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란의 매혹 혹은 매혹의 광란
- 라스베이거스(2월 19일~21일)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솔이네 1는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아이들 학교가 시작되면 시간이 없으니 그전에 여행을 많이 다녀야 한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야기를 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막막해하다가 그의 말처럼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시작하자 아이들 시간 때문에 여행은 더욱 어려워지고 말았다. 그러던 중 프레지던트 데이(President Day) 2가 돌아와 자연스럽게 2월 19일부터 21일까지 연휴가 되었다. 마침 연구보고서를 하나 마무리 한 시기였고, 더 이상 여행을 미루다가는 집에서 안위를 보장받을 수 없는 분위기라서 첫 번째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첫 번째 여행지를 라스베이거스로 정한 것은 주어진 시간이 짧았고, 별도의 계획을 가지지 않더라도 공연을 비롯한 다양한 엔터테인먼트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물론 그 사이 당일코스로 LA, 샌디에이고 등의 도시를 다녀오거나 집근처의 라구나비치, 뉴포트비치, 디즈니랜드 등을 다녀오기는 했지만, 숙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들은 라스베이거스 여행을 첫 여행이라고 여겼다.
라스베이거스는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얼바인에서 동쪽으로 조금 멀리 움직이려면 대부분 라스베이거스를 거쳐 가야만 한다. 얼바인에서 라스베이거스까지는 승용차로 4시간 3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4시간 30분을 가까운 거리라고 쓰는 것은 이 정도 거리는 미국에서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8-9시간 운전은 보통이니 4시간 30분은 가까운 거리가 아니겠는가? 물론 한국에서였다면 분당집에서 부산쯤 가는 시간이니 결코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그래서였는지 여행 중에 장시간 운전으로 지루해지면, 남은 거리를 보고 “대구쯤 남았다”, “이제 대전에서 출발하는 거야!”, “부산까지 왕복하면 되는 거리야!” 등으로 혼잣말하듯 가족들을 위로하고는 했다. 신기하게도 그러면 그 막막하고 지루한 길이 견딜만해지곤 했다.
라스베이거스는 집과의 거리도 거리였지만, 말로만 듣던 세계적인 수준의 호텔이나 그들의 도박 문화 그리고 화려한 쇼를 보고 싶은 욕심이 컸다. 더구나 라스베이거스는 아내가 좋아하던 <CSI: 라스베이거스>의 그리섬 반장이 활약하는 곳이고, 강의 시간에 자주 활용하는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Leaving Las Vegas, 1995)의 배경이 되는 지독한 욕망의 도시가 아니던가? 다만 걱정스러웠던 것은 아이들에게 이 메마른 도시에서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라스베이거스에는 가족 관광객들을 위한 쇼 프로그램이 아주 풍성했다. 각종 유료공연뿐만 아니라 호텔별로 프로모션을 위해 준비했다는 무료공연까지, 경비와 시간의 문제였지 콘텐츠는 풍요롭기 그지없었다.
숙소로 정한 몬테카를로 호텔은 기대만 못했다. 연휴 기간이어서 평소보다 비싼 가격도 가격이었지만, 무엇보다 <오션스 일레븐>(Ocean's Eleven, 2001)과 같은 할리우드 영화들이 보여주었던 화려한 이미지의 숙소가 아니었다. 3 물론 같은 이치로 우리 가족 역시 그러한 영화에 등장하는 백만장자는 아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다행스러운 것은 다른 호텔에 비해서는 조용하고 카지노도 번잡스럽지 않았다. 저녁을 먹기 위해 내려간 뷔페는 소박했다. 여행안내 책자에 가볼만한 곳으로 소개된 뷔페였는데 음식 종류나 수준은 실망스럽기만 했다. 가족들 모두 라스베이거스 뷔페에 앉아서 분당집 주변의 뷔페를 그리워하고 있었으니 웃지 못 할 풍경이었다.
라스베이거스의 유명한 3대 쇼 4 중에서 비교적 저렴한 <KA> 공연을 예약하고, 라스베이거스 스트립(Strip)을 중심으로 늘어선 호텔들을 구경하며 볼만한 무료공연의 스케줄을 확인해서 동선을 짜서 돌았다. 호텔과 뷔페는 기대만 못했지만, 호텔 어느 곳을 가든 카지노를 거쳐야 하는 동선 통제와 자연스럽게 도박을 권하는 다양한 전략은 눈여겨 볼만했다. 미성년자는 카지노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그곳을 거치지 않고는 뷔페를 갈 수도 없었고, 쇼를 보러 갈 수도 없었다. 그러니 아이들이 지나다녀도 별다른 제지는 없었지만, 도박을 하는 테이블 가까이 가면 직원들이 나이를 물으며 제지했다. 하지만 슬롯머신이나 도박 테이블 사이로 이동해야지만 식사나 쇼 관람을 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제지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드러내고 감추고, 허용하면서 금지하는 이중적인 성격의 공간이었다.
