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懷疑)가 만나는 자유 셋
박 기 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문학은 늘 위태롭다. 위기 운운하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최근 더욱 가파라지고 있다. 이 겨울, 문학을 더욱 위태롭게 하는 것은 경제한파 등의 외적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내부에 있다고 한다. 대중적인 시류에 영합하기 위해 끝없이 시도되는 일탈의 기록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선정주의의 질주는 그 끝을 우울하게 가늠하게 한다. 그래서 조건상, 황충상, 박청호의 다양한 목소리가 반가운 것이다.
1. 깊고 따뜻한 시선 --- 조건상, 《이웃사람 엄달호》
조건상의 시선은 깊고 따뜻하다. 10여년 시간의 간극을 두고 서 있는 8편의 작품 모두 사람에 대한 이해와 신뢰로 그 온기를 발한다. 아랫목 담요 속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던 한 주발의 밥처럼 그 적당한 따스함으로 읽는 이의 가슴을 넉넉히 덥히고 있다.
한 주발의 밥이 그렇듯 그의 이야기는 화려하지 않다. 그저 일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과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이다. 요즘 젊은 작가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꼼꼼한 일상의 재구(再構)와 인과성(因果性)에 대한 애착은 그의 소설문법이 전통적인 방법에 기대고 있는 탓도 있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은근한 사랑과 관심의 결과에 다름 아니다.
<떠도는 혼>과 <중공에서 온 손님>은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작품들이다. 내가 나를 비추어 볼 수 있는 공간, ‘돌아가야 할’ 당위의 공간이기는 하지만 ‘돌아갈만 하지는 못하게’ 변해버린 공간인 고향. 이처럼 작가가 고향의 공간에 집착하는 것은 그곳이 시간을 거슬러 오늘의 나를 찾을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고향을 찾는 과정을 중심으로 그리고 있지만, 작가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곳은 그 고향에 살고 있는 오늘 우리의 모습이다. 종군위안부 문제가 아직 사회적으로 공론화 되지 못한 채 대중소설의 선정적인 소재로 전락해 있던 시기에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 그리고 국교수립 이전에 이미 중국 조선족 동포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선구성(先驅性)에 주목해야만 한다. 그것은 단지 소재적인 선구성이 아니라 그들의 문제가 곧 오늘 우리의 문제라는 성찰의 선구성 때문이다. <떠도는 혼>에서는 종군위안부의 문제를 그들이 겪는 경제적․사회적 어려움이나 또는 과거의 아픈 기억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는 고향에 대한, 고향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에 주목하고 있다. 보상금이니 일왕(日王)의 사과니 하는 문제로 모든 시선이 쏠려있는 현실에서 정작 필요한 것은 ‘고향 사람들이 따뜻한 손’이라고 작가는 강변하고 있다. <중공에서 온 손님>에서는 이제는 손님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동포가 찾아간 고향, 즉 오늘 우리의 각박한 세태에 대한 성찰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그의 말은 작품이 쓰여진지 10년이 안돼서 현실로 드러나지 않았는가? 그의 혜안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신선한 예감 하나>는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는 세계에 대한 ‘소심한 나’의 힘겨운 응전이다. <인사 이동>은 우울한 대학의 풍경을 냉소적으로 그리고 있다. 체험에서 비롯되는 작가의 목소리가 작품의 구조적인 긴장을 이완시키는 아쉬움이 있다.
<민통선 하늘에 걸린 새벽달>은 ‘요령에 의하여 얻어진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에 대한 고발적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대대장의 허위 만들기는 죽은 자를 제외한 살아있는 모든 자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만 허위일 따름이다. 진실과 허위의 상투적인 갈등보다는 고발적 성격이 강한 탓도 있겠지만, 화자인 ‘나’가 좀더 치열하게 허위와 대결하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다. 허위에 대한 묵인이나 방조 역시 허위일 뿐이다. 화자의 진실에 대한 의지와 내적 갈등이 너무도 쉽게 무너짐으로써 자신과는 무관한 고발이 되어 버린다. 고발은 수정을 전제로 해야한다. 나와 무관한 고발이란 무책임한 질책일 뿐이기 때문이다.
