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등급제와 블랑카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얼마 전 고교 등급제에 관한 시사프로그램을 보다가 아내와 다툴 뻔했습니다. 아내의 주장은 현실적인 실력차이를 인정해야 하고, 그것이 비록 부모의 경제력에 기반 한 것이라고 해도, 투자한 만큼 얻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고교등급제가 자유경쟁의 원리라고 하는데, 자신의 실력이 아니라 선배들의 소위 일류대학 진학률로 평가되는 것이 어떻게 자유경쟁이냐고 저는 되물었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경제력에 의해 거주지가 결정되는 현실에서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서 이미 상급학교 선택의 폭이 결정된다면, 부모의 계급이 자식에게까지 대물림되는 고착된 계급사회로 가자는 것이냐고 말하려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아내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문득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아홉 살 첫째와 다섯 살 둘째가 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첫째는 공부 욕심이 있어서, 영어, 피아노, 수학, 미술, 작문 등 모든 것을 공부하고 싶어 합니다. 둘째도 제 언니를 보아서인지 자기도 영어 공부하겠다고 우겨서 영어와 한글을 배우고 있습니다. 배우고 싶다고 모두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는 이것도 저것도 하고 싶다고 하는데 제 수입으로는 한계가 있고, 그래서 월말이 되면 아내는 늘 고민에 빠집니다. 어떤 것을 끊어야 하나, 이 과목은 어디가 잘 가르치나 등등 아내의 가계부에는 아이들의 사교육이 늘 격렬한 논쟁과 갈등입니다. 뭐 그런 것으로 고민하느냐, 그냥 놀게 해라, 혼자서 잘하지 않느냐고 제가 이야기라도 꺼낼라치면 아내는 제가 세상 물정 모른다고 아예 말문을 닫습니다. 늘 부족한 수입으로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아이가 원하는 공부를 어떻게 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는 아내에게, 고교등급제는 아쉬움과 자부심 사이에 있습니다.
블랑카가 파키스탄 외국인 노동자라는 사실을 안 것은 오늘 아침 신문 기사를 읽고 나서입니다. 기사에 의하면, 고용주가 파키스탄 노동자에 대한 편견을 가질 수 있다는 이유로 파키스탄 대사관에서 <폭소클럽>의 블랑카 코너의 폐지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외국인 노동자 입장에서 바라본 한국 사회의 치부를 블랑카는 서툴고 어눌하지만 날카롭게 지적하던 코너가 파키스탄 노동자들의 국내 취업을 막고 있다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보여준 것입니다. 저는 이 코너를 보면서 최근 우리 코미디가 개인기의 무의미한 반복이나 텅 빈 언어유희로 일관하고 있는데, 이 코너는 “사장님 나빠요!”를 외치며 우리에게 아픈 성찰을 요구하는 비수를 날리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평가도 매우 자기중심적인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희화화되고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우린데, 이 땅의 소수자이며 약자인 파키스탄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것에 대한 피해를 오롯이 받고 있었다는 엄혹한 현실의 폭력 앞에 다시 한 번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자식을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시키겠다는 부모나, 좀 더 많은 학생들을 좋은 학교에 진학시키려는 고등학교나, 좀 더 실력 있는 학생을 뽑으려는 대학의 모습이 뭐 그리 잘못된 것이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기 위해서는 평가가 ‘학생들의 실력’에 따른 것이어야 하며, 평가방법도 좀 더 ‘다양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선배나 부모에 의해 이미 결정된 것이 아닌 자신의 실력에 따른 평가, 계량화하기 위한 필기시험을 넘어서는 다양한 질적 성취에 대한 평가가 선행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쟁에서 이긴 자나 진 자 모두가 결과에 납득할 수 있는 체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의미에서 교육은 현재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투자입니다. 현실 변화의 가능성을 교육이 담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다른 형태의 신분제일 뿐입니다. 또한 경쟁이 기회의 평등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은폐된 그러나 치명적인 폭력에 다름 아닙니다. 이러한 현실이라면 우리는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한 자”라는 <황산벌>의 논리, 즉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취에 가치를 부여하는 결과중심적인 사회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우울한 전망에 이르게 됩니다.
저는 분명하게 주장합니다. 고교 등급제에 반대합니다. 그것 말고도 이미 불평등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며, 교육만이 유일한 탈출구라는 우리네 꿈을 누구도 뺏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또 주장합니다. 블랑카 코너를 폐지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블랑카를 위시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되먹지 못한 우월감에 빠져있는, 노동자를 도구로만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의 우리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아내는 두 아이를 식탁으로 불러 모을 것입니다. 아이 둘은 제 키에 맞지 앉는 식탁 의자에 하나씩 앉아서 어미가 가르쳐주는 공부를 할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공부는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이지만, 아내에게 공부는 변화 가능성이며 꿈이기 때문입니다. 주방 형광등과 식탁의 백열등을 모두 켜고 아내와 아이들은 또 그렇게 식탁에서 꿈을 꿀 것입니다. 아직까지 아니 영원히 우리의 꿈은 무죄여야 합니다.
2004년 《오픈아이》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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