<KA>쇼는 무대 장치쇼에 가까웠다. 태양의 서커스단이 보여주는 아크로바틱한 연기도 연기였지만 무대가 수직으로 서면서 엄청난 양의 모래가 바닥으로 떨어지거나, 이층으로 분리되거나, 앞뒤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무대장치의 효과적인 활용은 압도적이었다. 5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관객으로 찾아오니 대사가 중심이 되거나 심도 있는 갈등의 전개는 어려웠을 것이고, 결국 기예와 무대장치의 스펙터클이 중심이 되는 넌버벌(nonverbal) 공연으로 갈 수밖에 없었으리라. <KA> 공연 내내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은 좋은 콘텐츠의 개발과 그것의 장기 공연을 위한 전용관의 문제, 더불어 지속적으로 관객을 소구할 수 있는 장소성 개발 등의 문제였다. 공연이 끝나고 나오면서 직원에게 객석의 규모를 물었더니 2,000석이 넘는단다. 하루 2회 공연에 우리가 구입했던 입장권이 제일 저렴한 것이었는데 77달러였고, 제일 좋은 좌석은 우리 것의 2배 가까운 금액이었으니 얼추 하루 수익을 계산할 수 있었다. 상설 공연으로 무대장치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가능할 것이고, 공연 연습 과정에서 배우들에게 투입되는 고정비용을 줄일 수 있고, 가족단위 카지노 방문객들에게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다는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있었다.
라스베이거스의 야경과 벨라지오 호텔의 분수쇼. 벨라지오 호텔의 분수쇼는 디즈니랜드의 <World of Color>에 비하면 소박했지만 수준과 규모가 결코 만만한 쇼는 아니었다.
라스베이거스는 도박을 중심으로 한 도시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을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하여 각종 엔터테인먼트를 유치하고 개발함으로써 매혹적인 도시를 만들었다. 사실 미국 전역에 카지노 없는 곳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황량한 사막까지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유는 도박만큼이나 압도적인 다양한 즐길 거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도박, 공연, 컨벤션, 쇼핑, 휴식, 놀이 등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도록 구성해놓은 도시 전체가 폐장하지 않는 테마파크였다.
라스베이거스 스트립을 중심으로 차별화된 테마로 꾸며 놓은 호텔들만 돌아보아도 하루가 모자랐다. 더구나 호텔별로 자신들의 테마에 맞는 무료쇼를 시간별로 보여주고 있어서 도시 전체가 유기적으로 구성된 하나의 콘텐츠였다. 아내가 시간대별로 무료쇼의 스케줄을 메모해둔 덕분에 그것에 맞추어 호텔들을 둘러보고, 대표적인 쇼들을 가급적 많이 보려고 부지런히 다녔다. 물론 무료쇼가 세계적인 수준의 유료쇼를 압도할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길을 가다가 잠시 발길을 멈추고 둘러볼만한 수준은 이미 넘어 선 것들이었다.
라스베이거스를 스트립을 중심으로 둘러보면서 우리는 다소 아쉬워하고 있었다. 테마별로 차별화하기 위해 꾸며 놓은 호텔 외관이나 소품들이 다소 경박하고 저렴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외관만 놓고 평한다면, 조악하게 흉내내놓은 질 낮은 테마파크를 보는 느낌이었다. 더구나 화려한 네온사인과 소란스러운 음악과 낯 뜨거운 호객 그리고 미국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취객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리의 혼잡과 광란도 긍정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스트립의 호텔들을 둘러보다가 ‘프리몬트 스트리트 익스피어리언스’(Fremont Street Experience)를 보기위해서 다운타운으로 갔다. ‘프리몬트 스트리트 익스피어리언스’는 460m 길이의 아케이드 천장에 1,600만개의 LED와 55만 와트의 음향기기가 어우러지는 쇼인데 라스베이거스에 가면 꼭 보아야할 쇼이다. 우리는 다른 곳을 둘러보다 마지막 공연을 보러갔는데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서 헤매다가 결국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아쉬웠지만 다음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지나치게 욕심을 내서 조금 더 많이 보려다가 정작 꼭 봐야할 것을 놓친 경우였다.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보느냐가 아니라 꼭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싶은 만큼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항상 과욕이 문제다.
라스베이거스의 호텔 숙박료는 시설 대비 매우 저렴한 편이다. 평일에 방문하면 일반적인 인(Inn)보다도 싼 경우를 흔하게 만날 수 있다. 저렴한 숙소를 제공하고 세계적인 공연을 유치하여 사람들을 불러 모은 후에는 카지노로 수익을 내는 전략이다. 그런 이유로 카지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모든 것이 카지노를 중심으로 짜여 있다. 도시 전체에서 놀라운 동선 통제와 시간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단 카지노에 들어서면 의지가 아주 굳은 사람이 아니라면 나갈 때에는 지갑을 비워주고 나가야만 하는 구조였다. 그래서인지 아침을 먹으러 가다보면 밤샘을 한 얼굴로 마지막 남은 얼마 안 되는 돈을 슬롯머신에 밀어 넣고 신경질적으로 버튼을 눌러대는 사람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 옆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똑같은 표정으로 돌아다니며 주류와 음료수를 가져다주는 아가씨의 표정은 야속하리만치 평온했다.