<솔바람 소리>는 아들의 장애를 인정하지 못하는 부모가 아들의 죽음으로 비로소 장애를 받아들이고 진정한 사랑을 회복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장애아의 문제를 그리면서 장애아가 아닌 부모의 일그러진 마음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장애아를 돌보는 부모의 가파른 심리를 섬세하게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 ‘부모’인 동시에 모순된 ‘인간’일 뿐임을 이해함으로써 그 모순을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다. 즉, 모순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을 껴안음으로써 그 모순을 넘어서고자 하는 노력이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성찰의 결과이며 동시에 인간의 모순을 없애야할 것으로 몰아대는 모든 억압적 체계에 대한 비판이다.
<옥탑위의 까치집>은 평자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다. 외로운 여인의 상처를 감싸 안는 과정에서 자신의 외로움을 깨닫는 화자, 사랑은 탈색되고 관계만 남은 아내와의 관계, 새집으로 표상 되는 온전한 일상에 찾아든 까치집 같은 사랑을 통하여 작가는 가족적인 관계의 망이 아닌 존재로서의 인간을 돌아보고 있다. 부모이거나 남편이기 이전에 존재로서 느끼는 외로움에 대한 성찰과 사랑을 통해 발견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남편도 없이 십여년 동안 홀로 키워 온 딸을 외국으로 떠나 보낸 그날 밤, 묵은 인연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고 있는 여인의 삭정이처럼 바싹 마른 마음을 다치지 않으려고 나는 조심스레 몸을 놀렸고, 여인은 여인대로 떨떠름한 내 마음을 헤아리고나 있는 듯이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들의 벗어버린 알몸처럼 아무런 꾸밈새도 없이 나를 편안하게 받아줌으로써 어떤 굴레 속에 갇혀서 자꾸만 작아지려는 나에게 적당한 용기와 뻔뻔스러움을 부추겨주고 있었다.(192쪽)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중년 남녀의 사랑은 오히려 ‘자기 찾기’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언젠가는 “허전한 빈둥지만 상처처럼” 안고 있을 자신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다. 하여 화자는 오히려 자신이 상처를 다스려준 여인이 자기에게 아늑한 숲이며 외로움을 씻어주는 강물임을 깨닫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의 인간에 대한 따뜻한 이해를 엿볼 수 있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은 따뜻하기에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상처 감싸기의 연장선상에 <이웃사람 엄달호>가 놓인다. 벼락 상승한 P동의 오늘에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는 원주민 엄달호 일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월남전에서 미군들을 구하려다가 성불구가 된 엄달호나 성추행을 당해 다른 이의 아이를 갖게된 부인이 가해자일 뿐인 냉혹한 현실을 건널 수 있는 것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추행을 당해서 갖게된 아이에게서 희망을 발견하려는 그들의 노력은 감동적이다. 어긋난 인연에 대한 희망은 또다른 사랑 만들기이며 아울러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의 결과이다.
모순된 존재로서 인간을 인정하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려는 노력이 조건상의 시선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화려하진 않지만 따뜻하다. 모질게 추운 것이 날씨 탓만이 아닌 이번 겨울, 조건상의 《이웃사람 엄달호》와 함께 건너는 것도 이 겨울을 따뜻하게 나는 방법이 될 것이다.
2. 없음으로 깨닫는 있음 --- 황충상, 《나는 없다》
향을 태운다. 꼿꼿한 자세로 시선을 붙잡고 있지만 아직 아무 것도 아니다. 불을 붙이고 그것이 텅빈 공간으로 사라질 때 비로소 향이 되는 것이다. 없음으로 깨닫는 있음의 세계. 그래서 황충상의 소설에서는 향이 난다. 작품에서 유난히 “없다는 것의 영원한 아름다움”이 강조되는 것도 그러한 깨달음이 데려다놓은 곳에서 ‘사물의 배후에 있는 아픔’을 감싸 안으려는 그의 구도적(求道的)인 글쓰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가 얼마나 ‘없음’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이번 작품집의 제목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없다>, <殺作家>, <아버지는 없다>, <아버지의 사리> 등이 그것이다. ‘없다’, ‘殺’ 등의 없음의 직접적인 진술에서부터 ‘사리’라는 없음의 증명에 이르기까지 그는 집요하게 천착한다. 게다가 <악어춤>까지도 그것이 죽음의 순간을 묘사한 표현이고 보면 ‘없다는 것’의 의미는 그에게 남다른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그의 ‘없음’을 만나보자.
