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눈동자를 그리는 이유
박기수(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축제는 잔치가 아닙니다. 축제는 잔치와 달라서 주인과 손님의 구분이 없고, 배우와 관객의 가름이 없이 함께 어우러져 노는 것입니다. 귀신의 한을 풀게 해주고 지켜보던 사람들과 음식과 술을 나누던 난장(亂場)이 우리 축제의 원형이 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입니다. 하여 축제의 성공 여부는 다양한 양질의 프로그램만큼이나 참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사람이 없는 축제, 사람이 있어도 구경만 하는 축제는 축제가 아니라 주인들만의 잔치일 뿐입니다.
최근 김기덕 감독이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일은 즐겁고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허리우드적인 어법이나 유럽영화의 문법을 거부하고 강렬한 자신만의 미장센을 구축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쁘고, 오만한 그들만의 축제에서 그들과 다른 모습으로 중앙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운 일이지요. 여기에 정규교육은 중학교 중퇴,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하지 않았음, 5억 원 내외(빈집은 12억 원)의 저예산으로 8년 동안 11편의 영화제작, 유럽에서 가장 환영받는 한국 감독 등의 이야기가 덧붙여지면 김기덕의 신화는 한층 더 견고해질 뿐입니다.
하지만 그가 감독상을 수상했던 베를린과 베니스의 영화제는 우리에게 온전한 축제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연이은 그의 수상에도 불구하고, 김기덕의 그것은 밖으로부터의 호응이며 평가이기 때문입니다. 안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밖에서도 그렇다면 가장 좋은 일이겠지만, 우리의 경우는 대부분 그렇지 못합니다. 안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밖에서는 그저 그렇더라는 평가는 문화적 차이 운운하며 쉽게 인정합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에도 그렇게 의연하게 반응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것에는 무엇보다 우리 자신의 읽기와 평가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참여해서 즐기지 못하면서 축제의 일원이 될 수는 없는 일이지요. 때문에 김기덕의 영광은 즐겁고 자랑스럽지만 우울한 단절입니다.
김기덕의 단절은 제도권 언론과의 불화도 한 몫을 했고, 그의 강렬한 영상과 문제의식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무엇보다 관객의 읽으려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작품을 찾아서 평가해주는 것이 고마운 일만이 아닌 것은 우리 가족 식탁을 보며 옆집 아저씨가 이것이 맛있으니 먹어보라고 권하는 것이 고마운 일이 아닌 것과 같은 까닭입니다. 영국이나 호주 등에서 활성화 되었다는 미디어 읽기(literacy)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소박한 의미에서 주체적인 읽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작품과 대화하고, 그 대화를 바탕으로 작품의 의미와 문제를 고민하는 일련의 창조적인 행위 말입니다.
제대로 읽으려는 의지와 노력이 부재하고, 독법을 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이 어디 김기덕의 영화뿐이겠습니까? 최근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수많은 논란들을 우리는 얼마나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일까요? 더구나 가장 신뢰할만한 정보제공자인 언론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지금 이곳에서, 우리에게 과연 우리의 세계를 읽으려는 의지와 노력이 있기나 한 것인지 우울하게 되묻고 싶습니다. 이 지독한 우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정확한 정보를 얻으려는 노력, 얻은 정보를 비판적인 자세로 정치하게 읽어내려는 노력,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시각으로 판단하고 세계와 소통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김기덕 감독이 수상식에서 보여주었다던 퍼포먼스를 생각합니다. 그가 보여준 손바닥의 눈동자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빈집>을 본 사람은 알 것이라고 했지만, 불행히도 저와 여러분은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으니 근거 없는 유추에 기댈 수밖에요. 아니 우리가 새롭게 의미를 부여해보면 어떨까요? 관객 모두가 스스로의 눈으로 읽어주길 바라는 메시지였다고, 특히 그의 말을 가장 잘 알아들을 우리에게 간절하게 하고 싶은 말로서 말입니다.
저는 삶이 축제가 되길 희망합니다. 저는 앞에서 축제는 구분 없이 함께 어우러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서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야 한다면 사는 일에서 너와 나의 경계는 무의미합니다. 그 경계를 넘어서는 일은 다소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보다 온전한 자신의 눈을 갖는 것입니다. 김기덕이 손바닥에 그려서라도 소통하고 싶어 했던 그 온전히 자신을 세울 수 있는 눈 말입니다.
2004년 《오픈아이》 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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