라스베이거스 주변에 위치한 명품 아울렛 역시 이 도시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매혹적인 브랜드의 공습이라는 표현 외에는 딱히 다르게 표현할 수 없는 공간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고, 들어서는 곳마다 세일에 세일을 더해주고 있었다. 필요해서가 아니라 사지 않고서는 견디기 어려운 욕망이 차고 흘러 넘쳤다. 욕망하는 모든 것들의 끝을 보려는 듯 매혹은 광란이 되고, 광란은 다시 매혹이 되어 무엇을 즐기고 있는지조차 잊게 되는 도시였다.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에서 알코올중독자인 벤이 왜 이곳에서 죽으려했는지, 거리의 여자인 세라가 왜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상처 있는 남자들의 위안이 되려하는지…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 도시는 콘텐츠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둘러보아야할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매혹의 요소나 몰입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통제를 통해 자연스럽게 즐기게 만드는 스토리텔링 전략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광란의 매혹과 매혹의 광란을 이토록 집약적으로 동시에 체험할 공간은 라스베이거스밖에는 없는 까닭이다. 우리 과 학생들이 자꾸 생각나는 이유였다.
- 솔이네는 내 연구년보다 UCLA방문학자로 6개월 먼저 얼바인에 와 있다가 먼저 귀국한 박사과정 제자 가족을 말한다. 솔이네는 우리가 미국에 안착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집을 구하는 일에서부터 은행계좌를 만들고 운전면허를 따는 일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솔이 아빠는 이미 스케줄을 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지 선정에서부터 좀 더 저렴한 숙소 예약 방법 등을 소상히 알려주고, 자신이 다녀온 곳들은 자신이 짜놓았던 여행 스케줄을 미리 제공해주어, 우리 여행이 실수 없이 효과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안내해 주었다. 제자인 솔이 아빠뿐만 아니라 솔이 엄마 역시 늘 넘치는 사랑과 정으로 우리를 위로해주고 도와주었다. 외로울라치면 자신의 집으로 초대를 하거나 우리 집으로 달려오던 솔이네가 있어서 낯선 곳에서의 시간을 외롭지 않고 따듯하게 보낼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본문으로]
- Presidents Day(Presidents' Day로도 표기함)는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과 16대 대통령인 아브라함 링컨을 기리기 위해 1980년대 중반에 제정한 날이다. Presidents Day는 2월 셋째 주 월요일로 원래는 조지 워싱턴의 생일(2월 22일)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는데, 머리 좋은 미국사람들 셋째 주 월요일로 정하여 자연스럽게 연휴를 만들어버렸다. 연휴만 만든 것이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 대규모 세일이 이루어지는 쇼핑의 광풍이 부는 시기기도 하다. [본문으로]
- 이후에도 라스베이거스에 몇 차례 더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뉴욕뉴욕, 엑스칼리버, 베네치아 등에서 숙박을 했었는데, 베네치아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웠지만 다소 비쌌고, 뉴욕뉴욕은 모던하고 깔끔했는데 다만 카지노가 지나치게 혼잡스러웠다. 엑스칼리버는 가격이 저렴했던 만큼 최악의 호텔이었다. [본문으로]
- 일반적으로 라스베이거스 3대 쇼라고 말하는 것은 MGM그랜드 호텔의
쇼, 벨라지오 호텔의 쇼, 윈 호텔의 쇼이다. 미국에서의 쇼핑이 대부분 그렇듯, 제값을 다주고 하는 경우는 드물다. 라스베이거스 쇼 역시 미리 할수록 저렴하게 관람할 수 있다. 인터넷에 라스베이거스 쇼 티켓 관련 사이트를 찾아서 가장 저렴한 것을 택하면 된다. 가급적 미국 현지 사이트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본문으로] - 나중에 다른 기회에 벨라지오 호텔의
쇼를 보았는데 무대 장치와 연기의 유기적인 조화가 경탄스러울 정도였다. 짧은 시간 안에 물과 무대장치를 이용한 역동적인 연기는 보는 내내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쇼에 비하면 쇼는 소박한 수준이었지만, 쇼를 보기 전에 쇼를 보았기 때문에 그 놀라움은 대단한 것이었다. [본문으로]
'저니로그 > 미국횡단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Ⅰ. 길에서 길을 묻다. (0) | 2018.07.11 |
---|---|
Ⅱ. 길을 떠나려는 사람은, 마음 준비: 하고 싶은 일과 해야 만할 일 사이 (0) | 2018.07.11 |
Ⅱ. 길을 떠나려는 사람은, 두 번째 여행: 낯선 곳에서 배우는 삶의 속도 (0) | 2018.07.11 |
Ⅱ. 길을 떠나려는 사람은, 세 번째 여행: 흐르는 강물처럼, 살아서 강성한 것들 (0) | 2018.07.11 |
Ⅱ. 길을 떠나려는 사람은, 떠날 준비: 먼 길을 떠나려는 사람의 준비 (0) | 2018.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