<나는 없다>는 중년 작가의 자기 찾기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동안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것을 모두 떨치고 앞으로 남은 시간과 정직하게 대결하기 위해 그는 집을 떠나 자신만의 방으로 들어온 것이다. 상희와의 대화를 통해 세 개의 삽화가 등장한다. 첫째 삽화는 천상의 영감을 주기 위해 그를 찾아온 베로니카를 통해 베로니카의 보살행을 깨닫는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薩 下化衆生)의 정신으로 “육신은 껍데기이며 진정한 내가 아니라는 것”을 베로니카는 깨우쳐준 것이다. 둘째 삽화는 믿음을 잃고 헤어진 상희부부의 이야기이다.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떠도는 남편과 그를 감싸주지 못하는 상희, 모든 것의 배후는 슬픔이기에 서로의 상처를 감싸지 못하는 아픔이다. 그리고 집을 나온 5년간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천녀와의 문답으로 답하며 “눈멀고 귀 멀고 마음으로만 가는 길”을 통해 구도적인 글쓰기에 이를 것임을 암시한다. 셋째 삽화는 정오가 남기고 간 ‘나는 없다’라는 화두이다. 그 화두를 통해 ‘껍데기 속의 나’를 깨닫는다. 그 빈곳을 통해 “없다는 것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다.
비로소 나는 내 지도를 찢어버려야 하리. 욕심부리고, 성내고, 어리석음으로만 찾았던 길, 믿음․소망․사랑으로만 찾아내려던 길, 철학․종교․도덕의 길이 어떻고 저떻고, 이제 그것들 그 길에 다 두고, 홀로 간다는 마음도 벗어두고, 나는 가리. 그러면 자연의 마음에 가 닿으리. 사슴이 하늘을 달리고, 꿩이 땅속을 날고, 북한산이 파도소리를 낸다. 이 장엄한 소식 전하기 위해 내 마음속에서 무어라 이름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뛰쳐나간다.(78쪽)
그곳에서 차이와 분별이 없는 자유를 만나는 것이다. 모든 분별을 놓아야하는 마음자리에 현실의 고통을 건너는 <殺作家>가 있다. 빵을 해결하기 위해 헤매는 자신을 죽이고 온전한 작가가 되리라는 것이다. <殺作家>가 깨달음으로 끝났다면 <아버지는 없다>에서는 그 실천행이 드러난다. 생활을 위한 빵이 빵을 위한 생활로 전도된 상황에서 문득 돌아본 자신의 모습, 그곳에 아버지는 없다. 이 부정의 상황에서 평상심을 회복하고 적멸(寂滅)의 체험을 통해 긍정의 세계를 만난다. 모든 아버지를 부정함으로써 부활하는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다. 부정을 긍정으로 전화시키는 방법으로 그는 참선수행을 들었지만, 그것은 세계의 아픔을 나누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아픔을 나눈다는 것은 하나가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괜찮다, 지금 너는 아비의 아픔을 쪼아내고 있어. 조만간 아픔 없는 아비의 상을 완성시키겠지. 그걸 보고 싶다. 그 기대에 잠겨 있으면 배길만해. 어서 네 일이나 하렴.“(146쪽)
실체의 아버지를 쪼아 부재의 아버지를 완성하는 <아버지의 사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공유하는 아픔에 주목해야 한다. 앞의 작품들에서 다소 관념적이고 공소하게 들렸을지도 모를 ‘없음’의 지혜를 구체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예술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던 앞의 주인공들의 다짐이 이 작품을 통해 완성되고 있다. 현실의 아픔인 아버지의 병마를 쪼아내는 아들의 예술 세계가 분별이 사라지고 하나가 됨으로써 온전한 예술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한다.
“없다는 것의 영원한 아름다움”. 이제 이 작품집의 화두를 풀어야한다. 삶과 예술, 있음과 없음, 육체와 정신, 성(聖)과 속(俗) 등의 분별이 사라짐으로써 떠오르는 세계의 아름다움. 그곳에 이 작품집의 근력(根力)이 있다. 다만 임영봉의 지적처럼, 그의 글쓰기가 탈속의 경지로 나아가면서 ‘현실’이 지워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남는다. ‘세속’으로만 존재하는 ‘현실’은 뛰어 넘어야할 것이지 살아내야 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처럼 경박함과 극단적인 일탈을 그리는 것이 소설인 것처럼 대접받는 시기에 황충상의 ‘없음의 미학’은 분명 소중한 것이다. 더구나 그의 불교로의 몰두는 우리 소설계에선 매우 이채로우며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집요한 작가를 만날 때 우리의 일상은 그 속내를 풀어놓을 수밖에 없다.
