워프는 ‘The Fish Hopper’의 새우 칵테일과 클램 차우더의 맛이나 ‘부바 검프’에서 먹은 해물과 로컬 맥주의 맛이 선명했다. 부두 곳곳에 나와 앉아 있던 바다사자들의 일광욕은 한가로운 여유였다. 그것에 비하면 항구에 가득했던 화려한 요트들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풍경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여느 관광지나 마찬가지로 숙소는 가격보다 아래에 있었고, 설상가상 인도인 주인은 지독하게 불친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번다한 것들이 몬트레이 바다의 풍경과 여유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몬트레이에서 돌아오는 날, 몬트레이에 가면 꼭 들러야 한다는 17마일 드라이브 길을 달렸다. 아름다운 것은 분명했지만 10달러의 입장료를 내고 달릴만한 길은 아니라고 투덜댔지만, 해변에서 만나는 바닷새의 자유와 바다사자의 여유는 돈을 주고서라도 꼭 사오고 싶은 것들이었다. 17마일 드라이브의 곳곳을 보면서 우리 동해안의 절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이곳에는 그 풍경과 어우러진 생물들이 그곳에서 생활을 함으로써 더욱 빛나고 있었다. 생물들은 숨고 풍경만 살아 있는 공간이 아니라 생물들의 생활로서 완성되는 풍경은 가슴 먹먹한 감동이었다.
17마일 드라이브에서 만난 버드록(bird rock) 위의 바다 사자들
17마일 드라이브를 돌아보고 캐멀로 가는 길에 캐멀 미션 바실리카 성당(Carmel Mission Basilica)을 만났다. 1771년에 세워졌다는 캐멀 미션 바실리카 성당은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더욱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성당이 인간을 압도할만한 규모나 장식으로 화려한 곳이 아니라 소박하고 따듯한 안식의 공간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지만 성당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의 흔적과 그것이 빚어내는 소박하지만 따듯한 안식과 평화에 어느새 젖어들고 있었다.
캐멀은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작은 마을 같았다. 여행 정보에는 크린트 이스트우드 (Clint Eastwood)가 시장을 했던 곳이라고 소개되어 있었지만, 정작 캐멀에서 걷다보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이후 예술가들이 정착하면서 조성된 도시라는데 그래서 그런지 아주 천천히 걸으며 돌아보기 좋았다. 아담하고 소박하지만 각각의 멋이 어우러진 작은 상점들, 그 사이를 아주 천천히 소요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작은 소음들마저도 캐멀에서는 평화로웠다. 점심을 먹기 위해서 들어간 곳은 식당과 바를 겸하는 곳이었는데 음식의 맛과 분위기가 아주 좋았고 가격마저 착했다.
캐멀의 분위기에 취해서 예정보다 출발이 조금 늦어졌다. 늦은 출발이었지만 매력적인 와이너리(winery)들의 등장에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도 와이너리에 가보고싶다고 해서 충동적으로 그곳으로 들어갔다. 와인을 별로 즐기는 편이 아니지만 와이너리의 이국적인 느낌을 체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와이너리에서는 프린트된 종이를 나누어 주고 그곳에 적힌 와인을 조금씩 따라주면서 맛보게 하고, 마음에 드는 것을 구입하도록 했다. 와인뿐만 아니라 와인관련 상품들이 매장에 가득했다. 운전 때문에 주로 아내가 많이 맛을 보았고 아이들은 옆에서 나누어주는 과자를 먹으면서 즐거워했다. 시간이 늦어서 와인 시음은 곧 끝이 났다. 서부개척시기의 분위기와 멕시코 마을 같은 분위기가 공존하는 와이너리 정원에서 아이들과 사진을 찍으며 즐겁게 놀았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즐거움이었다. 결국 돌아오는 차 안에는 세 병의 와인이 실려 있었지만 소중한 시간이었다. 집을 향해 7시간 넘게 운전하는 동안 가족들의 이야기와 어둠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분주히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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