3. 회의(懷疑)가 만나는 자유 --- 박청호, 《소년 소녀를 만나다》
‘만나다’라는 말에는 미래의 의미가 없다. ‘만났다’나 ‘만났었다’는 무난히 수용하면서 유독 ‘만날 것이다’라는 말만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또 ‘만나다’라는 말에는 소통 혹은 이해의 의미가 있다. 만날 것이다, 만나서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개선 가능성이 제거된 말, 만나다. 박청호의 소설집 《소년 소녀를 만나다》는 그래서 우울한 빛이다. 하지만 그 우울의 밑그림은 소통을 희망하는 몸짓, 그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미래다. 이 글이 《이매진》에 발표된 1997년 12월도 훨씬 지나서. 내가 라푼젤을 만난 것은 바로 거기서였다.(12쪽)
이처럼 <라푼젤의 두 번째 물고기>에서는 서사가 완성된 후에 사건을 발생시킴으로써 현실의 시간과 질서를 교란하고 있다. 또한 소설 속의 주인공을 소설 밖으로 걸어 나오게 함으로써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파괴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운명과 숱한 이야기들과 그 사람들과 그 이야기를 잇는 구조”가 세상이고 리바이던이며, 세상은 자기 자신을 집어삼키고 있다는 인식. 그래서 “더이상 아무런 이야기도 만들지 않고 살아야”한다는 인식의 결과물이 이 작품 자체가 되고 있다. 하여 서사의 인과적 고리나 현실과 소설의 경계 따위는 철저히 파괴한다. 이 낯선 세계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나와 라푼젤의 24시간의 동화 같은 사랑 때문이다. 그들의 행동은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상상에 대한 믿음으로 가능하다. 현실에서 이륙한 그들의 행동은 자유롭고 아름답다. ‘이륙하고 싶은 현실’을 괄호 치고 ‘이륙한 현실’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륙하고 싶어하는 현실은 어떤 모습인가? <죽은 시인의 사회>와 <빚을 갚기 위하여>에서 구체화된다. 시인의 삶이 아닌 죽음에 관심 있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않는 한 모든 것이 진실이고 모든 것이 가짜가 될 수도 있는 현실이 그것이다. 카메라를 통해 눈앞에 보여줌으로써 가장 확실한 듯 보이지만 카메라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기록하고 편집하는 자들의 정치성에 따라 달라지는 현실. 더욱 섬찍한 것은 필요에 의해 언제든지 나의 삶이 관찰되고, 그 진실이 편집․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빚을 갚기 위하여>는 ‘사랑이름으로 자행되는 무자비한 폭력’에 대한 고찰이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이나 어머니의 집요한 비난은 모두 자신들의 질서로 타인의 삶을 재편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가족들이 서로의 허물을 감싸주기보다는 오히려 서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뿐이다.
80년대 식으로 말하자면 사회 안정을 위해 싹쓸이도 가능하다는 식의 전도된 가치관으로서 가족 구성원들의 통일된 평안을 위해 개인적인 사생활은 완전히 무시되는 게 우리의 가족이다. 그런 탓에 그 어느 구성원들도 가족 앞에서 정직하거나 진실 되지는 않았다. 거기서는 다른 가족 구성원에 대한 배려나 관심이 전혀 없었다.(206쪽)
이러한 싹쓸이식 논리가 사회에도 확대 적용된 것이 한스의 이야기이다. 가족과 다른 것은 ‘사랑’대신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자행된다는 점뿐이다. 하여 현실은 “갑자기‘라는 의외성과 돌발성으로 다가오며, 그전까지 지루하게 반복․관리될 뿐이다. 사랑과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섬 -- 어린 시절: 여자이야기>는 이런 소통 불가능한 세계의 상처를 그렸다.
어쩌면 나는 아버지와 남동생으로부터 한 발짝 비켜나 진짜 혼자가 되기 위하여 어머니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72쪽)
어머니가 섬에 다니러 왔다가 돌아갈 때의 느낌도 그랬다. 내가 섬에 있다는 사실이 못 견딜 것처럼 싫었지만 방문객인 어머니가 떠날 때면 나는 평온해지기까지 했다. 또 어머니를 기다리리라. 그리고 여기서 계속 혼자 살게 되겠지. 이런 이중적인 감정이 어린 시절의 나를 지배했었다.(78쪽)
‘기다림’과 ‘혼자’라는 의식의 이율배반성이라는 유년의 상처는 현재까지 계속된다. 사랑이라기엔 아픔과 그리움 그리고 익숙해진 불행으로 반복되며, 그녀 자신도 타인이 들어와 쉴 수 있는 그늘을 마련하지 못한다. 특히 그녀의 연인들이 그저 ‘남자’로 묶일 뿐 개별적인 연인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녀의 사랑이 아직도 ‘기다림’과 ‘혼자되고 싶다는 의식’ 사이에서 진동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사랑하는, 나의 사랑에서 비롯되는 존재로서의 연인이기에 그저 남자라는 그 이상일 수 없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섬’이라는 의식의 공간을 통해 ‘과거로 가득찬 미래’가 반복되고, 그녀는 어머니의 삶을 되풀이한다. 치료로써의 연애는 그녀를 점점 더 병들게 하고 타인과의 소통 불가능만 확인할 뿐이다. 섬은 그러한 상태로 찾아드는 퇴행의 공간이다.
<한 착한 남자의 불행>은 가족성원들 모두 서로에게서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사랑하는데도 서로가 서로에게 철저하게 외로운. 이 같은 소통 불가능한 관계는 그가 병든 어머니에게 독백처럼 쏟아내는 말들과 전화 자동응답기 그리고 경아의 독백이 그것이다. 마치 희곡을 연상시키듯 어머니에 대한 독백이 중심을 이루는 점도 소통 불가능한 상황을 가장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어머니 시신 앞에서의 정사는 다소 위악적인 제스처로 이해될 수 있는 어머니 넘어서기의 한 형태이다. 그가 돌아온 이유는 어머니의 밥을 먹고 곁에 눕고 싶어서인 동시에 어머니 아닌 다른 여자를 찾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외적인 소통 가능성이 폭력적인 현실 앞에서 좌절되었을 때, 그가 찾을 수 있는 것은 모태 회귀거나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있는 또다른 자궁을 꿈꾸는 것이다. 그곳에 마지막 정사가 위치한다.
<펄프 픽션>을 연상시키는 구조의 <담뱃가게 이야기>는 각각의 인물을 일정한 거리에서 훑고 지나간 뒤, 그것을 마지막으로 종합하기 전까지 독자들의 자의적인 종합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의 경우 장순호와 장미래의 사랑이 ‘죽음을 통한 부재 증명으로써 불멸하려’는 시도였다면 그것이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졌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소통이 불가능한 시대에 사랑을 통해 그것을 건너려는 작가의 시도는 그것이 비록 죽음의 형태로밖에 나타나지 못할지라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소통의 가장 기본적이면서 가장 최종적인 형태가 사랑이기 때문이다.
일상과 환각이 교직 되는 탓에 전통적인 독법에 익숙한 독자들은 이 소설집이 낯설 것이다. 낯선 만큼 그것이 흔들고 가는 정서적 파장 역시 만만치 않을 것이다. 늘 아무일 없이 평화롭게 반복되는 일상의 배후에 전혀 소통되지 못하고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폭력과 단절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작품이 신세대 소설가들의 일반적 폐단으로부터 그렇게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현실이 휘발된 세계의 공소함이라든가, 인과성이나 재현성을 포기하고 헤매는 모험의 유효성 여부라든가, 곳곳에서 드러나는 환상적인 요소들이 과연 현실을 충실히 견제하고 있는가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청호의 작업은 소중하다. 끊임없이 시도되는 그의 소설적인 실험은 분명 서사의 영역을 확대시키는 귀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계속 회의한다. 이것은 자신이 보고 말하는 것의 확실성을 지속적으로 회의함으로써 자신의 그것이 또다른 견고한 폭력이 되지 않도록 견제하고 기장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그가 열어 가는 극적 서사의 도입이나 시간의 해체 그리고 소설과 현실의 경계 허물기 등도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기 때문이다.(1999)
1999년은 등단하고 난 다음 해다. 맹목적인 의욕에 넘쳐 마구 읽고 거칩없이 지르던 시기다. 3권의 신작 소설의 서평을 외뢰받아 쓴 것인데, 지금보니 무모한 의욕만 달리고 있다.
'북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인회> 그 정체와 지속 (0) | 2018.07.14 |
---|---|
살아있는 연대를 건너려는 당찬 시도-《1970년대 문학연구》 (0) | 2018.07.14 |
달력과 만난 세계사의 즐거움 (0) | 2018.07.14 |
고단한, 외로운, 그리고 적요한 신열-한강 (0) | 2018.07.13 |
근대적 주체로부터 벗어나기-《차이와 타자》 (0) | 2018.07.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